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와 예수회원들

Dante e i Gesuiti

© La Civiltà Cattolica, Q. 4089, 7 Nov 2020 IV, 291-296
쟝도메니코 무치 Giandomenico Mucci 신부 (예수회)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광주대교구) 옮김

1965년 단테(1265-1321) 탄생 700주년 행사들이 진행되는 동안, 본지는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예술성에 대한 예수회원들의 태도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적 상상력으로 널리 퍼진 오해를 해소하고자 두 개의 기고문을 발표하였다.1) 그 오해는 18세기 저명한 예수회 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사베리오 베티넬리Saverio Bettinelli의 단테 비평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 이후로 이탈리아 문학사 입문서라면 거의 예외 없이 그의 부정적 비평과 이를 성급하게 되풀이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늘 넘쳐났다. 그리하여 수세기 동안 마치 예수회원들이 단테를 파문했다는 듯이, 한 회원의 의견이 수도회 전체 입장으로 여겨졌다.

사실 예수회 학교들에서 단테는 학생들에게 고대의 고전 작가들처럼 널리 추천되는 저자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학사일정에서 이탈리아 문학 수업에 배정된 자리가 상당히 축소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도 이른바 심화학습반Accademie을 형성한 선발된 젊은이들 모임에서는 구성원들이 향후 단테 강독lecturae Dantis을 고려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신곡을 읽는 것이 허용되었다.

호교론적 목적

예수회 학교들과 대학들이 꽃을 피우던 그 시기에, 예수회 스승들은 단테의 시를 학생들에게 권고하기를 주저했을 수도 있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교황제 자체를 반대하고 비판하며 서방 그리스도교의 상처를 부추기던 시기에, 실랄한 문체로 몇몇 교황들의 결점과 약점들을 고발하는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들이 그 시대 젊은이들의 사유에 가장 유익한 영양분처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때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는 예수회에서 단테 전문가요 예찬론자들 중 한 명이었는데, 호교론적 목적으로 단테 연구를 시작하면서, 단테 문학의 가치와 그 저자의 완벽한 가톨릭 정통교리, 그리고 때로는 예언자적 태도를 지닌 정치적 예리함을 간파하였다. 시인은 이 예리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에 대한 기대를 열정적으로 표현했는데, 그 기대는 순전히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교황들의 행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벨라르미노는 온전히 시적인 재능에만 바탕을 둔 단테의 해석을 추정함으로써, 단테를 교황의 적이요 교회의 적으로 보고, 그가 마니교도이자 카바라교 신도로서 명백한 진짜 단어 의미를 숨기려고 밀교적 용어를 사용하는 비밀교단 구성원이었을 것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했다2). 그러므로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의 호교론적 방법이었다. 벨라르미노는 단테를 문예의 스승으로 칭송함으로써 시인을 변호하였고, 동시에 신앙의 교도권을 부정하려 했다는 단테의 혐의를 풀어줌으로써 교황권에 대한 호교론도 지켰다.

예수회원들은 종종 단테와 관련하여 이 방식을 거듭 사용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이탈리아 국가 통일을 향한 자유주의적 열망이 단테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교황들의 세속적이고 영적인 권력에 반대한 자유주의자들이 단테의 반교황적 독설들을 자신들의 투쟁에 적합한 의미로 해석했을 때, 신곡에 친숙했던 본지 창간인 죠반니 바티스타 피안치아니Giovanni Battista Pianciani신부와 카를로 마리아 쿠르치Carlo Maria Curci는 시인의 정통성을 옹호했다. 쿠르치는 최소한의 해설을 담은 – 오늘날 흔히 말하는 포켓판– 대중을 위한 [단테] 시집을 기획 출판하여 “별장에서나 산책이나 여행하면서” 가지고 다니며 부지런히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수회원들이 단테를 인정한 애정과 그 중요성에 대한 증거로 17세기 두 명의 유명한 예수회원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다니엘로바르톨리Daniello Bartoli 신부는 레오파르니Leopardi가 “이탈리아 산문의 단테”라고 불렀는데, 그는 단테적인 개념과 표현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기를 좋아했으며, 카를로 다퀴노Carlo D’Aquino 신부는 신곡 거의 전체를 라틴어 운율로 번역했다3).

예수회 역사가들

예수회 문학사가들 가운데에서 우선,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콰드리오Francesco Saverio Quadrio를 언급해야 하는데, 그는 18세기 7권으로된 『모든 시의 역사와 시상』 Della storia e della ragione d’ogni poesia 의 저자이다. 이 작품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서정시와 희곡, 서사시의기원과 성격, 역사에 대해 탐구한 일종의 세계문학 대백과사전이다. 이 방대한 저술 속에서 단테는 각 권마다 서정시canzoni과 서사시ballate, 단시sonetti로, 그러나 무엇보다 신곡Commedia으로, 그리고 그 작시와 그 초고 역사로 등장한다.

그리고 또 다른 예수회원인 지롤라모 티라보스키Girolamo Tiraboschi는 기념비적인 『이탈리아 문학사』Storia della letteratura italiana 저자인데, [19세기 저명한 시인] 포스콜로Ugo Foscolo와 [문학평론가] 데 상티스Francesco De Sanctis가 높이 평가했다. 단테는 거기에서 “매우 왕성한 상상력, 날카로운 재치, 때로는 고상하고 감상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스타일로서,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황홀하게 하며, 회화적인 형상들, 강한 독설, 부드럽고 열정적인 태도, 그리고 다른 비슷한 장식들은, 이 시(詩)가 장식된 곳에서는, 그 안에서 만나는 결함이나 오점들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라고 칭송되고 있다.

그리고 사베리오 베티넬리Saverio Bettinelli의 악명높은 『베르길리우스의 편지Lettere Virgiliane가 등장했다. 그에 대해 빈첸소 몬티Vincenzo Monti는 소심한 복수로 “여기 오랫동안 살았던 베티넬이 누워있다. 자신이 쓴 것이 잊혀지는 것을 보려고”라고 썼다. 그러나 베티넬리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예언자였다. 왜냐하면 18세기의 이 예수회원은, 단테에 대한 불편한 혹평으로나 그의 방종과 과장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 이탈리아 문화 안에서 장려된 개혁으로 인해 문학사에서 얻은 공적으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4)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베티넬리의 반단테적인 입장은 자신의 개인적 확신을 표현한 것이지, 예수회 전체 입장을 표명한 것이 아니다. 사실 베티넬리가 자신의 문학적 비행을 저지르자마자 장상들은 그로 하여금 르마 귀족대학의 교수직과 학회에서 물러나 베로나 근방의고립된 별장에서 영신수련 과정을 지도하도록 파견했다. 프랑스 예수회원 몇 명은 베티넬리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프랑스에서는 저명한 반단테주의자인 볼테르Voltaire가 군림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후의 라마르티네Lamartine에 비견되는 사람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르길리우스의 편지』 가 체사로티Cesarotti·죠비오Giovio·베리Verri의 호평을 받고 있었고 그 이유는 납득이 된다.

단테 예찬론자들 가운데에서 언급되어야 하는 18세기의 또 다른 예수회원이 있는데, 안드레아 루비Andrea Rubbi이다. 베네치아 사람으로서, 56권으로 된 『이탈리아 시문집』Parnaso italiano의 저자이다. 그 중에 3권에서 신곡, 단테 생애와 작품목록, 그와 미켈란젤로 비교등을 다루고 있다. 19세기 중엽에는, 오르비에토Orvieto 대학에서 문학교수로 있었던 발레리아노 카르델라Valeriano Cardella 신부가 학생들교재로 신곡의 시편들을 정리하는 작은 책자를 출판하면서, “이 기적적인 시 안에 담긴 지혜”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도록 학생들을 권고했다.

예수회 해설가들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예수회 안에는 신곡 전편을 해설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탈리아 예수회원들이 단테에 대해 지녀온 관심을 증거로, 그 중에 몇 명만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전에 그들에 앞선 18세기의 저명인사를 적어도 개략적으로라도 소개해야겠다. 이 시에 대해 폼페오 벤투리Pompeo Venturi 신부가 쓴 해설서인데, 1870년까지 최소 30판(版) 이상을 출판했다. 이 해설서의 편집사는 상당히 괴로운 작업이었는데, 이를 알고자 하는 이들은 몬드로네Mondrone가 한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여기서는 벤투리의 작품은 비코Vico의칭송을 받을 만했고, 크로체Croce는 이 예수회원의 작업에서 “비코가 예찬한 모든 것들이 들어있고, 그가 간과했음을 칭찬할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들은 모두 빠져 있다”5)고 인정했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벤투리 이후 한 세기 반이 지난 후, 죠반니 코르놀디Giovanni Cornoldi 신부의 신곡 해설서가 출판되었다. 그 시기는 레오 13세 교황이 가톨릭 학교들에서 토미즘을 복원하던 중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로마에 단테 학당을 설립했던 시기이다. 반대편에서는, 이 시를 가지고 교황권에 대한 반대의 도구로 만들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이 시인의 독설의 의미를 각색하면서, 프리메이슨이 사파엔자Sapienza 대학에 비견되는 강좌들을 개설해서, 이를 카르두치Carducci에게 제공했는데, 그는 프리메이슨이면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보비오Bovio 장관의 이름으로 격려해준 프리메이슨의 위대한 스승 아드리아노 렘미Adriano Lemmi에게, 집행부가 이해한 목적에 동의하지말라고 응답했다. 그것은 단테가 완벽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 측에서는 신곡을 그의 위대한 저자의 확실한 정신에 따라 해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임무는 코르놀디가 수행했는데, 그는 본지 편집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열렬한 토마스주의자로서, 자신의 해설서를 작성하면서, 철학적, 신학적, 역사적, 윤리적, 정치적 금욕적 입장을 밝혔지만, 아마도 단테주의적 해석이 논쟁하는 문제들에 관해 과도하게 확장되면서그의 작업이 학생들에게는 적합하지 않고, 오히려 단테주의자들에게 유익했고, 그들은 그 작업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약 10년 후 쯤, 그레고리안 대학 신학자 도메니코 팔미에리Domenico Palmieri 신부의 해설서가 나왔는데, 토미즘적 철학 경향이 아니었다. 3권으로 구성된 이 해설서에서는 저자의 관심이 시인 단테에게 직접적으로 집중되지 않고, 그보다는 그의 가톨릭 신앙과 반교황주의, 그리고 다른 교의적 문제들과 중세의 위대한 철학적 경향에 기울어져 있어서, 이 해설서는 즉시 단테주의자들간의 대화에 기여했지만, 교재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9세기에 본지Civiltà Cattolica에 등장하는 단테 연구자들 가운데, 카를로 피치릴료Carlo Piccirillo와 프란체스코 베라르디넬리Berardinelli를기억할 수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본지에 정기적으로 발표된 단테 관련 기고문들을 언급해야 한다. 그리고 티토 보타지시오Tito Bottagisio 신부가 있는데, 그는 바티칸 문서고에서 교황들의 요약기록에 관해 연구하면서, 보니파시오 8세가 첼레스티노 5세 교황·단테· 피렌체·필립 5세 미왕Filippo il Bello과 맺은 관계들을 연구하여, 단테의 공격과 그의 해석가들 중 스카르타찌니Scartazzini의 공격에 대항해 그 교황을 옹호하려 했다.

20세기에는 본지Civiltà Cattolica의 집필단의 일원이요, 저명한 단테 전문가로서 오늘날까지 전문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죠반니 부스넬리Giovanni Busnelli (1866-1944)가 있다. 그는 가장 저명한 단테주의자들–플라미니Flamini·징가렐리Zingarelli·바르비Barbi·반델리Vandelli·그랍만Grabmann·파로디Parodi·만도넷Mandonnet·피에트로보노Pietrobono·도비디오D’Ovidio·토라카Torraca·포레나Porena 등–에게 친구요동료였고, 필요할 때에는 그들의 해석에 적(敵)이 되었다. 문학분야에서 위대한 지적 재능을 갖춘 그는 특별히 포스콜로Foscolo·레오파르디Leopardi·만조니Manzoni를 공부하였으나, 전공분야로는 단테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이는 시의 주석보다는, 언어학적·철학적·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이탈리아와 외국에서도 단테 관련 모든 출판물들이 부스넬리의 관심과 심미적 비판 및 광범위한 문화적 정보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단지 다른 이들의 연구를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기여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부스넬리는 본지La Civiltà Cattolica와 단테 정기간행지il Giornale dantesco의 통상적 협조자였다.

때로는 주제별, 크기별 서적들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 실제 저서들과 요약본 중에서, 부스넬리는 자기 시대에 단테 연구자들이 토론한주제들의 많은 부분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집중적으로 작업을 했고, 또 그의 각별한 준비를 잘 드러내 준 작품은 『향연』Convivio 로서, 쥬세페 반델리Giuseppe Vandelli와 함께 해설했고, 현자인 미켈레 바르비Michele Barbi가 서문을 썼으며, 1934년 르모니에Le Monnier가 두권으로 출판하였다.

『향연』은 온갖 사색적 문제로 가득한 중세의 교훈적 작품으로 단테의 저술 중에서도 연구자들 정서와 관심에서 가장 멀게 느껴졌던것이다. 그 작품에 이미 간헐적으로 다양한 저서들을 헌정했던 부스넬리는 『신곡』이 그에게 일으켰던 흥미보다 더 작지 않을 관심을그것에 드러냈고, 그것의 원천을 알고 있었으며, 시인의 세계를 가깝게 느꼈다. 오늘날에도 2권의 해설서의 적어도 2/3를 차지하는 매우조밀한 문단들을 훑어보는 이는 얼마나 풍부한 박학함과 학식이 거기에 응축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예수회원이 반델리와 함께 협력하며, 1925년부터 작업한 비판서의 준비는 두 명의 단테학자들의 풍부한 서신왕래를 통해 이어졌고, 이는 또한 단테 본문의 언어학적 재건에 있어서, 부스넬리가 수행한 부차적이지 않은 부분들의 기록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 논고를 3세기 전의 베티넬리에서 출발하여, 단테에 관한 그의 의견과 함께, 위대한 피렌체인의 인물과 예술에 대해 예수회가 갖고 있다고 추정되는 혐오감에 대한 비방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18세기에 예수회 안에서 흥미를 이끌었던 잘 알려진 역사적 추이들과, 강한 적들과 허약한 친구들과 결합된 힘으로 이냐시오 회의 일시적 소멸로 이끌었던 것들이, 이런저런 비방들이 더 크게 자라난 토양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침전되고, 집단적인 무의식 안에서, 그 때 있었던 순전히 부차적이며 주관적인 에피소드들에의해 객관적 진리의 색깔과 옷을 입게 되는데, 이 진리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이들을 최고 소박한 현실로 되돌려 버릴 비판적인 검토를받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주어진다.

이 글은 이탈리아 예수회원들의 끊임없는 단테 칭송을 언급하며 [올해 2021년] 단테 서거 700주년을 맞이하여 저명한 예수회원들의 연구를 통해 자신의 예술로 교회와 가톨릭 신앙을 밝혀준 시인에게 쏟은 관심과 경의을 알리고자 했다.


1) Cfr D. Mondrone, «Dante e i gesuiti»(단테와 예수회원들), in Civ. Catt. 1965 II 535-547; 같은 이, «Gesuiti studiosi di Dante»(단테를 연구하는 예수회원들), 같은 곳 1965 III 119-132. 이 두 개의 논고에서 우리가 인용한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소식들을 뽑았다.
2) Cfr A. Valensin, Il cristianesimo di Dante(단테의 그리스도교 사상), Roma, Paoline, 1964, 11 s.
3) Cfr P. Chiti, «Un insigne latinista ammiratore e traduttore di Dante. Il P. Carlo D’Aquino (1654-1737)»(단테의 찬양가요 번역가인 저명한 라틴문학자. 카를로 다퀴노 신부), in Civ. Catt. 1960 I 250-267.
4) Cfr G. Natali, Il Settecento(18세기), Milano, Vallardi, 1929, 1157.
5) B. Croce, «Il “Giudizio su Dante” di G. B. Vico e il “Commento” di Pompeo Venturi»(G. B. 비코의 “단테에 관한 판단”과 폼페오 벤투리의 “해설서”), in La Critica 25 (1927) 407-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