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새로운 상상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곱가지 코로나19 이후 이미지
«UNA NUOVA IMMAGINAZIONE DEL POSSIBILE»
Sette immagini di Francesco per il post Covid-19

© La Civiltà Cattolica, Q 4080, 20 Giugno 2020 II, 567–580

Antonio Spadaro S.I.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이창준 로사리오 신부(예수회) 옮김

 

디지털 시대에 처음으로 전지구적 전염병 대유행이 갑자기 발생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접촉을 피하는 등 부자연스러운 중단으로 세상의 흐름이 정지되었다.

“지난 몇 주 간, 저녁 어스름이 깔린 것 같습니다. 짙은 어둠이 우리의 광장과 거리와 도시를 짙게 뒤덮었습니다. 적막한 고요와 황량한 빈 자리가 우리의 삶을 점령하고 지나가는 모든 것을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이에 우리는 겁에 질렸고 길을 잃었습니다.”

3월 27일 프란체스코 교황은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 전례 없는 상황을 묘사하였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서 성체 강복이나 전세계를 향한 축복(Urbi et Orbi)이 있었겠지만, 이날은 성당의 종소리와 구급차 소리만이 거룩함과 고통을 대변하듯이 이 메시지에 함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교황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전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는 위기이더라도 바로 이 시기가 “복음만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줄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찾고 이로부터 용기를 북돋을 수 있는 시간”1)이라고도 언급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짙은 어둠으로부터 발견하는 이미지 안에서 용기를 찾을 수 있다. 의기소침해지거나 두렵게 하는 이 순간에서 어떻게그러한 메시지가 다가올 수 있을까? 우리는 통계적으로 일어날 만하다고 일컫는 ‘가능성’에 익숙해졌다. 그 대신에, 때때로 이상적 세상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에는 시야가 좁다. ‘나는 가능성 속에 산다’라는 에밀리 디키슨의 시 구절에 나타난 바와 같은, ‘가능성 안에 머무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착되거나 낡은 규범, 양식, 구조”를 무너뜨리고 다른 세상에 눈을 여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요한 묵시록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교황은 “우리는 삶의 양식을 바꿀 준비가 되었을까요?”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전염병으로 느려진 세상 속 프란체스코 교황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이거나 영적인 자료를 제공할 필요성이 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처럼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퍼지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는 것은교회의 사명에도 도전이 된다”2)고 밝혔다. 또한, 우리가 실수한 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교황은 이에 대해 전세계적 차원의 지도자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몹시 병든 지구, 이익만을 좇는 경제에서 비롯한 전지구적 차원의불의, 오늘날 당장 중단해야 할 국제적 갈등, 각국의 폐쇄 정책이나 이기주의에 대하여 말해 왔다.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앞에 우리들의 약한 부분, 그리고 우리가 구축한 의제, 계획, 습관, 우선 순위로 여겼던 잘못되고 의미 없는 울타리가 드러났다.

이 변화는 복음의 “차고 넘치는 선포”와 “그와 같이 다가오는”3) 삶 사이에서 의 반응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우리에게 필요한 “혁신적인 시각”을 갖추는 길이다. 우리는 황금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렇다고 믿어왔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다시 출발”하는 자리에 부름 받은 게 아니라, “다시 시작”하도록 부름 받았다. 다시 출발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변화해야 하는 양식까지 자연스럽게 되돌리려 하는 성격을 지녀, 이 용어는 사용하는 게 이롭지 않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코로나19는 그 자체로 이질적이다. 혹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즉, 그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하여 우리의 시선을 갑자기 바꿨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각을 갖게 하였으며, 우리는 뒤엎어진 세상을 보았다. 지난 3월 27일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필요한 면역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이러스가 “병든 세상”을 드러내는 은유가 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은 세상의 악에 맞선 필요한 면역성의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전염병의 유행조차도 그 자체의 특징이나 지독한 성향에서 은유적으로 발상을 전환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전염병의 유행은 “희망의 전염”으로 이해된다.

코로나19를 통해 우리 앞에 갑자기 열린 거울 같은 공간에, 우리 모습이 비쳐졌다. 우리 모습은 뒤엎어져 있었지만, 동시에 이 터전은황량한 대도시, 사라진 교통, 텅 빈 벌판의 일부와 같은 도시들 등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효과는, 컴퓨터가 연결 중이거나 프로그램이 느려질 때 모니터에서 바퀴 모양으로 돌아가는 ‘톱니 바퀴’와 같다. 보통 느린 속도나기다리는 일을 참지 못하고, 멈춰버린 프로그램이나 느려진 연결에 작업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 바이러스로 인하여 ‘톱니 바퀴’는 더 오랜 시간을 끌고, 멈춰 버린 상태는 사회 생활, 관계에 대한 감각, 신앙 생활, 상업 활동, 존재의 가치 등에 영향을 미쳤다. 이래서 전염병은 우리가 종말에 맞닿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이 시기에 프란체스코 교황은 많은 일들에 관여하였다. 특히, 그는 바티칸 안에 위치한 산타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집전한 미사를 통하여, 로마에서 베이징까지 또는 베이루트에서 리마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을 위로하였다. 즉, 그는 적막함이 가득한우리 삶의 자리에 복음을 속삭였고, 성체 성사로 축복하였고, 죽음과 고통 앞에 눈물 흘렸고, 최선을 다해 생명을 찬양하였다. 그 위안, 위로, 도움을 청하는 기도는 많은 이들의 보금자리에 다가갔다. 그리고 이는 함께 동반하는 교회가 주는 첫 메시지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교황은 또한 지금 이 순간은 물론 미래, 가능성에 대한 시각 역시도 설명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쌓아 올리는 데에도 중점을 두었다.

그가 자신의 담화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일곱 가지 이미지가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한다. 그것들은 배, 불꽃, 땅 밑,(시인들의) 전쟁, 기름 부음, 창문, 은유로서 전염병 자체라 미리 간략히 밝힐 수 있다.

 

풍랑 속의

첫 번째 이미지는 배이다. 지난 3월 27일 저녁 6시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은 성체현시 이전, 그리고 로마에 전세계에 보내는 메시지(Urbi et Orbi)에 따른 축복 이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한 배에 올랐습니다. 이 배에서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어안이 벙벙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는 중요하고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 함께 노를 젓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모두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 배에 … 우리 모두가 있습니다.”

힘있는 이미지는 그의 담화에서 명확히 나타나며 맥락을 찾을 수 있다.4) 배는 ‘폭풍’을 만났다. 이 폭풍에 “우리의 약한 부분을 알아차렸고 그것들은 잘못이라는 게 드러난 채로 남았으며, 우리 의제, 계획, 습관, 우선 순위로 안전하다고 여긴 것들은 의미 없는 울타리라는 사실에 직면”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 차원의 전염병이다. 폭풍 하나가, 모든 이가 살아가는 현재 상태를 드러낸다. 거울은 현 상황의 이미지를 무자비하게 비쳐 보인다. 이 현실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 일어난 전쟁과 불의에 맞서 눈을 뜨지 않았으며, 가난한 이들과 몹시 아픈 지구의 외침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거친 바다에 던져졌고 ‘주님, 일어나십시오!’라고 그분께 간청합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한 강론에서 ‘홍수’의 이미지도 사용하였다.5)

이 거울을 들여다 보면 간청과 기도는 명확해진다. 고상한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 넘치는 기도라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행동도 나타난다. 이는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너진’ 삶을 ‘다시 바로 잡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배 위에서 항해하는 동안에, 우리는 “두려워도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저항을 해 온, 본 받을 만한 ‘여행의 동료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동료들은 누구인가? 프란체스코 교황은 뜬구름 잡듯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고, 항상 풍성하고 다양한 인물들을 현실로부터 끌어낸다. 그 동료들은 “의사, 간호사, 시장의 근로자, 미화원, 간병인, 운송업자, 경찰, 자원 봉사자, 사제, 수도자 및 홀로 자신을 구할 수 없다고 실감한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배는 근본적이고 인간적인 형제애를 이해하는 총체가 된다. 인종, 종교, 재산, 국적의 구분 없이 모두 그리고 누구나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놓였기에, 이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명백한 사실을 보여준다. 즉, 배는 바로 형제애를 의미한다.6)

2014년 9월 27일 예수회원들과 함께 한 미사 강론에서 교황이 언급한 저 내용은 이제 모든 인류에게 유효하다. 폭풍 앞에 마주 했을 때힘과 안전을 드러내고 뽐낼 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폭풍은 형제애를 발견하기에 이상적인 자리이다. 폭풍 앞에 놓인 상황은, 노를힘껏 내리쳐서 “일을 해결하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몸부림을 잠시 내려 놓은 채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좌절”을 끌어안게 한다. 더불어“모든 이가 부름을 느낄 수 있고 환대, 형제애, 연대를 새로운 모습으로 허락할 수 있는 공간”을 열고자 하는 용기를 틀림없이 발견하게한다. 믿는 이는 이 형제애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만이 북돋을 수 있는 창조성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것”임을 깨닫는다.

 

한밤에 켜진 새로운 불꽃

또 다른 이미지는 ‘불꽃’인데, 부활절 로마와 전세계를 향한 축복(Urbi et Orbi)의 메시지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이 가능한 상상의 두 번째 표현으로 제시했다. 만약 전염병 유행 초기에 ‘폭풍’이 있었다면, 지금은 ‘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고 지금은 거대한 우리 인류 가족에 부담을 주는 대유행에 괴로워하는 세상의 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밤’에 “교회의 목소리는 다시 울려퍼졌고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종종 밤이란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특별히 재임 초기 그는 브라질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언급했다. “그들의 밤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월 26일, 전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되던 시기 부활 삼종기도 연설에서도 교황은 이 밤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일도 없고, 오르막도 없으며, 예수님과 마주할 수 없는 밤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아주 적절하게 네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는 ‘밤’에 대해 강조하면서, 전염병이 유행하는 이 시대의 밤을 설명한다. 일반 시민들은 제재와 갈등 사이에 염려를 하며, 이는 유럽은 물론 국제적으로는 보다 더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네 가지 밤은 이 염려에서드러나는 상황에 대한 장면을 구성한다. “밤”에 관한 이 내용들은 주의 깊게 되짚어야 한다.

첫 번째 밤은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 시민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예측, 잃게 될 위험에 처한 일자리, 현재 직면한 위기가 가져올 결과 등을 우려하는 시간” 속에 산다. 교황은 “정치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모든 이가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고 상황이허락할 때 일상 생활을 재개하도록 필요한 수단과 도구를 제공하는 가운데, 시민들의 공동선에 대한 배려에 적극적으로 애쓰도록” 장려한다.

두 번째 밤은 ‘국제적 제재’로 나타난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국가가 각국의 시민에게 적절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각국이 전적으로 용납되지 않은 채 보다 가난한 이들을 지원할 경제적 책무를 줄여 가면서 현 상황의 중대한 요구에 대응하는” 제재를 완화할 수 있도록 호소하였다.

세 번째 밤은 ‘국가들 간의 이기주의와 적대’이다. 그리고 이 밤에 대한 내용은 유럽에 초점을 두고 다뤘으며, 산타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거행된 미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부활절에 교황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 많은 지역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럽을 떠올립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대륙은 과거의 적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연대하였고, 이 연대를 직접 경험하려는 마음 가짐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상황에서 그러한 적대가 다시는 유효하지 않고, 모든 이가 스스로 한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서로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 더욱 시급합니다. 오늘날 유럽 연합은 이 대륙의 미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미래가 좌우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혁신적인 해결책에매달리면서도, 더 뛰어난 연대를 시도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다른 길은, 평화롭게 함께 사는 삶과 다음 세대의 발전에 부담될 위험을 안은 채 이익을 좇는 이기주의와 과거로 회귀하려는 유혹뿐입니다.”

네 번째 밤은 ‘무력 분쟁’으로 나타난다. 이는 “세계 곳곳에 국제적이며 즉각적인 정전”에 대한 요구와 함께 한다. 더불어 “지금은 계속해서 무기를 생산하고 거래할 때가 아니며, 사람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데에 들어 가야 할 막대한 자본을 사용할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여기에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모잠비크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들, 리비아, 그리스, 터키, 베네수엘라 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

  코로나19 시대는 풀어야 할 매듭이 어떤 것인지 밝히며, 전염병의 유행에 대한 네 번째 밤은 이러한 시대를 맞은 세상에 관하여 넓은시각을 특징으로 한다. 세상의 “밤”에 대한 이 전망에는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가 책임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기를” 청하는 기도가따라온다. 교황의 세상에 대한 발언은 정치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비롯한다. 이를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는이들의 논법이 헛되다는 것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바티칸 외교 자체의 도덕적 리더십에 대한 원칙 역시 발전하기를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바티칸이 지니는 지정학적 균형이 뒤집어진 것을 직시하고 민주적 역동에 대한 확고한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밑과

치빌타 카톨리카 웹 사이트에 이탈리아어로 게시된 오스틴 아이브러이(Austen Ivereigh)와의 대담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저는 조언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땅 밑으로 내려갑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따라서 말입니다.”7)
땅을 보고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 땅 밑에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필요하다. 교황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역동을 설명하였다.
“며칠 전 라스베가스에서 찍힌 사진 한 장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는 노숙자들이 주차장에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텔들은 비었지만, 노숙자가 호텔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작업장의 불량품에 대한 이론을 봅니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로마에는 최고조의 격리 상태 중입니다. 한 경찰관은 한 남자에게 ‘거리에 머물 수 없고 자기 집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나는 집이 없습니다. 길에서 삽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눈을 뜨고서 ‘바라보기’를 청한다.
“가난한 이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을 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물건이 아닙니다. 불량품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유기된 동물에 대한 정책 마냥 복지 정책을 펼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땅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심하게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고 뚜렷한 형체가 없는 사회로부터 가난한 이의 고통 받는육체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버림 받은 이를 보는 것은 육체에 ‘손을 대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대담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젊은이들을 떠올리면서, 높고 낮은 관점이 뒤집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땅 속으로부터 시야의 방향성을 가리킨다. 사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앞을 더 내다 볼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한다. 이는 인터넷 사이트 비르질리오(Virgilio)와의 대담에서 사용한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트로이에서 패배한 아이네이아스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는 두 가지 방법을 찾았다. 한 가지는그곳에 남아 눈물 흘리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와 연관하여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마음 속에 간직한 것을 실천하고, 더 나아가고,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구절입니다. 이는 ‘나는물러섰고, 산에 오른 아버지에게 향했다(Cessi, et sublato montem genitore petivi)’입니다.”

 

시인들의 전쟁

전쟁 용어를 빌리자면, 이 상황은 바이러스와의 “전투”이다. 이 맥락에서 이 상황은 적의 침략이며, 시민은 이에 맞선 군인이고 조력자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말씀(logos)’은 ‘전쟁 그 자체(polemos)’에게 다가가는 길에 들어선다. “전쟁”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이 상징들 안에서, “떨어지고” 병에 걸린 이는 패배한 사람이다. 아픈 이는 패배자다.

실제로 교황은 전쟁에 관한 은유의 사용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 내용들을 상식에서 비틀어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다. 그는 부활절 주일, 대중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작성하였다.

“요즘 어려움과 깊은 고뇌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에 대해 전쟁에 은유 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항한 전투가 전쟁이라면, 이제 여러분은 더 위험하게 참호에서 싸우는, 정말 보이지 않는 군대입니다. 아무도 홀로 자신을 구할수 없는 요즘에 다시 꽃을 피우는 연대, 희망, 공동체 의식 없이, 군대는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였을 때에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분은 저에게 진정한 ‘사회적 시인들’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잊혀진 이들에게서, 소외된 이들의 더욱 긴급한 문제에 대한존엄한 해결책을 구상해 냅니다.”

은유를 사용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워 보인다. 은유 안으로부터는 임무를 부여하고 전쟁의 참혹한 의미를 비워내며, 밖으로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방식은 매우 흥미로워 보인다. 위험한 참호 속에서 싸우는, 보이지 않는 군대는 누가 구성하는가? 시인들, 즉 “사회적시인들”이다. 교황의 표현은 전에 사용된 적 없고 이해하여야 하는 내용이다. 누가 시인인가? 언어를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모든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보통 이야기, 평범하거나 널리 퍼진 말들을 표현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방법을 알고 호소할 수 있는 말을 만들 필요가 있다. 교황은 “소매를 걷고 여러분의 가족들을 위해, 여러분의 지역을위해, 공동선을 위해 일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5월 24일 부활 삼종 기도에서 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였다.

“건설적인 역사를 이야기하고 나누기 위해 우리 함께 용기를 냅시다. 우리가 형제처럼 서로 서로를 진정으로 돌본다면, 이 역사는, 우리 모두가 우리보다 더 큰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희망차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교황은 사회적 차원에서 기술이 군림하는 패러다임에 반대한다. 기술이 군림한다는 말은 시적인 표현으로, 국가나 시장에 중점을 둔다는 의미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중심에 있어야 하는 바는 사람, 공동체, 그리고 치유하고 돌보며 함께 나누기 위해 하나로 모인 민중”이라고 작성하였다. 시인이 모인 군대의 활동은 “치유”를 목표로 한다. 즉, 병이나 상처를 잘 다스려 낫게 하는 데에가치를 둔다. 치유는, “우리 삶에 대한 통제를 회복”하고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흔들며 “돈에 대한 우상 숭배를 끝내고 존엄성과 생명을 중심에 두는, 인간적이며 생태적 회심”을 열매 맺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섬김의 향기로운 기름 부음

프란체스코 교황이 사용한 네 번째 이미지는 2020년 4월 17일 잡지 ‘비다 누에바(Vida Nueva, 새 생명)’에 올린 기고문 “다시 떠오를 계획”8)에 나온 내용이다. 매우 풍성한 교황은 이 글에서, 우리를 “압도”하게 전염병이 유행하는 상황이, 부활의 “흘러 넘치는” 선포에 믿는 이들이 귀 기울이게끔 한다고 단언한다.9)

교황은 자신의 목표를 어떤 틀에 맞추는가? 그는 “우리는 의사, 간호사, 창고 작업자, 청소부, 간병인, 운송인, 보안군, 자원 봉사자, 사제, 수도자, 조부모, 교육자, 그리고 보살핌, 차분함, 상황에 걸맞은 격려를 조금이라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용기를 지닌 많은이들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다시 목록을 나열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 일련의 사람들을 “여행의 동료들”로 묘사하였고, 이제 4월 17일에는 향기로운 기름이 부어진 사람들이라 표현한다. 이 기름 부음은 크리스마 성유를 염두에 둔 것이며, 위안을 주는 기름과축복을 주는 기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어진 향유”는, 제자들이 받았던 위협, 즉 우리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따른 절망보다“더 멀리 퍼질 수 있는 특징”을 지녔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기름 부음은 끊임 없는 힘으로 확장되고 우리가 새로운 시선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관상하게 하기 때문에, 빈 틈을 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밝힌다.

고통 받는 인간성에 함께 하고 우리가 “보통 역사의 건축가이자 주인공”이 되게끔 하는 것이, 섬김의 향기로운 기름 부음이다. 이것은다시 한 번 중요한 내용이다. 기름 부음은 인간적인 형제애를 드러내는 보통 역사의 건설로 인도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이런의미에서 강렬하게 다가온다. 바이러스의 시대는 ‘의미의 시간(kairos)’, 즉 적절히 활용하기에 알맞은 순간이 된다. “우리가 ‘단 하나의민중’처럼만 행동한다면”, 세상의 “밤”에 대해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를 향한 시각으로 넘어 간다.

기름 부음은 “성령의 역동”을 지닌 리듬처럼, “지평을 열고”, “창조성을 일깨운다”. 정치적 측면을 지니는 담론은 영적이고 예언적인면을 띄게 된다. 주님은 “새로운 생명”의 원동력을 “역사의 이 구체적 순간에서 결실 맺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듯이, 바로 “지금이, 복음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현실주의와 함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용기를 찾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성령은 고착되거나 낡은 규범, 양식, 구조에 스스로 감춰지거나 착취되게 내버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 되도록, 성령은 그의 “모든 것을 새롭게(묵시 21,5)” 할 수 있는 자신의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아무도 잃지 않고 모두가 ‘모든 이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기회인 것 마냥 이를 시도해 봅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시각’이 없이는 그 누구의 미래도 있지 않습니다.”

 

창문과예방 사회’

올해 교황은 성유 축성 미사를 거행할 수 없었다. 이에 5월 30일 프란체스코 교황은 로마 교구 사제들에게 편지를 작성하여 보냈고, 여기에 우리가 강조할 법한 부정적 이미지를 담았다. 빽빽하게 찬 편지 안에, 그는 이메일뿐만 아니라 전화로도 자신의 교구사제들과의 일치를 꾀하는 의사 소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보여줬다. 이 “솔직한 담화”에서 그는 “필요하게 거리를 두는 일이, 사명을 마비시키고잠들게 하며 그만 두면서 스스로 물러서거나 봉쇄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항상 특정되지 않은 채 소비하려 드는 예방 사회의 이야기”이며, 바이러스에 의해 논쟁 거리로 놓였다. 이 위험성 앞에, “갈등에 직면한 문화적, 영적 면역력이 부족하다는 게 드러나는” 실정이다. 이 시기에 제기된 의문들이 봉쇄를 푸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님이 우리더러 걸어가도록 부른 ‘길을 고르게’하고 준비”하는 일은 필수적일 것이다. 따라서 “창문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는 것에 스스로를 가둔 채, 현실에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 이제, 부정적 이미지이다. 거리 두기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는 ‘창문’이다.

반면 교황은 “폭풍에 흠뻑 젖어 들어가는” 사제들을 칭찬한다. 그래서 “몰입”이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방언인 포르테뇨(porteño)를 즐겨 사용하고, 이 몰입은 이 지방 말로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고 호기심 있게 사건을 관찰한다는 말(balconear)이 아니다. 몰입은, 교회가 길 안으로 들어가 누비라는 의미(callejear)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친근하고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가 절뚝거리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이 필요성을 드러냈다. 3월 15일 일요일 오후, 그는 마치 순례처럼 로마 시내 비아델 코르소의 산 마르첼로 성당(Chiesa di San Marcello al Corso)까지 걸어갔다. 이 성당에는, 1522년 로마에 “흑사병의 대규모 창궐”이 끝나도록 로마에서 십자가 행렬 후 옮겨진 기적의 십자가가 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그의 기도와 함께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끝나기를간구하였다. 거리에 육신이 사라졌을 때, 그의 영적 권위는 완전하게 격리된 그의 몸에 집중되었다. ‘봉쇄’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기고 코로나19 이후 텅 빈 길을 예언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교황의 이 걸음이 필요했다.

대신 “창문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뭔가를 좋게 하거나 마비시키는 차원은 아니며 예방에 관한 이야기임을 확인한다. 창문의 논리는몰입에 관한 논리에 의하여 극복되어야 한다. 몰입의 논리는 새로운 길과 삶의 새로운 양식을 공들여 완성하도록 이끌며, 아래로부터 “젖어 들게” 하고 얽혀 들게 한다.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은유로서의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마지막으로, 교황이 전염병의 유행과 그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 담화에서 사용한 은유만 주목할 게 아니다. 일반적인 질병과 세계의아픔에 대한 은유처럼,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자체를 눈 여겨 보자.10) 2020년 3월 14일 성 마르타의 집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많은사람을 죽게 하고 우리가 알아 채지 못하는 많은 전염병이 유행하고, 우리는 거기서 다른 측면을 바라보자”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일부데이터를 상기시킨 후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 ‘굶주림, 전쟁, 아이들의 교육 기회에 대한 박탈’과 같은 다른 전염병이 유행하는 것도 막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활절 주일 강론에서 교황이 강조한 “전염병의 유행”은 “무관심한 이기주의”라 불리는바이러스의 유행이었다. 따라서 영적인 측면과 사회적 관계 아래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바이러스는 상징과 이미지를 지닌다.

 

, 불꽃, ,(시인들의) 전쟁, 기름 부음, 창문,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여기에 일곱 가지 이미지가 있다. 배, 불꽃, 땅 밑,(시인들의) 전쟁, 기름 부음, 쓸모 없는 창문, 은유로서 전염병의 유행 그 자체이다. 이것들은 가능성에 대한 이미지라는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조각들이다. 어떤 조각은 경계하게 하고 어떤 조각은 용기를 북돋는다. “믿음은우리에게 현실적이며 창의적인 이미지를 허락하고 이 이미지는 되풀이, 교체, 보존하려는 논리를 내버리게 할 수” 있고, 우리가 “현실에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11) 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일곱 가지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의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따른 것은 아니며 인간의 의지에 중점을 둔 것도 아니다. 문제를 헤아리기까지 하는 성령의 활동에 내어 맡긴다. 그는 인간 그리고 그의 이성 안에서, 권한과 결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활동에 확고한 믿음을 지녔다.

운영 체제가 돌아갈 때 나타나는 ‘톱니 바퀴’ 앞에서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위기 안에서 세상에 “거울” 역할을 할 것이라 교황은 가치를 매겼다. 그러나 결국 거울은 복음 자체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프란체스코 교황의 담화를 믿음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두 눈으로 보는 태양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치지 못하는 사시와 비슷한 시각으로, 왜곡된 시야 아래 담화의 겉을 바라본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즉,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은 묵시적 글에 들어가는 열쇠, 회심으로의 초대, 죽음과 부활에 대한 파스카적 열쇠와 결합하여, 신학적으로 전개된 것이다.12)

교회의 임무는 2013년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대담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교회는 “야전 병원”13)이 되며, 인간성이 받은 상처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고상한 말을 난발하라고 부름 받은 게 아니라 복음적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부름 받았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시선의 전환이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적 취약성에 대한 인식과 복음에 입각한 현실주의에 대한 이미지 자체를모두 요구하는, 다른 세상을 위한 시간이다.


1) Francesco, «Un plan para resuscitar. Una meditación», in Vida Nueva, 18-24 aprile 2020, 8-11.
2) Id., «Messaggio per la Giornata Missionaria Mondiale 2020». Francesco, in una Lettera ai sacerdoti della diocesi di Roma del 30 maggio 2020, 그는 비유를 제시하고 최초의 사도 공동체가 어떻게 “갇힘, 고립, 두려움, 불확실의 순간을 살았는지” 기억한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근 지 50일이 지나 “그들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킬 초창기의 선포”를 수행하였다.
3) Ivi.
4) 이 배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2014년 9월 27일 예수회 회복 200 주년을 기념하는 미사 강론에 사용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예수회에게 “그러니 노를 저으십시오! 여러분은 강합니다. 역풍이 불더라도 노를 저으십시오!”라고 말했다. (Francesco, «Remate dunque! Remate, siate forti!», in Civ. Catt. 2014 IV 108).
5) Cfr Francesco, Omelia nella Messa a Santa Marta, 14 maggio 2020.
6) 프란체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우리는 함께 사는 ‘신비’, 서로 어울리고 만나고 서로 감싸고 지지하며 이 흐름에 참여하는 신비를 발견하고 전달하도록 도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 흐름은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형제애의 진정한 체험과 연대의 행렬과 거룩한 순례가 될 수 있습니다.”(87항)라고 말한 바를 떠올릴 수 있다. 교황은 버스와 지하철에서와 같이 사람이 몰리고 익숙한 교통 수단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그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이미지 안에서 세상의 공통된 추이와 보편적 유대가 있는 감각을 드러낸다.
7) A. Ivereigh, «Il Papa confinat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in www. laciviltacattolica.it/news/il-papa-confinato-intervista-a-papa-francesco/, 8 aprile 2020.
8) Cfr Francesco, «Un plan para resuscitar…», cit.
9) Cfr D. Fares, «Il cuore di “Querida Amazonia”. “Traboccare mentre si è in cammino”», in Civ. Catt. 2020 I 532–546.
10) 이는 고유하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프란체스코 교황의 담화 안에서 보건과 관련한 용어를 유연한 방식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구원의말씀은 보존 되었고 ‘살균 되었으며’ 안전한 자리를 찾지 않습니다”(Francesco, Omelia per la domenica della Parola di Dio, 26 gennaio 2020)라고 이야기하였다. 2019년 9월 5일 모잠비크에서 예수회원과 담소를 나누면서 그는 “오늘날 우리는 ‘살균된’ 사회학적 유형에 유혹을 받습니다. 한 나라가 마치 수술실처럼 여겨져 모든 곳이 ‘살균된’ 것처럼 여기려 합니다. 내 인종, 내 가족, 내 문화가 더러워지고 위협 받으며 감염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A. Spadaro, «La sovranità del popolo di Dio”. I dialoghi di papa Francesco con i gesuiti di Mozambico e Madagascar», in Civ. Catt. 2019 IV 3-15)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살균”이라는 단어는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부정적 의미의 어법이라 이해할 수 있다.
11) Francesco, Lettera ai sacerdoti della diocesi di Roma, cit.
12) Cfr L. Oviedo Torró, «La teologia en tiempos de pandemia», in Razón y fe, 2020, 281.
13)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3 III 449-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