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살바도르 순교 예수회원들의 증거

참사 30주년을 추모하며

LA TESTIMONIANZA DEI GESUITI
ASSASSINATI A SAN SALVADOR

© La Civiltà Cattolica Q. 4065 (2 Nov 2019 IV), 277-287

마르틴 마이어 Martin Maier 신부 (예수회)
이창욱 펠릭스 (바티칸 뉴스 번역가) 옮김

  “오늘날 예수의 벗이 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 즉 신앙의수호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에 종사함을 의미한다.”
– 예수회 제32차 총회 교령 12

  어떤 범죄는 역사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1989년 11월 16일 산살바도르에서 6명의 예수회원과 2명의여인이 피살된 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그런 성격을 지닌다. 사건이 벌어진 날 불과 며칠 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냉전 종식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에 발발한 내전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체전쟁(Ersatzkrieg)1)으로, 다시 말해 동서간 가장 일반적인 갈등의 한 단면이었다. 그해 11월 11일부터 좌익 게릴라가 전면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하였고 수도 산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점령하였다. 포위됐다고 여긴 정부군은 시내 전체를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11월 15일 저녁 전군 지휘관들이 모여 반군 ‘수뇌부’가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특수 유격대가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호세 시메온 카냐스”(José Simeón Cañas) 중앙아메리카 대학교(Universitad Centroamericana: 이하 UCA)에 급파됐다. 군인들은 신부들을 사제관 바깥으로 끌어내어 풀밭에 얼굴을 묻고 엎드리게했고, 근접 사격으로 그들을 살해했다. 이 대학 학장인 이냐시오 에야쿠리아(Ignacio Ellacuría)와 함께 세군도 몬테스(Segundo Montes), 이냐시오 마르틴-바로(Ignacio Martín-Baró), 아만도 로페스(Amando López), 후안 라몬 모레노(Juan Ramón Moreno), 호아킨 로페스 이 로페스(Joaquín López y López) 신부가 총살됐다. 군인들은 학살의 증인을 남겨두지말라는 명령 때문에, 요리사였던 엘바 라모스(Elba Ramos)와 그녀의 딸 셀리나(Celina)도 사살했다.

  대학 교수들의 두개골에서 새어 나온 뇌 덩어리는 끔직한 상징이 되었는데, 그 의도는 정신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학살의 실행자들과 그들을 보낸 자들은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싫어하는 생각까지 없앴다고 재차 믿게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6명의 예수회원과 2명의 여성이 살해되었는가? 이 질문에 가장 직접적인 대답은 대학교성당 내부에 붙인 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5년 제32차 총회가 선언한 신원에 따라, 현대세계에서 예수회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거기에 나와 있다. “오늘날 예수의 벗이 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 즉 신앙의 수호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에 종사함을 의미한다.”3)

  예수회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선택과 함께 가장 시급한 현실의 도전으로 온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에 답변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예수회 총회는 예언적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정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귀 또한 현판에 새겨져 있다.

  예수회원 살해 사건 재판 과정

  예수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살인의 경우 제일 먼저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우선 군부정권은 범죄의 책임을 반군에게덮어 씌우려 했다. 하지만 이내 거짓의 모래성은 무너졌다. 처음에 군부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특히 미국 대사관 측도 사안을 은폐하려는 시도 때문에 스캔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 미국의 어느 군사 자문위원은 범죄 계획에 대해 이미알고 있었지만 그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한 엘살바도르 장교는 반군에 대항한 전쟁 기간 중 자신이 명령했던 이 살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고 자인했다. 특히 이 범죄에 대한 미국 여론의 도덕적분노는 결과적으로 미 정부의 엘살바도르 정책 변화를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90년 4월 유엔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유엔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Javier Pérez de Cuéllar)를 대표하여 페루 출신 알바로 데 소토(Álvaro de Soto)이 협상을 이끌었다. 나중에 데 소토 유엔 특사는 협상의성공을 위해선 예수회원들 암살 사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예수회원들의 죽음은 도덕적 분노를촉발시켰고, 엘살바도르 군부는 이에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서 이 사건을 인정하도록 압박하지 않고서는 항구한 평화에 도달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살해사건 조사와 평화협정 과정은 바흐식 ‘푸가의 기법’처럼 서로얽혀 있었다. 하늘에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4) 이 협상은 1992년 1월 평화협정의 서명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적용은 제한적이었다.

  1991년 9월, 이 국가 역사상 최초로 8명의 병사와 장교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선 재판이 산살바도르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오직 2명만이 형량을 선고 받았고 그 후 1993년 봄에 일반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는 동안 군부장성들이 학살 음모에 연루되었음이 확인되었지만, 범죄 사실은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엘살바도르에서소송 재판이 다시 열리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산되자, 2008년 11월 스페인 인권위원회(Apdhe)는 마드리드 국가 재판소와 함께 14명의 고위 군장성을 상대로 고발장을 접수했다. 엘로이 벨라스코 판사는 국제형법에 따라,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의 경우에 효력을 갖는 보편관할권에 관한 권한을 발휘했다. 6명의 예수회원 중 5명은 스페인 출신이었다.

  적어도 스페인에서는 형사소송 재판까지 갔다. 2017년 엘살바도르 전 공안부 차관 이노센테 오를란도 몬타노가 미국에서 스페인 사법부로 신병이 인도됐다. 아직 소송 중이던 2019년 5월, 검찰은 살해 명령을 내린 자들 중 한 명으로밝혀진 엘살바도르 전 육군 대령에게 150년의 수감을 구형했다.

  엘살바도르는 아직도 판결과 배상을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국민은 나름대로의 기억과 배상의 형태를갖고 있다. 내전 이후 피난민 정착촌은 피살된 예수회원들의 이름을 붙였다. 많은 성당과 오두막집에 그들의 초상화가걸렸다. 그들이 살해된 장소에는 오늘도 장미꽃이 피어나 있다. 이 장미정원처럼, 대학 성당 내에 마련된 그들의 무덤도 순례지가 되었다. 매년 11월 15일과 16일 밤, 대학 캠퍼스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순교자를 위해 노래하고 기도하며 기념한다. 참사 3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문

  피살된 6명의 예수회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사는 이냐시오 에야쿠리아(Ignacio Ellacuría) 학장 신부였다. 그는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포르투갈레테에서 1930년 11월 9일 태어났다. 1947년에 로욜라 소재 예수회의 수련소에입회했고 1948년에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의 산타테클라(Santa Tecla)에 최근 설립된 수련소에서 수련기를 보내도록 파견됐다. 1949년에서 1955년까지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Quito)에서 고전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 다음 산살바도르의 통합교구 신학교에서 3년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1958년에서 1962년까지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 기간을 다시 회상해봤을 때, 칼 라너의 수업과 세미나가 그의 신학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했다고 강조할 수 있다.5) 1962년 6월 26일 바오로 루쉬(Paulus Rusch)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같은 해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국립대학(Universidad Complutense)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고 바스크Basque 출신 철학자인 하비에르 수비리(Xavier Zubiri)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6)

  1967년 에야쿠리아 신부는 엘살바도르로 돌아왔고 UCA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74년 혼 소브리노(Jon Sobrino) 신부와 함께 신학연구센터(Centro de Reflexión Teológica)를 설립했다. 나중에 그 센터에서 로메로 대주교 센터(Centro Monseñor Romero)와 로메로 신학부가 생겼다.7) 1976년 에야쿠리아가『중앙아메리카 연구』(Estudios Centroamericano: ECA)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 이 학술지는 중앙아메리카 정치·사회·경제·문화 문제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간행물이 되었다. 1979년 UCA의 학장으로 임명되자 그에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에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8)

  대학 학장으로서 그는 계속해서 공개 토론에 참여했고, 더 많은 사회정의와 인권존중을 요구했다. 80년대 초 아르투로 리베라 이 다마스 대주교와 함께 내전에 평화적 대화의 물꼬를 틔우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가장 해박한 해방신학자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의 활동을 성가시게 여겼던 소수의 독재정치 세력은 더더욱 격렬하게 그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에야쿠리아 신부는 엘살바도르 국민 대다수의 불행 속에서 학술활동이 자신에게만 머물까 우려하여 더 이상 연구를계속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국민의 비참한 불행은 복수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UCA는 더 공정한 사회질서에 도달하려는 목표를 갖고 사회개혁을 위해 투신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때문에 그는 갈수록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1976년에서 1989년까지 UCA는 16차례나 폭탄 공격을 받았다. 네 차례 폭발로 인쇄소가 파괴되었는데, 그 곳에서 대학 출판 서적들과 잡지 여덟 종이 인쇄되고 있었다. 인쇄소를 공격한 것에 대해, 에야쿠리아 신부는 프랑코 독재정권의검열을 받는 동안 말했던 어느 스페인 시인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내가 보는 것을 쓰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쓴 글을사람들이 보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글로 쓰고, 분석하며, 사회-정치적인 현실을 대학이 마주한 도전으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그 교수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참된 이유다. UCA의 인권연구소장이자 사회학자인 세군도 몬테스(Segundo Montes) 신부는내전 피난민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심리학의 권위 있는 학자인 이냐시오 마르틴-바로(Ignacio Martín-Baró) 신부는 어린이에 대한 전쟁의 결과를 평가했다. 아만도 로페스(Amando López) 신부와 후안 라몬 모레노(Juan Ramón Moreno) 신부는 해방신학의 노선에 따른 신학을 가르쳤고 교회 기초공동체와 긴밀하게 결부되었다. 호아킨 로페스 이로페스(Joaquín López y López) 신부는 대학 설립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살해 당시 ‘신앙과 기쁨(Fe y Alegría)’이라는학술운동을 주도했다.

  UCA는 상류층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라틴아메리카의 고급 교육기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했다. 그런 교육기관은 소수 독재정치가의 자녀들만 받아들였다. 담벽으로 둘러싸인 부유층의 호화 저택이 외부 환경과 동떨어져 마치 비참한 사회적 불행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행복의 섬인 것처럼, UCA도 순수 학문만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섬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아탑처럼 자기 안에 갇힌 대학은 불가피하게 불의한 사회구조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할 뿐이다. 진정대학다운 모습으로 UCA는 사회의 공정한 질서를 바라는 사회변화를 위해 투신해야 했다.

  이 모든 면에서, 이냐시오 에야쿠리아 신부는 대학이 지성과 이성을 방법론적으로 키워나가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사회변화에 끼치는 영향력을 느끼고 싶어하는 대학은 다른 대학보다 더 학술적인 엄밀함을 필요로 한다고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하여 말하곤 하였다. 1989년 마드리드의 코밀라스 대학에서 한강연에서, 그는 엘살바도르 학생 몇 명이 미국 부통령이 대학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향해 계란을 투척했음을 용기 있게말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계란을 던질 것이 아니라 통계자료를 던져야 했다고 반론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에야쿠리아 신부는 UCA의 학자는 이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데이터에 입각해서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학술 활동은 국가 현실에서 출발하고 그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했다.

  UCA도 다른 모든 대학들처럼 연구와 더불어 근본적인 가르침의 역할을 했다. 구체적으로 UCA는 9,000명 이상의 학생과 300명 이상의 교수가 있다. 이처럼 대학은 젊은이가 사회변화의 주역이 되도록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전문가 양성 외에도, 윤리적 가치와 그리스도교적 가치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난한 이에 대한 선택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되지만, 교수들의 학술활동의 실천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이냐시오 에야쿠리아 신부의 말을인용해보자. “대학은 지식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지식이 되고, 목소리가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가난한 이들 안에 지성적으로 육화되어야 합니다. (…)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우리는 혹독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 만일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의 대학이 엘살바도르 국민의 고통과 죽음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면, 대학의 임무를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고 대학의 그리스도교적인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했을 겁니다. 거짓, 불의와 억압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대학은 박해 받는 대학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9)

  교회역사적 차원

  수도회와 교회의 역사도 범죄의 역사적 차원 안에 포함된다. 신앙과 정의를 위한 근본적인 선택을 통해, 예수회는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Medellín)에서 열린 주교회의 동안 라틴아메리카 주교들이 결정한 새로운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라틴아메리카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는 한편, 복수를 부르짖으며 아대륙(亞大陸 subcontinent, 중남아메리카)에서 교회에 대해 확고한 도전을 살고 있던 대다수 사람의 비참한 불행을 인식했다. 바로 이점에서 주교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이끌어냈고, 이를 통해 정의와 해방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에서 투신한다는 근본적인 결정을 표현했다.

  동시에 신앙과 정의가 새로운 상호관계를 맺게 된 ‘해방신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교적 구원은 더 이상 저 너머 세상과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관심을 두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틴아메리카 교회사 안에 전환점이 된 역사가 스며들었다. 수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 교회는, 부분적으로 소수의 예외가 있지만, 권력자와 부자를 너그럽게 봐준다고 여겨졌다. 메데인 문헌을 통해 이러한 묵인의 태도가 중단되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수 독재정치 집단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까지 위협했고, 이렇게 분쟁이시작됐다. 하느님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구조와 연결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처럼 부적격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치명적인 표식으로 여겨진다.

  엘살바도르에서 이러한 분쟁은 특히 강렬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이 나라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간직했지만, 그 대륙의 모든 긴장과 모순을 떠안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엘살바도르는 커피, 목화, 사탕수수를 수출하는농업 국가였고, ‘14개 유력 가문’이 사실상 지배했다. 1932년 군대는 농민과 농업종사자들의 저항 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악명 높은 ‘마탄사’(matanza, 대학살)에서 불과 몇 주 동안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9년까지 군사독재정권이 국가를 다스렸는데, 그들은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의 얼굴을 유지하느라 노심초사했다. 60년대 산업화의 물결 과정에서 노동조합, 개혁주의자들의 반대 정당과 학생 조직이 결성되어 국가 개혁과 사회 변화를 요구했다.

  70년대 초에는 거의 경작지 절반이 1.5%에 불과한 지주들의 손에 있었고, 농민의 87%가 겨우 국토의 20%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사회 인구의 증가를 비롯해 갈수록 혹독해지는 정부의 억압은 1981년에 급기야 파라분도 마르티 인민해방전선(Frente Farabundo Martí para la Liberacióon Nacional: 이하 FMLN)와 군부 간 내전 발발을 야기했다. 미국은 이 전쟁을 더 확장된 동서간 분쟁의 맥락으로 되돌려, 이념적 대체전쟁(Ersatzkrieg)으로 호도했다. 미국은 30억 달러 이상의자금을 대며 엘살바도르 군부를 지원했다. 1994년에 사망한 아르투로 리베라 이 다마스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난했다. “미국은 무기를 공급하고 우리는 죽은 이들을 공급한다.”

  정치 억압과 결부되어, 60년대와 80년대 엘살바도르에서는 교회의 진짜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1000여 명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 18명의 사제, 4명의 수녀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희생됐다. 대지주의 명령으로 2명의 동반자와 함께, 1977년에 피살된 첫 번째 사제는 예수회원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였다. 희생자 3명의 시복 절차는 이미 마무리 단계에 있다. 그란데 신부는 아길라레스 시골마을에서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해방의 메시지로 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강론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 높이 매달아놓은 해먹에 누워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루틸로 그란데 신부 살해사건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소심하고 호교론적인 교회의 사람에서 용기 있는 예언자, 가난한 이의 보호자로 변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10) 이러한 변화는 예수회원들 앞에서 취한 그의 변화된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사실 예전에 그가 그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3년간의 주교직 수행 기간 동안 이냐시오 에야쿠리아 신부와 혼 소브리노 신부가 그의 가장 밀접한 조언자가 되었다.11)

  현재 상황

  일반적으로 엘살바도르는 단지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나 혹은 여섯 명의 예수회원과 두 명의 여성이 살해된 사례처럼, 예외적인 범죄 무대가 될 때만 매스컴에 언급된다. 엘살바도르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평화협정에 서명한 지 28년이 지났어도, 국가 내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없다. 내전에서 참된 평화로, 10년간의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극단적인 사회 양극화에서 민족의 화해로 넘어가는 어렵고 민감한 과정에 있다. 평화협정에서 요구한 바와 같이 내전 시기 최악의 범죄들을 재조사할 가능성은 1993년에 합의했던 성급한 일반사면으로 그 동력을 잃어버렸다.

  특히 폭력에 관한 통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살인의 피해자는 적어도 내전 기간 동안 살해당한 숫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다. 2018년에만 3,340명이 살해됐다. 평균적으로 인구 10만 명당 91명이 폭력범죄의피해자가 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비율 중 하나다. 이 숫자 뒤에는 소위 ‘마라스’Maras12)라고 부르는청년 갱단의 문제가 있다. 전체 살인의 3분의 2가 이들의 짓으로 본다. 지금까지 군부는 ‘철권’(pugno di ferro)으로, 나중에는 ‘철퇴’(pugno d’acciaio)로 폭력 문제를 저지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언제나 극단적인 사회모순과 젊은이들을 위한 전망 부족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미국을 향한 이민은 많은 이들이 엘살바도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 수백 명이 북쪽으로 위험하고 값비싼 여행을 감행한다. 2019년 6월에 한 장의 사진이 깊은 울림을 일으키며 그와 같은 상황과 결부된 비극을 세계여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사진은 오스카 마르티네스Óscar Martíez와 그의 2살 된 딸 발레리아Valeria가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강인 리오 브라보(Rio Bravo)13)에 익사한 채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시신을 보여줬다. 미국에는 250만 명의 엘살바도르인이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으로 살고 있는데, 그들은 2018년에 그들의 가족에게 54억 달러를 보냈다. 이는 국내 총생산액의 21.3%에 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 정부의 위협을 받은 엘살바도르인 100만 명의 추방도 자국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2019년 2월 2일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아주 부유한 가정 태생인 30대의 나이브 부켈레(Nayib Bukele)가 엘살바도르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53%라는 압도적인 다수로 첫 선거에서 승리했다. 우파인 아레나 정당은 1989년에서 2009년까지 중앙아메리카 국가를 통치했고, 그 후 좌파인 FMLN에서 나온 대통령으로 교체되었다. 부켈레는 선거 공약에서부패의 종식, 청년 갱단의 폭력 극복과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공약을 어떤 식으로 실현시킬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국회는 현재 정치적 연립에 기대야 한다. 그의 통치 방식은 권위적이다. 청년 갱단 진압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지에서 끌어냈고 미국의 군사적 도움도 고려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과거의 슬픈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부켈레는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올것이라는 희망은 아주 희박해 보인다.

  기억의 양면적 가치

  2천 년 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논쟁적인 방식으로 예언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의 양면적 가치를 강조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29-31). 살해당한 UCA 예수회원에 대한 기념은 오늘날 세계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행복을 누리는 국가에서 정의의 문제를망각하고 제거하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자극제를 형성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중해에서 익사한 난민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엄중히 비판했던 “무관심의 세계화”를 극복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해, 위대한 유대인 작가이자 쇼아(Shoah, 대학살)14)의 증인인 루마니아 출신 미국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이연설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항상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고, 신앙의 반대는 교만이 아니라 무관심이며,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무관심은 과정의 시작이 아니라 과정의 끝입니다.”15)

  아도르노Adorno16)에 따르면, 불의한 사건을 잊는 것은 희생자들과 “살해당한 이들에게 (…) 우리의 무능력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사항, 곧 기억을 빼앗는 것”17)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쓸모 없는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은 사람들의 실제 고통에 민감해질 때, 그리고 그 기억에서 불의한 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실천이 샘솟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억이 된다.


1) 역주: Ersatzkrieg, 독일어 Ersatz는 대신하다는 뜻으로 체제를 대체하려고 봉기한 대안전쟁을 뜻한다. 하지만 정규군을 대신하여 시민이 모여 결성된 반군을 의미할 수도 있다.
2) 범죄에 대한 더 상세한 자료는 다음을 참조하라. M. Doggett, Death Foretold: The Jesuit Murders in El Salvador [예고된 죽음. 엘살바도르에서 살해된 예수회원들], Washington,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93.
3) 『예수회 제32차 총회교령』Decreti della Congregazione Generale XXXII della Compagnia di Gesù (1974-1975), (Roma, 1977), 제12조 2항.
4) A. de Soto, «Prólogo»(서론), in T. Whitfield, 「값을 치르며. 이냐시오 에야쿠리아와 엘살바도르 예수회원들의 암살(Pagando el Precio: Ignacio Ellacuría y el asesinato de los jesuitas en El Salvador)」, San Salvador, UCA, 1998, 13 참조.
5) M. Maier, «Karl Rahners Einflußauf das theologische Denken Ignacio Ellacurís(이냐시오 에야쿠리아의 신학사상에 끼친 칼 라너의 영향)», in Zeitschrift für Katholische Theologie(가톨릭신학 잡지) 126 (2004) 83-109 참조.
6) 에야쿠리아 신부의 철학 저서들은 유작으로 발간됐다. I. Ellacurí, 「철학서」(Escritos filosóficos), 3 voll., San Salvador, UCA, 1996-2001 참조.
7) 독일어로 번역된 에야쿠리아 신부의 신학 선집(選集)에 대해서는 다음 저서를 참조하라. I. Ellacurí,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 예언적인 그리스도교를 위하여」(Eine Kirche der Armen. Für ein prophetisches Christentum), Freiburg, Herder, 2011.
8)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저서를 참조하라. I. Ellacuría, 「대학 저술」(Escritos Universitarios, San Salvador), UCA, 1999.
9) 같은 곳, 226 이하.
10) M. Maier, 「오스카 로메로 – 가난한 이의 교회 예언자」(Oscar Romero – Prophet einer Kirche der Armen), Freiburg, Herder, 2015 참조.
11) 같은 저자, 「로메로 대주교와 해방신학」(Monseñr Romero y la teologí de la liberació), in Revista Latinoamericana de Teología(라틴아메리카 신학잡지) 99 (2016) 201-214 참조.
12) 역주: maras – 내전 당시 미국으로 이민한 엘살바도르인들의 조직폭력 단체나 갱 조직.
13) 역주: Rio Bravo – 멕시코에서는 리오 브라보라 부르고 미국에서는 리오그란데Rio Grande라고 부름
14) 역주: Shoah – 쇼아는 히브리어로 재앙을 의미하며, 유대인 학살 곧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말한다
15) O. Schwencke (ed.), 「현재에 대한 기억. 록쿰에 있었던 엘리 위젤」(Erinnerung als Gegenwart. Elie Wiesel in Loccum). Loccumer Protokolle 25 (1986), 레흐부르크 록쿰(Rehburg-Loccum), Evangelische Akademie Loccum(록쿰 복음 학술회), 1987, 157.
16) 역주: 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03-69),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음악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원,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2세대 학자이다.
17) Th. W. Adorno, 「아우슈비츠에서 얻은 교훈」(Erziehung nach Auschwitz), in Erziehung zur Mündigkeit(성년을 위한 교육), Frankfurt, Suhrkamp, 198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