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의 신앙 – 교회적 사목적 성찰

LA FEDE AL TEMPO DI COVID-19
Riflessioni ecclesiali e pastorali

© La Civiltà Cattolica, Q. 4076, 18 Apr, 2020 II, 163-176
다니엘레 리바노리 Daniele Libanori S. I. 주교 (예수회)1)
임숙희 레지나(엔아르케성경삶 연구소) 옮김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9). 이사야서 이 본문은 제가 대화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열쇠인 것 같습니다.2)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들 사이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과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소리가 무질서한 합창에 섞여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파멸의 전진으로 보이겠지만, 저는 새로운 탈출의 시작이라고 확신합니다. 결코 전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더 자주 외출하여 본당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제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아직 모든 사제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모든 방문을 마칠 것을 약속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자기 자리에 있었고 많은 사제들이 자신의 황량한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오히려 제 마음은 무척 흐뭇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항상 현존했던 사목, 그러나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더욱 새롭게 의식하며 살고 있는 사목의 한 측면에 더욱 자리를 내어주도록 초대합니다. 그 사목은 우리에게 맡겨진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전구를 하는 것(pregare e intercedere)입니다. 특히 이런 활동은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서로 힘을 북돋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사목입니다. 거기에서 온갖 다른 힘을 이끌어내는 사목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기도와 기쁜 소식 선포를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시하면서(참조 사도 6,4) 우리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라고 재촉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사목과 연결되는 장소에서 우리를 만날 수 있고 준비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이것은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습니다(참조 1베드 5,7). 물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매일 주님께서 일상의 기회를 통해 우리에게 제안하는 봉사의 다른 형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에 신자들이 성당에서 기도하고 전구를 바치는 사제를 발견하는 것과 사제 자신이 가장 구체적인 사목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사제가 항상 거기에 합일되도록 초대받았고 그것을 위임할 수는 없습니다.

  올라오는 물음들

  요즘 자잘한 일상의 일과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엄습하는 도전 사이에서 이런 성찰은 새롭고 필요한 공간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이 나라와 교회를 휩쓸고 있는 사건에서 촉발된 여러 물음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해진 프로그램들이 여지 없이 무산되고 정말로 다루기 힘든 사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서 신속하고 명확하게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여기는 (다소 공공연하게) 은밀한 요구와 함께 하느님께 청을 드리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뉴스를 통해 절박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질문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정말 하느님의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은 임박한 위험에 대한 인식과, 우리에게 스며들 듯 동요시키는 두려움을 통해 직접적이고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병에 걸릴 수 있으며, 도움을 찾지 못하며, 강제로 중환자실로 실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 이것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고통과 죽음을 추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병원에 수용되어 있거나 또는 집에서 자가격리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과 죽음을 추방한 문화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모두는 너무나 갑자기 각자 주인공으로서 해석해야 할 드라마에 직면해서 나약함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 불안, 두려움에서 안전하게 피할 도피처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들이 애덕(carità)의 강 바닥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면 분노, 절망, 부동의 체념으로 바뀌며 영혼과 정신을 뒤흔드는 고통의 형상을 빚어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한 예고도 없이 우리를 죽음 앞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죽음은 오로지 파스카의 전망에서만 직면할 수 있는 매우 고귀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을 독살하는 악에서 생겨납니다. 인간이 자유의 한계, 심지어 자유의 포기를 받아들이게 이끌어가는 것은 악한 세력입니다. 운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믿음은 희망, 용기, 용서의 토대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질 것이고 충만하게 될 생명은 도달해야 할 목표, 귀한 보물입니다.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발견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새롭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생명을 주는 창조적 힘입니다. 바오로는 이런 믿음 때문에 예언자들이 이미 한 말을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1코린 15,54-55).

  구원의 탐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죽음의 절박한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소홀히한 주제에 (다시) 불을 놓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혹감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이런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설사 바오로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때처럼 이런 말을 듣고 머리를 흔들면서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 지라도 말입니다(사도17장 참조)

  어리석은 지혜

   제가 보기에 이 시기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편리한 격려의 메아리만으로 만족할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 특히 참혹한 상황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참된 애덕은 억지 미소, 그럴듯한 손길, 어깨를 토닥이거나, 따뜻한 죽을 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은 자선단체의 긴급 구호와는 아주 다른 것을 교회로부터 기대합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타당한 이유를 말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세상은 희망해야 할 진지한 이유를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다르고 참된 전망을 열어줄 능력이 있는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위대함에 대한 환상을 투사하던 배경막이 갑자기 치워져 버리고 공포스러운 어둠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많은 강론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감미로운 감정을 신자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중단할 때입니다. 마침내 세상에 진지한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사는것과 죽는 것에 대한 타당한 “그” 이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이유를 지치지 않고 반복해야 합니다. 올해 우리가 전례 안에서 파스카를 기념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힘든 나날 주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사의 거대한 전례 안에서 파스카를 기념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 자신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역사는 인과응보 교리에 기초하여 해석되었습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재앙과 전쟁은 벌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백성도 자신의 삶과 가정에서 불행의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해석학적 열쇠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정확한 책임을 인식하게 해주었습니다. 정화하는 벌은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주님에게 돌아가는 여정으로 방향을 바꾸게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집트 탈출의 시련, 패배, 예루살렘 파괴, 영토의 상실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현현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은 무한한 인내 안에서 그리고 가끔 시련 안에서 우리를 정화시키는 자비로운 분으로만 알고 있는 하느님 모습과는 반대입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하느님 백성은 말씀을 재발견하고 말씀을 다시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그 안에서 연인이신 하느님의 속삭임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신랑이신 하느님은 분노의 날이 지나자 다시 손에 넣은 신부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얼굴을 새롭게 보여주십니다. 그녀의 마음에 대고 말하기 위해 그녀를 광야로 데려가(호세 2장 참조) 위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하권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죽이자 이스라엘은 이 극적인 사건 앞에서 자문합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의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편 10,3 참조). 그러면 불경한 이들이 “네 하느님이 어디 있는가”(시편 41,4 참조)라고 말하면서 그를 비웃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러자 이스라엘의 지혜는 영혼의 생존, 곧 시간을 넘어 삶이 지속된다는 가르침을 발견하고 발전시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에 충실한 사람이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충실함은 자주 인간의 눈에서 달아나버리지만 믿음의 시선에는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의인에게는 정의가 이루어지고 불경한 이에게는 그가 지은 죄의 공포가 드러납니다. 아버지가 그분 창조물에게 주었던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할 수는 있을 지언정. 아버지를 신뢰하는 사람을 절망하게 할 힘은 없습니다.

   성경은 무죄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질문합니다. 욥기는 의인을 공격하는 악의 신비에 대한 성찰입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존재하지도 않으며 욥이 갖고 있지도 않은 죄를 욥이 인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그 드라마에서 전통적인 답변으로 욥을 위로하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욥은 마지막에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욥이 침묵하고 멀리 계시며 원수처럼 보이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점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이 재난을 겪을 때 그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비난 앞에서도 그를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마지막에 가서야 욥 앞에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욥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창조자 지혜의 신비 앞에 욥을 데려갈 것입니다. 욥이 커다란 불행에 처하자 그를 위로 하려고 간 친구들도 욥을 단죄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오만하다고 여기고 욥이 무례하게도 단호하게 자기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욥은 결국 하느님 앞에 완전히 홀로 있습니다.

  이 장면은 헤아릴 수 없는 침묵 속에 멈춰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먼지와 재로 이루어진 작은 존재가 주님의 두렵고 매혹적인 권능 앞에 서 있습니다. 욥의 마지막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악의 신비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견뎌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의 불행의 밑바닥,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 지점, 유일한 지점에서 인간은 아버지의 표현할 수 없는 신비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고 그분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며 자신을 발견합니다.

   욥이 가진 온갖 재산을 다 흔들어 버리고 욥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 가버린 비극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당신 손 안에 그분 종의 생명을 단단히 쥐고 계십니다. 이것이 파스카 성삼일 동안 우리가 묵상할 주제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과 죽음으로 스캔들에 빠진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지혜”를 제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이 지혜를 제공하는 것은 먼지에서 일어나게 하며 영혼의 메마름을 해갈하는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에 머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우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새롭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앞에 있습니다. 이 상황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성숙하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새로운 자세를 취하도록, 새로운 길을 찾도록 재촉합니다.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신뢰로 그분의 뜻을 환대하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실의 증거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또한 정당한 권위(legittima Autorità)가 정한 실정법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분 백성의 합법적인 권위와 제국의 남용하는 권위 아래에 구체적으로 자신을 낮추시면서 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오늘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재건하시는 그분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파스카의 신비를 통과하는 새창조(rigenerazione)를 통해 그분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 때문에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서간을 쓰면서 바로 표징으로 향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 지금이 바로 이 말씀을 바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시기입니다. 이 말이 무겁기 때문에 부드럽게 전하면서도 동시에이 말의 가치를 깍아내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약함을 입기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약함을 입는 데로 옮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함이 그분에게서 오는 좋은 것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여러 상황이 – 말하자면 – 우리 사제들을 일시적으로 침묵해야하는 상황으로 “축소”시켰음을 성찰해야합니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 곧 사목자와 신자들은 주님께 귀를 기울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말씀에 의해 빛을 받기를 기다리는 체험을 통과하게 하면서 우리 마음에 대고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기대할 권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일한 스승의 말씀을 겸손하게 반복하는 우리 임무를 충만하게 실현할 수 있고 실현해야 합니다. 작은 이들이 성경의 빛을 “밝히도록” 도우면서, 주님께서 교회들(Chiese)에게 말하고 있는 것, 우리와 관련해서는 바빌론(바빌론은 요한 묵시록에서 로마 시를 가리킨다. 묵시 17,5 참조)에서 순례중인 교회(Chiesa)에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백성과 우리가 나누는 체험은 삶과 복음의 뿌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생명을 준 것이 아니듯 구원도 자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은 처음으로 인류 전체가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나아가 이탈리아는 이미 경제적인 차원에서 코로나의 결과를 우려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삶과 관계들을 생각하는 방식에서 출발하여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이 보호받고 있음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 바이러스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에 비해 아무런 자격과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정말 우리에게 참된 회심을 재촉할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성수련 첫째 주 끝에 피정자가 마침내 십자가 앞에 서서 이렇게 질문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의식하라고 초대합니다: 당신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저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영신수련 53항 참조). 교회는 위험과 구원의 이 체험을 각 사람이 집중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선물입니다.

  성찰을 자극하기 위하여: 계획의 실패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유다인들과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탑을 세우려고 벽돌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그 일이 강요된 일은 아니었는데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들이 탑을 세우는 이유는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입니다. 곧 아주 명확하고 효과적인 시스템의 안정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한 프로젝트에 동의합니다: 이들이 한 백성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단일성을 선호하고 다양성은 감소됩니다.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한 일치는 친교가 아니라 확인(omologazione) 안에서 추구됩니다. 그러나 탑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인간 조건의 구조적 한계만 아니라 주관적 독창성으로 되돌아갑니다. 단일 문화 (언어, 프로젝트)에 대한 순종을 대가로 얻은 일치를 상실합니다. 그들은 차이와 풍부함과 자유의 공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종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계약 안에서 다시 안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 문명에서 과학의 발전은 많은 성장을 했고 계속 첫 번째 순서의 역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서양은 마치 도그마처럼 탐구하면서 거기에 자기 운명을 맡길 정도로 어떤 확신에 도달하면서 과학을 신뢰했습니다. 이 문화를 숨 쉬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수명이 단지 하루만에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마태 6,27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 같은 순간에 오만하게 하늘에 닿는 지점까지 올라가는 탑이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국가의 삶을 규정하며 획득한 복지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와 경제 시스템은 이미 거칠게 흔들리고 있고 거기에 저항하기 위해 온갖 수고(또는 무능력?)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제 또는 환상 속의) 권리의 문화가, 오늘날 더 시급한 것으로 보이는 안보를 위해서 논의 없이 길을 열어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생겼는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모든 방어 수단을 제압했고 맹렬하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영혼을 공격하면서 침묵 속에 확산됩니다. 의심을 심습니다. 형제들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위협이 바로 자기 피에서 나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고통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친구들은 더 친밀한 관계 안에 바이러스의 독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사람들 사이의관계들을 공격했습니다.

  축적된 확실성에 대한 대규모 철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비상사태가 끝나면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의문의 여지가 있는 새로운 시작의 준비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탑을 건설하면서 만들고 싶었던 “이름”의 허영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묵시 2,17; 이사65,15 참조)인데 하느님께서는 그 이름으로 그분 아들의 친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를 것입니다.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충실한 백성을 위해서 확고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세울 것입니다(히브 11.10; 묵시 21장 참조). 그곳에는 탑도 성전도 없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참조).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공동 언어나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의사 소통을 하고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하며,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로서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언어를 찾아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언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그 언어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 자체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1고린 13,4-6). 한 백성의 노래에서 울려퍼지기를 기다리며 즉시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리며 말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언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시련 안에서 마음의 생각들이 드러난다.

  수많은 가정들이 겪고 있거니와, 좁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라기보다 그저 잠자는 곳으로 여겨지는 협소한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 속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가정은 단지 상호 부조 회사일 수도 있고, 각자가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본연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좁은 곳에서도 많이 힘들어도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공유 공간은 견딜 수 없는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부과된 상황은 참으로 근본적인 회심에 대한 긴급하고 지체할 수 없는 호소입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각자가 자신 편에서 같은 운명에 처한 형제와 동료를 이웃으로, 결국에는 친구로 만들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정을 낳게 하고 양육하는 것은 함께 사는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들은 이것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고 같은 강도로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양육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입니다. 요즘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어려울 수 있는 삶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새로운 인생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엄청난 인류(l’umanità)의 학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결과들을 볼 것입니다.

  시련은 신앙을 정화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자신에게 반복하는 것은 –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 모든 것이 잘못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없애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 두려움은 결국 하느님도 공격하는 근본적인 불신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해 주시거나 순식간에 악을 물리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필요에 따라 우리가 만든 하느님 상(象)으로 어둠 속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참 하느님, 곧 이스라엘의 외침을 듣고 당신 목소리를 모세에게 듣게 하는 분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여정을 걷도록 재촉하고 백성이 지나가는통로를 만들기 위해서 바다를 가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런 하느님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이분은 당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광야로 나가라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이집트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 없고 물이 부족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광야로 나가는 사람은 시련에 맞부딪치면서 성숙해질 것입니다.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어찌하여 외로이 앉아있는가?”(애가 1,1)

    “사람들로 붐비던 도성이 어찌하여 외로이 앉아있는가?”(애가 1,1)3) 3월 15일 주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로마시내 중심가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를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애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로마 중심가는 봄의 광채가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인데 지금은 황량하고 마치 유령이 사는 곳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 주어진 상황의 한계 때문에 성당 문을 닫은 것에 대해서도 한탄합니다. 한편에서는 공공 보건의 긴급성에 따른 결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유로이 전례를 거행할 권리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정부에서 모든 사람에게 이동 제한을 요구하므로 아무도 성당에 가지 않을지라도 열린 교회는 오히려 희망의 표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존중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적인 분출 없이 정부가 지금 통치하도록 부름 받은 상황이 이전에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복잡한 상황임을 성찰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 상황에 대해 우리는 단지 몇 가지 증거만을 모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예배 장소와 사목 활동의 폐쇄를 강요하지 않는다 해도 사목자들(Pastori) 편에서 각자 자신의 신자들에게 져야 할 책임감을 갖기를 기대합니다(여기에서 사목자들은 주로 주교를 뜻합니다. 주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백성의 하느님 앞에서 응답해야 하고 우리 사제들은 주교들에게 확실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니라 국가가 공중 보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아직 모든 사람이 진지하게 설득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많은 이데올로기를 가진 원칙을 상기시키지 않고 하나의 계획으로 예배 장소 개방에 대해 결정해야합니다. 이런 비상시기에 신앙과 신심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합니다. 열려있는 교회는 위로의 표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표징”이라면 교구 공동체의 모교회인 주교좌 성당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순절 셋째 주일(가해) 복음이 제안하는 것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4)

   교회들(Le chiese)은 중요하지만 결국은 축제 안에서 공동체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을 곧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도구일 뿐입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참된 교회(La Chiesa)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교회들이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처음 수세기 동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아직도 여전히 세계 많은 지역에서 교회 없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목자들은 적지 않게 중요한 문제를 정직하게 그리고 신자들을 존중하면서 자문해야 합니다. 성당 폐쇄에 반대하는 항의, 또는 잡음이 신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정화되어야 하는 종교성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영성체 단식

   거짓 열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시간 우리는 전에 체험해보지 못한 영성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성직자가 부족하거나 미사를 거행할 수 없는 조건에서 세상 많은 지역에서 성체 단식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필요입니다. 우리는 위안을 줄 수 있는 “성체성사 요청”«domanda di Eucaristia»을 목격하고 있습니다(이탈리아 주교회의CEI는 이와 관련하여 유용한 지침을 적절하게 발행했습니다). 그 요청은 강렬한 영성 생활의 열매인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태도는 물론 좋은 믿음에서 비롯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할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

  지나치게 끈질긴 영성체 요청에는 종종 진실한 믿음이 있지만… 성숙한 믿음은 아닙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좋은 관행에 의존하여 하느님 자신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원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이 하는 사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탐욕스럽게 선물을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굽히신 분의 얼굴보다는 자기 외침에 더 집중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성찬 신비의 의미와 깊이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고 좋은 교리 교육에서 많은 열매를 희망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분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 그분의 영과 함께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 안에 현존하시며 실제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을 계속 “양육”하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가까이에 현존하십니다. 주님은 성사에 대한 갈망 자체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잦은 영성체도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사제들을 향한 당부: 우리는 사제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받았다

    우리 사제들에 관해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하신 주님 말씀이 우리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게 합니다. 우리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닮게 한 안수 덕분에 우리 인격 안에서 양들을 하나 하나 알고 그들을 돌보는 목자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 백성 가운데 공현(epifania 에피파니아)과 하느님 현존의 참된 성사를 구성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억을 기념할 때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자원을 바칩니다. 우리의 현존은 그분 은총의 운반자가 되고 우리 기도는 사제 그리스도의 기도에 일치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분 아들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분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 방식은 주님의 고요하고 강하며 인내로운 사랑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뢰를 양육하는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영신수련 중에 우리가 배운 기도가 떠오릅니다.

  받으소서, 주님.

  저의 모든 자유와 저의 기억과 지성,

  저의 모든 의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당신이 이것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주님, 이 모두를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모두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리하소서.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으로 저는 족하옵니다”

  (영신수련 234).

    이해하기 위한 열쇠: 같은 벌로 “단죄 받은

  인간 조건의 의미, 그것이 부과하는 한계와 죽음 자체의 한계 이해를 돕는 루카 복음서 본문이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의 이야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두 죄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 절망한 죄수 한명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내용을 듣게 됩니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예수님의 침묵 가운데, 이 불행한 상황의 다른 동반자는 우리 각자가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말로 개입합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루카23,39-42). 고통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지성이 제시하는 이유들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얼마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위안이 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여러분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예수님께서 함께 나누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 6-8).

  역사가 우리 한계의 신비를 우리에게 더 예리하게 느끼게 할 때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 신비의 마음에 더 가깝게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분은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파견하여 어떤 에누리없이 인간의 조건을 살도록 하시면서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사랑스러운 친밀감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통과 죽음은 또한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모시킴으로써 우리의 육체와 함께 신비에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령에게서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과 운명의 친교를 받아들이고 평화 안에서 사는 능력을 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세상의 소동 가운데서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마음 속에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것이다…”(루카 23,43). 하느님 아들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인간적인 모험을 사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항상 그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은 사람은 그분과 함께 삽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들에게, 즉 우리가 봉사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파스카의 선포가 다시 울려퍼지도록 하기 위해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창안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마침내 경청하는 귀를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냐시오 성인이 무척 사랑했던 기도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원해 주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늑방의 물은 저를 씻어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에게 힘을 주소서.

  오, 선하신 예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당신의 상처 속에 저를 숨겨주시고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해 주시며

  사악한 원수에게서 저를 지켜주소서.

  제가 죽을 때에 저를 불러주시어

  당신께 오라 명하시고

  당신의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5)


1) 역주: 필자 다니엘레 리바노리(Daniele Libanori) 주교는 예수회원으로 2017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로마교구 보좌주교로 성품 받았다.
2)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텍스트는 리바노리 주교의 사목 서한이다. 로마 중부 지역을 관할하는 리바노리 보좌주교는 지난 3월 19일에 자신이 맡은구역의 본당 사제들에게 이 서한을 보냈다. 우리는 서한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을 약간 손질한 후에 서한 전체를 소개한다. 이 서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중부 지역의 사랑하는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저는 방해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서 자극을 받아 요즘 제가 하고 있는 성찰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한 것들인데 여러분 한 명 한 명에게 제가 가까이 있음을 표현하고 싶은 갈망으로 영적 대화로서 여러분에게 이 서한을 보냅니다. 이 새롭게 체험하는 역경 안에서 여러분이 저보다 얼마나 더 힘들지 상상합니다.”
3) 역주: 이태리 원문의 의미를 더욱 살리기 위해서 우리말 『성경』이 아니라 이태리어 성경대로 번역했다.
4) 역주: 원문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말 성경이 아니라 이태리 원문대로 성경 구절을 번역했다.
5) 사목서한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여기까지 저의 말씀을 들어주신 분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하지만 무엇을 원하십니까? 성찰을 자극하는 것은 많습니다. 저를 인내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시기를. 성모님께서 로마의 사제(Presbiterio)인 우리의 프란치스코 주교, 그리고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우리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에페 6,19-2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