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수호자

코로나19 맥락에서 창세기 1장 28절 읽기

Il custode delle specie: Gen 1,28 nel contesto del Covid-19

  © La Civiltà Cattolica Q. 4087, 3 Ott 2020 IV, 17-29
장-피에르 소네 Jean-Pierre Sonnet S.I. (예수회) 신부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전주교구) 옮김

호랑아! 호랑아!
이글이글 불타는구나
캄캄한 밤 숲속에서
[……]
양을 만드신 그분이
너도 만들었느냐?

블레이크 William Blake, <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 (1794년).

  코로나19 창궐과 최근 인류에 전파된 다른 동물 기원 전염병 확산은 창세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들 중 인간의 창조와 동물세계에서 그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혼잣말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려는 의지를 보여주신다. 성경이 처음부터 정확하게 설명하거니와 이는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는것이다. 일단 그렇게 사람이 창조되자,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핵심 목적을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명령으로 전달하신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28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는 인간이 야생동물 서식 청정지역을 침범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현대인의 생활방식과 이동수단으로 증폭되었는데, 이는 인간을 초고속 바이러스 전파자로 만들었다. 바이러스 학자들과 역학자들은 유행병 창궐에 놀라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임상 사진’은 두려운 시나리오들 중 하나였다.

  2012년에 출판된 데이비드 쾀멘(David Quammen)의 저서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Spillover: Animal Infections and the Next Human Pandemic)는 이런 점에서 유익하다. 그 책에서 과잉Spillover 현상,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의 “전파”는 다음과 같이 피할 수 없는 대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초래한 생태계 압력과 혼란은 병원균을 인류와 더욱 가깝게 접촉하게 하는 반면, 기술과 인간의 행동은 이런 병원균을 더욱 광범위하고 빠르게 확산시킨다.” 1)

  쾀멘의 목소리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는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의 목소리를 더할 수 있다. “계속해서 다른 생물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우리는 동물에서 사람으로 새로운 병원균을 옮길 것이다.” 2) 리키는 1995년에 예언 서적「여섯 번째 대멸종: 생물 다양성과 생존」(The Sixth Extinction: Biodiversity and Its Survival) 3)을 출판한 케냐의 고인류학자이다. 5대 멸종은 약 10억 년 전에 식물과 동물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이후로 자연의 진화를 돌연 중단시켰다.

  행성 규모의 큰 재앙으로 거대한 화산 폭발, 기후 변화, 대기 구성의 변화, 소행성의 충돌이 일어났다. 매번 (자연의) 대변동은 생물종의 거대한 멸종을 초래하였다. 여섯 번째 멸종은 그 원인으로 특별한 종, 바로 우리 (인간) 차례다. 우리가 집약 농업과 사육, 삼림 벌채, 증가하는 도시 인구를 위한 야생 동물 밀렵 등으로 인해 동물에 가하는 압박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격변으로 해석된다.

  그다음의 페이지들은 리키(Leakey)와 쾀멘(Quammen) 이전에도 창세기 1장의 본문이 비슷한 경고를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동물의 보호자로 정하시고 동물의 구별을 보증하게 하신다. 그때 반계몽주의 선집과는 거리가 먼 성경은 기억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예언적인 지혜의 추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서운 곳이며 신적인 것이 작용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마다 종류대로

  알려진 대로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의 창조 활동은 갈라놓음과 구별의 개념으로 지탱되고 있다 4). 문제의 본문은 사제계 문헌에 속한다. 히브리 성경에 통합된 모든 원전 가운데에서 그 사제계 원전은 세상의 표현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경험에서 나타내는 표현에 가장 주의를 기울인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구별 장면에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차이와 거룩함을 연관시킨다. 우주의 거시적 요소들의 규모로 이루어진 창세기 1장에서 구별의 개념은 사역(hifil) 동사 바달(bādal), “가르다(갈라놓다)”로 표현된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창세 1,4; 참조: 6.7.14.18).

  창조 행위가 “생물”(nephesh ḥayyāh, “생명의 숨을 불어넣은 생명체”, 참조: 20.21.24.30절)로 넘어갈 때, 구별의 현상은 이중 표현 형태를 취한다. 한편으로 생물은 그들의 서식지에 따라 창조되었다. 물과 하늘(20-23절)은 닷샛날에 채워졌고, 땅은 엿샛날에 동물의 종류대로 만들어 채워졌다(24-25절). 하느님께서는 앞서 이튿날과 사흗날에 갈라놓으셨던 공간에 그렇게 생물을 창조하신다(6-13절).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생물은 체계적으로 “제 종류대로”(21.24.25절; 참조: 6,20과 7,14) 5) 창조되었다. 생물종은 역동적이라는 점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새는 날아다니고 물에 사는 동물은 헤엄치고 땅에 사는 동물은 움직인다). 생물종 각각은 자신의 서식지에 맞는 이동 방법을 가지고 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동물 다음으로 창조된 인간은 분명히 지배하라는 책임을 맡은 땅에 사는 피조물이며 이 조건은 인간의 식이요법에도 반영된다. 사실 인간은 풀을 먹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땅에서 나는 열매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9). 그렇지만 하느님의 모습과 유사하게 창조된 인간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받은 임무에서 어느 모로 그의 근원적인 특성(ethos)을 넘어서면서 -하늘과 물과 땅- 세 왕국의 생물을 지배하라는 부름을 받은 생명체가 된다. 어떻게 이 독특한 소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맡겨진 다스리는 임무는 두 번, 곧 먼저 신적 계획에서(창세 1,26: “(너는) 다스려라”[wĕyirdû]), 그다음 인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려줄 때(28절: “(너희는) 다스려라”[ûrĕdû]) 표현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이 임무는 동사 “라다”(rādāh: “다스리다, 지배하다, 복종시키다”)와 작용하며, 인간 관계의 맥락에서 지배 관계와 정기적으로 관련되어있다 6). 이 동사는 목자와 양들을 인도하는 것에 관한 에제키엘서 34장 4절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언급할 때도 나타난다. 문제의 본문에서 예언자는 이 권위가 약한 양들에게 “강압으로” 가해졌다고 한탄한다. 노르베르트 로핑크(Norbert Lohfink)가 지적한 대로, 에제키엘서 34장 4절(과 다른 비슷한 사용)에서 “강압으로”라는 표현은 동사가 그자체로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놔둔다 7).

창조 활동은 하느님의 비폭력으로 나타내고 인간은 비폭력적인 하느님의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문맥은 인간 지배의 독단적이거나 잔인한 해석에 유리하도록 말하지 않는다. 창조 활동은 하느님의 비폭력으로 나타내고(창세기 1장은 특히 (역자 : 고대 바빌론의 가장 대표적인 창조 설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의 서사시에 묘사된 신들의 전쟁을 통한 창조의 모델에 반대한다), 인간은 이 비폭력적인 하느님의 모습이다. 또한 – 우리가 본 것처럼 – 다른 한편으로 동물들도 풀을 양식으로 먹는 것처럼 인간은 물을 먹는 존재로 창조되었다(30절 참조). 인간이 창세기 1장 28절에서 임무를 받을 때, 그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사냥꾼도 목자도 아니었다. 인간은 그런 관계에서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한다. 인간은 동물에게 어떤 힘의 관계도 행사하지 않는다. 폴 보샹(Paul Beauchamp)이 쓴 것처럼 창세기 1장은 라다(rādāh) 동사를 “역설적으로 사용”한다. “[중략] 창세기 1장의 채식주의는 역설적인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다. ‘지배’라고 불렀고 동시에 동물에게 위협이 되지 않은 인간의 친절 로다스리기 때문이다.”8)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에 표현된 것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 논리는 무엇인가?9)

  동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힘을 설명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은 모습-존재와 하느님을 닮은 모습-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생물을 뛰어나게 하시면서 생물의 다양한 질서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은 이 뛰어나게 하는 것을 스스로 재현한다. 하느님의 대리자(첼렘tselem: ‘상, 모습’)인 인간은 세상의 내재성 안에서 신의 초월성의 일부분을 행사한다. 이것이 인간의 ‘왕 다운’ 소명이다(고대 근동에서 ‘신의 모습’의 동기는 왕의 표상을 나타낸다).

  매우 기본적인 방식으로 이 초월성은 인간이 생물종의 배열에 대한 신적 이야기를 이해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이 인지 능력은 창세기 1장의 독자의 능력에 반영되고 배가 된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이야기에서 서식지마다 동물 왕국을 묘사할 수 있게 하는 자다. 여기서 관점은 신학적이고 인류학적이다. 인간의 영혼은 “어느 모로 모든 존재” 10)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철학적 일치를 제시할 수 있다. 성경의 인간은 그의 지식으로 모든 동물의 왕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완전하게 이루어진 체계로서 이 왕국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성경은 (통시적 관점에서) 생물종을 그들의 진화와 연관시키는 다윈의 반응도 (통시성의 또 다른 형태에서) 우리에게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에 대해 경고하는 현대 동물학자들의 반응도 확실히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을(기원을 예측하는) 특정 시간에 살아있는 체계의 균형과 관계를 맺게 한다. 그러나 문제의 신화적인 관점은 매우 현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점진적으로 획득한 힘 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에 항상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창세기 1장 26-28절의 이야기는 그 관점을 하느님의 마음과 신적 계획에 두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눈에 인간은 모든 생물종 가운데에 있는 균형점이다.

  생물종에 대한 신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형식적이거나 독단적인 어떤 것도 없는 권한과 책임을 준다. 그 권한과 책임은 완성된 창조의 선함에 대한 신적 인식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동기를 지니고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시는 주간에 피조물의 선함을 염두에 두셨다(창세 1,4.10.12.18.21.25. 31 참조). 엿샛날에 인간이 동물과 관계를 맺은 후에 하느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31절)는 것을 인정하신다. 생물종에 관한 신적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는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별해 주신 것의 선함을 증언하고 보증하는 자로 들어높여졌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해 대답하면서 창조 활동에서의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해 대답한다.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대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제는 모세오경 이후, 특히 사제계 기원의 본문들 안에서 중요한 발전을 보여준다. 홍수 이야기는 이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의 식이요법에 대한 신적 재정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아담의 자손들에게 그들이 먹는 양식에 동물성 음식을 포함하는 것이 허용된다(창세 9,3 참조). 그 이야기는 분명한 병원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곧 인간이 역사적인 상황에서 단지 풀을 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 설명한다. 병원학은 인간이 동물들을 자극하는 두려움도 설명해준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창세 9,2). 고기를 근본으로 하는 음식에 대한 신적 허용은 인간을 사냥꾼으로 만들었고, 이것은 동물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두려움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인간에게 동물 세계에 대한 전권의 위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적 허락은 중요한 제한을 수반한다.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수준에서 쓰러 넘어진 동물의 피를 먹는 것은 제외된다. 동물의 피를먹는 것은 동물의 가장 깊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1).

  그러고 나서 레위기 11장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정결한 동물만을 먹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다. 이 법적 결정에서는 세 개의 생물종 -땅과 물과 하늘의 거시적 생태계- 은 새로운 일련의 기준에 따라 정결한 짐승이나 부정한 짐승으로 검토되고 구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물속에서 지느러미로 움직이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들, 두 발로 걸으며 날아다니는 새들, 그리고 네 발로 걸어 다니거나 땅에서 뛸 수 있는 동물은 정결한 동물이다. 실제로 정결한 동물은 움직이는 방법이 조화롭지 않거나 불분명한 (부정한) 동물과는 달리, 그들의 자연환경에서 그들이 움직이는 목적에 잘 따르는동물이다(41-43절).

  그러므로 기준은 구별의 기준이며, 인류학자 매리 더글라스(Mary Douglas)가 자신의 저서 「순수와 위험」(1966년) 11)에서 지적한 대로, 사제계 전통의 천재적인 분류를 보여준다. 여기서도 계시법을 다루는데,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신학적이다.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로 가려낼 때 이스라엘 백성을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애착이 작용하고 있다. 레위기 20장 24-26절에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더 많은 구별을 증명하라고 명하신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부정한 새와 정결한 새를 가려야 한다. 그래서 짐승이든 새든, 그 밖에 땅을 기어 다니는 어떤 것이든, 내가 너희에게 부정하다고 가려낸 것으로 너희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 주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내어 내 것이 되게 하였다”.

  레위기 11장에 따른 구별은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이요법을 결정한다 12). 그 구별에는 존재론적인 것이 전혀 없다. 정결한 동물들과 부정한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21.25). 이러한 구별은 인간이 동물들 가운데서 모험을 할 때 얼마나 신중함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레위기 11장의 체계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질서와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적인 질서, 곧 “표현된” 세계의 질서로 유지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적인 동기에서도 온다. 땅 위에 사는 짐승들에 대해(“짐승 가운데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으며 새김질하는 것은 모두 너희가 먹을 수 있다”[3절]),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결정하는 최종 기준은 돼지(“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7절])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동물에 대해 느껴온 반감(이사 65,4 참조)은 여러 수준에서 설명된다 13). 예방적 이유의 발생도 배제할 수 없다. 돼지는 인간에게 (선모충병을 포함한) 여러 기생충을 전달하고, 그와 관련된 금지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배운 교훈의 결과일 수도 있다 14).

  레위기 11장에서 정결하고 부정한 동물들에 대한 체계는 분명히 우리의 것이 아닌 동물학적 지식을 반영한다. 어쨌든 경험과 논리를 결합하는 그의 방법으로 여전히 현실적인 교훈을 제공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보다 음식을 다룰 때 무섭고, 구별과 예방 조치를 필요로 한다 15). 우리의 과학 문화에서 그러한 관계는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왔다. 성경은 이를 신적 계시로 등록한다. 물론 레위기 11장의 규정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만, 성경의 모든 독자는 그 장에서 배운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증대된 친밀감은 동물과의 관계에서 분별력의 성숙으로 해석된다. 달리 표현하면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결합은 이 지구 위에 있는 다른 생명체들과 더 의식적인 결합의 형태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간다. 하느님과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항상 생명의 문제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다른 생명체들과 올바른 관계를 찾는 문제를 다룬다 16).

  (생물)종에 관한 이야기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의 역할에 대한 문제는 사제계 전통의 범위를 넘어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다시 나타난다 17). 우리는 하느님께서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중략]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19절)는 창세기 2장의 장면을 알고 있다. 만일 창세기 1장에서 (우주의 거시적 요소에 대해) 피조물들을 부르는 것이 하느님의 특권이었다면, 그의 생활 공간에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 이 일은 이제 인간에게 맡겨졌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생물종에 대한 이야기”의 수신자였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훨씬 더 잘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에덴 동산의 역사의 역설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것들과 같은 동물” 18)(창세기 2장 7절에는 nephesh ḥayyāh, 곧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생명체”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데려온 동물들에게 그들의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동물이다( 아마도 인간이 그를 빚어 만드신 하느님에게서 받은 유일한 존재라는 “생명의 숨”의 효과이지 않을까(7절)?) 19).

  그 장면은 열왕기 상권에서 드러난 반향을 찾는다. 열왕기 상권 5장에서 솔로몬은 새로운 아담처럼 보인다. 그 또한 생물종에 대해 말하였기 때문이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이루어진 나라-정원에서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 살았다”(1열왕 5,5)- 물려받은 지혜로 가득 찬 임금은 아담의 행위를 계속해서 한다.

  이제 분류학의 연구는 식물을 포함하고 동물의 부문에서 물고기로 확장되기 때문에 특히 광범위하다. 그는 “레바논에 있는 향백나무부터 담벼락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초목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관하여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13절).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에서 소개한 세 개의 영역, 곧땅(“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 하늘(“하늘의 새”)과 물(“바다의 물고기”)이 여기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

  새로운 아담인 임금의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자취를 따라,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는 사실에서 그의 시적 소명에서 인간의 탄생, 곧 이 지구를 “시적으로 사는” 것을 그들이 본 해석들이 부족하지 않았다(횔덜린(Hölderlin, 1770-1843)). 사실 (창세기 2장과 열왕기 상권 5장에서) 이중 장면의 문화적 배경은 우리에게 아담과 솔로몬이 시인이라기 보다는 “지혜를갖춘 이들”로 묘사되는 것을 보게 한다. 1열왕기 5장 12-13절 묘사에서, 솔로몬의 박식한 지혜는 실제로 잠언서와 성경율법의 법률집에 대한 목록들도 유래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분류학 지식과 “목록을 꿰뚫는 지혜”에 가깝다 21).

  메소포타미아의 목록들 안에서 실재의 현상들에 대한 분류는 그들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준비되었다. 솔로몬은 아담의 일을 계속해서 하면서 비슷한 일을 한다. 폴 보샹은 “솔로몬이 지닌 지혜의 울타리(동물학과 초목학)는 아담의 제2의 에덴 동산이다”라고 쓴다 22). 솔로몬 임금(shlōmōh)에 대해 그는 모든 나라를 “다스렸”(rōdeh: 여기에 ‘라다’(rādāh: “다스리다”) 동사 어근이 다시 나온다)고, “사방 모든 지역에서 평화를 누렸다”(4절)고 말한다. 아담시대의 임금의 평화로운 권한 행사가 “생물종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과 (사람이) 사는 세상의 평화로운 관계는 그의 생물종에 대한 이야기의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

  최근 몇 년 동안의 몇몇 심층적인 과학 논문들보다 성경은 동물의 체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룰 때 성경은 예언적임을 드러낸다. 성경은 아마도 오래되었지만 일관되고, 생물의 환경에서 사람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는 “생물종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성경은) 감히 사람을 생물종의 보호자, 그리고 산 이들의 체계 내부에서 그들의 구별을 증언하는 자와 보증하는 자로 만든다. (성경은) 사람 안에 있는 신적 모습은 전체 동물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오랜 세월 그리스도교적 성경 읽기는 이러한 해석 방침을 강조하지 않다가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2015년)에 와서야 교도권의 문헌이 비로소 피조물의 보호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23).

  “해마다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우리가 전혀 모르게 되고 우리 후손들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 활동과 관련된 이유로 매우 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때문에 수많은 생물종들이 더 이상 그들의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권리는 없습니다”(찬미받으소서, 33항) 24). 인류학자들, 동물학자들, 식물학자들, 그리고 다른 환경 전문가들과 함께 이 새로운 빛에서 “성경”을 생각해야 할 것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내용의 주제를 마무리할 수 있는 한 예로 충분할 것이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해석에서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이 누렸던 행운은 잘 알려져 있다. 랍비 아키바(Rabbi Aqiba)는 그 구절을 “큰 계명” 25)로 삼았고, 예수님께서는 랍비 아키바 이전에 이 구절을 신명기 6장 5절, 곧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4-40; 마르 12,28-34; 참조: 루카 10, 25-37)는 구절과 연결하면서 똑같은 계명으로 삼으셨다. 그 구절은 신학에서 윤리적인 전통을 따랐다. 또한 [그 구절은] 특히 황금률 26)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현대 시대까지 철학적 성찰을 고취시켰다. 오늘날에는 이 구절을 다음에 나오는 구절과 연계하여 읽어야 한다. “너희는 나의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종류가 서로 다른 가축끼리 교배시켜서는 안 된다”(19절). 레위기 19장은 신적 계명으로 시작된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2절).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람에게 있어서 동물의 구별을 존중하는 계명에서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에서도 실현된다 27).

  신적 계시 안에서 타인에 대한 인본주의는 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맺는 관계의 올바름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아간다. 전체 생태계를 짓누르고 위험에 빠뜨리는 우리 시대는 이 두 계명 사이의 연관성을 재고해야 하는 시대이다. 이 일련의 짧은 구절들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성찰하도록 크나큰 교훈을 알려준다. 곧 “산 이들의 땅”에서(시편 27,13; 116,9; 142,6 참조) 다른 이들과 함께 살 줄 안다는 것은 동물들을 비롯해 다른 모든 종들과 함께 살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28).


1) D. Quammen, Spillover: Animal Infections and the Next Human Pandemic, New York(NY), W.W. Norton Company, 2012, 40(이탈리아어 역본: Spillover. L’evoluzione delle pandemie, Milano, Adelphi, 2014).
2) R. Leakey (T. Pievani의 인터뷰), «Estinguendo gli animali ci attiriamo i loro virus», in Corriere della Sera, «La Lettura», 21 giugno 2020, 16.
3) 이탈리아어 역본에서: R. Leakey – R. Lewin, La sesta estinzione. La vita sulla Terra e il futuro del genere umano,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15.
4) P. Beauchamp, Création et séparation, Paris, Aubier-Cerf-Delachaux-Desclée de Brouwer, 1969 참조.
5) 동물을 창조하기 전에, 식물도 “제 종류대로”(창세 1,11-12 참조) 창조되었다.
6) 이런 관계는 일하는 사람들과 일을 감독하는 고급 관리의 관계(1열왕 5,30), 일하는 백성과 일을 지휘한 관리 책임자들의 관계(1열왕 9,23), 지배받는 백성과 다스리는 임금의 관계(1열왕 5,4; 시편 72,8; 110,2), 또는 원수와 민족의 관계(레위 26,17; 민수 24,19; 느헤 9,28 등.)이다. V.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Grand Rapids (MI), Eerdmans, 1990, 137 참조.
7) 레위기 25장 43.46.53절의 “가혹하게”와 이사야 14장 6절의 “성을 내며”가 덧붙여진 것을 보라. N. Lohfink, «“Subdue the Earth” (Gen 1:28)», in Id., Theology of the Pentateuch. Themes of the Priestly Narrative and Deuteronomy, Minneapolis (MN), Fortress, 1994, 11s 참조. 나아가 로핑크는 시편 68,28에서 이 동사를 사용할 때 폭력으로 가해진 지배의 모든 함축성은 배제되었다고 강조한다. 벤야민이 부족의 으뜸들보다 앞서 있는 축제 행렬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작지만 그들의 지배자인 벤야민이, 유다의 으뜸들이 무리 지어(rodēm) 있고 즈불룬의 으뜸들과 납탈리의 으뜸들이있네”. 로핑크의 번역은 무엇보다 짐승 무리와 동물을 이끄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한 아카디아어 redû(“동반하다, 이끌고 가다, 가다”)의 상관적인단어에 기초한다(p.12). 같은 의미에서도 T.E. Fretheim, «Genesis and Ecology», in C.A. Evans – J.N. Lohr – D.L. Petersen, The Book of Genesis, Leiden, Brill, 2012, 690s 참조.
8) P. Beauchamp, «Création et fondation de la loi en Gn 1,12,4a. Le don de la nourriture végétale en Gn 1,29s», in Id., Pages exégétiques, Paris, Cerf, 2005, 134.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히브리어 성경의 동물에 대한 전체 이야기에 바탕을 둔 앙드레 웨냉(André Wénin)의 저서도 참조. A. Wénin, «Maîtrisez les animaux… (Genèse 1,28). Humanité et animalité dans le premier Testament», in D. Luciani (ed.), Des animaux, des hommes et des dieux, Louvain-La-Neuve, Presses Universitaires de Louvain, 2020, 9-22.
9) 동물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은 땅과의 관계에 관한 명령보다 앞서 있다. “다스려라(wĕkibshuhā)”. 라다(rādāh) 동사보다 훨씬 더 카바쉬(kābash) 동사가 힘의 관계를 의미한다(예레 34,11.16; 미카 7,19; 즈카 9,15; 2역대 28,10; 느헤 5,5; 에스 7,8 참조). 이 경우에도 창세기 1장의 문맥은 그런 폭력의 함축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해밀턴이 제안한 것처럼(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it., 140) 동사를 사용할 때, 정착해서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처음으로 일구고 돌보아야 하는 노력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창세 2,5.15 참조). 토론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제 고전적인 기사는 성서적이고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적 관점이 자연 세계의 착취를 합법화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L. White, «The Historical Root o four Ecological Crisis», in Science 155 [1967] 1203-1207). P. Harrison, «Subduing the Earth: Genesis. 1. Early Modern Science and the Exploitation of Nature», in Journal of Religion 79 (1999) 86-109 참조. (화이트(White)의 해석을 그렇게 신뢰하면서) “지배(정복)”의 관점에서 카바쉬(kābash)와 라다(rādâ) 두 동사에 대한 “완고한” 해석은 하벨(N.C. Habel)에 의해 옹호되었다. N.C. Habel, «Geophany: The Earth Story in Genesis 1», in N.C. Habel – S. Wurst (edd.), The Earth Story in Genesi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34-48 (특히 46s); cfr. la discussione generale in D.G. Horrell, The Bible and the Environment. Towards a Critical Ecological Biblical Theology, London, Equinox, 2010, 23-36, e in A. Marx, «Assujettir ou veiller sur la création?», in Projet 347 (2015) 36-44.
10) Aristotele, L’Anima (431b 20), Napoli, Loffredo, 1979, 188.
11) 이탈리아어 역본에서, M. Douglas, Purezza e pericolo. Un’analisi dei concetti di contaminazione e tabù, Bologna, il Mulino, 1975.
12) 식이요법에 부정한 동물의 주검에 몸이 닿는 문제가 추가된다(레위 11,24-44 참조). 다른 한편으로, 창세기 독자에게 창세기 7장 2-3절과 8장 20절부터 잘 알려진 대로, 번제물로 바친 동물들은 정결한 동물들 가운데에서만 골랐다(레위 1,37에 자세하게 설명된 규정 참조). 성서상 이스라엘의 제물 규정에 대해, D. Luciani, «Les animaux du sacrifice», in Id., Des animaux, des hommes et des dieux. Parcours dans la Bible hébraïque, Louvain, Presses Universitaires de Louvain, 2020, 33-54 (e le tavole tassonomiche alle pp. 125-129) 참조. 여기서 더글러스(Douglas)의 인류학적 고찰을 신학적열쇠로 통합하는 에드윈 피르메이지(Edwin Firmage)의 기여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동물들은 땅에서 사는 동물들, 소와 양과 염소이다. 이 동물들은 또한 최고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동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규정된 식이요법은 그들을 그 제물 규정으로 하느님께 더 가깝게 한다. E. Firmage, «The Biblical Dietary Laws and the Concept of Holiness», in J.A. Emerton, Studies in the Pentateuch, Leiden, Brill, 1996, 177-208; Id., «Genesis 1 and the Priestly Agenda», in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82 (1999) 97-114 참조.
13) 밀그롬(J. Milgrom)의 토론 참조. J. Milgrom, Leviticus 1–16, New-York (NY), 1990, 649-653. 그는 고대 근동 전역에서 증명된 돼지에 대한 반감을언급하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숭배 의식과의 연관 때문에 성경에서 돼지고기를 금한다는 가설을 선호한다(이사 66,3; 66,17 참조).
14) 온갖 동물 전염병은 고대 근동에서 알려져 있다. Ph. Norrie, A History of Disease in Ancient Times, London –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6 참조. 그는 특히 역병, 흑사병, 야토병, 발진티푸스, 콜레라를 언급한다. 그 시대의 원인을 규명하는 체계에서 재앙의 책임을 동물이 아니라 악마나악마의 힘에 돌렸다. 그러나 동물은 전체 임상 검사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성경은 병리학과 (동물의) 발병원인을 연결한다. 그래서 짐승의 무리를 죽인 이집트의 다섯째 재앙은 초식동물에게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흑사병(탈출 9,3)의 유행을 나타낼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1사무엘5장 6-12절에서 하느님께서 필리스티아인들을 내리치신 “종기”는 표면적으로는 쥐에 의해 전염되는(1사무 6,5 참조) 일종의 역병인 것이다.
15) 우리는 박쥐의 운명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박쥐는 부정한 동물이고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다(레위 11,19; 참조: 신명14,18). 그들의 서식지-“바위 동굴과 암석 틈”-는 무서운 곳이다(이사 2,20-21 참조).
16) 신약 성경에서 다루는 음식물의 이동(마르 7,19; 사도 10,15)은 그 식이요법에 관해 – 특히 레위기 11장에서 진술된 – 이스라엘에 주어진 특별한계시를 가리킨다. 창세기 1장 28절의 동물과 비교하여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코 7장 19절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간결한 표현은 동물이 아니라 음식을 가리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니엘 보야린(Daniel Boyarin)을 통해 우리는 문제의 음식이 아마도 율법에 따라 그들의 동물 기원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정결례 관습(마태 15,16-20 참조)에 따라 오염된 것(여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D. Boyarin, Le Christ juif. À la recherche des origines, Paris, Cerf, 2013, 123-152 (이탈리아어 역본에서: Il Vangelo ebraico. Le vere origini del cristianesimo, Roma, Castelvecchi, 2012) 참조.
17) 레위기 11장에서 마주한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사이의 구별은 신명기 14장 3-21절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두 본문 사이의 관계에 대한수수께끼에 대해, 특히 C. Nihan, «The Laws about Clean and Unclean Animals in Leviticus and Deuteronomy and Their Place in the Formation of the Pentateuch», in T. Dozeman- K. Schmid – B.J. Schwartz (edd.), The Pentateuch: International Perspectives on Current Research, Tübingen, Mohr Siebeck, 2011, 401-432 참조.
18) 루치아니(D. Luciani)가 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D. Luciani, Les animaux dans la Bible, Cahiers Évangile, n. 183, Paris, Cerf, 2018, 18.
19)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에덴 동산의 이야기가 사람과 동물 사이, (물어 상처를 내는) 뱀의 머리와 (상처를 입히는) 사람의 발꿈치 사이의 깊은 친밀감의 병원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15절). 생물종 간의 어떤 접촉의 위험은 더 잘 설명될 수 없다.
20) J.-P. Sonnet, «Côté cour, côté jardin. Salomon, l’Adam royal», in C. Lichtert – D. Nocquet (edd.), Le Roi Salomon. Un héritage en question. Hommageà Jacques Vermeylen, Bruxelles, Lessius, 2008, 247-260; Id., «“L’origine delle specie”: Genesi 1 e la vocazione scientifica dell’uomo», in Civ. Catt. 2009 I 220-232 참조.
21) R. Labat, «La Mésopotamie», in R. Taton (ed.), Histoire générale des sciences. Tome 1. La science antique et médiévale. Des origines à 1450, Paris, PUF, 1994(1957) 86-87 참조. 이 “목록을 꿰뚫는 지식”에 대해서, J. Bottéro, Mésopotamie. L’écriture, la raison et les dieux, Paris, Gallimard, 1987, 165-169 e 206-217; J. Trublet의 관계문서와 토론, «La science dans la Bible. Méthode et résultats», in F. Mies (ed.), Bible et sciences. Déchiffrer l’univers, Bruxelles, Lessius, 2002, 11-58; J. Vermeylen, «Les représentations du cosmos dans la Bible hébraïque», ivi, 59-102(특히 65) 참조.
22) P. Beauchamp, L’uno e l’altro Testamento. Saggio di lettura, Brescia, Paideia, 1985, 255.
23) 이 주제는 이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가르침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와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행한공동 선언에 주목해야 한다(2002년 6월 10일 베네치아).
24)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in www.vatican.va
25) Sifra 레위 19,18; b. Shabbat 31a 참조.
26) 비냐와 자나르도(C. Vigna-S. Zanardo)의 저서에서 고대 철학에서 현대 철학까지 되돌아본 역사적 여정을 보라. C. Vigna – S. Zanardo, La regola d’oro come etica universale, Milano, Vita e Pensiero, 2005; O. du Roy, La Règle d’or. Histoire d’une maxime morale universelle, 2 voll., Paris, Cerf, 2012의책도 참조.
27) 레위기 19장 18-19절의 반향처럼, 집회서는 종의 내부에서 결합의 도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생물)의 이야기(대화)”를 그의 방식대로 전개한다. “모든 피조물은 저와 비슷한 존재를 사랑하고 모든 인간은 제 이웃을 사랑한다.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류와 어울리고 인간은 저를 닮은 자에게 집착한다”(집회 13,15-16).
28) A proposito di Lv 19 e del suo modo di associare comandamenti di registridifferenti, cfr D. Luciani, La sainteté pour tous: sublime ou ridicule? Lévitique 19,Namur – Paris, Lessiu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