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됨의 의미

ESSERE SANTI

© La Civiltà Cattolica Q. 4065 (2 Nov 2019 IV), 234-242
디에고 파레스 Diego Fares 신부 (예수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전주교구) 옮김

요약

거룩함은 선택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유에서는 ‘거룩함’santità이라는 추상적인 이상보다 ‘거룩한 사람이 되라’essere santi는 초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인생의 매 순간마다 크건 작건 예수님이 선언하신참행복과 자비의 사명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선택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 된다는 뜻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선택과 우정의 측면에서 부각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예수를 온전히 인격적이고 고유한 방식으로 따르기로 한 선택인데,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자비의 과업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이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행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회(카이로이kairoi)를 만들고 우리 자신의 공간, 즉 하느님 나라의 공간을 열어 우리가 그것들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참행복과 자비의 사명이다.

들어가며

  거룩함은 하나의 우정을 선택하는 것이다. 거룩함의 모든 방식은 모든 단계에서 스스로 새롭게 하는 선택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율법과 모든 의무를 떠나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제시하는 것은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이 순수한 우정으로 서로를 따라가고 서로 찾고 함께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십니다』CV 290).1) 또 이렇게도 쓰고 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의 은총이 성덕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열려 있게 하십시오.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느님을 향하십시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E 15).2)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선택하는 은 정말 사실인가? 우리는 근원적인 선택이라는 조건에서 거룩함을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실 직접적이고 결정적이며 그리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거룩함에 “아니요”라고말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의 실제적인 이유는 우리가 악을 악으로 선택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실제로 “아니요”는“예”가 무한대로 연기될 개연성이 더 높고, “예, 하지만…”는 조건부 “예”이다. 우리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건방진 것처럼들린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건방진 것처럼 들린다면 우리가 거룩함에 대해 가지는 심상이 복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3)

  프란치스코 교종이 잘 보여주거니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먼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만드신 분의 선택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뽑으시어,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기’(에페 1,4) 때문입니다”(GE 2).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분께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꿈꾸셨다. 또한 이런 거룩함이 다른 특별한 성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말하는 사랑은,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주시는 사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랑, 우리가 있는 대로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이다. 그것은 영웅적인 사랑, 심지어 표준적인 사랑이나고정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개인적인 사랑,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각자가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게 자비롭고 창조적인 사랑이고, 우리의 사랑은 작고 흔들리는 사랑이지만 역시 사랑인 것이다.

  이냐시오 식 ‘선택’의 전제 조건

  『영신 수련』의 둘째 주간 끝에 성 이냐시오는 20개의 조목을 제시한다. 이 조목은 “선택하는” 방법, 곧 자신의 생활과 신분을 선택하고 개선하는 방법에 관한 규칙들이다(『영신 수련』 169-189).

  미구엘 앙헬 피오리토(Miguel Ángel Fiorito)가 부르는 바대로, 이는 “실천 문서”인데 묵상과 관상(주제 문서)과 구별되고, 식별의 규칙(규칙 문서)과도 구별된다.4)

  성 이냐시오는 좋고 건전한 선택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 곧 선택의 시기와 내용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내면적인 마음의 상태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시기는 선택할 수 없이 머무르게 되는 주관적인 조건이다. 다분히 위로와 절망을 스스로 체험하는 영적 싸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는 자신의 지성을 이용할 수 있는 평온한 시기일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을 통해 분명하고 부득이한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사명을 보게 하는 시기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선택의 내용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더 객관적인 조건이다. 알다시피, 선택의 내용은 성 이냐시오가 말하듯이, ”그 자체가 좋은 것이거나, 적어도 나쁜 것이 아니어야 하며 자모이신 성교회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어야”(『영신수련』 170) 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더 나은 것, 더 사랑하게 해주는 것을 복음적인 열쇠로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반적인 방향은,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해 결정한다면, 선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선택의 내용에 관해, 이냐시오는 수련자에게 받아들여야 하는 더 개인적이고 실천적인 또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수련자는 “순연히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는 것과는 달리”(『영신 수련』 150; 174) 이르게 되는 실제의 모든 상황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내용의 첫 번째 조건이 일반적인 무관심이라면, 두 번째 조건은, 말하자면, “개인적인근원적인 특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내용”으로 숙고된 “거룩함”에 관하여 이점에 대해 말할 것이다.

  각자 하느님께서 오늘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시는 구체적인 요소-내용-를 찾고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점에서 우리가 의식해야 하는 유혹이 곧바로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 마음에 쓴 거룩함의 바람을 약화시키는 유혹, 곧 이런 선택을 추상적으로 고려하는 유혹이다.

  영신 수련에서 모든 것이 구체적이다. 선택에 먼 준비에 속하는 첫째 주간에 이냐시오는 우리 삶의 근원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곧 우리는 창조되었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가 아니라 각자 사랑받는아들로서 창조되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가 아니라 각자 돌아온 아들 또는 위선적인 아들로서 죄인이다. 선택에 가까운 준비와 자기 삶의 개선에 속하는 영신 수련의 둘째 주간에 이냐시오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시는 근원으로, 그분의 깃발로, 곧 십자가의 벌거벗은 구체적인 사실로 이끈다.

  주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청빈과 겸손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 모욕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위하여 당하거나 선택된 모욕은 구체적인 표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선택이나 개선의 주간인 셋째 주간에 성 이냐시오는 우리를 현재의 생활상태에 철저하도록 초대하여 무엇이 우리의 개인적인 거룩함의 구체적인 내용인지 선택하게 한다.

  이 거룩함은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생활 양식으로 제시하는 참행복과,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기로 결정할수 있도록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로운 행위와 일치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참행복과 우리가 마태오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구문에서 발견하는 거룩함에 대한 그 명제는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항구하게 활동하는 “복음적 단순화”이다.

  ‘여기 지금’의 현실주의

  참행복과 자비로운 행위는 “여기 지금”에 대한 은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실천하는 반면에 모든 행복과 모든 자비로운 행위는 자신의 기회(kairoi)를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의 공간-하느님 나라의 공간-을열어 놓는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훌륭한 예, 곧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의 예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풀려날 날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이렇게 다짐하였습니다. ‘현재의 모든 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리라.’ 또한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기회들을 붙들리라. 일상의 행동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하리라.’”(GE 17).

  각자 살고 있는 ‘순간’과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강조는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보편적인 부르심이 이른바 ‘유동사회’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의 사고방식과 대화를 나누도록 도움을 준다. 어떤 이들은 “일시적”이고 “토착화된” 방식으로 행한 선택이 더 약하다고 두려워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이런 경우에 아마 개념 구조는 추상적인보편적 특성에서 약해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인 개인의 자유가 강화된다.

  작품들로 해석되는 사랑의 자유는 사물이 제안되거나 표현되는 개념들과 정신적 체계보다 더 중요하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이 평생 동안 헌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일상사이다. 이것은 잘못된 문제이다. 문화적 조건들은 오늘 이후로 존재하지 않지만 항상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과거에는 안정성이 우선이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를 더 중시하고 있다. 사실, 복음은 항상 이 두 차원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도전한다. 조건 없이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항상 다시 선택하라고, 모든 중대한 상황 앞에서 그들의 선택을 새롭게 하라고 권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전 생애에 걸쳐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교종이 우리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선택”한 이들의 삶을 모델로 제시할 때, 우리도 고려하는 것이 좋은 하나의 모습을 기억한다. 교종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 모두를 부르는 강한 호소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온 생애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베푸시는 표징들을 인식함으로써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십시오. 여러분 삶의 매 순간에 또 여러분이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늘 성령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사명에서 그것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식별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 안에서, 오늘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적인 신비를 형성하실 수 있게 하십시오”(GE 23).

  그것은 -거룩함을 항상 다시 선택하면서-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전체에 걸쳐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바라신다는사실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각자가 불리움을 받은 사명이다.

  전체는 부분보다 위대하다는 기준은 교종의 이런 분별에 따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끝에서든 모든 상황에서든 우리를 “세분화”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신다. 성사들은 그 본보기이다.

  내가 고백할 때마다 나의 모든 특별한 죄를 용서하고 나의 일부만이 아니라 나 자신 전체를 거룩하게 하는 자비로운행위로써 내 삶 전체가 깨끗해진다. 친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친교를 이룰 때마다 나는 주님과 온전한 계약을 맺는다. 나의 일부만이 그분과 친교를 맺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 삶을 모든 행위 안에서 총체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지니며, 우리의 (혼인이나 축성 생활의) 서약에서 주님께 “예”라고 말할 때이든 자비로운 행위들 가운데 매우 다양한 작은 “예”를 말할 때마다 그렇게 한다.

  실천으로 확인되는 모든 행복의 총체적이고 포용적인 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스승의 빛 안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 프란치스코는 참행복을 구체화하는 거룩함의 “총체적인” 표현들을 명확히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70).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것”을 이냐시오가 ‘원리와 기초’에서 말한 것으로 구체화한다.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에, 가난보다 부귀에, 불명예보다 명예에, 단명보다 장수에 더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 밖의 모든 것에서도 그러합니다(『영신수련』, 23d)”(GE 69). 인간은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우선시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그러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그 밖의 모든 것을 괄호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에 열려 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하여 거룩한 사람이 됨을 선택한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74).

  거룩한 사람이 됨을 선택하는 것은 온유하게 응대함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응대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마도 분노의 첫째 움직임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서 분노를 절제하든지 혹은 제멋대로 하든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거룩함이 작용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엄하고 대하고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우월감을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한계와 결점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바라볼 때, 그들을 도와줄 수 있고 쓸데없는 불평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피할 수있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에게 “완전한 사랑은 남의 허물을 참아 주고, 남의 과오에 분노하지 않습니다”(GE 72).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76). 우리는 여러 번 작고 무죄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슬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상황을 보는 것은 충분하며, 우리 안에서도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 눈물에, 그 가엾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부드러움에 마음을 열어놓거나 닫는 것을 선택한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79).

  추구하는 것은 “추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의로움을 위해 싸우는 것은 선택이다. 곧 가장 가난한 사람들,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82).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선택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우리 각자는 “주관적으로”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그가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따른다. 객관성은 자력으로 증명되는 증거가 아니다.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사람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 일들이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선에서 연민의 정이 생겨나고, 그다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86). 마음의 깨끗함도 늘 새로워져야 하는선택이다. 눈의 깨끗함을 새롭게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눈보다 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눈은 모든 감각에게 아름답고 좋은 모든 것을 관찰하고, 그런 다음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그에게 고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애착을 품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시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89).

  씨앗을 뿌리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뿌려야 할 씨앗과 뿌리는 땅을 선택하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숙명이아니다. 씨뿌리기는 물려주는 것이지, 각자의 순서에 따라 씨앗을 뿌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94).

  여기에서도 삶의 선택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라고 하지 않고 “복음의 을 받아들인다고말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첫 번째 선택은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반면에 매일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구체적이고 가능한 선택이다.

  우리는 참행복이 예수님의 “심오한 선택”임을 인정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참행복을 생활 방식과 심판받을 “대명제”-마태오 25장의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선택한다는 것을 느끼는 방식으로 선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 선택은 모든 특별한 활동의 결과들보다 더 심오하며, 가장 “많은” 결과와 가장 “적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확실하게 얻을 것이다.

  참행복과 자비로운 행위의 총체를 위해 선택하는 것은 예수님의 선택과 그분 다음 우리의 선택, 둘 다 심오한 선택이다.

  “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은 ‘단순한 사랑의 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는 그리스도론의 한 구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을 알아보라고 한 이 이름은 그리스도의 마음 그 자체, 곧 모든 성인이 닮고자 하는 그분의 심오한 생각과 선택을 드러냅니다”(GE 96).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당신의 존재, 권고, 용서와 말씀을 멀리하여 살아갈 수없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한층 더 다정하고 친밀한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머무르게 하실 때만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그 핵심이 되는 성덕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 삶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이 제시한 대로, 이러한 신비들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여러 선택과 태도에서 이러한 신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끔 우리를 이끕니다”(GE 20).

  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기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사명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단지 “겉으로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이런 거룩함이 행위로 반사되는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하도록 놔두는 것”을 뜻한다.

  그런 변화는 양심 성찰에서 확인된 선의 습관적인 관행이라는 검증의 귀중한 도구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자유로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욕망, 걱정, 두려움, 의문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과 우리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 곧 ‘시대의 표징’을 살펴보고 그래서 온전한 자유로 이르는 길을 깨닫도록 요청하십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여라’(1테살 5,21)”(GE 168).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은 신중하고 확실한 수련,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살펴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이 마음을 넓혀주는 세 가지 큰 영역이 있다. 첫 번째 영역은 하느님의 새로운 에 관한 것이다. “식별은 우리 삶에 새로운 일이 생길 때” 더욱더 중요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새 포도주인지 세속의 영이나 악마의 영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식별해야 합니다”(GE 168).

  두 번째 영역은 주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나누신 것처럼, 사랑과 우정에 관하여 우리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모든 율법과 모든 의무를 떠나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은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이 순수한 우정으로 서로를 따라가고 서로 찾고 함께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맛보는 실패조차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이 우정을 체험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CV 290).

  세 번째 영역은 겸손에 관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겸손은 여러 굴욕을 통해서만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굴욕 없이 어떠한 겸손도 어떠한 성덕도 없습니다. 작은 굴욕도 참아 내고 봉헌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며 성덕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GE 118). “여기서 저는 순교의 참혹한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의 굴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들을 칭찬하는 이들, 남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거나, 때로는 심지어 부당함까지 감내하며 하느님께 그것을 봉헌하는 이들이 이러한 일상의 굴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1베드 2,20)”(GE 119).

  ‘타인들을 위한’ 나의 최선의 모습

  이 세 가지 영역–복음적 새로움, 우정과 겸손–에서 마지막 선택,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한 내 최고의 방법이 되는것”을 선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선교 성소는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봉사와 연관됩니다. 우리의 지상 삶은 하나의 봉헌이 될 때에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CV 254).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가 우리 성소에 응답하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든 면을 증진하고 싹틔우고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치장하거나 우리 자신을 무에서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 안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꽃피워 열매맺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어떤 소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CV 257).


1)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종 권고『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 젊은이들과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보내는 서한』Christus vivit, 이하 CV.
2)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종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 이하 GE.
3) N. Steeves, “San John Henry Newmann: fede, santità e immaginazione”, in Civ.Catt.2019 IV 163-176 참조.
4) 피오리토(Fiorito)는 단일성을 깨지 않고 영신 수련을 분석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부르는 바대로, 이 “정신적인 체계”를 이용한다(M.A. Fiorito, “Apuntes para una teología del discernimiento de espíritus [segunda parte]”, in Ciencia y Fe 20 [1964] 83 참조). 피오리토의 인물과 베르골리오 교황에 대한 그의 영향에 대하여, J.L. Narvaja, “Miguel Ángel Fiorito. Una riflessione sulla religiosità popolare nell’ambiente di Jorge Mario Bergoglio”, in Civ.Catt. 2018 II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