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왜 민중에게 해악을 끼치는가?
바르톨로메오 소르제 신부와의 대담집 서평

«PERCHÉ IL POPULISMO FA MALE AL POPOLO»1)
Un libro-conversazione con p. Bartolomeo Sorge

© La Civiltà Cattolica, Q. 4064 (19 Ottobre 2019 IV), 184-190

안토니오 스파다로 Antonio Spadaro S.J. (예수회)
오경택 안셀모 신부 (춘천교구 퇴계본당 주임) 옮김

바르톨로메오 소르제 신부는, 치빌타 카톨리카의 편집장을 역임했을 때부터(1973-85) 정치적·교회적 삶에 대한 해석 능력 덕분에 이탈리아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팔레르모(1986-96)에서 ‘페드로 아루페 정치함양연구소’L’Istituto di formazione politica «Pedro Arrupe» 원장, 그 후 2009년까지 밀라노에서 교양지 ‘사회 쇄신’Aggiornamenti sociali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헌신을 이어갔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경험과 그가 맡은 업무는 폭 넓고 풍요롭다. 바로 이러한 경험이 그를 단순한 전문가를 넘어, 시대의 증거자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이 경험은 끼아라 틴토리Chiara Tintori와의 대화를 담은 책 전반에 걸쳐서 드러난다. 여기서는 이 책의 제목 “포퓰리즘은 왜 민중에게 해악을 끼치는가? 민주주의의 탈선 그리고 «포퓰리즘»의 예방”에 따라 핵심 주제를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2)

이 책을 구성하는 대화는 명쾌한 사유와 직설적 표현으로 이탈리아 사회를 다루고 있다. 일단 펼치고 나면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운데, 이는 소르제 신부가 주요 인물들을 직접 언급하는  것에 더해, 두려움도 아랑곳없이 다양한 주제들과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 거침없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상대인 끼아라 틴토리는  송곳같은 핵심 질문을 그에게 던진다.

논의의 출발점은 최소한 현 시대 경제·정치·문화 세 영역의 위기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첫째, 경제적 위기는 그 자체로 불평등을 계속 악화시키면서, 생산과 노동 기회의 축소를 초래했다. 둘째, 정치적 위기는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존 정당들의 역량이 서서히 상실한 데에서 드러난다. 셋째, 문화적 위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주에서 비롯된 혼란과 ‘다름’에 대한 불신을 야기시키고 안전의 필요성을 드높였다. 소르제 신부는 이들 위기에 직면한 지금의 대응이 파편적이고 심지어 방해가 되고 있다며, 위기의 결과가 어떻게 공격적이고 분열된 사회 분위기를 형성했는지 주목한다. 이것이 정치적 논쟁의 형태cifra인데, 그 안에서 정치적 경쟁자는 싸워야 할 적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르제 신부가 대담에서 이야기하는 답변들은 루이지 스투르조Luigi Sturzo 신부의 “자유인들과 굳건한 이들에게 고함”L’Appello ai liberi e forti을 전형적으로 잇고 있다. 이것은 1919년 1월 18일 이탈리아 인민당Partito popolare이 결성될 당시 임시위원회가 쓴 성명서이다. 이 시칠리아의 사제는 이 책의 다음 장들에서 다시 다루어지는 “종교적 영감, 세속주의, 공동선 우선, 개혁주의” 같은 사항들을 자신의 정치적 통찰의 핵심 주제로 삼았다.

윤리적이고 이념적인 긴장

소르제 신부는 먼저 이탈리아 교회의 첫 협의회Convegno 주제였던 «복음화와 인권 향상»Evangelizzazione e promozione umana(1976년 10월 30일~11월 4일, 로마)을 회상한다. 그것은 시대를 열었고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에 맞설 올바른 정신을 찾기 위해 돌아와야 할 회의였다.3) 협의회에서는, 그리스도교 민주당(Dc)의 몰락이 예견되었기에, 스투루조 신부의 대중적 통찰을 더 이어가면서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인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새로운 틀을 고려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르제 신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포퓰리즘 증식과 확산의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정치적 시기가 시작되었는데, 곧 국가의식과 공공선의 상실이다.

이 시기에 의회의 다수파가 국민 전체와 동일시되는 신념이 나왔고 포퓰리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탈리아 사회를 증오심, 개인주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으로 물들게 하면서 문화적으로 미개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정치에 새로운 영감을 다시 불어넣기 위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민주주의가 자신의 기본적인 토대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안에서 교회는, 한편으로 최근 몇 년간 정치와 교회의 삶 사이의 관계 안에서 직면했던 방식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고유한 책임을 받아들어야 한다.

세속성, 하나의 경향

소르제 신부는, 모두가 역사에서 거부된 20세기 정치 이념들이 종식된 후 포퓰리즘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는 «자유인들과 굳건한 이들»은, 믿는 이들이든 믿지 않는 이들이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개혁적인 계획 속에서 깨어 있는 모든 이들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이들이 지닌 개혁적인 계획은 초인류적인 가치에 영향을 주고, 한편으로는 선한 의지를 지니는 모든 사람들과 공감을 이루는 세속적인 선택 안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소르제 신부가 «적극적 세속성»laicità positiva이라 부르는 것으로, 다른 이들 가운데  각자의 고유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훨신 더 큰 일치를 향해 함께 성장하기 위하여 우리 서로가 결속함으로써 화합을 이루는 만남 속에 존재한다. 즉, «적극적 세속성»이란 개념은 정당들간의 정치적 관계들에 잘 적용될 수 있는데, 여기서 «좋은 정치»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대화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은 물론이고 이념적인 차원까지 그 어떤 엄격한 ‘교조주의’confessionalismo도 극복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실, 이 교조주의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른 세력들간의 협력과 만남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으며, 그러다 결국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한 때 거대 대중 이념으로 두드러졌다 이제는 희미해진 세속 정당들과 가톨릭 정당간의 부자연스러운 대립은 완전히 극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동선의 지평

이어서 소르제 신부는 «공동선»bene comune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명확히 하면서, 세번째 주제를 다룬다. 공동선은 각각으로서의 개인의 유익에 대한 총계로 축소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동선의 개념의 진정한 본질은, 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향하는, 사회적 차원의 기준이다. «결론적으로, 공동선은 각각의 개인이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이건 할 것 없이, 이들 모두의 온전한 발전에 동의하고 만족하는, 삶의 조건들 모두를 포함한다» (p.49). 실제로, 사회는 외부에서 주어진 하나의 표식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인격 자체에 기인하며, 이 인간 인격의 본성 자체가 사회적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공동선을 사회적인 공동체나 어느 국가의 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인 복지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공동선»이 애매하고 모호한 개념으로 축소된 용어인 «대중»popolo이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소르제 신부는 명료하게 언급한다: «우리는 현 통치자들이 대중(엘리트 계층과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을 불러내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들은 마치 이것이 정치적 활동의 모든 것인 듯 여기고 있다. 서로 대립된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 순수한 대중과 부패한 엘리트들이라는, 사회적 분할은 포퓰리즘의 이념을 그 근간으로 한다. 그리고 사회 제도들·정당들·경제인들로부터 ‘홀대받았던’maltrattato 대중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었다»(p.52이하).

주권은 대중에게 속해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헌법 조문 자체가 표명하고 있듯이, 대중은 «그것을 헌법의 제한과 기준들 안에서 행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르제 신부는 다음과 같이 주의한다: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 반 다원론적인 소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수많은 기준들은 정치권력 수행에 있어 독재의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는 전형적 개인주의의 다양화에 불과하다.

담대한 개혁주의Un riformismo coraggioso

이 책에서 다루어진 고찰의 또 다른 핵심은, 마치 추구해야 할 길처럼 제시되는, 포퓰리즘 특유의 개혁주의이다. 이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간의 연계에 바탕을 두고  정치적 통합보다 경제적 사회적인 분석을 우선시 한다. 실제로 2018년 전반기에 이탈리아 국민의 상위 20% 계층이 전체 부의 72%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자료들은 분명 시급하고 체계적인 해결책이 나와야만 함을 촉구한다.

소르제 신부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침묵시키는 억지 평화와 사회적 평화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을 거듭 강조한다. 수익에 대한 분배정의와 관련이 있는 사회적 요구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연합과 인권들은 소수의 행복을 위한 일시적인 평화를 빌미로 제한될 수 없다. 세계화에 대한 그릇된 정책은 불평등을 가중시켰고, 수입과 사회・경제적 안정성 보장의 약화는 포퓰리즘의 확산을 부추겼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대중의 고통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리를 취하는 이들에 편에 편중했다.

  소르제 신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의식이 얼마만큼 깊이 성숙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이념의 시대는 이미 종식되었지만, 이 이념이 뿌리내리고 있는 정당들의 구시대적 이념의 틀은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들은 더 이상 하나의 이념을 중심으로 그 이념을 옹호하기 위하여 동시대의 다른 이념들을 대항하면서 개개인들을 규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시민들을, 구체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을 통해,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만일, 포퓰리즘이 권력을 잡게 되면 대의민주주의democrazia rappresentativa의 고유한 중재 기능들의 점진적인 상실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오늘날의 정치

  결국, 소르제 신부는 정치에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이라는 주제를 포퓰리즘에서부터 시작하여 다루어 나간다: 여기서 포퓰리즘은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발상이 아니라 성숙한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제시되는 사회의 본래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그는 종교적인 양심을 정치적인 자유의 근본에 위치시키고, 시민들과 비천한 계층의 보조적이고 책임 있는 참여를 향해 열려있는 사회가 실현되도록 인도한다.

  스투르조 신부는 단지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닌, 모든 «자유인과 굳건한 이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향하였다. 소르제 신부는, 스투르조 신부가 고안했던 것과 같은 포퓰리즘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진정하게 실현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이를 기억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데, 그의 통찰은 역사적 관점에서나 교회적 관점에서나 시기상조였음이 밝혀졌다. 스투르조 신부 자신은 그리스도교 민주당DC이 자신이 꿈꿨던 대중적 정당의 모델에 부응했다는 것을 언제나 단호하게 부정했다. 비록,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던 구체적 실현들은 주의 깊게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결국 포퓰리즘은 하나의 예언적의 통찰로 남았다.

  그리고 소르제 신부는, 민주당PD의 마르티나졸리Martinazzoli에 의해 알게 모르게 발전되었던 것과 같이, 대중 활동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최근 년도에 대한 조사는 부족함이 없는데, 특별히 그는 현대의 사회-자유주의 정당과 개혁주의자가, 서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 윤리 이념으로 진정한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민주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주목한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이념들은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갈 것인가? 생동하는 이탈리아(Italia viva)4)의 탄생과 최근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소르제 신부는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이 있기 전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그의 분석은 유익한 결과를 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제도적인 개혁에 대한 물음과 이탈리아에 진정한 우파destra의 부재, 그리고 렌치Matteo Renzi 수상의 실패로 인한 불안정한 국면을 언급하면서 유연하고 심도 있는 통합적 방법으로 문제를 검토하였기 때문이다.

  신생정당인 오성운동Moviemento Cinque Stelle에 대한 특별하고 동일한 이 비평들은 최근의 몇 달 동안 넘쳐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탈리아의 전반적인 정치 판도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듯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이 비평들을 읽는 것은 유익하였다.

  소르제 신부는 정치에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의 책임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마치 그리스도교 민주당과 함께 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들이 하나의 정당과 규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르제 신부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언급하였듯이, 스투루조 신부 역시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정치에 대한 그들의 참여를 복음적 가치들과 교회의 사회교리에 맞게 고취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는 덧붙이기를,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앙윤리를 강요하는 법 없이, 모든 동시대의 시민들과 함께 이러한 의무를 함께 실현하도록 불리움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사회적 우정»amicizia sociale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번 얘기했음을 기억한다. 이는 분명 한 나라의 일치와 시민적 삶의 기초이다.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소르제 신부는, 할 수만 있다면,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분위기”의 모습 아래에서, 모든 개혁주의자들에게 열려있고, 하나의 정당이라는 고정된 경계들을 넘어서며, 시민 사회의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하여 공동선과 중요한 정치적 목적들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의 그 어떤 새로운 정치적인 참여» (p.96)를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분명 매우 현실적인 논쟁 전체와 관련이 있는데, 특별히 스투르조 신부의 기념일과 이탈리아에서 최근 퍼지고 있는 정치적인 긴장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결국, 그리스도교 정치인은 ‘공동의 집’casa comune 건설에 열중하면서, 위험들을 직면하고, 연구와 활동의 불확실성을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민주적이고 세속적이며 포퓰리즘적인 규범들은 존중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닌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저버리지 않는 확신을 지니게 될 것이다. 소르제 신부의 말에 따르면, 만일 그리스도교 정치인이 특별한 환경들 속에 처하게 된다면, 그는 법률적인 차원에서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사소한 악을 받아드려야만 하거나, 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윤리 가치를 지닌 정치적 목적들 안에서 중재를 이끌어 나가면서 필요한 절차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하지 않은 그 어떤 능력을 키울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선한 의지를 지는 사람들과의 대화 안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더 큰 선을 추구하면서도, 문화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정치 파트너와 함께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분명 이것은 믿고 있는 복음의 예언적이고 비평적인 힘을 증거하는 것을 결코 단념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휘둘러지고 있는 권력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과 생명 안에서 예언자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교회 전체 차례가 된다.

소르제 신부는 구체적으로 선택한 것들에 대한 계획을 제시한다: «인간 존엄성과 연대성 그리고 세속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에 대한 바탕 속에서 성사될 수 있는 연합의 기초 위에, 법과 자유(또한 자유에 대한 표현), 그리고 인권에 대한 보호와 노력은 다시금 숙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영역도 고려된다: 제도들에 대한 개혁, 시장과 생산에 대한 규정들, 복지국가, 쇄신을 통한 노동의 수호 그리고 고용불안정에 대한 투쟁, 인종차별에 대한 거부 그리고 유입되는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없는 포용의 정치, 환경보호, 발전에 대한 세계적이고 유럽적인 차원의 문제들, 국제적인 협력» (p.94). 그리고 이탈리아의 현 정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이러한 지침들을 비평적인 방법 안에서 직면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포퓰리즘은 왜 민중에게 해악을 끼치는가»를 읽으면 적어도 두 가지 커다란 원천fonti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연구와 심화 덕분에 형성된 사유의 명징성(明徵性lucidity)과 소르제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증거한 체험의 힘이다. 추천의 이유로 우리는 이 책이 오늘날과 지난 40년을 다시 이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독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소르제 신부는 이 일을 종합적으로 그리고 아주 명료하게 해냈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이 역사를 이른바 «민주적 가톨릭 사상»Cattolicesimo democratico의 전통 안에 집어 넣었는데, 여기에서 현재 정치체제와 주도적 위치의 정당들을 평가하는 판단기준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정직함은 물론 ‘예언’profezia과 ‘솔직함’parresia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는 얻고자 하는 확실한 모든 답을 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 가능한 오류도 포함시키는 – 역사에 대한 진실되고 구체적인 헌신은 가까운 미래에 올바르게 이해하고 행동하기 위한 기본 자세이다.


1) 편집자 주: Populismo은 인기영합정치, 대중선동정치, 대중주의, 인민주의, 민중주의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어느 쪽도 정확한 뜻을 담지 못하고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정파에 따라 악의적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Populism의 해악을 다루는 이 글의 취지에 맞게 현재 언론 보도에서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는 영어 발음 ‘포퓰리즘’을 선택했다.
2) 참조: B. Sorge – C. Tintori, Perché il populismo fa male al popolo. Le deviazioni della democrazia e l’antidoto del «popolarismo» [민주주의의 변질과 포퓰리즘 해독제], Milano, Edizioni Terra Santa, 2019. I riferimenti alle pagine presenti nel testo sono relativi a questo volume. 본문에서 매 인용문 뒤 괄호 안 숫자는 이 책의 페이지 번호를 가리킨다.
3) 참조: B. Sorge, «Un “probabile Sinodo” della Chiesa italiana? Dal I Convegno ecclesiale del 1976 a oggi», in Civ. Catt. 2019 III 449-458.
4) 역주: 생동하는 이탈리아(Italia viva)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총리직을 지낸 마태오 렌치의 주도로 세워진 사회자유주의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