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적인 교육협약의 회복

Ricostruire il patto educativo globale

© La Civiltà Cattolica, Q. 4087, 3 Ott 2020 II, 3-16
조반니 쿠치Giovanni Cucci 신부 (예수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옮김

  오래 전부터 생겨난 계획

  2019년 9월 12일, 교육협약을 시작하기 위한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5월 14일에 여러 차원의 (학문적, 제도적, 사목적 및 사회적)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을 로마로 초청하여 함께 통합적인 교육협약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 계획은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인하여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 전염병 창궐은 교황의 요청을 더욱 절실한 것이 되게 했다. 교육이 형제애, 평화, 정의를 이룩하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0년 10월 15일 14시 30분(로마 시간)에,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고 바티칸 통신의 유튜브를 통하여 직접 중계되는 화상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이 회의에서는 교황의 영상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고, 창의성을 갖고 더 멀리 바라보기 위하여 국제적인 증언과 체험들을 나눌 것이다.1)

  지난 몇 년 동안 교황은 여러 차례, “공동의 집”을 돌보기 위하여 교육적 차원에서 이러한 협력이 필요함을 상기시켜왔다. 예를 들어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22항과 87항)과 회칙 『찬미받으소서』(215항과 220항), 그리고 2020년 1월 9일 교황청 주재 외교단에게 행한 연설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모든 변화는 교육적여정을, 인간적이고 개방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교육의 마을을 건설하는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한 마을은 인격을 중심에 두고, 장기적 계획으로 창의성과 책임감을 육성해야 하며, 공동체에 봉사하는 데에 투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폭넓은 삶의 경험과 배움의 과정을 포괄하고, 청소년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그들의 인격성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해 주는 교육 개념이 필요한 것입니다.”2)

  교육은 또한 이탈리아 주교단이 2010-2020년의 사목을 위하여 택한 기본 주제이기도 하다.3)

  교육의 실패를 보여주는 극적인 지표들

  언제나 교육을 위해 중요한 자리가 되어 온 장소들은 (특히 가정, 기관, 학교) 오늘날 깊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해 있는 현대 문화가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성인들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세대 간의 협약이 점점 더 심각하게 깨어지고 있다.4) 교황은 홀로 내버려져 있고 점점 더 힘겨운 삶의 리듬을 따라가야만 하는 부모들의 어려운 상황과 교사들(“언제나 낮은 처우를 받고 있는”)의 어려운 임무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분열은 서양의 인구 붕괴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여러 해 전부터 세계에서 거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이탈리아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출생수/사망수의 비율은 67/100이다 (전년대비 인구 212,000명 감소. 10년 전에 이 비율은 96/100이었다). “1918년 이래로 이탈리아에서 이 비율이 이렇게 낮은적은 없었다.” 자연적인 세대 교체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5) 또한 그 신생아의 5분의 1은 외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이는 우려되는 현상이며 또한 시대적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다. 인구 위기는 언제나, 더 전반적인 문명의 위기를 보여주는 첫 번째 표지가 되어 왔다. “구대륙”은 점점 더 “늙은 대륙”이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상에서 오직 구대륙에서만, 노인 수가 어린이 수를 넘어선다. “UN의 인구국에 따르면, 2050년에는 어린이들이 이탈리아 인구의 2.8%에불과할 것이다. 14세기에 팬데믹은 이탈리아 인구의 80%를 감소시켰다. 21세기에는 선택에 의하여 인구가 줄어들고있다[…]. 워싱턴의 미국 기획 연구소의 인구 전문가인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계속된다면, 한세대 안에는 자신의 부모 외에는 혈연상의 가족이 없는 나라들이 있게 될 것이다.’”6) 출생 수 감소는 다른 우려스러운 문제들을 수반한다. 한 사회에서 자녀들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음을 보여 준다. 다른 이들 안에서 삶을 계속하려는 뜻이 없고, 특히 후대에게 전해줄 아름다운 어떤 것이 있다는 의식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교육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삶을 가치 있게 해 주는 지혜의 유산을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하기 어려워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미래는 계획과 희망의 장소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두려움과 걱정의 대상이 된다. 복지가 증진된다고 해서 삶의 질이 개선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집착하는 경향을 커지게 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2018년 1월 18일, 영국의 테레사 메이 수상이 “고독부 장관”을 임명하기로 한 결정은 매우 의미가 깊고 염려스럽다. 이런 일은 역사상 전례가 없다. 메이 수상은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많은 이들에게 고독은 현대 생활의 슬픈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눌 이가 없는 모든 이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고자 합니다.” 영국 적십자의 자료에 따르면, “인구 6560만 명 가운데 9백만 명 이상이 언제나 또는 자주 외롭다고 느낀다고 말한다.”7)

  미국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행한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인 외로움의 느낌은 과체중보다 두 배나 더 건강에 해로우며, 알콜 중독이나 하루에 담배 15개피를 피우는 것만큼 해롭다. 연구자들은, 외로움이 통계적으로도 입증할 수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서 그 전파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계 보건 기구는, 10년(1987-97년) 사이에 세계에서 우울증 환자의 수가 300% 증가했다고 밝힌다. 2005년부터 2015년 사이에는 그 숫자가 18% 더 늘었다. 이것이 15세부터 40세 사이의 연령층에서 장애의 가장 큰 원인이 되며, 매년 430억 달러의 의료비 지출을 초래한다. 과거에는 30세 정도에 처음으로 우울함에 빠지는 시기가 나타났다면, 지금은 13세에 나타난다. 그 결과로 자살 행동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2013년에 842,000명이 자살을 시도했으며 그 숫자는 1960년에 비하여 60%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층에서 증가율은 400%였다.8)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통계가 역사상 가장 복되다고 여겨질 만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전쟁, 굶주림, 흉년이나 악천후를 겪지 않은 이들이다. 서양 사회는 수명, 생존율, 식료품 수급, 의료, 교육 기회, 행동의 자유, 권리의 보장, 환경 보전과 사생활 보호 등 여러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엄청난 성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행을 느끼는 비율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우리는 외로움으로 병들고 있는 세대이다. 이 때문에도, 통합적 교육 계획으로 최근 세대에서 사라진 학교와 가정 사이의 협약을 되살리는 것이 절실하다.

  교육의 특성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로 인한 봉쇄 직전에 열린 회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교육”이라는 단어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단순히 개념의 전달이나 추상적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교육한다는 것은 오히려 “머리의 언어를 마음의 언어와, 손의 언어와 통합하는 것이다. 학생이 자신이 느끼고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통합”9)으로서 가정, 학교, 제도와 모두 연관되는 협약이다.

  (교육한다는 것은 “머리의 언어를 마음의 언어와, 손의 언어와 통합하는 것”)

  이러한 통합적 전망은, 상당히 사라지기는 했어도 서양에 아직 남아 있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교육과정을 요약하면서, 그가 자신의 청소년기를 특징지었던 상반된 두 세계와 접하면서 자랐다고 말했다. “내가 철학적인 글들을 읽을 수 있기 훨씬 전에,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실재가 나의 양성을 결정지었다. 아이였던 나의 상상력은 무엇보다 켈트족의 구전 문화로 길러졌는데, 그것은 농부와 어부, 시인들과 음유시인들의 유산으로서 이미 거의 사라진 것이었지만, 내가 만났던 몇몇 노인들은 자신들이 그 문화에 속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문화에서 중요한 점들은 충실함, 친족과 또한 땅과의 유대였다.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하는 것을 뜻했다. 각자의 신원은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10)

  계몽주의적 근대의 특징인 “또 하나의 세계”는 (그리스적 의미의 teoria가 아닌) “이론”을, “이야기”에 반대되는 비판적이고 인과적인 지식을 특징으로 한다. “근대 세계는 이야기가 아닌 이론의 문화였다. 그것이, 사람들이 도덕성 그 자체라고 여겨지게 하고자 했던 것의 기본 틀이었다. 우리에 대한 그 권리들은 어떤 특정한 사회 집단의 권리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인류의 권리였다.”11)

  맥킨타이어에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회복한다는 것은 근대가 얻어낸 것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관계들과 위대한 지혜문학적 서사들을 중시하는 것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이들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자리이며, 현대의 문제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들이 사라진 데에서 기인한다. 어렸을 때부터 인내롭게 되풀이하여 동화와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부모가 있었던 어린이들이 독서와 학습에서 더 뛰어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결합된 대화의 중요성은 미국 신시내티의 소아과 병원에서 3세부터 5세까지의 어린이 19명을 대상으로 했던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MRI 촬영의 도움으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린이의 뇌에서 특정 영역이 – 표상들을 만들어내는 영역이 – 활성화되고 “머리 속의 영화”가 생겨나 시각적으로 그 이야기를 그려내게 한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12) 이러한 과정은 성인들에게서도, 특히 소설이나 이야기를 읽을 때에 발생한다. 텍스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상들이 함께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 교육이 기술에 한정될 때에는 삶이 그 모든 표현 방식에 있어 점차로 무미건조해지는 위험을 가져온다. 이것이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웅변적으로 묘사했던 “인공 새장”이다. “모든 것이 기술적 과정에 포함된다. 독서의 기술, 씹는 기술도 있고, 모든 운동은 점점 더 기술적이 된다. 문화적 고무를 위한 기술도 있고, 모임을 이끄는 기술도 있다.”13)

  움베르토 갈림베르티Umberto Galimberti가 지적하듯이, 젊은이들이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의 밑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갈망과 모순들을 밝혀내며 사건들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이야기들의 부재가 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병들어 있으나, 그들은 자신의 병에 이름을 붙이지도 못한다. 정체성을 갖게 하고 삶을 해석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경험과 사건들이 한데 얽혀 있지만, 그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기획은 없다. 실상 감정과 갈망들은 생물학적 데이터가 아니며,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사, 사건, 모델들과 만나면서 인식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젊은이들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에서, 분리된 것을 다시 연결시키는 능력인 서사라는 소중한 임무에 관한 마리아 가브리엘라 페린Maria Gabriela Perin의 사상에 따라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이야기를 만드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자비 안에서 우리의 승리와 실패를 가지고 역설로 가득한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엮으십니다. 그 천의 뒷면은 우리 삶의 사건들처럼 엉킨 실들로 지저분해 보일 수있습니다. 아마도 이 뒷면은 우리가 의심 속에 머물러 있을 때에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피스트리의 앞면은 멋진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면입니다.”14)

  서사와 감정들

  근대는 “머리”와 “손”에만 머물면서 마음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정보가 엄청나게 증가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소중한 선이라 하더라도, 삶을 더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다. 이에 대한 평가의 기준들은 관계적이고 정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감정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 다른 이들,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진실의 한 요소가 된다. 또한 감정들은 불편함을 알려주는 비상 벨이기도 하다.

  성경의 지혜는 지식과 애정, 마음, 지성과 신앙을 긴밀하게 결합시킬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이를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들을 중시하는 서사들을 통하여 행한다. 감정들은 평가와 결정의 자리이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았을 때의 “기쁨”(마태 2,10),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제의 앞에서 느낀 “슬픔”(루카18,23), 빌라도가 예수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요한 19,8)을 생각해 보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주님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무엇보다 그분 말씀의 감정적 공명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러한 탐구는, 신앙인이든 그렇지 않든 삶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모든 사람과 대화하게 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또 그와 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마르티니Carlo Maria Martini 추기경이 “비신앙인들의 교좌”라는 강의들을 시작하면서 한 언급은 의미가 깊다. “내 안에 있는 비신앙인은 내 안에 있는 신앙인을 동요시키며, 또한 내 안에 있는 신앙인은 내 안에 있지 않는 비신앙인을 동요시킨다[…]. 우리 시대에, 인격적인 진실함으로 자신이 믿지 않는다고 밝히는 비신앙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인내를 가진 신앙인이 있다는것은 서로에게 매우 유익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성을 향한 자신의 길을 더 잘 걸어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방어 없이 아주 솔직하게 이러한 훈련을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고 솔직하지 않고 불만을 품은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게 유익할 수 있다.”15)

  그러나 어떻게 교육협약을 다시 세울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교육의 마을을 건설하기, 2) 내일은 오늘의 최선을 요구한다, 3) 봉사하도록 교육하기, 교육은 봉사하는 것.

  교육의 마을을 건설하기

  이는 가정, 학교, 종교 기관 및 사회 기관 같은 여러 “교육 주체” 사이에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형식적 및 비형식적 교육 과정에 영혼을 부여하기 위하여 협약을 맺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이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며 – 건전한 인간학에 따라 – 경제, 정체, 진보를 이해하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통합생태의 과정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인간들과 또한 주변의 실재와 맺는 관계 안에서 그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가 중심에 놓이게 되고, 버리는 문화를 거부하는 생활 방식이 제시된다.”16)

  이 협약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유감스럽게도 오래 전부터 깨어졌고, 이는 모든 차원에서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불관용, 인종주의, 폭력, 따돌림과 연관된 현상들이 퍼져 나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라. SNS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교육 과정에 필수적인 것인 수고와 점진성을 대체하는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양성이 단순한 클릭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순간에, 덫이 되어버릴 수 있다.

  심각한 경제 위기, 그리고 기후와 환경의 변화도 “버리는 문화”의 결과이며, 간과할 수 없는 경고가 된다. 코로나 19의 팬데믹과 연관된 상황들과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미친 그 영향들은, 각자의 책임과 능력에 맡겨진 공동의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인류 전체가 좋은 일에서나 나쁜 일에서나 함께 연관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 준다.

  세대 간의 협약을 회복시키는 것은 젊은이에게 자신의 깊은 갈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노인에게는 자신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삶의 기억이라는 귀중한 역할을 재발견하게 해 준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그러한 꿈에 뿌리내릴 때에, 젊은이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곧, 젊은이들은 자신의 지평을 넓혀 주고 자신에게 새 길을 보여 주는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들이 꿈을 꾸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은 지평을 바라보는 선명한 시야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부모님은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기억은 조부모가 우리를 위하여 지닌 꿈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조부모에게서 선물처럼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찬 꿈,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이 모든 꿈 가운데에 가장 최초의 꿈은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 꾸신 창조의 꿈입니다. 이 꿈은 모든 하느님 자녀의 삶에 선행하면서도 그 삶을 동반합니다. 세세 대대로 이어지는 이러한 축복의 기억은 우리가 생생히 간직하여 물려주어야 하는 소중한 유산입니다.”17)

  내일은 오늘의 최선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고, 가능성을 태워버리고 질을 떨어뜨리는 “모든것을 즉시”라고 가르치는 시장의 법칙에 이의를 제의함을 뜻한다. 그것은 가장 깊고 효과적인 변화는 신속하고 즉각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세대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교육은 시간, 점진적 단계들, 애정을 요구한다.

  인간 지성의 비밀은, 본성의 눈속임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 눈속임이란, 인간이 다른 생물 종들에 비하여 느린 발전과 성장 단계를 거쳐왔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 정신의 특출한 능력과 유연성의 기반이 되었고 그 정신이 지금 여기보다 더 큰 전망으로 이끄는 놀랍고 지극히 다양한 작용들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영국 작가 테렌스 핸베리 화이트Terence Hanbury White는 소설 『영원한 왕』에서 이러한 특별한 특성을 우화를 통해 표현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을 다시 쓴 것과 같다. “오래 전, 우주를 완성한 다음 하느님은 우주를 생물들로 가득채우려 하셨다. 그래서 많은 배아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각각 자라서 어떤 동물이 되기를 원하는지 물으셨다. 누구는달리기를 원했고, 누구는 날기를 원했고, 누구는 헤엄치기를 원했다. 크고, 작고, 빠르고, 느리고… 오직 한 배아만 말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에게, 어째서 아무 것도 택하지 않는지 물으셨다. 그 작은 배아는, 자신이 창조된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만들어졌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그 대답을 칭찬하시고, 그 배아에게 그가 어린아이로 남아있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가장 느리게 성장하기 때문에 상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고, 우주의 주인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놀면서 그는 다른 세상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정신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변형시킬 것이다[…]. 인간의 유년기가 길어진 결과 그의 뇌가 커졌다. 인간에게는 아직 여러 가지로 형성될 수 있는 기간이, 결정적인 시기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데, 다른 동물들에게서 이 기간은 몇 주 또는 몇 달에 그친다. 인간 배아는 용감하게 십여 년 동안 기능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자신의 뇌를 형성하기 위하여 머물러 있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진화를 통하여 부모의 인내로운 돌봄과 가족이 생겨남으로써 이러한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어린아이인 인간은 선에서나 악에서나 본성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는 인간 뇌를 구성하면서 느림의 기술을 선택했고, 다른 동물들에 있어서는 신속함의 기술을 선택했다.”18)

  배우기, 자신을 인식하기, 그리고 읽기는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느리고 단계적인 걸음이다. 여기에는 시간, 점진성, 열정, 타자와의 대화가 요구된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봉사하도록 교육하기교육은 봉사이다

  또한, 헌신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능력을 지니고, 교육협약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양성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모든 세대는[…]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가치들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의식 있고 자유로우며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미래 세대와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희망에 매우 깊이 뿌리를 둔 것이며 관대함과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19)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새로움의 물결에 따라 교육 프로그램들을 다루려는 것은 언제나 강한 유혹이 된다. 이들은 그 순간의 이념이나 유행들에 따라 형성되고, 영구적 유산에 대한 지식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10년 전 이탈리아 교회의 문화 계획에서는 이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 안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어떤 개념이나 생활 방식이든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적-경제적 자원의 힘이, 모든 인간적 요구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듯이 보인다. 욕구들은 권리가 되고, 미학은 윤리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으로 보인다.”20)

  모든 것이 차이가 없고, 동일한 차원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선택은, 그리고 선택하지 않는 것까지도, 분명 정확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역사는 그 결과들을 드러내며, 다음 세대들에게 그 계산서를 내놓는다. 교육 분야에서의 능력은 필수 불가결하다. 모든 길들이 같은 정도로 선택할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그 길들은 신기루로 밝혀지고, 젊은이는 너무 늦게,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이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 봉사는 교육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교육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복잡하고 광대하여, 적절한 도움이 없다면 그를 밀어내게 될 수도 있다. 번-아웃 현상은,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의와 순수한 지향에는 경험과 능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개방적이고, 책임감 있고, 경청과 대화와 숙고를 위한 시간을 찾으려 하고, 또한 가족과, 세대들과, 시민 사회의 여러 표현들과 관계망을 건설할 줄 알아 새로운 인본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21)

  교회의 봉사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도전을 증언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협약은 문화와 종교 사이의 새로운 대화를 요구한다. 그 대화는 특히 서양에서 여러 차례 단절되었지만,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봉사가 된다. 바오로 6세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끔찍한 단절을 지적했고, 그것을 “우리 시대의 비극”22)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사람들이 점점 교회에 무관심해지는 것을 탄식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마음, 정신, 손”의 만남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 문화가 ‘유동적’이고 단편화 되었으며 불안정성의 원천이라고 되풀이하는 것은,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문화가 변모하는 동안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왜 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그런 결과들에 제동을 걸지 못했던가? 우리가 고발을 할 때, 우리는 그 피해를 바로잡을 적절한 방책을 찾아냈는가?”23)

  마음, 정신, 손 사이의 대화는 특히 목자들의 양성에서 중요하다. 여기에서도 그 대화가 지녀야 할 중요성,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세 측면을 함께 결합시키는 “요체”로써 지녀야 하는 중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해 동안 주로 성추행을 포함한 여러 문제들을 겪는 사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 루카 연구소(미국 메릴랜드)의소장이었던 스티븐 로세티Stephen Rossetti 신부는, 이 센터를 찾은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발견했다. 그들이 겪은 문제나 경험들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의 영성 생활은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여정에 대해 훌륭하게 말할 줄 알지만, 그들의 말은 그들 자신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실상 그들의 영성 생활은 공허하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경우들에서, 사제들의 인간적 양성이 부족할 때에 그것이 교회와 사회에 어떤 피해를 가져오는지를 보게 된다.”24)

  새로운 사제 양성 지침은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서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통합적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는 양성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양성 지침에 관한 국제 회의를 마치면서, 믿을만한 교육자가 되기 위하여 이러한 측면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사제 양성에 대해서는 더 대화하고, 지방색을 극복하고, 공유된 선택을 하고, 함께 좋은 양성 과정을 실행하고, 멀리서부터 이렇게 중요한 임무의 높이에 맞는 양성자들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제 양성을 중시하십시오. 교회는 열정과 지혜로 복음을 선포하고, 재가 삶을 덮어버린 그 자리에 희망의 불을 밝히고 역사의 광야에 믿음이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제들을 필요로 합니다.”25)

  “교육의 마을”은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맡기를 배울 때에 건설된다. 옛 아프리카 전설에서는, 숲에 불이 나서 모든 동물들이 도망쳤을 때 작은 벌새만 부리에 물을 가득 품고 반대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이야기한다. 사자가 벌새를 조롱하며 외쳤다. “너 미친 것 아니니? 그 큰 불을 물 네 방울로 끌 수있다고 믿는 건 아니지?” 그러나 벌새는, “나는 내 몫을 할 뿐이야.”라고 말했다.26)

  교육협약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다. 자신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큰 불을 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후세에게뿐만 아니라 먼저 그들 자신에게 미래를 열어 줄 것이다. 연대성과 형제애는 고독과 삶의 괴로움에 대해 효과 있는 유일한 대책이다.


1) 이 행사는 가톨릭 교육성이 마련하였다. 6천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다니는 216000 개의 가톨릭 학교들과 110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는 1750개의 가톨릭 대학들이 가톨릭 교육성과 연관된다. 더 많은 정보는, www.educationglobalcompact.org
2) 프란치스코, 교황청 주재 외교단 신년 알현, 2020년 1월 9일. 또한, 참조. A. Spadaro, «Sette pilastri dell’educazione secondo J. M. Bergoglio», in Civ. Catt. 2018 III 343-357.
3) Cfr. 이탈리아 주교회의 Italiana, Educare alla vita buona del Vangelo. Orientamenti pastorali dell’Episcopato italiano per il decennio 2010-2020, 2010년10월 4일; G. Cucci, «Che cosa significa “educare”?», in Civ. Catt. 2012 III 483-495.
4) “오늘날에는 소위 ‘교육적 협약’이 위기에 처하고 깨어지고 있습니다. 가정, 학교, 국가, 세계, 문화와 문화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협약이[…] 깨어진다는 것은 교육하도록 부름받은 사회, 가정, 그리고 여러 기관들이 이 중요한 교육적 임무를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그럼으로써 여러 기초 기관들과 국가들까지도 이를 포기하고 그러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 “Education: the global compact” 참가자들에게행한 연설, 2020년 2월 7일).
5)Cfr www.istat.it/it/files//2020/02/Indicatori-demografici_2019.pdf
6)G. Meotti, «Culle vuote a occidente. La crisi di una civiltà che non genera più vita e va verso la sua consumazione», in Il Foglio quotidiano, 2012년12월3일; 참조. G. Salvini, «L’Italia diventa più anziana», in Civ. Catt. 2017 II 400-403.
7) «La May ha nominato un ministro per “battere la solitudine”», in Il Giornale (www.ilgiornale.it/news/mondo/gb-theresa-may-nomina-ministrosolitudine-1484127.html), 2018년 1월 17일.
8) 참조. 세계보건기구, «Depression» (30 gennaio 2020) www.who.int/mediacentre/factsheets/fs369/en
심층 고찰, G. Cucci, L’arte di vivere. Educare alla felicità (Milano, Àncora – La Civiltà Cattolica, 2019) 참조.
9) 프란치스코, “Education: the global compact” 참가자들에게 행한 연설, cit.
10) G. Borradori, Conversazioni americane, Bari – Roma, Laterza, 1991, 171 s.
11) Ivi, 172.12) 참조. J. S. Hutton et Al., «Parent-child reading increases activation of brain networks supporting emergent literacy in 3-5 years-old children: An fMRI study», in Abstracts Pediatric Academic Societies’ Annual Meeting (2015) (www.abstracts2view.com/pas/view.php?nu=PAS15L1_1355.8); L. Wehbe et Al., «Simultaneously Uncovering the Patterns of Brain Regions Involved in Different Story Reading Subprocesses», in PLoS ONE (2014) 9 (11): e112575. doi:10.1371/journal.pone.0112575; «Lettura e attività cerebrale», in Psicologia contemporanea, n.251, 2015, 36 s.
13)J. . Ellul, Il sistema tecnico. La gabbia delle società contemporanee, Milano, Jaca Book, 2009, 206.
14) 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CV), 2019년 3월 25일, 198항.
15) C. M. Martini (ed.), Cattedra dei non credenti, Milano, Rusconi, 1992, 5 s.
16) 프란치스코, 교육협약을 시작하기 위한 담화, 2019년 9월 12일.
17) CV 193-194항.
18) P. Legrenzi, «Declinazioni della lentezza», in Il Sole 24 Ore, 2014년 9월 14일. 참조. L. Maffei, Elogio della lentezza, Bologna, il Mulino, 2014, 21-23; T. H. White, Re in eterno, Milano, Mondadori, 1989.
19) 프란치스코, “Education: the global compact” 참가자들에게 행한 연설, cit.
20) 이탈리아 주교회의, 문화 계획 위원회 (ed.), La sfida educativa. Rapporto-proposta sull’educazione, Roma – Bari, Laterza, 2009, 2010, XIV.
21) 프란치스코, 교육협약을 시작하기 위한 담화, cit.
22) 바오로 6세,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선교』, 1975년 12월 8일, 20항.
23) G. Canobbio, «Leggere per formarsi», in La Rivista del Clero Italiano 96 (2015) 666.
24) S. J. Rossetti, «From Anger to Gratitude-Becoming a Eucharistic People: The Journey of Human Formation»,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 2004년 3월 26일강의 원고.
25) 프란치스코 교황, 성직자성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행한 연설, 2017년 10월 7일.
26) 참조. G. Ravasi, «Breviario», in Il Sole 24 Ore, 2020년 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