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도력
그의 교황직 수행의 원동력은 여전히 살아있는가?

IL GOVERNO DI FRANCESCO
È ancora attiva la spinta propulsiva del pontificato?

La Civiltà Cattolica, Q. 4085, 5 Set, 2020 III, 350-364

안토니오 스파다로 Antonio Spadaro, S.J. 신부
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 옮김

  [2013년 3월 13일] 즉위 후 7년간 교황직 수행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부 평론가와 분석가들은 그 동력이 여전히 작용하는지 궁금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 지도력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교황의 통치는 어떤 방식인가? 이것을 지난 7년간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그의 성격과 삶, 그리고 예수회 양성에서 비롯된 교황의 통솔 방식이 어떤 의미인지 고찰하면서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1)

  트렌토 공의회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공의회 첫 회기부터 예수회원들은 자문신학자로서 참석하였다. 바오로 3세 교황의 요청으로 이냐시오 성인은 디에고 라이네즈Diego Laìnez와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ón이 공의회에 파견하였다.2)클로드 르 제이Claude Le Jay는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주교 대리로 참석하였다.3) 예수회 창설자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이 첫 예수회원들이 공의회에서 어떻게 처신할 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4) 흥미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편지에서 교의적이거나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냐시오는 예수회원들의 삶의 모범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이 공의회와 같은 단일하고 매우 중요한 맥락에서 교회의 개혁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처음부터 보여주는것이었다. 교회의 개혁은 주로 사람들을 내부로부터 개혁하는 문제였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에게는 구조의 회심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영신수련은 인간과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개혁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냐시오는 병원의 환자를 방문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고백성사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고 주고 그들이 기도하도록 안내할 것을” 제안하는데5) 이는 그의 삶의 체험이었다. 이냐시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첫번째 사도적 방문을 람페두사Lampedusa6) 섬에 가는 것으로 시작하였고 여전히 ‘자비의 금요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7)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원이고 그의 교회 개혁 아이디어는 이냐시오 성인의 비전과 일치한다. 교회와 예수회 역사를 보면 예수회원들의 통치 방식은 다양한 수준에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첫번째 예수회 출신인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독특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현 상황에 대한 어떤 다른 성찰과는 별개로 교황의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인물됨을 형성시킨 영적 은사에서 유래하는 것이 분명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직에 나타나는 영적, 사목적, 구조적회심간의 차이를 이론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다. 개혁은 참으로 영적인 과정이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구조’라 불리는 형태까지 변화시킨다. 리트머스 시험지가 자연스럽게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개혁은구조를 ‘자연스럽게’by connaturality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산도와 알칼리도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담기는 액체안에서 변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심에 이르는 것은 영적인 효력이 없는 경건함의 투영이 아니라, 근원적인 통치 행위이다.

  만약 예수회원들 중에 예수회 영적 통솔의 모델이 한 명 이상이라면 베르골리오에게 영감을 준 모델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8)가 ‘개혁사제’라고 불렀던 베드로 파브르Peter Faber9) 성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내적 경험, 교의적 표현, 그리고 구조적 개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의 기도에서 보듯이 각자 적절한역할을 하도록 초대받는 마음, 정신 그리고 몸이 포함된다. 2013년 8월 본지에 실린 대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금욕주의, 침묵, 고행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회 안에서, 특히 스페인 예수회안에서 확산된 변형된흐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루이 랄르망Louis Lallemant과 쟝-조셉 쉬랭Jean-Joseph Surin이 주창한 신비적인 경향에 더 가깝다. 파브르 성인도 신비가였다.”10)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식의 개혁을 지향한다.11)

  자신을 비운 개혁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수회원에 대한 언급을 읽게 되면 그의 개혁과 근본적인 태도의 핵심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2014년 1월 3일에 로마의 제수Gesù 성당에서 미사강론 중에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회원들도 자신을 비울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회의 중심은그리스도이자 그의 교회이기에 예수회원은 ‘자신을 비우고 자기 중심적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겸손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개혁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신약성경 구절의 자기를 비움에 뿌리를 두는것이다(필리 2:6-11). 거기에 진정한 개혁이 자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이 단지 아이디어이거나, 이상적인 프로젝트이거나, 아무리 좋더라도 개인의 갈망인 경우에 개혁은 또 하나의 변화에 대한 이념ideology of change일 뿐이다.

  그 개혁은 막연하게 뜨거운 특성을 지닌 이념일 것이다. 그렇다. 다른 이념과 마찬가지로 개혁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워해야 할 개혁이어야 한다. 그 개혁은 자신의 의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멸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개혁은 그러한 세속적 의지를 ‘비우면’ 작동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이념과는 정반대이다. 교황의 추진력은 항상 모든 경우에 추진력이나 변화를 제도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비움의 시간과순간을 식별하여 우리의 사명이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제도적 질서의 형태를 취하는 개혁의 체계적인 구조는 식별 그 자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스틴 아이브라Austen Ivereigh와의 대담에서 “교회는 제도”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영지주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교회를 상상하거나 꿈꾸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12) 그러나 교회를 제도로만드는 것은 성령이다.13) 성령은 “은사들carismi로 무질서를 일으키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신다.” 교회는“순례자이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며, 어떤 필요한 경우에든 항상 모든 제도적 표현을 초월한다”(『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111).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기에 성령과 제도는 결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제도화되었으며, “성령에 의해 야기된 무질서와 조화 사이의 긴장”덕분에 “교회가 자기관심안에만 머무는 내향성”(복음의 기쁨 27)을 피하게 한다. 이는 제도화 및 탈 제도화의 유동적인 과정이 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남아 있다. 교회의 미래는 정적이고 경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말하듯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땅 주인은 종들에게 말한다 “너희가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13:29-30).

  비이념적인 식별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은 역사의 변동과 연결된 역사적 영성이다. 이냐시오 영성은 역사를 만드는 누룩이고 제도를 조직하고 세운다. 이냐시오의 영성 사도직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제도화되었고 예수회 자체 및 문화와 역사와대화하는 예수회의 역량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이것은 더 복잡한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배경이며, 이는 교황으로서 베르골리오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베르골리오는 이냐시오의 삶 안에 그의 전망progetto의 내부적 일관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이해하는 이냐시오의 ‘전망’는 무엇인가? 한계 내에서 강제로 현실에 적용할 준비가 된 이론적 비전일까? 아니면 실행가능한 추상적 개념일까?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냐시오적 전망은 “기능적 계획이나 가능성의 집합도 아니다. 그의 프로젝트는 그가 내면적으로 경험했던 것을 분명하게 구체화시키는 것이다.”14)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계획programma은 무엇인가?” 라는질문은 실제로 말이 되지 않는다. 교황은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미리 포장된 아이디어나 기성복같은 이념적인 개혁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는 대화, 협의, 그리고 취약한 인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하면서 단계적으로 공유하는 영적 경험과 기도를 바탕으로 개혁을 실천한다. 교황은 미리 포장되어 전략적으로 연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열린 대화를 위한 구조적 조건을 만든다. 그는 2020년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사도들의 다락방 체험에 대해 “사도들은 앞으로 나간다. 준비되지 않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다락방 밖으로 나간다”고 말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없었다.

  분명히 이 비전은 교황이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온전히 살고 그의 백성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인예로서 칠레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자. 교황은 성직자들이 저지른 성적 학대에 대해 찰스 쉬크루나Charles Scicluna 대주교가 제출한 보고서가 나온 후에 칠레 주교들에게 보낸 2018년 4월 8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특히 신뢰할 만하고 균형 잡힌 정보가 부족하여 이 상황에 대한 평가와 인식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나는 내가 상처를준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 몇 주 안에 희생자 대표들과 만날 때 개인적으로 그렇게 용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통해 교황은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에 ‘몰입’할 때에만 실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이것은 통치의 한 형태이며 구조적인 방식으로 교회의 통치를 건드린다. 스타일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리 포장된 아이디어는 쓸모가 없으며 정보는 균형이 없거나 거짓을 수 있다. 만남과 몰입만이 현명한 통솔을 가능케한다.

  이것은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현재의 교회 상황 및 그리스도교의 미래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연구해야 할 제도적 유형의 개혁입니다. 가장 강력한 이미지 하나는 아마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가운데서 텅 빈 성 베드로광장에서 홀로 ‘로마와 세계를 향해’Urbi et Orbi 연설을 하고 성체강복을 한 교황의 모습일 것이다.15)

  이러한 진행방식을 ‘식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삶과 역사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다. 식별은 마음의 영역이고 내면의 영역이지만 그 원재료는 항상 사람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현실을 반영하는 메아리이다. 식별은 우리가 대화에 열려 있고, 하느님을 만나고, 미리 결정되고 잘 정의되고 울타리가 있는 경계내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하느님을 찾을 것을 촉구하는 내적 태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에 대한 식별, 다시 말해 개혁의 이상들에 대한 식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실제 역사,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식별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이유로 출발점은 항상 역사적이며 주로 “하느님께서 지상에 창조된 모든 것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수고하신다”17)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행동과 결정은 항상 신중하고, 명상과 기도하는 태도로 경험을 읽어야한다. 그리고 영적인 삶에는 자체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개혁을 위한 제안이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안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는 정신(좋든 나쁘든)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제안된 것뿐만 아니라 그 제안이 표현되는 언어에서 나온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잘 이해했듯이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은 식별을 우선시하는 언어를 탄생시킨다.18)

  치빌타 카톨리카와 나눈 교황님의 요점

  교황에게 시노드 총회는19)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움직이고, 선을 가장한 유혹이 흔히 일어나는 영적 위안과 고독을경험하는 “영적 수련”의 시간이다. 치빌타 카톨리카와 나눈 교황의 개인적인 메모는 이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메모에는 우리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해할 수 있는 성찰이 들어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때때로 “악신이 “식별을 좌지우지하고, 이념적 입장을 선호하며(이분법적인), 진영간의 격렬한 갈등을 선호하며, 더 나쁜 것은, 시노드적 여정에매우 중요한 영적인 자유를 약화시킵니다”라고 썼다.

  이 경우에 “결국 교회의 사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변증법적 및 적대적 입장때문에 시노드 총회장을 왜곡하고 축소시키고 분열시키는 분위기가 있다. ‘자신의 진리’를 양보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입장의 포로가 되어 여러상황에 자신의 혼란과 불만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께 걷는 것이 불가능 해집니다.”

  아마존 시노드를 언급하면서 교황은 기혼 남성들viri probati의 사제서품에 대해 이렇게 썼다. “토론이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토론… 논거가 분명한 토론이었지만 훌륭하고 합법적인 합의 또는 상대적 절대 다수결에 도달하는 것과 다른 식별이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노드 총회는 의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특정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기혼 남성 서품 사안에 관해서는 풍요롭고 생산적이며 심지어 필요한 의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저에게 이 점은 어떻게 교황권고Exhortation를 쓸 지 고민할 때 최종 식별에서 결정적인 부분이었습니다.”20]

  교황이 기혼 남성들 사제서품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옳고 그른가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여기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결정이 내려 졌는지, 사유 방식forma mentis, 진정으로 자유로운 식별의 필요성에대한 질문이 생긴다.

  그래서 “시도드적 교육의 풍요로움과 독창성 중 하나는 바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을배우기 위해 의회 논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항상 몇 명의 참석자의 발표 후에 침묵에 머물 것을제안합니다. 함께 걷는 것은 정직한 경청에 시간을 쏟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 입장의 명백한 순수성을 드러내고(또는 적어도 진지한 것),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parousia 가라지 가운데서 항상 밀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돕는데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에 대한 이 복음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필요한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진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은 회심이 요구되는 ‘숨겨진 안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말씀을 함께 듣지 않는다면 시노드 총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황의 요점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어떤 의미에서 시노드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 했던전체 과정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우리가 계속해서 걸어가고 이 경험을 실천하라는 도전을 합니다.”

  따라서 시노드 총회는 여러 제안들이 제출되는 식별의 장소이다. 사도적 권고에 나타나는 교황의 교도권magisterium은제안을 경청하는 것뿐 아니라, 언론의 압력이나 과반수 투표를 넘어 제안을 표현하는 정신을 식별하는 것이다. 또한 교도권은 식별이 실제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논쟁인지 평가한다. 그런 다음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여부를 평가한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교황은 제안의 타당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식별을 계속 할 것을 요청하고 토론의 장을 열어 둔다.21)

  개방적이고 역사적인 과정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을 내리는 내적태도는 영신수련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우리 주 하느님께 대한 봉사가 위해서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로 힘쓴다.”(155번) 따라서 어떤 일이든 단 하나의 기준에 따른다. “만약그것이 그분께 봉사와 찬미가 되는 것만을 원하기.”(157번) 이 기준은 기능적이 아니라 신비적으로 이해된다.

  통치에 대한 교황의 결정은 “영적 식별과 관련이 있다.” 이 식별은 “삶의 필요한 모호성을 받아들이게 하고 가장 적절한 수단을 찾게 하는데 이 수단은 항상 다른 수단보다 커 보이거나 강한 것과 같지 않다.”22) 따라서 그는 영적 위로와 고독을 잘 듣는다. 그리고 위로와 고독이 그를 어디로 이끄는지를 잘 이해하고 이 영적과정에 따라서 교황은 결정을내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모든 과정을 성 베드로 파브르에게서 배웠다. 파브르 성인은 자신의 비망록Memoriale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과 “선과 성령의 중재”를 내가 실행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것과 구별하여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했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 과정에서도 성령의 중재없이 성취될 수 있는 선이 있다. 또는 ‘진리의 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진실한 것’도 있다(비망록 n. 51). 파브르성인의 영적 지혜는 교황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미겔 앙헬 피오리토Miguel Ángel Fiorito 신부의 가르침에 분명히 보인다.23)

  이미 말했듯이 교황에게 성 베드로 파브르는 ‘개혁 사제’였다. 개혁가의 임무는 역사적 과정을 시작하거나 동반하는것이다. 이것은 베르골리오식 시선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이다. 시간은 공간보다 우월하다. 개혁이란 어떤 세력의 ‘머리를 자르거나’ 그 세력의 ‘공간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냐시오 성인과 그의 첫 동료들은 이 식별의 정신으로 개신교 세력의 도전을 직면했다.

  교황은 배경과 출발점을 잘 숙지한다. 그는 정보를 받고 의견을 경청한다. 그는 ‘현재’에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그를 위해 정말로 열려 있으나 이론적인 지도가 없다. 걸어야 길이 열린다. 따라서 그의‘전망’progetto은 현실에서 단계적으로 형성되고 구체적인 용어와 행동으로 전환되는 살아있는 영적 경험이다. 그것은그가 실현하려는 아이디어와 개념을 언급하는 계획이 아니라 전형적인 이냐시오 영성의 표현인 ‘시간, 장소, 사람’을언급하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이념적으로 추상화시키거나 사물에 대한 이론적 관점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자신의 틀에 따라 조직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내면의 비전은 역사에 강요하지 않고 현실과 대화한다. 그것은 사람과 교회의 진흙투성이 역사의 일부이다. 그 비전은 시간과 더불어 발생한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비전 안에서 장상처럼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과정의 안내자’여야 하는 ‘영신수련’의 교황이다.”24)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진정한 ‘영적 통솔’의 모습이다.25) 베르골리오의 교황직과 그의 개혁에 대한 열망은단지 행정적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매우 느린 프로세스의 시작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문서를 개혁 그 자체로 여기는 실용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예수회 사제였을 때와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을 때 베르골리오는 영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로 이 과정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그는 이 과정의 복음주의적 기원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이미지를 사용했다. “우리는 도시를 건설하도록 격려받았지만 아마도 우리가 머릿속에 미리 그린 모델을 해체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몸짓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얼굴에 나타난 어떤 움직임을 끌이 지워 버릴지라도 우리는 용기를 내고 하느님의 끌이 우리의 얼굴을 그리도록 해야 합니다.”26)

  머리로 그린 모델을 무너뜨리는 pars destruens(비판의 부정적 부분)은 하느님 손에 끌을 맡길 때 작동한다.27) 여기프란치스코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인용문이 있다. “과정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하느님이우리보다 크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성령이심을 믿는 것입니다.”28) 교황은 끊임없는 식별의 역동성을 살아간다. 그 식별은 그에게 미래를 열어주고갈등을 일으키고 싶은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흑백논리에 갇히지 않고 프로젝트가아니라 영의 움직임인 교회의 미래개혁에도 열리게 한다. 베르골리오는 뉘앙스와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보고 성령의현존과 교회가 걷는 길에 이미 심어진 그 현존의 씨앗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최소값에서 최대값을 찾기 위한 신중한 프로세스

  이 진화적 비전을 합성하는 원리는 다음 모토이다. “더 큰 것에 억제되지 않고 더 작은 것에는 억제되는 것. 이것은신성한 것이다.” Non coerceri a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29)

  이 생각은 베르골리오가 적어도 관구장일 때부터 갖게 되었고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그의 글인 “크고 작은 통솔”Conducir en lo grande y en lo pequeño에 담겨있다.30) 이 글에서 교황은 그 자체로 크거나 작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상의 기능주의적 시선의 맥락에서 작거나 크거나, 약하거나 강한 것을 보지 않고 오히려 삶의 영적 맥락에서 바라본다.” 31)

  교황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거대한 개혁의 기획은 작은 몸짓으로, 작은 발걸음으로, 심지어 한 명의 사람과의만남, 혹은 특정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반적으로 권위자, 지도자 혹은 특별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기 보다는 종종 부정적인 상황이나 착취의 희생자인 사람들을 직접 언급하는 이유이다. 그는 복음적 개혁의 씨앗을 지닌 작은 것과 구체적인 상황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의 교도권 ‘형식’이 유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문서에 추가한 메모가 단락보다 더 가치가있을 수 있다. 관저인 산타 마르타Santa Marta에서 드린 미사 강론은 공식적인 담화보다 복음적으로 더 깊은 의미가 있을수 있다. 비정기적인 메시지는 사도적 권고만큼 예리할 수 ​​있다.32) 프란치스코 교황 교도권의 신학적 깊이는 기능적으로 관습적인 형식을 존중하지 않고 시대와 순간에 적응한다.

  한계,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베르골리오는 결코 영웅적이고 숭고한 열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최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엄격한 이상주의도 ‘윤리주의’도 ‘영적 추상주의’도 믿지 않는다.33) 한계, 갈등 및 문제는 영적 여정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장안에서 실제로 ‘한계들을 잘못 다루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34) 이 표현으로 베르골리오는 이상주의의 침범을 거듭 경고한다. “그 이상주의는 현실에 이상적인 계획을 투사하려는 유혹에 늘 노출되지만 현실의 한계를(그 한계가 무엇이든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위험은 금욕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극단주의(절대주의적 방식으로 주장)으로 이어지거나 결함(설정해야 하는 위치를 고정시키고 않고 포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35)

  때때로 우리를 뒤흔들고 두렵게 하는 갈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11월 남자 수도회 총장들에게 한 연설 중에 “갈등을 어루만져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베르골리오에게 예수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모순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36) 그렇지만 교황이 종종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경직성은 이 특징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모순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비옥한 역사의 일부이다. 베르골리오는 이 특징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항상 적절하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항상 즉시 해결되어야 하는 경우일 필요는 없다. 역사를 암시하고 시간과 순간을 입증하는 식별이 있다.37) 때로는 즉시 직면하고 싶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된다. 따라서 진행중인 과정을 이해하고 심지어 현재의 관심사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개혁 과정의 적시성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어이다.

  유혹에 맞서는 과정

  유혹은 종종 기관, 특히 높고 거룩한 숭고한 기관 속에 숨어 있다. 베르골리오는 “악령은 성령의 지혜의 영향을 받는사람들과 공동체를 상대해야 할 때 그의 전투가 정말 어렵고 승리의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정도로 교활합니다”라고 한다.

  이 경우 선한 얼굴로 유혹한다. 악마의 주장의 기교는 극단적이 되는데,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 행동해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장 미묘한 점은 “교회가 스스로를 왜곡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고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구해야 한다고 확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공통점을 가지고있는 다른 가면 아래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항상 교회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부족입니다.” 38)

  여기에서 또한 “교계제도와의 비생산적인 갈등, 교회 내 ‘집단’(예: 진보파 또는 보수파)간의 파괴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간단히 말하면 부차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39)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엇보다 정치적 집단에묶여 있지 않다. 대신 그는 보수주의자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자에게 알맞은 정직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판단은 개방된마음이나 폐쇄된 정신과 무관하다. 그는 판단의 정직함에 끌린다.

  대신, 이념주의자들은(우익 또는 좌익) 종종 선을 가장한 얼굴로 다가오는 유혹에 굴복하는데, 이는 교회를 현실과역사에서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가장 비참하고 만연한 하나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교의나 참된 개혁을옹호하는 데 교황을 대신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불확실성과 혼란을 일으킬 때, 심지어 정통 교리나 변화에 미칠 위험을 상상케 할 때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40) 이것은 특히 그러한 태도를 취할 때 위선은 우리를 성부께 드리는‘효성스런 헌신’과 존경스런 ‘형제적 교정’의 모습을 당당하게 고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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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일부 평론가와 분석가가 빠질 위험이 있는 유혹은 계획과 더불어 기능적이고 조직적인 정신으로 정교해진제도 개혁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 교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지도의 내용을 교황직의 발전에 투사하고 끝으로 이러한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려는 것은 또 다른 유혹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식별을 통해서 그의 교황직의 발전과 현재 매우강력히 추진되는 개혁을 향한 열쇠를 얻는다.

  현실에 적용할 추상적인 개혁 계획은 없다. 그러므로”사도들은 전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서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그들은 전략을 세우지 않았고, 사목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41) 교황직의 역동성의 척도를 이 수준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교회의 여정을 위한 생각과 제안뿐만 아니라 그 생각과 제안의 타당성을 논의하기 보다 그 생각이나 제안을 일으킨 영이(선하거나 악하거나)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고 듣는 영적 변증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 의지가 ‘영적 세속성’에 굴복하는 위험을 피해야한다. 우리는 선을 행할 때마다 이 세속성에굴복한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식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나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속성에 무릎을 꿇는다.

  세상의 논리는 구조적 성격이라 할지라도 마지막이자 가장 깊은 유혹으로 남아 있고 교회는 끊임없이 그 유혹을 맞서 투쟁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히 선언했다. “세속적인 시각은 구조가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영적인 시각은 형제 자매들이 자비를 구하는 것을 봅니다.”42) 참된 구조의 효과적인 이미지인 “야전 병원”을 교회 안에서 보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영적인 시선이다. 2013년 교황은 본지와의 첫 번째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고 신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돌보는 능력, 친밀감, 접근입니다. 나는 교회를 전투 후의 야전 병원으로 봅니다. 중상을입은 사람에게 높은 콜레스테롤과 당 수치가 높은지 묻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의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다음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치료하십시오. 상처를 치료하십시오…”43)


1) 참고: A. Ivereigh, 자비의 시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의 생애(Tempo di misericordia. Vita di Jorge Mario Bergoglio), Milano, Mondadori, 2014.
2) 역주: 디에고 라이네즈(1512-1565)와 알폰소 살메론(1515-1585)은 스페인 출신으로 1534년 8월 15일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성모 마리아 경당에서 첫 서원을 했던 7명의 첫 예수회원들이었다.
3) 역주: 프랑스 출신 클로드 르 제이(1504-1552)는 1535년 8월 15일에 7명의 첫 회원들이 서원갱신을 할 때 첫 서원을 하였다
4) 참조: Gli scritti di Ignazio di Loyola 이냐시오 로욜라의 저술들], Rome, AdP, 2007, 1017-1019
5) Ibid., 1019.
6) 역주: 아프리카의 튀니지와 가까운 이탈리아 최남단 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즉위 직후 7월 8일 바티칸 외부 첫 방문지로수많은 이주 및 난민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이 섬을 찾았다.
7)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3월 13일 “자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가톨릭 교회의 소명을 높이기 위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한다”며, 그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부터 2016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11월 20일까지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했다. 교황은 그 특별희년의 주제를 루카 복음 6장 36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로 정했다. 교황은 특별희년 동안 매달 한번 금요일마다 영적이고 실제적인 자비 활동의 하나로 ‘자비의 금요일’ 행보에 나섰다. 교황은 자비의 희년이 끝난 후에도 ‘자비의 금요일’ 방문을 계속하고 있다
8) 역주: 프랑스 예수회원(1925-1986)
9) 역주: 베드로 파브르(1506-1546) 성인은 프랑스 출신으로 첫 예수회원이었던 성 이냐시오 로욜라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한방에 거주하면서 파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534년 8월 15일에 7명의 첫 예수회원들이 몽마르트 언덕에서 첫 서원을 할 때 유일한 사제였다. 2013년 12월 17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인품에 올렸다.
10)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대담], in Civ. Catt. 2013 III 457
11) 미셀 드 세르토는 『베드로 파브르 비망록』을 편집하였다(P. Favre, Memoriale, Paris, Cerf, 1960). 파브르 성인에 관련된 몇 개의 논문이 본지에 실렸다. S. Madrigal, “Pietro Favre, il Pellegrino” 순례자 베드로 파브르], 2013 IV 371-383; B. O’Leary, “Il vocabolario spirituale di Pietro Favre. Desiderium, affectus, devotio, cor” 베드로 파브르의 영적 용어-정감, 헌신, 마음], 2013 IV 459-472; R. García Mateo, “Pietro Favre, il luteranesimo e l’unità dei cristiani” 베드로 파브르 – 루터주의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Ibid., 543-556. 이 논문들은 다른자료와 함께 Pietro Favre. Servitori della consolazione 베드로 파브르, 위로의 봉사자] (A. Spadaro ed., Milano, Ancora, 2013)에 수록되었다
12) 참고: A. Ivereigh, “Il Papa confinat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경계를 넘나드는 교황 –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대담], in www.laciviltacattolica.it/news/il-papa-confinato-intervista-a-papa-franceco
13) 참고: M. Á. Fiorito, Escritos III, 1972-1975, Rome, La Civiltà Cattolica, 2019, 338-341
14) 프란치스코 교황, Cambiamo! 바꿉시다!] Milan, Solferino, 2020, 252
15) 역주: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는 라틴어로 ‘로마와 온 세상에’라는 뜻이다. 교황의 이 축복은 1년에 2회, 부활절과 성탄절에한다. 2020년 3월 27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드로 광장에서 Urbi et Orbi 장엄축복을 하였다
16) 『복음의 기쁨』, 231-233
17) 영신수련 n. 236
18) 롤랑 바르트(프랑스 철학자. 기호학자: 1915-1980). Sade, Fourier, Loyola. La Scrittura come eccesso, Torino, Einaudi, 1977
19) 역주: 시노드(synod)란 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였던 회의를 말한다. 희랍어에 어원을 두고있는 이 말은 ‘함께, 동시에’를 뜻하는 단어(syn)와 ‘길, 여정, 방법’을 뜻하는 단어(hodos)가 합쳐진 것이다
20) 역주: viri probati는 “입증된 품성을 지닌 기혼 남성들”을 의미한다. 2019년 10월에 로마에서 열린 ‘아마존 시노드’의 주요 의제였다. 시노드는 사제가 부족하여 정기적으로 방문이 어려운 공동체에서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특정 연령의 입증된 신앙을 가진 기혼 남성의 서품에 찬성하였다
21) 참고: A. Spadaro, “‘Querida Amazonia’. Commento alla Esortazione Apostolica di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20 I 462-476
22) A. Spadaro, 교황 프란치스코 대담(Intervista a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3 III 454
23) 피오리토 신부는 자연과 은총은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일정 시기 동안 갈등을 겪은 후에 의지는 의지를 움직이는 ‘힘’때문에 자연이나 은총에 의존한다. 행동을 촉구하는 공식이나 구절을 통해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동작또는 힘이다. 이를 피오리토 신부는 “동기부여 구절(frase motivante)”이라고 부르고 그 기원을 밝혔다. 참조: M. Á. Fiorito, Buscar y hallar la voluntad de Dios. Comentario prático de los Ejercicios Espirituales de San Ignacio de Loyola, Bilbao, Paulinas-Mensajero, 2013, 248-252. 참조 : C. Judde,(Euvres spirituelles, Lyon, Perisses, 1883, II, 313-319
24) J. 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Alle radici della mia spiritualità 모든 사제의 마음 속에 – 내 영성의 뿌리] Milan, Rizzoli, 2014, 88.
25) Ibid., 90
26) Ibid., 274
27) 역주: Pars destruens는 논쟁에서 비판하는 견해의 부정적인 부분을 일컫는다. 베이컨(Bacon)은 그의 책Novum Organum(1620)에서 언급하였다
28) Ibid., 96
29) 이 문장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리기 위해 익명의 예수회원이 쓴 긴 문학적 비문의 일부이다. Hölderlin은 이 문장이 좋아 Hyperion의모토로 사용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문장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신학대전’과 연결고리를 만든다(III, q. 1, art. 1 ad 4um ):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볼루시안(Volussian)에게 보낸 같은 편지의 글 Epist. 137, 2] : 그리스도교 교리는 하느님이 인간의 육신을 취해 내려 오심으로써 우주를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렸다거나 그 통치가 이 작은 육신안에서만 제한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는 오로지 물질적 현실만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이제 하느님은 부피가 아니라 권세 때문에 위대하다. 그러므로 작은 것들을 모으는 그분의 위대함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Deus autem non mole, sed virtute magnus est, unde magnitudo virtutis eius nullas in angusto sentit angustias). 우리의 덧없는 말이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들려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영원하신 신성한 말씀이 한 자리에 동시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30) 참조: J. 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op. cit., 91-102
31) Ibid., 94
32) 예를 들어 A. Spadaro, “‘Rompete tutti gli specchi di casa!’. Francesco scrive alle Pontificie Opere Missionarie” “집 안의 모든 (자기중심적) 거울을 깨십시오!” 교황청 전교기구에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글 참조], in Civ. Catt. 2020 II 471-479
33) J. M. Bergoglo, Nel cuore di ogni ogni padre…, cit., 37
34) Ibid., 97
35) Ibid., 95
36) Ibid., 83. 교황은 모순의 몇가지 예를 제시한다. “우리 예수회원들은 관상가이고 활동하는 사람들: 식별하는 사람들이자 순명하는 사람들: 이미 안정된 사도직을 하거나 마치 침입자처럼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들; 한편으로는 깊은 애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장상의 판단에 맡기고 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정주하며 사람들을 교육할 때와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에도 예수회원이던 사람들: 그것은 우리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활 방식입니다)”(Ibid., 84)
37) Ibid.
38) Ibid., 22
39) Ibid., 36
40) 참고: Ibid., 107. 선한 얼굴을 (sub specie boni) 유혹은 상황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교회의 여러 영역이 현실을 분석하는 일부 과학적 도구에 거의 미신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참으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령쇄신운동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도 맹목적이다. 비판적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맹목적이다. 과거를 충실히 기억하는 창조성에서 벗어나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전통주의자들의 특성을 지닌 기억의 아편도 맹목적이다. 가능성과 함께 진행되는 현실을 수용할 용기도 없이 이상적인 윤리 프로그램을 따르는 사람들의 개인주의도 맹목적이다
41) 프란치스코 교황.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2020년 5월 31일)
42)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여러 민족에 따라 그룹으로 나누고 먼저 이웃에게 말한 다음 먼 사람들에게순서대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그들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그 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심화시키기위해 잠시 기다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주님에 대한 기억이 폐쇄된 집단 내에서와 아늑한 둥지를 트는 즐거움이 있는 장소에서 배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에 겪을 수 있는 나쁜 질병입니다. 그 질병은 공동체, 가족, 어머니, 그리고 둥지에 오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열고, 기르고, 이미 말하고 행한 것 이상으로 밀어 부칩니다. 성령은 부끄러워하고경계하는 믿음의 울타리 너머로 밀어 부칩니다. 탄탄한 구조와 치밀하게 조직된 전략이 없다면 세상에서 우리는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대신 교회에서는 성령을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일치를 보장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걸어 나섭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나의 열망이 그들을 부추깁니다. 자신들이 받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참고: 1.3)”
43)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대담], in Civ. Catt. 2013 III, 461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