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기본소득 – 긴급한 공동식별

UNA «RETRIBUZIONE UNIVERSALE»: Un urgente discernimento collettivo

© La Civiltà Cattolica, Q. 4078, 6 Giugno, 2020 II, 429-442
Gaël Giraud S.I. 가엘 지로 신부 (예수회)1)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광주 대교구) 옮김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4월 12일, 부활절에 발표한 전세계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에게 보낸 서한> 에서 기본적인<보편적 기본소득> 수립을 촉구했다.

“이제 보편적인 기본 보상의 형태를 고려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수행하고 있는 고귀하고 대체 불가능한 과업을 인정해주고 품위를 부여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권리 없는 노동자는 없다.’ 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외침을 보장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급여가 [보편적 기본소득]입니다.”2)

이 제안은 열광적인 반응과 비판적인 반응을 함께 일으켰다. 그의 이 주장은 교황이 모든 이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불될 보편적인 소득의 입장을 취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한 임금의 원칙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진짜로 조건 없는 보편소득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복음적인 관심이 우리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인 조건들을 잘 평가하도록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가? 혹은 단순히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것들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실시되는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한 ‘중세적’ 조치(강제 격리와 통제)는3), 적어도 1930년대에 서방이 겪었던 것처럼 지구상 대부분의 지역을 경제 대공황으로 몰락시킬 수있을 정도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2020년대 10년 동안, 유럽과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도 계속 따라다니게 될 실업과 빈곤이 커져가는 와중에, 이 ‘보편적 기본소득’은 통화수축(디플레이션)의 덫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줄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여길 수 있을까? 이것이 세계적 빈곤이라는 거대한 도전도 해결하도록 기여할 수 있을까?

  신학적 문제

로마 주교의 서한에서 제기된 주요한 문제는 민중운동 단체의 형제·자매들과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인정이다: <현행 제도로 인해 여러분은 정말로 보이지 않기invisibili 때문에, 수차례 여러분이 자격을 갖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시장(市場)이 옹호하는 해결책들은 외곽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기서는 국가의 보호도 부족합니다>4).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헌금함에 자신의 봉헌금을 조심스럽게 넣는 과부를 향하여 지니셨던 것과 똑같은 신중한 시선으로(마르코 12,38-44 참조) 이 <사회적 시인들>의 ‘보이지 않음’(불가시성不可視性 invisibilità)과 싸우도록 초대하신다.

이러한 도전은 영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이는 분명히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시선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지만, 또한 우리 사회의 외곽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보이지 않음’을 양산하고 지속시키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요구한다5). 공적인 자리에서 눈에 띄게visibili 드러날 가능성은 온전히 개인의 능력에만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합법화하고 향상시키거나, 혹은 정반대로 이를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신용을 잃게 만드는 사회적 규칙들에 달려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자격이 전혀 아니며, 우리 존재의 양식을 확정하거나 부정하는 사회적인 방식이다6). 좌천, 소외, 일자리 부족 등은 사람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모든 형태의 참여방식으로부터 말소시키고 제외시킨다; 종속 노동자, 임시직, 외면당한 이들, 실직자, 과부, 고아, 난민, 무주택자, 환자들이 언제나 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변두리화를 지속시키는 이 ‘보이지 않음’을 배격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제도 개혁은 어떤 것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본지와의 대담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전통이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교회 안에서 더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을 <비제도화>시키고 미래를 <제도화>한다7). 성령의 이러한 창조적 붕괴는 교회 제도에만 국한될 수 없는데, 이는 적어도 교회 제도 것들이 추상적으로in abstracto발전되지 않고, 하나의 특정한 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역사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표현한 <무질서>와 <조화> 사이의 영적인 긴장은 우리의 모든 제도들을 관통하고 있다8). 이런 제도들을 개혁하는 것은 신학의 문제인데, 이는 또한 시민들의 소득을 결정하기 위한 것과 같은 세속적인 제도들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 혹은 보편소득

<보편적 기본소득>의 제안은 이러한 영적이며 정치적인 질문의 지평 안에 접목된다. 직장을 가진 이들에게 한정된 최저임금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건 없이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소득의 문제인가?

이러한 구별에 있어서 전문가인 경제학자들에게는 교황의 표명은 애매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기독교 노동자연합의 총무인 죠세프 투브넬(Joseph Thouvenel)과 같은 노동조합주의자의 눈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점은 <무위도식하는>9) 이들을 위한 변명으로 해석될 수는 없지만, 토마스 아퀴나스가 형상화했고, 후에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헌장’(Rerum novarum) 회칙에 다시 언급한 <정당한 임금>의 이론에 대한 암시일 수 밖에 없다. 이 경우에는, 교황의 제안은 보장된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실, 현재 노동 <시장> 의 세계화는, 논리적으로 모든 가능한 변이(變異)를 피하도록 해주는 규칙들도 세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수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특정한 나라나 혹은 다른 나라에서 최저임금을 제정한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활동을 다른 곳으로 아웃소싱(외부위탁)하도록 회사들을 장려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팰리(Thomas Palley)10)를 포함한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구의 모든 나라들의 중앙값임금의 50%에 해당하는 최저임금을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최저 월급을 (지금의 500 유로가 아닌) 대략 1,860 유로로 고정하는 것과 일치할 것이다. 이탈리아 노동력의 1/4이 현재 이 금액보다 낮은 봉급을 받고 있고, 이 비율은 향후 몇 년간 증가할 위험이 있다. 사람들이 보통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것이 실업을 폭발적으로 늘리지는 않을 것이고11), 제품들의 가격을 아주 조금 증가시킬 것이며12), 다른 한편, 독일에서도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어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사한 <보편적 기본소득>의 수혜자들의 명단은 엄격한 의미에서의(stricto sensu) 봉급자들의 범주를 넘어간다: <행상인, 수집가, 순회오락장 종사원, 소농들, 벽돌공,재봉사, 다양한 조력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 […], 불안정 노동자들, 자영업자들, 비공식 분야나 서민경제 종사자들, 여러분은 이 순간을 견뎌내기 위한 고정적인 봉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13). 교황의 서한에 대한 다양한 번역들은 <임금>(salario)라는 용어가 엄격하게 해석될 수 없다고생각하게 한다: salaire, salarios, salário 그리고 wage도 있고, 또한 Grundeinkommen 과 retribuzione(보수) 등의 용어도 있다. ‘보이지 않음’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들은 또한 <환자들과 노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대중매체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땅을 계속해서 경작하면서도, 열매들을 독점하거나 사람들의 삶의 필수품들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하지 않는 농부와 소농들도 마찬가지입니다>14).

그러니까, 교황의 제안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모든 <노동자들>을 향한다. 예를 들어, 주부는 그의 봉사가 시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GDP(국내총생산)의 계산에 전혀 고려되지 않는데, <노동력>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는가? 노동자들을 노동자로 특징 짓는 하나의 status(신분)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 <노동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결하고자 하시는 그 문제가 바로 그들이 이 ‘보이지 않음’ 속에 있다. 우리는 그 답이 ‘보이지 않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고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의 문화는 […] 변화와 숙고, 그리고 재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 변화를 만들어 가는데 필수적인 사람들입니다>15).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구하시는 이 <보편적 기본소득>의 특징들을 결정하는 것은 이 무명의 노동자들의 과제가 아닐까? 그래서 <이 세가지 T […]; tierra, techo, trabajo (땅 –여기에는 그 열매, 즉 음식이 포함해서-, 집, 노동)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16)이 그들 스스로가 더 적합하다고 여기는 조건들 안에서 그들에게 보장되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최저임금과 보편소득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들은 사회의 중심부에 속하는 이들이 주로 끌고 간다.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발언권이 없는 이들에게 발언권을 줘서, 그들이 중심부가 부여한 정의와 standard(표준)으로 인해 폭행을 당하기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보편적 기본소득>이 가져야 하는 의미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중심으로부터 외곽으로의- 관점의 전환은, 예를 들어, ATD-제4세계 운동17)과 조제프 레진스키 신부의 사상을 이끌어주었다18).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몇몇 경제학자들의 접근에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2002년에 프랑스에서, 일반 시민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실현된 불평등과 빈곤의 기압계 (Bip40)처럼, 참여 기준의 통계 지표를 구축하는데 기초가 된다19).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예언자적 개혁인가?

그러니까, 기본소득을 위한 프랑스의 이 운동이, 교황이 “보편소득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20)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것은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발언권이 없는 이들이 자신을 위해서 원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조건하에서 그런 것이다. 인간의 품위에 대한 존중은 이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제안하는 해석은, 우리 변두리의 ‘보이지 않는’ 이들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사하는 “보편적인 보수”가 상식선에서의 “보편소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수반한다.

보통 보편소득을 규정하는데 사용되는 기준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1. 정기적인 불입.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2009년에 재정위기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보낸 900달러의 일회성 수당이나, 트럼프 행정부가 얼마 전 미국 가정들에 지불한 1,000달러의 그것들과는 다른 것이다21).
  2. 금전적인 송금. 즉 자연물은 아니다. 이는 모든 이에게 자신의 돈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은행계좌의 개설과 같이, 극빈자 중 많은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작업을 전제로 한다.
  3. 개인적인 공헌금: 지불은 개인적인 기준으로 집행되고, 예를 들어, 세무적인 관점에서의 가족의 기준으로 집행되지않는다.
  4. 보편적: 어떤 특별한 자격요건에 매이지 않는다.
  5. 무조건적: 지불은 수취인에게 어떤 의무, 특별히 노동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몇 가지 숫자를 기억해보자. 세계은행은 극빈자의 한계를 구매력과 동일하게, 1일 보수 1.9 달러 수준으로 잡았다. 그러나 경제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의견은, 이 협약이 품위있는 삶을 영위할 능력을 갖춘 건강한 인간의 실제적 요구들을 광범위하게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하루에 7.4달러의 최저소득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22).

2018년에는, 4천2백만이 넘는 사람들(전 세계 인구의 60%)이 아직 이 기준 이하에서 살고 있었고, 이 숫자는 lockdown(폐쇄)가 가져올 치명적인 결과로, 앞으로 몇 개월간 현저하게 늘어날 것이다. 이 국민이 이 기준점 위에서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얼마의 연간수입원이 필요할까? 구매력 평가에 대한 계산의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최대 13조 달러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숫자가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2018년 중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에 근접한다. 그러나, NGO Oxfam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해에, 지구의 1%의 최고 갑부들이, 연간 소득 56조달러(전세계 총생산의 80%) 를 차지하였다. 이 소득의 1/4만 징수한다면, 이로써 기본소득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하루에 7.4달러(혹은 그 이상)의 기본소득을 공급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징수>를 한다고 해도, 대부호들 중 최고의 백분위23)에 해당하는 이들은 아직도 개인당 월소득이 평균 47,500달러에 이를 것인데, 이것은 그들이 <품위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충분할 것이다.

  “보편소득은 좌파에도 우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의 부류들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징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정치적으로 쉽다는 주장을 우리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숫자들은, 일반적으로 확신하는 것과는 반대로, 기본소득의 공급 문제가 <자원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시켜준다. 같은 방식으로, 만일, 유엔의 추정에 따르면, 세상에서 8억2천만 명의 사람들이 아직 기아에 허덕인다면 –그리고 이숫자는 불행하게도 현재의 긴급상황으로 인해 수개월 안에 늘어날 것이다 -, 이것은 지구에서 생산된 바이오매스(Biomass; 생물자원)가 인류를 부양할 수준에 못 미쳐서가 아니다. 이는 부의 분배에 관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결핍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상상은, 관대한 제안은 불가능하다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게 만들지만, 이는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우리는 – 비록 생태학적 위기로 위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 풍성한 지구에 살고 있고, 비록 lockdown(폐쇄)와 제한의 문제로 현저하게 더 가난해질 위험이 있지만, 굉장히 부유한 세계 경제 안에서 살고 있다.

  보편소득의 두가지 형태

그들의 구체적인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 형태의 <보편소득>을 구별해야 한다. 첫 번째는, <우파>라고 말할 수 있는, 경제적 효능의 기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또 하나는, <좌파>, 즉 사회적 정의에 대한 열망으로 정향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적인 구별은 우리로 하여금 즉시, 간편한 양분법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보편소득은 좌파에도, 우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 부류들을 관통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형태의 기본소득은 시카고의 경제학자 Milton Friedman24)이 한 작업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적 이동을 대체하기 위해서 고안되었고, 그렇게 최저임금의 도입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노동 시장>의 추가유연성에 대한 희망과 연대성을 위한 공적 비용의 축소, 혹은 국가의 편에서는 시민들의 노동소득을 결정하는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에 대한 희망까지도 키워나간다.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서 <더 융통성 있고 유연한> 사랑은 그렇게 가난과의 전쟁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되찾을 것이라고 Friedman은 주장한다.

이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최소한의 생계비 수입을 보장하는 것과 동등할 것이며, 이는 시민의 “예비군”을 노예로 만들고, 시민들은 자신의 일상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조건하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러한 유형의 우려는 노동조합 세계의 한 부류가 보편소득을 거부하게 독려할 것이다.

기본소득에 관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치적 도구화와는 별개로, 그래도 그의 영향력은 단순함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없다. 아무런 조건이 없으면, 전통적인 사회적 이전25)의 수혜자들을 식별하는 데 필요한 행정 절차의 비효율성을 단축시킬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은 너무나 자주 이 때문에 자신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향유하기를 포기한다. 그 결과로, 어떤 나라의 공공행정이 약할수록, 혹은 사회적 이전의 시스템이 복잡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경우, 보편소득에 대한 선택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러한 동기로, 자신들의 정치적 감수성에 상관없이, 다양한 경제학자들이 전세계 남반구(南半球)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소득을 실천에 옮기도록 권하고 있다26).

두 번째 형태의 보편소득은, 적어도 1986년부터, Guy Standing이 옹호하고 있는데, 그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약칭 BIEN)27)의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첫 번째 형태와는 다르게, 이것은 보충소득이 될 것이고, 따라서 이미 사회적 이전이 진행 중인 곳에서는, 그것의 대체형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산층과 민중 계급의 재정불안에 관해 증가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며, 특히 다른 종류의 노동관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몇가지 상황에서의 이루어진 노동조건의 비인간화가 – 여기에 대해서는 2013년 방글라데시에 있는 Rana 광장의비극이 상징이 되었다 – 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생존하기 위해 어떠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부유한 국가들에서도 이런 종류의 보편소득은 확실하게 소위 bullshit jobs28)(<허드렛일>)을 없애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직업은 우리의 공공업무와 개인 회사에 고용된 이들 중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데, 만일 내가 일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면, 왜 사회적으로 쓸모 없고,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직업을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도구는 근본적으로 어떤 노동관계에서든, 그것이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안에 내포되는 교섭의 용어들을 근본적으로 전도(轉倒)시켜버릴 것이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계약권을 강화시키면, 이는 확실하게 경제의 부가가치에서 자본 소득의 비율 감소와 직장 소득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대다수를 희생시키면서 40 년 동안 기록된 역추세를 바로잡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이 끝나고, 먼저 산업화된 대부분의 국가에서, 근로 소득의 비율이 GDP의 70-80%에서 60%로 낮아졌다.

보편소득에 대해 <진보적> 옹호자들이 부여한 장점에 대해 자주 반대자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주어진 소득은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만드는 구실을 제공하지 않을까?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지는 못할망정, 혹시 인간관계를 분열시키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들 뒤로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두가지 정치철학이 예견된다: 한편으로는, Thomas Hobbes 나John Locke의 철학인데,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의 원자(原子)요, 심지어 늑대이며, 단지 이익을 위해서만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으로 엮어 들어가는 고독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하는 관계적 인간학이 있다29). 이 두 번째 관점에 따르면, 그 자체로서의 인류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의 배경 위에서만, 나의 특별한 이익을 추구하는 환원주의(還元主義, riduzionismo)도 설 자리가 있다.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의 도움으로 이러한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가? 2010년부터 많은 국가들이 기본소득을 통한 경험들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세계적 전염병 이전부터 이러한 기준을 위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증언하지만30), 때로는 정부가 열망이 부족하며, 이런 경험들을 수반하는 정치적 논쟁이 길어진다는 것이 드러났다. 비록 제한된 용량을 가진 수단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것들이 때가 되기 전에 중단되었다.

캐나다에서는 4,000 캐나다 달러의 기본소득이 주는 영향을 시험하기 위해 2018년에 착수된 Ontario Basic Income Pilot Project (온타리오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젝트)가 갓 선출된 보수적인 정당에 의해 몇 개월 만에 취소되었다. 목표는 확실한 부양, 스트레스와 걱정, 건강–정신적 건강을 포함하여 -, 주택, 교육, 그리고 노동세계에의 참여에 대한 기본소득의 효과를 시험하는 것이었다31).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만일 기본소득이 모든 이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그렇게 확실하다면,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게 하는 것은 어떤가? 실제로, 최저임금(혹은 그것의 상승)을 실험하는 것이 자주 그의 반대자들이 예견한 것에 반대결과를 보여주었다. 즉 봉급과 노동 시간이 일반적으로 인상되었고, 실업이 축소되었다32). 기본소득이 다수의 이익을 가져다 줄 거라는 것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건 아닌가?

2014년에 인도에서 행해진 실험에서, 화폐의 교환이 제한적인 환경에서 유동성을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편소득을 테스트하는 목표를 설정했다. 끝까지 수행될 수 있었던 이 실험의 결론은 희미하지만, 매우 긍정적이다. 그 결론은, 사회적 결과로 인해 보편소득의 경제적 “가치”가 각 수령인에게 할당된 명목 금액을 훨씬 초과한다고 제안한다33). 결국, 금전의 전이에 대한 수차례의 실험이 Namibia와 인도, 그리고 남반구의 10여개 국가에서 좋은 결실을 맺었고, 10여년간 비웃음을 받았지만, 지금은 많은 분석가들이 이를 <발전의 열쇠>34)로 보고 있다.

  세상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공재

1982년부터 알래스카에서 진행된 경험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실제로 매년, 석유배당의 일부가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주민들에게 분배된다. 금액은 – 시기에 따라, 연간 1,000달러에서 2,000달러 사이35) – 위에 언급된 대로, 하루에 7.4달러의 빈곤선의 규모에 해당한다. 미국의 중산층 삶의 질을 고려한다면, 분명히 적은 금액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알래스카 주가 사용한 원칙이다: 그것은 실제로는 주민 각자에게 속하는 석유라는 공동선을 개발할 권리에 대한 보상이다.

보편소득을 공급하는 원초적인 방식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한걸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217년 산림헌장Carta foresta (The Charter of the Forest)는 영국 농민들에게, 나무와 물을 저장하고, 가축의 무리에게 먹을 것을 줄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공공재commons – 숲, 목초지, 산악 목초지, 강 -을 향유할 권리를 주었다. 영국은 대부분의 국민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권리를 공식화했다. 이는 로마법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배치된 공공재res communis의 범주에서 최고 계급의 재산으로 이미 인준한 것이었는데. 이에 비해 사유재산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미 15세기에 영국의 귀족들은 인클로저enclosures운동(울타리로 공유지를 사유화)을 벌여서, 공공재의 경계를 좁히고, 그때 이후로 그것들을 지역 영주의 독점재산이라고 선언했다. 가난한 농부들에게서 모든 형태의 생계를 빼앗음으로써, 이 운동은 그들을 도시로 밀어냈고, 그들은 비참하게 생존수단을 찾아야 했다. 농촌으로부터의 이러한 탈출이 없이는 산업혁명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러한 공공재의 민영화가우리가 3세기 전부터 알고 있는 임금노동의 비인간적 형태를 만들어내고 독려했다36).

기본소득은, 비록 부분적으로만 보편적이라고 해도, 이 잘못된 논리를 깨뜨릴 수 있다. 이러한 도구가 민영화의 만능주의로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될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 인클로저의 두 번째 움직임으로 변환되어 생태계가 주는 재화와 서비스, 인간 유전자 정보, 지적 재산, 예술작품 및 잠재적 인간활동 전반과 같은 새로운 공공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한가?

알래스카 사례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해답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전세계 공공재를 개발한 데서 오는 소득 일부를 기본소득을 공급하기 위해 재분배하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가? 이것이 바로 교회의 교부들과 교회의 사회교리에 부합하는 재산의 보편적인 목표를 충족하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예를 들어, 대기권은 분명히 전 세계의 공공재다. – Stern-Stiglitz 위원회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37) – CO2 톤당 120 유로의 세계 탄소세38)는, 배출량의 70%를 담당하는 100개 다국적 기업에 적용된다면, 연간 3.1조 유로의 수익을 창출할 것이다. 이 세금은, 다른 모든 유형의 문제로 확장한다면, 4,430억 유로를 제공할 것이다. 이는 국제 기금39)으로 관리한다면, 이 수입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배될 수 있다40). 이것이 인류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현재 조세 피난처에 숨겨져 있는 32조 달러의 27%의 세금만으로도, 모든 사람이하루에 7.4달러 이상으로 생활하는데 부족한 것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으므로, 토지, 산림 또는 폐기물(“공동의 악”)의 소유권으로 발생하는 소득에도 글로벌세금이 부과될 수 있다.

어떤 옵션을 선택하든, 모든 이해 당사자와 상의한 후에 실행해야 한다. 사실, 만일 기본소득이 부분적으로만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면, 많은 다른 질문들이 기본소득의 수혜자에 대해 발생한다. 앞으로 수년간 젊은이 중 대부분이 유럽에서일자리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예를 들어, 25세 미만으로 제한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그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한,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진정으로 유익한 집단적 식별은 이루어질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중 운동의 노동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여러분들의 태도는 저에게 도움이 되고, 제가 고민하게 하며,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41).


1) 편집자주: Gaël Giraud, 예수회 사제, 경제학자, 파리 국립과학연구원 소장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CNRS), 제목은 불어 원문 «Le “Salaire Universel”. Enjeu d’un discernement collectif» 직역; 영문판 “A Universal Wage: An urgent social debate”
2) 프란치스코 교황,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에게 보낸 서한> Lettera ai movimenti popolari (2020.4.12)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letters/2020/documents/papa-francesco_20200412_lettera-movimentipopolari.html
3) 참조: G. Giraud, <코로나19 위기 이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Per ripartire dopo l’emergenza Covid-19», Civ. Catt. 2020 II 7-19; 영문“Starting anew after The COVID-19 Emergency
4) Francesco, Lettera ai movimenti popolari, cit.
5) 이러한 도전은, 예를 들어 Axel Honneth, Paul Ricœur 그리고 Judith Butler 가 한 성찰의 중심에 있다. A. Honneth, La lutte pour la reconnaissance(인정을 위한 투쟁), Paris, Cerf, 2000; P. Ricœur, «Parcours de la reconnaissance»(인식 여행), in Mondes en développement, Paris, Stock, 2004; J. P. Butler, Giving an Account of Oneself(자신의 계정을 제공하기), New York City, Fordham University Press, 2005 참조.
6) G. Le Blanc, L’invisibilité sociale (사회적 보이지 않음), Paris, PUF, 2009. 이것은 또한 2019년에 프랑스 감독 Louis-Julien Petit 가 만든 영화 <보이지 않는 사람들 Les invisibles>의 주제이기도 하다.
7) 참조: A. Ivereigh, «Il Papa confinat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경계선에 선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인터뷰), La Civiltà Cattolica 홈페이지, www.laciviltacattolica.it/news/il-papa-confinato-intervista-a- papa-francesco.
8) 이런 주장은 Ch. Theobald, Le christianisme comme style. Une manière de faire de lathéologie en postmodernité, vol. 1, Paris, Cerf, 2007 (tr. it. Il cristianesimo come stile. Un modo di fare teologia nella postmodernità – 이태리어본. 형식으로서의 그리스도교사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학하는 방식-, vol. 1, Bologna, EDB, 2009)의 신학 안에서 중심사상이다.
9) 참조: J. Thouvenel, 보편소득, 노동자 최악의 적 «Le revenu universel, meilleur ennemi des travailleurs», in Valeurs (2020.4.18)https://bit.ly/2Lw3ckZ
10) 참조: Th. Palley, 전세계 최저임금 체계 «A Global Minimum Wage System», in FT Economists’Forum (2011.7.18) http://thomaspalley.com/?p=182
11) J. Schmitt, Why Does the Minimum Wage Have No Discernible Effect on Employment? (최저임금은 왜 고용에 가시적인 효과를 주지 않는가?), Washington, Center for Economics and Policy Research, 2013.2) https://bit.ly/360t5CZ
12) 특히, 제1차 재료의 가격이, 세계적 대전염병의 유행으로 인한 공급 사슬의 차단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는다면, 서양에서는 디플레이션(통화수축)의 배경 안에서 나선형 인플레이션의 위험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노동비용의결과는 아닐 것이다.
13) Francesco, Lettera ai movimenti popolari, cit.
14) 같은 곳.
15) 같은 곳. 이탤릭체는 저자의 것임.
16) 같은 곳.
17) ATD 제4세계(Agir Tous pour Dignity, Quart Monde)는 요제프 레진스키(Joseph Wresinski;1917~1988)신부가 파리 근교 극빈층 주거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만든 빈곤퇴치운동 목적의 비영리단체이다. 프랑스 정부는 물론 유엔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초석을 놓았다. 역자주.
18) G. Mucci, «Joseph Wresinski. Un costruttore sociale»(조제프 레진스키. 사회적 건설자), in Civ. Catt. 1996 I 436-445 참조.
19) https://bit.ly/3cvlxuB 참조.
20) G. Normand, «Le Pape François s’approche de la cause du revenu universel», in revenudebase.info (https://bit.ly/3btqVNA), 2020년 4월 16일.
21) 이것들은 오늘날 유럽에서는 환영받을 만한 발의들이다.
22) 참조: D. Woodward, «Incrementum ad Absurdum: Global Growth, Inequality and Poverty Eradication in a Carbon-Constrained World» (부조리의 성장: 탄소 제한 세계에서의 세계 성장, 불평등 및 빈곤 퇴치), in World Social and Economic Review (https://bit.ly/2WVytTQ), 2015년 2월 9일.
23) 백분위는 자료의 특정값이 전체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백분율로 나타내고자 할 때 쓰는 수학용어로, 최고의 백분위에 해당하는 이들은 최상위 1%에 해당하는 이들을 말한다. 역자주.
24) M. Friedman, Capitalism and Freedom(자본주의와 자유),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참조; Id., «The Case for the Negative Income Tax: A View from the Right»(마이너스 소득세의 경우: 법으로부터의 관점), i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Symposium on Guaranteed Income, Washington, D. C., U.S. Chamber of Commerce, 1966년 12월 9일. 이 제안은 즉시 케인즈(영국의 경제학자)적인 경제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졌고, 이는 처음부터 양면성을 지적하고 있다.: J. Tobin – J. A. Pechman – P. M. Mieszkowski, «Is a negative income tax practical?»(마이너스 소득세는 실용적입니까?)(세금, in The Yale Law Journal, vol. 77/1, 1967년 11월 참조.
25) 사회적 이전(trasferimenti sociali; social transfers)은 정부나 시민단체가 가난한 이들이나 가난으로 추락할 위험에 있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사회적 도움을 말한다. 이 ‘사회적 도움’은 현금이나 다른 물품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사회의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 예를 들면, 직장인들이 노인들에게, 건강한 이들이 병자들에게, 혹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수입이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역자주. https://www.social-protection.org/gimi/ShowTheme.action?id=11 참조.
26) M. Ghatak – F. Maniquet, «Universal Basic Income: Some Theoretical Aspects»(보편적 기본소득: 몇가지 이론적 측면들), in Annual Review of Economics 11 (2019) 895–928 참조.
27) https://basicincome.org/ 참조; 2017년 다보스 포럼에서 Standing이 한 연설도 보라, in https://bit.ly/3buxu2f.
28) D. Graeber, Bullshit Jobs: A Theory, New York, Simon & Schuster, 2018 (tr. it. Bullshit Jobs, Milano, Garzanti, 2018) 참조.
29) Ch. Theobald, Selon l’Esprit de sainteté. Genèse d’une théologie systématique(성화의 영성을 따라서. 조직신학의 탄생), Paris, Cerf, 2015 참조.
30) 참조:, 예를 들면, il rapporto commissionato dalla Scozia(스코틀랜드가 요구한 보고서): A.Painter – J. Cooke – I. Burbidge – A. Ahmed, A Basic Income for Scotland(스코틀랜드를 위한 기본소득) (https://bit. ly/3fPbBxW), 2019년 5월 참조.
31) Ontario Basic Income Pilot Project 에 대해서는, https://bit.ly/2y4yUD2 참조
32) P. Constant, «New UW Report Finds Seattle’s Minimum Wage Is Great for Workers and Businesses», in Civic Skunk Works(https://bit.ly/3bwDYxN), 2016년 7월 22일 참조.
33) G. Standing, «Why Basic Income’s Emancipatory Value Exceeds Its Monetary Value»(기초소득의 해방적 가치가 금전적 가치를 초과하는이유), in Basic Income Studies 10 (2015/2) (https://bit.ly/3dJvlkO) 참조.
34) Oxfam, «“Just Give Money to the Poor: the Development Revolution from the Global South”, an excellent overview of cash transfers»(“가난한 이들에게 바로 현금을! 남반구로부터의 개발혁명”; 혁신적 현금지급 소개) (https://bit. ly/2yWeVa0), 24 maggio 2010 참조.
35) T. J. Isenberg, «What a New Survey from Alaska Can Teach Us about Public Support for Basic Income»(알래스카의 새로운 조사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공공 지원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in Economic Security Project (https://bit. ly/369xpjH), 2017년 6월 28일 참조.
36) 참조: G. Giraud, Composer un Monde en commun, une «théologie politique» de l’Anthropocène(공동의 세상을 만들기, 인류세(人類世-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지질시대를 잃컫는 말; 역자주)에 대한 <정치신학>, Paris, Seuil, 출판중.
37) 참조: 탄소가격선도연합, <탄소 가격에 관한 고위급 위원회 보고서> Carbon Pricing Leadership Coalition, Report Of The High-Level Commission On Carbon Prices (2017.5.29) https://bit.ly/2WP9fq4
38) 스웨덴에 적용된 탄소세의 현재 수준이다.
39) 지금은 전염병에 의해 완전히 마비되었지만, 유엔이 남부의 신흥 국가들에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스스로 개혁한다 조건하에서, 유엔의 감독을 상정해볼 수 있다.
40) 공화당 전 국무장관 명과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탄소세로 기본소득을 부분적으로 조달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M. Howard, «Conservative Carbon Dividend Proposal is a Welcome Development for Introduction of Partial Basic Income» (보수적 탄소 배당 제안은 부분적인 기본소득의 도입을 위해 환영받을 만한 발전이다), in Basic Income News(https://bit.ly/3cx5Qmt), 2017년 2월 11일 참조.
41) Francesco, Lettera ai movimenti popolari,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