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살(助力自殺): 풀어야 할 정치적 매듭

IL SUICIDIO ASSISTITO: un nodo politico da sciogliere

© La Civiltà Cattolica Q. 4065 (2 Nov 2019 IV), 243 – 252
프란체스코 오케타 Francesco Occhetta 신부 (예수회)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광주대교구) 옮김

  2019년 9월 25일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자살교사·방조죄(自殺敎唆·傍助罪)에 관한 형법 제580조 “타인이 자기 생명을 끝내는 결심을 실행하도록 도운 사람은 조건 없이 처벌한다”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1). 생명 종결 논쟁을 재점화시킨 이 판결은 각 정당의 이념적 충돌로 인해 아직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의회의 대리 진술로 여겨야한다.

  이렇게 해서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580조에, 목숨을 끊으려는 계획의 실행을 도와주는 이의 행동을 “처벌할 수 없도록” 판단하는 정상참작을 도입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엄격하고 긴박한 환경이 존재할 때이다: “어떤 환자가 생명 유지 치료로 생명을 이어가면서, 회복할 수 없는 병에 걸리고, 그 병은 그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체적이며심리적인 고통들의 원천이 되며, 그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결정들을 내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2). 그러나 임의로 적용 가능한 이 규정은 국민건강보험이 위에 언급된 4가지 조건들을 확인하고, 사전동의와 완화치료, 강력진정작용3)에 관한 규범을 존중하고, 지역적으로 권한을 가진 윤리위원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4).

  마지막에 헌법재판소는 의회에 신속하게 개입할 것을 요청했다: 판결문은 어느 순간에 무너질지 모르고, 문화수준과 의료수준에서는 “법은 제정되어야 한다”de iure condendo는 고대원칙에 따라 재판관들이 부여한 제한적인 법적 조건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제방의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생명 종결에 관한 공개 토론을 재점화시키고 분리시킨 주요한 원인이다5).

  이탈리아 안에서의 생명종결

  판결문은 2006년에 시작된 생명종결의 주제에 관한 문화적이고 법적인 여정의 한 단계로 여겨져야 한다. 그 해에 재판관들은 삐에르죠르지오 웰비(Piergiorgio Welby)의 사건을 다루면서, 치료가 생명유지를 위한 수술들로 구성되었을때에도 환자가 이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환자에게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2007년 10월 16일자 대법원(Corte di cassazione)의 판결문 제21,748호로, 재판관들은 앨루아나 앵글라로(Eluana Englaro)의 아버지와 후견인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인위적인 영양(nutrizione)과 수화(水化, idratazione)와 같은 생체기능들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가진 식물인간 조건들로 인해 강제 영양공급을 중단하려는 상소였다.

  2010년에는 보건치료에 관한 법령 38호에서, 입법자는 고통을 일종의 질병으로 인정하고,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했고, Englaro 판결 이후 10년이 지난 2017년에는 사전동의와 사전처리규범들(Dat)을 규제하며, “보건치료의 내용에대해 자신의 원의를 표현하고, 진단 테스트들이나 혹은 치료법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개별 위생치료에 대한 동의나 거부들도 표현하는 것”을 허락했다. (법률 219호/2017)

  마지막 판결의 대상이었던 조력자살이라는 주제는, 문화를 두 개의 정반대의 생각의 흐름들로 분열시켰다: “한 경향에 따르면, 2017년의 법률 219호는 –일반적으로 혹은 적어도 Dj Fabo의 상징적인 것과 같은 상황들에서는 – 죽을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죽음을 원하지만 자율적으로는 이를 실천할 수 없는 이에 대한 제삼자의 도움의 적법성을 인정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경향에 따르면, 그 법은 ‘미끄러운 경사’와 같은 전제들을 깔아놓고, ‘유료로 맞이하는 달콤한 죽음’을 위해 준비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업구조들에 도달할 때까지 그 법을 통과해 지나가도록 자극했다. 벌써여러 나라들[네델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에서 작동하는 구조들인데; 연대성의 논리보다는 이윤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6).

  이 판결문은 또한 체제의 비정상적 상황을 드러나게 했는데, 생명 종결과 같이 민감한 문제들을 조정하는 역할에는늘 재판관들이 많아지고, 국회의원들의 경우는 줄어드는데, 이들은 문제를 추적하고 조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유기적으로 규제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대법원장 죠반니 맘모네(Giovanni Mammone)가 염려하는 바이다. 그는 “재판관이, 모든 사법조사의 기본적 도구라 할 수 있는 입법적 성격을 지닌 직접적인 규범의 근거도 갖추지 못한 채, 생명 종결의신비와 관계된 것들처럼 가장 기본적인 내용의 윤리 원칙들을 수반하는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가? 재판을 할 의무와자신의 정서와 공동체의 정서를 규제하는 윤리적 확신들 사이의 균형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의 내적 법정이면충분한가?”. 이렇게 하면, 재판관들은 특별한 사건들을 규제하고, 이들을 일반규범이 되게 만들어버리도록 강요받게된다.

  생명 종결의 인류학적 윤리적 뿌리들

  생명 종결에 대한 토론은 새로운 문화적 출발점을 건너가게 하는데, 이는 온 가족이 휘말리게 되는 질문들과 언어들, 경험들로 이루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2017년 11월에 생명종결에 관련된 복합적인 문제들을 섬세하게 다룰것을 요청하시며, “육체에 관해서는 강력한 효과를 내지만, 때로는 인간의 통합적인 선에는 유익하지 못한 치료들을고집하는 유혹을 더 조심해야 한다”7)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첨단 기술의 의학 –

  이로 인해 죽음이 일종의 사고이고 극복해야 할 전투가 되었다 – 이 존재에 대한 몇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바꾸도록우리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언제 생명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가? 의 문제이다.

  이 기술의 침략성은 사람이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계에 덫을놓는 마지막 올무로부터 해방되느냐 마느냐를 준비시키는 체험을 살아가도록 자주 강요당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역설이 아닌가? 실제로, “‘ – 철학자 엠마누엘레 세베리노(Emanuele Severino)가 말하듯이 – 기술과학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이를 마치 난해한 문제처럼 기피하며,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고뇌가 실제로 무엇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능선 위에 진정한 세속성의 본질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경계의 문화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의학, 기계문명이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반드시 실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특히 만일 이것이우리들의 존엄성을 해치고 어떤 심오한 윤리적 가치들을 침해하려 한다면 더욱 그렇다”8).

  생명의 존엄성의 의미와 인간의 행위로서 죽는다는 것의 존엄성의 의미를 중심에 놓는 것은 명사로서의 “죽음”에 의미를 주기 위해 동사로서의 “죽다”를 문화적으로 심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묘사한 전망 안에서 생명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죽음이 가장 큰 위험이라면,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위험을 본다면, 죽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위험이 너무 커서 죽음이 희망이 되었다면, 절망은죽을 수조차 없는 희망 부재이다”9)

  처음부터 철학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근본적인 질문으로 내놓았다: “우리를 가장 겁나게 만드는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있으면 죽음은 없다; 죽음이 있으면, 더는 우리가 없다. 따라서 죽음은 산 이들에게나 죽은 이들에게나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산 이들에게는 그것이 아직 없고, 죽은 이들에 관해서는 그들 자신이존재하지 않는다”10).

  죽을 때는 누가 죽는가? 생명은 생물학적인 의미나,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생화학적인 관계로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만남과 다른 이와의 만남, 세상과의 만남, 그리고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구성된 일대기적 의미를 지닌다.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은, 질병의 말기에 있는 환자에게는 생물학적인 차원의 필요에 상응하는 도움을 받을 권리를 의미하지만, 또한 심리학적이고 영적인 것들처럼 일대기적인 차원의 필요에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류학적인 전제는 “평안(salute)”의 가장 광범위한 의미인데, salute는 라틴어 salus에서 온 말로 구원을 의미한다11).

  이탈리아 주교회의의 입장

  2017년 219호 법령이 나오고 나서, 지난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국회에 이런 태도를 탈범죄화하지 말고, 형벌을 축소하도록 제안했는데, 이 판결문 이후에는 의사들의 양심적 거부를 상정하기를 요청했다.

  법원의 공고 직후에 발표된 최종 보도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교들은 수많은 시민 단체들과 목소리를 합하여,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결정들 앞에서 우려를 표명한다. 이 주제가이념적인 도구화에 얼마나 조력할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위중한 질병의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과 고통에대해서 들으려 노력했다”12). 사무총장 스테파노 루쏘(Stefano Russo) 몬시뇰은 재판부의 이 결정이 이탈리아 주교회의와 이탈리아 기관들 사이의 “균열”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항상 대화에 열려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판결문이 국회를 거치지 않고 도달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보도자료에서는 “교회는 늘 인간의 존엄성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래서 사목자들은 자살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말기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 곁에 현존하며, 이를 더 강화해야 할 직무를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은 고독과 무관심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선물과 책임으로써 생명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더욱 증진시켜준다. 그리스도교적 지향으로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이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것을 돌보며, 죽는 데 도움을 받기를 요청하는 이들에 대해 양심적 거부를 행사할 가능성을 회복시켜주고, 생명에 봉사할 임무를 맡은 의료인이라는 직업의 의미를 격려해준다”13).

  대략 50여개의 비영리 단체들이 있어서, 이 주제를 심화시키고, 토론하며,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재판관이 입법권을 대신함으로써 유럽연합법(diritto comunitaro)을 위반한 점에 대해 유럽연합법원(Corte di giustizia)에 이의를 제기할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다14). 국립 보건사목국장인 막시모 안젤렐리 신부(Don Massimo Angelelli)는고통과 선택의 자유 사이의 관계를 성찰해보도록 초대한다. “고통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심리학적으로 굉장히 유약한 조건을 살아가며, 이 조건은 판결문의 전제조건인 환자의 선택의 자유를 퇴색시킨다”15).

  Avvenire 신문사 사장인 마르토 타르퀴니오(Marco Tarquinio)는 “인간애로 부름받은 이들”이라는 호소문에서, “양심있는 남성과 여성들, 신자들, 비신자들과 함께, 생명의 조건들과 생명의 보호를 위해 놓여진 조건들이 죽음의 조건들이나 죽음을 위한 조건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사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적법성 안에서” 이 주제를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종결한다는 것이 돌본다는 것과 운율을 맞추지 않도록, 그리고 치료하는 것이 죽는 것과 운율을 맞추지않도록 해야 한다. 고통이 결코 원한이 되지 말아야 하며, 반대하는 것은 머무는 것, 즉 인간적으로 머무는 것이 되어야한다”16).

  국회의 책무

  (자유경제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라고 불리며, 타인에 대한 책임 위에서 자유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문화는 항상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이라는 악마를 쫓아내려는 시도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생명 종결에 관해 의견을 피력하고, 공개적으로 고통과 죽음의 원인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새로운 법령의 핵심은 아직 의식이 있는 병자와 의사들, 그리고 유효한 치료 관계의 환경 안에 있는 가족들이 함께참여하는 선택을 공유하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 이러한 기초 관계 밖에서, 그리고 제한 없이 진행된다면, “전원을 뽑는것”은 시민 문화에서도 아직은 성역으로 남아 있는 생명의 가치에 반하는 월권으로 끝날 것이다. “‘극단적 경우’에 집중하는 평가는 바늘구멍과 같다. 이는 신앙인의 가치들과 비신앙인의 원칙들이 집중되고, 상호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종합 안에, 만일 존재한다면, 모든 것의 본질이 있다. 자유가 있고 책임감의 의미가 있다”17).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는 국회에서 행해야 할 성숙한 논쟁을 위한 많은 요소가 발견된다. 불완전한 원칙으로 여겨지는 환자의 자기결정을 넘어서, 미성년자와 같이 연약한 주체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공공기관의 내부에서 의료환경안에 머무를 의무를 넘어서,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윤리위원회의 견해에로; 안락사가 “의료 행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범주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넘어서, 스위스의 경우처럼 사립병원이 달콤한 죽음의 장소가 되고 새로운 사업의중심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로 논의들이 넘어가야 한다.

  판결문은 국회가 자기결정의 원칙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의지론적 태도와 주체의 자기결정을 포함하지 않는 현행 법률의 국가 온정주의적 태도 사이의 균형점을 찾도록 방향을 잡아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주장을 반복하며, “인간을 그 자체로서의 가치로 바라보지, 집단의 만족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고”18), 국회에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결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도록”19) 요구한다.

  국회는 형법 제 580조를 수정하여, 자살방조 사건을 결정에 참여한 이들에게만 한정하며, 일반적 자살방조에 대한형벌을 자살교사로부터 구분하여, 후자만 범죄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20). 이렇게 하면, 자살방조는 범죄로 남으면서. 특정한 조건들이 드러난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을 지닌 객관적인 윤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21). 예를 들어, 생명유지 장치로 삶을 유지하는 환자가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를 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법률은 또한 지금 재판관들에게 맡겨져 있는 의료 행위의 권리와 그 한계들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치료관계를 더 정확히 해야 한다. 불길한 예후 앞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치료관계를 더 정확히 해야 한다22).

  국회에는 10개의 법안이 제출되었다: 무슨 이유로 이 주제에 대한 국회의 진정한 토론이 없는 것인가? M5S (Movimento 5 Stelle; 오성운동당)은, 좌파 정당과 함께 안락사의 문화를 개방하기 위해 조력자살을 옹호하는가? 우리는 묻는다: 입법자의 첫 번째 가치는 무엇인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개인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인가?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을 지지하면 충분한가? 생명종결을 규정하는 법률들이 보건 비용을 줄이는 데 관심이 있고, 참여자의 희생을 없애거나, 고통을 회피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공리주의에 따라 조정될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돌봄과 존엄성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동반할 책임성인 자비(pietas)로양육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민주당의 원내대표인 그라찌아노 델리오(Graziano Delrio)는 “법은 죽음이 권리가 아니며, 우선권은 치료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했고, 의사로서 “자살의 의료화라는 주제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치료의 관계는 죽음에까지 동반하는 것도 제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23)라고 주장했다.

  입법자는 판결문에 맞서지 않으면서, 헌법재판소가 남긴 방향의 자국 안에 머물러야 하고, 의사 개인의 거부권을 보장하면서, 조항들을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인 범죄를 탈범죄화하지 않으면서, 이에 협력한 개인들을 면제하는 것은 의사 개인에게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수행하도록 강요하지 않게 할 것이다. 범죄를 구성하는 사실들은 최대한 정확하게법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조언을 좋은 민주적 관행으로 존중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제삼자의 개입 없이 생명을 제거하는데 동의하는 해결책을 허락하는 법률제안들은 법원의 뜻을 어기게 될 것이다. 법원은자율적으로 결정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그리고 완화치료를 활용하려 하지 않고, Dj Fabo의 경우처럼 자율적으로 “생명을 제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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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력자살의 문화에 응답하기 위한 인류학적 지평은 연대성의 지평과 구체적이고 가능한 도움의 지평이어야 한다. 이는 모든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카탈도 주까로(Cataldo Zucca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과 싸워야 하고, 완화제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에 대응할 능력에 있어서 현저한 진전이 있었고,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것이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죽음을 준비한다’라는, 일종의 ‘마지막 결정’으로 가치가 폄하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답변(죽음)의 차원이 질문(고통)의 차원과 같지 않다. 이러한 성찰 위에서, 오늘날 너무나도 관념적인 용어들로 치료적인 분노요 안락사로 공통적으로 인식된 이러한 태도들을 극복할 수 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 없다. 삶이 없는 죽음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에서 삶을 분리할 수 없다. ‘삶의 우상화’와‘죽음의 우상화’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24).

  만일 국회가 자기결정의 원칙 – 이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자율적으로 처분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 을 장려하기로 선택한다면, 또한 caregiver(환자에 대한 도움을 줄 가족)들의 외로움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 완화 치료를 포함한 자택요양, 부양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위해 적합한 가족수당 등과 같이 그 결정을 평안하게 내리는데 필요한 도움들을 보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변에 정치적인 선택이 남아있다: 환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맥락의 경험이라는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수구에 도달한 조각들이 분열과 이념적인 당파, 그리고 개별 정당들과 공리주의적인 로비 그룹들의 특정 이익으로 인해 국회의 토론을 계속해서 마비시킬 것이다.

  생명종결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문화전통들의 만남을 위한 인류학적 출발점은 의학의 개인화와 인간화를 의학자체의 기술화와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치료하는”(to cure) 행위가 환자의 정서적, 관계적, 심리학적이며 영적인 세상을 “돌보는”(to care) 것과 함께 성숙할 것이다25). 더구나, 모든 문명의 목적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삼고 이를 지키는 것이다.


1)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마르코 카파토(Marco Cappato) 사건에 관한 밀라노 중재법원(仲裁法院)의 상소로 나오게 되었다. 재판관들의 첫번째 개입은 201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원은 카파토가 스위스에서 2017년 2월 27일에 Dj Fabo 라고 알려진 파비아노 안토니아니(Fabiano Antoniani)의 죽음을 동반하고 협력한 혐의로 5년~12년의 징역형에 처벌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파비아노는 2014년부터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맹인이 된 상태였다. 더 심오한 연구를 위해서는,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2018년 조례 제207호, in www.cortecostituzionale.it 참조
2)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2019년 9월 25일자 보도자료, 같은 곳.
3) 역자 주) 보통 수면마취라고 표현되는 마취의 정도를 나타내는 의학적 표현. 마취의 단계를 4단계로 나누었을 때, 4단계인 전신마취의 바로 아래단계로 ‘전신 마취의 경우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깨지 않고 호흡도 없어지는 단계인데 반하여 수면 마취의 경우 말을 걸거나 살짝 건드리면 깨는정도의 진정 단계’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wilight_anesthesia,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108549&cid=63166&categoryId=51023 참조.
4) C. Mirabelli, «La non punibilità. Il passo avanti e le ombre da diradare»(비처벌성. 일보전진과 감소시켜야 할 그늘들), in Il Messaggero, 2019년 9월 26일자, 20쪽 참조. Mirabelli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보증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살을 혜택을 받을 권리로 변형시킬 위험이 있다. 이는 헌법재판소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앞선 조례에서 ‘모든 개인의 생명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이다: – 정 반대로 – 국가나 제삼자로부터 죽기 위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확인한 바 있다».
5) F. Occhetta, «Etica medica e il fine vita»(의학윤리와 생명종결), in Civ. Catt. 2011 IV 325 참조.
6) G. M. Flick, «Relazione al convegno ‘Fine vita tra diritto ed etica’»(회의보고서 ‘법과 윤리 사이에서의 생명종결’), Roma, 2019년 6월 5일.
7) Francesco, «Messaggio ai partecipanti al Meeting regionale europeo della ‘World Medical Association’ sulle questioni del ‘fine – vita’»(‘생명 종결’의 문제들에 관한 ‘세계 의학협회’ 유럽 지역 만남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신 말씀), 2017년 11월 16 – 17일, in www.vatican.va
8) M. Ajello, «Il senso del limite. La barriera infranta tra libertà e fede»(경계의 의미. 자유와 신앙 사이에서 깨어진 장벽), in Il Messaggero, 2019년 9월27일, 16.
9) S. Kierkegaard, La malattia per la morte (죽음을 향한 질병), Roma, Donzelli, 2011, 20.
10) Epicuro, Lettera a Meneceo (메네세오에게 보낸 편지), in R. Ferrari, Lettera di spiritualità monastica (수도승 영성 편지), Parma, Mamma editori, 2017, 20.
11) C. Casalone, «Vivere il morire con umanità e solidarietà»(관대함과 연대성으로 죽음을 살아가기), in Civ. Catt. IV 2017 533 – 545 참조.
12) «La Cei: eutanasia, ‘preoccupazione per le scelte che incidono su cultura e società’» (이탈리아 주교회의: 안락사, ‘문화와 사회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는 선택에 대한 염려’ (www.avvenire.it/chiesa/pagine/cei – assemblea – permanente – comunicatofinale), 2019년 9월 26일.
13) 같은 곳.
14) 입장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http://polispropersona.com 참조.
15) P. Viana, «Suicidio assistito(조력자살). Don Angelelli (Cei): ‘Ai malati manca la libertà di vivere’(환자들에게는 삶의 자유가 부족하다)» (www.avvenire.it), 2019년 9월 28일자. 안젤렐리는 고통중에 있는 환자가 “자유롭지 못하며, 다른 모든 이들보다 스스로 짐이 되고 있고, 생명을 종결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확신에 가까이 있다. [….]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고통이다. 이것이 사실 호스피스의 관심과 작업의 중심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부재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죽기를 선택하는 결정은 육체적 고통의 환경에서 이루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고통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16) M. Tarquinio, «Chiamati all’umanità. Confusioni da evitare, lavoro da fare»(인간애로 부름받은 이들. 혼돈을 피해야 할 것들과 해야 할 일) , in Avvenire, 2019년 9월 26일, 1.
17) M. Ajello, «Il senso del limite. La barriera infranta tra libertà e fede», 위의 책, 16.
18) 헌법재판소, 2018년 조례 제207호, 같은 곳.
19) 같은 곳.
20) ANSA, «Ceccanti, Camere prendano sul serio Consulta» (www.ansa.it), 2019년 9월 25일.
21) 교회의 교도권은 윤리적 딜레마와 정치의 책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언급한다. “때로 공권력이 어떤 것을 금지하였을 때 더욱 심각한 해악을 일으키게 될 것 같은 경우에, 그것을 멈추게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생명에 대한 권리처럼 아주 근본적인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공격을 개인의 –비록 그들이 사회 구성원의 다수라고 할지라도 – 권리로 정당화해 주는 것이라고추정하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생명의 복음, 71항)
22) 참조: 외과 및 치과 의사연합의 윤리학적 자문서, in www.quotidianosanita.it/allegati/allegato9264391.pdf
23) 그라찌아노 델리오(Graziano Delrio)가 로베르타 단젤로(Roberta D’Angelo)와 한 대담, in Avvenire, 2019년 9월 27일자, 7.
24) C. Zuccaro, «Relazione al seminario ‘Fine vita tra diritto ed etica’»(‘법과 윤리 사이의 생명종결’세미나에 대한 논평, in Il diritto vivente(생명권), n. 2, 2019, 26 s. 또다른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난다: «비록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시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건시스템의전체적인 재정비의 필요성이 긴급해진다. 같은 치료절차가 어떤 의료체계에서는 불균형을 이루고, 다른 의료체계에서는 적절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막막하다. 어떤 특별한 병리학으로 어떤 환자의 치료에 적합하다면, 이 치료방법은 같은 조건에 있는 모든 환자들에게 그래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이에 대한 (강요된) 포기는, 의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사실적으로는, 안락사 행위처럼 드러난다. 이 경우에는 죽음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 역사의 과정을 겪는것이 문제가 된다».
25) 그것을 우리 잡지에서 명시한 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안락사와 치료적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문화’를 매개체로 죽음을 조정하려고주장하며, 자신의 법률로 ‘자연’을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생명과 죽음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문화적인 관념이 아니다: 성장하고 사랑하며, 계획하고 희망하며, 살고 죽는 구체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누가 생명의 종결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그렇게 확신을 가질수 있는가? 인간에게는 1인칭으로 죽음을 체험하고 후에 이 이야기를 들려줄 가능성은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제나 오로지 ‘타인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자신의 ‘죽음을 향한 존재’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발자취를 타인 안에 그리고 역사 안에 남겨놓음으로 시작되는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Gli interrogativi sul fine vita»(생명 종결에 관한 질문들), in Civ. Catt. 2011 IV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