진정성의 힘

LA FORZA DELL’AUTENTICITÀ1)

-문화와 신앙에 대한 성찰-

에우제니오 리바스Eugenio Rivas, S.J.
*이태리어 원문: https://www.laciviltacattolica.it/articolo/la-forza-dellautenticita/
*영어 원문:https://www.laciviltacattolica.com/the-strength-of-being-authentic-reflections-on-culture-and-faith/

  현대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2)는 오늘날 문화적 실재에 대한 최고의 서술은 진정성authenticity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참된 “진정성의 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에게 이 용어는 인격적인 자아실현의 추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진실로 느끼는 것에 충실하려는 주관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추구의 너머에는 “자기 자신에 진실함”이라는 윤리적 이상이 있다. 테일러의 주장에 따르면, 이 이상은 우리의 갈망이나 필요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갈망해야 할지 그 윤곽을 제공한다고 한다.3)

  이 주장에 따르면, 어떤 문화에 내재된 개인의 추구가 상대주의나 개인주의, 자아도취나 자기 인용 등의 영향을 받아 손상되고 위장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은 어떤 윤리적 힘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윤리적 힘은 품위가 없거나 무비판적인 방어 논리나 교묘하게 균형 잡힌 타협을 추구하는 논지들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들과 같지 않다. 이러한 진정성과 일탈의 파노라마에 직면하여 테일러는 복구 프로젝트를 제안하는데, 이로써 진정성이 기대고 있는 윤리적 이상이 실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진정성이 요구를 촉진하거나 반대로 역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진정성의 문화가 신앙생활에 침투하였다. 신앙생활은 문화에 대해 면역이 되거나 격리된 것이 아니다. 이는 신앙생활이 사회적 헌신이 아니라, 타락하거나 사회를 외면할 수도 있다, 즉 해방의 누룩이 되도록 불림 받은 역사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실제 삶과 실행으로서의 신앙이 사회적 및 정치적인 중요성은 물론이고 그 효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 변화를 위한 투신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조명하는 소명을 수행하면서 역사가 진정한 “신학의 자리”가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인간인 자신의 운명과 역사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구현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점차 변화를 일으킨다.”4)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헌신은 인간의 생명과 품위가 보호받고 품위 있는 삶의 보장으로서 법이 요청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함께 하고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다.5)

  역사에 헌신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 말씀을 신앙의 빛으로 읽은 결과이다. 그 신앙의 빛은 과거를 드러내고 현재를 설명해주는 가르침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6)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향한 것이라면, 우리가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사회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필시 뭔가 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모상”인 인간을 축소하거나 훼손하는 어떤 형태의 종속성에 대해서 해방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이는 현실을 변화시키라는 말씀이며, 죽음을 생명으로, 기아를 풍요로, 질병을 건강으로, 전쟁을 평화로, 감옥을 자유로, 어둠을 빛으로, 의심을 신앙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이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것으로 여겨지는 아름다운 기도문에 표현된 체험으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고자 하는 것의 도구가 되도록 청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뜻한 바를 이루지 않고는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 (이사 55,10-11 참조) 실제적인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이것으로 양육된다. 신앙이 스며들게 하고 세상의 인간화를 위한 온갖 형태의 투쟁에 나서라는 역사적인 도전을 받아들일 때 싹이 돋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 참여야말로 ‘진정성의 문화’가 승부를 걸어야 하는 곳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테일러의 성찰을 신학을 위한 도발로 여기며 환영한다. 여기서 “도발”이란 표현은 자극이나 도움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신앙을 그 맥락과 함께 생각하고, 신앙을 자라게 하고 신앙으로 양육되는 신학적 성찰의 기초 위에서 신앙의 도전들을 규명하고, 따라갈 여정을 적시하는 기회라는 의미로 썼다. 우리의 질문은, 진정성의 신앙 체험에서 출발하여,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의 요청들을 활용하여 실천적인 삶의 쇄신을 돕는 풍성한 신학적 성찰로 이끄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테일러와 함께 ‘진정성’의 근거와 동기가 윤리적 이상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앙의 실천적 요구를 회복하고 신앙을 어떤 심령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진정성의 신앙”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시급하다. 심령주의는 저변에 그리고 외형상의 정통교리 뒤에 숨어서 “인간 조건에 대한 적의와 […] 성자의 육화 안에서 피조물을 취하시고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그 피조물과 소통하는 사실에서 드러난 창조주의 ‘인간애’에 대한 적의7)를 드러낸다.”

  현대문화 안에서 진정성

  테일러는 진정성 문화의 피상성에 -혹은 그것의 일탈이라고 부른 것- 그치지 않고, 그것을 탐구의 문화로 여길 것을 제안하는데, 그 뒤에는 자신에 대한 정직성이라는 윤리적 이상과 양도할 수 없는 독창성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각각 뭔가 자신만의 말할 거리를 가지고 있다.”8)

  인간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어떤 존재양식이 있으며 나만의 개별적인 인간적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은 근대적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나의 인간적 형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은 진짜가 되는 데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인간됨의 모델을 오로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내가 참나가 되지 못하면, 나의 인간적 형상은 부패하고, 개별적인 독창성은 상실될 것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나의 독창성에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명료화하고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명료화하면서, 나 자신을 정의한다. 고유하게 나 자신의 것인 잠재력을 실현하고 있다.”9)

  테일러에 따르면, 여기에 진정성의 윤리적 힘이 있다. 그 자체는 윤리적 이상인데, 그는 이 이상을 “더 나은 삶 혹은 더 높은 삶의 양식의 그림”10)으로 이해하였다. 이 형상은 우리가 열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범이 되며, 그것은 우리가 당장 바라는 것이나 지금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이상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상대주의와 자아도취, 주관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이기주의로 인해 감퇴되거나 변질될 수도 있다. 이상과 감퇴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알아차리기는 매우 어렵다. 개인적인 자아실현에서 이기주의나 자아도취로 넘어가기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집중하여 자아실현을 추구하면서 사회나 자연의 요구들을 회피하기 쉽고, 이런 식으로 역사와 연대성의 유대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탈은 자아를 이상화함으로써 장려되고, 모든 것을 도구적 전망에서 바라보고 고려하게 하며 바로 원자적 사회로 귀결시키는 도구적이고 관료적인 시각에 의해서 강화된다.

  진정성의 문화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길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 “자아실현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의 결연관계를 순수 도구화할 때, 즉 원자적 사회로 밀어붙일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자아실현을 오로지 자기 자신의 기대치로 축소시키고 역사와 전통, 사회, 자연, 혹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질문들을 무시하거나 부당하다고 치부한다. 달리 말하면, 급진적인 인간중심주의를 키우는 것이다.”11)

  진정성에 대한 비판은 이런 이상, 곧 자아도취와 상대주의, 허무주의와 이기주의 등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탈의 위험성에 초점을 맞춘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유동성과 액체성의 은유를 빌어 현재의 모더니티 상황에서 특징을 이루는 문화의 부정적 성격을 표현했다. “액체는 고체와 달리 보통 고유한 형상을 유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유동체들은 공간을 고정하지 않고, 시간을 묶지 않으며 […], 자신의 형상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준비가 되어 있다.”12)

  문화와 환경을 유동성 개념으로 특징짓는 것은 문화에 대한 비관적인 서술인데, 거기서 미래의 약속은 자아도취의 수준만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3) 어쨌든, 테일러가 서술한 미래는 이렇게 절망적이다. 진정성이 표현되는 방식은 –거기서는 각자 자신의 여정을 분별해내고, 자신에 대해 진실해지도록 노력한다.– 윤리적 이상에 대한 절망이나 손상이 아니며, 이 모두는 탐구의 표현이다. 캐나다 철학자는 문화 분석이 어떤 변화가 가져오는 심각한 정치적 결과에 대한 실질적인 염려의 표현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다만, 이들은 진실을 그려내기는 하지만, 자신이 그려내는 문화를 경멸하는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이 현상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윤리적 이상을 볼 수 없게 한다.14)

  진정성의 문화에 속한 이들은 자아실현보다 더 높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테일러는 그들과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의 가능성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대화적 차원에 근거가 있다. 대화는 회복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진정성에 관해 단죄하거나 방어하거나 혹은 중재하는 입장을 취하는 데에 있지 않고, 실제적인 삶을 회복하는 방법으로서 그 근거가 되는 이상을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진정성을 촉진하는 이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면서, 그들의 실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도록 하고, 그들이 동조하는 이상에 내포된 함의들을 더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성의 의미를 위해 싸워야 한다. […] 그리고, 자아실현이 ‘나’를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관계와 윤리적 질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어떤 면에서는 그것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도록 해야 한다.”15)

  진정성의 문화는 어떤 문화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이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생활양식의 경향들 안에서 긴장과 갈등이 상존한다. 대개 어떤 이상의 가장 저급한 형태가 주류가 된다고 할 수 있으나, 소수를 제거할 수는 없다. 테일러는 문화 영역에서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일에 있어서 나는 다수이든 소수이든 트렌드를 찾지 말라고 하고 싶다. 어떤 트렌드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멈추고, 계속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16)

  이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와 문화의 한 면을 등한시하면서 문화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문화적 진보는 그것이 주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고 다양성을 꽃피우게 한 바로 그것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테일러는 매너를 행위의 질료나 콘텐츠와 구분하라고 제안한다. “어느 한 수준에서는 [진정성의 이상이] 삶의 목적이나 형태를 채용하는 방식(매너)과 분명 연관되어 있다. 진정성은 분명히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이다. ‘이것이 내 방침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수준에서도 콘텐츠가 자기참조적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목표가 나의 욕구나 열망들을 표현하고 충족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욕구와 열망 너머에 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과 반대되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어떤 정치적 이유로, 혹은 지구를 돌보는 가운데 하느님 안에서의 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 우리는 이와 같은 어떤 것, 곧 우리 자신이나 우리 욕구로부터 독립된 의미를 갖는 어떤 것에서 진정한 완성을 발견할 것이다.”17)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세 가지의 논쟁이 되는 이상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첫째로, 진정성이 유효한 이상이다. (문화의 일탈로부터 출발하여 그 문화를 평가하는 문화비평과 대비된다.) 둘째, 이상들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다. 그것들이 얼마나 실천되고 있느냐를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 주관주의에 반대된다.) 셋째, 이런 성찰이 결과를 가져온다. (결과가 나올 수 있다.)18)

  진정성의 신앙

  새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나 진정성의 문화에 속한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19) 자신들의 신앙을 참으로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개인주의와 집단, 자율과 의존, 자유와 정서적 성숙, 종교적 언어의 사용과 일상적 태도, 약속과 실행, 항구함과 임의성, 일상의 틀에 박힌 생활과 새로운 경험, 임박한 책임과 지속적 책임, 과거와 미래, 가까운 현실과 먼 현실 등등의 사이에서 균열과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개인주의의 경향이 강력한 우정과 끈끈한 집단에 소속될 요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청한다. 한 사람이 견고한 공동체 구조를 지지하면서 이와 동시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자율성과 독창성을 긍정하고 더 많이 추구한다고 하여 획일적인 외적 상징에의 의존과 매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의 표지라는 외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면 “조합주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형태가 가능하게 된다.20) 종교적 체험의 조합화는 외적인 상징을 특징으로 하는데, 정체성이 (모자, 펜, 로고를 새긴 셔츠, 포스터) 이 상징들로 객관화되고 긍정된다. 집단을 구별하는 포인트가 부각되면서 그리스도인 공통의 차원은 약해져서 뒷자리로 물러나는데, 뒷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곧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조합주의는 개종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언어와 양식, 가족적 분위기와 하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체에 속하여 활달한 공동생활과 관대함이 깃든 온기 있는 환경에서 살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형제애를 생각하게 한다. 사회적 의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에너지는 정서적인 특성과 개인적 성숙의 문제들에 집중하게 되고, 사회적인 문제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제한된 책임을 갖고 단기간 실시하는 자원봉사활동에 호감을 갖는다. 이런 형태의 활동에서 이타주의와 헌신, 동정과 자비 그리고 연대를 실천한다. 한 사람이 서로 무관한 여러 활동을 맡는 경우에도 편안하게 여기는데, 그것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그 활동들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일관되고 실수가 없다고 여기지 않고, 취약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매우 무거운 유산으로, 미래는 불확실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충심으로 현재를 살고, 감당할 수 있는 행복의 순간들을 맞는다.

  기 드보드Guy Debord가 인용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아버지보다 시대를 더 닮는다.”21)는 유명한 아랍의 격언과 함께 진정성이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자아실현보다 더 높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이 시대에 신앙이 가능한 것인지, 혹은 이와 반대로, 신앙인의 삶에서 긴장이 체험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에서 답을 찾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는 표지가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정직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길을 도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신앙은 요구하는 것이 있다. 신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생기며, 각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과 함께 포기와 자기부정과 내어맡김, 기억력과 기대의 능력을 모두 내포한다. 그리고 끝으로 신앙이란 무엇인지의 정의를 내포한다. 그것은 “타자(他者)”를 신뢰하는 것이며, 자신으로 하여금 “타자(他者)”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스턴트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특별한 반향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 신앙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뒤돌아설” 수 있는 감각을 지녔다는 것인데, 이런 가능성의 인식이 방향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더 힘겹게 만들기 때문이다.22) 문화는 “영원”과 “모든 달걀을 하나의 바구니에 집어넣기”를 거부하는데, 우리는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신앙을 살아가도록 불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대안문화를 살도록 제안해 온 종교이지만, 이는 -수도승들의 삶의 이상이 쉽게 오해되듯이– 세상 포기(fuga mundi)가 아니라,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7,15-16 참조) 신앙을 살고 방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문화에서 어려워 보이는 것이 분명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터와 같은 신앙생활은 오직 “우리를 부르시는 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에 영구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유가 보장될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2차적인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게 된다.

  실천적인 삶의 재활성화

  우리는 지금까지 “진정성의 시대”에 종교가 갖는 여러 모습들을 묘사했는데, 이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라 칭하는 모든 집단에는 성령강림의 현상이 유일하지는 않지만 공통의 분모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다음 질문이 따라 나온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내어맡김과 책임감, 무상성과 관대함은 물론이고 지루함과 일상성이 일생동안 요구되는 생활을 할 능력이 있을까?

  “진정성의 시대”의 바람직한 신앙인상에 묘사된 사람들이 그들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묘사된 특징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여정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신앙인들은 일관되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이기야 하겠지만,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은 어찌 그들만 그런 것인가. 어느 집단이든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계획한 대로 사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다. 누구도 원하는 대로 늘 행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신앙인이 사회에서 겪어야 할 저항은 부정적인 언어 인식과 강한 선입견 등이다. 처음부터 부적격자 취급을 당하고 왜곡된 언어 표현을 거듭 들어야 하는 지위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법이다. 한편으로, 언어 표현에 담긴 부정적 반응을 감지하면서 대화의 가능성이 차단되며, 대화자는 진단 결과를 수용하고 상대방이 내놓는 처방전을 기꺼이 실행한다는 말을 하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업신여기는 말투는 대화 상대방의 시선을 근시안적으로 만든다. 근시안은 현실을 더 깊은 차원에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다양한 길들을 장려하는 일과 참됨을 위한 싸움이, 비록 거짓되고 부패한 것처럼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강력한 윤리적 이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23)

  게다가, 진정성의 문화와 신앙을 가진 세대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감정은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인격을 걸고 투쟁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같은 이야기이지만, 모든 개인적 경험이 갖는 축소할 수 없는 독창성을 단일한 방식으로, 혹은 특정한 맥락에서 발생하고 특정한 집단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축소하려는 인식과 감정을 갖는다.

  분명 일탈의 위험이 있다. 신앙생활이 훼손될 수 있고, 신앙이 변화의 소명을 받은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테일러가 제안하는 복구 작업은 실제 삶을 쇄신하려는 것이다. 이 문화에서 이 작업을 진정성의 신앙에 적용함으로써 신앙이 복음적 효과를 회복하여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할 수 있다. 이 복구는 어떤 성격들을 가져야 할까?

  첫째로, 오늘날 모든 형태의 주변 종교들이 행하는 탐구의 “진정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탈의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악마화해서는 안 되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는 개인적인 권리를 무비판적으로 합법화해서도 안 되며, 어떤 긴장으로 경험되는 추구가 진행 중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 긴장은 “현실에서 충만하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상의 의미에서 유래한다. 이 긴장은 사람들이 실천상의 결함을 찾아내서 비판하게 되면 투쟁이 될 수 있다.”24)

  많은 경우에, 이런 추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신심단체의 증가다. 교회의 품 안에 여러 운동들이 증식하여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을 듯- 적응의 논리에 적지 않게 응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운동들이 많을수록 좋은데, 그 이유는 모든 이를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의 존재 방식, 자신의 욕구, 그리고 자신의 탐구에 더 적합한 운동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평가에 작동하는 원칙은 적응의 원칙, 즉 “더 많은 사람을 품는” 것이다. 그 결과, 신앙을 개인의 필요를 위한 도구로 축소시키고 그 의미가 감쇄된다. 내가 단체에 들어갈 때, 내가 찾는 것을 얻지만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복음의 원칙에 부합한 헌신을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 속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의 복음적 과제로 투신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역설을 유지하게 하려면, 신학적 성찰은 현실을 더 깊은 차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니 만큼 대화와 설득의 길을 걸으면서 “자아실현은 무조건적인 관계들과 ‘나’를 초월하는 윤리적 질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요청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애써 설득해야 한다. 싸움은 진정성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가 아니라, 진정성에 대해 그 참된 의미를 가려내는 싸움이라야 한다.”25)

  둘째, 이런 인정은 식별의 길, 즉 추구하는 이들과 공감하며 바라보는 길을 통해서, 그리고 언어 정화의 방식 등을 통해 진행된다. 진정성의 신앙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기표현은 반드시 역사적인 유산을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거나, 이미 걸어온 길의 합법성과 진정성을 부정하거나, 전통과 공동 유산의 무게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개인적 경험의 독창성이 갖는 진정성을 박탈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것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각 개인의 경험에 자리를 내준다면, 같은 방식으로 그 고유한 본성상, 진정성의 문화를 특징짓는 탐구 역시 왜곡하지 않고 보장한다.

  이런 복구 작업을 지향하는 신학적 성찰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구현하려는 신앙의 마땅한 요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작업이 없다면 신학적 성찰은 재난 예언과 절망적인 울부짖음, 선입견과 경멸이 가득한 비가가 되는 데에 그칠 것이다. 그런 경우에 진정성에 대한 신앙은 신앙의 요구를 회피하게 한다는 식으로 선의에서 나오는 변명을 할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호소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모든 위협과 일탈을 뿌리 뽑으려는 엄격한 조치와 엄한 심판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쉽지 않은 제안의 기쁜 전령이자 복음에 충실한 삶에서 빛나는 선과 아름다움의 수호자가 되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제168항)

  우리 입장에서 진정성의 추구를 훼손하지 않고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인적인 관심과 원의(“절대적 이기주의”) 외에 다른 질문이 없는 자아실현이 어떻게 “나”를 고립시키고 위축시키며, 그 결과 진정성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문화적 염세주의”26)를 분쇄하고 그런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유혹에 저항할 것이다.


1) 번역: 이정주 신부. 광주대교구. 임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2) 1931년 캐나다에서 출생한 찰스 테일러는 오늘날 북미, 유럽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톨릭 평신도이다. Oxford와 몬트리올 대학, 그리고 맥길 대학(McGill University)에서 가르쳤고, 지금은 그곳의 명예교수이다. 철학사 이외에도, 정치철학과 사회과학들의 철학을 연구했다. 그는 오늘날 신성과 형이상학적 전제를 수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속 시대Secular Age’에서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도달해야 하는 공통의 윤리와 도덕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제안한다. 그는 특정한 종교 신념이나 형이상학적 토대를 가정하지 않고 인류의 공통된 목적(공동선의 발현)으로서 ‘삶의 충만함’을 화두로 제시한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업적은 공동체주의와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 그리고 종교와 근대화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세속화의 주제에 대해서는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Sources of the Self (1989); A Secular Age (2007); «The Language Animal» (2016). 국제적으로 많은 인정과 상을 받았는데, 2019년에는 랏칭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으로는 「자아의 원천들」, 「세속화와 현대문명」, 「근대의 사회적 상상」, 「현대종교의 다양성」, 「불안한 현대사회」 등이 있다.
3)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ambridge (Ma)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16.
4) G. Gutiérrez, Teología de la liberación. Perspectivas, Salamanca, 1975, 80 (in it. Teologia della liberazione. Prospettive, Brescia, Queriniana, 1981).
5)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와 그들의 신학적 성찰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요청되고 내포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으로 구체화하고, 특정되었다. 이 가난한 이들에 선택은 또한 공동의 집에 대한 돌봄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노력한다. (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49항).
6) Cfr J. L. Segundo, Liberación de la teología, Buenos Aires, Carlos Lolhé, 1975, 12.
7) U. Vázquez, «Padecer e saber», in Perspectiva teológica, gennaio-aprile 2016, 16. 심령주의(spiritualimo)는 일종의 영의 질병이며, ‘영적병리학’이다. (cfr G. Parotto, «Pneuma e pneumopatologia nel pensiero di Eric Voegelin», in Politica e religione. 2010-2011, Brescia, Morcelliana, 2012, 233-259).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개념을 ‘영적 세속성’으로 사실적으로 조명했다..(cfr. Evangelii gaudium, n. 93).
8)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it., 39.
9) Ivi, 29.
10) Ivi, 16.
11) Ivi, 58. 프란치스코 교종은 ‘포악’하고 ‘일탈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직접적 이익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하며, 모든 것이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하여 자신을 해친다.(cfr LS 68-69) Cfr E. Rivas, «A esperança como chave de leitura da “Laudato si’”», in A. Murad – E. V. B. Reis – M. A. Rocha (ed.), Tecnociência e ecologia: múltiplos olhares, Belo Horizonte, Lumem Juris, 2019, 29-45.
12) Z. Bauman, Modernità liquida, Roma – Bari, Laterza, 2004, VI. 같은 저자의 책들 중 다음의 책들이 이태리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Amore liquido (2003), Vita liquida (2005), Paura liquida (2006), Futuro liquido (2014), Nati liquidi (2017)
13) Cfr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it., 76.
14) 테일러는 이 작품들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D. Bell, Le contraddizioni culturali del capitalismo, Torino, Einaudi, 1978; C. Lasch, La cultura del narcisismo, Milano, Bompiani, 2001; Id., L’ io minimo, Vicenza, Neri Pozza, 2018; G. Lipovetsky, L’ era del vuoto, Milano, Luni, 2018. Cfr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it., 14.
15)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it., 72 s.
16) Ivi, 79.
17) Ivi, 82.
18) Cfr ivi, 23.
19) Cfr E. Rivas, «La fidelidad a la intemperie. Pensar en fidelidade en la vida religiosa hoy», in CLAR 3 (2007) 9-19; Id., «The Faith of “Authenticity”: Challenges and Prospects for Liberation Theology», in The Heythrop Journal 60 (2019) 871-882.
20) Cfr P. Trigo, «Mística y profecía en la vida religiosa», in Iter 15 (2004) 113-117.
21) G. Debord,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London, Verso, 1990, 13.
22) Cfr Z. Bauman, Amore liquido, Roma – Bari, Laterza, 2017.
23) Cfr C.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cit., 15.
24) Ivi, 76 s.
25) Ivi, 72 s.
26) Ivi,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