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천재의 생애에 깃든 빛과 그림자

© La Civiltà Cattolica, Q. 4074, 21 Mar, 2020 I, 582-595
쟌카를로 파니 신부 Giancarlo Pani, S.I. (예수회)
김영식 루카 신부(서울대교구) 옮김

  성좌에 신임장을 제출한 외교관들에 대한 신년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가 “우르비노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로 1520년 4월 6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난” 라파엘로 산치오 선종 500주년이 되는 해임을 상기시켰다. “라파엘로 덕분에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값진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예술가로 다양한 색, 거친 재료, 음향을 한 예술품의 부분으로 조화롭게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교도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의 고유성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우리가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그림인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교황은 라파엘로의 두 가지 다른 업적을 강조했다. 첫째, 그는 “문예부흥(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서 인류 전체의 삶을풍요롭게 했습니다. 이 시대에도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믿음과 희망을 지닌 시대였습니다.” 둘째, 그는 성모님에게 다양한 성화를 봉헌했습니다. “라파엘로가 선호한 회화 주제 중 하나는 성모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 곳곳의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많은 그림을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예술가의 한 가지 특색을 잘 파악했다. 성모님은 거의 항상 아기 예수님과 함께 그려지는데 라파엘로가 고착시킨 이 유형의 표현법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큰 성공을 가져왔고, 1900년대까지 오랜 세기 동안 마리아를 표현하는 미술 역사에서 정착되었다.

미와 조화

  라파엘로 산치오는 1483년 우르비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학식을 갖춘 화가로서 아들에게 미술 기초 수업을 가르쳤다. 소년은 몬테펠트로 공작령의 우르비노에서 문화적 환경의 혜택을 받았다. 이곳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찍세상을 떠난 후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문하생 집단에 들어갔다. 페루지노는 15세기말 움브리아 화파의 창립자로서 베로키오, 로렌조디 크레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피렌체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미술을 단순하고 고상한 형태로 해석했고 이런 방식이 라파엘로에게 전수되었다. 한편 라파엘로는 위대한 피에로의 작품에서 멀리있는 풍경이나 장소-인물간 관계에서 크리스탈과 같은 투명함을 차용했다. 이후 라파엘로의 생애에서 이 경향이 항상 남아있었다.

  페루지노는 이미 명성의 절정에 이르렀기에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젊은 라파엘로는 스승과 시뇨렐리의 미적 개념에서 내적 위기, 즉 미술을 사회-영성적 기능을 갖추어 소통과 권고로 여기는 모습을 보았다.

  라파엘로가 세상에 알려진 곳은 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였다. 알비찌니 가문은 1504년에 그에게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봉헌할 ‘동정 마리아의 결혼식’이란 그림을 부탁했다. 이는 그가 서명과 날짜를 적은 첫 그림이다. 그는 그림의 정중앙, 즉 풍경 위에 있는 성전의 정면부에 ‘라파엘로 우르비나스 1504’라고 적었다.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페루지노가 동정 마리아의 약혼반지 성유물을 보관한 페루지아 주교좌성당의 경당 그림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했는데 제자와 스승 간의 대결 같았다. 스승은 ‘열쇠를 넘기심(1484, 시스티나경당)’에 쓰인 구도를 다시 택해서 전면에 성경 장면이 있고, 배경에 성당과 두 개의 개선문이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1400년대 원근법을최상으로 구현한 그림으로 여겨졌다.

  라파엘로는 이미지 조각을 비튼다. 무엇보다 마당 포장석과 성전의 건축학적 구조(브라멘테가 제작한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경당을연상시킨다)가 만들어낸 공간의 원근법과 의미를 움직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어 더 자연스러운 자세를 유지했으며 사건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게 했다. 우측의 성 요셉은 낙담한 후보자들(한 명은 무릎으로 막대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중에서꽃이 피어난 막대기를 들고 서있다. 좌측의 마리아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화관을 만든 소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두 집단은두 개의 곡선을 이룬다. 하나는 내부로 향해 성전의 정면부로, 다른 하나는 외부로 향해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을 포함시키는 듯하다.

  반면에 페루지노가 ‘마리아의 결혼식’에서 그리는 인물들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뻣뻣하고 정적으로 서있으며 공간을 만들지 않고이 장엄한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요약하면 라파엘로는 경탄할 만한 수작을 그렸다. 제자는 공간과 얼굴 표정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시각으로 스승을 능가한다. 비평가 스트리나티가 지적하듯 이는 생각할 만한 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세부적인 것들을 촘촘히 분석하여 웅장한 필법으로 그렸고 위대한 인문주의적 그림은 손의 뛰어난 기술만이 아니라 이 안에 암묵적으로 포함된 막연한 제안도 가리킨다. ‘마리아의 결혼식’으로 라파엘로는 더 뛰어나고 더 역량있는 화가임을 완전히 드러냈다. 이 작품은 탁월하지만 여기에 깃든 문화는 완전히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에 무결실이란 흠의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엄격하고 노련한 판단이지만 당시 예술가는 겨우21세였고 모두 미래를 향해 투사된 것이다.

피렌체에서의 경험

  첫번째 성공 후 라파엘로는 자기 경험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껴 피렌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는 베로키오의 제자였던 자기 스승의피렌체 경험을 답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귀도발도의 여동생인 몬테펠트로의 죠반나가 피렌체 공화국의 장관인 피에르 소데리니에게쓴 추천서를 지니고 갔다. 이 문서의 날짜는 1504년 10월 1일로 적혀 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의 두 위대한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의 명성이 퍼져 있었고 피렌체의 최고 명성을 위해 서로 경합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그들의그림과 조각, 베키오 궁전의 ‘500인의 방’에서 그들이 시도하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 그는 즉시 이들의 새로움을 느끼고 자기가 배워가는특별히 중요한 시기에 비교해야 할 스승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작품을 철저히 공부하고 이들이 서로 상반되고 쉽게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입장을 대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레오나르도에게 미술은 자연, 인생, 세상의 발견을 알게 하는 기능이 있다면 미켈란젤로는 인간, 사람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인간 영혼의 혼란과 모순을 강조했다.

  라파엘로는 모든 경험에 개방적이었다. 그는 경탄하며 각자의 심오한 면들을 수용하고, 심지어 비교할 수 없는 이들과 경쟁을 시도한다. 그는 지능적으로 그들의 새로움을 흉내낼 줄 알았고 그 비밀을 이해하며 미술 시장의 추이를 잘 이해했다. 그에게 피렌체는 진정한시험대로서 두 위대한 미술가들의 가치를 결합시키고 미의 원형에 통합시키려 시도했다. 바사리는 미술가 들의 전기에서 분명히 주장한다. “그의 그림에는 인물의 아름다움과 그림의 고귀함 안에 신성의 숨결이 부는 듯하다. 이 그림은 어떻게 인간의 재능이 단순한 색채라는 불완전함으로 그림 안의 것들을 살아있는 것처럼 탁월한 화법으로 축약할 수 있는지 고려하는 이들을 경이롭게 만든다.” 그의 평가는흥미롭다. 라파엘로의 그림들은 정말 살아있고 게다가 그 표현의 단순성과 자연성으로 활력이 넘치며 매력적인 무언가를 전하며 황홀하게 하고 매혹시킨다. 이는 매혹하는 아름다움의 신비이다.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낙담하게 된다. 피에르 소데리니는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고 라파엘로는 일부 상인들이주문한 아주 지엽적인 일들로 만족해야 했다. 그 중 상인이면서 지성을 겸비한 타데오 타데이Taddeo Taddei가 라파엘로에게 아기 예수와함께 있는 동정 마리아의 그림을 부탁한다. 라파엘로에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고 이미 카스텔로와 페루지아에서 다양한 작품을 만든 바 있었다. 이 작품들은 페루지노의 양식을 많이 닮았고 다소 차갑고 반복적인 화법을 표현했으나 점차 유행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타데이의 주문으로 그는 고유의 독창성을 표현하게 되었다. 1506년에 그린 ‘풀밭의(혹은 벨베데레의) 성모’로 라파엘로는 피렌체 작업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피라미드 식의 배치는 명백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성녀, 안나, 동정녀, 아기 예수’를 보라.)에서 기인하며 앉아있는 동정녀를 표현한다. 배경에는 광활한 수평선에 호숫가의 마을이 보인다. 마리아는 손으로 아기 예수를 받치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뒤뚱거리며 첫 걸음을움직이면서 세례자 요한의 막대 십자가를 잡는다. 이는 장차 있을 구원 사명을 뜻한다. 미술가는 레오나르도식의 신비의 의미를 웅장하고 정감있는 차분함으로 재형성한다. 시선과 자세가 서로 결합되어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마리아그림 유형의 전문가가 되게 한 연작 중 첫 번째 그림이다. 동정녀의 형상은 미, 인간성, 다정함의 모범을 제시하게 된다.

  거의 동시대의 작품은 ‘검은 방울새의 성모Madonna del Cardellino’로서 자기 방식의 실험작이지만 완성도가 높다. 이어 1508년에 그려진‘카지자니의 성 가족’,‘카우퍼의 성모’(라파엘로의 마돈나 시리즈 이름에서 옴)가 있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옷깃 안으로 손을넣으며 사랑스런 동작을 취한다.

  피렌체에서의 체류는 또한 초상화의 시기였다. 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 아뇰로 도니와 그 부인인 막달레나 스트로치 도니의초상화가 대표적이다. 막달레나 부인의 자세는 지나치게 죠콘다의 자세를 따라간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여인이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으며 ‘사실적’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죠콘다를 흉내낸다면, 다른 한편 이상과는 달리 오히려 단점을 지닌 여인처럼 보인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뚱뚱하며 거만한 자세로 값진 보석을 가슴 위에 장식했다. 그럼에도 이 모습은 벨벳 재질로 된부드러운 복장의 짙은 색깔과 체형을 강조하며 어느 정도 웅장함을 지닌다.

  1507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시신 수습’(혹은 Pala Baglioni)은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요한 의뢰였다. 페루지아의 경당에 쓰일 제단화로서, 가족 초상화가 아니었다. 라파엘로에게는 피렌체 미술계를 넘어선 것을 뜻했다. 아탈란타 발리오니는 자기 아들인 그리포네토를 기념하는 그림을 주문했다. 그 아들은 1500년 혈육간의 전쟁에서 살해되었다. 형제 살인에 연루되어 어머니 집에서 추방당해유배형을 받고 지내다 사촌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매우 감성적인 표현으로 온 가족이 연루된 비극을 상기시킨다. 그림 중앙에는 활력으로 가득찬 젊은이가 있으며 이제 막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옮긴다. 그의 얼굴은 그리포네토를 닮았다. 스승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막달레나도 헝클어진 머리로 서 있다. 그녀의 장밋빛 손은 창백한 예수의 몸과 닿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만 유일하게 주님과 접촉하고 있다.

  그녀의 고통은 반대편에서 기절하는 성모의 모습과 연결된다(아마 발리오니의 비극을 표현한 것이리라). 주님을 들어올리는 이들 가운데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표정으로 관람객을 쳐다보는 노인은 아리마테아의 요셉일까? 분명히 미켈란젤로가 마태오를 화가의 상상으로 그린 모습일 것이다. 그림의 배치는 서기 2세기 ‘멜레아그로의 시신을 옮김’이란 제목이 붙은 로마 석관의 얕은 양각을 상기시킨다. 라파엘로에게 이는 고대 문화와의 만남을 뜻했다. 이는 미술가의 고전주의가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이 작품은 회화 역사에서 획을 긋는 모델이 된다.

 로마에서의 라파엘로

  1508년 말 우르비노 출신이며 라파엘로 부친의 친구였던 도나토 브라만테가 급하게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렀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축을 담당한 건축가로서 호전적인 교황 율리오 2세가 얼마나 로마를 예술로 장식하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율리오 2세는 교황관을 뺏어간 자기 선임자이자 경쟁자였던 알렉산드로 6세의 숙소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니콜로 5세 경당 위로 숙소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 방을 완전히 개조하려 했다.

  라파엘로가 도착하자 새 숙소에는 발다싸르 페루치, 로렌조 로토, 브라만티노, 소도마처럼 이미 명성을 떨치던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그리고 있었다. 브라만테의 조언에 따라 율리오 2세는 라파엘로에게 ‘서명의 방’ 장식을 맡겼다. 이 방은 대심원De signatura Gratiae1)의 용도로 계획되었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 천장에는 네 가지 원이 표현되어 있었다. 신학은 Divinarum rerum notitia, 즉 ‘하느님에 대한 계시’란 말이 써있고, 철학에는 Causarum cognition (사물에 대한 인식)이 써있다. 마지막으로 정의와 시가 표현되어 있었다. 라파엘로는 아래의 벽에 인문주의 문화의 기초가 되는 이 이상들이 묘사하는 장면들을 그렸다.

  따라서 신학 아래에는 소위 ‘성사에 대한 토론’이라는 프레스코화가 있다. 주제는 전통적 도상에 따라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한다. 성부, 성자, (비둘기 형상의) 성령은 성체가 담긴 성광이 놓여진 제대 위에 떠있으며 단순한 구조처럼 보인다. 사실 라파엘로는 반원형 배치를 만들었다. 즉 제대에서 출발해 축성된 성체를 중심에 두고 삼위일체 주변에 두 개의 전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한쪽 날개는 전투교회를 포함한다. 교회 박사들(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토마스 아퀴나스), 주교들, 신자들(심지어 단테와 사보나롤라도 보인다. 사보나롤라의 경우 알렉산드로 6세 이후 명예가 복권된 것인가?)이 보인다. 다른 전망의 날개는 승리 교회를 표현한다. 수난과 영광의 상징에 둘러쌓인 예수가 중앙에 있고,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있으며 좌우로 사도들, 복음사가들, 예언자들이 있다. 그 위에성부는 오른손으로 축복하며 왼손으로 지구를 들고 있으며 그 좌우에 천사들의 무리와 옅어지는 하늘 풍경이 있다. 정말로 성당 후진의조개 모양인 이 그림이 설명하는 바는 명확하다. ‘계시’는 교회 안에 형태를 띠고 있으며 건축학적 구조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 즉 천상 세계가 지상 세계를 확증하며 지상 세계가 천상 세계와 만난다. ‘성사에 대한 토론’은 ‘서명의 방’의 걸작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아테네 학당

  또다른 걸작은 ‘아테네 학당’이다. 이는 ‘철학’ 아래 있으며 ‘성사에 대한 토론’ 건너편 벽에 위치하여 고대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신학과 철학이라는 두 벽 사이의 이상적인 연속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성사에 대한 토론’에 비해 새로운 점이 많다. 이 작품에서 철학으로 그 정점에 이른 인간 사상의 탁월함을 표현하기 때문에 웅장한 구조를 지닌다.

  조망의 중심에 고대의 최고 철학자 두 명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결연한 자세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들은 마치 방 안에 들어오려 계단을 내려오려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이상 세계인 하늘을 가리키며, 대표 저서인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다. 이 책은 존재와생성에 대한 대화를 주제로 하며 우주의 기원, 원소들의 본성,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플라톤은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과 진리를 지침없이연구했던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닮았다. 그 옆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향해 질문하는 시선을 지니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고 왼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윤리를 다룬다. 이 인물은 누구를 그린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의 논의가 있다. 아마 ‘전망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던 화가요 건축가였던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Bastiano da Sangallo일 것이다. 아마 그가 무한하게 떠있는 광활한 공간을 표현한 기념비적 건축 조망 계획을 이어받아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전 계획의 구조를 다시 택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당대에 현존하는 두 인물로 그려서 고대 철학문제를 현대와 동시대의 문제로 변모시켰다.

  게다가 인간 지혜의 탁월함을 표현해야 했기에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다. 사람들은 웅장한 태도와 동작에서 나오는 기운으로 구별된다.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디오게네스를 알아볼 수 있다. 당대 인물들도 없지 않다. 유클리드는 브라만테를 그린 것이고, 흰 튜닉을 입고 박사들 사이로 가는 젊은이를 막아선다. 이는 로베레 왕가의 후손이며 율리오 2세의 조카이다. 가장 우측하단에 소도마 곁에는 검은 베레모를 쓴 라파엘로의 자화상도 있다. 이는 유일하게 관람객을 바라보는 인물이며 그의 서명이라 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습으로 그려진 미켈란젤로는 유일하게 당대의 복장과 장화를 착용하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도 그림에 있기에 교황은 자기 얼굴도 추가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이사야 예언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 그림 작업이 막 끝났기에 그 태도의 새로움이 저절로 드러났다. 라파엘로가 표현한 이 그림에서만 미켈란젤로 고유의 파토스(비애)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와 정의

  ‘시’의 아래쪽과 창문 위의 루네트(반월형 부분)에는 파르나소(시인들)와 함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을 찬양한다. 과거와 동시대 시인들 앞에서 전통적인 수금 대신 비올라를 연주하는 아폴로와 악기들을 연주하는 뮤즈 신들이 그려져있다. 호메로스 뒤에는 비르질리우스, 단테, 페트라르카가 있다. 라파엘로는 두 세계의 연속성을 제안하려 했다.

  파르나소 맞은편의 프레스코화에는 창문 위 루네트에 미술가가 덕을 찬미한다. 향주삼덕 중에 ‘신덕’은 하늘을 가리키는 한 신사로의인화되었고, 망덕은 손에 횃불을 든 사람으로, 애덕은 참나무(율리우스 2세 가문의 문장을 상징함) 가지에서 무언가를 얻는 세 번째 사람으로 그려졌다. 사추덕 중에 지덕, 절덕, 용덕은 달리며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 날개달린 큐피드들로 그려졌다. 용덕은 칼 대신 참나무 가지를 손에 쥐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 역시 교황 가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

  창문 옆에 있는 두 개의 프레스코화는 민법(유스티니아누스가 법전을 받는다)과 교회법(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이 중세 교회법을 모은 교령집을 승인한다)과 함께 있는 의덕을 찬미한다. 그런데 연로하고 겸손한 얼굴의 교황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오랜 임기동안 겪은 고통을 특히 턱수염으로 표현했다. 교황은 1510년 페라라에서 보르지아 가문의 루크레치아의 남편인 에스트 가문 알퐁소와 프랑스 동맹군에게 패배했다. 볼로냐인들은 얼마 전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교황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기회로 활용했다. 이는 큰 치욕이었기에 율리우스 2세는 볼로냐에 대한 성무집행금지 명령으로 대응했다. 한편 루이 12세는 율리우스 2세를 폐위시키려 피사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놀랍게도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인들을 전부 내쫓기 전까지 턱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죽을 때까지 턱수염을 길러야 했다.

  라파엘로는 이어서 턱수염을 기른 율리우스 2세의 공식 초상화를 그린다. 이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보관될 예정이었다. 그 당시 신자들은 교황을 거의 보지 못했으며 이 초상화는 라파엘로가 효과적으로 해석한 교황의 종교-정치 계획을 장엄하게선포하는 것이 될 터였다.

헬리오도로스의

  라파엘로는 이어 헬리오도로스의 방을 그린다. 방이 이 이름으로 불린 이유는 헬리오도로스를 쫓아내는 성경 장면을 표현한 프레스코화 때문이다.2)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레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부유한 재물을 약탈하려고 헬리오도로스를 보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림 중앙에 무릎꿇고 탄원 기도를 바치는 오니아스 대사제의 청을 들어 하늘의 기사를 보내어 헬리오도로스를 쫓아냈다. 이는 과거와 함께 당시대를 암시한 장면으로 율리우스 2세의 영적이고 세속적인 계획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3)

  측면에는 하느님이 파견한 빛나는 천사 덕분에 이뤄진 ‘성 베드로의 해방’이 아름답고 쇄신된 밤의 풍경으로 그려졌다. 또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의심을 품었던 보헤미아 사제의 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볼세나의 미사’도 있다. 이 사제가 성체를 축성하는순간에 갑자기 성체에서 핏방울이 성체포 위에 떨어졌다. 라파엘로는 율리우스 2세의 계획을 하느님이 축복해주신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교회사의 모든 사건들을 활용한 것이다. 이 방의 그림 작업에는 다양한 협력가와 제자들이 동참했으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스승의 지도를 받고 작업을 수행했다. 한편 라파엘로의 개입은 ‘레오 대교황과 아틸라의 만남’에선 완전히 사라진다.

  1513년 율리우스 2세는 세상을 떠나고 레오 10세가 교황직에 오른다. 그는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아들인 죠반니 데 메디치였다. 마지막 프레스코화에 그려진 교황 얼굴에서 레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미술 수준은 이전 방들에 그려진 그림들에 미치지못한다. 마지막 방에 그려진 ‘보르고의 화재’는 대부분 제자들의 작업이었다.

로마에서의 성공: 화가이며 건축가

  라파엘로의 명성은 어느덧 지속되었고 브라만테가 죽자 라파엘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담당 건축가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이직책을 지니게 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고대 유적에 대한 그의 공부가 중요했기에 레오 10세 교황은 그를 고대 로마의 ‘감독관’으로임명했다. 이는 고고학적 유물 보호의 길을 개척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스티나 경당 벽면은 이미 로베레 가문의 식스토 4세 교황 시절에 가짜 천막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레오 교황은 그에게 이 벽 하단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연작 계획도 맡겼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명작 아래 위치하게 될 터였다. 이는 라파엘로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었으니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와 로마 시의 수호성인들의역사로 탁월한 그림 연작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도안은 저명한 태피스트리 작가 피터 반 엘스트가 브뤼셀에서 그렸다. 이 작품은 회화와 태피스트리 미술 역사에 혁명을 일으킨 성공이었다.

  이제 로마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수준높은 의뢰가 비오듯 쏟아졌다. 피아첸자의 성 식스토 수도승들을 위해 그려진 ‘식스토 경당의 성모Madonna Sistina’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섬세함과 정교함으로 유명하며 라파엘로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이다. 이 태피스트리는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의 초자연적 계시가 특징이며 마리아는 신자들을 향해 구름 위에서 장엄하게 내려다보면서 신자들도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격려한다. 성 식스토의 모습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모습이 보인다. 난간 가장자리에서 꿈꾸듯 이 장면을바라보는 두  아기 천사는 매우 독창적이다.

  로마에서 주문받은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는 ‘율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과 루이지 데 로씨 추기경 가운데 있는 레오 10세 추기경의초상화’이다. 교황은 조카들과 ‘침묵의 대화’를 하며 눈길을 교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장식된 값진 성경을 펼치는 동작으로 표현된다. 그는 자신의 문화적 관심사, 예술을 세밀하게 추구하는 수집가로서의 취미를 알려주듯 한 손에 안경을 들고 있다.

  날짜를 확정하기 어려운 작품 중에는 ‘갈라테아의 승리’가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옮김’과 병행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풀밭의 성모’에서의 배치와 비슷해보인다.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의 스타일은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동시대의 것일 수 있다. 매우 부유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는 라파엘로에게 페루치Peruzzi에서 룽가라Lungara에 이르는 곳에건축된 화려한 빌라(이후 ‘파르네시나’Farnesina라고 불림)에 쓸 갈라테아Galatea 신화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외눈 거인] 폴리페모Polifemo로부터 안전하도록 돌고래들이 끄는 조가비 껍질 위에 요정이 서 있다. 요정은 빨간 망토를 두르고 비틀어진 자세이지만 균형잡힌 자세로 서있다. 바다의 신은 벗어나려고 하는 또다른 요정을 붙잡고 있으며 세 번째 요정은 켄타우로스centauro(반인반마)의 어깨를 붙잡고 있다. 빛나는 바다 저 멀리 에로스가 눈을 활짝 뜨고 살피며, 사랑의 요정들은 화살을 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마 이 그림은 홀아비인 키지가 마르게리타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역사를 다룬 듯하다. 라파엘로는 마르가리테스margarites가 그리스어로 ‘진주’perla인 것을 알게 되었다. 웅장하고 호화로운 갈라테아는 조개 안에 진주처럼 서있다. 또다른 비밀이 있다. 그 얼굴은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정부(情婦)였던 임페리아 코냐티Imperia Cognati일 수 있다. 그녀는 귀부인 신분을 버리고 은행가의 사랑을 받았다. 키지는 라파엘로에게 그녀를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했고 라파엘로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직업의 진가를 인정했다. 여기서도 라파엘로가 대담한 삶을 살았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둘 다 공통적으로 여성에게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바사리도 기록한 내용이다. 아마 이 절제할 수 없는 열정이 라파엘로의 악의 기원일 것이다. “라파엘로는 여성들에게 매우 사랑스럽고 애정적인 사람이었고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봉사했다. […] 그의 친한 친구인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 그의 궁전의 첫째 로지아에서 그림을 그릴 때, 라파엘로는 자기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작업에 깊이 집중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고스티노는 좌절했고[…] 라파엘로가 작업하는 이 집에 그의 여인이 계속 와서 그의 곁에 머물게 했다. 그러면 작업이 끝날 수 있었다.”

  일화에 따르면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라파엘로의 고뇌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사생활은 일부 그의 명작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포르나리나Fornarina’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 작품은 거의 이해한다는 듯한 빛나는 눈과 손가락이 스치는 섬세한 가슴을 지닌 무명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린 것으로 화가가 죽기까지 항상 자기 곁에 소장할 정도로 소중한 그림이었다. 왼쪽 팔 둘레의 장식에 라파엘로는 자기 이름을 새겼는데 이는 자신의 서명인 셈이다. 이 소녀는 룽가라 마을에서 멀지 않은 제빵업자의 딸일 것이다. 그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고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도 없다. “레오나르도의 조콘다와 똑같이 포르나리나는 미술사에서 유령같은 인물이다.”

죽음

  라파엘로는 1520년 4월 6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사리는 그의 삶이 무절제해서 요절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그의머리맡에 미완성된 마지막 걸작인 ‘주님의 변모’를 두었다. 이는 20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라파엘로가 집중적이고 열정적으로 성숙시킨 것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비길 만하며, 어떤 이는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벰보Bembo 추기경은 판테온의 무덤을 봉인한 묘비에 라파엘로를 기리며 이렇게 적었다.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 rerum magna parens moriente mori. (여기 라파엘로가 잠들어 있으니, 그가 살아있을 때 정복될까 두려워했던 자연이 이제 그와 함께 죽을까 두려워한다).” 이 밖에 다른 것을 추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1) 최종결정권을 지닌 교황이 서명하기 전에 문헌들을 참조하던 관습에서 이 이름이 붙음.
2) 참조: 2마카 3,1-40
3)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인들을 쫓아낸다는 것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