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과 연민 – 성서적 성찰

Connessione e Compassione – Una riflessione biblica

© La Civiltà Cattolica, Q 4082, 18 Luglio 2020 III, 133–139
Pino di Luccio S.I. 피노디 루쵸 신부(예수회)
강선남 헬레나 박사(서강대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옮김

  연민과 상호연결성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신학적인 용어로 상호연결성(interconnessione, 서로  붙어있음)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요한 15장은 이러한 ‘상호연결’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 또는 비유로 설명하면서 ‘성령의 증언’으로 말한다.1)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농부는(1절)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신다’(직역: καθαιρει ‘씻어주신다.’). 요한복음에서 ‘씻다’라는 동사는 요한 13,10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신 장면에도 나온다. “목욕을 한 이는 온 몸이 깨끗하니(καθαρος)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그분은 누가 당신을 배신할지 알고 계셨기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가 모두 다 깨끗하지는 않다.”2)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열매를 맺는 가지를 치시는 것은(2절) 발을 씻어주는 세례의 의미에 대한 예시이며 설명이다. 요한 13,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를 베드로에게 설명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못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예수님의 수난으로 그의 제자들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연합하게 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명과 성령의 선물로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에 연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3)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으로 ‘깨끗해진’ 제자들은 구원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예수님과의 친교에 참여하며 그분 안에 ‘머물도록’로 초대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 소용없는 잘린 가지처럼 된다.

  이제 예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의미를 되풀이하시며 당신께 ‘붙어있지’ 못하는 사람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4)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5)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밖에 던져져’6)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처럼 말라버린다. 이 유비에서 ‘불’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시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유비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열매를 맺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에붙어있음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친교에 붙어있음은 생명을 만들어 내고 자극하고 증진시킨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의 논리에따르면, 생명을 만들어 내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씻어줌’은 예수님의 생명에 붙어있음을 내포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초대하신다. ‘즉’(여기 그리스어 본문에 사용된 접속사 ‘카이’και는 설명하는 역할을한다) 그들이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도록 당신 말씀이 그들 안에 살게 하라고 초대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영광스럽게 되신다.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결합하신 것처럼 제자들과 결합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제자들이 된다. 그렇게 되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상호적인 사랑의 본보기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에 머물려야 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 사랑에 ‘머무른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와 충만한 기쁨을 의미하는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친교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에참여하는 것, 그분과 친교를 맺는 다는 것은 사랑과 친교가 없는 곳에 (대화를 통해서) 사랑과 친교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 곧 사랑의 계명을7) 지키는 것인 이러한 붙어있음(결합)의 역동성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곧 그분과 관계를 맺고 대화하며 원수를 환대하는 것을 포함한다.8)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과 원수에 대한 사랑)을9) 지키셨다. 요한복음이 ‘영광스럽게 되시다’라고 표현한 상호적인 사랑의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 안에 머무르신다.10)

  성령의 증언

  예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모범이 당신의 사랑이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선언하신 뒤에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1) 히브리어에서 우정과 친구는 ‘연결하다’(חבר)는 뜻을 지닌 단어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며 아버지와의 사랑의 친교에 친구들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당신자신을 그들과 결합시켰다. 따라서 예수님이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는 유비로 사랑에 ‘머무르라’고 하신 계명은 결국, 친구들을 위해목숨을 내놓음으로 설명된 상호적인 사랑을 의미한다.12)

  이 계명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에서 ‘새 계명’으로 표현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합되었기에 ‘상호적’이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의 친교로 ‘붙어있음’을 표현한다.13) 상호적인 사랑으로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사랑에의친교인 당신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무한하고 대가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인 사랑을 증언하면서 세상의 증오에 맞선다.14)

  사람들 전체나 집단 이상을 가리키는 ‘세상’은 예수님의 계시를 거스르는 마음을 가리킨다.15) 사랑과 친교에 반하는 미움은 예수님의 계시에 적대적이고 ‘세상적’인 마음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당신에 대한 세상의 증오라고 명시하고나서(예수님의 선택과 그분의 상호적인 사랑 18-24절), 시편 35,19와 69,5를 인용하며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스승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에대해 말씀하신다. 세상이 제자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까닭 없이 미워하는 것이다.16)

  이러한 문맥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영인17) 진리의 영이18) 오시어 증언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고 예수님-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이며 진리인-과 동일한, 진리의 성령은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신 붙어있음과 하나 됨을 실현시킨다.19) 진리의 영은 대화와 새로운 계약과20), 사랑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계명의 성취다. 그 사랑은예수님의 아버지와의 친교의 삶이다. ‘영의 증언’은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아버지와의 사랑의 친교로 ‘붙어있음’을 실현하며, 시험의 순간에 이러한 ‘붙어있음’을 표현한다.21)

    포도나무, 나뭇가지와 창조의탄식

  요한 15,1-11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는 공관복음서 전승의 최후의 만찬 제정의 말씀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22) 공관복음서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포도나무의 열매) 하느님의 말씀과 새로운 계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당신의 수난의 대속적인 의미와 연결하신다. 데오(Roger Le Déaut)는 최후 만찬의 ‘잔’을 타르굼 네오피티 신명 32,1(과 「아브라함의 유언집」 16)의 용어, 곧 죽음의 의미라고 제안하였다. 이 잔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 위해서 마셔야 하는 잔이며 고난의 잔이다23) “나는죽음의 잔을 마시며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하느님의 아들들) 반대하는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대해 죽지않고 죽음의 잔을 맛보지 않고, 하지만 종말에는 파괴될 사람들에게 반하는 증언을 하늘과 땅 앞에서 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역본인 타르굼에 의하면 성경에서 ‘잔’은 수난과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에 제자들을 초대하신것은24) 당신의 수난에 참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루카 22,20; 참조. 창세 31,31-34)은, ‘디아쎄케’(διαθηκη)라는 말의 이중적인 의미-계약과 죽음을 가정하는 유언-에 의하면, 당신 수난과 구속적인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실현된다.25)

  잔(과 포도와 포도주의 메시아적 상징)의 의미26)에 포함된 이러한 수난과 시험의 이러한 면은 예수님에 의해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로 다시 언급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7)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의 전승에 의한 최후의 만찬의 의미를 언급하며 성찬 제정 말씀을 설명하는 것처럼, 선물과 친교라는(?) 단어들의 세례성사적 의미를 언급하면서 예수님 생명의 선물도, 당신 생명에의 친교도, 당신 수난에 대한 참여도 설명한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러한 단어들로 제자가 스승의 생명에 일치되는 새 계명에 대해  말했다.

  요한 신학에서처럼 사도 바오로의 신학에서도 세례와 성령의 선물은 ‘상호 연결’의 양상을 지닌다.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은 예수님의유산, 그분의 고통과 영광에의 참여로 이해되는 거룩함과 성화(상호 연결)를 위해 활동한다.28) 성령에 의한 하느님 자녀들의 성화는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인간들의 죄 때문에 쇠락하는 창조를 재조명하고, 속량과 성화를 공유한다.

  앞으로 드러날 미래의 영광과 비교되지 않는 현재의 고난은,29) (하느님의 자녀들의 계시를 기다리는) 창조의 진통을 겪을 때 나오는탄식, 믿는 이들 안에서의 성령의 탄식으로 표현된다. 창조와(22절) 믿은 이들 안에서의(23절) 성령의 탄식은 성화 활동을 묘사한다. 즉, 신적 생명에의 참여, 하느님 나라의 강림 그리고 성부의 현존을 증명한다. 예수님의 생명이며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인 성령의 선물과 함께(참조. 요한 1,18; 1요한 4장) 피조물의 성화는 성자의 영광에 순응함으로써 성취된다. 피조물 안에서 탄식하는 바로 그 성령은, 성자의이미지를 닮은 당신 자녀들의 삶에서 하느님의 ‘부성’을 드러내면서, 믿는 이들 안에서 탄식한다.

   붙어있음과 섬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예수님의 생명의 선물과 그분의 생명과 아버지의 사랑에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하느님의 말씀과 새로운 계약의 약속의 성취로 예수님의 파스카를 소개한다. 이처럼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는 발을 씻어주는 성사적의미를 다시 환기시키고, 그러한 방식으로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때의 잔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세례적) 의미가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하나 됨을 통한 그분의 생명에의 참여로 설명돼야 한다. 새로운 계약은 예수님의 잔과,30) 그분의 수난과 성령인 그분 생명의 선물에의 참여이며 성령의 증언이다.31)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성령의 증언의 표현인 자비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비가 말하는 ‘붙어있음’에서 출발하는 환대의 (실천적) 신학에 의해 이해된다. 이는 (모든 이들의)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예수님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로 모든 계명인 ‘연결’은 요한복음 15장에 따르면 자비의 새로움이다. 이 자비는 예수님의 모든 이들을 향한 항구한 우정에 의해, 그분 성령의(창조 안에서 그리고 모든 종족, 문화 그리고 종교의 좋은 뜻을 가진 남자들과 여자들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는 평화와 사랑의)32) 선물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 붙어있음은 그분의 생명이며 아버지와 함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고, 예언과 히브리 성경의 성취다.33) 이 계명의 모든 형태와 실천, 자비와 대화의 모든 표현은 성령의 ‘증언’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성령은 일반적으로는‘성덕의 중산층’에서, 보편적으로는 창조에 결합하고 피조물에 봉사하며 활동한다.34)


1) 요한 6장, 7장, 17장 등을 보라. M.J. Lagrange은 요한 15장을 우화allegoria로 변형된 하나의 비유라고 한다. M.J. Lagrange, Évangile selon Saint Jean, Paris, J. Gabalda, 1948, 401. 요한 10장과 달리 요한 15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농부처럼 소개하며 그분의 역할을 설명하신다(1절; 참조. 마르 「12,1-12; 1코린 3,6-9).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종 이러한 ‘상호연결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포실리포의 대화」Discorso di Posillipo, 「진리의 기쁨 이후 지중해 지역의 신학적 상황」La teologia dopo ‘Veritatis gaudium’ nel contesto del mediterraneo에 관한 학술대회, 지난 2월 바리에서 주교단들과의 만남에서의 대화인 「지중해, 평화의 최전선」Meiterraneo frontiera di pace에서 지중해 지역과 관련된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참조. S. Bongiovanni – S. Tanzarella(edd.), Con tutti I naufraghi della storia. La teologia dopo Veritatis gaudium nel contesto del Mediterraneo [역사에서 난파당한모든 이들과 함께 – 회칙 <진리의 기쁨> 이후의 신학]. Trapani, Il Pozzo di Giacobbe, 2019, 221-232.
2) 요한 13,10-11.
3) 참조. 요한 19,30; 20,21-23; 로마 6장.
4) “잘려 말라 버린 가지는 경고의 이유로 발전하였다(6절). 이것은 유다의 배신보다는 악행을 저지르거나 거짓 가르침에 빠져 공동체에서 추방된이들을 암시하고(참조. 1요한 2,19), 여기 요한 15장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신 행동으로 설명되고 있다.” R. Schnackenburg, Il vangelo di Giovanni, vol. 3. Brescia, Paideia, 1981.
5) 요한 15,6; 참조. 이사 40,7; 마태 13,24-30. 36-43.
6) 참조. 요한 12,31.
7) 참조. 요한 13,35; 1요한 2,4.
8) “‘계명 준수’와 ‘사랑’의 결합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연대의 신학이 표현된 신명기, 특히 6-11장의 언어에서(참조. 신명 7,9.12) 온 것이다.” J. Beutler, Il Vangelo di Giovanni, Roma, Gregorian & Biblical Press, 2016, 468.
9) 참조. 레위 19,1-2; 마태 5,43-48.
10) 참조. 요한 15,10; 14,15.21.23.
11) 요한 15,12-14.
12) 참조. 요한 15,12-13; 1요한 2,9-11; 3,11-18.23; 4,7.11-12.20-21; 5,1-2.
13) 참조. 요한 13,34. 요한 15,12-13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주라.’ 13절)은 발을 씻어주는 것, 곧 예수님의 목숨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1요한 3,16). 요한 15,13에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다’(τιθεμι)는 동사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전에 겉옷을 ‘벗으시다’(직역: ‘내던지시다’) 13,4(그리고 10,11절)에 다시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14) 참조. 요한 15,18.
15) 참조. 요한 8,23; 17,9.
16) 참조. 마르 13,9-13.
17) 참조. 요한 1,17-18; 참조. 갈라 3,5.
18) 참조. 요한 15,26; 참조. 요한 14,16-17.25-26; 16,7; 1요한 5,6-7.
19) 참조. 요한 14,6.16.
20) 참조. 창세 31,31-31-32; 에제 36,24-25.
21) 참조. 마태 10,19-20; 마르 13,9.11; 루카 2,11-12; 21,13.
22) 참조. P. Di Luccio, “Tradizione dell’Ultima Cena,” Rassegna di Teologia 54, 2013/3, 391-416.
23) 참조. 루카 22,20; 요한 18,11; 마태 20,22-23.
24) 참조. 루카 22,20.
25) 참조. R. L. Déaut, “Goûter le calice de la mort,” Biblica 43, 1962, 82-86.
26) 참조. 창세 15,2; 마태 15,13; 21,41; 루카 13,6-9; 로마 11,17.
27) 참조. 요한 15,2; 마태 15,13; 21,41; 루카 13,6-9; 로마 11,17.
28) 참조. 로마 8,16-17; 참조. 로마 5,1-5; 갈라 3,29-4,7; 1베드 4,13; 5,1.
29) 참조. 로마 8,18; 신명 7,21-22.25-27; 12,1-3; 욥 23,22-31; 1QH(?)3,28-36.
30) 참조. 마태 20,20-23; 마르 10,35-40.
31) 참조. 요한 19,30; 20,21-23
32) Francesco, 「진리의 기쁨에 비추어 본 지중해 지역의 신학적 상황」Discorso al Convengno “La teologia dopo ‘Veritatis gaudium’ nel contesto del Mediterraneo,” Napoli, 21 giugno 2019.
33) 참조. 요한 1,17-18.
34) 참조. Ignazio di Loyola, s., 『영신수련』Esercizi spirituali, n.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