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직 7년 – 예수회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시선

I GESUITI E GLI OCCHI DI FRANCESCO
Sette anni di Pontificato

© La Civiltà Cattolica, Q 4073, 7 Mar 2020 I, 417-426

아르투로 소사 신부, 예수회 총장
번역 이창욱 펠릭스(바티칸 뉴스 번역가)

  최근 들어 예수회는 현 세계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정치·경제적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재임 중 주님과 교회를 어떻게 섬길지에 관한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우리의 문화, 언어와 전통의 “다양성 안의 일치”를 식별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모든 예수회 공동체와 우리의 모든 사도직 활동이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현재 예수회는 전 세계 110여 국가에 진출했고, 약 15,6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럽에 집중되어 있던 예수회는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점차 아시아로 밀집지역이 이동하게 됐습니다.1) 우리는 신학, 영성, 문화와 사회 분야에서 사도직 사명에 종사하고 있는 평신도, 다른 수도회소속 수도자, 교구 사제 등 수많은 사람들과 세계 곳곳에서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청과 식별의 풍요로운 과정을 통해 다음의 네 가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을 교종님에게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1) 영신수련과 식별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2) 화해와 정의의 사명 안에서 가난하고 세상에서 쫓겨난 이들, 그 존엄성이 훼손된 이들과 함께 걷기. 3)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젊은이들과 함께하기. 4) 우리의공동의 집을 돌보기 위해 함께 협력하기.

  2003년에 예수회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사도직 직무, 이민자와 난민 봉사, 로마에서 지성 사도직과 국제 연구기관개설을 우선적인 사도적 선택으로 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전 세계 예수회의 도움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던 선교의 다섯가지 필요성을 촉구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 필요성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도전과제로 남아 있으며 결코 소홀히 다룰수 없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우리 사명의 영성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지침”입니다. 이보다 더중요한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네 가지 선택 모두 우리에게는 우리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부르심이고 한꺼번에 고찰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선택은 실행해야 할 새로운 “사안”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지평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특수성에 초점을 둬야 할, 사명을 “어떻게 실행하고 살아갈지에 관한 영감”을 다루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9년 2월 6일의 서한을 통해 이같이 확인해주셨습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에 이르기 위해 예수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과정은 (…) 참된 식별이었습니다.” 교종에 따르면, 우리가 제시한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무엇보다 먼저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EG)에서 시작하여, 교종, 시노드와 주교회의의 일반적인 교도권을 통해 표현된, 교회의 구체적인 선택과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종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첫 번째 선택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회가 주님과 갖는 관계, 기도와 식별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전제하기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이 기도하는 태도 없이는 나머지 선택도 제 역할을 못합니다.”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통솔하는 이의
마음을 개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 드 로욜라의 경험은 교회와 세상의 새로운 문제에 옛날 방식의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통솔하는 이의 마음을 개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시대적 변화시기였던 16세기의 “교량역할을 하는 사람(uomo-ponte: 매개자)”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지구와 인간의 공간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막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코페르니쿠스로 인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과학이 입증했던 겁니다. 루터의 시대였고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렸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시대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 교회에 대한 모든 내부 개혁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자기 자신과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복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서 정해졌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보편적인 시선”을 선사합니다. 요한복음의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그러므로 이냐시오 성인이 말하는 것처럼,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도록,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주님을 내적으로 인식할”2)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종은 영성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습니다. 예수회원에게 있어서 우리가 받은 카리스마에 따라, 영성생활을 삶의 중심에 둔다는 것은 그 과정을 다시 활성화하고, 희망을 조성하며,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재임 기간 동안 보여준 몸짓, 말씀과 선택은 이러한 보편적인 시각에서 읽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시각은 긴장, 오해와 특별한 관심을 재구성해줍니다.

영신수련과 식별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식별”이라는 말은 교종의 재임 기간을 특징짓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한다”는 의미로 오해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기 위해,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일부 현대 문화의 경향은 마치 식별의 인류학적 의미를 제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을 겪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과 양심, 그리고 더 나아가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3)을 명령하는 의무감을 이 식별에서 깎아내리려는 듯이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직 식별 안에서만 진리와 자유, 법과 책임, 권위와 순명이 통합됩니다. 라틴어 ‘ob-audire’에서 유래한 순명(obbedienza)은 “타자(他者) 앞에서 경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별하려는 열망과 뜻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발적이거나 정상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별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행하는 그룹이나 모든 사람을 동참시키는 복합적인 과정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별을 행할 진정한 원의가 있는가? 이 식별과정의 단계를 교종은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EG)에서 “인식하다”(riconoscere), “해석하다”(interpretare), “선택하다”(scegliere)의 세 가지 동사로 요약했습니다.

  1523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이 식별의 규칙을 체계화했을 때부터, 이 규칙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제시된 공통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영신수련의 체험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은 성소를 깨닫게 해주고, 아울러 이를 자유롭게 이행하도록 선택하게 합니다. 식별을 통해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지에서 악의 유혹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악이 선한 겉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식별은 자기 삶의 의미에 관해 선택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식별을 하는 동안 개인의 삶이나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 삶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존재하도록 부르심 받은 나는 누구인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모든 이의 선을 위해 어떤 결정을 택하는 것이 좋은가? 어떻게 사회악을 피하고 공동선을 구축할 것인가?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에서 뿐 아니라,
개인의 삶 안에서도 식별은
공동선의 건설을 도와줍니다.”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에서 그런 것처럼, 개인의 삶 안에서도 식별은 공동선의 건설을 도와줍니다. 공동선을 이루는 사람은 “용기, 힘, 위로와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고 이냐시오 데 로욜라 상인은 영신수련에 썼습니다. 식별을 통해 더 이상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인 사람과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 모든 이의 선을 조장하는 이와 공포와 분열을 심는 이를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살펴볼 문제가 있습니다. 곧 공동체적인 식별 안에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의 한계가 죽음 이후에 생기는 삶과 새로운 시대적 표징에 여지를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 권리의 보편적인 선언은 어떻게 많은 국가와 민족이 인간 존엄성을 중심에 두면서 성숙된 식별을 실행할 수 있었는지 사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최근 들어 우리는 인간 권리의 보편성이 감소하는 데 일조하며, 법과 권력 간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봅니다. 그 사례로 들 수 있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 몰려든 난민들에서부터 희망을 안고 지중해로 떠난 여행길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민족들의 침묵의 탈출기(Esodo)에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소수 민족의 박해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도 인간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권력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속 사회를 직면하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세속주의를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지난 과거에 대한 문화적 표현을 통한 향수도 초월해야 합니다. 아울러 세속 사회도 역사 안에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킬 기회를 제공해주는 시대의 표징입니다. 인간적인 자유와 종교적인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장소입니다. 세속 사회 안에 우리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및 정치적 배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조건이 생깁니다.

화해와 정의의 사명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걷기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인류의 미래는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평화의 건설과 사회적 대화라는 문제를 거쳐야 합니다.4)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결정해야만 가능합니다. 통합,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조건은 “함께 걷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에 대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론적인 처방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가야 하고,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삶을 바라보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가난한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로 육화하신 나자렛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를 낳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불의를 인식해야 하고 하나하나 소환하여 그 원인을 연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비인간적인 조건과 불의의 구조적 원인을 밑바닥까지 이해하는 것은 한낱 지성적인 과제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잡한 현실이든 살아가고 있는 조건이든 우리에게 본래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정의는 복수의 뿌리 혹은 화해의 뿌리에 의해 길러질 수 있습니다. 화해의 결실로서, 정의는 사람들 간에 생기는 잘못이나, 민족과 문화 사이에 일어나는 잘못을 토대로 구축된 관계를 본성과 하느님을 통해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포와 삶은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어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10,7)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EG 180).

  정치적인 차원은 여전히 정의와 화해를 증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정의로운 세상은 진정한 시민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형태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선 추구를 위해 노력하는 사회조직들을 증진하며 “신-자유주의”, 근본주의와 포퓰리즘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행한 결과를 막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시민권에 대해 책임지고 그런 신분 안에서 교육받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비록 합법적이더라도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우위에 두며 통치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관점에서볼 때, “정치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경청하고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익사업을 마련하고 증진하는 소명은 화해와 정의의 사명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정치(politica)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대문자 “P”를 사용해서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회원에게 정의와 화해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예수님의 방식에 따라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난민들과 인신매매의 희생자들을 도와주고, 교회 안팎으로 온갖 형태의 남용을 제거하는 데 기여하면서 말입니다. 구조적인불의가 권력의 남용, 성 착취 및 양심의 남용과 결부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의를 증진한다는것은 온갖 형태의 남용을 근절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1965년에서 1983년까지 예수회 총장을 지냈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신앙의 봉사와 정의의 증진이 한 몸의 두 개의 허파와 같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곧 믿음의 차원이 없다면 활동은 관념론이 되어버릴것이고, 정의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적 증거는 예배행위로 국한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종직무도 이러한 “신앙-정의”라는 이항식 아래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젊은이들과 함께하기

  신앙과 기쁨(Fe y Alegría) 학교를 포함해서 계산한다면, 이냐시오 성인의 교육 사업 네트워크는 매년 약 1백만 명의 전 세계 학생들을 동반합니다. 예수회에게 있어 “타인과 함께 그리고 타인을 위해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은 큰 책임입니다. 젊은이 세대는 빠르게 변화합니다. 1968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지났고, 제삼천년기의 젊은이들은 혼자 힘으로 쟁취했던 최소한의 권리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최근에 와서야 그들의 사회적 권리도 함께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세대는 사회와 교육 시스템 전체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젊은이들은 무슨 목표를 향해 방향 지워졌는가? 어떤 식으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가? 어떤 대화가 가능한가?

  우리의 선교사명은 그들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와 젊은이는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 흐를 수 있는 현 세계의 십자가, “신학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젊은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의 자극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맥락에서 그들을 동반할 때, 그들의 고통과 꿈 안으로 몰입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들의 활기찬 세상에 적극적으로 다가서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끌고 있는 교회는, 그 어원이 “주입하다”를 떠올리는 “가르침”(insegnamento)에 대해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젊은이들의 “교육”(educazione)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이는 젊은이들의 재능, 혁신과 가치로부터 “바깥으로 이끌어낸다”는 아주 높은 차원의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체험은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고차원의 형태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전통에서 보면, 체험이란 지속적이고, 개인화된 양성을 요구합니다. 이는 영적독서나 선별된 연구, 경청 장소의 조성, 사회봉사의 책임과 자신의 삶을 재해석할 가능성을 얻기 위해 1년 동안 살아가야 할 기도와 침묵의 기간 등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회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을 택했습니다. 젊은이들이 혼자 웹상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포함시키는 새로운 공동체적 소속감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신앙추구, 그들의 언어,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새로운 실천에 의해 자극 받아 쇄신되고 ‘업그레이드’됨으로써 사명을 깨닫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젊은이들에게 요구합니다. 이들이 직면한 도전은 젊은이들이 참된 주인공이 되고,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과정을 인도받고 결정내리는 법을 배우게 되는 “실존적인 공간”을 다함께 조성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LS)가 사회적인 회칙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사실 환경과 사회는 서로 분리된 두 가지 위기가 아니라, 사회-환경적 위기입니다. 회칙은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LS 16) 때문에, 온전한 인간 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증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모두가 존엄한 존재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이러한 도전은 정의롭게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할 정도로 피조물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두고, 지속가능하며 대안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하도록 요청합니다. 우리 각자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존 모델에 대안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과의 조화가 드러나는 삶의 방식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조적인 변화를 위해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플라스틱 및 에너지 사용, 운송방식, 옷의 선택 등 우리의 일상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작은 변화들”도 시급합니다.

  따라서 통합 생태론은 도시 공간의 아름다움과 활성화, 도덕적인 행동방식, 도시의 선한 통치와 같은, 삶의 다른 모든 문제들과 함께 환경적인 문제와 현상들을(지구 온난화, 환경오염, 자원고갈, 산림벌채 등) 다같이 담을 수 있는 패러다임이 됩니다. 더 나아가 관계와 연결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의 관계(LS 155항 참조)에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역동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의 삶을 읽어내는 데 핵심이 되는 통합 생태론 안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사회 제도의 건전함과 환경과 인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 생태론은 필연적으로 제도와 관련되며, 사회의 기초 집단인 가정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국가, 그리고 국제적 삶까지 그 대상으로 삼습니다”(LS 142항).

  예수회에게, 아마존, 인도, 인도네시아와 콩고 분지에서 살아가는 삶처럼, 이미 취약한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하느님의 창조활동에 참된 예배를 드리는 방법입니다.

  물, 공기, 흙, 기후 같은 자원이 개별 국가의 운영에만 맡겨져서는 안 되고 보편적 인간 공동체의 관리에 맡겨져야 하기 때문에, 분배에 관한 협력에 주안점을 두는 초국가적 정치를 통해 보편적인 시민권이 구성됩니다.

  그 시작부터 예수회는 다양한 문화와 국가 출신의 예수회원들로 구성되었고 그중에는 서로 전쟁 상태에 있는 국가에 속하는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분열을 초월하는 이러한 보편적인 시각은 세 가지 경험, 곧 주 예수님과 맺는 깊은 우정, 연학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섬기는 봉사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이를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로마에 있는 콜레지오 로마노 광장에는 이냐시오 성인이 설립한 오랜 역사를 가진 로마 신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전 세계의 성직자가 배출되었고 아울러 이곳에는 매춘부들이 수용되고 회복되었던 “산타 마르타”라고 불리는 작은 성당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냐시오 성인에게 선교사명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바오로 3세 교종이 이냐시오 성인에게 트리엔트 공의회를 위한 2명의 예수회 신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을 때, (거기에 파견됐던) 라이네스 신부와 살메론 신부는 신학적인 공헌을 했던 지성을 통해서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증언을 통해서도 탁월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자유시간 동안에 병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병원에 기거하면서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예수회의 네 가지 보편적 사도적 선택은 마치 씨앗처럼 싹을 틔우기 위해, 예수회 전체와 개인의 보살핌, 기도, 연학, 봉사,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종이 알고 있는 교회가 되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교종 또한 이러한 우리의 영적 체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끼리 긴밀히 연결하고 역동적인 과정에서 계속 대화하면서, 다른 수도회들, 평신도들과 운동단체들과 협력과 공유를 하는 가운데 걸어가야 할 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극복하는 친교를 이룰 줄 알아야 하고, 언제나 지리적·지성적 ‘전방’으로 나서야 합니다.

   마치 두 다리처럼,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영적 차원과 지성적인 차원이 우리를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게다가 복음과 교도권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함 안에서, 우리 사이의 협력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아낌없이 내어 주라고 권유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과 빛을 주십니다.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는 늘 이 세상 중심에 현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홀로 두지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이 땅과 궁극적으로 결합하셨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새로운 길을 찾게 언제나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주님 찬미받으소서!”(LS 245).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2019년 초기 예수회원은 15,586명이었다. 그중 사제는 12,308명, 수사는 1,031명, 연학수사는 2,609명이고 수련자는 738명에 달한다.
2)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영신수련, 104항.
3)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4) 프란치스코 교종,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86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