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생태, 경제: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COVID-19: UNA QUESTIONE ECONOMICA
Dalla globalizzazione alla localizzazione

  © La Civiltà Cattolica Q. 4091, 5 Dic 2020 IV, 431-442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회,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 편집자 일러두기: 조현철 신부님의 한글 원문이 영어와 이태리어로 번역되어 본지에 실렸다. 이태리어 제목과 일부 내용은 한글 원문 직역보다 의역이며, 한국어판에서는 이를 다시 번역하지 않고 한글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1. 코로나 이후, 어떻게 것인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코로나19 감염 발생 후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전’에 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듯, ‘이후’의 변화에 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르다.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코로나19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첫째, 코로나19 재난을 바이러스 감염병으로만 볼 수 있다. 이 경우, ‘이후’의 대책으로 효과적인 감염 방지와 치료를 위한 보건과 방역 대책 마련, 백신과 치료제 개발, 감염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경제 살리기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이전’의 일상으로 하루속히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바이러스 감염은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극복해야 할 장애로 간주된다. 한국 정부와 지자체도 이런 관점에서 코로나19 대책을 수립, 시행해왔다.

   둘째, 코로나19 재난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바이러스 감염의 창궐은 인간의 자연 파괴로 일어났다. 오늘날 자연생태계 파괴의 주요한 구조적 요인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탈규제 자본주의를 앞세워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찾아다니며 지구를 온통 헤집어 놓은 세계화 경제다. 이 과정에서 ‘성장지상주의’는 세계화 경제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렇게보면, 코로나19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단순한 걸림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진보와 발전으로만 여겨왔던 ‘경제성장’에 보내는 긴급 경고음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 재난의 근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극복할 대상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싸워야 할 것은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도구화하여 끝없이 이윤과 풍요를 쫓는 탐욕의 체제다. ‘이후’에 관한 고민은 ‘이전’에 관한 근원적 반성을 먼저 요구한다.

   첫 번째 관점에서 재난에 직접 대응하는 대책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의 관점에서나, 오늘날 벌어지는 생태 문제의 근원이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자연을 쥐어짜온 자본주의 경제에 있다는 점에서나, 코로나19에 근원적으로 접근하려면 두 번째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는 질병과 자연의 문제이면서 근본적으로 개발과 경제, 곧 사람의 문제다. 코로나19를 질병과 자연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놓치게 된다.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한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139항).

   2. 세계화와 바이러스 감염병

  코로나19 재난을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려면 바이러스 감염병의 창궐과 ‘세계화’globalization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세계화로 감염의 확산 속도가 크게 증가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 전염병은 대개 지역 단위에 머물렀다. 해상 무역의 전개로 전염병의 대륙 간 전파가 일어났지만, 여행 시간이 길어서 전염병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고속의 교통망으로 촘촘히 연결되었고, 바이러스 감염은 일단 발생하면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된다.

   세계화 경제는 ‘자본’의 효율적 투자를 위해 전 세계에서 규제를 철폐해왔다. 그 결과 무분별한 개발과 채굴 사업이 가능해졌고 자연생태계는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인간에 의한 자연생태계 파괴는 다양한 방식으로 바이러스 감염을 부추긴다. 일반적으로 환경오염은 병원균의 왕성한 번식의 온상이 된다. 과도한 개발로 서식처를 잃게 된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영역에 더 접근하게 되고, 바이러스와 인간의 접촉가능성도 커진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자연을 파괴해 개발한 곳에서는 인수공통 전염병을 지닌 동물의 개체 수가 2.5배 증가했다. 대규모 축산 공장은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여정의 편리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대규모 단일 경작과 벌목과 화재로 숲이 파괴되면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토착 생물의 텃세가 줄어들어 새로운 바이러스가 더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다. 산업화 이후의 지속적 경제 성장과 대량 생산·유통·소비·폐기의 생활양식이 불러온 기후변화는 바이러스 매개체인 동물의 개체수를 변화시켜 감염 발생을 부추긴다. 또한 지구 온난화로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거기에 묻혀 있던 수많은 종류의 바이러스가 풀려날 것으로 예상된다.

   요컨대, 인간이 바이러스를 불러들인 것이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공격하기 전에 인간이 먼저 자연에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윤의 극대화만을 노리는 세계화된 자본이 있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창궐을 제대로 막기 위해서는 방역과 보건 대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화 경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코로나 이후를 전망해야 한다.

   3. 세계화 경제

  세계화의 핵심은 ‘경제’에 있다. 세계화는 초국적기업과 국제 무역협정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단일 경제 체제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세계화 경제는 각종 국제 무역협정을 통해 국제적 분업에 기초한 자유무역을 강화했고, 이를 위해 각국의 산업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규제와 보호 장치를 철폐해왔다. 가장 큰 문제는 전체 세계 교역의 상당 부분은 ‘산업 내 교역’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상품을 동시에 수출하고 수입하는 것이다. 세계화 경제에서는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상품도 가격만 더 싸면 지구 반대편에서 수입하는 이른바 ‘미친 교역’crazy trade이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일어난다. ‘글로벌 산업농’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대형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수천 마일을 이동해온 많은 각종 농산품이 값싼 가격에 진열되어 있다. 외국산이 그 지역산보다 싸게 판매되려면 값싼 노동력과 자원 수탈 그리고 정부의 각종 보조와 특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초국적 기업들은 환경오염을 비롯하여 자기들이 지역에서 발생시킨 각종 비용을 가격에 포함시키지 않고 지역에 떠넘겨왔다.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찾아 이동하는 초국적 자본은 최대한의 이윤을 거두는 것 외에는 지역에 대한 관심이 없다. 지역의 노동과 자연 환경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자유무역의 기준인 ‘비교우위’에 따라 소수의 품목을 선택, 집중하면 다수의 다른 품목에 대한 대외 의존도가 높아져서 외부의 변화와 충격에 취약해진다. 비상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국 ‘식량’일 것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소수의 글로벌 곡물 기업이 세계 곡물시장을지배하게 되었고, 각국의 전통 농업과 농촌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우리나라의 식량 대외의존도는 심각한 상태를 넘어 한심한 상태다. 곡물자급률이 거의 300%에 육박하는 호주를 포함하여 평균 자급률이 101.5%에 달하는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평균 23%로최하위 수준이다. 식량자급률은 자급률 100%에 이르는 쌀을 포함해도 46.7%에 불과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쌀 주요 수출국인 베트남을 비롯한 식량수출국들이 수출 중단, 통제 조치를 취했고 국제 쌀 가격이 폭등했다. 여기에 가뭄이나 홍수로 식량 수확 자체가 줄어들면, 세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난 7월 중순에 한국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에서는 농업을 찾아볼 수 없다. 진보든 보수든 한국 정부가 농촌을홀대해온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에서 산업농이 차지하는 비중, 기후변화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국제적 단절에 의한 식량위기의 점증, 농업과 농촌의 생태적 가치와 기여 등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농촌은 이렇게 무시되었지만, 자동차 산업은 그린 뉴딜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린 뉴딜에서 비중이 가장 큰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사업은 20조3000억원을 들여서 전기차 113만대와 수소차 20만대를 보급할 예정이다. ‘현대차’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사업이다. 한국판 뉴딜에는 재벌과의‘딜’만 보인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세계화 경제는 환경 문제, 특히 기후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기후 대응과 세계화 경제 추진도 비슷한 시기에, 그러나 별도로 진행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이 시작되었다. 1992년 브라질의 리우 ‘지구정상회의’는 향후 기후 협상의 토대가 될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을 채택했고, 1997년에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었다. 비슷한 시기, 세계화 경제의 토대가 될 국제 무역협상이 진행되었다. 1992년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었고, 1995년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었으며2001년 중국이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국제 무역협상으로 자유무역 체제가 확립되자 초국적기업들은 자국을 떠나 값싼 노동력과 각종 규제가 느슨한 지역을 찾아 나섰다. 해외 생산이 급증하며 탄소 배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 세계의 굴뚝이 된 것도 바로 이때다. 생산과 소비의 거리가 크게 늘어나면서 장거리 ‘유통’이 주요 탄소 배출원이 되었다. 글로벌 ‘산업농’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글로벌 푸드 체인’의 부산물이다. 더구나 세계화 경제의 이념적 기반인 ‘신자유주의’는 세계 각국에서 민영화, 규제 완화, 공공지출 삭감을 관철하며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기후행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기후변화에 국제적으로 대응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경제 세계화를 추진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1)

   4. 세계화와정상 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코로나19 ‘이후’의 고민은 근원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찰스 페로Charles Perrow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개념도 이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해준다.2) 정상 사고는 “상호작용성 복잡성interactive complexity과 긴밀한 연계성tight coupling이라는 시스템의 속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고”다. 정상 사고는 자주 일어나거나 예측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속성상 예상치 못한 다발적 장애의 상호 작용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정상’인 사고를 말한다. 정상 사고는 현대 산업사회가 구축해온 “주요 시스템의 요소들이 고도의 상호작용성과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어난다.

   페로는 ‘스리마일 섬’ 핵발전소, 석유화학 공장, 항공기, 선박 등에서 정상 사고를 다루었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의 현실 또한 정상 사고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화의 진척으로 세계 전체가 수많은 하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복잡성과 긴밀한 연계성을 지닌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재난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세계화의 현실에서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고, 일어나는 것이 정상인 사고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바이러스로 보고 대응하는 것 못지 않게 바이러스 팬데믹의 가능성이 내재된 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변화의 노력이 중요하다.

   정상 사고를 막으려고 시스템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면 복잡성과 연계성이 증가되어 오히려 사고 발생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상 사고를 막으려면 시스템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정상 사고’로 본 코로나19 재난이 세계화에 보내는 경고는 분명하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세계적 재난은 ‘예측할 수 없지만 불가피한’ 정상 사고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우리가 막을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재난으로 가는 길이다. 안전장치만으로는 세계화에 내재된 위험을 막을 수 없다. 근본 대책은 세계화의 길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것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5. 지역화 경제

  코로나 ‘이후’는 세계화 자체를 ‘지역화’로 전환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지역화의 실체는 경제에 있다. 지역화는지역 간의 단절을 뜻하지 않으며, 지역화 경제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자립적 경제를 지향한다. 지역에서 필요한 것은 가능하면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지역의 자원으로 그 지역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경제는 없다.

   지역화 경제는 세계화 경제의 문제점을 대폭 해소할 수 있다. 첫째, 지역화로 상호의존의 규모가 세계에서 지역으로 줄어들고 긴밀한 연계가 느슨한 연계로 바뀌면서, 정상 사고의 성격을 띤 세계적 재난의 발생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다. 여기에 바이러스 팬데믹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 지역화로 생산과 소비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불필요한 국제 교역이 사라지고 원거리 유통의 감소는 수송 에너지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셋째, 농업 부문에서는 글로벌 산업농이 소농 중심으로, 화학농이 유기농으로 대폭 변화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어떻게 생산했는지 모르는, 지구 저편에서 온 ‘상품’이 아니라 자기 지역에서 나온 먹을거리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식량 확보가 가능해진다. 넷째, 이윤을 찾아 세계 곳곳을 배회하는 세계화 경제와 달리, 지역화 경제는 지역의 자연환경 보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지역의 자급 경제는 에너지 자급과 직결되기 때문에 화석 에너지를 태양과 바람 같은 지역의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은 지역화 경제의 핵심에 속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이러스 감염병 발생 가능성도 대폭 줄어들 것이다.

   6. 지역화와 교회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공동 기원으로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숭고한 공동체”를 이룬다(『찬미받으소서』 89항). 피조물 간의 ‘근원적 유대’는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창조질서다. 이 창조질서는 우리에게 사람은 물론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를 요구한다. 값싼 노동력과 자연 자원을 발판으로 이윤의 극대화에 몰두해온 탈규제 자본주의 세계화 경제는 결국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과정이었고, 세계화의 흐름을 되돌리는 지역화는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창조질서의 보전은 정의의 구현을 뜻하며, 평화는 정의의 결과다(이사 32,17; 『기쁨과 희망』 78항). 지역화는 결국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사명의 핵심이다.

   세계화의 흐름을 지역화로 바꾸는 것은 대량 생산·유통·소비·폐기라는 우리의 지배적인 생활양식에 관한 반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근원적 전환’을 뜻한다. 지역화는 오늘의 현실을 철벽같이 지배하는 ‘성장지상주의’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지역화로 가는 길이 험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지역화의 주요 항목인 ‘에너지 전환’도 대부분 ‘성장 패러다임’ 안에서 논의되는 것이 현실이다. 화석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도 대개는 지금의 생활양식과 에너지 사용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지금 같은 대량 생산·유통·소비·폐기의 생활양식을 유지할 정도의 화석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대규모의 전환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면서도 과연 기후변화 대응에 의미 있는 정도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을까? 더구나 에너지 전환은 전기에너지에 국한될 뿐이고, 전기는 전 세계가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결국, 지역화에는 생산과 소비의 감축과 절약이 불가피하다.

   세계화가 ‘성장’을 요구했다면 지역화는 ‘절제’를 요구한다. 지역화에는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이면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찬미받으소서』191항). 세계의 팽창 속도를 줄이려면 개인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가 먼저 되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그런 우리의 모습은 ‘절제’에서 찾을 수 있다. 절제는 한계의 존중과 수용이다. 절제는 자연의 한계에서 오는 제약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문제는 절제나 절약이 오늘날 “강박적”이고 “집착적”으로 변해버린 소비주의 문화(203항)에서는 인기가 없을 뿐 아니라 낯선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표’를 쫓는 정부와 정당에게 ‘절제’에 기초한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의 자발적 후원을 존립 기반으로 하는 시민단체도 정도가 다를 뿐이다. 환경운동에서도 ‘전환’은 인기가 많지만 ‘절약’은 인기가 없다.

   교회는 오늘의 현실을 깊게 살피고 길게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사회적 주체들이 움츠리는 상황에서도 교회만은 세상을 향해 ‘절제’와 ‘절약’을 외쳐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세상을 우리가 잘 보전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지금 기후위기를 비롯한 각종 생태위기로 세상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훼손되고 있다. 세계화 경제와 성장 이데올로기가 생태위기의 근원이고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그 결과다. 오늘날 교회가 절제와 절약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은 예언자의 외침과 삶이다. 한편, 모든 나라가 이문제에 대해 동등한 책임과 부담을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계화 경제의 결실을 많이 누리고 자연 환경 파괴에 책임이 큰 부자나라들이 솔선하여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좀 더 검소한 생활 방식을 실천할 자세”를 갖추라고 촉구해야 한다(193항).

   예수의 삶은 단순과 절제의 삶이었다. 오늘날 세계화 경제는 성장을 통한 무한한 풍요로 우리를 유혹하며 공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 확대, 자연생태계의 훼손, 바이러스 감염병 창궐은 우리가 추구해온 경제 성장의 필연적 부산물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순과 절제는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어야 한다. 구약성경의 안식일 전통은 절제를 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확대하고 동기를 강화해준다(『찬미받으소서』71, 237항). 안식일 전통에는 ‘자기 성찰’과 ‘타자 배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렛날의 ‘안식’(창세 2,2-3)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관상하는 안식”이었다(237항).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취지의 안식일(탈출 20,11)은 우리 자신의 삶과 활동을 성찰하고 의미를 찾는 날이다. 안식일의 배경에 놓여 있는 출애굽 사건은 안식일 정신이 ‘해방’임을 알려준다(신명 5,15). 안식일은 우리에게 사회적 약자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하고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돌볼 책임이 있음을 주기적으로 알려준다. 요컨대, 이렛날에 의도적으로 일을 ‘멈추는’ 안식은 자신과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의 행위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자발적 자기 제한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다. 육화와 십자가는 ‘자기 비움’(필리 2,6-8)의 사건이며 자기 제한의 정점에 있다. 예수의 삶은 육화의 충실한 지속이었으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바이러스 창궐과 생태 위기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발적 자기 제한’의 삶이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태적 회심’은 예수를 따르는 자발적 자기 제한으로 이웃과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결단이다(217항). 생태적 회심은 소비주의 사회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확신으로(222항), 단순과 절제의 삶으로 구현된다. 검약과 절약의 삶으로 실천되는 안식일 정신은 세계화에 저항하며 지역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청빈 서원을 발하는 ‘수도자’의 삶은 오늘날 각별한 의미가 있다. 수도회 차원에서 청빈 서원의 의미를 지역화의 맥락에서 새롭게 의식하고 실천한다면 교회 안팎에 절제와 절약의 삶을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풀뿌리 운동은 지역화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역 농업’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에서는 ‘얼굴을 건 농사’, 유럽에서는 ‘예약 농사’, 영국에서는 ‘농민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운동’, 미국에서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농업’으로 불려온 지역 농업은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자 지역화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지역 농업은 지역의 농민과 농산물 수요자를 연결하고, 지역의 자연을 보전하기위해서 지속가능한 순환 농법을 사용한다. 지역 농업은 글로벌 산업농의 폐해를 고리로 세계화 경제의 문제점을 아래로부터 제기하며지역 주민에게 지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런 면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가톨릭 농민회’, ‘우리농 살리기 운동’ 등은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운동이다. 교회는 지역화의 차원에서 이러한 운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또한 교회 밖의 지역 농업과도 연대하며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세계화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국제 사회와 개별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지역화의 중요한 과제다. 가톨릭교회의 글로벌 조직은 세계 각지의 지역화 운동을 연결하고 결집하는 연대의 글로벌 네트워크로써 중요한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준에서 교회 리더십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역화로 근원적 전환을 하려면 결국 ‘좋은 삶’buen vivir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각성이 필요하다. 좋은 삶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창조질서 안에서 근원적 유대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이웃과 자연의 존중에서 시작한다는 깨달음과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화가 애초의 약속과 전망과 다르게 다수의 사람과 자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지역화를 위한 입지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지역 공동체에 소속감을 갖고 지역의 자연과 유대감을 가질 때, 우리는 이웃과 자연을 다르게 보게 되고,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좋은 삶’을 만들고 누리려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창조질서 보전의 맥락에서 세상의 선한 이들과 연대하고 협력하여 ‘좋은 삶’의 구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역화로 가는 더디지만 확실한 길이다.


1) Naomi Klein, This Changes Everything: Capitalism vs. The Climate (2015), 2장 참조.
2) Charles Perrow, Normal Accidents: Living with High-Risk Technologie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