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녹색 성장은 가능할까?

© La Civiltà Cattolica, Q. 4074, 21 Mar, 2020 I, 547-560
비구이리스티 신부 Fernando de la Iglesia Viguiristi, S.I. (예수회)
노우재 미카엘 신부(부산교구 수정본당) 옮김

도입

  곧 다가올 우리들 미래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어떠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도달해야 하는가? 오늘날 진정한 발전은 무엇인가?

  긍정적인 선택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발전을 호의적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시작하겠다. 우리는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질적인 역동성에 더욱 부합하다고 믿는다. 실존 질서 전반에서 볼 때,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퇴보를 뜻한다. 우리가 악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의식했다.1)

  그러나 이런 본성적 경향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서 조화롭게 조절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계속 생겨나온다. 첫 역사학자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면전을 숙고하면서, 인간 본성의 주요 특성은, 동일하게 대립되는 힘이 아니라면 제한되거나 억눌리지 않는, 성장을 향한 끝없는 열망에 있다고 했다. 성장auxēsis, 곧,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는 내재적 경향은 정치적으로 조직된 인간 사회의 특징적이고 해소될 수 없는 특성이다. 그리하여, 지리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 두 가지의 권력 핵심이 형성되면, 쌍방은 모두 자기 힘을 증가시켜 세력을 넓히며 힘없는 도시를 점령하려 할 것이고, 상호적인 세력권은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며 종식될 것이 분명하다.2)

발전의 경제적 차원

  인간 발전에서 경제적 요소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제 발전과 인간의 통합적 발전 가능성의 상호 관계는 명백하며, 그 증거 또한확실하다.3)

  오늘 우리는 경제 성장을 필수적이고 또 접근 가능한 목표로 삼고 있으며, 비성장이나 저성장은 가장 명백한 실패라고 간주한다. 실제 이런 시각으로 유로화의 기능을 살펴보고 (유럽 연합의 경제 퇴보가 가능한가?), 이탈리아 같은 국가의 지난해 총생산 자료도 풀이한다. 사실 발전과 또 여기 포함되는 경제 성장은, 많은 사람이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역사 안에서 볼 때는 항구적인 현실이 아니라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역사 속의 경제 성장

  인간 역사 안에서 발전은 획기적인 새로움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고전이 된 본문을 여기서 인용해야겠다. “기록이 남아있는 고대의 첫 시작부터, 그러니까 기원전 2,000년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지구의 문명화된 중심에 살던 중류층 개인의 생활양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상류층과 하류층도 마찬가지였다. […] 이런 느리기만 한 과정, 또는 진보의 부재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중요한 기술 혁신이 없었고, 자본 축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거의 모든 생필품, 근대가 시작하면서 세상이 소유했던 그 모든 것은 이미 역사의 시초부터 인간에게 알려졌던 것들이다. 언어, 불, 오늘날과 같은 가축. 밀, 보리,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쟁기, 수레바퀴, 노, 돛, 가죽, 아마포 옷, 벽돌과 솥, 금과 은, 주석과 납 (기원전 1,000년 직전부터 사용된 철도 포함시켜야겠다), 금융 활동, 통치 방식, 수학, 천문학과 종교.”4)

  근대적 경제 성장은 다양한 요인들이 영국에서 특별히 결집된 결과였다. 17세기와 18세기 영국에는 상호 연관된 수많은 사회적이고기술적인 혁신이 계속 발생했다. 무엇보다,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도시화가 진행되고 상업 역시 활성화 되었다. 뒤이어 훨씬 정교한 시장 경제가 구축되었다.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혁신적 발견에 대한 특허를 보장하면서 소유권은 더욱 복잡해지고 유연해졌다. 합법성의 원칙이 강화되고, 과학 혁명이 확산되었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과학과 기술이 인류를 위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진즉 언급했다.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과 제임스 와트James Watt 같은 천재들은 석탄과 철을 사용하여 증기 기관을 발명하여 운송 조건을 발전시켰다. 이때부터 다양한 기술 진보의 국면이 근대 세계의 모습을 이끌어냈다.5)

  그러면서도 산업혁명은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사실상 심화시켰다. 1820년 유럽의 소득수준은 아프리카에 비해 세 배 높았지만, 1998년 그 격차는 20 배 이상 더 벌어졌다.6) 성장과 함께 편차도 더 커진 것이다. 성장인가 비성장인가는 매우 높은 복지수준에 있는가 매우낮은 복지수준에 있는가와 똑같아졌다.

  오늘날 경제 현실은 생활수준에 관련하여 세계의 여러 국가들 사이 엄청난 격차를 보여준다. 최근 수 십 년간 역사는 지역 간의 여러국가들 사이 1인당 소득 증대가 얼마나 상이하게 이루어졌는지 기록으로 알려준다. 한 예만 든다면, 1970년 가나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비슷했다(각기 250달러와 260달러). 그 후, 한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어 2001년 1인당 국민소득이 15,090달러에 달했는데비해, 가나는 퇴보의 국면을 거듭하여 빈국이 되었고 2001년 1인당 국민 소득은 2,250달러에 머물렀다.

  이와 유사하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생산체계와 기초설비의 가장 큰 파괴를 겪었던 나라들도 포함해서) 매우 향상된 복지수준에 도달했지만, 같은 기간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들에서는 극도의 빈곤 상태가 지속되었거나 극미한 정도로만 완화되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장을 거둔 주역들, 이른 바 “동남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무척 높은 경제적 복지 수준을 달성했다. 경제 발전을 이룬 가장 최근의 본보기는 중국과 인도이다.

  경제 발전과 집단 행복의 관련성 문제는 세계은행의 2013년 보고서에 등장한다.7) 보고서는 경제 성장과 개인 행복의 조건 사이 내재한 긴밀한 관계를 분석하면서, 총체적 수준의 경제적 가치 창출이 인간 발전을 위해 투자해야 할 (교육, 건강, 환경 자원의 보호와 보전에 대한 투자) 모든 자원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성장은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개인 행복의 다른 조건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확인했다. 이것을 순전한 물질주의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8)

저개발: 우리 시대의 비극

  저개발 현상, 다시 말해, 빈곤과 재난을 퇴치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오로 6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비극이라고 고발했다. 교황은, 발전하지 못한 바로 그 이유로 인류의 분쟁이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에 후진국의 발전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발전을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 대응하여 유엔은 전 지구적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우리는 “새천년 개발목표”와 또 현재 그 뒤를 잇는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소개하려 한다. 지속가능 발전목표는 네 가지 큰 영역으로 종합될 수 있다. 1)경제 번영 2)통합 및 사회적 결속 3)환경의 지속성 4)정치와 기업의 적절하고 건전한 협치governance.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놀라운 복지가 믿기 어려운 기적처럼 다가왔다. 단순한 구강 염증이 생길 때, 현재 우리들과 당대 가장 부유했던 로스차일드Rothschild 남작이 각기 어떻게 대처하는지 비교만 해도 이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약국에서나 적은 비용으로 페니실린을 구입하고 복용하면서 염증을 치료한다. 하지만 남작은 페니실린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죽음을 맞아야 했다.

  경제 성장은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왔다. 기대 수명이 늘어났고, 유아 사망률이 줄어들었다. 소득이 증가했고, 재화와 서비스생산이 증대되었다. 그런데 어떤 대가를 치루어야 했는가? 무엇보다 먼저 오염, 천연자원 고갈,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세기 경제 성장이 낳은 또 다른 부작용은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다.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도 분명 그렇고, 개별 국가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몇몇 직업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정보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화 교환원과 비서들은 자기들 일자리가 재편되는 것을 보았다. 1900년에는 미국의 노동자들 가운데 40프로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지만, 오늘날은 2프로를 밑돈다.

  경제학자들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런 저런 혜택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다.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는 분명 그러해야 한다.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20프로의 어린이들이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는데, 그 주요 원인은 오염이나 기술 진보가 아니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국가들에서도 대가보다는 혜택이 더 크다. 이를테면, 오염은 경제 성장의 첫 단계에서만 심각한 문제가 된다. 19세기 런던과 현재의 멕시코시티가 이를 확인해 준다.

녹색혁명은 산업혁명이다

  오늘날 발전은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을 통해 새로운 산업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기적을 창출하는 것을 함축하여 의미한다. 녹색 경제의 구축과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다.

  경제 성장과 환경 지속성 간의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환경 보존을 더 중요시하면 경제 발전이 늦어지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전통의 사고였다. 전통적 처방은 생산과 소비에 초점을 맞춰 세금 부과, 배출 오염량 통제 등 생산과 소비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몇몇 다른 경제학자들은 이런 전략과 상반되는 기본 입장을 피력했다. 그들은 이런 전략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평가했다. 복지 시스템과 사회보호망을 구축하고, 공공부채에 대한 재정지원을 실행하고, 빈곤을 축소할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가치를 필연적으로 창출해야 하는데, 그런 처방으로는 기존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성찰하고 고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탈성장을 적극 수용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탈성장 운동의 주창자들은 환경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논쟁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 이들은 국내총생산의 증가를 척도로 물질적 행복의 성장을 이룩하는 것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는 기존의 일방적 전망을 거슬러 투쟁했다.

  이들에 따르면, 시장 영역을 축소하고 비상업적 영역 (상호성, 선물교환, 자기 소비, 자기 생산, 비화폐적 생산물 교환)을 증대하는 길을 개척해 가야 한다. 행복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비화폐적 부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 경제 시스템이 비공식적 생산 영역과 시장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가치교환의 영역을 점진적으로 축소해왔다고 강조한다. 또한, 매일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모든 생필품을 구매해야 하는 선진국에서는 극심한 빈곤을 겪는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개발도상국의 비옥한 농촌 지역에서는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비공식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 열려 있고, 자기소비와 자기 생산으로 존엄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빈곤 측정에 관련해서 이러한 현실을 분명 고려해야겠지만, 비공식적 활동에 비해 시장 활동의 영역이 축소된다면, 앞서 언급한, 탈성장이 초래할 손실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 명백하다. 그리하여, 탈성장 주창자들이 증거를 제시하게 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요청해 볼 수있다. 그들은 탈성장이 실현가능하고, 적절한 고용 수준을 보장하며, 혹독한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고, 공공 서비스와 집단 행복의 질적 저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경제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의 요청을 조화시키려면, 환경 보호의 기치 아래 지속 가능한 방식의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도록 경제시스템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과연 가능한가?

  기존에 제시된 긍정적 답변은 이른바 “쿠츠네츠 파동”curva di Kuznets에 근거한다. 1인당 소득과 개별 노동자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사이 이른바 “역-유(U)자형” 관계가 수립된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런 전망에 의하면, 경제 발전은 환경에 미치는 훼손을 감소시켜 그자체로 문제를 해결한다. 수많은 실제적 연구를 통해 해당 국가들의 상이한 시대 역사 안에, 또 다양한 표본들 안에 이런 상호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앞서 우리는 오염과 관련하여 오늘날의 런던은 한 세기전의 런던과 같은 점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쿠츠네츠 파동은, 1인당 소득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면 처음에는 오염도가 상승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때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는 경제 발전의 문제이고, 경제 활동은 주로 농업과 산업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곡선의 정점을 지나면, 1인당 소득은 이미 높은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합당한 생활수준을 영위하는 시민들은 이제 삶의 질, 오염 통제, 녹색 공간을 요청하며, 경제는제3의 영역을 향해 진보하고 발전한다. 규제가 더욱 강화되고, 미래의 더욱 조화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환경을 더욱 존중하는 체계를 갖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쿠츠네츠 파동이 예상하는 결과에 대해 과연 낙관해도 되는지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단순히 성장을 통해서 환경 지속성이라는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경제와 환경의 관계에서 주요 문제 하나는 소비와 경제 활동이 오염을 발생시켜 기후가 파괴되는 것이다. 오염으로 말미암아 기후는축적의 피해를 당한다. 여러 해 동안 배출되어 축적되는 오염 총량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축적된 오염을 제거하려면 수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배출량이 어느 선에서 감소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오랫동안 심각하게 남는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되돌아 갈 수 없는 지점”이 생겨날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 지점을 지난다면 오염이 정점을 넘어선다 해도 지구 행성에서 그 결과를 수습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염 강도가 낮아진다고 해서 매년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오염 총량이 계속 증가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인구가 일정 한도를 넘어 증가하거나, 인구가 많은 국가들이 쿠츠네츠 파동의 최종 단계가 아니라 초기(성장) 단계에 있다면 오염 증가는 분명한 현실이 된다.

  이런 점에서, 쿠츠네츠 파동 이론은, 그 주장과 달리, 경제 성장과 환경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평가해 볼 수있다. 이 주제에 관하여 문화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생겼는데, 그 첫 신호는 지구 온난화와 이 문제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도록 영국 정부가 의뢰하여 2005년 출간된 스턴 보고서Stern Report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 가스 배출에 시급히 대응하지 않는 경우, 현재 추세대로 기온이 상승한다면 수년 내로 경제 시스템 전반이영향을 받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프로가 상실된다. 그 반대로, 정치적 중요한 변화를 통해 배출량을 축소하는 경우, 전 세계 생산체계가 재편되면서 에너지 분야가 발전의 새로운 견인차가 되고 경제 성장의 매우 놀라운 성과가 발생할 것이다. 이처럼, 스턴 보고서는 경제 성장과 환경 보호의 딜레마가 결국 해소되어 이 두 목적을 조화시키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예견한다.

  경제 시스템이 환경을 향해 회심한다면, 성장[과 연구]를 촉진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하고 고유한 “녹색혁명”을 말하고 있다. 녹색혁명은 회피할 수 없을뿐더러,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열어 줄 위대한 기회가 될 것이다.

  최근 조지프 스티글릿츠Joseph Stiglitz는 이런 현실에 대해 미국 경제를 맥락으로 삼아 성찰했다.9) 그는 관심을 이끌어내며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이 공격을 받았다면, “우리가 참전할 영광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실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적들에 맞서 싸우지 말자고 해서도 안 되었다. 기후 위기가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를 모른 척하면 혹독한 대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

  기후 위기에 맞선 투쟁은, 적절하게 수행되기만 한다면, 경제에 실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의 황금 시기를 이룩할 기반을 조성했듯이 말이다. 녹색 뉴딜Green New Deal은 사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도록 인도하면서 계속적으로 질문을 제기할 것이며, 녹색 경제는 새로운 정점을 향해 여정을 밟아나갈 것이다. 현재 석탄 에너지와 관련된 일자리가 사라진다 해도 그 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혁신 에너지 분야에서 창출될 것이다. 21세기의 혁신된 녹색 경제가 20세기의 화석 연료에 바탕한 제조업 경제의 경제 모델과 사회 모델을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하겠다. 제조업 경제가 그 이전 세기 토지-농촌 경제의 재정 모델과 사회모델을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듯 말이다.

가지 성찰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이 세 가지 핵심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부의 창출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식의 발전을 원하고, 어떤 발전을 이루어내야 하는가? 이들 질문에 대해 교회의 사회 교리를 척도로 삼아 답변을 찾아가야 하겠다.

  사회교리에서 우리는, 잘 이해되진 않았지만 폄하되진 않은 본질적 원리, 곧 보조성의 원리와 연대성의 원리를 찾아본다. 이 원리들로부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경제 시스템과 시장의 역할, 경제 생활의 방식과 발전 자체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전망이 생겨난다.

  고삐 풀린 세계화, 통제되지 않는 야만적인 세계화에 시급히 대응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유럽의 모델은 북미와 중국의 모델과 비교해서 훨씬 더 인간적이며, 더욱 사회적인 경제를 위한 방안을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 시장은 극단적 경쟁이 횡행하고, 규제자로서 각국 정부의 본질적인 역할은 힘을 잃었다. 2008년의 위기는 이런 현실의 논리적 귀결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은 2009년 12월13일의 죽음을 한 해 앞두고 “규정 없는 자유주의자들의 일곱가지 오류”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한 세기 전보다 더 악화된 금융위기의 근저에는 프리트만과 하이에크가 주창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있다고 비판한다.10)
그에 따르면, 2008년 발생한 세계적 위기는 분명 미국이 만들어 낸made in USA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요인도 덧붙여 말해야 한다. 경제적 통합이 점증하면서 금융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금융의 세계화 현상이 없었다면 미국의 모기지 대출mortgage loans 때문에 발생한 재앙이 지구 구석구석까지 그토록 큰 해악을 입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경제”에 대한 많은 담론이 있고, “협동조합 모델”도 존재한다.11) 2013년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출간한 문헌 『기업 리더의 소명la vocazione del leader d’impresa』은 기업인들이 갖추어야 할 면모를 크게 세 가지로 말한다. 1)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동시에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비용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분배과정을 책임 있게 구축하며, 가난한 이들의 요청을 책임감 있게 수용한다. 2)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노동을 체계화하여, 직원들이 자신들의 활동으로 스스로를 개발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노동 여건을 조성하여 직원들이 함께 참여하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며 서로 신뢰하게 하여, 자기 능력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거두게 한다. 3)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여 수익과 복지를 창출하며, 지속가능한 부를 생산하고 공정하게 분배한다 (협력자들에게는 정당한 임금, 소비자와 공급업체에게는 합당한 가격, 지역사회에는 정당한 세금납부, 소유주에게는 합당한 이득).”12)

  베네딕토 16세는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CV)에서 시장 경제를 선물의 전망에서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가혹하고 추상적인 경제, 영혼도 윤리도 연민도 없는 경제에서 탈피할 것을 호소한다. “저개발을 척결하려면 교환을 바탕으로 한 상거래와 공공 복지제도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무상성과 친교에 몫을 할애하는 경제 활동 형태에 점진적으로 열려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CV 39).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로봇공학 시대라고 지금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트럼프와 시진핑의 긴장이 들끓는 지점이 여기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13) 기술 진보는 성장의 동력이며, 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영역까지 도달하고 있다. 수십년 전 케인스는 에세이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서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는, 먼 훗날 황금시대 기술 진보로 말미암아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욕구들은 경제적 가능성이 모두 쉽게 채워줄 것이고, 그래서 경제 문제와 생존 투쟁은 더이상 인류의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케인스는 그저 몽상가였을까?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예견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오늘날도 어려움은 여전하다. 1895년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론”(黃禍論, Gelbe Gefahr)을 주창하며 동양인들이 유럽인들을 침해하여 세상을 통치할지 모른다고 공포심을 조장했고, “중국이 깨어나면 세계가 두려워 할 것이다.”는 나폴레옹의 1816년 발언을 언급했다. 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는, 두려움은 결코 좋은 인도자가 아니며, 모든 이는 그들 스스로 공존과 존경, 상호 존중을 이룰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중국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세력을 떨치며 경제적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 시장에 대해 옳다고 할 수만은 없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재산권 등에 관해 논란의 소지가 없다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술의 발전을 실현한다. 다른 한편에서, 북미 행정부는 기후 변화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보호주의를 펼친다. 이밖에도, 빈곤과 미개발 세계의 재난, 지속적인 국지전과 인간존중이 보장되지 않는 이주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지속가능한 경제”를 말하며, 이를 절실히 요청한다. 이와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합적 발전”을 선호하여 말하며, 교회의 위대한 전통을 다시 취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같은 학자가 높이 평가하는 우리들의 사유 전통을 더욱 더 잘 알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영감 없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14) 감수성과 심오함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필적할 이론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결론

  우리 시대, 우리들 한계를 직면하지 않고서는 과연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본래 질문이다. 오늘날 이런 한계는 특별히 생태 문제와 관련하고, 가장 심각한 위협은 기후 변화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녹색 경제는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게나 모두 부를 창출해 줄 수 있기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참으로 좋은 기회가 된다. 미래는 과연 이렇게 실현될 것인가?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빈곤을 척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장이 필요하다. 우리들 세상에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성장은 항상 가능한가?

  우리는 탈성장에 관해서도 알아보았다. 인간과 자연, 또 사람들 사이의 균형 잡힌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경제적 생산을 통제하여 감축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유의 전반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인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에 따르면, 성장을 위해서는 성장 목표를 버려야 한다.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경제적 탈성장은 생태학적으로 바람직하며, 외면하지 못할 문제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가? 탈성장의 경제에서 생산은 어떻게 구축되어야 하는가? 이런 큰 변화는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조건 하에서 실현가능한가? 표준적인 경제 이론과 모델들은 이런 물음을 알지 못한다. 경제 성장만을 절대적 필요성으로 여길 뿐이다.

  2015년 6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LS)를 반포했다. 부유한 북반구와 빈곤한 남반구 사이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부채 관계, 인류에게서 기인한 지구 온난화 문제, 강력한 국제기구 설립 요청, 정치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필요성, 불필요한 소비에 대한 개인적 희생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동시에, 이 회칙은 지구 행성의 가용 자원이 무한하다는 거짓을 담고 있는 무척이나 확산된 무제한적 성장 관념을 비판한다. 북반구의 과도한 성장과 남반구가 겪는 불평등에 관련하여, 교황은 인간의 존엄성에 따라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항상 더 많이 소비하고 파괴하는 이들의 태도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지구상의 몇몇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자원들을 제공하면서 어느 정도의 탈성장을 수용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언급한다(LS 106; 109; 193 참조).

  전 지구적 경제 위기를 맞이한 우리는 특별한 윤리적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 인류는 이미 두 차례 맬서스주의의 악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도 승리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세상의 정원을 “일구고 돌보라”고 우리를 초대한다(창세2,15참조). “일구다”는 쟁기를 들고 일하는 것이고, “돌보다”는 보호하고 보살피고 보존하고 일깨우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지구 행성의 가벼움을 진지하게 고찰하기를 촉구하는 가르침이다. 케네스 볼딩Kenneth Boulding은, “유한한 세상 안에서 폭발적인 성장이 무한히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미치광이거나 경제학자이다.”고 했다.

  부유하든 여전히 가난하든 우리 모두가 함께 복지를 누리며 성장하도록 녹색경제가 이바지할 것이다. 피조물을 존중하고 인간의 몸과 마음 전부와 모든 사람을 참으로 통합할 녹색경제로 넘어가기를 바란다.*


1) 이 격언은 성 아타나시오의 『안토니오의 생애』 La vita di Antonio에서 유래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를 Nolle proficere, deficere est라고 정식화했다.
2) Cfr Tucidide, La guerra del Peloponneso, Milano, Rizzoli, 1996.
3) 이런 진술의 유효성과 타당성에 대해서 참조: L. Boggio – G. Seravalli, Lo sviluppo economico, Bologna, il Mulino, 2015, 55: “결론은 이러하다. 인간발전의 수준은 단지 두 가지 요소만 고려해도 적합하게 알아볼 수 있다. 곧, 1인당 소득 수준과 그 분배이다. 그렇다고 인간 발전을 밝혀주는 일련의 다른 모든 지표들을 해독하고 계산하는 지난한 작업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결론 자체가 그러한 연구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4) J.M.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in Id., Essays in Persuasion,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62.
5) Cfr J. Sachs, L’era dello sviluppo sostenibile, Milano, Egea, 2014, 85.
6) Cfr A. Maddison, The World Economy: A Millenial Perspective, Paris, OECD, 2001.
7) Cfr L. Becchetti – L. Bruni – S. Zamagni, Microeconomia. Un testo di economia civile, Bologna, il Mulino, 2014, 431.
8) 프란시스 해킷(Francis Hackett)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질주의를 믿는다. 건전한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모든 결과들을 믿는다. 좋은 음식, 안전한 집, 건조한 발. 하수도, 상수도, 온수, 화장실, 전깃불, 자동차, 훌륭한 도로, 밝은 길, 도시 밖으로 떠나는 긴 휴가, 새로운 관념, 빠른 말, 활기찬 대화,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음악 밴드. 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믿는다”(P.A. Samuelson – W. Nordhaus, Economía, Madrid, Mc Graw Hill, 1999, 531).
9) J. Stiglitz, “The climate crisis is our third world war. It needs a bold response”, in The Guardian, 2019.6.4.
10) Cfr P.A. Samuelson, “I sette errori dei liberisti senza reglole”, in Corriere della Sera, 2008.10.20. Cfr F. de la Iglesia Viguiristi, “A dieci anni dal crollo di ‘Lehman Brothers’”, in Civ.Catt. 2018 IV 471-485.
11) 바스크 지역에는 호세 마리아 아리즈멘디아리에타 (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신부가 창안하여 설립한 몬드라곤 협동조합공동체가 확산되어있다. 그는 곧 교회의 복자품에 오를 것이다.
12) Pontificio Consiglio della Giustizia e della Pace, La vocazione del leader d’impresa. Una riflessione, 2013.
13) Cfr F. de la Iglesia Viguiristi, “Usa e Cina in guerra commerciale”, in Civ. Catt. 2019 I 362-376.
14) Cfr J. Sachs, “Sembrando un futuro. De cómo la Iglesia puede ayudar a promover objectivos de desarrollo sostenible”, in Razón y Fe, vol. 269, 2014, 2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