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안 하기 – 소중하지만 어려운 활동

FARE NIENTE: Un’attività preziosa e ardua

 

© La Civiltà Cattolica, Q. 4075, 4 Apr, 2020 II, 20-29
죠반니 쿠치 신부Giovanni Cucci S.I.(예수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성삼의 딸들 수녀회) 옮김

자신과 함께 머물기 어려움

  강요된 멈춤으로 고통 받는 시간―예를 들자면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병을 이기기 위한 고립으로 정해진 시간―은 소중한 가르침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측면에서도 역시 이 심각한 전염병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여러 가지이다. 가능한 수많은 실마리들 가운데 영적 전통 안에서 잘 알려진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냥 시간을 내는 것이다.

  TV 앞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빈둥거리거나 뭔가로 시간을 채우거나 시간을 죽일 수 있다. 혹은 더 심하게는 새로 발견된 웹 사이트들을 통해 엄청난 가능성을 제공하는 악습의 덫에 더 끈질기게 걸려들 수도 있는데, 그 결과는 똑같이 엄청나게 파괴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적이있다.1)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대조되는 것들이다.

  단순히 자기 자신과만 있기는 하나의 악습으로, 곧 게으름의 한 형태로 낙인 찍힐 수 있다. 동시에 할 일들과 직무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이상적인 상황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하고자 결심할때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동시에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일이 된다. 가장 쉽다는 것은 활동이나 특정한 제안이 필요 없고 그저 침묵 속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한데 우리의 정신은 일들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이 어마어마한 축적물로부터 독소를 없앨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작업이다.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다면 쉽게 낙담한다.

  몇 년 전에 나온 어떤 심리학 기사는 물론 (코로나19라는) 현재의 비상사태를 상상하지 못하고 바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마지막 때는 언제였는가? 읽지도 않고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고 전자메일을 확인하지도 않고 업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 그렇게 보낸 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한 상태의 밑바닥까지, 모든 활동을 멈출 때 나타나는 비워진 상태에까지 가 본 적이 언제였는가? 오직 횡격막만이 올라가고 호흡의 박자가 내려가는 그런 때가?”2) 자신과의 만남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길이 없이 말이다. 이는 흔히 우리 손이 닿지 않는 하나의 이상(理想)으로 보이던 하나의 가능성이다.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거나 더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강요받을 때는 지루함과 욕구불만을 대면하기 때문이다. 휴가를 떠날 때 자주 전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 고 돌아오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함께 홀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문이다. 난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어떤 병에 걸린 사람들과 같이오랫동안 자신과만 함께 있도록 강요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이를 잘 안다. 혹은 이 시기(옮긴이: 코로나19의 시기를 가리킨다.)에 그러하듯이 오랫동안 집에 머물도록 강요받은 사람은 가능한 기분전환 거리만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발견한다. 이는 실험을 통해서도 발견되는상태이다.

  미국 연구팀이 진행한 11가지 연구는 사람들이 혼자서 자신과만 머물 때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떤 학생 집단(146명)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정신을 전환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제공되지 않는 어떤 방에 앉아서 6분에서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하고만 접촉하면서 침묵 속에 머무르도록 요구받았다. 이어서 그 체험을 평가하도록 요구하자 58%가 집중에 어려움을 겪었고 90%가 대개 분심했으며 절반은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고 답했다.

  나이가 더 든 집단(77세까지)에서도 대체로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너무도 견딜 수없어 그저 생각만 하면서 머무르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주는 어떤 방해요소를 바라기까지 했다. 자발적 지루함을 15분 동안 멈추기 위해 가벼운 전기 충격을 당하겠느냐는 제안에 대부분이 그 가능성을 선택했고 일부는 전기 충격을 열정적으로 원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생각과만 관계한다는 것은 분명 전기충격을 받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연구자들은 결과를 이렇게 풀이했다. “훈련되지 않은 정신은 오직 자신하고만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3) 그렇지만 그러한 훈련은 고통스럽기는 해도 불가피하다. 더 높은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을 표현하게 해주고 우리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지를 알아차리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관상하기, 행복의 동의어

  여러 세기 동안 인간들은 현재의 기분전환 수단들 없이 살아 왔고 또 잘 살아 왔다. 그런 수단들이 없을 때 그들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악(惡)과 정욕의 큰 부분이 “단 한 가지에서 나온다는 것, 곧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를 줄을 모른다는 것에서 나온다”4)는 것을 주목하였다. 앞에서 말한 연구의 저자들이 주목한 정신의 훈련을 고대인들은 살아가는 기술, 지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활동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상태인 ‘에우다이모니아’(행복)eudaimonia에 들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활동의 즐거움은 완전한 것이고 지나침과 결핍과 수고와 고통을 모르며 이는 가장 높은 활동이요 자유로운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리스 철학자는 인간이 오직 어느 정도의 짧은 순간 동안만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유형의 삶은 인간에게는 너무 높은 수준일 것이다. 사실 인간 이어서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인간 안에 뭔가 신적인 것이 있기에 그렇게 살 것이다. 그리고 이 신적 요소가 인간 본성의 합성물을 능가하는 만큼 그의 활동은 다른 형태의 덕(德)에 어울리는 활동을 능가한다. 결국 지성은 인간과 비교하여 신적 실재이고 지성에 따른 활동 역시 인간적인 덕과 비교하여 신적인 활동일 것이다.”5)

  하지만 이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반대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잠정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은 활동이라는 사실이 그 활동을 덜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그 활동이 도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여겨지기에 포기하라는 반대 입장을 분노하며 물리친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높고 숭고한 차원을 희생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적이고 죽을 운명의 것들만 생각하라고 ―자신이 인간이고 죽을 존재라고 해서― 충고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가능한 한 불사의 존재로 행동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숭고한 부분에 따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은 몸집으로서는 작다고 해도 역량과 가치로 보아서는 모든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 또 인간의 이 숭고한 부분이 그의 주요한 부분이자 최상의 부분이라는 것이 […] 사실이라면 모든 인간은 이 부분과 동일시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삶은 또한 가장 행복한 삶이기도 할 것이다.”6)

  이 주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폭 넓게 다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쓴다. “진리에 대한 관상 안에서 맛보는 즐거움이 너무 크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진리의 확실성을 제공하기에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 전에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결코 알지 못했던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리고 영혼이 온전히 총체적인 진리에 투신할 수 있도록 전에는 두려워하던 죽음을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죽음을 희구하는 것이다.”7)

관상하다라는 용어에 대한 가지 설명

  하지만 이 용어를 마치 은수자들의 제한된 공동체에 유보된 말이거나 활동을 희생하고 수동성을 독려하는 말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스타기로스 출신의 철학자(옮긴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짐작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도한다. 엔독사endoxa*, 곧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의견들의 검토를 거쳐 그는 행복이란 겉으로는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활동을 함으로써 도달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 두 가지 활동은 바로 관상 및 관계들 같은 것으로서 이 관계들 덕분에 인간은 그를 하느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케 해 주면서 그리고 이루어진 일에 한 가닥 기쁨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면서 그를 짐승과 노예로부터 구별해 주는 인간 고유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관상은 활동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충만하게 생명이 넘치는 존재가 되게 해 주는, 활동의 가장 높은 표현이요 창의성이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이 순간들을 ‘절정 체험’peak-experience이라고 부르는데 이 체험 안에서 시간은 마치 멈추어 있는 것과 같고 존재는 그 아름다움으로 감지되며 절대자가 인간 주체를 내세우면서 등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기대 밖으로 받은 그러한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놀라움과 경탄에 결합된 심오한 기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 체험 후에 사람은 더 너그러워지고 용서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되며 고통과 시련 앞에서 더 잘 대응할 줄 알게 된다.8) ‘절정 체험’이라는 용어는 시(詩), 문학적 영감, 예술 작품, 사랑의 관계, 신비적 상태 등과 같이 극히 다양한 사건들의 현상학적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

  ……………

  관상은 활동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

  그러한 순간들을 경험한 사람은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며 반대로 그 순간들을 자기 인생의 가장 강도 높은 순간들로 간주한다. 충만함이라는 이 특징들은 전문적 활동도 포함하는데 이런 활동은 자신의 깊은 욕구와 조화를 이룬다면 진복(眞福)beatitudine을 앞당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Irvin Yalom이 한 자전적 소설에서 자신의 직업을 묘사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사람은 행운아다. 어니스트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꼈다. 축복 받은 자. 그는 자기 소명을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완벽하게 나 자신을 표현한다. 나는 내 재능과 내 흥미와 내 열정의 절정에 있다.’ 어니스트는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매일 아침 약속들이 적힌 수첩을 펴서 자신에게 소중한, 그리고 자신이 함께 하루를 보내게 될 8·9명의 이름을 보곤 했을 때 그는 오로지 종교적 용어로써만 정의할 수 있을 법한 감정에 압도되었다. 그 순간들에 그는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기까지 자신을 인도해 온 데 대해 누구에겐가, 무엇엔가 감사하고 싶은 가장 깊은 욕구를 체험했다.”9)

침묵과 주의(注意), 자신에 대한 진리를 향한

  침묵 속에 머무르기는 힘든 일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니고 분심이 늘 덮쳐오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 머무르고자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정신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생각들이 통제를 벗어나 달아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중세의 어떤 이야기에서 어느 본당신부가 농부 한 사람에게 그가 ‘주님의 기도’를 분심하지 않고 바칠 수 있다면 나귀 한 마리를 선물로 주겠노라고 내기를 한다. 농부는 손쉬운 벌이라고 생각하고 내기를 흔쾌히 수락한다. 하지만 기도의 절반쯤에 이르러 갑자기 “그런데 안장도 주실 건가요?” 하고 묻는다.10) ‘주님의 기도’를 한번 바칠 동안의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를 지닌다는 것은 쉬운 수련이 아니다.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하면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의 가치와 어려움을 발견한다. 이는 그리스어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주님의 기도’ 텍스트를 이용하고자 선택하면서 그 텍스트에 정복당하던 날 이전에는 그녀가 결코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녀는 분심 없이 그 말들에 멈추는 일의 어려움도 역시 주목한다. 그리고 아침마다 주의 깊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분심이 들 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녀는 그 매혹적인 텍스트의 희랍어의 뉘앙스와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맛 들이는 법을 익혔다. “이 실천의 힘은 특별했고 매번 나를 놀라게 했다. 매일 그 힘을 체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매번 나의 기대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때때로 처음에 나오는 말들이 내 몸에서 생각을 낚아채서 공간 밖의 장소로 옮겨가는데, 그곳에는 전망도 관점도 […]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 무한의 무한은 그 모든 부분에서 침묵으로 가득차게 되는데 그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확실한, 소리의 감각보다 더 확실한 감각의 대상이 되는침묵이다. 소음은 ―소음이 있다면― 오직 이 침묵을 거친 후에야 나에게 다가온다.”11)

  주된 어려움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의지의 노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할 때 베유는 학생들이 애를 써서 근육을 수축시키는 것을 보았고, 무엇에 주의를 기울였느냐는 다음 질문에 그들은 답을 하지 못했다. 시몬 베유는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기도와 같은 것임을 알았다. 곧 자신의 밑바닥에 다가가기 위한 싸움, 처음에는 지치게 하지만 정화해 주고 삶을 음미하게 하는 싸움인것이다. 이는 적용해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고 단순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이다. “주의를 기울이는일은 하나의 노력이다. 어쩌면 모든 노력 중에 가장 큰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소극적인 노력이다. 그 자체로는 수고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를 감지하게 될 때는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이미 대단히 훈련되지 않았다면 말이다.”12)

  이는 숨 쉬는 것과 같다. 이 수련을 주의 깊게 행할 때 자기 자신과 접촉하게 되고 회복하게 된다. “20분 동안 힘들이지 않고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3시간 이상 몰두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가치가 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느낌으로 ‘나는 맹렬히 일했다’고 말하게 된다[…]. 가장 귀중한 재화는 찾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것들을 찾을 수 없다.”13) 또 다시 감미롭게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베유는 무호흡 안에 잠기는 것과 같은, 그럼에도 정신의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본질적인 이러한 수련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에는 육신이 수고를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진정으로 주의를기울이는 일을 싫어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 어떤 것은 악(惡)에 육신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깝다. 바로 이 때문에 참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자신 안에 있는 악을 조금씩 파괴하는 것이다. 15분 동안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그렇게 수많은 선행(善行)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14)

지력(知力) 위한 휴식

  베유의 직감은 신경학 분야에서 응답을 받았다. 우리의 뇌(腦) 안에서 휴식할 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때, 혹은 자신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거나 미래에 대해 상상을 펼칠 때 활성화되는 신경망network이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디폴트 모드 네트웤’Default mode network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2001년에 신경학자 마커스 레이클Marcus Raichle에 의해 발견되었다.15) 실제로 이 네트웤은 체험한 내용에서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그 체험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일을 돕는데, 이는 바로 지력의 활동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만이 중요치 않은 생각들이 본질적인 생각들로부터 분리되고,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면 생각 너머의 다른 영역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 그렇게 마땅히 취해야 할 지상의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되며,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생각 없이 그저 활동 안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는 것이다.”16)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물론 이는 쉬운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사람들이 무척 두려워하는 무료함이 느껴질 때 그렇다. 하지만 이 또한 풀어서 읽어 내야 할 생각이다. 침묵을, 자기 자신과 함께 있기를 마주해 본 사람은 무료함(따분함)이 그저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중요하기도 한 느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 창의적이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파스칼Pascal이 경계했던 것처럼) 하나의 위험으로 여겨 피해서는 안 된다. 신체적 활동을 할 때 활동능력에 따르는 수고처럼 무료함은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이는 심리학 분야에서도 확인된 자료이다. “무료함과 초조함은 사물들의 실재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재촉하는 신호들이다 […]. 무료함의 체험은 창의성 및 혁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무료함에 주의 깊게 호기심을 가지고 머무른다면 우리는 무료함을 한 발짝 물러서서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과 다시 접촉하기 위한 순간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17)

 항상 현재적이고 예견할 없는 체험

  베유가 주목한 바는 정확히 자기 자신과 홀로 함께 머무르는 두려움을 극복할 때만 새로워지는 체험이다. 곧 대체로 요즘처럼* 그렇게 홀로 머무를 수 밖에 없을 때 발생하는 체험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젊은 사관생도 프란쯔 얄릭스Franz Jalics의 경우이다. 전쟁포로로서 어떤 수도원에 감금된 그는 무료함을 느끼자 자연 및 자기 자신과 접촉하면서 침묵 속에서 나날을 지내기로 작정한다.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차차 그 활동이 자신을 복원시키고 변화시킨다는 것을 주목하고 회복됨을 느끼며 사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그 해를 지내고 나서 […]나는 내 안에서 특별한 고요함과 내적 선명함 안에서 드러나는 관상적 토대가 성장했다.”18) 그 체험으로부터 그는 진정으로 자기 마음에 자리한 것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는데, 마음에서 “그는 참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얄롬Yalom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예수회에 들어가서 누가 됐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근본적은 욕구를 실현하 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읽어내고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며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를 위해 관상 수련을 제안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자신과 접촉하기 위해 얄릭스는 무엇보다 우선 감지(感知)하는 능력을, “듣기, 만지기, 맛을 느끼기, 보기, 냄새 맡기 등의 감각들을, 그리고 영적 감지를, 곧 의식하게 되고 인식하면 알아차리는 […] 감지능력”을 훈련할 것을 제안한다. “감지하는 상태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머무른다는 것을 뜻한다.”19) 감지능력의 훈련은 생각하기와 행하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근대를 지나오면서 점차적으로 약해져 갔다. 하지만 감지능력이 없이는 생각하기는 하나의 고문(拷問)이 되고(스스로 격리된 사람들의 11 가지 실험에서처럼) 행하기는스트레스를 낳는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유일한 차원인 현재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감지에서는 물론 지루함이 머리를 내밀 수 있다. 하지만 지루함을 받아들이고 경청할 때 그 지루함은 성가신 존재이길 멈추고 다른 어떤 것에 길을 내 준다는 것은 앞에서 주목한 바와 같다. 관상은 피곤하게 하지 않고 우리를 회복시켜 준다. 그래서 얄릭스는 끝없이 하느님을 관상하면서 보내는 영원한 삶이 피곤하게 하는 활동이 아니고 잠시 멈추거나 휴가를 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주목한다. 우리는 충만함에 도달해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현재의 시간에 하는 모든 체험과 활동은 그 충만함의 단편을 이루며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그 만족이 도달할 미래의 그 충만함의 웅변적인 예표가 되는 것이다.20)

  결국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 자신과 접촉하기 위하여 이 현세를 이용하여 필요를 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21)


1) Cfr G. Cucci, «Cybersex. Una dipendenza insidiosa»(사이버섹스, 음험한 중독), in Civ. Catt. 2019 II 540-552.
2) B. Schönberger, «Far niente»(아무것도 하지 않기), in Psicologia contemporanea(현대 심리학), n. 252, 2015년 11-12월, 12.
3) T. D. Wilson et Al., «Just think: The challenges of the disengaged mind»(그저 생각하라. 플려 있는 정신의 도전, in Science, n. 345, 2014년7월, 75-77.
4) B. Pascal, Pensieri(『팡세』), n. 126.
5)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X, 7, 1177 b 25-32.
6) 같은 책, X, 7, 1178 a 5-10. 『형이상학』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결론이다. “인간의 지성이 –적어도 합성요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지성이– 얼마 동안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듯이 신적 지성 역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영원히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형이상학』, XII, 9, 1074 b 15 – 1075 a 10; 강조는 필자의 것).
7) Agostino, s., De Quantitate Animae(영혼의 양에 대하여), 33,76.
8) Cfr A. Maslow, Religious, Values, and Peak-Experiences(『종교, 가치 그리고 절정체험』), Columbus,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64, 59. 심화를 위해서는 cfr G. Cucci, L’arte di vivere. Educare alla felicità(『살아가는 기술, 행복하도록 교육하기』), Milano, Àncora – La Civiltà Cattolica, 2019.
9) I. Yalom, Sul lettino di Freud(『프로이드의 작은 침대 위에서』), Milano, Neri Pozza, 2015, 7.
10) G. Canobbio, «Leggere per formarsi»(양성되기 위한 독서), in La Rivista del Clero Italiano 96 (2015) 660에서 재인용.
11) S. Weil, Attesa di Dio(『하느님을 기다림』), Milano, Rusconi, 1984, 45s. 이와 대단히 유사한 체험을 아우구스티누스도 묘사한다. “나는 내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일종의 빛과 음성과 냄새와 음식과 포옹을 사랑합니다. 이는 곧 내 안에 있는 내적 인간의 빛, 음성, 냄새, 음식,포옹입니다. 그곳에서는 공간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어떤 빛이 내 영혼에 빛을 뿜고, 그곳에서는 시간에 압도당하지 않은 한 음성이울려오며, 그곳에서는 바람이 퍼뜨리지 않는 향기가 납니다. 그곳에서는 탐식으로도 질리지 않는 맛이 느껴지고. 그곳에서는 만족하고도 중단되지 않는 포옹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이것을 나는 사랑합니다”(『고백록』, X, 6,8).
12) 같은 책, 80. 이러한 내용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에서 권고하는 세 번째 기도방법과 대단히 유사하다. “숨을 쉴 때마다 마음 속으로 주님의 기도나 바치고 싶은 다른 기도의 단어 하나를 말하면서 기도한다. 그런식으로 호흡과 다음 호흡 사이에 주로 그단어의 의미나 그 기도가 향하는 분을, 혹은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각하거나 그분의 위대함과 자신의 보잘것없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한다. 같은 진행방식과 같은 정도로 계속해서 주님의 기도의 다른 단어들로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그런 방식으로 다른 기도들을, 곧 성모송, ‘그리스도의 영혼은’, 사도신경, 그리고 ‘여왕이시며’를 바친다”(258항).
13) S. Weil, Attesa di Dio(『하느님을 기다림』), 80s.
14) 같은 책.
15) R. L. Buckner – J. R. Andrews-Hanna – D. L. Schacter, «The Brain’s Default Network: Anatomy, Function, and Relevance to Disease»(뇌의디폴트 네트웤: 해부, 기능, 질병관련성), in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vol. 1124 (2008), n. 1, 1-38; M. E. Raichle – A. Z. Snyder, «A default mode of brain function: A brief history of an evolving idea»(뇌기능의 디폴트 모드: 진화하는 개념의 간략한 역사), in NeuroImage 37 (2007) 1083-1090.
16) B. Schönberger, «Far niente»(아무것도 하지 않기), cit., 15.
17) Sh. Turkle, La conversazione necessaria. La forza del dialogo nell’era digitale(필요한 담론. 디지털 시대의 대화의 힘). Torino, Einaudi, 2016, 50-52; cfr S. Mann – R. Cadman, «Does Being Bored Make Us More Creative?»(무료함은 우리를 더 창의적으로 만드는가?), in Creativity Research Journal 26 (2014) 165-173.
18) F. Jalics, Esercizi di contemplazione [관상 수련], Milano, Àncora, 2018, 29 s.
19) 같은 곳, 34. 이는 한 유명한 경구에서 파스칼도 역시 지적했던 바다. “각자 자기 생각을 검토할 일이다. 그러면 그 생각들이 항상 과거와 앞날에 붙들려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다. 혹은 현재를 생각하더라도 그저 앞일을 미리 준비하고자 현재에서 빛을 얻기 위해서만 생각한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들이다. 오직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렇게 우리는 결코 살지를 않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며, 항상 행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B. 파스칼, 『팡세』 n. 172).
20) F. Jalics, Esercizi di contemplazione [관상 수련], cit., 36.
21) 여기에 인용된 본문 외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일과 기도의 간단한 수련을 권고한다. “10분 동안의 침묵을 보존하기로 결심하고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라…. 편안한 자세를 찾으라…. 눈을 감으라…. 무엇보다 먼저 1-2분 동안 흐트러진 정신을 알아차리라…. 이제 침묵을 들으라…. 그것이 이 흐트러짐을 의식하게 해 줄 것이다. 침묵이 낳는 소리를 들으라. 당신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당신을 둘러싼 소리들을 듣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5분 동안 침묵을 유지하라. 이는 그 소리들을 가려내는 일이 아니다. 잠간동안 각각의 소리에 머무르라. 한 번에 한 가지씩….강렬한 소리들, 희미한 소리들…,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들, 멀리서 들리는 소리들…. 이제 당신의 숨소리를 들으라. 이 흐름의 가장자리에 당신이 있음을 느끼고 그 흐름을 들으라. 이제 당신을 둘러싼 모든 소리를 마치 하나의 소리인 것처럼 들으라…. 끝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라.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감지했고 무엇을 체험했으며 무엇을 만났는가?”(G. Cucci – M. Marelli, Istruzioni per il tempo degli Esercizi spirituali [영신수련의 시간을 위한 가르침], Roma, AdP, 2015, 221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