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블루스

PANDEMIA BLUES

© La Civiltà Cattolica, Q. 4077, 2 Maggio 2020, Volume II, 256-268
패트릭 질거 Patrick Gilger S. J. (예수회) 신부1)
최원오 빈첸시오 교수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 옮김

  매일 저녁 해가 지고 나면 청소년들이 5층에 있는 내 방 창문 아래 광장에 모여든다. 그들은 시끄럽지 않다. 그저 젊을 따름이다. 젊은이들이 이 언저리에서 대화하고 노래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그런 다음 내 방 아래 컴컴한 곳에 앉아 깔깔거리며 노래한다. 이것은 내가 잠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시차 적응하느라] 잠이 필요하다.

  두 주가 지난 후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수면에 문제가 없다. 나는 그 젊은이들이 어디선가 여전히 웃고 노래하고술을 마시고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이 격리 기간에 더 이상 내 창문 아래에 오지 않는다. 그들이 그립다.

  맑은 날에는 경치가 장관이다. 북쪽으로는 눈 덮인 알프스 봉우리가 보인다. 남쪽으로 한껏 몸을 내밀면 황금빛 성모상이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 종탑을 장식하고 있다. 살짝 보이는 그 치맛자락 곁에는 유명한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 있다.

  여기는 밀라노, 평범한 날에 방문하는 사람은 우아하고 활기차며 역사적이고 현대적이며 바쁘게 붐비는 도시를 보게 될 것이다. 유럽 대도시의 플라톤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도시다. 그러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는 지난 3월 초에 멀쩡하고 건강한 상태로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롬바르디아 지방에 퍼졌다는 소식은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날에야 미국 언론에 떴다. 그렇게 짧은 사전경고에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야간 비행기는 거의 비어 있었다. 나는 방해받지 않고 좌석에 기대어 잠들었다.

  그 이튿날 아침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착륙하자 마스크를 쓴 보건요원 두 명이 빠르게 체온을 쟀고, 나는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입국 심사장을 통과했다. 기차를 탔고 조금 지나 내가 머물 레오 13세 연구소Istituto Leone XIII건물 문턱에 도착했다. 이곳은 밀라노 도심 북서쪽에 위치한 예수회 학술기관이다.

  그날은 화요일 아침이었고, 나는 고등학교 풍경과 소리, 소년 소녀 수천 명의 재잘거림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부질없게 되었다. 학교는 전날 문을 닫았다. 박물관과 스포츠 행사,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와 상황도 함께 차단되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고, 입구의 불은 꺼져 있었으며, 시커먼 철문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몇 차례 초인종을 누르자 저명한 원로 사제 한 명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방인인 나의 눈에는 이 도시가 느려진 듯 보이지만, 생명이 없지도 두려움에 짓눌리지도 않은 듯하다. 오히려 참을성 있게 주시하고 있다. 마치 허파에 공기를 가득 머금은 채 막 잠수한 고래 같다. 언젠가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 * * * * *

  고백하건대 미국식 위기 대응 교육에 익숙한 나에게 이러한 인내는 수수께끼다. 우리 미국인은 눈보라가 날리기 시작하면 빵과 우유 선반을 싹 비워버린다. 공황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 반응은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게 하고 마련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게 해 준다.

  우리는 상황 논리를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불러준 그 어떤 노래보다 우리 기억에 더 깊이 새겨져 있다. 나는 사야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 나는 사야 .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무것도없이 지낸다면, 나는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는 사야 .

  이것은 미국인이 관대한 국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관대하다. 우리 미국인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이며, 넉넉한 시기에도 곡물을 저장할 큰 곳간을 만드는 데 익숙하다.

  예수회 신부인 나로서는 이렇게 다른 사회 분위기에 편입된 것이 매우 적절한 사순 참회였다.

  여기서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타주의의 위대한 역량이나 놀랍도록 너그러운 자선단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웅적이지 않을뿐더러 생필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병원 침대가 가득하고 미 해군 병원선Usns Comfort이 정박해 있는 내가 살던 맨하탄도 다르게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여기서는 그 친숙한 노랫가락이 두려움의 선율에 맞춰 살짝 바뀐 것 같다. 도 장조에서 시 단조로 말이다. 마치 이 도시가 따르고 있는 악보 위에 다음과 같은 지시어가 쓰여 있는 듯하다. 점점 느리게. 천천히.

  거듭 말하자면 예수회 사제인 내가 이런 사회 분위기에 편입된 것은 특별히 적합한 사순절 참회였다.

  격리 기간 동안 밀라노는 나에게 두려움에 대한 우리 미국식 대응 방식을 끊어버리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통제하고 지배하고 정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 그리하여 실제로 실제적인 것과 참으로 참된 것을 승인한 다음 안심해 버리는것, 이것은 내가 이곳 밀라노에서도 행동으로 옮겼을 지 모를 미국식 대응 방식이다.

  나폴리, 시에나, 로마의 발코니에서 노래하는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직도 이런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 * * * * *

  3세기 중반, 성 치프리아누스는 카르타고의 주교였다. 이 도시의 유적은 현재 튀니스 근처에서 발견된다. 고대 후기를 연구하는 몇몇 신학자와 역사가를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은 치프리아누스를 특히 이 한 가지를 통해서 알고 있다. 그 이름을 딴 질병이 있다. 치프리아누스 전염병은 약 20년 동안 로마 제국을 휩쓸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스코틀랜드까지 도시와 시골 주민을 거덜 냈다. 그것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던 제국의 기초를 약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전염병이 치프리아누스의 이름을 지니게 된 까닭은 그가 전염병에 무책임했거나 전염병을 종식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염병에 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전염병 한가운데서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설교인 『죽음』De mortalitate 덕분에 그 영향에 관하여 알고 있다.

  예컨대 그 질병이 어떻게 고열을 동반하며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하여 “인후를 망가뜨리고” 몸의 외부까지 불덩이로 만드는지 그의 작품에 기대어 알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영양분도 섭취할 수 없을 정도로 장은 엉망이 되었고, 눈은 “혈압으로 타들어 가” 온몸이 욱신거렸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감염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귀먹고, 눈이 멀거나 마비되었는지 우리는 그의 짧은 기도에서 엿보게 된다.

  치프리아누스의 간략한 설명이 있었기에, 그 전염병이 바이러스성 출혈열(에볼라 같은 필로 바이러스)이거나, 급성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라고 역학사 전문가들이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코로나19 바이러스 같다.

  오늘날 이러한 팬데믹 전염병의 위협을 감당하기에 국경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도인들도 병은 신앙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른 이웃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인간들처럼 그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사실 치프리아누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인생 여정을 걷던 사람들, 더불어 일하던 사람들, 같이 먹던 사람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을 잤던 사람들, 성찬에서 자기 앞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들기보다, 오히려 치프리아누스 주교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찾으라고 요청했다.

  모든 시대의 인간들처럼 그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치프리아누스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을 성찰토록 권고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 끔찍하고 치명적인 이 재앙이나 전염병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발가벗기고 인류의 행태를 성찰하는 일이 왜 필요합니까? 건강한 사람들이 병자를 돕는다면, 친지가 연민으로 친척을 사랑한다면, 주인이 자신의 아픈 종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면, 의사가 자신의 의술을 요청하는 이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전염병도 쓸모가 있습니다.”2)

  치프리아누스는 이 전염병이 안고 있는 문제를 성찰해 보라고 카르타고 백성에게 요청했다. 건강한 사람은 병자를 돌보는가? 의사는 환자를 보살피는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드러내는가?

  로마 제국이 기울어가던 시절, 치프리아누스는 끔찍한 전염병 때문에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고통에 다가가고, 위험에 친숙해지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라고 권고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의료인, 식료품 점원과 전염병의 최전선에 있는 모든 사람의 결단을 보면서 존경심을 지닌다. 그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치프리아누스처럼 가르쳐 주고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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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에서 첫 두 주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회적으로 훈련되기 전에 나는 내 일상을 정돈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것 말고도 내가 이탈리아에 온 또 다른 이유인 나의 연구가 뒤죽박죽되었기 때문에 나는 맨하탄 습관에 다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 옷을 입고, 나만큼이나 큰 기계에서 뽑은 터무니없이 작은 “카페 룽고”를 마셨고,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화상 채팅으로 이루어지는 이탈리아어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내 방에 들어가기 전 경당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냈다.

  치프리아누스는 끔찍한 전염병 때문에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고통에 다가가고, 위험에 친숙해지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라고 권고했는데도 말이다.

  그런 다음 오후에는 “모르겠는데요”와 “틀렸어요”라는 말, 부분관사 “치”(ci)의 수천 가지 의미가 머릿속에 맴도는가운데 도시를 걸었다. 도시는 조용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핼쑥해졌지만 텅 비지는 않았다. 여전히 아이스크림이 있었고 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고, 노인들은 공원에서 보체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텅 빈 학교 안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 예수회 공동체와 미사를 드리고 저녁을 먹기 위해 어깨에서 빗물을 털어냈다. 우리는 파스타와 프로슈토(prosciutto, 이태리식 햄)를 먹었을 것이다. 흰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고, 아마도 소화제로 그라파(grappa, 포도 짜는 기계 속의 찌꺼기를 증류한 술)도 한 잔 했을 것이다. 대개 나는 내 주변에서 쏟아지는 엄청 빠른 말을 따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다. 자상하고 참을성 있는 공동체 장상인 쟌카를로 바가티Giancarlo Bagatti 신부는 나의 하루에 관해 물었다. 정중한 그는 내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케 코자 아이 파토 오지?”(Che cosa hai fatto oggi? 오늘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속도를 늦추어 말을 건네 주었다.

  바가티 신부는 이탈리아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여든이 다 되었지만 스무 살은 더 젊어 보인다. 그는 자주 미소를 짓고, 세 손가락으로 담배를 말며, 포도주의 첫 잔을 마시기 전에 늘 건배를 한다. 그 첫날 아침 나의 신경질적인 벨소리에 학교 문을 열어주기 위해 전통적인 검은 사제복 차림으로 나와준 사람이 그였다. 그는 무성한 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빗질했고, 모직 외투를 그의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가 인사를 하면서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악수를 청했을때, 나는 마치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에 출연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린 기분이었다.

  나의 하루에 대한 바가티 신부의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성 암브로시우스 대성당 제대 아래 모셔진 그의 유해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을 했는지 어린 아이의 어휘로 애써 표현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또 한 번은 387년 부활성야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끝없이 불안한 마음이 암브로시우스의 손에 이끌려 정화의 물속으로 잠겼던 팔각 세례당 앞에서 묵묵히 머물렀던 체험을 말해 보려고도 했다. 당시 나는 눈물(lacrime)이라는 이탈리아 단어를 몰랐다.

  바가티 신부는 조용히 주의를 기울여 들어주고, 내 어학 공부의 빈틈을 적절한 몇 마디로 채워준다. 신사인 그는 가장 어리석은 문법적 오류만 고쳐준다. 그는 밀라노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다. 그는 스무 명이 넘는 예수회원으로 구성된 레오 13세 공동체의 장상이었다. 지금은 네 명뿐이다.

  혼자 지내면서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느 날 저녁,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수십 년이 아니라 최근 몇 주 동안 도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오후 산책하는 동안 그는 자신처럼 산책하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물리적 거리만 두면서 평상시에 하던 대로 인사를 건넸을 때 일이 벌어졌다. 그 행인들은 기쁘게 반응하기는커녕 인사를 받은 사실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답례 흉내만 내고는 저마다 황급히 제 갈 길을 갔다고 했다.

  바가티 신부는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여전히 언짢아 했다. 그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수수께끼 상자 앞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는 동안 입술을 깨문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다. 나는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신다. 우리는 함께 앉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자신에게 묻는다. “왜 그들은 그토록 무서웠을까?”

  혼자 지내면서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연인만이 경험하는 서로 주고받는 상처나 원한이나 불안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불안과 두려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두려움에는 집중할 대상이 있다. 어둠 속 괴음이나 손에 든 무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 두려움은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불안은 알려지지 않은 위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평생을 함께 보내고도 가깝게 지낼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 사람에게는 분명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거리두기는 이 팬데믹을 억제하는 데 필요한 용기 있는 행동이 되고 있다.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가로지르고 있는 이 위기에 완전히 무지하지도 않다. 우리는 이 팬데믹을 이해하고 핵심 역량을 집중해야 할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전염병에 이름을 붙여 주었고,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이 병의 위험도를 평가했고, 경제에 미칠 영향과 나이에 따른 서로 다른 위험 요소를 식별했다. 우리는 고립된 불안에서 공동 대응으로 옮겨가는 수준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품 진열대들이 비어 있다. 모든 사람 사이에는 2m 거리가 필요하다. 바가티 신부는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제 도심 대신 학교 테라스에서 매일 산책을 한다고 했다.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리한다. 그는 깨닫고 순응한다.

  평생을 함께 보내고도 가깝게 지낼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 사람에게는 분명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거리두기는 이 팬데믹을 억제하는 데 필요한 용기 있는 행동이 되고 있다. 한 노인의 인사에 대한 성급하고 겁에 질린 반응 때문에 꼭 필요한 거리두기가 신체적 분리보다 정신적 분리로 해석될 때 더욱 그러하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이 팬데믹은 우리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낯선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않도록 요구하는 역설의 끝판왕 같다.

  잠시 후, 바가티 신부가 고개를 든다. 그의 눈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잔을 든다. 그리고 건배를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끼 비브라, 베데라 Chi vivrà, vedrà” (살아남는 자가 보게 되리라).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또는 “기다려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과 비슷한 이탈리아 속담이다. 이탈리아 속담을 써먹을 필요가 있을때 이런 의미로 사용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번역에서는 의미의 부스러기들이 상실된다. 왜냐하면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보게 되리라”, 곧 살아 있을 사람이 보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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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카롤로 보로메오의 유해는 두오모의 작은 경당에 앞면이 수정으로 된 유골함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16세기 중반 밀라노의 대주교 추기경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개혁가, 학교들의 창립자, 트렌토 공의회 마무리 회기를 이끈 인물로 유명하지만,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병이 있다는 사실에는 소홀하기 쉽다.

  성 카롤로 전염병은 1576년 여름 밀라노에 상륙하여 1578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1 년 반 동안 도시에 퍼져 나가면서시민의 삶이 뒤흔들어 놓았고, 상업을 마비시키고, 17,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카 그란다(Ca’ Granda) 병원에 희생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마자 시장과 도시의 귀족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분명 가난했다. (요즘 그 병원은 또다시 병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글에서 읽고 뉴스로 본 바로 그 병원이다. 유럽에서 가장 좋은 병원 가운데 하나다).

  밀라노 당국자 대부분은 꽁무니를 뺐고, 도시 질서를 회복하려고 애쓴 이는 보로메오 대주교였다. 조직적 재능을 지닌 그는 격리를 명령하고, 도시의 거리를 청소하게 했으며, 굶주린 이들이게 음식을 제공했다. 그는 카 그란다 병원을 유일한 기부금 수령자로 지정하여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다. 이와 같은 실용적 활동도 필수적이었지만, 보로메오는 종교적 대응도 도시에 제공키로 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뿐 아니라 겁에 질린 백성들 사이에 연대를 새롭게하는 세 가지 장엄 행렬과 세 가지 공적이고 집단적인 참회 예식을 준비했다.

  그것은 특별한 행사였다. 도시의 심장부인 두오모에서 출발하여 수천 명의 밀라노 시민들이 거리를 따라 참회 시편을 읊으며 행진했다. 보로메오 몸소 죄수의 밧줄을 목에 건 채 맨발로 걸으면서 이 모든 행렬을 일일이 이끌었다. 그는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진짜 십자가에서 빼냈다는 거룩한 못 하나를 들고 있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역사 기록이 자루옷을 입은 추기경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순례의 노랫소리였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성가인 모든 성인 호칭기도litania를 노래하며 성인들의 중재를 청했다. 성가대가 “성모마리아”Sancta Maria를 부르면, 민중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Ora pro nobis라고 화답했다. 암브로시우스, 모니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다른 성인들의 이름도 불렀고,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단순하고 간결하며 본질적이고 반복적인 이 노래는 모든 목소리를 모아낸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단순한 노래만이 그러하듯, 모든 성인 호칭기도는 우리가 함께 행동하도록 뭉쳐준다. 마치 그네에 탄 우리 뒤에 서 있는 아버지처럼 무언가를 향해 우리를 밀어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컨대 부활 성야나 사제서품식이나 세례식 때, 곧 온 교회의 온갖 시기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되어 노래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 행렬은 대단했다. 그러나 인간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숙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훨씬 전인 16세기에도 감염은 거리두기를 통해서만 통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보로메오가 행렬을 중단한 까닭이다. 그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건강을 챙기도록 권고했다.

  행렬은 멈췄지만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는 중단되지 않았다. 대주교는 소책자를 인쇄해 배포함으로써 격리 기간 동안 고립된 사람들이 일종의 공동체를 찾는 도구로 활용하도록 배려했다. 밀라노에서는 거의 1년 반에 걸친 격리 기간동안 그러했다. 이따금 몇 시간 간격으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사람들은 창과 문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파올로 비시올라Paolo Bisciola는 <<밀라노 전염병의 진행에 관한 가장 진실한 보고서>>(1577)에서 그 몇 달간의 전염병을 이렇게 묘사했다. “밀라노에 가면 노랫소리 말고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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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이 나기 이틀 전 목요일 오후, 나는 두오모의 중앙 제대 밑 경당에 성 카롤로의 유해를 참배하러 갔다. 토요일 저녁에는 무기력하고 땀이 나는 느낌이었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아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침 미사에는 세 명만 참례했다. 나는 집안에 있는 작은 경당 뒤쪽에 이를 악물고 웅크리고 있었다. 바가티 신부가 주례를 맡았다. 그의 황금 무늬 자주색 제의는 떠오르는 햇빛을 반사하면서 내 눈을 아프게 했다. 나는 성작을 만지지 않았다.

  그 당시 내 방에서 고립되어 지내는 것은 큰 희생이 아니었다. 나를 그토록 환대해 준 노인들을 위해, 현명하게 이틀 일찍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월요일에 나는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미국의 큰 대학 병원 의사이며 감염학 전문가다. 게다가 그는 강한 척할 필요가 없는 드문 친구 가운데 하나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면서, 죽을 듯한 내 불안의 무게를 그에게 내려놓는다. 그 친구는 진정 온 마음으로 나를 지지해 준다. “거기 밀라노에서도, 네가 거기 있더라도 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거야. 만일 걸리더라도 너는 젊고 건강하니 이겨낼 거야. 약 좀 먹고 쉬어. 변화가 있으면 전화해.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게 한숨을 내쉰다. 한 번 더 깊이 숨을 내쉰다. 그리고 묻는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나는 이 친구를 20년 전부터 알고 있다. 우리는 열아홉 살이었고 열아홉 살짜리가 하는 짓을 했다. 지금 내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직설적이고 차분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 네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거다. 네 방에 있어. 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는 이겨낼 것이고, 너는 위험하지 않아. 방에 있어.”

  그 친구가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나는 동의했다. 나는 그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요구에 순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투쟁 도구는 거리를 유지하는 용기가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이 나누는 법을 배우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함께 나눈 불안조차 고립으로 끝나기도 한다.

  “네 방에 있어.”는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는 아니지만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방향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 말을 주문처럼 우리 자신에게 되풀이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응답 없는 전화일 뿐이다.

  아쉬운 것은 노래다. 어쩌면 우리는 노래하는 법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 방 창문 바깥에는 작은 발코니를 갖춘 아파트 수십 채가 있다. 그 철제 난간은 이른 봄의 신록으로 덮여 있거나, 기와지붕과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강렬한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미 보았듯이 많은 도시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발코니에서 서로를 위해 노래한다.

  내 방에서 보이는 발코니에서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노라고 말하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텅 빈 거리에서 구급차 소리를 들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소리다.

  그것은 도움의 소리다. 그럼에도 사이렌 소리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노랫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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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주일. 정오. 내 열이 떨어졌다. 집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도 하느님 은총으로 아직은 무사하다.

  밀라노는 잿빛이며 조용하다. 나는 만질 수 없는 도시를 보기 위해 창가로 간다. 청년들이 노래하던 광장 저편에 소년이 있다. 많아야 12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가 여동생과 함께 발코니에 나온다. 황금 나팔을 가진 소년은 누이를 보고 웃는다. 그리고 나팔을 입술에 댄다.

  나팔 소리가 아래쪽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과묵한 건물들 사이에 울려 퍼진다. 아직 솜씨가 좋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선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어설프다고 꾸짖는 이는 없다. 틀림없는 삶의 소리다. 살아남는 자가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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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트릭 질거Patrick Gilger는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 예수회 신부다. 현대 문화(특히 팝 문화), 영성과 소통에 늘 매달려 왔다. 레드 클라우드Red Cloud 인디언 학교에서 일했다. 다양한 예수회 대학교(크레이턴, 로욜라 시카고, 산타 클라라)에서 공부한 뒤 지금은 뉴욕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예수회 간행 가톨릭 교양지인 『아메리카 매거진』America Magazine 기자이기도 하다.
2) Cipriano, <<La pestilenza>>, in Cipriano – Paolino Da Nola – Uranio, Poesia e teologia della morte, Città Nuova, 1997, 33. – 역자 주: ‘전염병’이라는 별명을 지닌 치프리아누스의 이 작품의 공식 제목은 『죽음』De mortalitate이다. 이 인용문은 『죽음』 제16장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