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의 위험들

수도생활의 위험들1)

죠반니 쿠치 Giovanni Cucci, S.J.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성삼의 딸들 수녀회) 옮김

  최근에 나온 디스마 드 라쒸Dysmas de Lassus의 책 한 권은 수도생활의 몇 가지 일탈에 대한 꼼꼼한 조사내용을 소개한다.2) 서문에서는 이 책이 수도회들 안에서 일어난 여러 형태(심리적, 성적, 영적)의 피해자들과 4년에 걸쳐 가진 만남의 결과물임을,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면서 그런 일들을 가능케 했던 공동체적 수도회적 일탈을 규명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연구는 몇몇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 수도자들과 각각 한 명의 남녀 수도원장,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전문의들의 협력으로 불란서의 정주수도회 연합회 회장인 프랑소와 유François You가 추진하였고,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 성의 차관 호세 로드리게즈 카르바요José Rodríguez Carballo 대주교의 서문이 들어 있다. 이 연구의 편집자 디스마 신부는 카르투시오 수도원장 겸 총장인데 이러한 일탈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가 대단히 부족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간의 연구들은 대체로 피해자들의 개별적 이야기에 머물렀던 것이다.

  수도생활의 병든 부분을 왜 그토록 강조하는가?

  편집자는 도입부에서 이 질문을 명시적으로 던진다. 그는 질문에 답하면서 몇몇 항공회사에서 벌어진 일을 예로 든다. 고장과 오작동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은 회사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경고를 무시했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수백 명의 사망자, 소송, 회사의 파산, 줄줄이 이어지는 해고, 사람들로부터의 신뢰 상실 등. 이로부터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부단한 점검을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수도 공동체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하도록, 곧 복음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권고에 따라 정기적인 ‘점검’을 하도록 소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 ‘작동 실태’를 조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한 상황의 반복적인 유사성은 단순히 ‘우연히 걸린 썩은 사과’ 탓으로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은 몇 가지 사회학적 범주를 가져와 ‘파괴적 공동체들’(Sennett)의 특징과 함께 수도공동체들이 전수해온 은사를 계속 구현하여 건강성을 유지하게 하는 면역적 방어기제들을 찾아내고자 한다. 저자들은 피해자들이 말하도록 함으로써 뚜렷하지 않더라도 치명적일 수 있는 몇 가지 반복적인 ‘바이러스’를 찾아냈다. 그것들을 알아보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닌데, 성 이냐시오가 말하듯이 ‘선(善)의 외양을 지니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중 몇 가지를 검토해 본다. 이 책의 풍부한 분석을 당연히 다 드러내지 못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신학적 전통과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보게 해 줄 것이다.

  권위의 도구적 사용

  샹탈-마리 소를랑Chantal-Marie Sorlin 수녀는 ‘가톨릭 내부의 분파 일탈 위원회’ 위원인데, 해당 주제 연구(프랑스 주교회의 사무처 발간)에서 양심을 가두는 권위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1) 위를 향한 유혹 2) 특정 개인숭배 3) 외부 세계와 단절 4) 조작적 유형의 영성 5) 실제 삶과의 불일치. 이 특징들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유혹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들이다. 권력과 소유와 쾌락, 이 세 가지 유혹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이들 일탈이 하느님의 증인들과 성덕의 열매들을 마주할 것이라 여겨지는 곳에 존재할 경우에는 더욱 더 심각해진다.3)

  여기에 권위의 목소리를 단순 반복하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일치의 이름으로 질식시키는 분파적 공동체의 역기능을 추가해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생활양식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표현하기는 고사하고, 알아보기조차 어렵게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이 다르다고 느끼고, 소외되고 수도회의 적이라고, 또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닌데) 악령의 종이라고 느낀다. 집단이 폐쇄적일수록 적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공동체의 생활양식과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두 수도회를 예로 든다. 1961년에 크나큰 선교열정으로 탄생했다가 1974년에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 나자렛 성 가정 수도회The Family of Nazareth와 자신의 범행들이 밝혀질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1956년에 ‘애덕의 사적 서원’을 도입한 그리스도의 군대회Legionary of Christ의 창설자 사건이다. 이 서원을 통해 소속 회원들은 장상에게 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감독하는 의무를 진다. 그러한 결정 앞에서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 장상이 그런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한 단체가 그 명백한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 규칙을 받아들여 50년 동안 그저 시키는 대로 복종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렇다.” 가능한 모든 비판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수도적 혹은 신학적 가치와는 전혀 상관 없고, … 장상에 대한 존경과도 교회의 일치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4) 이런 방식으로 창설자 개인이 공동체를 자신의 모상과 유사성을 따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분파적 집단들은 특히 내부 개혁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일탈행위들이 너무 확산되고 흔해서 더 이상 빗나간 것으로 알아차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공포와 불확실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사람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다.”(책의 77쪽) 하지만 이는 특히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불면증, 악몽, 원인 모를 질병, 폭력적 자해 행위, 공황, 자살 시도 등이 그것이다.

  익명을 원하는 어느 여성 심리학자는 자살 충동 때문에 내보내진 약 15명의 관상수녀들을 동반한 일을 이야기한다. 그 수녀들은 심리적 불균형이나 심각한 우울증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원인은 생활양식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 곧 그들의 관심의 중심, 그들의 재능을 모두 비워내도록 요구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갈망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완전하고 거룩한 수녀가 되고자 했다. 공동체의 지침은 어떤 한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들의 내면은 다른 방식을 요구했다. 그들이 거기 순응하면 할수록 의혹과 갈등과 자신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증폭되어 가서 결국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워 버리고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오직 죽음만이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다.”(책의 234쪽)

  피라미드 구조

  쇄신 여정의 장애들은 병리적 공동체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검열을 받고, 특히 교도권의 문헌들과 교회법, 회헌과 규칙서에 의해 정해진 기준들과 대조할 수 없게 된 수도회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그런 식으로 “창설자와 ‘은사의 보유자라고 믿는 사람’에 대한 순종의 이름으로 교회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것이다.”(책의 108쪽; 106쪽 참조)

  분파적 일탈을 연구하는 임무를 맡은 한 수도원장은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요소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피라미드 구조인데, 동료들 사이의 수평적 소통을 금지하고, 어디까지 알려주는 것이 적절한지를 반대 받을 염려 없이 결정하는 상급 권위자와의 수직적 소통만을 유지하는 경향이다. “그렇게 진실의 한 부분은 감추어지고 결국 모두가 거짓을 믿게 된다. 거짓을 말할수록 그 체제에 갇힌 자가 되고, 최소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며 모든 것이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되어간다.”(책의 74쪽) 디스마 신부는 이것을 일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거짓의 문화’라고 부른다. 단체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이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우선된다. 교회 당국이 사제들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겪은 폭력보다 이것이 더 심각한 아픔이다.- 그 바탕에 가장 약한 이를 희생시키는 이 ‘피라미드’ 사고방식이 있다.

  형제적 교정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마태 18,15-20) 우리가 알고 있듯이 비판적인 지적은 달갑지 않을 수 있지만 회심과 비뚤어진 상황을 알아차리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 그러한 상황은 두려움 때문이거나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파괴적 결과에 이를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이 머리에서 나오면 몸과 인격체, 특히 가장 유능한 인격체들은 얼마 안 가서 질식당할 것이다.”(책의 104쪽)

  수녀였던 한 여성은 장상들의 방문이 있을 때 공동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오직 자신과 자신의 결점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스스로를 교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저는 떠날 때까지 제가 사는 동안 보고 살아가는 것에 거스르는 말은 단 한 마디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어요. …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거짓을 말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대변하는 하느님을 신뢰하겠어요?”(책의 69쪽)

  장상-공동체의 변증법

  그러한 일탈들에 주목하면 두 방향의 경청, 곧 수평적, 수직적 경청이 수도회가 점차적으로 궤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관계의 영적 (그리고 인간적) 건강성은 은사에 대한 충실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수도회와 공동체 사이의 상호 교류로 지켜진다. “수도회는 권력이 합법적 영역을 벗어나려는 유혹을 피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대안권력을 대변한다.”(책의 82쪽) 그렇지 않으면 맡겨진 직책은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역할을 자기 가치와 동일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수도원장이나 총장의 선출을 위한 투표는 애정의 선언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을 받을 것이기에” 같은 인물을 다시 선출해야 하는 것으로 느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투표는 수도회의 통솔에 필요한 몇 가지 자질들, 특히 하느님의 은총에 늘 종속된 수도회가 시간 안에서 지속되게끔 하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능력 있는 인물들이라 해도 통솔 직무에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유능하고 뛰어난 장상의 존재로 인하여 교체가 더 어렵게 되고 필요한 쇄신의 여정을 막을 위험이 있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장상과 공동체 사이의 쌍방 소통은 순종의 참된 의미를 보장하기도 한다. 공동생활에 할애된 장(章)은 대단히 풍부하고 상세한데 (책의 89-134쪽 참조) 수도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이 순명서원의 신학적, 교회법적, 영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이 서원에 대한 오해가 흔히 위에서 주목한 심각한 비인격화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장상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자기 형제들에게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그것은, 장상이 하느님의 위치에 있다는 이 공식은 또 다른 공식, 곧 장상의 입장에서는 순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위치에 있다는 공식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 따라서 사랑과 존경을 담아서 명령할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바로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된다.”(책의 97쪽).

   있을 수 있는 모든 비판을 거부하는 것은 오만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동의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에게 순명을 끝까지 요구하는 경우이다. (비도덕적인 일들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들이 아니라면 순명해야 한다. 신학적, 교회법적, 영적 차원에서 이 주제에 관하여 폭넓게 다룬다. 책의 147-198쪽) 그렇지만 순명은 행동에 관련되며 생각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이는 심각한 양심의 위반이 될 것이다.5)

  특권으로서의 권위

  장상과 수하 사이의 왜곡된 관계가 가져오는 또 다른 결과는 특권이다. 공동체의 어떤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건(본가에 다녀오는 것, 책임 있는 어떤 자리, 전화기 충전) 그의 충실성에 대한 특별한 상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애정을 착취하기 위한 사전 보상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해 주었으니 너는 … 잘 알겠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의존하게 만들면서 예상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기분을 통해서도 –더웠다가 추웠다가- 사람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것인데, 이런 변덕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그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느끼게 해서 권위자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무슨 수라도 찾아내도록 부추겨서 그것이 그에게 주된 염려가 되기에 이르게까지 된다. 이런 공동체들은 현실 및 진실과의 접촉점을 상실했다. 그 구성원들은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안심시키고자 스스로 정당화할 커다란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진실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책의 73쪽; 281쪽 참조).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장상의 의지가 유일한 행동기준이 되기 십상이고 장상은 법 위에 군림하며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할 수가 있다. 공동체와 수도회의 재산을 개인 재산처럼 이용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심각한 위험도 수반된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몇 년 전에 유명한 수도원의 원장이 관련되어 크게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6) 당연히 소란스러운 이 경우는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은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피라미드 사고방식을 드러내 준다. 장상이 자기 형제들처럼 살지 않으면 수도생활의 본질적 차원이 위험에 처해진다. … 모범을 보일 임무는 장상의 사명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카르투시오회의 기본 법규는 모범이 되지 못하는 원장은 그 직책에서 해임되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책의 113쪽)

  영적, 성적 폭력

  피라미드 구조가 관계의 규범이 되는 순간 쉽사리 폭력적으로 변질된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들은 대부분 강렬한 카리스마적 느낌을 주며 다른 관점들을 용인하지 않고 경청과 공감의 능력이 없으며 극히 경직된 방식으로 복음적 추종을 제안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칠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에게 보낸 편지’(2018년 5월 31일)와 ‘하느님 백성에게 보낸 편지’(2018년 8월 20일)에서 단순히 “성폭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항상 “성폭력과 권력과 양심에 대해서 말씀하시되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맥락이라는 더 넓은 체제의 맥락에서 권위가 섬김이 아니라 권력으로 행사될 때 그 관계들이 타락하여 발생한다고 한다.”7)

   이러한 역동은 특히 영적 차원에서 가해자의 가면을 벗기면서 서로 동일시될 수도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시대에 있어 왔지만 지금까지 별로 조사되지 않았던 주제라는 것을 저자들은 인정한다. 17세기의 성녀 요한나 샹탈이 기술한 체험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성녀는 신심 깊은 사람들에게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어떤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데 그는 성녀에게 네 가지 서원으로 자신에게 묶여 있으면서 내적 생활을 자기 손에 맡기라고 한다. 그 네 가지 서원은 이렇다. 첫째, 그에게 순종할 것, 둘째 그를 결코 바꾸지 말 것, 셋째,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 넷째,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오직 그에게만 털어놓고 다른 누구에게도 열어 보이지 말 것.8) 그렇게 요한나 성녀는 강력한 저항이 없지 않았음에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작정하기까지 2년 동안 커다란 고통을 겪으면서 이 지도자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하게 되는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양심의 평화를 파괴할 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강압에서 성녀를 해방시킨다.

  이이서 성녀는 (다른 폭력들의 출입문이 되는) 양심의 폭력에 고유한 애정적 협박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 영적인 관계를 내밀한 부분의 소유로 이해함 2) 하느님의 이름을 조작하여 타인의 의지를 없애고자 함 3) 전적인 복종의 요구9) 4) 죄와 벌을 부과하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지 못하도록 절대적 금지를 내려서 그를 자신에게 묶어 두고자 함.

  권위자와의 병적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이 특징들은 대부분의 경우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이 책의 끝부분에 들어 있는 증언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책의 429-439쪽; 288쪽 참조)10) 요한나 성녀의 경우에는 권위자가 “착한 수도자”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짓뭉개는 산”과 같은 관계로 지냈다. 폭력에서는 관계의 수준이 역전된다. 곧 동반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요한나 성녀는 다행히도 새장에서 나오도록 자신을 도와준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을 만났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특히 수도생활의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신체적 심리적 고통이 생겨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제시되는 더 심각한 문제와 함께. 여기서 영적 폭력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느님 이미지의 왜곡이 나오는데 이는 결국에는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만다, 성 토마스가 지적하듯이 “이성(理性)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악으로 제시한다면 의지는 신앙을 악으로서가 아니면 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그 자체가 악이어서가 아니라 이성이 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신학대전』 I-II, q.19, a.5) 여기에서 하느님께도 모욕적이라고 간주되는 행위를 거부할 필요가 나온다.

   이 책은 교부들의 가르침을 취하면서 내면 법정의 실행인 참된 동반의 수많은 특징들을 제공한다.(책의 255-283쪽 참조)

  치유의 길

  수도생활의 병리학에 대해 그토록 명확한 증빙 자료에 기초한 책이 한 은수자에 의해, 은둔생활을 하고 본인이 인정하는 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수 있다. 하지만 디스마 신부는 은수자이기에 흔치 않은 경청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주의 깊게 들어 주는 귀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면담을 한 후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아주 다른 공동체들에 발생한 폭력 사건들 사이에 어떤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우리가 중요한 문제 앞에 있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었다. … 나는 그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이는 전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이다! 수도생활에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부침이 있지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는 상황의 긴급성이 눈에 띌 정도라는 것이다.”11)

  다양한 형태의 ‘폭력 체계’(권력형, 심리학적, 영적이고 성적인)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러한 체험들을 출간하면서 디스마 신부는,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일탈들이 일단 인식되면 부정적 요소들로부터 수도공동체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치유의 첫걸음은 우리와 관계되는 병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질적으로 기술자인 나는 그 메커니즘을 보여 주기만 해도 ‘정상적’이 아님을 인식하는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달라지기를 원해야 한다. 분파적 일탈의 요소들은 거미줄과 비슷하여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를 제거하면 나머지는 무너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악한 피라미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꾸기를 원하기만 해도 된다. 비록 공동체와 사람들 안에 오래된 행동방식에 작은 변화로 생긴 결과들이 두려울 때에도 말이다.”12)

  피해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필수적인 단계인데, 이는 안타깝게도 대체로 소홀히 되어온 부분이다. 2008년에서 2011년 사이에 베를린 예수회의 연학 공동체 원장이었던 클라우스 메르테스Klaus Mertes 신부는 일부 형제들이 10년 동안(1970-80)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을 알고 그 시기에 학교에 다녔던 모든 사람(대략 600명 정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만나려는 소망을 드러냈다. 대다수가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13) 사실, 피해자들의 고통과 쓰라린 느낌을 강조했던 이전의 시도들에 비추어서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경청과 주의의 결핍이나 서두름은 이미 당한 폭력과 똑같이 강한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14)

  그래서 피해자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먼저 적절한 양성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15)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일의 심각성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하며, 죄의식(폭력에 많이 존재하는)을 침묵시키기 위해 그리고 가해자의 역할과 권력과 책임을 올바른 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정신과 영혼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또는 아마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16)

  면역적 방어를 강화하기

  모든 수도회는 이런 일탈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유한 방식으로 ‘면역적 방어’를 마련하고 있다. 규칙서와 회헌, 변경을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특히 직책들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무기한 연장되며 모아지는 경향이 있을 때의 변경 제안, 대내외의 대화, 교회 기관들과의 대화 등이다.17) 또 총회나 집행부 및 대의원들의 역할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LXIV, 2-6; LXV, 18-21)는 대수도원장이나 수도원장이 중대한 위반의 책임이 있을 때 사임시킬 권한을 이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또한 관계와 동반의 빗나간 형태들이 양성과정 동안에 제시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적절한 때에 그것들을 알아보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피해자들의 대다수가 너무 늦게야 자기가 빠져든 그물을 알아차렸음을, -때로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그리고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 다시 작업하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인정한다.

  이런 문제들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통합된 양성의 필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양성이 선을 행하기 위해 불가결한 에너지인 애정과 열정을 건드리지 않은 채 종종 지성적인 수준에 그친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 말하지만 애정은 복음화되지 않는 것이다.18) 이와 관련된 증언들은 “통합된” 영적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해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신뢰와 투명성의 참된 체험을 살도록 해 주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⑴ 강요당한다는 느낌이 없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말할 온전한 자유 ⑵ 어떤 방식으로도 강압을 당하지 않는다. ⑶ 커다란 이해심을 드러내며 그 어떤 통제의 필요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 그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표지를 나타낸다.(책의 304쪽 참조)

  권위와 동반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주어진 또 다른 근본적 경고는 둘째 계명의 영속적인 진리이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탈출 20,7) 이 금지에 이어 위반자를 하느님께서 벌하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가 깊다. 이는 다른 계명들에는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일컫는 것은 단지 독성죄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이득이나 폭력, 살인, 테러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훔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그런 타락들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 심각성을 고발하고 그와 동시에 역사 안에 현존하는 타락을 증언한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게 한다.19) 양심의 폭력은 개인적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도구화된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폭력의 결과가 대부분이다.

  한 수녀는 수련자 때 자신과 동료들이 그 수도회의 창립자 신부에게서 반복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러한 행동을 ‘하느님 사랑의 전달’로 합리화했기에 그들은 순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대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정결과 순명 사이에서 무서운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불순명으로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더 컸고 그래서 결국 나는 굴복했다.”20) 약자의 의지를 굽히기 위해 그런 책략을 사용한 사실은 하느님을 대신하는 막중한 과제를 지닌 자가 하느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더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나서, 그런 일들을 들추어내는 것이 수도생활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며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아름다운 복음의 소명을 체험한 사람들도 지상생활을 하는 모든 날에 이 수고에서 면제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의 분석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도생활을 더욱 안전하게 하고 어떤 일탈들을 피하는 데 기여한다면, 길게 보아 수도생활의 이미지와 내적 삶의 차원에서 득이 될 것이다.”(책의 19쪽)


1) La Civiltà Cattolica 2020 IV 557-569 | 4092 (19 dic 2020/2 gen 2021).
2) Dom Dysmas de Lassus, 『수도생활의 위험과 일탈』(Risques et dérives de la vie religieuse), Paris, Cerf, 2020.
3) Sur Chantal-Marie Sorlin, ‘가톨릭 공동체들 안에서의 분파적 일탈'(Les dérives sectaires dans des communautés catholiques), in ‘주교 문헌집'(Documents épiscopat), n. 11, 2018, 23.
4) Dom Dysmas de Lassus, 『수도생활의 위험과 일탈』(Risques et dérives de la vie religieuse), cit., 129; 참조: X. Léger, 『영향과 정신적 조작 및 분파의 개념들의 인식론적 상태』(Le statut épistémologique des concepts d’emprise, de manipulation mentale et de secte), Lyon, Université catholique de Lyon, 2013-2014, 46-50.
5) 과거에 수사였던 이가 “나는 내 존재가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듯이.(296쪽)
6) 30,000유로까지 쓰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값비싼 주말을 보내는 비용을 치르고자 여러 차례 수입의 0.8%를 이용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의 경우이다.
7) F. Lombardi, ‘미성년자들의 보호에 대한 주교들의 모임을 향하여'(Verso l’incontro dei Vescovi sulla protezione dei minori), in Civ. Catt. 2018 IV 545. 쟈끄 뿌졸Jacques Poujol은 영적 폭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누군가(목사, 사제, 주교, 공동체)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조종하거나 지배하기 위하여 권위를 가진 자신의 자리를 이용할 때 []. 영적 폭력은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신적 권위의 활용을 통해 더욱 심각해지는 권위의 폭력이다.(『영적 폭력.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나기』Abus spirituels. S’affranchir de l’emprise, Paris, Empreinte Temps Present, 2015, 10-12). 2013년 창립자 마리 도미니끄 필립Marie-Dominique Philippe 신부가 저지른 정결에 반대되는 행위들이 드러난 사건에 이어 2015년에 성 요한 형제회Frres de Saint-Jean 공동체가 만든 『폭력 SOS 위원회』La Commission SOS abus는 보고서에서 (성인들에 대한) 성폭력 사건의 80%가 영적 지도의 맥락 안에서 벌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339쪽).
8) A. Ravier, 『요한나 샹탈의 작은 길』(Petite vie de Jeanne de Chantal), Paris, Desclée de Brouwer, 1992, 39.
9) 어떤 수련자는 수련장에게서 받은 지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전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그 어떤 내적 유보도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 나는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히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책의 295-296쪽) 저자는 이런 해설을 덧붙인다. “온전히” 폭력을 만들어 낸다.
10) L. Bove, 『쥴리아와 늑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어떤 성폭력 이야기』Giulia e il Lupo. Storia di un abuso sessuale nella Chiesa, Milano, Àncora, 2016도 참조할 것. 이 책에는 영적 동반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유형의 약탈을 보여 준다.
11) S. Lebrun, ‘끊어진 길’: 카르투지오 수도원 총장이 수도회 안의 폭력에 대해 말하다(“Sentieri interrotti”: il Generale dei Certosini parla di abusi in religione), 참조: www.breviarium.eu/2020/02/25/dysmas-de-lassus-sophie-lebrunlavie
12) 같은 곳.
13) 참조: www.tagesspiegel.de/berlin
14) 예컨대, 소피 뒤크레Sophie Ducrey가 전하는 이야기, 『질식: 어떤 영적 폭력의 이야기』(Étouffée: Récit d’un abus spirituel)를 참조하라. 이 이야기에서는 자신이 당한 폭력(자신의 고해사제가 ‘신학적’ 동기들로 정당화한)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는 교회 공동체 안의 공모의 벽과 압력을 깨부수려는 시도, 특히 가해자가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 앞에서 느낀 커다란 좌절감을 묘사한다. 소피에게 있어서는 출판의 차원에서도 큰 고통이 있었는데, 이 책이 7년 동안 여섯 개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 주제에 대해 언론이 떠들어 댄 덕분에 출판되었다. 소피는 교회 측의 경청을 찾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35년을 기다렸다.
15) 이 목적을 위해서도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 ‘어린이 보호를 위한 센터’Centre for Child Protection(CCP)가 설립되었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폭력을 알아보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코스와 세미나가 제공된다.
16) 한 피해자가 이렇게 털어놓은 바와 같다. 나는 이 고장난 부분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데, 그리고 내 삶의 영웅 안에서 그토록 큰 병자를 보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15년이 걸렸다. 내 편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조종, 지배, 세뇌에 의한 것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말이다. 그리고 이제 4반세기 이상이 지나고 나서 여전히 나는 악몽에 시달리고 더욱 더 배신의 실체를 느낀다(335쪽).
17) 참조: 프랑스 수도승 협의회, 『수도생활과 자유. 교회법적사목적영적심리학적 접근』(Vie religieuse et liberté. Approche canonique, pastorale, spirituelle et psychologique), Paris, Corref, 2018. 개별적인 점들에 대해서는 이 책을 보라.
18) 참조: G. Cucci, ‘열정’(Passioni), in P. Benanti – F. Compagnoni – A. Fumagalli (edd.), 『윤리신학 사전』(Dizionario di teologia morale),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2019, 735-742.
19) 명예교종 베네딕도 16세는 2019년 4월 11일자 교서 「교회와 성폭력」(La Chiesa e gli abusi sessuali)에서 전속 사제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 관리인의 트라우마를 상기하는데 이 사제는 그 여성에게 가하고 있는 성폭력을 항상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하는 말로 시작했다. 이 여성이 그의 폭력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새롭게 느끼지 않고는 동일한 (성찬례) 축성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III, 2).
20) J. Poujol, 『영적 폭력』(Abus spirituel), cit., 38. 스트라스부릌 대주교 몬시뇰 륔 라벨Luc Ravel은 피해자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 편에서 고집스럽게 부인할수록 강력하고 오랜 시간 지속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듣는 마음으로서. 성폭력에 대한 한 주교의 진실한 말』Comme un cur qui cout. La parole vraie d’un vque sur les abus sexuels, Paris, Artge, 2019,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