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경계를 넘어선 선교사

FRANCESCO SAVERIO, MISSIONARIO AL DI LÀ DEI CONFINI

누노 다 실바 곤잘레스 신부 (예수회)
Nuno da Silva Gonçalves S.J.
노우재 미카엘 신부 (부산교구 수정본당 주임) 옮김

La Civilta Cattolica, Q. 4061 (7 Set 2019 III), 421-426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0년 11월29일 마닐라에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와 여러분의 구원, 제가 이 두 가지 중요한 목표를 마음속에 확고히 품지 않았다면, 로마를 떠나 머나먼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어 덧붙였다. “목적지가 멀면 멀수록, 또 저의 선교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은 더욱 시급히 수행할 일이 됩니다.”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또한 같은 말을 했을지 모른다. 그에게도 그리스도와 백성들의 구원이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가장 멀고 어려운 목적지가 가장 시급한 곳이라고 아무 두려움 없이 생각했다. 이러한 열정으로 그는 인도와 말라카(말레이시아), 몰루카(인도네시아), 일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꿈꾸었던 마지막 위대한 선교지, 중국에 들어가려 했을 때 그를 막아선 건 죽음뿐이었다.

  하비에르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하느님의 손 안에 놓인 도구라고 의식했고,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이 쓸모없는 도구를 사용하시어 이방인들이 당신께 대한 신앙을 갖도록 은총을 주셨다고 저는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2) 그때 그는 “쓸모없는 도구”가 포르투갈 임금 요한 3세의 요청으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에 의해 선교에 파견된 것을 알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그와 진실한 관계를 맺었고,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알려주기도 했고, 도움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사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와 함께 요한 3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포르투갈에 먼저 파견되었다. 요한 3세는 인도에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를 찾아 나섰던 서이베리아 반도의 군주였다. 하비에르와 로드리게스는 1540년 리스본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는 1541년 동방으로 떠났고, 로드리게스는 포르투갈에 남아 예수회의 첫 관구장이 되어 젊은 예수회원들의 양성에 전념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동방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선교에 파견되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한 1549년, 마누엘 다 노브레가 신부가 인도한 여섯 명의 예수회원들이 브라질에 파견되어 신세계의 첫 예수회 선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선교 영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더 많은 열매를 맺으러 더 먼 곳까지 가려고 늘 갈망한 선교사였다. 더욱 많이 섬기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몇 가지 반복되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많은 열매를 맺기” “한없이 많은 열매를 맺기” “어머니 성교회의 경계를 크게 넓히기” “우리 주 하느님을 많이 섬기기”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증진하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증대하기”.

  영신수련의 학교에서 양성된 이에게 특별히 고유한 이런 표현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자세히 살펴보겠다.

  1541년 리스본, 고아를 향해 떠나기 직전 하비에르는 이냐시오에게 편지를 쓴다. “이번 주 우리는 인도를 향해 떠납니다. 우리 주 하느님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그 곳의 영혼들은 회심을 위한 자세를 잘 갖추고 있다고, 거기서 오랫동안 지냈던 사람들이 모두 말했습니다.”3)

  1545년 코친에서 그는 리스본에 남아있던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선교사를 더 많이 요청하면서 편지를 보내는데, 이유는 이렇다. “어머니 성 교회의 경계를 크게 넓힐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인도에 보내 주십시오.”4)

  교회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그의 열망은 인도와 말라카, 몰루카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일본과 중국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더욱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1548년 이렇게 쓴다. “매우 믿을만한 몇몇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 열도라고 불리는 근래에 발견된 아주 큰 섬들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들 말로는, 인도의 어느 지역보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확장하는 큰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 백성들은 많은 것을 배워 알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인도의 이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모두, 제가 그곳에 가면 우리 주 하느님을 크게 섬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큰 지각을 지닌 백성이기 때문에 인도의 이교도들에게서 거둔 열매보다 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제 영혼 안에서 의식하는 대로, 저 자신이나 다른 예수회원이 2년 안에는 일본에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풍랑과 중국인 해적들 때문에 많은 선박들이 침몰하고 약탈되는 아주 위험한 여행길이지만 말입니다.”5)

  영혼 안에서 의식하는 바에 주의를 다하면서, 곧, 참된 영적 식별의 과정을 밟으면서 하비에르는 일본에 갈 결심을 하였다. 1549년 그는 이 계획을 성 이냐시오에게 알렸다. “저는 큰 내적 충만을 느끼면서 이 땅에 갈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 예수회원들이 일생동안 얻을 열매를 그 백성들 사이에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 자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6) 그의 말은 참된 예언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은 후에도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 어떤 외부 접촉도 없이 존속했고, 하비에르의 말대로 “그들 자신 때문에” 지속된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예언이었다.

  일본에 도착하고 몇 달 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여전히 신뢰를 가지고 더욱 더 전진하리라 결심하며 말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 어떤 지역도 여기보다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겁니다.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면 예수회가 지속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7)

  자신의 선교 활동의 경계를 넓히려는 열망을 간직하고, 또 중국의 중요성을 더욱 확신하면서, 하비에르는 1552년의 여정을 계획한다. 그해 그는 유럽의 예수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금년 1552년 중국의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참으로 확산될 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에서 미신을 믿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8)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말하는 선교사의 모습

  하비에르는 새로운 여정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출중한 조직자였다. 유럽에서 오거나 지역에서 양성되어 합류한 동료들은 대개 정확한 지침을 받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배치되었고, 그래서 이미 시작된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동방의 사도가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자질을 어떻게 말했는지 다시 살펴볼 만하다.

  이상적인 선교사의 모습은 하비에르가 언급하는 지역에 따라 선명하게 달라진다. 인도의 여러 지역에 관련해서는, 1545년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신의 힘과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학업을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 기도를 가르치고 마을을 방문하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선교사의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9)

  1546년 하비에르는 유럽의 예수회원들에게 지역 주민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의지가 학업이나 지적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상기시킨다.10) 1549년 그는 성 이냐시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선교사들의 필수불가결한 특성을 더욱 명료히 열거한다.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그들 가운데 파견될 이들에게 많은 지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순종, 겸손, 끈기, 인내, 이웃사랑, 그리고 죄 지을 숱한 기회를 피할 고귀한 정결과 같은 많은 덕목이 필요합니다.”11)

  같은 해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를 동방에 초대하면서, 너무 젊은 회원들은 데려오지 말라고 요청했다. “사실 여기는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사이, 겸손, 친절, 인내, 특히 정결 과 같은 모든 덕을 갖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12)

  고아와 코친에 관련해서 하비에르는 고해성사를 주고 영신수련을 지도할 자질이 있는 예수회원들을 요청했다.13) 동방의 포르투갈 요새도시에 관련해서는 그곳의 여러 다양한 그룹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능력이 있는 설교가들을 요청했다.14)

  일본과 중국에 파견될 선교사들에 대해 하비에르는 특별한 자질을 요청했다. 이들 두 나라에 들어갈 선교사들은 지적인 준비를 훌륭히 갖추어야 하는데, “중국인과 일본인 같은 신중하고 통찰력 있는 이교도들이 던질만한 많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15) 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파견될 선교사들에게 특별히 그는 세상의 박해를 겪어보고 경험했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만일 훌륭한 철학자라면 좋고, 변증론 기술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토론으로 일본인들을 모순에 빠뜨리려면 말입니다. 천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늘의 움직임과 일식, 달의 차고 기울임에 대해 일본인들은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합니다. 빗물, 눈과 우박, 천둥, 번개, 혜성과 같은 자연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들은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설명하면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매우 쉽습니다.”16)

  1552년 선교사들의 자질에 관해 이렇게 권고하면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생 동방에서 실천했던 그대로 계속 길을 개척했고, 이후 예수회의 많은 후속 세대들은 그 길을 밟아 나갔다. 사실, 동방의 사도를 정신적 모델로 삼은 후속 선교사 그룹들은 더욱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까지 도달했고, 이들을 통해 하비에르의 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급속한 팽창으로 말미암아 예수회와 그리스도교는 말라바르 해안의 고아와 일본, 중국에 자리 잡았고, 예수회의 많은 후속 세대들은 선교, 특히 동방 선교에 큰 매력을 느꼈다. 1540년 바오로 3세 교황이 승인한 예수회 기본법Formula 에서 천명한 내용, 곧 세상 어느 곳이든지, 믿는 이들이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또 “인도라고 불리는 지역의 다른 비신앙인들에게”17)도 파견되고 싶어하는 원의가 그렇게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의는 1583년에서 1770년 사이 예수회원들이 총장 신부에게 선교파견을 요청하며 보냈던, 현재 예수회 로마 문서고에 보관된 16,000여 통의 서간에서 확인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선종한 1552년, 베이징에 처음 정착한 예수회원 마테오 리치가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탄생했다. 1552년에는 어느 누구도 연관지우지 못했던 두 가지 사건이었다. 50년이 지난 1601년, 하비에르가 꿈꾸었지만 중국에 거의 도착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던 선교여정을 완수한 이가 바로 리치였다.*


1) Paolo VI, s., Omelia nella santa Messa al «Quezon Circle», Manila, 1970.11.29, in https://w2.vatican.va/content/paul-vi/it/homilies/1970/documents/hf_p-vi_hom_19701129.html
2) F. Saverio, s., «Lettera ai compagni residenti in Roma», Goa, 1542.9.20, in Id., Dalle terre dove sorge il sole. Lettere e documenti dall’Oriente 1535-1552, Roma, Città Nuova, 2002, 91s.
3) Id., «Lettera ai padri Ignazio di Loyola e Giovanni Coduri (Lisbona, 1541.3.18)», ivi, 75.
4) Id., «Lettera al p. Simón Rodrigues (Cochín, 1545.1.27)», ivi, 172.
5) Id., «Lettera ai compagni residenti in Roma (Cochín, 1548.1.20)», ivi, 208-210.
6) Id., «Lettera al p. Ignazio di Loyola (Cochín, 1549.1.12)», ivi, 239.
7) Id., «Lettera al p. Paolo (Kagoshima, 1549.11.5)», ivi, 343.
8) Id., «Lettera ai compagni residenti in Europa (Cochín, 1552.1.29)», ivi, 372s.
9) Cfr Id., «Lettera a Ignazio di Loyola (Cochín, 1545.1.27)», ivi, 163.
10) Cfr Id., «Lettera ai compagni residenti in Europa (Amboina, 1546.5.10)», ivi, 191.
11) Id., «Lettera al p. Ignazio di Loyola (Cochín, 1549.1.14)», ivi, 245.
12) Id., «Lettera al p. Simón Rodrigues (Cochín, 1549.2.2)», ivi, 272.
13) Cfr Id., «Lettera a Ignazio di Loyola (Cochín, 1545.1.7)», ivi, 164.
14) Cfr Id., «Lettera al p. Simón Rodrigues (Cochín, 1548.1.20)», ivi, 226.
15) Id., «Lettera a Giovanni III, re del Portogallo (Goa, 1552.4.8)», ivi, 419.
16) Id., «Lettera al p. Ignazio di Loyola (Goa, 1552.4.9)», ivi, 422s.
17) Formula della Compagnia di Gesù, n.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