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회칙 “모든 형제들”에 나타난 샤를 드 푸코의 모습 – 희망 안에서 반응하기

La figura di Charles de Foucauld in «Fratelli tutti»
Reagire nella speranza

© La Civiltà Cattolica, Q. 4089, 7 Nov 2020 IV, 278-290
Diego Fares 디에고 파레스 신부 (예수회)
이창준 로사리오 신부(예수회) 옮김

  “모든 형제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서두로 이번 새 회칙에서, 우리에게 막 주어진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교황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게서 다시 한 번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이 성인은 모든 피조물, 특히 보다 더 내버려진 그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1)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교리를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일, 즉 하느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에 초점을 둔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신자로서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두기 위해 우리 원천으로 돌아가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향한 경배와 이웃 사랑입니다. 이는 그들의 맥락을 벗어나 우리 교리의 몇몇 측면에 맞춘 채 경멸, 증오, 외국인 혐오, 타인에 대한 거부의 형태로 끝나지 않게 합니다.” (FT 282)

  교황은 우리와 세상의 회개가 필요한 주제에서, 복음 선포의 본질 자체(kerygma)로 여러 번 돌아간다. 이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나타난 방식을 따른다. 영신수련에서 되풀이는, 성령이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 내미는 진리를 “내적으로 느끼고 맛들이기” (영신수련 2항) 위한 열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연설에서 정치적인 내용이 많고 종말론적 성격이 적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기준에 따라, 그는 마지막 날에 관한 추상적인 단언의 영역을 배제하고 보다 현실적이게 우리의 현재에 그 비유를 가져온다. 그 비유는 “길” 위에 있다. 이 길에서 “인간적 형제애를 실현하기 위한 길에 투영된 모든 존재 안에, […] 우리 서로는 상처 입은 사람과 함께 필연적으로 부딪칩니다.” (FT 69)라고 밝힐 수 있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교황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길 바라는 일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교황은 이 새로운 회칙에서 그들에게 한 지점을 환기한다. 이 지점은 ‘나눠지거나 혼란스럽지 않은’ 곳으로서, 사회 생활, 경제, 정치, 종교 생활을 다룬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상처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길이란 장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포함 또는 배제는 경제,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계획을 결정합니다.” (FT69)

  샤를 드 푸코의 예언자적 이미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로 시작한 이미지와 함께 샤를 드 푸코로 마무리하는 이미지는 회칙의 모든 내용을 희망 가득히 끌어안는다. 교황은 역동적으로 회칙을 개괄하면서, 그가 바라는 핵심으로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을 제시한다.

  “저는 우리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살아 가도록 주어진 이 시간 안에 있는 만큼, 모든 이들 사이에 형제애에 대한 세계적 열망이 되살아 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FT 8)

  함께 꿈을 꾸자는 것, 회칙 서두부터 우리를 재촉한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이 제안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샤를 드 푸코에게 불어 넣었던 그 꿈에 대한 영감을 불러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FT 287 참조)

  곧 시성 될 샤를 드 푸코2)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형제들”에서 매우 확실한 증거이다. 교황은 회칙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유산을 모으고 실현하며 복음적 내용을 종합하고 육화시키기를 제안한다. 그는 우리에게 구체적 방법으로 우리 시대의 보다 큰 도전이 일어나는 곳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교황이 복자 샤를 드 푸코에게 명시적으로 할애한 두 가지 요점은, 간단하지만 복음적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보여준다. 이는 “모든 이의 형제”, “보편적 형제”가 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샤를 드 푸코의 꿈이다. 복자는 오직 “스스로 가장 낮은 이들과 동일시” (FT 287; 2-4 참조)하면서 이를 실현하였다. 교황이 우리에게 지적하듯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작위로 마주 할 꿈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꿈은 역사에 가득 차 있다. 복자 샤를 드 푸코의 꿈은 하느님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킨 것과 같다. 그것은 오랫동안 꿈꿔온 이상이며, 우리 안에서도 변화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이상이고, 우리 스스로를 이러한 성인들, 형제들, 모든 친구들처럼 느끼게 하는 지점까지이다.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대한 이러한 꿈은 언제나 교황 베르골리오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FT 5 참조)3). 그리고 우리는 드 푸코의 영성이 마지막 부분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회칙 전체에 스며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성인 특유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 외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영성이 “모든 형제들” 안에 관통하여 나타나는 사실을 눈 여겨 볼 수 있다.

  내버려진 이들

  3장에서 “길 위의 이방인”은 “내버려진 이”라 불린다. 이 표현에서 교황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보편적 사랑을 구체화였다. 그리고 이 표현은 “아프리카 사막 한가운데서 가장 낮고 내버려진 이들과 함께” (FT 287) 한 샤를 드 푸코에 대해 확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보다 더 내버려진 이들에 대한 이러한 선호는 시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신학적인 특징을 지닌다. 샤를 드 푸코에게서, 성부의 손길에서 소외되어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나 (“무관심의 기도”) 보다 작은 이들의 소외를 용인하는 일은 매 한가지이다. 그는 “겸손, 가난, 소외, 실의, 고독, 구유에 뉘인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통 등을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적으로 위대하고 칭송 받을 일들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가장 부유한 이들처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낮은 자리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찾고, 가장 낮은 사람이자 사람들 중에 보다 멸시 받는 이가 되는 방식에 내 삶의 자리를 두는 것입니다.”4)라고 언급하였다.

  드 푸코가 내버려진 이들을 한 명씩 찾은 게 아니라 그들 각자 안에서 사람들 모두를 끌어안은 점이 흥미롭다. 정확히 말하면 보다 더 내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간 것이다. 이에 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제게는 그들보다 더 내버려진 사람이 없었기에, 사하라의 대목구장님에게 알제리의 사하라에서 머물 수 있는 허락을 청하여 얻었습니다. 그곳이 고독 안에, 봉쇄 안에, 침묵 안에, 수작업 안에, 거룩한 청빈 안에서 홀로 또는 몇몇 사제들이나 평수사들과 예수님 안으로 나아가는 자리이기를 바랐습니다. 나자렛에서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그러한 삶이 얼마나 가능한지 확실히 보여 줍니다.”5)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회칙에 받아들인 샤를 드 푸코의 다른 특징은 내버려진 이들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나타난다. 이 자세는 자비나 정의 안에서만 이를 행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우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정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예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반적으로 보다 나은 사례라 간주하는 현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에 관한 예이다. 그리고 “분류하다”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종종 특별한 경우로 다뤄지는 현상들에서 보편적 핵심을 심화하고 공식화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적 우정과 보편적 형제애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 인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개인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언제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헤아리는 것입니다. 각자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자원이 부족하거나 개발이 덜 된 곳에 태어 났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이들이 낮은 존엄성을 지닌 채 살아 가는 게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회 생활의 기본 원칙입니다. 일상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있으며, 세상에 대한 시각이 자신에게 맞지 않거나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FT 106)

  그리고 인간의 가치는 얼마인가? 이 회칙에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인간의 가치가 정의와 자비를 받을 만할 때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친구가 될 만할 때에 한없이 더욱 가치 있다고 이야기한다.

  “(브라질 아파레시다에서 있었던 주교회의 총회 중)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가르쳤듯이, ‘우리가 친구이게끔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이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가치, 정당하게 차오르는 그들의 열망, 신앙 생활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방식을 깊이 존중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은 우리를 가난한 이들과의 우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아파레시다 문헌 398항 중)” (FT 234)

  회심

  회칙의 6장에서 대화와 사회적 우정에 대하여 밝힌다. 이는 샤를 드 프코가 “겸손한 이들과의 대화를 늘리고 힘있는 이들과의 대화는 줄입시다”6)라고 제시한 그 해결책을 읽을 때에 생생하게 밝혀진다.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이슬람교의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대한 담화에 목소리를 높일 때이다. 드 푸코는 “그들에게 다가가고, 교류하고, 그들과 우정을 쌓고, 일상적이며 우호적인 관계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편견을 무너뜨리십시오. 대화와 우리 삶의 모범으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십시오”7)라고 이야기하였다.

  그의 담화는 자연스러운 사교성에서 비롯할 뿐만 아니라 사목 전략도 다룬다. 그에게, 삶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 즉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그는 “기도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영혼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 이는 내면의 대화이자 즐거운 비밀입니다”8)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바로 만나게 되는 더욱 겸손한 사람들에게 그가 내어주는, 바로 이러한 그의 귀중한 차원이다. 샤를 드 푸코는 최고의 찬사를 바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로서, “모든 이와 대화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정의롭고 열린 이들은 물론, 우리가 우정의 가치를 둘 수 있다고 여길 만한 이들과의 대화 방식에 관하여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1장 “닫힌 세상의 그림자”에서 교황은 대화에 대하여 경시하는 자세가 뿌리 박힌 비판을 뛰어넘는다. 이런 비판은 한 나라와 세상의 정치 및 사회 생활에 해를 가할 정도인, 가짜 뉴스, 타인에 대한 비방 및 명예 훼손으로부터 나타난다. 프란치스코는 인류를 통합할 수 있고 우리가 마음과 함께 “우리”를 사용하여 1인칭 복수형으로 말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만큼, 우정 가득한 대화를 위한 마음을 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몸짓, 표정, 침묵, 신체 언어, 심지어 향기, 악수, 얼굴의 홍조, 땀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하고 인간 의사 소통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관계는 「우정」을 키우려는 노력, 안정된 상호 관계,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숙해지는 동의도 제거합니다. 이 관계는 사교적인 듯 한 외양을 지녔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구축하지 못하지만, 외국인 혐오증과 약자에 대한 경멸 안에 나타나는 바로 그 개인주의를 감추고 증폭시킵니다. 디지털의 연결은 다리를 놓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인류를 통합할 수 없습니다” (FT 43; 홑낫표는 저자 주)

  사회적 우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대화 방법이 있다. 교황은, 모든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 타인을 인정하는 즐거움, 친절의 회복에 대한 동의를 함께 구축하고 뿌리 내리는 데에 목표를 둔다. 이것들은 친구들 사이에 이야기 나눌 때 충만하게 나타나는 대화의 모든 방법들이다.

  갈등의 진정한 극복: 더욱 내면적인 것, 더욱 보편적인 것

  프란치스코의 관점 안에서 샤를 드 푸코의 태도는 패러다임의 색채를 띤다. 교황은 그를 마치 반죽을 발효시키는 누룩과 같은 복음적 진리가 우리 시대 안에 육화한 사람으로 제시한다. 이는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표현을 빌려 공식화할 수 있다. 즉, 보다 내면적인 것만이 진정하게 보편적인 것으로 변화할 수 있고, 보다 보편적인 것만이 근본적으로 내면화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거짓된 보편주의와 거짓되게 내면을 내세우는 모든 사조에 반대한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박사 과정 중이던 베르골리오가 1989년 산 미겔 대학교에서 학기를 시작할 때, 정치 인류학 석사 과정 강의 중 그가 다룬 도덕적 긴장을 기억할 수 있다. 그는 ‘내면과 전체(또는 총체)’ 사이의 올바른 긴장에 대하여 말하였다. 자기 안에 갇히고 개인주의로서 내면에 대립하는 긴장, 그리고 자신을 잃고 전체주의로서 전체에 대립하는 긴장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전체는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출발하려는 특징만 갖춥니다. 그게 아니라면, 추상적인 구조가 되며 갈등을 넘어서려는 도구로서 이바지하지 않은 채, 보다 진정한 것을 이해하거나 나타내지 않는 전체 안에서 자신을 잃게 됩니다.”9)

  교황의 보다 광범위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 맥락 안에, 그의 이러한 내면적 염려가 오늘날에 다시 재연되는 것을 회칙에서 볼 수 있다 (FT 5 참조). 그의 성찰에서, 그는 더 자유롭고 내면적인 것을 보편화하는 데에 힘쓴다. 한 예로, 그는 형제애가 근본적으로 인류의 사회 정치 생활에 뿌리 내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우정을 바란다. 사실, 형제애로는 충분하지 않다. 창세기의 카인 이후로 형제들 간의 충돌은, 상속 분쟁에서부터 내전에 이르까지 종종 더욱 치열하다. 형제들 간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우정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형제 관계에, 친구가 되기 위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으로서 질적인 요소를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형제애의 관계를 굳건히 한다. 우정과 달리 형제애의 관계는 선택되지 않은 공통된 기원에서 비롯하는 만큼, 그 반대 급부로서 우정을 향하여 흘러 나올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악으로서 사회적 배제에 대한 교황의 식별이 우리를 이끄는 바는 분명하다. 그는 그러한 배제가 우정에 대한 꿈과 같이 내면적이고 대가 없는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 할 것이라 결론 내리게 한다. 그리고 그의 식별은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타인을 고려하는 자세에 대하여, 같은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정의 가능성까지 받아들이게 귀결시킨다.

  샤를 드 푸코의 자세는 영웅적이지만 개인적이고 흉내낼 수 없는 사명에 헌신하는 수도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의 자세는 우리 눈에 절대적으로 따라할 수 있고 잘 짜인 사명을 펼치는, 구체적이고 보편적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이슬람교의 세계에 복음과 그리스도가 도래하는 상황에 준비하기 위하여, 어떤 보편적 진리를 내세우는 요구 없이 순수한 우정과 섬김으로서 시간이 걸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드 푸코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실천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섬김을 보편화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적 생각들을 통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는 침묵한다. 그는 “그 목자에, 그와 같은 사람들”, “마음에 작용하는 선은 그 마음의 내적인 영과 직접적으로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제 손에 달렸습니다! 제가 거룩해지면 그들은 구원 받을 것입니다”10)라고 밝힌다.

  복자 샤를 드 푸코에게서, 그가 개인적으로 거룩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그와 같은 거룩함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비추려는 힘 사이의 이 관계가 얼마나 열정적인지 볼 수 있다. 반죽에 든 누룩의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동전의 다른 면도 보여 주기에 이른다. 그는 우리에게, 보다 내면적인 것이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점에서 내면과 보편성의 관계가 일방 통행길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진정한 보편성이 없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하는데, 이는 아무런 대가나 보상 없이 더 깊이 있는 가치를 탐색하지 않는 보편성이다. 사람들의 우정에 대한 열망을 북돋구려 하지 않고 외적으로 의지와 표를 조작하는 데에 갇히는 정치는, 공동선을 섬기는 진정한 정치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제에서 그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또는 나중에라도 더욱 배제된 이들의 지갑에 다다르지 않는 경제 시스템은 국제적 단계에서 붕괴될 것이다.

  코로나 19의 세계적 유행으로, 우리는 각 개인과 모든 인류의 건강 간의 관계를 실존적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모든 이가 누릴 수 없는 기쁨, 이기적인 방식으로 몇몇만 누리는 기쁨은 온전한 기쁨들이 아니며 무언가 부족하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관계는 존재와 관련을 짓고,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두 개의 원칙

  이와 같이 내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건실하고 근본적인 연결은, 교황이 항상 기억하는 유명한 원칙들 역시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 원칙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고 부분들의 합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참조. FT 78; 145;215). 다른 원칙은 “통합과 갈등의 극복” (FT 245)이다. 이 원칙들은 각 개념의 다른 정의들을 대치시킨 채 추상적 논리로 읽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각 정의들을 뛰어넘는 살아있는 열쇠로 원칙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보다 내면적이고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과 보다 보편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있는 열쇠는 균형 잡히지 않은 긴장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황은 여러 방법으로 보편성이 보다 지역적인 것의 내면성에 그 뿌리를 둔다고 확인한다.

  “보편에 대한 거짓된 개방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 나라의 깊은 곳까지 꿰뚫을 수 없는 이들이나 자기 겨레에 대해 해결할 수 없는 울분을 지닌 이들의 공허하게 피상적인 것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어찌 되었든, ‘늘 시선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 올 더 큰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뿌리 뽑지 않고서 그것을 해야 합니다. 비옥한 땅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인 자기 지역의 역사에서 뿌리를 밀어 넣어야 합니다. 가까운 것과 함께 하지만 더 넓은 관점을 지니고 작은 곳에서 일합니다. […] 무력해지는 전지구적 차원도 아니고 열매 맺지 못하는 고립된 부분도 아닙니다.’ 많은 면을 가진 다면체입니다. 여기에 각자가 자기 가치를 존중 받더라도,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고 그 부분들을 단순히 합한 것보다도 큽니다.’” (FT 145)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미지는 한 사안에 온 마음을 다하는 것과 그로부터 “우리”를 세워 올리는 것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요약한다. 교황은 이에 다음과 같이 밝힌다.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각 경우에 따라 더욱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것을 위해 자기 나라와 세상의 마지막 구석까지 씨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에서 온 여행자가 상처 입은 이의 모든 아픈 곳에 가졌던, 바로 그 돌봄과 함께 합니다. […] 그러나 각자 홀로 그것을 행하지는 맙시다. 사마리아 인은 그 사람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여관 주인을 찾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초대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작은 개인들의 합보다 더 클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고 그 부분들을 단순히 합한 것보다도 큽니다.’” (FT 78)

  마찬가지로,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연합은 “우리 자신의 보다 높은 곳에” 뿌리를 둔 그것이다.

  “저는 여러 번 다음처럼 제안했습니다. ‘사회적 우정을 건설하기 위해 간과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통합이 갈등의 극복이라는 것입니다. […] 그것은 (전혀 다른 전통을 합하여 조화시키려는) 혼합주의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가 다른 것에 흡수 되는 바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극에 놓인 소중한 잠재력을 자기 안에 간직하는 더 높은 차원에서,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매번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특별한 관심사의「보다 높은 곳」에 초점을 두고서 배웁니다. 그 순간마다, 이해와 책임 간에 서로 변화합니다. […] 갈등이 있는 영역의 긴장과 또한 과거 대립된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 법한 긴장 역시, 새로운 삶의 결실을 맺는 다양한 모습의 통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FT 245; 홑낫표는 저자 주, 괄호는 역자 주)

  보편적 형제가 되고자 하는 그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샤를 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지인들은 우리를 잘 맞아들입니다. 이 환대는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필요에 굴복해요. […] 그들이 그래 보일 듯한 감정을 갖기 위해 얼마나 걸릴까요? 어쩌면 그들은 그런 감정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이를 갖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날이겠지요. […] 그들은 군인과 사제를 구분할 줄 알까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종들, 평화와 사랑의 직무, 보편적 형제들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저 의무를 마친다면, 예수님은 가득 찬 은총을 뿌리실 테고 그들은 이해하겠지요.”11)

  프란치스코는 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이자 친밀한 것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게 두 가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용서와 우정이다.

  용서

  교황은 용서에 대한 생각과 관련하여 모든 어려움과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것을 상세히 현상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우리에게 “자유롭고 진실한 용서”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의 “위대함이 거룩한 용서의 거대함을 반영한다”는 점을 밝힌다. 그는 “용서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후회를 느끼고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이도 용서 「할 수 있습니다」” (FT 250; 홑낫표는 저자 주)라고 작성한다. 회칙의 보다 독창적인 구절 중 하나에서, 교황은 용서가 망각을 수반한다고 확인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거나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때 용서「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용납하거나 정당화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때 용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잊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용서 「할 수 있습니다.」” (FT 250; 홑낫표는 저자 주)

  여기서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서, 형제적 사회를 건설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을 볼 수 있다. 바로 용서이다. 즉, 자유롭고 아무런 대가 없는 내면적 행동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용서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교황은 용서 “해야만 한다”는 말보다, 용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용서에 대한 선택으로서 이러한 자세는 이상향이나 순전히 종교적인 질문이 아니다. 소모임, 국가, 또는 국제적 차원 등 어떠한 협정에서든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특정한 것을 용서하는 결정을 언제나 내포한다.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용서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모든 정책의 뿌리에 있다.

  우정

  프란치스코는 우정을 되돌아보며, “황홀한 법”이라 부르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존재의 성장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마음의 내면으로부터입니다. 사랑이 그 자체로부터 다른 이를 통하여 개인이 나오게 할 때 유대를 만들고 존재의 범위를 넓힙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지어졌고 우리 각자 안에는 ‘「황홀」한 법에 대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법은 다른 이들에게서 존재의 성장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든, 참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약하여 나올 차례를 결정해야 합니다.’” (FT 88)

  이것이 바로 더욱 고귀한 우정의 형태가, 스스로 이루게 하는 마음에 머무는 이유이다. 부부의 결속과 우정은 그것들과 관련한 마음을 열게 하면서, 우리가 모든 이를 맞아들일 때까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게 한다. (FT 89 참조). 우정의 보다 고유한 특징은 이와 같이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 타인의 삶에서 보다 나은 것을 찾도록 자극한다.

  “우리가 관계 맺는 이 방식을 길러야만,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적 우정과 모두에게 열린 형제애가 가능할 것입니다.” (FT 94)

  보다 나은 정치와 모든 종교의 더 나은 측면

  이처럼 내면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이, 보다 나은 정치를 구축하고 모든 종교의 더 나은 측면 간에 대화하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작성한다.

  “모든 사람을 형제나 자매로 인식하고 모든 이를 포함한 사회적 우정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실제 가능성이라 보장할 수 있는 효과적 경로를 찾아 내는 결정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어떠한 임무라도 사랑의 또 다른 훈련이 됩니다. 각 개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를 위한 형제애와 정의의 사회적 흐름에 생명을 주기 위해 다른 이들과 통합할 때, ‘보다 넓은 사랑과 정치적 사랑의 마당’에 들어갑니다. 그 핵심이 사회적 사랑이라 볼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를 따라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다시 한 번 재평가하도록 초대하고 싶은 정치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소명이고 사랑의 보다 값진 형태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정치가 공동선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FT 180)

  다양한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피조물로서 모든 사람의 의견으로부터 대화에 초점을 두고서 이어 나간다. 시작을 위해 이것은 언제나 모든 종교가 내어놓을 게 있는 점을 확인한다.

  “형제애의 건설과 사회 내 정의의 수호를 위한 값진 공헌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간의 대화는 외교, 예의 또는 관용을 위한 것뿐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주교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대화의 목표는 우정, 평화, 조화를 이루고 가치와 도덕적이며 영적 경험을 진리와 사랑의 정신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FT 271)

  회칙 8장 “우리 세계 안에서 형제애를 위한 종교들”에서는 특수한 방법으로 조망한다. 이는 샤를 드 푸코가 알제리의 베니 아베스(Béni Abbès)에서 은수 생활을 할 때 유목민들과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맞아 들이던 상황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때 드 푸코는 “‘형제애 (그는 그의 은수 생활하는 곳을 이렇게 불렀다)’ 안에서 언제나 겸손하고 온화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나자렛 성가정에서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 온화함, 겸손, 자신을 낮춤, 사랑,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12)

  희망에 반응하기

  프란치스코가 “반응”이란 단어로 밑에 깔린 자신의 의도를 표현한, 회칙 6항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 마무리할 수 있다.

  “저는 이 사회 회칙을 성찰에 대한 겸손한 기여로 넘깁니다. 현재 직면한 다양한 방식은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말에 국한되지 않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의「새로운 꿈과 함께 반응」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FT 6; 홑낫표는 저자 주)

  사방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 위기의 거대한 규모에 반응할 필요가 있다. 교황은 말이 아니라 새로운 꿈으로 반응하도록 초대한다. 그 꿈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샤를 드 푸코가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씨앗을 자신들 안에 깊이 담고서, 작은 몸짓 안에 실현할 수 있었던 꿈이다.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예 하나를 제안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에 관대하게 반응한 많은 보통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최근의 세계적 대유행에서, 우리는 많은 친구들과 여행의 길동무들을 되찾고 그들의 진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반응하였습니다.” (FT 54)

  그의 회칙에 관하여 교황은 “형제적 사랑에 대한 교리를 정리한다고 내세우지 않지만, 그 보편적 차원에 대해 그리고 모든 이를 향한 개방에 대해 멈추어 섭니다.” (FT 6)라고 밝힌다. 국경을 넘어 넓어질 수 있는 이 사랑은 “우리가 모든 도시와 모든 국가에서 ‘사회적 우정’이라 부르는 것을 기반” (FT 99)으로 한다. 그리고 사랑이 “진실할 때, 사회 안에 대한 이 사회적 우정은 진정하고 보편적인 개방 가능성의 조건” (FT 99)이다. 이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그가 멀리 있을지라도 그가 가까이 있는 것만큼’ 다른 이를 사랑하는 이는 복됩니다.” (FT 1)라고 선포한 문장에 포함된 역동이다. 즉, 지정학적, 이념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멀리 있는 만큼 보다 더 가깝다.

  “모든 형제들”은 친구 사이에 대화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에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고 열중하게 하는 중요한 의제를 다룰 때, 정답에 도달하는 것보다 친구나 형제처럼 이야기하는 태도에서 솟아 나오는 구체적 희망에 관심이 간다.

  “(프란치스코가 화두를 던지는 그의 어투에서 말하듯이) 저는 희망에 초대합니다. 그 희망은 ‘’구체적 상황과 삶이 놓인 역사적 조건에 관계 없이, 인간 실존의 깊은 곳에 뿌리 내린 현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희망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목마름, 열망, 충만함을 향해 차오르는 갈망, 실현된 삶, 위대한 것과 마음을 채우는 것에 비추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 선함과 아름다움, 정의와 사랑 같은 위대한 것들을 향해 영혼을 드높입니다. […] 희망은 대담합니다. 그것은 삶을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하는 위대한 이념들에 터놓기 위해 개인의 안락함, 시야를 좁게 하는 자잘한 안전과 보장을 넘어서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는 희망 안에서 걸어갑니다.” (FT 55)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희망을 불어 넣는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샤를 드 푸코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가톨릭 저술가 마들렌 델브렐(Madeleine Delbrêl)은 드 푸코에 대하여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그는 홀로 많은 대립들에 있어 일치를 이룹니다. […] 그리고 사랑의 교차로에 뿌리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 그는 사랑의 양극을 일치시킵니다. 바로 이웃과 온 세상입니다.”13)


1)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Fratelli tutti, sulla fraternità e l’amicizia sociale [모든 형제,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관하여], 2020. 10. 3. 본고에서 회칙은 약어 ‘FT’로 표시한다.
2) 2020년 5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청으로 하여금 복자 드 푸코의 시성 관련 교령 공포를 인가하였다.
3) 교황 선출 이전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젊은 교리 교사들에게 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성부의 사랑 가득한 현존에 대한 발걸음은, 무한한 신뢰와 함께 그분께로 내어 맡길 줄 압니다. 마치 성녀 소화 데레사나 샤를 두 푸코 수사가 어떻게 하는지 알았던 것처럼요.” (J. M. Bergoglio, Discorso all’Incontro arcidiocesano di catechesi [대교구 교리교사총회 연설], Buenos Aires, 11 marzo 2006, inNei tuoi occhi è la mia parola: Omelie e discorsi di Buenos Aires 1999-2013 [나의 말은 그대의 눈에 –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절 강론과 연설 모음집], Milano, Rizzoli, 2016, 413 s).
4) Charles de Foucauld, Scritti spirituali [영적 수기], Assisi (Pg), Cittadella, 1968, 69.
5) Ibid., 182.
6) Ibid., Escritos espirituales [영적 수기], Madrid, Studium, 1964, 124. www.iesuscaritas.org/wp-content/uploads/2018/10/kupdf.net_escritos-espirituales- carlos-de-foucauld.pdf
7) Ibid., Scritti spirituali, cit., 199.
8) Ibid., 90; 93.
9) Francesco, Non fatevi rubare la speranza. La preghiera, il peccato, la filosofia e la politica pensati alla luce della speranza [희망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 희망에 비추어 고찰한 기도와 죄, 그리고 철학과 정치], Milano, Mondadori, 2013, 179s.
10) Charles de Foucauld, Opere spirituali. Antologia [영적 저술 선집], Milano, Paoline, 1961, 538.
11) Ibid., Escritos espirituales, cit., 144.
12) Ibid., Opere spirituali. Antologia, cit., 546.
13) M. Delbrêl, «Perché amiamo il padre de Foucauld 우리는 왜 푸코 신부를 사랑하는가», in Che gioia credere!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Torino, Gribaudi, 1969, 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