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와 어른들: 불신의 세대?

GIOVANI E ADULTI: GENERAZIONI INCREDULE?

© La Civiltà Cattolica, Q. 4067, 7/21 Dic, 2019 IV, 493-502
GianPaolo Salvini S.J. 쟌파올로 살비니 (예수회)
장재명 파트리시오 신부(부산교구) 옮김

  교회는 젊은이들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 전력을 쏟아 부은 시노드를 진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1) 우리 잡지는 수많은 아티클과 시노드에 대한 해석에 참여한 것들을 출판했고 그것들에 대해 조언했다. 반면에 이 아티클에서는 특별한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아르만도 마태오의 책 한 권을 되짚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2) 실제로 이 책은 시노드의 상반기에 나왔고 시노드 준비에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책은 현실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이 책에서 제안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풀지 못한 좋은 부분 안에 있기에 아직도 현실적이다.

  저자는 그것을 여러 번 말했고, 다른 책들에서도 그랬다. 우리가 검토하는 것은 그의 논제들을 깊이, 설득력 있게, 더 단일한 방법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의 신앙의 위기에 대하여 말할 때, 특별히 그들이 자라왔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의 세상과의 관계에서 살고 있는 정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젊은이들 자체와 그들의 문제들을 집중해서 본다. 어른들과 부모들의 세상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했던 시노드와 시노드 문헌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논제들은 젊은이들의 위기가 단순히 어른들이 맞는 위기의 또 다른 모습이다. 모두가 영원히 젊은이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세상에서는, 젊은이들이 세월의 나이와 계절을 통해, 진정으로 젊은이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그들을 위한 공간이 더 이상 없다. 단순한 예로, 2006년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베로나에서 열렸던, 이탈리아 교회의 국제회의에서 이미, 노동조합관심자인 사비노 페조타가 그의 발언에서 본질적으로 이것을 명확히 했다: “젊은이들의 위기는 우리 어른들의 위기이다.” 이 발언은 비록 그 순간에는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 책의 근본정신들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분리해서 설명하겠지만, 저자는 그것이 밀접하게 상호 관련이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아르만도 마태오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의 신앙의 전달이 위기에 처해 있다. 유아기적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건너가는 여정으로 표현해야할 단계가 매우 자주 신앙을 버리고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견진성사인데, 이 성사를 받은 이후에 종종 젊은이들은 더 이상 그들이 전해 받은 신앙을 삶으로 옮기지 않는다. 어떤 본당신부가 슬픈 유머와 함께 충고한 것처럼, 성당지기의 비탄들에 대한 응답은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몇 마리 비둘기들을 교회로부터 몰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견진성사를 준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이 즉시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분리되는 지점은 개인이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에 배운 것만큼 적절한 방법으로 형성되어 가면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유형을 그려내는 어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성숙을 위해 제공하는 것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있어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우리가 자라났을 때,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닐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9쪽) 오늘날 예수가 했던 말들을 믿고 그 말들로부터 오는 영감을 받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고 난 이후에 삶을 감지하고 이끌어가는 일반적인 길의 한 부분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른들 세상의 한 부분이 되기를 열망한다. 젊은이들을 표면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위한 공간이 있다: 즉, “마음으로” 응원하는 팀에서부터 꿈에 그리던 자동차까지; 언제나 더 많은 돈을 가져야할 필요에서부터 “항상 젊은이로 남아 있으려는” 강박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적 한계가 없는 자신의 성(性)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부터 모든 기술적인 새로움들 (실제로 더 부드러운 시대로부터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에 열려 있는 것까지.

  자식들이 부족하지 않게 되고, 계속 그들 곁에서 함께 있으려 하는 어른들의 열망이 너무 강하다. 오늘날 종교적 체험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어른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위한 공간이 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 복음, 기도 그리고 사심 없는 사랑이 아빠와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어떤 아들이나 딸이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렵게 된다. 자녀들은 문화적인 뿌리의 의미를 알기 위해 최대한으로 준비된다. 덧붙여 말하면, 파리 노틀담 주교좌 성당 화재 이후, 이미 극도로 세속화되어 있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갑작스럽게 그들 고유의 가톨릭을 재발견한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더 적절하게 말하면, 그들 고유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가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을 유감스러워 하고 되찾는 것에 동의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이러한 세대 간의 위기는 적절하게 감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우리가 복음 선포를 위한 창조성을, 우리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또 우리의 틀 잡히지 않은 문명 안에서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부족했고,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모든 것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위기는 혼자서 해결될 것이고 실패들과 일상의 다툼은 국가와 세계적인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종교성 안에서 적절한 답을 찾게 하고, 오늘날 거의 항상 빈약하기 짝이 없는 소명들을 다시 자라나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비밀스럽게 생각하는 존경할 만한 인물들이 – 교회 안에도 – 적지 않다. 그러나 “주어진 질문은 경제-금융 권력의 힘과 기술-과학의 경이로운 발명품들의 “매혹”으로 언제나 더 드러나는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여전히 예수의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13쪽)

  교회가 일상의 안주함과 그 안에서 지니고 있던 것들의 현행 유지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를 흔들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노력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고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는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현재 교종에 의해 불이 붙은 수많은 지지자들은, 교종의 메시지 안에서 어른들이 비록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젊음을 유지하기 원하는 그런 영속적인 청년기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열망을 받아들이는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교종은 그의 담화들에서, 젊은이들은 풀어야할 과제라고 말하는 “청춘의 연약함” 이라고 퍼져 있는 그릇된 주제 대신에, 어느 사회든지 자신의 미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솟아오른 존재가 바로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교회는 분명히 사회의 여러 다른 구성 요소들과 함께, 목적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와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교회가 젊은이들을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닐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15세에서 35세 사이에 속한 사람들을 젊은이로 본다면, 젊은이들과 신앙이 항상 더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음을 말해주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연구들이 수없이 많다. 한 예로, 2011년 12월에 이미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이렇게 고찰한 바 있다: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신앙이 없는 이들도, 교회 안에서 규칙적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항상 더 늙어가고 그들의 수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르만도 마태오는 1981년생부터 1996년생까지를 – 소위 밀레니엄 세대Millennials라고 불리는 – 서방에서 믿음이 없는 첫 번째 세대로 분류한다.3) 이 표현은 더 이상 개개인이 아니고 또 그들 중 극소수도 아닌 전체 세대가 신앙의 실천에 무관심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젊은이들은, 시노드가 확인한 바와 같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그들 자신만의 긴급함을 안고 유아기와 어린 시절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깨달았던 것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 복음의 하느님 없이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교회에 대한 체험 없이 사는 것을 배우게 된다.

  가정에 쏟아 부었던 앞선 시노드에서, 사회적으로 이혼했거나 재혼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어주는 것을 허용하는 가능성에 대하여, 불확실한 결론과 함께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는 오늘날 밀레니엄 세대가 가톨릭의 혼인 규범에 어떤 호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특별히, 과거에 이미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무신론 증가를 강조한다. 1981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여성들은 – 일반적으로 말해서 – 개인 기도의 성향 외에는, 가톨릭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동시대의 젊은 남성들에 비해서 본질적인 차이를 거의 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본당이나 주일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일과 봉사, 교리교육 등의 기본적인 모든 일들이 여성들, 평신도들 또는 수도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엄마들, 할머니들, 결혼하지 않은 이모들, 누이들 등이 있는 가정 안에서 그들의 아기들이나 혹은 다른 남녀 아이들에게, 첫 번째로 필수적인 복음화를 실현하면서 신앙을 전달하는 데에 유익하다. 지금의 변화에는 분명히 젊은이들이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 본당과 그 공동체의 생활을 도와줄 수 있는 그들의 가능성을 재빨리 줄여나가는 것이 영향을 주었다.

  가정 그리스도교, 다시 말해서 전쟁 이후 세대로 특징지어진 신앙의 세대 간 전달은 감소했다. 이것은 종교를 거스르는 결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천천히 미끄러지고 주변으로 밀려난 구체적인 신앙 체험 때문이다. 가정들 안에서 우리의 실존에 대한 불확실성과 같은, 인간 존재에 대한 큰 물음들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접근할 수 있는 토론이나 진지함, 성경 봉독, 기도를 위한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참으로 생각되는 것은 거의 오직 사회-경제적 위치, 신분증이 있지만 항상 그에 알맞은 존재가 되는 짧은 코스 그리고 마침내는 스포츠의 열혈팬이 되는 것이다.”(34쪽) 주일은 이제 더 이상 미사를 드려야 하는 날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신앙의 결과들을 염려하기 이전에, 신앙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의 두 교종이 연결되어 서명한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에서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는 분, 곧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현현이실 뿐만 아니라 믿기 위해서 우리가 일치되어야 할 분이십니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18항)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오늘날 어른이 된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좋은 시민과 좋은 부모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서 공동선을 찾기 위한 그리고 자녀 교육에 부과된 일들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의 규범들을 따르며 8퍼센트 정도가 활동을 유지하지만, 정작 예수와 그의 복음의 깊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여되어 있다. 그는 신앙보다는 신앙의 결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다시 말해서 교리의 일관성, 윤리 규범들에 대한 복종 그리고 교회 생활을 유지하는 것 등이다. 젊은이들에 관한 시노드의 ‘준비문서’Documento preparatorio는 이렇게 말했다: “존경할만한 신자들은 분명한 인간성을 지니고, 교회에 굳건히 속해 있으며, 드러나는 영적 수준을 갖추고, 교육적인 열정 그리고 깊은 식별의 능력을 지니고 봉사합니다.”(45쪽 인용)

  여기서 ‘영적’spirituale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싶다: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오늘날 굳건한 종교적 영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이들이 영성을 탐구하는 데에 매우 열정적인데, 사실 그들이 여러 종류의 영성을 찾지만 교회가 제공하는 영성은 그들이 살고 있는 문제들과는 너무 멀어 보인다. 그들에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나의 예외로 보이는데, 이미 말한 것처럼, 그는 교종 직무 초기부터 젊은이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넓은 애정을 계속해서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이러한 동의가 교종이 으뜸으로 있는 교회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나오는 참된 그리스도교의 삶의 요구들은, 어른들의 믿을만한 증언에서도, 또 교회의 대다수가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장소들에서 보여주기 위해 찾는 것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젊은이들은 과학의 지대한 발전으로부터 그리고 서방 민족 관습들의 뿌리부터 오는 변화로부터, 또 가톨릭의 성(性)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오는, 자신들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교회 안에서, 신학 안에서 그리고 공식 교리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다. 성(性)에 대한 관념은 개인의 고유한 인성의 균형 잡힌 발전에 들어가야 할 가장 인간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는데, 교회는 이 부분에 있어서 젊은이들에게 적합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

  어른 세계로부터의 배제

  그러나 이것이 오직 교회의 문제로만 다루어질 수는 없다. 저자의 견해로는, 이것이 젊은이들이 가진 불신의 두 번째 양상이다. 어른들은 사실 미래를 향한 혹은 정확히 말해서 미래가 전망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실제 현실을 향하여 깊은 불신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이끌어 들여야 할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그 결과는 자녀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여전히 자녀로, 아기로 남아 있기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 무리의 한 부분으로, 젊은이의 세상에 속해 있고 “인간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틀을 젊어지게 하고 쇄신하려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목적에 포함되는”(46쪽) 특별함을 알아차리고 발전시키는 것이 항상 더 어렵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일반적인 견해이고, 예를 들어 수많은 본당들, 거의 자발적인 단체들 그리고 자주 여러 운동들 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들만 다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사고가 합리적이라고 할 만하다: “세상적으로 큰 가능성들이 있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끝없이 놓여있는 벤치 같은 곳에서 계속 머무르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같은 쪽)

  의심의 여지없이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에게 막혀 있는 많은 문들 혹은 그들 가까이에서 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어른들이 이미 자리잡은 많은 공간들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성장하고 소통하는데 도움을 주는 문화적 혹은 영적 갈망들을 향한 새로운 깊은 곳들을 재발견하거나 제공했다. 이것을 잘 볼 수 있는 몇 가지 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젊은이들에게는 출세와 돈을 훨씬 능가하는 열망인, ‘우정의 가치’il valore dell’amicizia가 있다. 이것은 상호 소통의 열망으로, 물건을 교환하는 곳인 시장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것은 확인되는 것,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슴속에서 더 살아 있는 것이 서로 교환된다. “선천적으로 디지털화되어 있다는 것은 또한 “공동체의 좋은 관행들의”4) 인간적인 연결망들의 진정한 촉진제의 옷들을 물려받는 그런 기회가 되는 것이다.”(152쪽 이하)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특징짓는 두 번째 요소는 ‘음악을 향한 사랑’l’amore per la musica이다. 음악은 창조와 자유의 공간이며 오직 소득과 성장의 목표 아래서만 작동한다고 여기는 어른들의 효율적인 강박관념들을 거스르는 공간이다. 저자는, 이 음악을 향한 사랑을 떠올리면서, 미국 흑인들의 ‘영가들’spirituals로부터 그의 시대에 완결된 고생과의 유사성을 제안한다. 비록 하느님의 존재가 의미를 지닐지라도 멀리 있는 하느님에게 익명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대상은 축제의 하느님일 수가 없다.

  또한 새롭게 일어나는 ‘독서를 향한 사랑’amore per la lettura도 눈여겨볼 수 있는데, 이것은 경제생활의 인위적이고 항상 더 빨라지는 리듬들에 대한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의 요리이며, 전자기술뿐만 아니라 정신이 그보다 더 낮아질 수 없는 생물학적인 모든 감각 안에서의 리듬들과 인간관계의 보존에 기반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5)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젊은이들과 소년들이 여러 자연 환경의 파괴적인 힘과 겨루기 위하여 동시대의 혼합된 도구들을 (공연들에 사용하기 위한 전자제품, 확성기, 비행기들 등등) 서로 사용하면서 왁자지껄하게 표현하는, ‘자연을 향한’per la natura 청소년들의 큰 ‘감수성’sensibilità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형태의 폭력, 전쟁, 배제, 소외, 구매자들에 대한 어떠한 검증도 없이 여러 국가들에서 팔려나가는 무기 매매와 확산 등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는 강한 ‘정의감’senso della giustizia이 있다. 생태적인 임무 또한 수많은 형태의 현대 경제와 천연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에 처한 자연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폭력을 거스르는 투쟁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감수성의 이런 형태와 관심들은 폭넓게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융화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져야 한다. 비록 젊은이들이 그 신앙과 명백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자라났다 하더라도 그렇다.

  인생이란 배를 타고 가는 것

  책을 이끌어가는 맥락은 이렇다. “어른들이 어른들, 젊은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는 젊은이들을 만들 수 없다.”(159쪽)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대화는 사회학적인 그것과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곧바로 어른들의 이야기가 공허하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복음과 기도 그리고 어른들의 내면 안에 있는 궁극적인 물음들을 향한 개인적인 관심의 결핍에 달려 있는데, 이것은 아빠, 엄마로부터 시작하여, 언제나 더 자주 ‘탈그리스도인들’postcristiani로 드러나고, 비록 종교와의 전쟁은 없을지라도, 그것에 대한 어떠한 실제적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은 성숙한 세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어른스러움’generatività의 이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젊은이의 모습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유지하는 것이 지상에서 행복해지는 확실한 접근인 것처럼 칭송한다. 여기서 어른들에 의해 젊음을 향한 사랑이 솟아 나와서 퍼지게 되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젊게 사는 삶을 단순하게 불가능하도록 만든다.”(160쪽)

  어른들 안에 뿌리내린 진짜 신화는 오직 젊음이 존재할 때까지만 삶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형성된다. 어른 세대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 다시 말해서 인생의 배를 타고 가는 것이고, 이것이 지금의 상황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어떤 규칙이 실제적으로 조부모 세대에 의해 이행되지만, 그들의 모든 실제 선한 의도와 반박할 수 없는 임무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의 과제는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문화, 다수가 소통하는 세상 혹은 산업화된 세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어른들의 손에 굳게 달려 있고, 모든 한계를 넘어서리라고 믿는 젊음의 신기루로부터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태리의 입법은,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이 사회 안에서 적합한 자리를 발견할 가능성에는 무겁게 페널티를 주면서, 한편으로 노인들을 향한 폭넓은 애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 어떤 정부도 공약들과 많은 계획들을 진행해 가면서, 실제적으로 흐름을 바꾸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는, 그의 흠과 결핍 – 불행하게도 이것은 수많은 교회 구성원들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방향으로 공공의식들을 이끌어 가면서, 교육을 통하여 중요한 규칙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줄어든 자녀의 숫자는 – 한 집에 하나 혹은 두 명 – 나중에 자녀들을 모든 희망과 두려움들에 대한 집중으로 이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가난에 직면해야만 하는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어느 이태리 사회학자6)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관심을 기울이기도 전에 아기는 걱정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글자 그대로, 자녀가 가정의 궤도로부터 벗어나도 된다고 판단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즉 거의 … 50세 가까이 될 때까지 자녀에게 정해진 모든 공간들은 ‘이미 가득 차 있다’occupare prima는 말이다. 이렇게 앞서 있는 걱정은 돈으로 상징되는, 안락한 삶benessere (well-being)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기 때문에, 자녀가 가난해지면 안 되고, 모든 시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위기의 관점에서, 여러 연구들은 이태리에서의 사회적 신분 상승이 멈추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처럼 보이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희생과 의무를 다하는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깨달음을 가르칠 줄 모른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녀를 지키려는 열망으로, 부모들은, 만일 교사들이 자녀들에게 “괴로움들”을 주려고 한다면, 교사들을 – 교육을 위한 역할로 자연스럽게 동맹하고 있는 그들을 – 거슬러서, 드러나게 (가끔은 공격적으로) 떼를 지어 몰려드는 부모들이 없지 않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모범과 가르침의 빛으로 새로운 차원들을 경험하는 신자에게, 필수적인 인간적 가치들이 결여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어른이 인간 존재에 고유한 윤리와 인간의 약함, 늙어감의 진리를 지속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자녀들에게도 삶의 법칙들과 절기들로 평화를 만들어 가고, 생명을 잉태하고 삶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숙고하는 감각 체계 안에서 살아갈 때 한결같이 매력적인 모든 것들을 배우는 일은 필수적이다.

  다양한 세대들이 각자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사랑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다른 연령들의 독특한 삶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삶의 고유한 순간들의 의미를 회복해 나가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삶에 대한 사랑과 인간 조건에 대한 기대를 되찾는 것은 하느님 자신에 관한 계획을 되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보기 위하여 걸어가는 여정임을 알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소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만 연관된 임무가 아니다: 오직 부모와 어른들이 먼저 그들의 자녀 출산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증거의 의미를 되찾을 줄 알 때에,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대륙에서 더 빛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시노드의 작업들에 관련된 모든 문헌들에 대해서는, Una Chiesa che frequenta il futuro. Tutti I documenti del Sinodo ordinario 2018 “I giovani, la fede e il discernimento vocazionale”, Milano, Àncora, 2018을 참고하라. 프란치스코 교종이 시노드 여정을 마무리하기 원했던 문헌들에 대해서는, Esortazione apostolica postsinodale “Christus vivit” del Santo Padre Francesco ai giovani e a tuto il popolo di Dio. Con una guida alla lettura di Antonio Spadaro S.I., Milano, Solferino, 2019를 참고하라.
2) A. MATTEO, Tutti giovani, nessun giovane. Le attese disattese della prima generazione incredula, Milano, Piemme, 2018 참조. 본문에서 인용된 페이지는 이 책의 것이다.
3) 10년 전에 아르만도 마태오가 <믿음이 없는 첫 세대. 젊은이들과 신앙 간의 어려운 관계> La prima generazione incredula. Il difficile rapporto tra i giovani e la fede (Soveria Mannelli〔Cz〕,Rubbettino, 2010) 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고, 2017년에 보완하여 다시 출판되었다.
4) F. STOPPA, Istituire la vita. Come riconsegnare le istituzioni alla comunità, Milano, Vita e Pensiero, 2014, 34.
5) L. ZOJA, “La nuova generazione fragile e critica”, in Vita e Pensiero 100 (2017) 148.
6) Marina D’Amato, p.164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