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의 여정에서
인간적 형제애의 초월적이고 계획적인 가치

LA FRATELLANZA UMANA: Il suo valore trascendentale e
programmatico nell’itinerario di papa Francesco

Civiltà Cattolica 4058 (20 lug / 3 ago, 2019 III), 114-126

디에고 파레즈 Diego Fares S.J. (예수회)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옮김 (광주대교구)

  시작하며

  프란치스코 교종의 여정에서 형제애, 즉 형제가 된다는 것은 초월적인 가치이며, 프로그램적programmatico 성격을 지닌다. 만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지나쳐 버리거나’, 혹은 이를 가볍게 다루어서, 마치 ‘형제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관심과 관료주의, 권위주의 등의 유혹들을 피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사용된다면, 이는 긍정적 역동성을 일으키는 그 풍성함과 역량을 충분히 심화시키지 못했음을 뜻한다.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표현 ‘지나가 버린다’를 적극 활용해보자. 왜냐하면, 상처 입은 이에게 다가가지 않기 위한 사제와 레위인의 변명–전염되지 않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라면, 하지만 예를 들어, 율법은 시신에 ‘손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면서도 직계 가족인 경우에는 예외를 두었기 때문이다1). 구체적인 행동들로 표현되는 형제애를 강조하고 심화시키는 것은 그릇된 이분법을 극복하도록 도와준다2).

  형제애는 베르골리오가 교종으로 선출된 날 언급했던 첫 번째 주제이다. 그는 청중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주교-백성의 관계를 “형제애의 여정”으로 정의하면서, 이런 원의를 표현했다: “항상 우리를 위하여, 서로 기도합시다. 온 세상을 위하여, 하나의 위대한 형제애를 이룩하도록 기도합시다.”3)

  그가 시작한 이 형제애의 여정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의미 있는 행보를 가졌다. 가장 최근의 것은 『세계 평화와 공동 공생을 위한 인간적 형제애에 관한 문서』(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une)4)이다. 아부다비에서 서명된 이 문서에서 대이맘과 교종은 일년이 넘는 작업을 통해 서로 합의한 모든 것이 이 ‘초월적 가치’로부터 어떻게 파생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앙은 믿은 이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이들 안에서 지지하고 사랑해야 할 형제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5)

  형제애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모든 실체들 안에는 공통 기원의 신비로 보든 관계 맺음의 가능성으로 보든 그들을 유비적으로 ‘형제’로 여기게 하는 무엇인가 있다. 크리스토프 테오발트(Christoph Theobald)가 말했듯이, 출발점으로서 형제애는 계획적인 가치를 갖는다. 이 예수회 신학자는 교종이 “신비적 형제애”(『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이하 EG] 92항)에 대해 말할 때, 이를 “계획적으로” 말하며, 명확한 자료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요, ‘양식(樣式)’의 문제”6)를 다룬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그리스도교적 양식은 형식이나 입맛의 문제가 아니고, 내용과 복음 선포의 문제, 즉 사목과 교의의 문제”7)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교종직’pontificato을 이 용어가 가진 의미, 즉, 그가 건설했던 “다리들(ponti)”의 의미에 따라 생각해본다면, 기도해달라고 처음 했던 그 요청은 어떤 원의를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부탁이고, 진정한 의미의 출발점이었다. 이에 대해 교종은 스스로 짐을 졌고, 매 걸음마다 행동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의 선택과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집트 술탄과의 만남 800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알-아자르 대이맘과의 만남은 설명이 필요 없는 사건들이며, 오히려 그 의미를 심화시키기 위한 관상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있다.

  이 글은 형제애 주제를 네 단계로 접근할 것인데, (1) 우선 가정에서의 경험을 살펴보고, (2) 이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를 고찰한 후, (3) 철학적 관점에서 더 심화된 성찰을 하며, (3) 끝으로 어떻게 형제애가 경제적·사회적 차원의 이분법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형제들의 역사

  우리는 로마 산 사바San Saba 본당 내 Astalli 센터8)가 운영하는 난민 환대 공동체에서 두 형제와 대화를 했다. 이들은 혈연 관계는 아니고 친구들로, 잠비아인 모로Morro와 파키스탄인 쉐어Sheer이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 시시콜콜 조금씩 다 얘기했다: 우리가 속한 나라들, 기후, 2백만이 조금 넘는 잠비아의 인구(모로는 웃으면서, “우리는 한 나라라기보다 하나의 도(道) 정도”라고 말했다), 2억2천만의 파키스탄 인구와 4천6백만의 아르헨티나 인구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나는 그들에게 가족에 대해, 형제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다. 이 질문에 그들은 미소 지으며,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자신들의 도식에는 맞지 않는 이런 질문 앞에서 그들은 “생각을 재정리”해야 하는데, 그 최고의 단계를 확인한 것은 며칠 전 저녁이었다. 다른 친구인 무스타파에게 그 가족이 몇 명인지를 물었다. 그는 처음에는 머리로 계산하다가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인이 넷이었는데, 자기 어머니로부터 다섯의 자녀가 있었고, 다른 부인들에게서는 […]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형제와 이복형제들 사이에 적어도 28명은 되었다. 물론, 그는 친모에게서 태어난 네 형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부인들에게서 나온 형제들은 조금 헷갈려 했다. 나이 차이에서도 첫 번째 혼인에서 나온 형제들 몇 명은 그보다 서른 살 정도 더 많았다.

  그날 저녁 모로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친모에게 다섯 명의 자녀가 있고, 다른 부인에게 네 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 셰어가 웃으며 말했는데, 모로가 형제가 몇 명인지 나에게 말하기 어려워한 이유는 무슬림들이 여러 아내를 둘 수 있다는 사실때문임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 상황을 이해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과정에서, 내가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같은 아버지에 다른 어머니들의 이복 형제들’이란 사실에는 깊은 실존적 차이를 드러내는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히브리인들과 불교인들 사이에 신학적 문제들로 토론할 때, 궁극적인 신 개념은 유일신이라는 것을 서로 이해하지만, 그 개념 위에 얹어진 형상들–혹은 비형상들–과 정서들은 어떤 이질감을 만들고, 뚜렷한 거리감을 형성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들”에 대해 말할 때,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형상들과 정감, 그리고 이질감 자체도 호감을 갖게 만든다. 독자가 우선시되는 사회 앞에서 형제가 많은 이들의 형제관계 때문에 갖게 되는 타인의 당혹감도 이해가 된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울림과 반향들은 무궁무진하다. 독자라는 사실은,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선택할 수 있는 형제들”을 갖고자 하는 원의를 갖게 할 수도 있고, 혹은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많은 수의 형제들과 이복형제들을 갖는 것은 종족의 폐쇄성으로 이끌거나, 혹은 친척에 대해 더 넓은 정서로 이끌 수도 있다. 형제 관계의 역동성은 언제나 자유로우면서 합의를 근거로 한 결정과 선택의 장소이며, 이를 근거로 해서 서로 대개 형제들이 된다.

  가족이 세상에서의 형제관계를 이끌어준다.

  가족은 “우리가 서로의 차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배우는 곳”(EG 66)이다. 가정생활에서 형제애는 두 번째 아들이자 첫 번째 형제인 이가 태어나면서 시작되는 관계이다. 관계로서는 다른 관계들–부부관계, 부성/모성의 관계와 자녀관계–에 뒤따라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형성되면 앞선 관계들을 변형시키고, 그 관계들을 그 자체로 완성시키면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도록 해준다. 두 번째 아들은 자신의 존재로 이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면서, 좀 더 폭넓은 관계로 문을 열고, 가족을 사랑과 사회적 형제관계에로 활짝 열어준다. 그 이후에 태어난 형제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가족은 사람들의 친교로서, 최고의 인간관계이다. 부부애, 부성, 모성, 친자관계, 형제애는 각 사람이 인간적인 가정에로 인도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9).

  교종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이하 AL)에서 교종은 특별히 한 항목을 “형제자매 되기”에 할애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제자매의 관계는 깊어지고 “가정에서 자녀들 사이에서 형성된 형제적 유대는 타인에게 열린 교육적 환경으로 강화될 때에 자유와 평화의 훌륭한 학교가 됩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형제자매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사는 법을 배웁니다. […] 어쩌면 우리가 늘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가정이 세상에 형제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처음으로 형제애를 체험하며, 형제애는 가정의 사랑과 교육으로 커지며, 그 형제애의 품격이 사회 전체에 대한 약속처럼 빛을 발합니다”(AL 194).

  형제적 사랑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한 말을 들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커다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의심하고 있던 것을 확인해준다. 즉, 다른 아들에 대해서도 큰아들에게 가졌던 똑같은 정열과 강도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어머니가 표현하는 것은, 사랑이란 나누어주는 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심오한 체험이다. 그녀 자신이 확언하듯이, 두려움이 없는 순수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다르게 전달하듯이, 그만큼 그 다름이 이 형제들 사이의 분쟁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교종이 알려주듯이, “우리가 추구하려는 일치는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의 일치’ 또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풍요로워진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는 차이가 공존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이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개성과 특성을 유지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서로 같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AL139).

  이 말씀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것은 모든 획일적 사고들이 당연히 여기는 “서로 같아야 한다는 의무감” 뒤에 숨어있는 오류와 속박을 분별해준다. 이러한 유혹에 반대하며, 아부다비 문서는 이 자유의 개념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신앙의 자유와 다양성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나오는 기원이다.”10)

  형제애의 실존적 성격

  결정적인 점은 형제애 관계에서 주고 받는 ‘동등성과 상이성의 동시 경험’이란 외면할 수 없는 실존적인 특징에 있다. 형제들 사이의 동등성들과 상이성들은 형제들 자신들만큼이나 많다; 그러나 경탄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형제들 각자가 정확하게 다른 형제가 느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똑같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아버지가 될 때, 자기부모들을 이해하게 되지만, 형제들 사이에서 형제애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지속적이며 동등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실존적 성격”이라고 부른 것의 한 특징은, 형제애의 역동성이 안에서 밖으로, 전체에서 부분들을 향해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다. 정서적 유대들은 우선 자녀됨이란 우리 인간 실존의 핵심을 먼저 묶고, 그 다음 다양한 기준으로 여러 인연들을 결속시킨다. 이처럼 결속은 아주 강력한 것이어서, 생각이나 감정, 혹은 선택이 수준에서 올라오는 단절을, 항상 개인적-가족적 [유대감이란] 핵심 정서로 되돌려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우리 형제들에 관해서는, 다르게 생각하고, 이질적인 감정을 갖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단계들 중 하나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고 – 만일 해결할 수 없다면 최소한 스스로 책임지며 –, 그래서 형제간 유대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를 극복하는 역동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를, 형제들 사이의 논쟁들 속에서 볼 수 있다. 논쟁이 생겨서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유대감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다시 회복될 것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 사이에 사이가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논리는 분노의 바이러스에 대항한 해독제이다. 이 바이러스는 이념적이고, 따라서 추상적이다. 타인의 실제적인 현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면 – 연약함과 육체의 한계로 – 폭력을 온화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가상의 미디어들은 이 폭력을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형제애의 실존적인 특징은, 적어도 시각이나 의견의 불일치에서 일어난 싸움이 결정적으로 형제애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관념들을 객관화시키도록 돕는다.

  육화의 연장, 우리가 심판 받게 될 기준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청 사회과학원장 아처Archer 교수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형제애가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들을 주님의 말씀에서 도출해 낸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교종은 이 문장에서 자신의 교종직을 시작할 때부터 가리키고자 했던 두 가지 근본 지향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강생이 형제자매들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EG 179)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실상 우리가 심판 받게 될 기준은 형제애에 기초하고 있다”11)는 것이다.

  따라서 교종은 육화와 최후의 심판 사이 유익한 긴장 상태에 형제애를 놓는다. 우리는 형제애가 – 곧 우리를 형제처럼 가까운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 – 우리를 현재에 위치시켜 놓으면서, 과거로부터 오는 주님의 육화를 연장시켜주고, 미래의 최후의 심판을 미리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애를 통한 육화의 연장은 자유의지의 행위를 요청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은 “누가 나의 형제요 이웃인가?”란 물음 보다, “나는 누구의 형제요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란 물음을 다루는 것이다. 실제로, 영적인 형제애는 혈통이나 육욕이 아니라 성령에서 비롯된 것이고 (요한 1,13 참조),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과정, 즉 “가까이 다가가 / 형제애를 맺는” 과정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는 공동의 아들관계에서 나오는데, 이는 혈통이나 육욕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이다. 그리스도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형제애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후 심판의 기준으로, 우리는 매일 “앞당겨 참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사건의 줄거리는 다양한 해석의 단서들을 열어준다. 그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우리 형제들을 도와주며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도록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를 통해 초월적인 행위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환전 통화’인 진정한 공로를 보장하는 행위들(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의 성취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이러한 형제적 태도를 혼자만의 자기실현과 대비시키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가치가 있는 것은, 자기 기준의 완전성을 위한 행동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행동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 이상,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소 우리들의 공로에 치우친 면이 있다.

  또 다른 해석의 열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참조)에서 말씀하신 것에 기초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선한 행동을 하라는 명령”보다는,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내리시는 재평가에 우리의 시선을 더 고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소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와주는 것처럼, 가정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비록 이러한 행동이 오늘날 위협을 받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민자들의 가정을 돕습니다”처럼 근본적으로 도움을 주는 인간 행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육화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매순간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움직임에 초월성을 부여하시어 가난한 이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모든 것이 바뀐다. 성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성자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순간부터, 형제로서 들어오신다. 형제애는 친밀한 관계로서, 인간 존엄성 측면에서는 평등이 다양성과 조화를 이루고, 주님 편에서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한 가지 유형의 선택을 뜻한다. 자녀들로서, 우리는 선택 받아야 한다. 형제로서, 우리는 형제관계를 맺도록 초대되며, 우리는 받아들여진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형제애를 어떤 현실로 가리키시는데, 이 현실을 통하여 그 분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육화를 우리가 함께 연장하기를 바라신다.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를 가장 도와주는 행위이며, 우리에게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가리켜준다. “먹을 것을 주는 것”에만 강조점을 두지 않고, 다른 이를 형제로 여기며, 이로써 그에게 음식을 주는 행동이, 마치 가족인 것처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양적이고 외적인 기준으로는 주어질 수 없는 그 정확한 척도를 찾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형제애는 부부관계, 부자/모자관계 다음으로 가정의 마지막 관계로 드러난다. 그리고, 앞선 관계들을 열어주면서, 이 모든 관계들을 진정한 사랑(agapē 와 우정)이라는 표식으로 봉인한다. 소유하는 사랑과 풍요로운 사랑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완전할 수 있다. 유일한 아버지는 오로지 하늘의 아버지이시며, 유일한 신랑은 예수님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진실로 서로에게 형제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의 자유가 요구된다. 형제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자유이다. 이는 그 안에 모두가 성장하고,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5-28).

  게다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신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삶에서 체험하는 타자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분을 뵙기 위한” 여정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이는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실존적으로 우리를 내어놓는 것이다12). 그러므로 형제애는 하늘나라의 공간이요, 그 공간 안에서 성령께서 오시고, 사시며, 행동하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형제애라는 공간을 필요로 하시는데, 그 형제애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해주고, 식별을 통해 자유롭게 선택되며, 시간 안에서 발전하고, 동등한 이들이 서로 다를 수 있게 허락해준다.

  진정한 형제애에 대한 바람: 잔치의 비유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안에 진정한 형제애에 대한 바람을 다시 일깨워주실까? 가장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복음서의 수많은 비유들에 나오는 잔치의 이미지이다. 이는 형제애와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결국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같은 식탁에 함께 앉는 것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표징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아버지가 마련해주는 잔치는 수년 동안 왜곡되었던 형제애를 드러낸다. 동생은 형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하고만 대화를 하고 집을 나갔었다. 그리고 그가 회개할 때는 일꾼들만 생각한다. 분명히 형과의 다툼을 예견하면서도 형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형은 잔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고, 동생을 아버지의 착한 아들로 여기지 않는다. 둘 중 누구도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최소한으로도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가 대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라고 부드럽게 되풀이하여 말한다. 아버지는 정의나 이념에 관한 다른 어떤 문제들을 직면하기 전에 이 형제 관계를 부각시킨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당신이 “형제들과 함께” 먹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이 비유를 들려주신다.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제애를 드러내는 “바로 그” 표징이다. 어떤 동기로도 이를 막는 것은,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태도를 재연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머무르시고자 한 것은, 그 본질적 의미 – 즉, 형제와 함께 하는 식탁에서 당신 스스로가 먹혀지는 것 – 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대상물을 택하고자 하심이 아니다. 주님은 빵과 포도주를 선택하시는데, 이것들이 형제애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형제애는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분은 모든 제자들의 발을, 그리고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신다. 식탁의 역동성은 참여자들을 “합당하게 해주는 데” 가장 적합하다. 그들의 다양성 안에서 다 같은 형제로서 합당한 것이다.

  우애, 가족적인 사랑과 우정어린 사랑 사이에서

  공동의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주신다. “~한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형제적 방식을 가리킨다. 교종은 사도권고 『살아계신 그리스도』(Christus vivit, CV)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만일 형제적 사랑이 ‘새로운 계명’(요한 13,34)이고,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면, 젊은이들의 양성과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CV 215).

  이 계명은 모방이라는 가장 특별한 원의를 일깨운다. 즉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모방에 대해 가장 강력하면서도 사심이 없는 원의이며, 이에 대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조화시킬수 있다. 이 형제적 사랑을 함양하면서, 서로 같은 수준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이렇게 온 가족이 성장한다.

  형제애는 또한 우정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린다. 친구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형제들이라고 말한다. 부모님과의 유대가 혈연으로 맺어진 일치의 싹을 제공하고, 이것이 다른 모든 차이들보다 우선하며, 이 차이들을 합법적인 것으로 포용하는 반면, 가족이 아닌 사람과 우정으로 맺어진 유대는 관계성의 자유로운 – 즉 “영적인” – 성격을 표현하고 강조한다. 형제애는 이렇게 두 가지의 사랑 – 혈연에 기초한 사랑과 자유에 기초한 사랑 – 사이에 자리하며, 이 두 사랑을 결합시키고, 혈연의 유대를 자유로운 결속으로 변화시키며, 영적인 유대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형제애를 모든 사회적 관계 속으로 확장하고 개방시키는 선순환적 역동성이다.

  형제애는 서로 같은 이들 가운데 서로 다름을 허락하는 것

  이렇게 형제애는, 교종이 강조한 바와 같이, 핵심 단어가 된다. 만일 경제적 차원에서 “경제영역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을 규정하기에 혼자로도 충분할 ‘효율’이라는 체계와, 사회영역 안에서 여러 주체 사이의 관계들을 규정할 ‘연대’라는 체계” 사이의 현실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는 분명해진다.13)

  “연대성”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형제애가 없는 연대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애는 연대성을 포함하고,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연대성이 불평등한 이들을 동등하게 만들어 주는 사회 정책적 원칙인 반면, 형제애는 동등한 이들이 서로 다른 인간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형제애는 자신들의 본성, 존엄성, 자유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기본권 안에서 동등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능력, 자신들의 삶의 계획, 자신들의 소명, 자신들의 직업, 혹은 자신들의 봉사 능력에 따라 공동선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게 해 준다”14).

  서로 다름을 진실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서로 같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피조물이면서도 인격적 존엄성 안에서의 ‘서로 같음’이다. 다른 이를 존중하는 것과 형제로 느끼게 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정의를 실현하며, 행위 이전에 먼저 존엄성 안에서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형제애의 태도 밖에서는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생각할 수 없다. 형제애의 척도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는데, 모든 형제들이 “형제적”인 것에 동의해야 하고, 이는 그들의 서로 다름이 받아들여지고 존중 받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문제들을 옮기지 않기 위한 열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양극화 안에서, 갈등의 대상이 되는 특정 주제를 넘어서서, 근본적인 동기는 실존적인 영역(이는 생명이나 죽음의 문제인데 자꾸 뒤로 미뤄진다) 으로부터, 경직되고, 무한정 이어지는 이념적인 영역으로 문제들을 옮기는 데 있다. 교종은 자신의 수많은 메시지들 안에서, 특히 회칙들과 사도권고들 안에서, 주요한 문제들을 2차적인 문제들로부터 분별할 것을 강조한다. 형제애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즉 가족, 공동체, 교회, 정치 등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한 핵심 단어들 중 하나이다.

  형제애는 유일하신 아버지께로 향한다. 내 앞에 있는 이웃과 함께 형제적 사랑이라는 구체적 태도를 살아갈 때, 우리는 그분을 어떤 창조신학에 따라 계시를 통해 받아들이고, 또 온전한 자유 안에서 기다리게 된다. 교종은 교종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GE)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계명들과 규정들 가운데서 두 얼굴, 곧 하느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정식이나 명령을 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두 얼굴, 아니 오로지 하나, 곧 수많은 다른 모습에 반영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전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 특히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약한 이들, 힘없는 이들, 궁핍한 이들 가운데서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GE 61).

  형제애는 하느님의 문제를 “이념”이나 “문화”의 영역으로 옮기게 하지 않는다. 이를 정의와 자비, 그리고 구체적인 형제들과의 사랑의 관계라는 현실적인 영역으로 다시 배치시킨다. 이 때문에 교종은 Christus vivit에서 젊은이들을 이렇게 격려한다. ““많이 사랑받으신 얼굴, 우리가 거룩한 성찬의 전례에서 찬양하고 고통받는 형제의 몸에서 알아 뵙는 그 얼굴에 매료된 이들”이여, 달려가십시오” (CV 299).

  형제애는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가 강화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게 해주는 조직을 구성해준다. Amoris laetitia(“사랑의 기쁨”)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가정에 세상을 가정화하는 일을 맡기시어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도록 하셨습니다” (AL 183).

  형제애는 복음을 세상과 유리되도록 하지 않으며,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지구를 돌본다. 따라서 『복음의 기쁨』Evangelium gaudium은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의 삶을 살아가려는 열정”과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한다(EG 179). 교종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GE)는 우리에게 말한다. “예수 자신이 ‘몸소 변방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요한 1,14 참조). 그래서 우리가 용기를 내어 변방으로 간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이미 거기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거기에, 곧 우리 형제들의 마음 안에, 그들의 상처받은 육신에, 그들의 역경과 그들의 황폐한 마음속 깊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거기에 계십니다.” (GE 135)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LS)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LS 1)와 “보편적 형제애”(LS 228)에 관해 말한다. “그의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욱 커다란 측은지심에 찬 성인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셨습니다.” (LS 11). 형제애는 식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이고, 이 식별은 “젠체하는 자기 분석이나 자기중심적인 내면관찰이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 신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형제자매의 선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GE 175).

  이렇듯 프란치스코 교황의 여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즉, 형제적 방식과 형제애의 구체적인 표현들이 그분을 갈등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그러면서 거기에 발이 묶이지 않게 한다는 사실이다. 형제애는 모든 장애들을 극복하는 길을 찾도록 해주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파괴될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는 이 유대를 심화시키고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참조: J. Jeremias, Le parabole di Gesù [예수의 비유들] (Brescia: Paideia, 1973), 248
2) 참조: F. Körner, «Fratellanza umana. Una riflessione sul Documento di Abu Dhabi»[인간적 형제애. 아부다비 문서에 대한 성찰], in Civ. Catt. 2019 II 313-327
3) Francesco, Primo saluto del Santo Padre [교종 성하의 첫인사] (2013, 3.13), in www.vatican.va
4) 참조: Francesco – Ahmad Al-Tayyeb, 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per la pace mondiale e la convivenza commune [세계 평화와 공존공생을 위한 인간적 형제애에 관한 문서] (Abu Dhabi, 2019, 2.4)
5) Ibid.
6) C. Theobald, Fraternità. Il nuovo stile della Chiesa secondo Papa Francesco(형제애, 프란치스코 교종이 보는 교회의 새로운 양식), Magnano (Bi), Qiqajon, 2016, 60.
7) Ibid., 8 (E. Bianchi가 쓴 “서문”)
8) Astalli 센터는 예수회 난민 사목부(JRS)의 이탈리아 본부이다.
9)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incontro promosso dalla Federazione Europea delle Associazioni Familiari Cattoliche [FAFCE, 가톨릭 가족협회 유럽 연합이 주최한 모임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신 연설] (2017, 1.1).
10) Francesco – Ahmad Al-Tayyeb, Documento sulla fratellanza umana…, 같은 문서.
11) Francesco, Messaggio alla professoressa Margaret Archer, Presidente della Pontificia Accademia delle Scienze sociali, in occasione della sessione plenaria [학술대회 즈음에 성청 사회과학원장 마가렛 아처 교수에게 보낸 메시지], 2017년 4월 24일.
12) 복음의 기쁨 272: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속에서 살아가면서”(1요한 2,11)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1요한 3,14)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결국 “어둠에 싸인 세상을 언제나 밝혀주고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유일한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13) Francesco, Messaggio alla professoressa Margaret Archer… cit.
14)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