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을 맞은 종교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이후 55년1)

펠릭스 쾨르너, S.J.
강선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보통 하나의 전환점으로 이해된다.2) 그러나 1965년에 공의회와 관련하여 반포된 「인간의 존엄성Dignitatis humanae」 선언은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종교가 되었다는 주장을 버린 것인가? 가톨릭교회의 종교 자유 선언은 여타 종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 허용되는가?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개인인가, 아니면 공공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종교라는 공동체들인가?

  2019년 국제 신학위원회는 이 주제에 관하여 “모두의 선익을 위한 종교의 자유: 현대의 도전들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3) 이 글은 이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국제신학위원회 문헌이 갖는 특이성, 즉 일단의 필진에 의해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방대해지는 본문의 양으로 보아 이 문헌들은 공의회 선언들처럼 합의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글을 작성하는 데에는 문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내 조류 그리고 시대의 징표를 읽는 서로 다른 이해에 대한 어떤 합의가 있어야 최소한의 공통된 정식에 도달할 수가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근본적인 관심사와 접근방식 그리고 논증 및 표현 형식에 대해 한 사람이 작성한 글에서보다 당연히 더 많은 내적 긴장들이 있을 것이다.

  2004년부터 여성들이 포함되기 시작했는데 필진은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이름이 공개된 것은 물론이고, 위원회에 초청된 것이 전문가적 명성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전문 영역은 넓지만 모두 신학 분야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들은 주교들의 교도권이 아니라, 학문적 권위로 제시되며, 따라서 외부의 어떤 권위자가 그들이 다룰 주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도권에 의해서 충분히 고려되거나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주제들을 집필진에서 선정하여 다루어 왔다.

  문헌의 목표는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개념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 일관된 정당화로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출판은 신앙교리성 장관이 교황의 동의를 얻어 명시적으로 승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제신학위원회의 문헌들은 공적인 위상에 있어서 다른 어떤 가톨릭 신학자 그룹이 서명한 글보다 더 상위이다. 그 문헌들은 일종의 지침으로 지도적 권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모두의 선익을 위한 종교의 자유”는 국제신학위원회 소속 위원들 중 10명으로 구성된 소위에서 출판되었다. 모든 주제를 망라해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13항 참조) 깊이 있는 연구로, 본문의 분량은 같은 주제를 다룬 공의회 관련 선언 「인간의 존엄성」 보다 다섯 배가 많다.4)

  이 문헌이 제시하는 것은 신학적 해석학적 성찰이다(12항 참조). 이 문헌이 해석학적 방법론을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다. 이 문헌의 목표를 「인간의 존엄성」을 수용하는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 두는 한편, 그 주장의 근거로 종교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두 가지 수준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드는 것이다. 이 문헌은 신학적 해석학의 적용 외에도 다른 접근 방식들, 특히 철학 및 신학적 인류학과 일종의 교회정치의 사회학도 소환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교회의 교도권에서 인용한다.

  이 문헌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다시 읽기를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대한 주석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의 다섯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1) 2019년 문헌의 필자들은 교의사적 관점에서 교회가 종교 자유에 대하여 공의회 이전과 이후에 갖는 입장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는가?

  2) 새 문헌은 공의회 선언이 역사적으로 교회에 미친 효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3) 국제 신학위원회가 공의회 관련 선언에서 찾은 종교 자유의 정당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새로운 문헌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줄 것이다.

  4) 위원회가 현 상황을 진단하면서 1965년과 비교되는 새로운 문제들이라고 본 것은 무엇인가?

  5) 끝으로, 필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이런 맥락에서 올바로 읽었는가?

  「인간의 존엄성」 다시읽기. 강조점의 변화

  종교의 자유에 관한 제2바티칸 공의회 선언은 하나의 전환점으로 환영받았지만 전통과의 단절로 여겨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제신학위원회의 필자들은 종종 국교가 되기를 바라는 공의회 이전 관점과 공의회의 가르침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이 점에 대하여 문헌은 교의사와 관련이 있는 일곱 가지 요소를 폭넓게 제시한다. 「인간의 존엄성」에서 ‘교도권의 사고가 성숙해졌고’, ‘교의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진화되었으며’,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 본질적으로 진보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성과 함의에 관하여 ‘더 깊이 이해’하였고, ‘전망이 새로워졌으며’, ‘이전 교도권에 대한 추론과 적용에 관하여 태도가 달라졌다’(14항 참조). 끝으로, 문헌은 공의회가 전통을 파괴한 것인지 진화시킨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여 베네딕토 16세가 제시한 간단한 공식, 즉 공의회 문헌은 “개혁의 해석학”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27항 참조)는 공식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개혁은 원천으로 돌아감과 변화라는 이중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그 말은, 그리스도교는 완고하게 전통을 고집할 때가 아니라 교회가 신앙의 전통으로 늘 새롭게 행동할 때 전통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사상가들은 신앙이 우리 현실의 일부이기에 외부에서 누군가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직관을 이미 표현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에 관하여 라틴 교부 문헌을 인용하였으며 (「인간의 존엄성」 8항 참조) 지금 분석 중인 위원회 문헌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께 부르지만 아무도 강제하지 않으신다.”는 공식을 사용하고 있다(27항 참조).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읽는 맥락에서, 이 문헌은 교도권의 인용문들을 분산 병렬하지 않고 최근 교황들과 공의회 선언들의 수용의 역사를 간략히 제공한다.

  바오로 6세는 신학적 인간학적 3중 요소의 관점에서 종교자유를 해석한 분으로 소개된다. 인간은 “개방과 관계 그리고 초월의 존재로 만드는”(23항) 영적인 차원을 지닌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적 차원에 초점을 더 명시적으로 맞추고 종교적 자유를 위해 적절한 법적 보호를 요구한다. 그 근거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다른 모든 자유가 거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오직 종교의 자유만이 자유와 책임 사이에 풍요로운 긴장을 초래하면서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24항 참조).

  베네딕토 16세는 이 문헌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여전히 위협하는 세 가지 경향을 지적하였다. 종교적 소속에 따른 차별과 폭력을 내포한 종파적인 근본주의 그리고 조작적이고 이념적인 세속주의가 그것이다(25항 참조). 이 문헌은 라칭거 교황이 세속국가가 사회에 공헌한 것으로서 세속국가와 종교 사이의 성공적인 상호인정을 설명하기 위해 곧잘 사용한 “긍정적 세속주의”라는 공식을 몇 차례 반복한다(25; 65; 86항).

  마지막으로 문헌의 필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 가지를 강조하여 종교자유의 역사에 기여한 바를 언급한다. 첫째, 종교가 갖는 진정 혁신적인 동기부여의 힘. 둘째, 종교자유를 위해 순교한 희생자들. 끝으로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협력(26항 참조). 필자들은 세 가지 강조 사항을 나중에 다시 다룬다(48; 81; 77항 참조).

  국제 신학위원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종교자유를 정당화한다고 보는가? 이를 위해 네 가지 학문분야, 곧 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식론, 일반 종교신학, 그리고 교회정치론을 언급한다.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본 문헌은 인간의 “온전함”(18항)을 가정한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바깥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 양심의 판단은 공적인 표출이 보장되어야 한다.

  종교자유의 정당화의 두 번째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에 나오는 인식론이다. 진리를 찾아야 하는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진리의 추구는 사회적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가족에서 시작하여 공동체 그리고 공적으로 접근 가능한 기관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국가와 사회는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믿는 이가 자기를 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의회 교부들 사이에 공유된 함의들을 위원회가 명시하지는 않는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포함한 인류는 신약성경이 완결된 뒤에도 계속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따라서 종교적 진리를 포함한 진리 추구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 진리의 추구는 “대화”를 요구한다는 (19항) 사실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국제 신학위원회는 대화라는 용어로써 우리가 앎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 스스로 묻고 공유된 해결책을 기꺼이 찾는 것이다.

  세 번째로, 국제신학위원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일반적인 종교신학을 소환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종교의 핵심을 이룬다는 (20항 참조) 사고로 종교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가시성, 즉 자신의 내면을 넘어서는 외부 영역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18항 참조) 종교 역시 공개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본 문헌의 필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에서 인정한다고 보는 종교 자유의 네 번째 근거는 근본적으로 교회정치론, 즉 종교에 관한 헌법상의 고려와 관련이 있다. 처음에는 이 정당화에 대해 신중하게 언급하지만 결국 문서 전체의 주요동기가 될 것이다. “네 번째 근거는 […] 종교와 관련하여 순전히 인간적이며 시민적이고 법적인 권력의 한계를 다룬다.”(21항) 그러나 본문에서는 모든 형태의 종교적 자기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기에 곧 이어 믿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자기 절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오히려 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모든 공적 활동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고 있는지, 즉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집필자들은 이제 문헌의 중심을 차지하는 염려를 내비친다. 종교가 공동선에 기여하는 한 국가의 활동이 종교 발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1965년 선언에서 도출될 수 있다면, 종교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문서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왜 이것이 국가의 개입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종교 사이의 관계에 아주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추정하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승인된 것은 상당히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였다(1항).” 위원회는 종교의 자유 및 그 증진과 관련해서 교회가 새로운 요청을 하는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본 문헌은 현 종교 상황에 대한 진단을 여러 곳에서 제시한다.

  변화된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 현재의 진단

  국제신학위원회 문헌에 따르면, 1965년 이후 변화된 맥락의 특징은 ‘종교’라는 요소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문헌에서는 이것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다원성 안에서의 종교, 종교와 대립되는 중립성 그리고 문제가 되는 종교의 경우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변화 중에서 첫 번째 눈에 띄는 것은 종교적 다원성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9항 참조). 1960년대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오늘날 인류 대다수는 다종교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10항 참조). 이것은 예를 들면 이주나(68항 참조) 특정 종교를 실천하고 공동체와 동일시하는 인구가 감소하여 인구 구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 상황의 변화와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자기이해가 변화된 데에 따르는 현상일 수도 있다.   

  이제 종교와 관련된 사회 변화의 두 번째 의미가 대두되는데, 본 문헌의 주요 관심사를 다시 건드리는 문제다. 집필자들은 종교가 점점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적 문제로 간주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진단은 종교적, 인종적 중립성을 전제로 한다(11항 참조).

  세 번째로, 종교는 55년 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오늘날에는 하나의 문제로 인식된다(2항 참조). 이것은 부분적으로 ‘근본주의’ 현상에 기인한다. 이러한 관찰 결과 다음 세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이들 근본주의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지성적인 논의로 어떻게 그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어떻게 종교의 자유를 정당화할 것인가?

  본 문헌은 종교 자유의 담론을 인권의 역사와 잘 연계시키고 현대의 세속적 인본주의 및 개인주의적 다원주의 조류와 올바르게 결합시킨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유래한 것은, 모든 개인이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동일한 존엄성을 지니므로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임을 상기시킨다(3항 참조). 이러한 주의 깊은 관찰은 종종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간과되는 데에 대한 유감의 표현일 수 있는데, 이는 종교가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적 차원과 너무 성급하게 일치되는 것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필자들은 여기서 간략하게 근본주의의 기원을 다룬다(4항 참조). 그들은 단순한 “전통 신심으로의 복귀”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근본주의들이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국가가 지침을 거의 내놓지 않거나 (“상대주의”) 종교를 공적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자 (4항, “연성 전체주의”) 과도한 힘을 사용할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국제 신학위원회는 이런 면에서 종교적 및 반종교적 광신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5항 참조).

  이 첫 번째 단락에서 본 문헌의 주요 관심사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의 출구를 제시하고 있다. 중립성 지지자들과 종교공동체로부터 공통의 근거를 찾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종교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고 관념적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자유주의 문화는 그런 선입견을 극복하고 종교를 더욱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 종교 역시 “종교에서 영감을 받은 실체와 공존에 대한 전망을 인간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교하게 다듬는 법”을 배워야한다(7항).

  이 지점에서 본 문헌은 중요한 선언을 한다.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 오늘날 복음화는 그보다는 신앙의 선포를 막지 않는 “종교의 자유와 시민적 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긍정적인 향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화는 국가 권력과 같은 힘을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더욱이 강제로 부과해서는 안 된다(8항 참조). 본 문헌의 필자들은 이런 입장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류문화의 진리를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2019년 국제 신학위원회가 1965년의 선언을 적절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해석하였는지 물어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선언을 올바로 읽었는가? 그리스도교를 특히 이성적 종교로 부각시키려는 노력은(8항 참조)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을 고유하고 유일한 특성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역사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다른 종교들을 종속적인 것으로 여기고 덜 합리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할 위험이 있다.

  위원회가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관심사 때문이다. 어떤 종교가 공적인 승인을 얻고 유효한 종교가 되고자 하면 공적 토론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위원회가 취하는 주된 방향성은 인간은 한 인격이고, 따라서 양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존엄성」 1항의 신학적 인간학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위원회는 개별성과 관계성 사이의 긴장 안에서 인간됨을 규정한다(35항 참조). 또한 “신앙의 행위는 본성상 의지적인 행위”라는 「인간의 존엄성」 10항의 신학적 인식론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내면과 외형의 연결(18항 참조)과 필연적으로 사회공동체적인 진리 탐구(19항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특정한 합리성을 더욱 강조한다(8항 참조).

  따라서 위원회의 「인간의 존엄성」 이해는 정확하고 방향성도 명료하다. 위원회는 문서가 개인에 제한되기를 원치 않고 사회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종교 공동체와 국가. 구별되는 관계

  본 문헌은 국가와 종교 공동체의 상호인정을 요청한다. 종교에 관한 이런 헌법적 접근은 모든 형태의 “정치적 일원주의”를 거부한다(61항). 치빌타카톨리카La Civilta Cattolica는 이미 30년 전에 이 용어가 가리키는 바를 거부하며 이러한 공식을 토론 정식으로 도입했다.5)

  국제신학위원회의 문헌은 하느님의 권능과 국가의 힘이 상호 대체하는 온갖 정치적 형태를 검토한 뒤에 그것들을 모두 일원주의로 간주하며 거부한다. 상호 대체를 위한 시도는 신정주의나 무신론 국가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신앙 영역과 정치 영역의 이중성이 모호한 형태로 유지될 것이다. 그보다는 종교적 주도권과 정치권력을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별은 분리가 아니다. 위원회는 「사목헌장」 76항과 함께 구별의 목표가 정치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들 사이의 “협력”이기도 하다는 점을 (60항) 긍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본 문헌은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 논거도 제시한다. 특히 교도권 문헌에서 거의 인용되지 않는 두 가지 철학적 사조를 언급한다.

  먼저 폴 리쾨르(Paul Riccoeur)의 성찰이 나온다.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첫 권에서 프랑스 철학자는 이야기의 효과를 고찰하면서 인간의 정체성 인식과 존엄성에 있어서의 교육적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이야기의 남용을 경계한다. 사회는 건국설화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48항 참조).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 쉽게 우월성과 배제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회는 건국설화를 넘어서 개인 또는 보편적 수준에서 다양성과 다름과 거리를 설명하는 담론을 통해 그 본질적인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개별 가족의 전통과 인류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종교가 그러한 요소들을 제공한다.

  본 문헌이 언급하는 또 다른 현대 철학자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다. 『세속시대A Secular Age』에서 테일러는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변화가 있음을(62항 참조) 관찰한다. 그는 종교에 속하는 것이 하나의 선택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동호회의 회원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테일러는 이러한 비교의 기원에 부적절한 위치 변동이 있음을 지적한다. 현대정치이론이 시민들의 평등을 위해 싸웠다면, 이것은 모든 개인이 국가와의 관계에서 동일한 보호와 참여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몇몇 나라에서는 평등과 민주화를 통해서 요구하는 내용이 달라졌다. 즉, 시민사회의 집단은 모두 평등하게 대해야 하며 공통된 가치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국가차원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평등과 참여의 그러한 의미 변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이 ‘스타워즈’에 열광하든지 혹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추구하든지 국가가 무관심할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가치와 관련될 때에는 주민들의 투표로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좋든지 싫든지 “윤리적으로 권위주의적”이 될 것이다(62항).

  식별. 용어에 대한 비판

  문헌 작성시에 필자들은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환영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범죄들에 대해서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다(4; 25; 82항 참조). 분명히 이것은 종교의 자유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기도 하다는 생각을 부추긴다. 국가가 개입하여 이 극도로 위험한 요인인 종교를 길들이고 문명화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헌은 “식별” 개념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풀고자 한다(70항). 그러나 모두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식별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신중하게 경청하여 특정 이해관계가 아니라 모두의 선익을 도모하는 관점에서 결정하는 기술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하느님의 뜻이 인식되고 완수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필자들은 “식별” 개념과 더불어 하나의 기준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품위에 따른 이성이 정당하게 요구하는 바를 드러내도록 동의해야 한다.”(70항)

  어떠한 요구들인가? 여기서 문헌은 “종교적 권리의 평화로운 상호성”이라는 하나의 단일 공식을 예로 든다. 이것은 명시적으로는 개종의 자유를 가리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문헌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지만,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무슬림은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면 사형의 벌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를 포함하여 종교를 바꾸는 것으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국제적 논의에서 언급되었을 것이며 종교자유의 요청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호주의 요청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교 전통 국가도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들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국의 이슬람교인들에게 그 권리를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는 다른 나라들의 법적 대표도 프랑스의 인질도 아니다. 물론 해당 국가에서 결정할 책임을 진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위한 “합리적 요구”를 설명할 수 있고 설명해야 하지만, 그러한 요구는 사실상의 혹은 정당한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유효하다. 그러므로 요점은 어떤 관대함의 상호성이 아니라, 인권으로서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종교 자유의 상호성이다.

  기준들에 대한 숙고가 중요한 요소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비판이 가능한 두 개의 다른 공식을 살펴볼 것이다. 사실 위원회는 때때로 여러 문화권에서 정당한 거부에 직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 문헌이 균형 잡힌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칭송하는 “긍정적 세속주의”라는 표현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8년 베네딕토 16세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Nicolas Sarkozy의 연설에 대해 응답하면서 이 표현을 다시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긍정적’이라는 형용사는 법철학에서와 같이 ‘독단적인, 규범적인’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여기서는 “칭찬할 만한”이라는 일반어의 의미로 사용되며,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국가가 종교를 ‘긍정적’으로, 즉 환영받고 건설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주의”라는 용어는 국가와 종교사이의 상호분리와 고립과 같은 구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베네딕토 16세도 위원회 문서도 이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러한 분리는 종교공동체가 사회와 문화 형성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참된 종교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결국 문헌에 나오는 “긍정적 세속주의”는 헌법적 관점에서 종교에 대한 ‘자비로운 세속주의’를 긍정하는 개념을 뜻한다.

  둘째, 본 문헌이 “인본주의적” 태도(예: 68; 75항)와 같은 개념을 표현할 때 인본주의에 대한 위원회의 견해가 늘 분명한 것은 아니다. 모든 정치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인류를 기본 가치로 선포한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인가? “인본주의”라는 슬로건은 부당한 신앙의 특권을 선언하면서 종교 공동체와 국가 간의 -상호 인정을 특징으로 하는- 건설적인 협력을 폐지하려는 공격적이고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 사조에서도 사용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문헌을 연구하면서 몇 가지 용어를 비판하는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언어적 표현에 따라 문헌이 어느 곳에서는 본질적인 거부가 아니라 단순한 오해로 인해 수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것이다.

  이제 끝으로 어휘론적 관찰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의 선포와 성찰이 –공적 영역에서조차- “양심”과 “자유”, “인간성”과 “인간 존엄성” 그리고 “공동선”에 대해 말할 때, 교회와 사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어휘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목소리는 이들의 경우에 순수하게 “세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런 현대 문화의 개념과 정식들이 사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문화적 중재의 열매임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3항 참조). 근본적인 범주에 속하는 그런 용어들을 교회가 선포하고 삶으로 증언하고 신학을 통해 성찰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에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항구적인 대화에 있음을 대화상대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증언은 항상 그 용어들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하여 새롭게 조명하고 비옥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이 -문화들의 형성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토착화뿐만 아니라 문화들의 만남을 위해서도 (28항 참조) 기꺼이 노력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열린 자세로 다른 개념적 역사와 전통 그리고 경험들로부터 배우고자 한다.

  본 문헌에서 필자들은 종교의 자유로 제3의 효과도 얻는다고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개인 윤리에 기초한 종교 자유의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양심과 인격의 개념에서 발전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첫 자리에 놓은 것이다. 위원회의 문헌은 종교 공동체가 공적인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행동할 권리, 즉 사회 윤리에 기초한 종교적 자유의 개념도 더 두드러지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위원회는 이 원칙을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공동체에도 적용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구원사를 교회사의 범위 안에 닫아놓지 않기 때문이다.”(83항)

  또 문헌은 세 번째 영역도 간략하게 언급한다. 종교의 자유는 개인과 사회영역을 넘어 종교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고 살아가는지의 내부 문화에 도전도 한다. 공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공동체 회원들 사이에 일어나는 비판과 형제자매들의 믿음이 서로 다른 데에 대한 이해부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종교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에 대한 비판에도 적용할 것이다.”(80항)

  결론적으로 본 문헌의 필진은 수준 높은 이론을 제시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칭송하지 않고 (83항 참조) 확고한 이유와 함께 국가와 사회가 종교를 새롭게 인식하고 종교 공동체들을 사회생활 전체의 협력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근본적인 사고는 교회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호소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 그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종교들과 그들이 세계 형성 과정에 참여하도록 부여된 종교의 자유는6) 공동선에 봉사하기 때문이다.7)


1) La Civiltà Cattolica 2020 IV 326-339 | 4090 (21 nov/5 dic 2020).
2) 참조. R.A. Siebenrock , “Theologischer Kommentar zur Erklärung über die religiöse Freihiet ‘Diegnitatis humanae’”, in P. Hünermann – B.J. Hilberath (edd.),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Zweiten Vatikanischen Konzil, vol. 4, Freiburg im Breisgau, Herder, 2005, 125-207(208-218쪽의 다수의 참고문헌도 보라).
3) La liberta religiosa per il bene di tutti. Approccio teologico alle sfide contemporanee 문서는 2019년 3월 21일에 승인되었다.
4) 바티칸 웹 사이트(vatican.va)에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된 문서를 볼 수 있다. 독일 주교회의 역시 독일어 번역문을 제공하고 있다.
5) 참조. “Fede e politica. Né confusione né separazione, ma distinzione e rapporto reciproco”, in Civ. Catt. 1987 II 521-532.
6) 참조. F. Körner, Political Religion. How Christianity and Islam Shape the World, New York, Paulist, 2020; Id., Politische Religion. Theologie der Weltgestaltung Christentum und Islam, Freiburg, Herder, 2020.
7)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Wissenschaftskolleg zu Berlin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