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심에서 봉헌으로 – 중심으로의 초대

Dalla distrazione alla dedicazione: Un invito al «Centro»

© La Civiltà Cattolica, 28 Maggio 2020

Adolfo Nicolás, S.I. 아돌포 니콜라스 신부(1936-2020)*
최진일 박사(서강대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옮김

 

* 2020년 5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선종한 전임 예수회 총장 아돌포 니콜라스 신부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편집자 일러두기: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재임하던 시절, 아돌포 니콜라스(Adolfo Nicolás) 총장 신부는 예수회(the Society) 전체 회원들에게 보낼 만한 편지 주제로 몇 가지 요점들을 제시했다. 그는 이 편지를 실제로 써서 보낸 적은 없지만, 몇몇 지인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공유했다. 아래 글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비공식 원고이지만 그의 사유 방향을 명확히 표현한다. 니콜라스 신부의 허락을 받아 이 글을 공유한다.

 

한동안 우리 수도자들은 교회 내 삶과 우리가 증거하는 흡인력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곧 우리가 ‘수도생활’이라 부르는 삶이 교회 안팎에서 무엇인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을 알아차리는데 비범한 통찰력이나 심오한 분석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수도회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나 기도의 깊이 등 삶의 진정성을 통해 신뢰를 유지하고 심지어 증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질문들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쇄신의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목적 없이 사는 것 아닌가? Siamo senza una meta?

모델이 되는 고전들 I Classici come modelli

  저는 로욜라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수도자들의 삶을 다룬 고전 몇편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제 마음이 재충전되었는데, 마치 집으로 돌아와서 그 시작점, 그 첫사랑, 처음으로 저의 온생애를 봉헌할 귀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그 때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무엇이 그들 안에 현존하는가? 무엇이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가? 저는 “온전히 중심에 있음”totalmente centrati이 그들의 현존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성령과 불, 그리스도의 삶과 양식에 사로잡혀, 완전히 거기에 초점을 두고 그 심오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하여그들은 이 새로운 중심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전생애를 새롭게 구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체험 안에서 존재의 심연을마주했고, 자신을 불태워 타인들과 그 불과 빛을 나눔으로써 나머지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깊이의 존재에 대해 동일한 심오함이나 놀라움을 추구하는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이 고전들Classici은 – 더 적절한 용어로 표현하기 부족하지만 – 온전히 중심에 있습니다. 이런 성인들 앞에서 우리는 –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 매우 어리석게도 ‘산만해’ 보입니다.

  바로 이 [중심과 분심]에 대해 제가 몇 가지 성찰거리riflessione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 글을 제가 고전들의 하나처럼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들은 하느님의 일들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썼다. 거의 분심의 전문가라 할 수 있을 만큼 저는 분심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제가 아는 것에 기반하여 쓰고자 합니다.

기도의 분심에서 삶의 분심으로Dall’«essere distratto nella preghiera» all’«essere distratto nella vita»

  기도 중의 분심들은 저의 수도생활 초기에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과거 따로 떨어져 거의 은둔하는 수련시절 우리는 매주 고백할 무언가를 일상생활에서 찾았고, 기도 중에 분심들은 늘 명백했습니다. 수년간의 분투와 실패를 겪고 나서야진정한 분심은 제 기도 안에 있지 않고 제 삶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삶과 일과 연구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분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제 기도가 똑같은 불편함disagio에 시달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 정신과 마음이 그토록 많은 것들에 주의가 산란해졌는데 어떻게 제가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깨달음은 가장 전통적인 이냐시오식 기도 방법들 중 하나인 성찰l’Esame이라는 자각coscienza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수도자로 살아가는 여러 벗들처럼 저도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부터 가르치고, 축구를 하고 성주간 전례를 돕는 일까지 초대받은 일들을 최선을 다해 잘 해내는 괜찮은 동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노래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만했습니다distratti. 즉 분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부들Maestri의 고전들을 다시읽어보니 이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분심에 사로잡히기 쉬운 유혹들 Le facili tentazioni nel distrarsi

  저는 개인적으로 누구를 비난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분심에 싸여 있다면 그것은 분심거리들이 우리 주변 온 사방에 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심거리들은 일반적으로 어느 인간 공동체에서나 볼 수 있는 ‘상식적인’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분심거리들은 ‘상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를 따르지 않으면 별스럽거나 신뢰할 수 없으며 때로는 자신이 속한 그룹에 반하여 불충실한 것으로까지 여겨집니다.

  저는 여기에 사회적, 민족적 또는 문화적 집단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싶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집단들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수도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젊은 시절의 모든 이상주의를 그 집단들이나 한정된 ‘이유들’에 투영하여 [그만큼] 매우 제한된 사회적, 민족적 또는 문화적 이해 관계들의 대표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영성] ‘고전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강력한 분심입니다.

  또 다른 쉬운 유혹은 일종의 콤플렉스complesso로 고통받는 집단과의 정서적인 동일시입니다. 저는 이순간 이런 집단들이 생각납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억압과 불의를 겪었고 지금도 정말로 나쁜 그 경험을 영원한 ‘피해자’vittima 지위를 주장하는 이유로 삼습니다. 때로는 과거에 소외됐던 집단들이 줄곧 이것을 특권적 지위로 살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있습니다. 봉헌된 사람들(수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분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수도자들은 이념들이나 이념적 사고에 직면하여 취약해지는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모호함과 애매한 영역 속에서 힘겨운 삶vita dura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헌신할 자세가 되어 있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어떤 헌신에도 전체 진리를 쉽게 투영하고 미묘함과 모호함앞에서 심지어 ‘흑백 논리’ 세계관의 대립들 앞에서 맹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꽤 오랫동안 예수회를 포함한 우리 수도회들은 사회 사도직과 교육 사도직에 투신하는 회원들간에, 가난한 이들에게봉사하는 이들과 엘리트들에게 봉사하는 이들로 분열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정말로 이념적 작용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채 신학적으로 그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정당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얼마나 산만한 분심입니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예수님이 가난한 군중에게 연민을 느끼셨을 때처럼, 마음으로부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위한 선택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통찰 없이, 우리는 ‘우선적 선택’을 ‘도덕적 의무’로 해석했고, 모든 사람들을 덜 그리스도교적이고 덜 헌신적이고 덜 복음적으로 간주하는 위협으로 이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정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자 더 이상 그들을 형제 자매로 대하지 못하고 복음의 대의를 배반하는 이들로 여겼습니다.

완벽주의는 자기애적 분심 Il perfezionismo come distrazione narcisistica

  그러나 모든 분심이 외부에서 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하나는 가장 종교적인 선의 추구, 하느님께 대한 순명, 영적 성장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완벽주의’perfezionismo라 불러왔고, 다른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채롭게 표현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분심이지만, 수도생활의 이상과 실제 삶에 늘 치명적이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심하게 몰입된 일부 집단들의 특이하고 도드라진 과잉 헌신에 대응하여 이것을 ‘바리사이주의’Phariseeism(바리사이적 완고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것을 마주하고 다루어 왔습니다. 그리고우리는 이것이 사도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친 진짜 분심이자 유혹임을 늘 감지해왔습니다.

  현대 심리학은 자기 자신, 자신의 이미지와 외모, 또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현상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애’narcissism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분심에 꼭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욕구 때문에 오히려 분심에 싸입니다. 여기에는 영성 고전들이 큰도움이 됩니다. 이 남녀 [영성의 대가]들은 그리스도의 케노시스kenosis, 즉 자기 비움 안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따랐으며 그래서 방해가 될 수 있는 자아의 어떤 측면에도 산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논리적으로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여 집중의 총체성(전인적인 몰입)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멀어지느니 차라리 저주의 고통을 받겠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저의 하느님, [저에게 약속하신 천국 때문에] 당신을 찾는 것도 아니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어느 것에도 마음 흔들리지 말라, 무엇에도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지닌 자 부족함 없나니… nada, nada, nada […]  (성 아빌라의 대데레사)
그리스도와 함께 부유함보다 가난을, 명예보다 업신여김을 당하기를 원하고 선택하며…(성 이냐시오 데로욜라, <영신수련> 167: 겸손의 세 번째 단계)
내가 보기에 흰 것이라도 [교회가 검다고 판정하면] 나도 검다고 믿어야 한다(<영신수련> 365).

  완벽주의자들의 분심은 우리 예수회원들에게 매우 미묘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이를 [다소 경각심을 가지고!]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우리가 일하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이를 식별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근본적인 분심은 경쟁, 강박적인 최신 기술 유지와 전자기기 보유 및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의 사용 등의 ‘보조 분심거리’distrazioni ausiliarie로 더욱 복잡해집니다. 기관은 ‘완벽주의’를 측정 가능한 발전의 기준으로 삼고 어려운 시장의 세계에서 미래를 보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주간의 엄숙함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하느님 나라의 실패”를 결코 기념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는 늘 성공만을 찬미해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으로 분심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습니까?

자아Ego 최고의 분심.

  물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핵심적인 분심은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결코 쉬지 않으며 늘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끌고 싶어합니다. ‘영적 행위자’의 역할을 할 필요 없이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는 차분하게 인생의 여정에서 자아가 가장 큰 분심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심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초점이 맞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모순이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때로는 그것이 매우 심각할지라도 복음의 삶과 소통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영적인 사람은 이 경험을 통해 커다란 내적 자유로 살아가며, 그 또는 그녀를 하느님과 진리 및 진정한 고통의 전문가들과 더 가까운 친밀감으로 인도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난관을 겪으며 그것이 모두 자아에 대한 음모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박해받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면의 평화와 기쁨을 읽었다고 느낍니다. 오해받고 상처받은 자아에 집중하는 것은 결국 거대한 분심이 됩니다.

  이런 유형의 분심 작용은 의사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결코 통제하거나 지시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 즉 대다수가 지지하는 특정 의견이나 우리가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이들의 의견에 초점을 맞출때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대중성에 사로잡힌 분심’distrazione di popolarit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지위와 의사결정 과정이 해이해진 것에서 비롯되는데, 광범위하고 전혀 통제되지 않는 식별 작용부터 성스럽고 존경받는 사람까지도 집단의 역동성에 휩싸여 더 쉽게 느끼고 행동하기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인간적이고 영적인 지평이 위축될 때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견에 푹 빠져 있을 때, 특히 그 의견이 지성적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확신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에 너무 산만해져서 일일이 열거하면 결코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을 마무리하는 이들에게 교회 내 올바른 정서와 태도를 갖기 위한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좁은 지평의 분심에서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렵게 들리지만, 성 이냐시오가 원했던 것은 자유, 즉 단순한 사유들보다 – 설령 그것들이 내 것이라 해도 – 더 큰 것에 대한 개방성openness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인 의견 대신 이념들과 이념적 선택을 이야기한다면 이 자유의 중요성은 명백해집니다. 개인이나공동 식별의 결실로 묘사되는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또한 집단의 결정들이, 그저 형식적으로만 진정한 식별의 과정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식별의 언어로 포장된 이념적 선택에 불과합니까? 이런 경우 신학조차도 이념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작용하여 분심을 형성합니다.

  주체가 초래한 분심은 공동체 혹은 공동체와의 영적 관계가 희미해지거나 사라질 때 가장 강력합니다. 우리 봉헌된 사람들은 신앙과 사명과 사랑의 공동체로서 함께 한 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오해를 받는 수도 서원인 순명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데, 나쁜 소식은 이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더 예지력이 있고 더 지적일수록, 중요한 이 명분 혹은 저 명분에 더 전념하는 사람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개인적인(대부분 정신적 또는 정서적) 영감에 따라 혼자 가는 것이 언제나 훨씬 더 쉽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다른 이들과 함께 식별하고 우리의 생각이나 제안의 부족함과 더불어 겸허하게 걸어가야 하는 일보다 자신을 예언자로 여기는 것이 더 쉽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한, 우리는 공동체밖에서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보호받기 위해 공동체로 달려가지만, 여전히 공동체나 그 지도자들에게 이해와 용기, 비전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곤 합니다. 이 불평에는 고의적인 악의는 없습니다. 변화를 이루기위한 많은 선한 소망, 여러 전망, 위대한 결단력 등이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분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미디어와 시장의 분심: 전자기기, 인터넷

  이 분심들은 가장 일반적이고 알아내기도 가장 쉽습니다. 이것들은 바로 우리 모두 앞에 놓여 있고, 우리 가운데 일부는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이들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가장 위험한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히 이러한 매체와 일부 기기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신 유행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왠지 모를 열등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르다는 것에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쁠까요?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팀의 일원이 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아마도 우리는 더는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분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디어가 ‘진리’의 새로운 경전canone, 새로운 정통성ortodossia을 정의하도록 허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구성되고 비판적이지 않은 여론입니다. 새로운 정보 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방식이 근본적인 선택으로서 우리와 마주합니다. 우리는 정보를 원하는가 아니면 이해를 원하는가? 속도인가, 아니면 깊이인가?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는가? 아니면 웹 탐색에 중심을 두는가? 나는 이것이 배타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어떤 분심들만큼 우리의 삶에서 실제가 될 수있습니다.

수도생활에서 피상성superficialità 초래하는 분심 관습, 습관, 전통, 의례, 헌신, 지위, 이론들에 대한 찬성과 반대

  우리의 오랜 지적 훈련을 고려할 때 이것들은 우리 예수회원들에게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분심들입니다. 이 분심들은 우리의 지적 성장이 기도, 경배, 사목으로 끝나지 않을 때 나타닙니다. 이 분심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앙생활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불안을 조성합니다. 우리는 나의 이론과 맞지 않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는’(난센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난센스에 상당히 참을성이 없습니다. 게다가 “만일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무의미할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전형적인 미성숙한 태도를 보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교회에서 올바른 감각을 갖기 위해 그의 규칙으로 이 경향을 단호히 잘라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소박한 사람들, 교회의 소박한 신자들 상식에 맞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절대 내가 좋아하지 않은 것을 찬미하지 않는다”고 자랑하곤 합니다.

  이냐시오는 사람들을 돕는 헌신, 기도, 하느님과 그의 교회에 친근하도록 돕는 감정 등 그 모든 것을 찬미하라고 말합니다. 그의 규칙은 사목적 색채와 방향이 강합니다. 이냐시오는 그 규칙들 안에서 자아에 의해, 우리의 호불호, 의견들, 신학들과 같은 우리의 이념들에 의해 분심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걷고 사는 사람들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자아는 잃어버리고 이 사람들의 삶을 위한 입장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위대한 예수회원들은 통일된 인물들로, 통합되고 헌신적이며 확고하고 중심을 잡으며 사소한 것에 산만하지 않습니다.

  예수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역사와 그것을 가득 채운 위대한 사람들이 매우 자랑스럽고, 당연하게도 그렇습니다. 내가 그들을 우리의 분심들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들 모두에게서 내게인상적인 것은 소명과 사명에 대한 그들의 완전한 헌신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었고 여전히 자신을 선물로써 내어놓는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과 하느님 왕국의 봉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각자가 어떻게 이 완전히 집중된 헌신에 몰두했는지를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입니다. 몇몇 이름들만 떠올려 봅시다. 여기에 적지 않은 이름들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창립자: 이냐시오Ignazio, 하비에르Saverio, 파브르Favre
창작자: 안치에타Anchieta, 비에이라Vieira,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포초Pozzo
선구자: 리치Ricci, 데 노빌리De Nobili, 브레뵈프Brebeuf, 떼이야르Teilhard, 아루페Arrupe
신비가: 이냐시오, 하비에르, 콜롱비에르Colombière, 떼이야르 …

  이들에 대한 기억은 저에게 그 중심으로 – 하느님 안의 중심, 우리 자신의 중심, 그리고 예수회와 교회에서 우리의 소명으로 – 나아가는 초대장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고 전임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명과 사명은 “분심에 사로잡힌” 추종자나 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자를 따르라고 형제와 친구들, 인류 구원의 꿈을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사람들을 계속 부르십니다.

  이 과업은 변함없이 광대하고 도전적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항상 우주를 위한 것이었고, 인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대응 또한 여전히 혹은 그 이상으로 중심에 초점을 맞추어 총체적이고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냐시오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그러한 주님을 섬김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식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임무에 그들의 온 생애를 바칠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이 편지와 함께 드리는 기도는 교회와 인류, 그리고 우주의 선을 위한 우리 주 예수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에 우리 모두가 새롭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아돌포 니콜라스(Adolfo Nicolás), S.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