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문화

– LA CULTURA DELLA TOLLERANZA –

© La Civiltà Cattolica, Q 4069, 4 Gen 2020 I, 53-63

잔까를로 빠니 Giancarlo Pani S.I.
오경택 안셀모 신부(춘천교구) 옮김

  관용과 비관용에 대한 물음은 몇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쟁점이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1) 그리고 2019년 새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다양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기억에 남을 특별한 두 일은 아랍 에미리트에서 선포한 «관용의 해»와 아부다비 문헌이다.

  아랍에미리트는, 1996년의 UN 지침을 기반으로, «관용의 해»를 2019년에 선언하고, «관용에 대한 기초 선언»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관용 대한 UN 지침의 사항이다: «관용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대해 존중과 인정, 그리고 그에 대해 가치를 부여함이다. […] 그리고 다름 안에서의 조화를 뜻한다. […] 관용은 평화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덕목이고 전쟁의 문화를 평화의 문화로 변화시키는 데에 공헌한다».2)

  교종 프란치스코 역시, 무엇보다 다른 이웃들,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피신처를 찾는 이에 대한 존중을 주목하는 차원에서, 관용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이 주제는, 2019년 2월 4일 아부다비에서 교종 프란치스코와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가 서명했던, 세계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류적 형제애에 대한 문헌(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une)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이 문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과, 국제 정치적이고 세계 경제적 정책들은 관용의 공존과 평화의 문화가 확산되도록 중대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3)

  «관용의 문화»를 알기 위해 무엇이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 자체로 방대한 양의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논의를 한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이 주제는 계몽주의로부터 거대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특별히 오늘날은 미약한 숙고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용»과 이의 반대말인 «비관용»이라는 용어는 종교분열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용어들을 정의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은 역사 속에서 대조적인 어감들과 함께 다른 의미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설명을 시도해 보자면, «관용»은 사회 안에서 그릇되거나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나 생각들에 대한 «시민의 권리»로 이해되고, 반면 «비관용»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들로 이루어지던 간에, 확고한 처벌이 동반되는것으로 이해된다. 본래적으로 이 행동들은, 서로 간에 분쟁이 있는 상이한 신앙 고백들이 드러나는 사회 안에서 종교적 차이에 대한 탄압이 적법한 것인가 아니면 부적법한 것인가와 상관하여 공권력에 의해 행해져 왔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실제는 고대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관용과 양심의 자유는 복음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분되어 다루어졌다. 이미 2세기 중엽의 디오그네토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는 이것에 대해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구원하기 위하여, 설득하기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에 폭력은 자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5) 이 가르침은 많은 교부들과 몇몇 호교론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테르툴리아노와 라탄찌오6)는 황제권을 향하여 양심의 자유를 존중할 것을 큰 목소리로 요청하였다. 그 이후 관용은 아우구스티노7)에 의해, 그리고 중세 시기에는 아벨라르도와 이노첸시오 3세8)에 의해 강하게 강조 되었다. 현대 시대에 관용과 양심의 자유는 존 로크의 관용에 대한편지9)에서 변호되었고, 볼테르의 관용론10)에서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외에 알려진 많은 저자들을 인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관용은 반대 의미인 비관용도 포용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역설적이게도, 복음 말씀의 분명한 해석으로부터 기인한다. 만일 진리가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모호함과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은 그 자체로 «비타협적» (intransigente)이며, 이는 달리 말해, 어느 정도 «비관용적» (intollerante)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열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일하며 진정한 종교가 되는 데에 까지 이르렀고, 결국 로마 제국속에서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는 비관용의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관용과 비관용이라는 두 길은 다른 삶의 자리 사이에서,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관용과 대화

  법적인 관점에서 «관용»은, 오늘날의 각 개인이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내적인 영역에서 침해받지 않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는, 각 개인과 관계된 권리에 대한 공적인 인식으로 이해된다. 관용의 개념과 체험은 개인이 누리는 합법적인 지위(status giuridico)처럼 전적으로 내적인 고유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관용은 대화에 열려있고, 반면 비관용은 동등한 차원에서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대화하기를 거부한다.

  한편으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관용이라는 것이 이야기 될 때, 그 근저에는 불평등한 관계가 전제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용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한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고, 용인되어진 한개인은 낮은 영역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상호간의 존중이다. 따라서, 적어도 논점을 시작하면서 정의해 보면, 관용이란 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삶과 각 개인과 관련된 법적인 체계보다 훨씬더 영적으로 하나의 열려있는 조건이다.11)

  대화에 대한 수용이라는 관용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여 보자면, 비관용적인 각각의 사람들은, 적어도 말뿐일지라도, 다른 이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각자 자신의 생각을 알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몇몇 부류와 대화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식의 모습은 신앙을 지닌 이들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일반적인데, 이러한 신앙인은, 세속적인 영역 속의 많은 대화 상대자들에게 이야기 되어지는 사람일뿐이며, 그와 함께 이야기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변론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분명, «비관용»으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

  내적인 면에서 관용은, 마치 법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고유한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대화를 하고자 한다는 것은 위에서 열거한 법적인 측면보다 더한 그 무엇을 함축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고유한 합의들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이 문화적이고, 법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그렇다고 단순하게 발언권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현실적으로, 발언권의 자유가 그 자체로 지켜지기 위해선,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즉, 고유한 의견들과 의사결정들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너무도 많은 주변 요인과 관심과 염려가 조건적으로 따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느 대학교 도서관에서 어느 특정한 이념적 경향에 속하는 도서목록을 제외시켰을 때, 비관용적인 행위가 행해진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앎에 대한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한 그룹 전체와의 대화가 거부되고, 그 이념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고자 하는 특정부류의 학생들의 바람은 좌절되게 된다. 어느 누군가에게 발언하고 저술하고 출판하는 것을 제재하지는 않더라도, 알 권리를 막는 것은 분명 비관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잘 편집되고 최근에 간행된 성경의 발행본들이 이탈리아의 문학, 철학 학부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반대로, 신학부의 도서관에 세속 문화와 계몽주의 고전 서적들이 때때로 자리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사상의 자유와 소수자들

  사실, 자신의 소신들을 행할 수 있는 권리는 특별한 경우이다. 만일, 한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권한이 있다고 자각하고 있고, 동시에 그러한 권한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가 어떤 특정한 행동들이나 이념들, 아니면 소수자로서 혹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수용하지 않게 된다면, 그의 주변 이웃에게는 정확하게 «비관용»이라 할 수 있는 폭력이 자행되게 된다. 소수자로 머물고,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견디는 능력은 하나의 어려운 덕목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웃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이웃이 지닌 고유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접할 수 있듯이,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참조: 창세 2,18.20), 홀로 머물 수 있는 법을 모른다.12) 그러기에 인간은 결국 대화하고 소통을 나누는 선천적인 기질을 타고났으며, 이를 통해 다른 이들과 함께 순응의 길을 걷는다.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은 때때로 부주의함도 있지만, 모두를 진실로 끌어안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들을 일률적으로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법과 결정적인 하나의 이유를 들어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을 고정화 하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선한 방향으로든 악한 방향으로든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말들을, 마지막까지 전부 헤아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타인에 대해 열려있음은 명백하게 제한된 한계들을 지닌다. 이는 때때로 관용과 비관용 사이의 경계 식별에 있어서 모호한 경향을 드러내는 행동에서 드러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대화의 영역을 무한대로 연장할 수는 없으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이들과 대화 할 수도 없다. 가장 가까운 이들과 있을 수 있는 폭넓은 대화의 영역을 고려할 수도 있겠지만, 대화의 폭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성들은 신앙의 물음들 속에서 명백한 적용을 찾는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러한 주제에 대한 대화와 토론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매우 방대하다. 왜냐하면 신학 대학들과 영적 지침들의 다양성은 의사표현에 대한 광범위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가 토론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느 종교이건 이러한 한계들을 지니고 있고,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교의적인 견해 차이는 자신들의 합의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리하여 현재의 것을 넘어 다른 것이 되지 않는 이상, 이 한계들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어느 현실이건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다양성의 가능성은 존재론적인 하나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 변화가 그 어떤 비평적 지점들을 넘어서게 될 때, 그 현실은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기를 멈추고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대화에서 이러한 비평적 지점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바로 이 지점에서, 의견을 공유하는 그 공동체의 영역을 벗어나, 그 어떤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반면,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있어선 하나의 법정이 존재한다(예를 들어 한때 행해졌던 이단 심문소). 그리고 세속적인 양심에 있어 «법정»은 매우 실제적인 현실이다. 사실, 모든 개별적인 양심은 그 자체로 법정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법정은 그 자체로 비타협성을 요구하고 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며, 이것은 그야말로 영속적인 기구이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마치 재판을 위해 대성당의 높은 의자에서 늘 머물고 있는 듯한, 엄격하고 명확한 기준의 검열적인 행동은 매우 일반적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안에서, 무엇이 이 «법정»의 의무인지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드는 것이 좋겠다. 감추어져 있는 것보다, 교양 있는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익할 수 있는 모든 책들, 특별히 성경, 그리고 교회의 교부들과 저술가들, 그리스도교 문학의 고대와 현대의 저자들에게 차분하게 다가서는 것을 저지하는 창피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또한, 일련의 그 어떤 주제들에는 먼저 문서화 되는 일없이 가볍게 이야기하고, 세속적 양심으로 신앙을 바라보는 일들의 무지함과 정보 없이 이루어지는 토론의 자유는 그 수위를 넘어섰다.

세상 속에서의 관용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관용에 대한 고유한 개념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개념은, 교의적이고 신학적인 견해차이라는 것이, 공통의 기원과 관계된 것과 모두에게 인정되는 계시의 기본적인 원리들 앞에서 이차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견해의 차이는 몇몇 그리스도교적 환경 속에서 이상적인 관용의 모습으로 일어나며, 반대되는 그룹들을 용서한다는 점에서 사랑이라는 덕으로 자리매김 된다. 그러나 이와 다른 환경들과 주변의 다른 정황들 안에서 관용은 회의론 혹은 혼합주의와 매우 흡사한 영적 태도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관용은 최고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론적으로 어떠한 인간도 어느 한 교의가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서 절대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관용은 각자가 자신의 고유함을 간직하고 있는 다양한 길들을 통해서 같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14)

  설명했던 첫 논점은 그리스도교적인 관용이었고, 그 다음 논점은 종교 상대주의와 같은, 관용의 세속적 개념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이는 관용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감추어지고, 가려지고, 체념된 알려지지 않은 비관용의 유형이다. 이것이 처음 형성된 배경의 기반엔 종교적 자연주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문서적인 분명함과 기성 종교들의 명료함은 모두 부수적인 면에 해당하는 반면, 참된 종교는 자연 종교이다.15) «신의 뜻을 향한 종교적 신심의 고양은 다양한 종교들이 신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종교적인 개념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16). 이들에 따르면, 교의적인 선택은 모두 상대적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며, 혹은 이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교에 받아드려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란, 모든 종교적인 체험의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으로, 고유하게 드러나고 축소된 각각의 가치를 지닌 협소한 의미이다. 이미 언급이 되었듯이, 중요한 것은 «신심의 고양», 즉 종교적 영감의 움직임인데, 역동적인 그 어떤 것에 대한 용어적인 의미부여와는 별개의 뜻이다.

  관용에 대한 세속적인 체험이 녹아든 «종교적 상대주의»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이 역시 교의적인 정확함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 상대주의의 요점은, 계시를 통해 자연종교에 도달되는 것과 같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특별함을 배척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계시에 대한 거부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소통하시고, 말씀하시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주제를 수용한다. 이에 따라서, 실제로 모든 «추정된» 계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제를 죽이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이끌어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17) 또한, 하느님께서 비록 인간적인 상황들 속에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분은 존재하신다. 즉, 우리가 성경의 체험들과 정확하게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할지라도, 바로 그곳이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주시는 곳이며, 그분은 그분에 의해 자유롭게 섭리된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역사를 이끄신다.

  이러한 종교 상대주의적 교의 전개는 계몽주의자들의 활동 속에서 폭넓게 자리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독특한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항상 그 어떤 토론의 가능성을 회피하였고, 그들은 적어도 이성을 통한 계몽을 받아드리는 이들과 함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어떤 변명으로 토론을 회피한다면(하느님에게 말씀의 권한이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선 매우 특별한 변명이 요구된다), 그것은 그들이 비관용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들이 더욱 비관용적일수록 그만큼, 교의적 논쟁의 영역을 벗어나고 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여지를 그만큼 많이 남기는 것이 된다.

  이러한 비관용은, 어떤 이가 어느 종교를 받아드린 행동이 어리석은 것이라 단정하고, 어리석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유익하지 못한 것이라 정당화하면서, 실제적으로 여타의 종교적 주제들에 대해 대화하기를 매우 고집스럽게거부함으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비관용은 무엇보다 기성 종교들, 특별히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그들이 지닌 주변 상황과 그들의 고유한 관점을 이해하고자하는 능력을 상실했을 때 드러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다른 이들의 신념들이 쉽사리 이상하고 우스운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해학에 대해서, 달리 말해, 피상적이고 냉소적인 것을 잘이용했던 눈부셨던 거장은 볼테르였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불이해의 해학이며 그러기에 전적으로 비관용에 해당한다.18)

  다른 한편으로, 냉소는 이해하기를 뒷전으로 미루면서, 언제나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마치 일반적인 사람의눈에 자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이, 계몽주의자들이 내리는 그 어떤 확신들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판단들이셀 수도 없는 주변 정황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이성의 명료함으로 전혀 양육될 수 없다는 것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냉소가 지닌 문제는 객관성이 결여된 덜 목적적인 합의들이 더 우선시 될 수 있고, 그 어떤 신중한 판단을 위해 요구되는 냉정하고 정중한 조심성이 일반적으로 배척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저술들에 영감을 부여한 마니교적 정신은 조롱하고 논쟁하는 가능성을 매우 용이하게 만들었다: 상대편의 말들과 글들은 빛과 어두움이라는 이원론에 따라 도식화되게 되는데, 이러한 도식을 이끌기 위해 그것들을 효과적인 구도로 짜 맞추며, 혹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각각의 이미지 내부에 고립시키고, 토론의 진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을 이용한다. 이것은 볼테르가 자신의 논제를 역사적으로 기록할 때에, 매우 많이 사용했던 전개방식이다.19)

관용과 언어적 표현

  이러한 정의들 안에서, 관용이라는 주제는 언어적 표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20) 계몽주의와 함께 세속의 정신세계는 높은 성숙함에 도달하였는데, «관용»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여타의 것들에 호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하여계몽주의자들이 가톨릭보다 더 많은 잉크를 쏟아부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른 이들의 관점을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세는 비관용에 속하는 단 하나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관용에 대해 논함에 있어서, 다른 이의 신념에 대한 수용력 결핍은 대화의 단절이나 의견에 대한 불일치보다 더욱 더 심각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 신자들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관용에 대한 다른 두 입장 사이에서의 불일치는 신념과 교의 부분에서 더 큰 대비를 이룬다. 교의적인 논쟁은 결코 통합적으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정신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그것에 실질적인 해법이 주어진다고 가정해보지만, 더 이상 진전은 없다. 더 나아가 진정한 차이는 논점에 있지 않고, 어느 정도만 진실하고, 어느 정도만 폐쇄적이고, 어느 정도만 대화에 열려 있는 마음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에 대한 교의에 너무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자주 지적되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론 안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결코 비평이 아니라, 참으로 쓰라린 면이지만, 오히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찾는,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굳어져 버린 돌과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논점의 불일치를 서로 이해하면서, 마음으로 가득 찬 친교의 소통을 나누는 것이 가능한 개신교인들이 있다. 이것은 적대감의 이유라는 것이 몇몇 성경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기인하고 있음에 대한 분명한 확증이다. 단순한 주석만으로 상반된 두 지점으로 인도할 수 있다. 즉, 실질적인 객관성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심화시킬 수 있거나, 반면, 성경 어느 본문의 글자 뒤편에 숨어, 오롯한 성령과 그분의 영감을 거부할 수도 있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있어, 종교적인 선택들이란 신학적 물음에 대한 단순한 견해 차이일 뿐이라는 것은 그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기에,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제시하려고 하는 비관용자들을 상대로 논쟁이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종교적인 선택들을 견해차이로 보는 입장은 논쟁의 축소를 가져온다. 그러나 적당히 진실되거나 혹은 적당히 거짓된 모습과는 별개로, 종교들은 어떠한 견해를 체계화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깊이있는 결단으로 이끈다.

관용과 2 바티칸 공의회

  교회는, 자신의 기나긴 역사 안에서 자주 비관용적인 모습을 지녀왔다. 그러나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이 문제에 앞에서 새로운 태도를 받아드렸다. 문헌에서는 «관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 용어는, 다른 이들과 관계하여 우월성을 내포하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며, 이는 분명 소통을 방해할 수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인간적 관계들과 평화에 기초가 되는, 형제애 안에서 모두에 대한 존중을 공고히 하며 이 용어를 넘어서고자 하였다.21) 특별히 공의회의 두 문헌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전환을 보여준다: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인 «우리 시대» (Nostra aetate),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인 «인간 존엄성» (Dignitatis humanae).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종교의 영역에서 모든 개인이 지닌 양심의 자유를 단정적으로 언명하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서 행동하도록 강요되거나 억압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종교의 자유는 인간 인격의 존엄성 위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인간의 이성과 하느님 말씀 모두로부터 드러난다.22)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양심의 명령을 따르면서, 종교적 삶 안에서 진리를 추구할 권리를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자신의 사회적 본성과 자유와 대화, 그리고 상호적인 존중 안에서 인간 인격의 존엄성에 부합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므로 인간은 이에 양심으로 매이지만 강제 당하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창조하신 인간 곧, 자기 판단으로 행동하고 자유를 누려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신다».23) 종교 자유 선언은 스승이요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언해 주셨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결코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음을 드러낸다.24)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언급한다: «(선한)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25)이 말씀은 오랜 세기를 거치며 윤리적이거나 법적으로 양심의 법들을 유지하기 위한 자명한 공적 이치가 될 것이다. «믿음에서» (ex fide)라는 표현은 선한 믿음에서 유래하는 것을 지칭하며, 그리고 이것은 죄에 대한 쓰라린 체험 아래에서 고유한 양심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청한다. 이미 1200년대에 이노첸시오 3세는 로마서의 이 구절을 설명하고 아벨라르도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행하기보다 파문을 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곤 하였다.26) 그러나 이러한 요청이 교회의 보편적인 교의가 되기 위해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기다려야만 했었다.

  공의회로부터 열려진 전망들인, 아랍에미리트의 «관용의 해»27) 선포와 세계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류적 형제애에 대한 문헌은 «공존과 평화에 대한 관용의 문화»를 위한 진정한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

1) 참조: F. Battaglia, «Tolleranza», in Enciclopedia Italiana, vol. XXXIII, Roma, Istituto della Enciclopedia Italiana, 1937, 980 s; C. Gallicet Calvetti, «Il problema della tolleranza», in M. F. Sciacca, Grande antologia filosofica, vol. VIII, Milano, Marzorati, 1964, 1708-1716; H. Kamen, Nascita della tolleranza, Milano, il Saggiatore, 1967; J. Lecler, Storia della tolleranza nel secolo della Riforma, voll. I-II, Brescia, Morcelliana, 2004 (or. 1967); F. Lomonaco, Tolleranza. Momenti e percorsi della modernità fino a Voltaire, Napoli, Guida, 2005, 7-26.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참조: https://dubaitaly.com/2018/12/28/2019-lanno-della-tolleranza
3) 참조: 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une, in w2.vatican.va
4) 참조: W. Post, «Tolleranza», in Sacramentum mundi, vol. VIII, Brescia, Morcelliana, 1997, 364-375.
5) A Diogneto, 7,4.
6) 참조: Tertulliano, Apologeticum, 24, 6; Ad Scapulam, 2,2; Lattanzio, De Institutionibus divinis, V, 19,11-13.23.
7) Agostino, s., Commento al Vangelo di san Giovanni, omelia 26,2.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교회에 들어온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 성사를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8) 참조: M.-D. Chenu, Il risveglio della coscienza nella civiltà medievale, Milano, Jaca Book, 2010 (or. 1969), 32s.
9) 참조: J. Locke, Epistola de Tolerantia (1689) (in it., Lettera sulla tolleranza, con Saggio sulla tolleranza, Roma – Bari, Laterza, 20068, 4-6).
10) 참조: Voltaire, 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 (in it., Trattato sulla tolleranza, Milano, Feltrinelli, 2002).
11) 사회에서의 삶은 개개인들의 실제적 삶의 성취이며 표현인 것처럼, 이렇듯 공동체와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공적인 관계들의 영역에서 관용에 대한 체험의 확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2) «자신으로 충분할 뿐이지, 인간은 섬이 아니다», 영국 시인 John Donne이 씀: 참조. M. Walzer, Sulla tolleranza, Roma – Bari, Laterza, 20032, VII; Th. Merton, Nessun uomo è un’isola, Milano, Garzanti, 1988.
13) 예를 들어, 철학, 그리고 성경 혹은 영성신학과 전례학적인 부분에서 신학대학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견해차이는 마치 심연처럼 헤아릴 수 없기에, 신앙에 대한 몇몇 본질적인 측면들을 제외하고서 모든 것을 무시해야만 한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14) F. Battaglia, «Tolleranza», cit., 980.
15) 자연종교는, 표현 방식에서 있어서 일반적으로 추구된, 확실함을 지니고 있다. 즉, 신은 존재하고, 무한하며,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자신의 섭리를 통해 다스린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을 섬기도록 초대되었고, 공적인 경신례는 인간의 사회적 기질과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섬세한 표현들에 대한 인간의 필요와 상관한다.
16) G. E. Lessing, Nathan der Weise, atto III, scena 1. 이 오페라는 종교 상대주의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고전이다. 오페라 공연을 통해 종교적인 물음들에 대한 토론들은 1900년대에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참조: G. E. Lessing, Teatro, Torino, Utet, 1981, 238; K.-J. Kuschel, «L’ebreo, il cristiano e il musulmano s’incontrano»? «Nathan il saggio» di Lessing, Brescia, Queriniana, 2006, 42-44; 187-189.
17) 참조: Voltaire, Trattato sulla tolleranza, cit., 62. 그리스도교인들의 비관용과 관련하여, 논제의 기본적인 정의는 분명하다: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두고 조각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분지음을 통해 파멸에 이른다».
18) 볼테르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조롱하고 놀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출중한 능력을 지닌다. 그의 주제들은 언제나 그와 함께 토론하는 이들이 받아들이기 거북한 용어로 전개된다. 그의 방법은 사실 토론이라기 보다 독설에 가깝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풍자를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행한다. 즉, 소리지르는 법 없이 모욕하고, 흥분하는 법 없이 비방하며, 오직 가장 효과적인 고소 방식을 찾기 위해 무례한 언행을 거부한다.
19) 참조: Voltaire, Trattato sulla tolleranza, cit. 이 저서는 볼테르의 대작 중 하나인데, 이 안에서 저자는 그가 함께 토론하고 있는 상대들이 받아드릴수 없는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주제들을 제시한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서 폭력, 비관용, 편견과 어리석음이 거부되고 있고, 다른 한편, 한 피고인이 언제나 그의 독설들 앞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이거나 혹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대표할 수 있는 이 피고인은 결코 독자적이 아닌, 판결문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기도문은 특별한 가치를 지니며, 그것과 함께 저서는 마무리된다. 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형제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요청되고 있다. (p. 148)
20) 참조: S. Corradino, «L’uomo e la parola: la tentazione del verbalismo», in Civ. Catt. 2018 IV 447-458.
21)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인간의 존엄성(DH), 14.
22) 참조: DH 2.
23) DH 11.
24) 참조: ivi.
25) Rm 14,23. Omne quod non est ex fide, peccatum est, 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믿음으로, 즉 선한 양심 안에서 행동하지 않는 자는, 죄를 짓는다». CEI의 새번역은 다음과 같다: «양심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26) 이렇듯 교종은 부르쥬의 대주교에게 교령으로 된 문서로 응답한다. 참조: M.-D. Chenu, Il risveglio della coscienza nella civiltà medievale, cit., 32 s.
27) 참조: 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une,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