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여전히 가치 있는 제안인가?

GLI ESERCIZI SPIRITUALI DI SANT’IGNAZIO:
UNA PROPOSTA ANCORA VALIDA?

La Civiltà Cattolica 4059-4060 (3 ago / 7 set, 2019 III), 223-237.

죠반니 쿠치Giovanni Cucci와 막시모 마렐리Massimo Marelli (예수회)
임숙희 레지나 박사 옮김 (영성신학,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무익한 체험?

  영성생활이나 영신수련같은 피정에 보낸 시간이 실질적으로 더 유용하고 수익성이 있는 다른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잘 지내기’stare bene (well-being) 위해, 약물복용이나 걱정 없는 삶이 약속하는 헛된 언약이 아닌 평온을 얻기 위해 영성생활과 관련된 것을 잘 사용하고 거기에서 영성생활의 샘을 길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과가 나타날 때 바로 그런 노력을 포기해버린다. 그러나 이냐시오 성인이 제안한 지시에 따라 이 체험을 해본 사람들은 정반대의 사실을 알게 된다. 용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상황과 거리를 두는 것은 영신수련에서 필수적인데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다. 토마스 머튼은 금욕주의나 영적 실천으로 여기는 내면의 삶이 역사에서 일어난 헌신과 대부분의 사회 변혁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관찰했다. 경험에 의하면 “거리를 두는 것”,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더욱 효과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도 지적 측면에서도 건강을 얻는다.

  유타 대학교University of Utah의 데이비드 스트레이어David Strayer는 30세 이상의 남성과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해냈다. 사람들이 나흘에서 엿새까지 일과 관련된 어떤 활동(작업이든 놀이든)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기술 도구(태블릿에서 휴대 전화까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 그들에게 요구된 일을 하는 능력과 효과가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였다(평균 50프로까지). 자연과 접촉하며 보내는 경우 창의성 측면에서의 차이는 훨씬 더 상관성이 있었다.1)

  소외나 현실에서 탈출하는 것(이른바 ‘의심의 스승들’maestri del sospetto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영적 차원이다. 침묵과 자연, 자신의 깊은 내면(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절대타자와의 만남에 자신을 개방하는 상태)과의 접촉을 특권적인 준거점으로 갖는 이런 영적 차원은 일반적으로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는데도 확실한 도움이 된다.

  이것 때문에 이냐시오 성인은 피정자들에게 이 체험을 더욱 잘 수행하기위해 육체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에서 벗어나라고 초대한다. “매인 것이 적고 가능한 한 모든 것에서 진보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음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모든 영신수련을 준다. 이 경우 보통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과 일상 업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급적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다른 집이나 방으로 옮겨가 지냄으로써 아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매일 미사와 저녁 기도에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따로 지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있고 또 질서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 하느님을 섬기고 찬미하기 위하여 이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것은 하느님께 적지 않은 공이 된다. 둘째, 이렇게 외따로 지냄으로써 정신이 많은 일에 분산되지 않고 모든 관심을 한 가지 일, 즉 창조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의 진보를 도모하는 데에만 쏟으며 그토록 원하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데 우리의 본성적 능력을 더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다. 셋째, 우리 영혼은 혼자서 따로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 창조주인 주님께 가까이 가기에 더욱 적합해지며 이렇게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거룩한 최고 선의 은총과 선물들을 받을 내적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된다”(영신수련 20).

  일상 환경과 활동에서 “분리”하면 자신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서 외부 세계를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높은 곳에서 도시 전체를 보는 체험과 같다. 이것은 도시 안에 잠겨 있을 때에는 불가능하다. 감추어진 형태의 일상생활은 영신수련을 할 때 더욱 명확하고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많은 활동과 헌신적인 행동들은 종종 의식은 깨어있지 못하면서 성공하지 못한 삶의 공허와 삶의 어려움을 덮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의식은 일상 활동과 거리를 두고 하느님 말씀에 비추어 일상과 연결하는 시간을 가질 때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특히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자기 내면에서 솟아나는 모든 것을 마주 보고 다시 읽을 용기를 가질 때(영성생활은 전혀 도피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반복하는 것들을 주목하게 된다. 이것 때문에 영적 체험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큰 변화의 기초가 된다.

  자기 돌봄의 중요성

  영성생활은 스러지는 물거품같은 여러 제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법과 자신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신비가들과 영성생활의 스승들이 겪은 위대한 체험의 기초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저술은 지혜, 삶,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비전을 드러낸다.2) 이런 저술들은 특히 충만한 삶을 향한 계획을 더욱 충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목소리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영신수련의 첫째 가르침은 이것이다. 체념주의, 허무주의, 무관심의 위험을 자제하면서 이런 삶의 스타일로 ‘자신을 교육하는 것’educarsi 배우는 것이다. 이런 위험들에 담긴 공통점은 자기 돌봄, 자신의 내적 차원을 돌보는 노력과 헌신의 부재이다.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고 변명하면서 쉽게 포기해 버린다. 무관심––‘헌신하지 않음’이라는 악덕––은 오늘날 그토록 대중적이고 널리 퍼져있다. 우리 프로젝트와 실현하는 일보다 더 큰 차원에 대해 오늘날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을 반향한다.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 정박한 채 살아간다. 우리 손 안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자신이 전능하다고 착각하는 삶의 태도는 아주 큰 대가를 치뤄야 한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계획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항상 작은 새를 갖고 있기 위해 그 새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다. 사실은 그런 행동은 그 새를 질식시키고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우리 생각과 우리 프로젝트 수준에만 맞추어 산다면 인생은 공허해지고 슬픔과 허무를 느낄 것이다. 희망의 부재는 실존의 초월적 차원이 사라졌음을 기억하라는 경고 신호이다.3)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곤경과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 즉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일하고 투쟁할 가치가 있는지 대해 내면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의 목소리, 매우 설득력 있고 혼란스러운 목소리이다. 내 인생에서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텐데 왜 내가 그런 일을 위해 모험을 해야 하는가?

  무관심은 중요하고 오랜 기간을 요구하는 삶의 선택을 하는 것,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자유를 내어놓는 것, 특히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느끼는 것을 갈수록 힘들게 한다. “오늘날 세상에서 무관심은 더 이상 게으름의 얼굴을 취하지 않는다. 일을 시작할 첫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두 똑같고 개선은 불가능하다’고들 말한다. 이런 합리화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무관심은 힘들게 수고하며 일할 줄 모른다. 특히 헌신할 줄 모른다. 우리 시대에는 사랑조차도 길게 가꾸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 참 지루하구나!”4)

  그러므로 영성수련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단순한 선택 사항이나 기호가 아니다. 영신수련은 잘 사는 법을 배우는데 귀중한 도움을 준다. 영신수련의 목표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쇄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은 구원인데 이미 지금 충만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통합된 제안

  영신수련 시작 부분에서 “질서를 세우라”mettere ordine라는 요구는 영성생활의 또 다른 심각한 위험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과 닮은 종교를 구축하는 것, 불편하고 수고로운 것을 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브리콜라쥬(bricolage) 유형이나 영의 슈퍼마켓을 구축하려는 경향이다.

  영신수련과 관련된 ‘영’spirito이라는 용어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순간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요리 메뉴나 제품 목록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회칙 『신앙의 빛』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정확히 살아있는 유기체에 비교할 수 있는 신앙 체험은 마음대로 협상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신앙은 하나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온전하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모든 조항은 상호 연관되어 있기에 가장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를 부인하면 전체가 약화됩니다. 각 시대마다 신앙의 이러저러한 조항들을 수용하는 것이 더욱 쉽게 여겨지기도 하고 어렵게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전달하여(1티모 6,20 참조) 신앙 고백의 모든 측면이 적절히 보존될 수 있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신앙의 일치가 교회의 일치이기 때문에 신앙에서 무엇인가를 빼내게 되면 친교의 진실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이 교회 안에서 지속해서 존재하는 것에 비유하여, 신앙을 여러 지체가 달린 한 몸, 진리의 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신앙의 온전함은 동정녀로서 교회상과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교회가 그분께 드려야 할 사랑에 대한 충실성과 연관됩니다. 신앙을 해치는 것은 곧 주님과의 친교를 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일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일치와 같습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추기경[2019년 10월 13일 시성]은 이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교의의 연속성을 돋보이게 하는 특징들 가운데 교의의 동화하는 힘을 듭니다. 교의는 교회가 만나는 다양한 문화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최상의 표현에 이르도록 이끌면서 동화합니다.”5)

  영성 차원의 준거 기준은 그 순간에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 차원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건강과 돌봄이다. 치료 환경에서 수술은 흔히 기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때로는 인생에서 필수적이다. 살아있는 존재의 특징은 구조적 통일성이다. 신체의 더욱 좋은 부분을 선택해서 다른 곳에 갖다 붙이려고 부분적으로 몸을 해부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괴물이 나오게 된다. 이것을 인생에 적용하자면 혼돈을 낳게 된다. 영성생활에 대한 많은 제안들은 모순된 측면이 있고 원하든 원치 않든 감정이나 기분의 변덕에 위임될 수 없는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론 조사에서도 응답자 85퍼센트가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방식’에 따른 신앙생활, 곧 종교예식과 고해성사 부정, 혼외 부부관계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높은 경제적, 사회적 신분을 얻으려는 자세에 대한 관대함)이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정치인들의 이중, 삼중 윤리(가톨릭이자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 충실한 신자이면서도 특히 음식과 주류와 관련해서 사치를 즐기는 것), 종교 예배 참석자 지수 쇠락, 소명의 심각한 위기에서 신앙의 감소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이것의 부재로 모든 것이 허용되고 가능하며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긴다)를 잃어버렸다. 믿음에 대한 질문(정치에 대한 질문 다음에)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미성숙(순수한 본능), 방종, 자기애주의, 규칙에 대한 저항 상태로 돌아섰다”.6)

  영신수련과 무상성

  위에서 언급한 저항들 뒤에서 또한 인생의 근본적인 측면의 상실, 곧 무상성과 관대함의 상실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이냐시오 자신도 기억하듯 영신수련 체험에 접근하는 열쇠이다(영신수련 5항 참조). 무상성은 유용성에 따라 종교를 판단하는 상업적 사고방식을 반대하는 가치를 갖고 있다. 우고 사르 토리오Ugo Sartorio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 종교]가 참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유용한가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에게 현대 세계의 혼돈 안에서 생존하기위한 실존의 비타민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관심을 갖는 구원은 […] 여기 지금의 구원이다. 이런 구원은 자신의 심리와 육체의 통합과 개인적으로 흡족한 만족을 누리는 차원과 관련된다. 종교,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나의 보호를 위해 즉흥적으로 혼합 종교인이 된 많은 사람들은―종종 여러 종교 전통의 상징적 유산을 약탈하면서―이러저러한 것을 기대한다. 사후 세계보다는 이 현세에서의 구원을 기대하기 때문에 종교적 선택에 투자할 때 바로 매상을 따진다. 이윤으로 남는 가격이 낮거나 전혀 상품 가치가 없으면 선택을 바꾼다.”7) 내적 빈곤, 신앙을 체험하는 상황에서 관계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무능력이 여기에서 파생한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항상 자신의 여정에 가능한 진리를 읽기 위해 필수적인 순간으로 동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뉴에이지’new age, 단순히 ‘잘 지내는 것’stare bene과 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다른 제안들과 혼동될 수 없다. 사실 정반대 상황이 발생하는 것으로 끝난다. 번영과 만족을 추구할수록 그것들을 더 적게 발견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무관심에서 파생한다. 충만과 내면의 평화는 이냐시오의 하느님 체험, 소명에 관한 복음(루카 5,1-11.27-28; 마르 3,13-19)처럼 거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난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이 그분을 찾지 않을 때나 다른 것에서 하느님을 찾을 때 당신을 발견하게 하신다.

  오로지 거저 주어지고 체험하는 이 무상성 안에서만 자기 인생에서 발견하는 한계, 결함, 무능력과 상관없이 인생이 가치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주거나 존경받기 위해 선을 행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보상이 유일하고 참된 보상(마태 6,1-6.16-17 참조)이기 때문이다. 이 보상은 숨겨진 채 그것을 찾지 않는 순간에만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무상성의 행복이다(참조. 마태 10,8).

  용어의 의미

  “영신수련”이라는 표현은 이냐시오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그는 먼 고대의 전통, 그리스 철학에서 길어낸 초 세기 그리스도교 영성을 다시 취한 것이다. 스토아 전통에 따르면 플라톤적 담화와 유사한 영신수련은 인내로운 경청과 살아낸 감정, 지지와 가능한 위험들을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안내자와의 대면이 특징이다. 안내자는 개인이 그런 지침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실행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고대 철학의 교훈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변화시키라는 초대이다. 철학은 회심, 존재 방식과 생활방식의 변화이다. 지혜를 찾는 것인데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8)

  이 지점에 대해 고전적인 전통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있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을 알고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를 성취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리고 지성적인 차원과 정서적인 차원을 통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지식에 대해서도 모두 언급한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이 실천적인 열쇠를 취한 것이다. 이냐시오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이기고 어떤 무질서한 애착에도 이끌림이 없이 생활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영적 수련들”(영신수련 21항). 위에서 살펴본 의미에서 영신수련은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질서 있게” 결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영이 강력하게 활동하는 시기인 피정은 일상생활에서 그 결과를 느끼게 하는데 결과들이 “시작과 끝이 정해진 일상의 지속성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9) 때문이다.

  피에르 쿠 셀레Pierre Courcelle가 이 주제에 대해 세밀하고 상세한 연구에 수록된 많은 자료는 철학적 성찰과 성경적 성찰의 심오한 통합, 특히 자주 공허한 에티켓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세속’laica 문화와 ‘종교’religiosa 문화 사이의 가능한 관계라는 현대 논쟁에 대해 식견 있는 저자들이 존중과 정확한 지식에 바탕을 둔 대화를 보여준다.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사고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반대로 논쟁하기 힘든 것에 대한 공통점, 다양성에 대한 두려움보다 알고 싶은 욕구가 더 중요한 사색가들을 보여준다. 모든 대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도 기초가 되는 본질적인 교차점은 자신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발견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는 자기 영혼의 내면 깊은 곳 안에서 그분을 찾고 창조된 그의 본질이라는 밭을 파야 할 것이다.”10)

  이냐시오 영성의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양심성찰도 매우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아를르의 체라리오 성인San Cesario di Arles은 설교에서 그의 청중들에게 각 사람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원래 모상에 더욱 닮아가면서 일상 행동에서 드러난 악습을 정화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훈련을 하라고 초대하곤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본성과의 비교, 직역하면 농부의 일처럼 ‘자신을 파는 것’scavo di sé은 인생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수고이다. “이 경우 경작이란 자신의 양심을 검토하고 자신의 생각, 언어,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육적인 모든 일에 거리를 두는 것, 고해의 열의로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 회개와 기도로 생수의 원천에서 길어내면서 영의 열매를 심는 것이다.”11)

  이냐시오는 오늘날 거의 무시되는 이 유익한 훈련을 다시 가져온다. 피정자들이 하느님의 충실하심과 선하심에 비추어 자신의 하루를 다시 읽고 거기에 반대되는 현재의 무질서들을 주목하면서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더욱 자유롭고 질서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12)

  그러나 이냐시오의 제안은 근대의 정신 안에 뿌리박은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자주 ‘의심’sospetto을 활용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 이냐시오가 개인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처럼, 특히 시작된 좋은 사업을 혼동하고 산만하게하는 정서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생각들과 추론들에 대해서 의심하라고 권고한다.13)

  이 예수회 창립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창세기 3장의 진리를 바로 체험한다. 다시 말해 영성생활 안에서는 유혹이 자주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더욱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조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의식하고 느끼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의 경과, 시작, 특히 그 끝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영신수련 333항 참조). 이냐시오는 이것을 “영의 식별”이라고 불렀고 유명한 용어가 되었다. 영의 식별을 하려면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해, 특히 자신의 약점, 무질서한 애정, 걱정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우리 마음의 진정한 비밀번호(패스워드)인데 유혹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것과 함께 들어와 자기 것을 가지고 나가는”(영신수련 332) 원수에게 감히 문을 열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이냐시오의 제안은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들을 소개하는데, 1) 감각sensibilità과 정서affettività의 통합을 목적으로 삼고, 2)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결합한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 안에서나 그것이 전개되는 방식의 안정성 안에서나 자신이 한 선택의 보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 경우에도 두 가지 요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는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의향, 자신의 갈망과 한계에 대해 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 예수님과의 애정 관계이다. 규칙, 장소 구성과 관상으로 이루어지는 영신수련의 여정은 피정자를 두 개의 커다란 은총에 도달하도록 데려가기를 원한다.

  자유의 여정

  이 제안의 목적은 영혼에 독이 되는 것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면서, 더욱 자유롭게 선을 위해 결정하도록 감각을 교육하면서 기억을 정화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에 따른 참된 변화는 우리 방식대로 듣고 평가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이것이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이 의도한 것과 같은 ‘회심’conversione이다. 이것은 문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평을 바꾸는 것, 그것을 고려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14) 위에서 말한 예들을 다시 설명하자면 영신 수련은 수술 작업에 비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정을 교육하도록 돕기 위해서 특히 원한과 분노같은 파괴적인 경향에 저항해야 한다. 악습은 우리를 쉽게 사로잡기 때문에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상한 사실이지만 분노, 증오는 상상 덕분에 새롭게 구체적인 사항이 늘어나면서 더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점점 더 자신이 이런 상태에 중독되게 내버려둔다.15) 타인에 대한 헌신과 사회 정의처럼 아주 좋고 공유할 수 있는 일조차 유혹이 될 수 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Carlo Maria Martini 추기경은 정직하고 관대한 사람들이 올바른 의도로 행동하며 열정과 헌신을 다해 정의를 위해 일하지만 분노에 몰입되어 사람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고 회상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가 돕는 사람들 안에서 일종의 ‘순간적인 과거 장면 전환’flashback처럼 특정 상황을 보고 자신이 체험한 굴욕을 떠올리면서 그 내적 갈등proprie battaglie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16)

  육화된 영성

  영신수련의 또다른 기본 용어는 ‘육체성’corporeità(유형성, 실체성, 구체성 등으로 번역)이다. 주님과의 만남은 다섯 가지 감각, 영혼의 세 가지 힘(기억, 지성, 의지, 45항 참조), 상상력과 정서를 통과한다. 이 체험의 기초에 통합적인 인간학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III, 6, 11)가 말하듯 하느님과 마주하는 장소는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되고 심오한 인식의 장소, “나 자신보다 더 내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영신수련은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진다. 육화에 대한 관상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감각, 특히 시각의 수련이다. “제1요점은 사람들을 한 무리씩 차례로 보는데vedo 먼저 세상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이 각양각색임을 본다. 백인들이 있는가 하면 흑인들도 있고, 평화 중에 있는가 하면 전쟁 중에 있고, 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웃은 이들이 있고,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있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죽어가는 이들이 있는 식이다. 둘째로는, 성삼위께서 천상 옥좌에 앉아서 둥근 땅의 모습과 눈먼ciechi 상태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보시는데osservano 사람들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있음을 생각한다consider. 셋째로는, 성모님과 성모님께 인식하는 천사를 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성찰하며rifletto 유익한 점들을 믿도록 한다”(영신수련 106항, 기울임꼴은 필자 강조). 여기에서 시각에 대해 세 가지의 다른 차원을 보게 되는데 이냐시오가 피정자를 데려가기 원하는 자유와 진리의 여정을 향한 다른 이야기 세 개를 보여준다. “이냐시오는 세상과 사람들을 주의 깊게 침묵 안에서 판단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말하고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 나아감을 알면서 ‘바라본다’.” 스페인어 ‘미라르’Mirar(바라보다)는 이냐시오가 선호하는 단어이다. 현재를 바라보는 것, 현재 안에서 미래에 올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의 어원은 ‘크나큰 존경’ammirazione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어조가 담겨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현존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찰하다, 생각하다, 질문하게 하다, 기도하다’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이 말은 하나의 결정을 준비하거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잴 때, 우리의 환기를 소개하는 시간들과 ‘단계들’passaggi를 식별할 때 더욱 자주 나온다. 걱정이나 착각없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것을 바라보듯이, 또한 동시에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듯이” 바라보는 것이다.17)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이다. “제2요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즉 서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맹세하며 불경스러운 말 등을 하는지를 듣는다ascolto. 또한 성삼위께서 ‘인류를 구원합시다.’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성모님과 천사가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이것들을 성찰하여 이 말씀들에서 유익한 점들을 얻도록 한다. 제3요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들, 예컨대 서로 상처 입히고, 죽이고, 지옥에 가는 것 등을 [바라]본다osservo. 그리고 성삼위께서 하시는 일, 즉 지극히 거룩한 강생 등의 일을 하시는 모습을 [눈여겨]본다guardo. 또한 성모님과 천사가 하시는 일, 즉 천사는 사절의 임무를 하고 있고 성모님은 이를 황송하게 여기며 삼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이를 성찰하여 각각에서 유익한 점을 얻도록 한다. 끝으로, 성삼위나 강생하신 영원한 말씀이나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말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의 담화를 한다. 그리고 이처럼 다시금 강생하시는 우리 주님을 더 잘 따르고 본받도록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필요한 은혜를 청한다. 주의 기도로 마친다.” (영신수련 107-109항, [ ] 표시는 편집자 추가).

  영원한 분과 마주하는 시간과 장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이 되는 다른 말은 시간tempo이다.18) 인간은 시간 안에서 사는 존재이다. 하느님 자신이 유한한 시간 안에서 인간이 그분을 만나게 하셨다. 계시와 함께 육화를 통해 더욱 충만한 방식으로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시간은 인생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 외에 하느님 체험을 하는 방식이다.

  영신수련은 안식일이라는 성경 제도에서 비롯된 위대한 가르침을 다시 가져온다. 우리가 일상 생활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을 재독(再讀)하고 영원하신 분이 우리 삶 안에서 지나가시는 표징을 주목하기 위해서다. 신성한 존재Sacro, ‘분리된 것’, 온갖 현실의 기원에 있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의 무질서한 경향과 습관, 자율주의 같은 영적 엔트로피에 대항하면서 이런 작업을 한다.

  성경은 첫 페이지부터 사물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철학은 성경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철학자들에게는 선에 대한 사상이 가장 높다. 대신 성경 안에서는 이것은 끝에서 두 번째 장소를 차지한다. 신성한 것이 없으면 선은 존재할 수 없다. 선은 기초이며, 신성한 것은 정상이다. 하느님은 엿새 동안 창조된 것들을 보시고 좋다고 여기신다. 그러나 이레째 하느님은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만드신다 […]. 우리는 보통 땅이 우리 어머니이고, 시간은 돈이며, 이익은 우리 동반자라고 믿는다. 이렛날은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시간은 생명이며 영은 우리 동반자임을 상기시켜준다. 성경 언어 안에서 세상은 엿새 동안의 창조 작업을 통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생존은 이렛날의 신성함에 달려있다 […]. 우리는 법령으로 열정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열째 명령은 안식일에 관한 “명령”이 없다면 헛것이다. 십계명 본문의 삼분의 일이 안식일에 대해 할애하고 다른 모든 계명을 요약한다. 우리는 이 두 ‘계명’comandamenti 사이의 관계를 찾아야 한다. 너희 이웃에게 속한 것은 어떤 것도 원하지 말라. 나는 ‘나에게’Me 속한 어떤 것을 너에게 주었다. 이 어떤 것은 무엇인가? 하루이다.”19) 안식일은 하느님의 휴식을 예시하는 체험이다(참조. 창세 2,4ㄱ). 성화 체험은 갈망을 교육하고 자유의 공간을 넓힌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시간의 사물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에 공간의 사물이 점점 자리를 덜 차지하게 된다. 이렛날에 시간과 영원의 이런 본질적인 결합 때문에 창세기는 이렛날에 대해 말할 때 이전에 창조 말미에 항상 반복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를 생략한다. 안식일은 저녁도 아침도, 끝도 없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원성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세상에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과 같다.” 안식일은 인간에게도 하느님에게도 의미가 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밀접한 조약의 표시로서 둘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 안식일은 인간의 영혼에 열려진, 세상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것이다 […]. 영원한 생명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안에 심겨져 있으며” 우리를 넘어 발전한다. 그러므로 미래 세계는 영혼이 육체와 분리 된 후 영혼 안에 떠오르는 사후 상태가 아니다. 미래 세계의 본질은 영원한 안식일 안에 있으며 이렛날은 시간 안에 영원의 맛을 제공한다.”20)

  그러나 이 날에 들어가는 입구는 준비된다. 안식일은 “잃어버린 시간”의 표류에서 시간을 구원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안식일은 또한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다. “탈무드는 안식일을 me’en ‘olam ha-ba이라 부르는데, 그 뜻은 오히려 영원성이나 미래 세계에 가깝다. 우리 인생의 일곱 번째 부분에서 우리가 낙원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이런 사고는 이교인이 보기에는 스캔들이요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나의 계시이다. […]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안식일을 맛보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식을 시작하지 않으면 미래 세상에서 영원의 맛을 즐길 수 없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한 채로 하늘에 도착한 사람들, 안식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운명은 슬프다.”21) 영신수련은 시간 안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가는 입구,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 부활에 대한 기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혼은 다른 곳에서 헛되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데 하느님의 안식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은 지상 낙원으로 산책하러 돌아오신다.”22)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참조: R. Atchley, D. Strayer & P. Atchley, «Creativity in the Wild: Improving Creative Reasoning through Immersion in Natural Settings» [야생에서의 창의성: 자연에 몰입을 통한 창의적 추론 향상], in PLoS ONE (2012) 7(12): e51474. doi: 10.1371.
2) 참조: G. Cucci, “Mistica e riflessione psicologica”, in ID., Esperienza religiosa e psicologia, Leumann (To), Elledici, 20172, 237-292.
3) 희망은 히브리서의 의미 안에서 신앙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4) S. Natoli, Dizionario dei vizi e delle virtù [악덕과 미덕 사전] (Milano: Feltrinelli, 1997), 12s; Per un approfondimento [더 깊은 사항은 다음을 참조], G. Cucci, Il fascino del male. I vizi capitali, [악의 유혹―일곱 가지 대죄] (Roma: AdP, 20122), 313-358.
5) 프란치스코 교종 회칙,『신앙의 빛』Lumen fidei (2013년 6월 29일), 48항; 참조: J. H. Newman, An 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고] (London: Longmans, 1868-81), 185-189.
6) M. Bonanno, http://www.sololibri.net
7) F. Anfossi & A. M. Valli, Il vangelo secondo gli italiani [이탈리아인들의 복음]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2013), 94; 참조: G. Salvini, «La religiosità degli italiani» [이탈리아인들의 종교심성], in Civ. Catt. 2013 III 56-65.
8) P. Hadot, Esercizi spirituali e filosofia antica (Torino: Einaudi, 1988), 166.
9) M. Giuliani, «La voie d’Ignace de Loyola», in Études (Hors-Série, 2013), 45.
10) L. Bouyer, F. Vandenbroucke, & L. Cognet, Histoire de la spiritualité chrétienne [그리스도교 영성사] (Paris: Aubier, 1966), t. III, 2; 46.
11) P. Courcelle, Conosci te stesso. Da Socrate a san Bernardo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에서 성 베르나르도까지] (Milano: Vita e Pensiero, 2010), 204: 저자는 파리의 성 빅토르를 저자로 여기는 De contemplatione et eius speciebus [관상과 그 종류]를 인용한다.
12) 『영신수련』43항: 일반 성찰을 하는 방법. 여기에 해당하는 요점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 우리 주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드린다. 둘째, 죄를 알고 떨쳐버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 셋째,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성창하는 현재까지 시간별로, 혹은 사건별로 헤아려본다. 먼저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말에 대해서 이어서 행위에 대해서 특별 성찰에서 말한 것과 같은 순서로 한다. 넷째, 잘못한 점들에 대해서는 우리 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 다섯째, 그분의 은총으로 이를 개선할 결심을 한다. 주의 기도로 마친다.
13)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자서전』, 20항: 마음속에서 “앞으로 남은 칠십 평생을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해 나가겠느냐?”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오는 듯했다. 그 생각이 원수에게서 오는 것이라 믿으며 그는 마음 속으로 맹렬한 격분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 불쌍한 존재야, 네가 나한테 한 시간의 목숨이나마 보장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렇게 유혹을 견뎌내고 그는 평안을 되찾았다.
14) 참조: B. Lonergan, Metodo in Teologia [신학의 방법] (Roma: Città Nuova, 2001), 268-270.
15) 참조: G. Cucci, P come perdono [용서의 P] (Assisi (Pg): Cittadella, 2011), 53-60.
16) 참조: C. M. Martini, Due pellegrini per la giustizia [정의를 향한 두 명의 순례자] (Casale Monferrato (Al): Piemme), 107.
17) M. Giuliani, «La voie d’Ignace de Loyola» [이냐시오 로욜라의 길], cit., 46.
18) 참조: 영신수련 12항, 이냐시오는 하루 동안 정해진 시간에 충실하게 기도하면서 매 기도마다 네 개나 다섯 개의 기도나 관상에 집중하라고 권고한다.
19) A. Heschel, Il sabato [안식일] (Milano: Garzanti, 1999), 95f; 111.
20) Ibid., 69; 77; 94f.
21) Ibid., 94.
22) Ambrogio, s., Epistola [서한집] 4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