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칙 「모든 형제」 이해를 위한 길잡이

FRATELLI TUTTI Una guida alla lettura*1)

© La Civiltà Cattolica Q. 4088, 17 Ott 2020 IV, 105-119
안토니오 스파다로 Amtonio Spadaro, S.J. (예수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성삼의 딸들 수녀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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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일러두기]  본문에 인용된 회칙의 항들은 역자가 직접 번역했다. 조만간 한국주교회의가 인준한 회칙의 공식 번역본이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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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은 선임 8년 째에 자신의 교도권을 이루는 광범위한 부분의 합류점에 해당하는 새로운 회칙「모든 형제」를 썼다(제5항 참조).2) 형제적 친교fratellanza는 프란치스코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을 때 자신의 교종직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첫 번째 주제였다. 그곳에서 그는 주교-백성 관계를 ‘형제적 친교의 여정’으로 정의했고 “우리 서로를 위해서 늘 기도합시다. 온 세상을 향해 위대한 형제적 친교를 위해 기도합시다.”3)라는 소망을 드러냈다.

  제목은 성 프란치스코의 『훈화Ammonizioni』 에 나오는 “모든 형제여”Fratelli tutti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이는 교종의 다른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와 온전히 조화를 이루면서 인류뿐만 아니라 곧바로 지구 전체로 확장되어 가는 형제적 친교를 가리킨다.4)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

  「모든 형제」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을 함께 선언한다. 이것이 본문과 그 의미의 핵심이다. 이 문헌을 관통하는 현실주의는 형제적 친교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잠복해 있는 모든 낭만주의를 희석시킨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형제적 친교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관념만은 아니고 – 비록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 하나의 ‘객관적 사실’인데 이는 또 밖으로 나감을, 행동(그리고 자유)을 포함한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군가의 형제가 되어 주는가?”이다.

  그렇게 이해되는 형제적 친교는 오늘날 팽배해 있는 묵시록의 논리를 뒤집는데, 이는 세상이 하느님을 대적한다며, 곧 우상이라 여기고 시간의 종말을 재촉하기 위해 세상을 최대한 빨리 쳐부숴야 한다는 믿음으로 세상에 맞서 싸우는 논리이다. 묵시록의 [염세적] 심연 앞에서 더 이상 형제들은 없다. 배교자들이나 시간을 ‘거슬러’ 달려가는 ‘순교자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장군인이나 배교자들이 아니라 모두가 형제들이다.

  형제적 친교는 시간을 건너뛰지도 않고 눈과 영혼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요구한다. 다툼의 시간과 화해의 시간을 들인다. 형제적 친교는 시간을 ‘허비한다’perde. 묵시록은 시간을 건너뛴다. 형제적 친교는 지루한 시간을 요구한다. 미움은 순수한 흥분이다. 형제적 친교는 대등한 이들 서로가 다른 사람이 되도록 허용하는것이다. 미움은 다름을 없애 버린다. 형제적 친교는 정치의 시간, 중재의 시간, 만남의 시간, 시민사회 건설의 시간, 돌봄의 시간을 낸다. 근본주의는 이 시간을 비디오게임에서 무효화해버린다.

  바로 이것이 2019년 2월 4일 아부다비Abu Dhabi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알아즈하르al-Azhar의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Aḥmad al-Tayyeb가 형제적 친교에 관한 역사적 문서에 서명한 이유이다. 두 지도자는 서로 형제로 인정했고 오늘의 세상에 함께 눈길을 주고자 했다. 그들은 무엇을 이해했던가? 묵시록 방식의 해결이란 도전을 막아낼 유일한 진짜 대안은형제적 친교라는 것이다.

  이 강력한 복음적 단어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motto로 등장했지만 혁명 후 체제에서 버려지더니 급기야는 정치-경제 어휘사전에서 지워지고 말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단어를 ‘연대’solidarietà라는 더 약한 단어로 대치했다. 어찌됐건 ‘연대’는 「모든 형제」에서 22번 나타난다(이에 비해 ‘형제애’fraternità는 44번 나타난다). 프란치스코는 한 담화문에서 이렇게 썼다. “연대가 불평등한 사람들이 평등해지는 것을 허용해 주는 사회적 계획이라면 형제애는 평등한 사람들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되게 해 주는 것입니다.”5)

  형제적 친교를 인정하는 것은 전망을 바꾸며, 전망을 뒤집어서 정치적 가치에서 나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곧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며 따라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시민이라는 메시지가 되고 그 형제애의 그늘 아래서 모두가 정의를 누리는 것이다.

  형제적 친교는 또 ‘사회적 우정’을 살기 위한 견고한 토대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5년에 하바나에서 말하면서 자신이 언젠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대단히 가난한 지역을 방문하러 갔던 때를 기억했다. 그 지역의 본당신부가 몇몇 장소에서 건축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젊은이를 교종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이 친구는 건축가이고 이 친구는 히브리인이며 이 친구는 공산주의자이고 이 친구는 미사에 참여하는 가톨릭 신자이며 또 이 사람은…”. 교종은 말했다. “모두가 달랐어요. 하지만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었지요.”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자세를 ‘사회적 우정’이라고 부르는데, 사회적 우정은 권리를 공동선을 위한 책임과 결합시키고 다름을 근본적인 형제적 친교를 인정하는 일과 결합시킬 줄 안다.

  경계 없는 형제애

  「모든 형제」는 열린 형제애를 환기시키면서 시작되는데, 열린 형제애는 각 사람이 물리적 가까움을 넘어서서,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장소를 넘어서서 인정받고 가치를 부여받으며 사랑받게 해 준다. 주님께 대한 충실성은 항상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비례한다. 그리고 그 비례는 이 회칙의 근본적인 기준이다. 곧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6)

  첫 구절부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형제애를 인간 실존들, 출신지의 거리나 국적이나 피부색이나 종교를 넘어서서 특별히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내다 버려진 이들,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할 뿐 아니라, 태양과 바다와 바람에게까지도 확장하는 것이 부각된다(1-13항 참조). 그러니까 시선이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문헌이 지닌 호흡도 그러하다.

  이 회칙은 예상 밖으로 폭발한 코비드-19 대유행병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여러 나라가 제시한 대응책을 넘어서서 우리는 최고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으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고 교종은 쓰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쓴다. “하늘이 마침내는 더 이상 ‘남들’이 아니라 ‘우리’만이 있게 해 주시기를”(35항).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분열

  프란치스코가 떼어놓은 첫 걸음은 현재의 세상이 보편적 형제애의 발전에 비호감의 경향을 보이는 현상을 수집하는것이다. 베르골리오의 분석의 출발점은 흔히 –늘 그런 것은 아니어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배운 것으로, 여기서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상상하면서 기도하도록 권고한다.7)

  교종은 세상을 관찰하고는 세상이 각 개인과 인류 공동체 사이의 참되고 고유한 분열이 자라나고 있다는 전반적인 인상을 받는다(30항 참조). 역사의식 없이 20세기의 비극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세상인 것이다(13항 참조). 이는 후퇴로 보인다. 곧 ‘갈등’, ‘국수주의’, 상실된 사회의식(11항 참조) 그리고 공동선bene comune은 재화보다 덜 공동의meno comune dei beni 것이다. 이 지구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각자 혼자이고 개인이 존재의 공동체적 차원보다 우세하다(12항 참조). 사람들은 소비자나 관객의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힘 센 이들이 선호된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우리 시대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퍼즐의 조각들을 짜맞춘다.

  첫 번째 조각은 정치와 관련된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니, 자유니 정의니 일치니 하는 거대 담론은 그 온전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역사의식, 비판적 사고, 정의를 위한 투쟁 그리고 통합의 길은 흐물흐물해지고 만다(참조: 14항; 110항). 오늘날 종종 전락하고만 ‘정치’에 대한 심판은 지극히 혹독하다. “그러한 정치는 이제 더 이상 모든 사람과 공동선의 발전을 위한 장기적 계획에 대한 건전한 토론이 아니고 그저 가장 효과적 자원인 타인을 파괴하는 데서 발견하는 마케팅의 허망한 처방일 뿐이다”(15항).

  두 번째 조각은 버림의 문화이다. ‘마케팅’으로 전락한 정치는 ‘지구적 버림’scarto globale과 그 결실인 문화를 장려한다(참조: 19-20항).

  이러한 전개는 ‘인권’에 관한 숙고를 삽입하면서 계속 진행되는데 인권에 대한 존중은 한 나라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다(22항 참조).

  네 번째 조각은 ‘이민’에 할애된 중요한 단락이다. 이민을 떠나지 않을 권리가 강력히 주장되어야 한다면 외국인 혐오의 사고방식은 이민들이 자신들의 구조 그 자체의 주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이 단락은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고방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39항).

  이야기는 다섯 번째 조각으로 계속 진행되는데, 바로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제기하는 위험이 곧 그것이다. 디지털 접속을 통해 거리가 짧아지지만 증오의 움직임들이 연출하는 “공연”을 부추기는 폐쇄성과 불관용의 태도는 더욱 심해져 간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신체적 몸짓이, 얼굴 표정이, 침묵이, 몸의 언어가, 심지어는 향기가, 손의 떨림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땀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소통에 대해 말해 주며 그 소통을 이루기 때문입니다”(42항).

  그렇지만 교종은 현실과 우리 시대의 드라마에 대한 활기 없는 묘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그러한 묘사는 참여와 신앙의 정신에 잠긴 읽기이다. 교종의 시각은 사회정치적·문화적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여기서 부상하는 개인주의로의 전락은 죄의 결과인 것이다.

   위의 낯선 사람

  이 회칙의 내용에 묘사된 어두운 그늘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충만함에 대한 갈증에 대해, 마음을 채워 주고 위대한 것들을 향해 정신을 끌어올려 주는 것을 접촉하고 싶은 열망에 대해 말해 주는 많은 희망의 여정을 반향하고자 한다(54-55항 참조).

  하나의 빛을 찾으려는 시도로, 그리고 몇 가지 행동 라인을 가리키기 전에 프란치스코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한 장(章)을 할애하기를 제안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시대의 드라마를 복음적으로 판단하고 출구를 찾기 위한 근본적인 통로이다. 그렇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사회적·시민적 모델이 된다(66항 참조). 길가에 쓰러진 부상당한 사람을 포용하느냐 배척하느냐는 모든 경제적·정치적·사회적·종교적 프로젝트를 규정한다. 교종은 사실 개인적 선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 두 가지 선택을 ‘국가들의 정책’이라는 차원으로 향하게 한다. 그렇지만 개인들이 책임을 벗은 것으로 느낄까봐 항상 개인적 차원으로 돌아온다.

  환대하는 세상을 생각하고 만들어내기포용적 시각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수행하도록 하는 여정의 세 번째 단계는 교종과 함께 ‘저너머’al di là, 곧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저편으로 나아갈 필요의 단계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단계이다. 제1장에 묘사된 드라마가 자신의 개인주의와 관객의 수동성 안에 갇힌 소비자 인간의 고독이라는 드라마라면 출구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사랑할 구체적인 얼굴 없이는 그 누구도 삶의 가치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된 인간 실존의 비밀이 있다(86항 참조). 사랑은 유대를 만들어 내고 존재를 확장한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의 이 ‘나감’은 작은 집단과의 관계나 가족의 유대로 축소되지 않는다. 곧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더 넓은 관계들의 짜임 없이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88-91항 참조).

  ‘저편으로’와 ‘환대’로 열린 이 사랑은 사회적 우정과 형제애를 맺어 주는 행동의 토대이다. ‘사회적 우정과 형제애는 배척하지 않고 포용한다.’ 신체적·도덕적 특징이나, 교종이 기록하듯이, 민족, 사회, 문화와는 상관이 없다(95항 참조). ‘보편적 친교’를 향해(같은 곳), “서로 보살피면서 서로 맞아들이는 형제들로 구성된 공동체”(같은 곳)를 향해 있는 것이다. 이 개방은 지리적인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실존적이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교종 자신이 한 가지 오해의 위험을 감지하는데,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거짓 보편주의의 위험이 그것이다. 동질화하고 획일화하며 지배하고자 하는 ‘권위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주의’의 위험 또한 강력하다. 차이를 수호하는 것은 동질화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여 수렴시키면서 활용하는 형제애의 기준이다. 동등하면서 동시에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형제들이다. “서로 같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8)

  다면주의(多面主義)multilateralismo 중요성

  교종은 인간 상호간의 차원이나 국가 간의 차원만이 아니라 국제 관계 안에서도 근원적 관점의 변화를, 곧 지상 재화의 공통 목적지에 대한 확실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관점은 파노라마를 변화시키고 “어떤 지역의 재화는 다른 곳에서 온 궁핍한 사람에게 거부되어서는 안 되기에 각 나라는 외국인의 것이기도 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12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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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은 인간 상호간의 차원이나

국가 간의 차원만이 아니라 국제 관계 안에서도

근원적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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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가서 이는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전제한다고 교종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강대국들과 대기업들이 더 작거나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하기를 선호하는 양면적 접근에 대한, 곧 더 큰 이득을 끌어내기 위한 방식에 대한 진정한 비난과 함께 다면주의(多面主義)의 중요성에 대한 호소는 지극히 분명하다(153항 참조). 열쇠는 “공동운명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에 책임을 가질 줄 아는”(115항) 것이다. 연약함을 보살피기가 이 회칙의 핵심이다.

   세상으로 열린 마음

  프란치스코는 또한 형제애가 그저 추상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고 육화하도록 하기 위해 대응해야 할 도전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첫째 도전은 네 가지 동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민이라는 도전으로 그 동사들은 맞아들이다, 보호하다, 촉진하다, 통합하다이다. 사실, “높은 곳에서 지원 프로그램을 내려 보내는 것”이 아니고 “이 네 가지 행위를 통해 함께 걸어가는것”(129항)이다.

  프란치스코는 아주 구체적인 제시들을 내놓는다(130항 참조). 하지만 특별히 시민권(시민의 삶)cittadinanza이라는 주제에 멈춘다. 아부다비에서 서명한 ‘세계 평화와 상호 공존을 위한 인류 형제애에 관한 선언문’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une에서 거부했던 대로이다. ‘시민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종족주의와 적대감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타인의 얼굴에서 적(敵)의 가면을 보는 ‘소수’minornza라는 관념을 멀리한다. 프란치스코의 접근방식은 확산되고 있는 묵시록적 정치신학에 비해 뒤집어엎는 방식이다.

  다른 한 편, 교종은 삶의 환경과 문화적 환경이 상이한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도착은 그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선물로 바뀐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들과 문화들 사이의 만남으로서 풍요롭게 되고 발전하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경우는 타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게 할 때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준은 항상 동일하다. 곧 우리 모두가 구원되거나 아무도 구원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인식을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불모화’sterilizzazione와 고립주의의 모든 태도는 만남의 풍요로움에 장애물이다.

  포퓰리즘과 자유주의

  프란치스코는 최상의 정치, 곧 참된 공동선에 봉사하는 정치에 할애된 장(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154항 참조). 그는 여기서 약한 자들, ‘백성’을 대중선동demagogia의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는 ‘포퓰리즘populismo과 자유주의liberalismo’ 사이의 대조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한다. 교종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로서 썼던 자신의 글의 출판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던 대담을 폭넓은 인용을 이용하면서 즉시 오해를 밝히고자 한다. 그 전문을 아래 인용하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백성’은 하나의 논리적 범주가 아니며, 신비적 범주도 아닙니다. 백성이 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백성은 천사화된 범주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은 하나의 신화적 범주입니다. […] 백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때 논리적 범주를 사용하지요. 백성을 설명해야 하니까요. 필요합니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백성에의 소속감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백성’이라는 말은 논리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요. 백성에 속해 있다는 것은 사회적·문화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통의 정체성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통의 계획을 향한 하나의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지요”(158항).9)

  결과적으로 이 신화적 범주는 공동선에 봉사하기 위하여 백성과 그리고 백성의 문화적 역동 및 한 사회의 커다란 흐름들과 조화를 이룰 능력이 있는 리더십을 가리킬 수 있다. 혹은 그것이 선거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적인 자신의 계획을 위해 백성의 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도구화하기 위해 동의를 끌어내는 능력으로 변질될 때는 퇴화를가리킬 수도 있다(159항 참조).

  하지만 백성의 신화적 범주를 마치 하나의 낭만적 표현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 더욱 구체적이고 제도적이며, 사회적 조직에 그리고 시민사회의 학문과 기관들에 연결된 담론을 위하여 거부되는 것으로 강조할 필요도 없다.

  두 가지 차원을, 곧 신화적 범주와 제도적 범주를 결합하는 것은 ‘사랑’carità인데 사랑은 모든 것을 합체시키는, 곧 제도, 법률, 기술, 체험, 전문적 기여, 학문적 분석, 행정적 진행절차 등을 통합하는 역사의 변모 여정을 포함한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사실 현실주의적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형제애의 영성도 더욱 효율적인 조직도 모두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모두에게 똑 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경제적인 처방전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엄격한 학문도 또 다른 길과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164-165항 참조).

  민중운동과 국제기구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는 민중 운동과 국제기구들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말한다. 이 둘은 조직의 대립되고 상이한 두 차원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고결함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국지적인 것과 이쪽 사람들 및 지구적인 것과 저쪽사람들 모두의 가치를 드러내며 항상 다면주의의 기치 아래 있기 때문이다.

  ‘민중운동’은 “실업자들,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미 정해진 통로에 쉽게 들어가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을 모아들인다”(169항). 이러한 운동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지만 결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정책이 아니고 결코 가난한 사람들의 정책이 아니며 더욱이 백성들을 모으는 프로젝트 안에 들어 있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정책의 관념”(같은 곳)을 극복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오늘날 경제금융의 차원이 초국가적 특성들을 통해 정치보다 우세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약화되어 버린 ‘국제기구들’을 다룬다. 이 기구들 중에서 국제연합UN의 조직은 불법화되지 않도록, 그리고 “국가들의 가족이라는 개념에 실제적 구체성을 부여할 수”(173항)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 국제연합은 법의 주권을 촉진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정의는 “보편적 형제애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소”(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최상의 정치는 경제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제 프란치스코는 ‘정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교종은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고 경제는 또 기술의 효율주의적 패러다임에 종속되어 있음을 여러 번 탄식한 바 있다. 그와 반대로 경제가 공동선을 지향하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대중적 프로젝트 안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하나의 폭넓은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정치이다(참조: 177항; 17항).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은 추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사회과학을 끌어들이기도 하면서 그 현실적 가능성을 보장하는 길을 찾아내는 결정과 능력을 요구한다. 이것이 “고도의 사랑 실천”(180항)이다. 결국 사랑은 일 대 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여러 차원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을 추구하면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에서도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사회적 사랑’amore socila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86항 참조). 이 정치적 사랑carità politica은 “각자는 한 백성에게 속할 때 온전하게 사람persona(인격체)이 되며 동시에 각 사람의 얼굴에 대한 존중 없이는 참된 백성도 없다”(182항)는 사회적 감각의 성숙을 전제한다. 결국 ‘백성과 사람’은 상호관계적 용어이다.

  ‘사회적 사랑’amore socilae과 정치적 사랑carità politica은 모든 사람과의 대조 및 대화에 대한, 심지어는 공동선을 위해서 적어도 몇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수렴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적 적대자들과의 대조 및 대화에 대한 온전한 개방 안에서도 표현된다. 다름이 가져오는 갈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획일성은 질식을 가져오며 문화적으로 우리 자신을 잠식시키기”(191항)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정치인이 자신을 일상적 인간 상호관계 안에서 사랑을 살도록 불린 인간 존재로 간주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리고 참으로 ‘다정한 사랑’tenerezza을 살 줄 안다면 가능하다. 정치와 다정한 사랑 사이의 이 연결은 생소해 보인다. 하지만 다정한 사랑은 “가까이 다가서는 구체적인 사랑”(194항)이기때문에 이 연결은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정치활동 가운데서 가장 약한 이들은 다정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우리에게서 영혼과 마음을 가져갈 ‘권리’가 있다”(같은 곳).

  대화와 만남의 문화

  프란치스코는 이 회칙에서 사용된 몇 가지 동사를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는데 ‘대화’dialogo가 그것이다. “다원주의적 사회 안에서 대화는 항상 긍정되고 존중되어야 하며 어쩌다 이루어지는 동의를 넘어서야 함을 인정하는 일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길이다.”(211항)라고 교종은 쓰고 있다.

  또 다시 다름들의 꾸준한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우정의 독특한 시각이 드러난다. 교종은 이 시대는 대화의 시대임을 주목한다. 모든 사람이 예컨대 네트웤 덕분에 소셜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그럼에도 자주 대화가 의견들의 열띤 교환과 혼동되는데, 이 의견교환은 실제로는 공격성이 지배하는 독백이다. 교종은 또 이것이 정치적 맥락에서 우세한 것으로 보이는 유형이며 이는 또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반영된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차린다(200-202항 참조).

  “진정한 사회적 대화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존중하면서 그 관점이 정당한 신념이나 관심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전제합니다”(203항).10) 이것이 바로 형제애의 역동이요 그 실존적 특성으로서 “적어도 시각과 의견이 같지 않은 데서 일어나는 갈등이 형제애를 결정적으로 지배한다는 사실에 체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관념들을 상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11)

  대화는 결코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야 한다.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미 썼듯이 프란치스코는 객관적 진리나 정해진 원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열망과 즉각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일이라면 법은 그저 임의적으로 부과된 것이요 피해야 할 장애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높은 가치의 추구는 항상 스스로 제시되는 것이다(206-210 참조).

  만남과 대화는 그렇게 해서 ‘만남의 문화’가 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는, 그리고 그 자체로는 하나의 선이 아니고 공동선을 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어떤 일을 계획하고자 하는 한 백성의 열정을 의미한다(216-221항 참고).

  새로운 만남의 길들: 갈등과 화해

  프란치스코는 만남을 위해서는,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굳건한 토대를 놓으라고 호소한다. 만남은 공허한 외교술에, 이중적 화술에, 은폐에, 기교들 등에 토대를 둘 수는 없다. 오직 사실의 진실에서만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한 종합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생겨날 수 있다(225-226 참조).

  교종은 참된 화해는 갈등에서 도피하지 않으며, 대화와 투명하고 진지하며 끈기 있는 타협을 통해 갈등을 극복하면서 갈등 안에서 얻어진다고 여긴다(244항 참조). 다른 한편 용서는 부패한 권력자 앞에서나 범죄자 앞에서, 혹은 우리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241항 참조).

  특히 역사의 커다란 범죄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이제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일이고 앞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책장을 넘기려는 유혹에 떨어지기가 아주 쉽습니다. 제발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억없이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입니다”(249항).

  전쟁과 사형

  이러한 장면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드라마틱한 처지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됨직한 두 가지 극한의 상황을, 곧 전쟁과 사형을 검토한다. 이 두 경우를 다루는 데 있어 교종은 지극히 분명한 입장이다.

  ‘전쟁’에 관해서는 불행히도 전쟁이 과거의 유령이 아니라 끊임없는 위협이라는 것을 긍정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모든 권리의 부정이요 환경에 대한 비극적 침략”(257항)이라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또한 윤리적 정당성의 엄격한 몇 가지 조건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전제와 함께 군사력을 통한 정당방위의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입장에도 맞선다. 그러나 이 법의 너무 폭 넓은 해석에 쉽게 떨어진다고 프란치스코는 쓰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의 발전과 함께 “전쟁에는 수많은 무죄한 민간인에게 타격을 주는 통제 불가능한 파괴력이 주어졌습니다.” 교종의 결론은 이렇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해결책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데 위험은 필시 가정상의 유용성을 언제나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오늘날 있을 수 있는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지난 세기들 안에서 성숙해 온 이성적 기준들을 지탱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결코 더 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258항).

  핵무기의 위협과 다른 모든 형태의 대량 살상에 대한 응답은 상호신뢰에 기초하여 집합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교종은 또 제안하기를 “무기와 다른 군비에 쓰이는 돈으로 드디어 기아를 없애고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을 위한 세계 기금을 설립합시다. 그렇게 해서 그 나라들에 사는 이들이 폭력적이거나 기만에 의한 해결책에 의지하지 않고 더 존엄한 삶을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지 않도록 합시다”(262항).

  ‘사형’에 대해서 프란치스코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각을 다시 취하는데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에서 사형이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부적절하고 형벌의 차원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명료하게 밝혔다(56항). 프란치스코는 라탄찌오Lattanzio, 니콜라오 1세, 혹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저자들에게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들은 교회의 초세기부터 이 형벌에 대한 반대를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는 “사형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268항)는 것과 교회는 단호하게 전 세계에서 사형이 폐지되도록 제안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의 심판은“감추어진 사형인”(268항) 종신형으로도 확장된다.

  세상 안에서의 형제애에 봉사하는 종교들

  이 회칙의 마지막 부분은 종교와 형제애에 봉사하는 종교의 역할에 할애된다. 종교들은 여러 세기의 체험과 지혜를 모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나 학문과 같은 공공의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275항 참조).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으로 “종교의 직무자들은 평신도들 고유의 정당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존재의 정치적 차원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276항) 하고 말한다. 결국 교회는 보편적 형제애를 위해서도 행해야 할 공적인 역할이 있는 것이다(같은 곳 참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인간 존엄성과 형제애의 원천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으며, 여기에서 생각을 위해서도 사목활동을 위해서도, 관계와 만남 및 인류 전체와의 보편적 친교가 지닌 근본적 중요성이 솟아난다(277항 참조). 교회는 “부활하신 분의 권능으로 새로운 세상을 낳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형제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버려지는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으며, 정의와 평화가 빛나는 세상입니다”(278항).

  평화와 형제적 친교에 대한 호소

  「모든 형제」는 하나의 호소와 그 호소의 의미와 대상을 밝히는 두 개의 기도로 끝난다.

  실제로, 호소는 교종과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가 아부다비에서 서명한 문헌의 광범위한 인용이며, 바로 다음의 확신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결코 전쟁을 부추기지 않으며 증오와 적개심과 극단주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폭력이나 피 흘림을 권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불행한 일들은 빗나간 종교적 가르침들과 종교의 정치적 사용의 결과요 종교인 단체들의 해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285항).

  문헌의 본문에 나오는 다른 내용들 가운데 교종은 특별히 복자 샤를 두 푸꼬Cahrles de Foucauld를 기억했는데 그는 “단연코 ‘보편적 형제’이고자 했다. 오직 자신을 마지막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의 형제가 되기에 이르렀다”(287항).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형제적 친교는 하느님 나라의 고유한 자리로서 그 자리에 성령께서 오셔서 거주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것이다.12)

  “… 그렇게 형제들의 도시 필라델피아Filadelfia 다스릴 것이다

  「모든 형제」를 그 기본 주제들에 강조점을 두고자 하면서 훑어본 다음에 필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대단히 높이 평가하여 2013년 대담에서 필자에게 그에 대해 말했던 아르헨티나 작가 레오폴도 마레샬Leopoldo Marechal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레샬은 형이상학적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형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시인 아단Adàn의 3일간의 상징적 여행을 이야기하는 작품인 걸작 『아단 부에노스아이레스』Adàn Buenosayres에서 ‘형제들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대해 묘사했다. 특별히 ‘지옥편’에 대한 명백한 패러디인 ‘어두운 도시 카코델피아로의 여행’Viaje a la Oscura Ciudad de Cacodelphia이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의 제7권에서는 단테의 영향이 인정된다.

  이제 우리는 필라델피아로 간다. 마레샬은 이렇게 쓴다. “필라델피아는 어린 아이 얼굴처럼 빛나는 하늘 아래 둥근지붕들cupole과 종탑들을 세울 것이다. 마치 꽃들 가운데 장미처럼, 새들 가운데 깃털이 노란 방울새처럼, 금속 가운데 금(金)처럼 그렇게 세계의 대도시들 가운데 형제들의 도시 필라델피아가 다스릴 것이다. 평화롭고 행복한 많은 사람이 그 거리들을 지나다닐 것이다. 하늘은 빛을 볼 것이고 부정했던 사람은 자기가 부정했던 것을 긍정하게 될 것이며 유배갔던 사람은 자신의 고향 땅을 밟을 것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마침내 구원받을 것이다. …”13)

  마치 꽃들 가운데 장미처럼 그렇게 세계의 대도시들 가운데 ‘형제들의 도시’가 다스릴 것이라고 마레샬은 쓰고 있다.
모두가 한 분 아버지의 자녀이기에 우리 모두를 형제로 보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기도하듯이 프란치스코는 이 회칙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직접 가리킨다. 하느님 나라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온 인류가, 모든 남녀 인간이 어떤 차별도 없이 구원과 충만함의 자원으로서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 경우에는 형제적 친교의 복음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20 II 313-327 | 4078 (16 mag/6 giu 2020)
2) 이후 이 회칙을 가리킬 때 괄호 안에 제목을 생략하고 항목 번호만을 사용한다. 다음도 참조할 것. Fratellanza, Roma, La Civiltà Cattolica, 2020, in www.laciviltacattolica.it/prodotto/fratellanza
3) 프란치스코, 교종의 첫 인사, 2013년 3월 13일.
4) 남성형인 ‘형제들’이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교종이 마치 여성형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고자 하기라도 한 것처럼 몇 가지 논란이 일어났다. 분명하게 회칙의 제목은 프란치스코의 인용이며 따라서 인용으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배타적인 특성을 지니지 않는다. 물론 최근에 프랑스에서 남녀평등을 위한 고등평의회l’Alto consiglio per l’uguaglianza tra le donne e gli uomini(Hce)가 예고된 헌법 개정을 앞두고 공화국의 국가 모토에서 ‘형제애’라는 단어 fraternité를 adelphité로 대치하자는 제안을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희랍어에서 유래하는 이 단어는 ‘형제애’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fraternité라는 단어에 고유한 남성적 함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신조어를 피하기 위해 단순하게 연대solidarité라는 단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선택이 약하다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특히 프란치스코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J. L. Narvaja, ‘자유, 평등, 형제애. 신자유주의와 신국가주의에 대한 대안’(«Libertà, uguaglianza, fraternità. Un’alternativa al neoliberismo e al neostatalismo»), in Civ. Catt. 2018 II 394-399 참조.
5) 프란치스코, 교황청 사회과학 학술원 원장 마가렛 아쳐 교수에게 보낸 메시지(Messaggio alla prof.ssa Margaret Archer, Presidente della Pontificia Accademia delle Scienze Sociali), 24 aprile 2017.
6) 이 주제는 프란치스코의 교종직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따라서 또한 그의 교도권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 예로서 몇몇 구절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권고 문헌 「사랑의 기쁨」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는 가정에 세상을 ‘가정화’하는 계획을 맡기시어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도록 하셨습니다”(183항).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규정들과 계명들 가운데서 두 얼굴, 곧 하느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구별하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정식이나 명령을 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두 얼굴, 아니 오로지 하나, 곧 수많은 다른 모습에 반영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전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 특히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약한 이들, 힘없는 이들, 궁핍한 이들 가운데서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61항).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는 이렇게 쓴다. “‘우리가 성체성사 안에서 경배하는 그분께 이끌려, 고통받는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알아 뵙는 바로 그분께 이끌려 달려 나가십시오’”(299항). 「찬미받으소서」에서는 이 주제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이다. “그(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보나벤뚜라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이 공통 원천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하여 그분(성 프란치스코)께서는 아무리 작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셨습니다’”(11항).
7)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103-106항 참조.
8) 프란치스코, 교종 권고 「사랑의 기쁨」, 139항.
9) A. Spadaro, 「한 사목자의 발자취. 프란치스코 교종과의 대화」(«Le orme di un pastore. Una conversazione con Papa Francesco»), in J. M. Bergoglio/Papa Francesco, 『당신의 눈 속에 저의 말이 있나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강론과 연설 199902013』(Nei tuoi occhi è la mia parola. Omelie e discorsi di Buenos Aires 1999-2013), Milano, Rizzoli, 2016, XVI.
10)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22항 참조.
11) D. Fares, «La fratellanza umana. Il suo valore trascendentale e programmatico nell’itinerario di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9 III 119.
12) Cfr D. Fares, «La fratellanza umana…», cit., 122.
13) L. Marechal, Adán Buenosayres, Firenze, Vallecchi, 2010, 342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