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아닌 ‘우리’: 교회 안에서의 장애

«Noi», non «loro»: la disabilità nella Chiesa

© La Civiltà Cattolica, Q 4069, 4 Gen 2020 I, 41-52
저스틴 글린 Justin Glyn, S.J.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옮김

  정부들과 다른 사회의 저자들이 장애와 관련하여 사용했던 포용의 수사학은 매우 실망스러운 현실을 위장한다. 한편 우리 가톨릭 교회는 길고도 주목할 만한 사회 교리의 신학과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이 때문에도 오늘날 장애를 지닌 이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더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장애의 신학을 다루는 가톨릭 장애인들은 소수이며, 그래서 우리가 겪은 경험은 교회의 자기 이해의 한 부분이 되지 못했다.1)

  교회 안의 장애 개념

  장애 문제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발언들은 두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하나의 문헌 안에서도 그렇다. 한편으로 장애는 원죄의 결과로 간주되어, 장애를 지닌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은 “흐려졌다”고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장애를 지닌 이들은 인간의 죄스러움의 표지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이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을 은총을 받았기에 다른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이들이라고 보기도 한다.2)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떤 것도 장애를 지닌 우리 대부분이 겪는 체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장애는 서로 다른 온갖 형태와 정도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다른 모든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 신학과 사회교리의 최근 동향들은 어떻게 장애에 대하여 교회와 또한 세상과 말하기 위한 토대가 될 더 견고한 바탕을 마련해줄 수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에게 장애를 지닌 이들과 장애가 없는 이들이 “그들”이라기보다 함께 하나의 “우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을까?

  최근 적어도 서양 사회 대부분에서는, 장애에 대해 말하는 데에 사용되던 전통적인 “치료적 모델”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장애의 조건을 해결해야 할 임상적인 문제로 보면서 “정상성”에서 “비정상적”으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장애인”들을 “규범”으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드러나는 차이에 집중한다.

  반면 장애를 겪고 장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어떤 특징들이 아니라 사회에 의하여 부과되는 장벽이라고 본다. 한편으로, 우리의 장애는 우리가 경험하는 신체적-정신적 기능의 결핍이다(예를 들어 나는 눈에 손상을 지니고 있다). 다른한편으로, 우리의 장애는 그 결함과 사회적-신체적 환경 사이의 상관 관계로서, 우리가 충만한 삶을 향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래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것도 문제가 있다. 장애와 결함은 서술하기가 – 또는 비장애로부터 구별하기가 –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장애로 체험하는 어떤 무능력과 일반적으로 장애가 없는 이들의 기준을 따르는 사회의 맥락 안에서 장애인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서 시작해 보자.

  장애의치료적 모델 다른 이들을 위한희생 장애인들

  가톨릭 교회의 사회 교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장애에 대해 말하면서, “하느님의 모상”이 무엇이며 또한 다양한 형태와 차원에서 그리고 신체적-정신적인 폭넓은가능성들을 통하여 인간다움이 표현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규정하는 데에서 흔히 난점에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분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창세 1,26-27 참조). 그러나 흔히 “하느님의 모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이해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능력이 제한될 때에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도 손상된다. 이것이 장애의 “치료적 모델”의 신학적 관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으로부터 정의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어떤 점들의 결핍은 다시 죄의 탓으로 돌려진다.

  예를 들어, 1917년 교회법전에서는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들과 “뇌전증 환자, 광인, 마귀든 자”에게는 사제 서품이주어질 수 없다고 규정했다(제984-986조). 1983년 법전에서는 이 조항이 폐지되었지만, 그러한 개념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장애를 지닌 이들을 돌볼 것을 요청하면서 그들은 “생명력이 감소되고 쇠퇴되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2276항). 또한 몇몇 교회 문헌들은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상이 “흐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장애는 아직도 악이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하는 장애들 가운데 하나이며 마지막 날에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문헌들에 따르면 덕은 장애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는” 이들이 실천하는 것이다.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저 “치료의 대상”으로 축소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무시된다. “포용”에 관한 온갖 형식적 선언들에도 불구하고, 치료에 대한 이러한 말들은 우리 장애인들이 우리의 개인적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주역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이다) 오직 다른 이들의 삶의 무대 위의 상대방으로 남을 뿐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장애인들을 단순한 “치료의 대상”으로 축소하는 것은, 예수님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에 관하여 질문했을 때 그분께서 하신 대답을 생각하게 한다(요한 9,1-12 참조). 그 사람의 관점을 예수님은 무시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기초가 되는 신학은 더욱 염려스럽다. 그 밑에는, 어떤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생각이 깔려 있다. 그 사람은 – 또는 적어도 그의 장애는 – 어떤 사람의 악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다음 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그릇된 해석 역시 문제가 된다. 그 사람이 죄인이 아니었더라도, 그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죄로인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치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치유” 없이 살아가는 시각 장애인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 안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없는가?

  반대편 끝에는, 이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을 “희생”으로 보는 이론이 있다. 장애를 지닌 이들은 죄 없이 다른 이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도록 예정된 희생자들이다. 다행히 이러한 이론은 교회의 공식 신학의 한 부분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그러한 의미에서 특별한 증인 또는 대화 상대로 묘사될 때에는 그러한 이론이 암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두 관점 모두가 장애를 지닌 이들을 거스르고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가톨릭의 개념을 해친다는 것, 그래서 장애에 관한 교회의 문헌들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로, 사람들을 그들의 장애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그들이 겪는 모든 것이 기적적인 표지라거나 마지막 심판 날에치유되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그들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을 지지해주지 못하는것이다. 저주를 받았다고 보든 축복을 받았다고 보든, 결론은 이들이 언제나 그러한 상태에 있을 운명이며 아무 것도그런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사회는 그것이 그들을 소외시키는 구조이며 선택이라는점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로써 그 지체들인 이 사람들에 대한 모든 의무를 덜었다고 느낄 위험이 있다.

  장애를 죄나 덕에서 기인하는 고통으로 보는 것 역시 장애를 지닌 이들의 체험에 상응하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은장애의 고유한 요소들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 수 있겠지만, 장애인들 대부분에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에 어떤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사고)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마치 눈의 색깔과 같이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생리학 또는 유전학의 문제이다. 일부 장애인들에게는 가장 단순한활동까지도 불가능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때로는 비범하게 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으로 간주되는 이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만이 스티븐 호킹과 같은 수학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장애가 어떤 사람을 인격성이 없는 “하느님의 장난감”으로 축소시킨다는 생각은, 매우 표면적인 분석만으로도 이미 그릇된 것임이 확인된다.

  하느님 백성 모두의 동등한 존엄성

  이러한 그릇된 개념들은, 사목보다 신학에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 안에서 모든 이들이 동등한 존엄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고 모두가 세례로 인하여하느님의 자녀임을 이해하게 되었다.3) 이러한 신학적 세계관 한에서, 장애인들이 세례나 그들 편의 어떤 선택과 무관하게 죄로 인하여 (죄가 있다거나 또는 없다는 이유로) “특전적”이거나 또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개념은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신학적 차원에서, 장애를 죄 또는 축복으로 보는 견해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되고 동일한 인간다움을 부인하는것은 은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념에 혼동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면 은총은 본성에 기초한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 곧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며, 우리의 피조물적 선성 위에 작용하고 본성적 선물들에, 한계와 재능 위에 작용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우리는 악을 (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우리에게당신 자신을 (은총을) 선사하시며, 당신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창조의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위에서 언급한 그릇된 이론들은 본성에 대한 은총의 이러한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은총을 마지막 때에 “적용된” 것으로 여기거나(장애를 원죄의 결과로 보는 것) 미리 “넘치도록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고통받는 성인) 외재적 시각은 인간을 그의 장애로 축소시키며, 그를 온전한 주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삶 안에서 그 삶을 사는 사람의 협력 없이 은총이 더해지거나 제거되어야 한다면, 개인적 선택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사람들의 행위나 궐함, 다른 이들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 세상과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미리 또는마지막에) 주어진 은총이 모든 것을 할 것이고, 인격적 개입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편에서 이러한 전통의 몇몇 요소들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그 가운데에는 이레네오와 같은 첫 신학자들의 글들도 있었는데, 그는 구원 역사에서 우리의 육체성과 그리스도의 육체성의 의미를 강조했다. 원죄가 장애와 관련이 있든 없든, 이레네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 조건을 취하시면서 우리의 한계들을 받아들이셨고이로써 창조를 회복시키셨으며 창조를 옛 광채로 되돌리셨다고 말했다. 이레네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창조를 죄와그 결과들로부터 해방시키심으로써 창조를 새롭게 시작하셨다. 그분 자신이 새로운 시작이셨으며, 당신과 결합되는이들을 창조의 이 새로움에 참여하게 하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은 이와 유사한 표현들로 인간 조건을 제시한다. 인간이 존엄성에서나 한계에서나 서로 동등하다고 밝힐 뿐만 아니라, 인간 안에서 영혼과 육신이 일치를 이루며 그 찬란한 다양성의 온갖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4)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의 육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체는 영혼이 지상적 실체와 결합되는 양태이다. 죄는 축소되지 않는다. 죄는 그 온갖 혐오스러움을 지니고 현존하지만, 우리의 어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측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부터 나와 우리 각자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선하면서도 한계를 지니고 창조된 육체의 특징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죄는 – 『가톨릭 교회 교리서』 397-405항에서 말하듯이 – 생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 한계들을 잘못 사용하는 윤리적 문제이다. 죄의 결과로 우리는 창조된 세상에 해를 입할 수 있지만, 죄는 우리 모두가 우리 창조주의 모상으로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러한 분명한 선언들은가톨릭 전통을 따른다. 정교회와 유다교의 전망에서도, 우리가 그를 본따 만들어진 하느님의 모상은 일관된 하나의 전체임을 강조한다. 지금 이미 육체는 영혼과 함께 은총의 삶에 참여한다. 내세의 삶에서, 영혼과 육체의 공유 관계는 어떻게 이와 다를 수 있겠는가?

  이 측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장애의 신학에 관한 고찰들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들은 분명하다. 장애는 일탈(축복 또는 저주)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모상인 육체의 실현 양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원칙은자연계를 관찰할 때에 더욱 분명히 확인된다. 동물들도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지니고 있고, 많은 동물들은 그것이 인간안에 나타난다면 결함으로 간주될 (동물들에게서도 그와 매우 유사한 결과를 수반하는) 유전적 변형들을 지니고 있다.

  이레네오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희망」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취하시며 자신을 낮추려 하신 목적이 창조된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헤아릴 수 없는 품위로 드높이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창조를 그 모상대로 새롭게 하는 데에 있었음을 지적한다(22항 참조). 여기에서도 은총은 본성에 기초한다. 모든 인간은 파스카 신비에참여하고 하느님과의 합일 안에 살도록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인간 본성을 취하시어 당신 것으로 삼으시며 당신의 신적 생명을 함께 나누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무한한 존재와 결합될 은총이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되는 이 소명은 보편적이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에, 우리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하면서 이를 미리 체험한다.

  그러므로, “적용된” 은총이나 인간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여지가 없다. 손상된 육체는그럼에도 아름답게 창조된 육체이며, 그 육체가 할 수 있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인간성 자체로인하여 가치를 지닌다. 은총은 인간과, 곧 자신 안에 성령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모든 인간들과 하느님의 지속적 관계에 관련된다.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내쳐지도록 계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듯이, “육체의 어떤 치료가 대중의 전설이 되고 경제적인 문제가 된 이 시대에, 불완전한 것은 가려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권을 누리는 이들의 행복과 평온함을 위협하고 지배적인 모델을 위기에 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사도의 말은 진정 참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5)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모상은 어떤 장애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을 통하여 빛난다는 것이 분명하다. 창조 또는 구원에 관련해서, 교회의 가르침은 장애인과 다른 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우리 형제들의 장애 또는 결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한다.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신앙의 중심에자리한 신비들, 곧 삼위일체와 그 두 번째 위격의 육화라는 신비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대성의 표지인 장애

  이 신비들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장애에 관한 첫 번째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취하신 삶 안에서 우리와 연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한계들을 받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고통과 당신의 죽음 안에서 그 취하신 육체와 구체적으로 일치하셨다. 복음서들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쪼갤 때에 존재한다는 그 특별한 말씀을 강조한다(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1코린 10,16; 1코린11,24 참조). 바로 이 “쪼갬”의 동작에서 제자들은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알아본다(루카 24,30-31 참조). 낸시 이즐런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손상된 손과 발들을 보여주심으로써 […]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장애 하느님으로 계시하신다. 부활하신 구원자 예수님은 놀란 당신 동료들에게, 결함의 표지 안에서 그들과 하느님의 유대를, 그들의 구원을알아보도록 초대하신다.”6)

  그러므로 장애는 참으로 인간 조건에 대한 그리스도의 연대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표지이며 또한 우리의 장애가 그분의 것임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수화들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가 검지 손가락을 반대쪽 손바닥에 대는 것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표지는 부활 후에도 그분 안에 남아 있었던, 십자가에 못박힌 못의 상처들을 나타낸다. 이즐런드는 개신교 전통을 토대로 글을 썼지만, 이 점에서 그의 생각은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완전히 부합된다. 「기쁨과 희망」은, 장애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이미 인간의 삶과죽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이들을 변화시켰음을 말한다(54항 참조).

  어떤 이들은, 장애를 지닌 하느님이라는 이 개념이 정신적 결함보다는 신체적 결함에 더 잘 적용된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지적 장애를 지닌 이들 안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여길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애는 하나의 한계이다.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취하신 인성으로 인하여 개별적인 어떤 인간 존재가 되셔야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한 인간 존재가 되시어 그 모든 한계와 결함들을 지니심으로써 – 그 가운데에는 가장 중요한 한계인 죽음도 포함된다 – 장애와 다른 한계들을 포함하여 어떤 개별적 형태의 인간성을 사는 모든 이들과연대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되셨다. 다른 어떤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 나이와 성, 장소, 시대, 결함이나 다른 개인적 요소들과 무관하게 –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물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인가?

  토마스 웨이넌디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에 관한 마태오의 설화들에(마태 8,16-17 참조) 그분께서 당신이 치유하신 결함들을 실제로 스스로 받아들이셨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7) 이는 그리스도께서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개념에 완전히 부합된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4세기에, 예수님께서는 온갖 다양함을 지닌 인성을 하느님께 결합시키기 위하여 신성과 인성을 충만하게 체험하셨어야 한다고 말한다. “취해지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았다. 하느님과 결합되었던 것은 구원되었다.”8)

  잘 살펴보면, 이러한 연대성은 제한되고 잘 규정된 한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은 자립적인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우리는 질병, 상처, 결함은 인간 조건의 구성적 요소라는 불편한 진리를 인정한다. 많은 장애인들이, 상상으로 만든 규범으로부터 현재 상태에서 심신이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을 지칭하여 “일시적인비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에 제한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예를 들어, 걸을 줄 모르고자제하지 못하며 시력이 매우 나쁘다), 다행히 충분히 오래 살게 된다면 어떤 결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결함을 지닌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연대성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이 모두를 스스로 취하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결함있고불완전하고 고통받는 육체를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며, 당신께서 인간의 결정적 한계인 죽음에 대해 승리하시는바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 당신의 상처들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결함은 하느님의 능력을 확인해 주고 비추어 준다. 성바오로가 불특정한 그의 신체적 문제에 대해 말하듯이,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10).

  바오로는 그 문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 부르지만,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 자신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처음에 언급했던 신학, 곧 복음서의 치유 이적들을 결함을 지닌 채로 남아있는 이들을 소외시키는 행위로 보는 신학 역시그릇된 것으로 판명된다. 다른 단락들에서(예를 들어 마태 8,16-17과 요한 9,39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결함을 취하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감각과 신체적 온전성이 외면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9) 실상, 그리스도는 확신을 갖고 우리의 모든 약함을 받아 지셨다. 그러므로 장애는 흠도 특권도 아니며, 하느님의 현존과 우리모두에 대한 그분의 연대성의 표지이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다른 모든 특징과 마찬가지로, 장애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더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를 창조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이끌 수 있는 것인 하나의 약함이다.

  우리가 부름받은 신적인 삶의 표지인 장애

  둘째로, 장애와 결함은 우리가 부름받은 삶을 부여주는 표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의 삶으로 부르시는데, 그 삶은 언제나 관계로 이해되어 왔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중세 신비가들은 사랑의 관점에서 그 삶을 이해하곤했다. 성부는 사랑하시는 분, 성자는 사랑을 받으시는 분, 성자는 그 사이에서 춤추며 우리를 그 친교 안으로 깊이 이끌어 들이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 안에서 사는 우리의 미래 삶도 관계적인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올바로 일컬어진다. 우리는 고립되어 살아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들이 아니다. 교리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그리고 가톨릭 교리는 지복직관에서 실현될 신적인 삶이 자립이 아니라 친교임을 역설한다.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는 결함과 장애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호 의존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장애를 지닌 이들이흔히 가장 기본적인 요구들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 역시 도움을 줄수 있다. 때로는 그들의 현존 자체로, 때로는 더 분명하고 특출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장애가 어떤능력으로 보상된다는 뜻이 아니라, 결함과 장애라는 현상이 서로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의존성은 인간 일반의 운명이다. 「기쁨과 희망」에서 말하듯이,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지 않은척 하려 한다 해도 결국 신화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 당신 성령을 주시어 바로 당신의 몸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형제적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그 안에서는 모든 이가 서로서로 지체를 이루고 주어진 여러 가지 은사에따라 서로 봉사한다”(32항).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곧 장애를 지닌 이들이나 “일시적으로 장애를 지니지 않은” 이들이나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진 임무이다.

  결론

  교회의 국가의 실천은, 장애를 지니고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결과들을 지금보다 더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 교리의 기초가 되는 신학은 특히 지난 몇십 년 사이에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장애의 신학을 위하여 많은 결과들이 나타났고, 다른 많은 점들은 아직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장애를 지닌 사람의 개별성을 부인하는 신학을 점차로 버리고 있다. 그러한 신학에 따르면 장애는 원죄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그보다 나을 것이 없는) 대안으로서는, 장애가 모든 이들을 위하여 고통을 겪는 “희생된 영혼”과 결부된 축복이라고 보았다. 장애의 치료적 모델은 이와 같이 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두 개념 모두는 공동체에게, 그 일부 지체들에 관하여 “손을 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장애들을 하느님의 모상의 육화의 측면들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계는 인간 계획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며, 장애는 신체적이 아니라 윤리적 결함인 인간의 죄스러움과는 무관한 인간의 한계의 예들이다. 장애가 있는 육체도 아름답다. 그리스도께서는 육화 때에 이 결함 있는 육을 취하셨고 그것을 신적인 것이 되게 하셨다.

  장애는 교회 전체를 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장애는 과거에 생각한 것과는 다른 표지이다. 육화는 그리스도께서장애를 포함한 인간적 한계들을 받아 지셨음을 보여준다. 그분은 치유를 행하실 때에 다른 이들의 결함을 신적인 삶 안에 받아들이셨고,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적인, 부활하신 몸 안에 당신 상처들을 지니신 채로 죽은 이들에게서 돌아오신다. 그러므로 결함은 인간적 약함의 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빛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느님과 또한 우리 이웃과 친교를 이루도록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하느님 나라의 삶은 – 현재에나 미래에나 – 하느님 안에서의 상호 의존성의 삶이다. 삼위일체 안의 삶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관계적이다. 우리의 은총들은 다른 이들의 약함과 한계들을 보완한다. 모든 인류의 운명인 결함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본질이 관계이신 그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새로운 삶으로 부름받은 상호 의존적인 공동체임을 상기시킨다.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본고에서 제기된 신학적 질문들을 더 깊이 다루는 글들은 다음과 같다. J. Glyn, «Pied Beauty: The Theological Anthropology of Impairment and Disability in Recent Catholic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in Heythrop Journal 60 (2019) 517-584; Id., «Us» Not «Them»: Disability and Catholic Theology and Social Theaching, Canberra, Office for Social Justice, Australian Catholic Bishops Conference, 2019.
2)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Messaggio ai partecipanti al Simposio internazionale su “Dignità e diritti della persona con handicap mentale”», 2004년 1월 5일, n. 6.
3)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세상의 빛」(Lumen gentium), (1964년 11월 21일), 9.
4) 참조. 상동,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65년 12월 7일), 12-14.29항.
5) 프란치스코, 환자와 장애인들의 대희년 강론, 로마, 성베드로 광장, 2016년 6월 12일.
6) N. Eiesland, The Disabled God: Toward a Liberatory Theology of Disability, Nashville, Abingdon, 1994, 100
7) T. G. Weinandy,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 An Essay on the Humanity of Christ, London, T&T Clark, 1993, 103-104.
8)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s., Epistole, 101, 32: PG 37,181.
9) J. L. Koosed – D. Schumm, «Out of the Darkness: Examining the Rhetoric of Blindness in the Gospel of John», in D. Schumm – M. Stoltzfus (eds), Disability in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 London, Palgrave Macmillan, 7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