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COME COMUNICARE IN UNA SOCIETÀ POLARIZZATA

La Civiltà Cattolica, Q. 4047 (2 Feb 2019) I, 222-235

디에고 파레스Diego Fares S.J. 아우스텐 이베리히Austen Ivereigh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전주교구) 옮김

  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다양성 안에서 통합과 만남, 화해와 일치를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 양극화가 모든 공적 또는 사적 토론에 자신의 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좋은 의사 전달자가 되는데 필요한 태도,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양극화는 인류만큼 오래된 현상이지만, 오늘날 광범위한 변화와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자신의 정적들을 국가의 복지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는 미국에서, 증가하는 양극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와 프로젝트를 낳았다.1)

  이 분야에서 사회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가 눈에 띈다. 그는 자신의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도덕적 직관”의 중요성과 사람들이 그 직관을 옹호하기 위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2) 진보파와 보수파는 그들을 갈라놓는 틈을 벗어나려면 그들 각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도덕적 직관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다.

  시민 단체 「선한 천사」(Better Angels)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실질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미국을 해체”하려고 한다.3) 자기 자신을 미국 문화전쟁(culture wars)으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으로 서술한 이 단체의 설립자, 데이비드 블랑켄호른(David Blankenhorn)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7가지 “태도”를 규명하면서 이를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7가지 덕목에서 끌어내었다.

  블랑켄호른(David Blankenhorn)에 따르면, 3가지 최고 덕목은 이렇다. 1) “내부에서부터 비판하라”, 곧 (도덕적 직관이 보통 보편적임을 인정하면서) 공유하고 있는 가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다. 2) “위험 재산을 경계하라”, 곧 어떤 갈등은 악과 반대되는 선에 연관되는 반면에, 대부분은 재산을 두고 갈등이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고 있는 재산을 인정하고 견주어 생각해본다. 3) “둘 이상을 고려하라”, 곧 거짓-갈등으로 이어지는 적대적 두 집단으로 분열하는 경향을 극복하는 것이다.4)

  우리는 미국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열성적인 “진보파”과 “보수파” 사이에서 첨예한 종교간 분열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18년 6월,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an University)는 교회의 사회 교리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양극화를 극복하려는 목적으로 80명의 권위 있는 가톨릭 대표 회의를 후원하였다.5) 발표자 가운데 한 명인 시카고의 대주교, 블레이스 조셉 수피치(Blase Joseph Cupich) 추기경은 “당파”와 “양극화”의 구분을 주지시켰다. 전자는 분열이나 불일치를 수반하지만, 공유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협력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 서로에 대한 고립과 불신은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수피치 추기경은 양극화가 죄악과 같다고 말씀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을 언급하였다. 양극화는 인류를 위한 하느님 계획의 이행과 비교하여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양극화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입장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와 배제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유행처럼 발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6)고 말하였다. 교종은 세계 홍보의 날의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셜 웹(social web)상에서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 곧 그룹과 무관한 사람과 비교하여 대조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의할 때에,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보다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인종, 성, 종교 등에 대하여)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온갖 편견의 분출을 조장하는 것입니다.”7) 교종은 친교 안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보호하는 의무에 대한 가장 심오한 동기로서 서로 지체라는 것에 대해 성찰하였다.8) 또 그는 교회를 “성찬 친교로 엮어진 네트워크”로 서술하였다. “성찬 친교에서는 ‘좋아요’가 아니라 진리, ‘아멘’을 바탕으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아멘’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하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9)

  그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행한 가장 중요한 연설 가운데 하나는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선과 악만 보거나 여러분이 바란다면, 의인과 죄인으로 보는 단순한 환원주의입니다. 많은 형제자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열린 상처와 함께, 현대 세계는 이 두 진영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양극화에 우리가 맞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10)

  교종은 계속해서 가능한 역설을 제시하였다. “외부의 적에서 해방되려고 시도하다가 우리는 내부의 적을 키우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폭군들과 살인자들의 증오와 폭력을 모방하는 것이 그들을 대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은 국민으로서 여러분이 거부하는 것입니다.”1)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거부, 이런 저항은 “그리스도교 건전함과 정통성의 기준”12)이며, 이 기준은 저항하는 방식만큼 행동방식에 달려 있지 않다. 양극화가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는 개인적인 저항은 나중에 언론과 정치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 제50차 세계 사회홍보의 날을 위한 담화에서 교종은 홍보수단의 오용은 “사람과 그룹 간의 외적 양극화와 분열로 이끌 수 있다”13)고 명시하였다. 마찬가지로 공동선을 위해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중재자” 정치인이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건강한 정치와는 달리, ‘중간자’ 정치인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분쟁을 강조하면서 분쟁이 만연해지면 정치는 건강하지 못하다.14)

  예수회의 관구장으로 금방 임명되었을 때인 1974년에 이미 베르골리오는 「영신수련」에서 죄는 “주님과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에 속한 우리를 파괴하는 토대”15)라고 강조하였다. 죄는 인류에 속한 우리도 파괴한다. 나아가 그는 “유일한 실제적인 원수는 하느님 계획을 가로막는 원수이다”16)라고 말하였다. 바오로가 말한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로마 8,28)루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진짜와 거짓을 분별하기 위한 해석학이고”, 하느님 시간과 “순간의 모순”17)이며 이 하느님 시간은 “가장 큰 우리의 모순”18)이다.

  탈극화 “사고방식”

  우리는 이제 양극화된 사회에서 소통을 잘하는 방법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사고방식을 형성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네 가지 태도를 분석할 것이다.19) 두 개의 “아니오”와 두 개의 “좋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양극화를 시도하는 사람과 말다툼하지 말라. 그리고 거짓 모순으로 혼동하지 말라. 그러고 나서 말보다는 행실로써, 궁극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자비를 베풀어라. 그리고 특정 문화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조상들의 언어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교종이 양극화된 상황에서 몇 마디로(때로는 그에게 동작, 의미심장한 정지나 침묵은 충분하였다.) 잘 소통하였던 몇몇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우구스티니아눔(Augustinianum)에서 개최된 세대간 대화에 관한 회의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신의 저서 「세월의 지혜」20)를 소개할 때, 자녀들과 잘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필요성을 드러낸 한 쌍의 조부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조부모는 교종에게 말하였다. “부모로서 믿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때때로 매우 비판적이고, 우리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가톨릭 교육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겠습니까?”

  교종은 잠시 쉬었다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말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전달에 관해 제게 저절로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조상들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항상. 친숙한 언어, …언어. 우리가 마카베오서21)에서 읽은 어떤 일곱 형제의 어머니를 여러분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 이야기는 두 번이나 어머니가 “조상들의 언어로”, 모국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그렇게 전해졌기 때문에 믿음은 집에서 전해집니다.”22) 그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절대 말다툼하지 마세요. 이는 함정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과 말다툼하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나는 이것에 대답할 줄 모른다. 다른 곳에서 (대답을) 찾아라. 그러나 찾아라, ….찾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항상 직접 말다툼하지 않도록 하세요.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조상들의 언어로’, 곧 자녀들이 이해하는 부드러운 말로 증언하세요.”23)

  교종과 한 쌍의 조부모/부모 사이의 짧은 대화의 힘은 의도적이거나 본의가 아니게 양극화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의사소통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이런 두 가지 태도, 곧 조상들의 언어로 증언하는 것과 말다툼하지 않는 것을 채택하는 문제이다. 말다툼하지 않는 것은 분별력을 갖추는 것을 전제한다. 거짓 양극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그 양극화를 뛰어넘는 패러다임, 곧 자비의 패러다임에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다른 두 가지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아일랜드에서 사도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한 기자가 그날 아침 전임 주미 교종 대사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Carlo Maria Viganò) 대주교가 제기한 은폐 의혹에 대해 교종에게 질문하였다.24) 이 질문은 교종이 (맥캐릭 전임 추기경이 연루된 성추행 사건에 대한) 그런 비난이 실제로 사실인지 밝히도록 촉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비가노 대주교가 서술한 용어에 따라 대답하는 대신, 당분간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오히려 그는 기자들을 초청하여 비난의 진실을 직접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의 침묵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소 호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종이 침묵을 지키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에서 사도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다.25) 사도좌 방문 동안에 미얀마의 군 당국이 인정하지 않는 소수민족인 로힝야(rohingya)라는 용어를 (교종이) 사용하는 경우를 두고 양극화가 생겼다. 교종은 미얀마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였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 도착하자마자 그 소수민족에 속하는 16명의 난민과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 교종은 “오늘날 하느님의 존재는 로힝야라고도 불린다.”26)라고 말하였다.

  기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교종은, 그의 공식 연설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 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과 같으며 “이와 비슷한 공격적인 행동은 대화를 끝내고 문을 닫으며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였다. 오히려 미얀마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권리와 시민권을 지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중요성에 대해 말하였고, 이것은 나중에 개별 만남에서 그가 “더 나아가게”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카에서 열린 종교간 만남에서 난민들과 인사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그 용어가 새어 나왔다.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속으로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들을 보낼 수 없다.’ 그래서 저는 마이크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 내가 용서를 구했다는 것을 압니다. […] 저는 울었습니다. 저는 드러나지 않게 울었습니다. 그들 또한 울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의 성찰을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전체 흐름, 전체 여정을 보고, 저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전해야 할 메시지, 자비와 포용에 중심을 맞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었다.

  비난하는 사람과 말다툼하지 말라

  프란치스코 교종의 증언과 조언은, 자녀들이 부모들을 논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 부모에게 보내는 권고와 함께 가족적인 상황이든, 비가노 사건의 경우처럼 언론의 공격으로 가득 찬 비난을 제기하는 공개 토론이든, 양극화된 상황에서 말다툼하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교종이 “말다툼하지 말라”는 기준을 강조한 가족적인 상황은 “양극화 바이러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잠복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사실은 논쟁의 정신에 넋을 잃게 될 때 종종 우리가 빠지는 함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런 사랑의 언어를 이해할 것을 알면서 “조상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과 결합된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공격하는 사람들과 말다툼하지 않는 것은, 그와 반대로 침묵을 지키게 하고, 마치 주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도발에 대답하지 않고 행하셨던 것처럼, “잠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착하지 않은 사람들, 단지 추문만 일삼는 사람들, 단지 분열만 추구하는 사람들, 가정 내에서조차 단지 파괴만 추구하는 사람들과 말다툼하지 말고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27)

  침묵은 비난과 단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막아주며 그 비난과 단죄 뒤에는 언제나 “거대한 고발자”28)의 나쁜 마음이 있다. 공격적인 분노에는 단지 한 가지 태도만, 곧 예수의 태도만이 가능하다. “목사는, 어려운 순간에, 악마가 날뛰는 순간에, 목자가 비난을 당하였던 곳에서, 그러나 많은 이들, 많은 권력자를 통해 거대한 고발자에게 비난을 당하는 곳에서, 고통을 받고 목숨을 바치며 기도합니다.”29) 침묵은 유일한 진정한 모순, 곧 거짓말의 아버지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사이에 시작되는 모순을 드러낸다.30) “어둠과 큰 고통의 순간에, ‘실’과 ‘매듭’이 풀릴 수 없고 상황이 명확해질 수 없다면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침묵의 온화함은 우리에게 더욱더 약함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하면 악마는 대담해지면서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것이고 더 이상 빛의 천사로 위장하지 않고 분명한 방식으로 그의 본심을 보여줄 것입니다.”31) 거대한 고발자를 맞서는 기준은 주님의 방식, 곧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를 이기는 것이다.32)

  “말다툼하지 말라”는 이러한 태도는 양극화의 논리에 따라 편파성(“침묵하는 사람은 동의하는 것이다”)이나 갈등 회피를 의미하는 정적주의적인 평화와 거짓 평화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교종의 사상과 태도에서 더 멀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종은 갈등과 긴장을 창조적 기회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모순을 숨기고 평화를 긴 여정이 아니라 사업인 것처럼 제안하려고 시도할 때 나쁜 마음의 행위를 분별하기도 한다.33)

  1980년 말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콜레지오 막시모(Colegio Máximo)의 학생들에게 제시한 묵상에서34), 베르골리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일치를 거스르는 유혹은 많을 수 있지만, 주된 유혹은 “영성 생활의 호전적인 모델을 부인하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평화주의를 열망해서 또는 모순을 강조하면서 이른 수확에 대한 열망에 이끌려서 이 모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35) 또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거짓] 평화주의는 스스로 협상할 수 없는 것을 협상하고 단죄하는 능력을 잃는 것에 대해 일종의 환상적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묘사합니다. […] 또 다른 유혹은 삶의 호전적인 의미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36)

  마찬가지로 그는 나중에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갈등 앞에서 사람들은 그냥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제 길을 갑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활을 계속해 나가려고 여기서 손을 씻어 버립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갈등 속으로 들어가 그 포로가 된 체 방향 감각을 잃고 그들 자신의 혼동과 불만을 제도에 투사하여,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제3의 길도 있습니다. 이것이 갈등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곧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27항).

  양극화된 세상 앞에서, 그 세상에서 자신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염된 상태로 있을 위험이 매우 큰 모방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의 제안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데 분별력을 지니라는 것이다. 그는 분명하게 선교사 태도를 취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희생자라고 느끼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역동성에 이끌리는 대신에 우리를 하느님 자비와 대화를 나누게 하는 자기 자신의 비난은37)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활동과 함께 같은 보조로 나아간다. 교회는 논쟁 속에 틀어박혀 “반대”하는 대신에, “교회를 더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교회는 박해를 받았을 때 선교사가 되었다.

  오로지 대조만 있는 곳에서 모순을 보지 말라

  말다툼하는 대신에 분별할 필요가 있다.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것은 의견의 충돌뿐만 아니라 마음의 충돌이기도 하다.38) 특히 고통의 맥락에서 나쁜 마음은 불일치를 갈등으로 바꾸려고 한다.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이 말하듯이, “평범한 마음의 가장 중요한 징후 가운데 하나는 오로지 대조만 있는 곳에서 모순을 보는 것이다.”39)

  프란치스코 교종의 네 가지 원칙, 특히 그들 가운데 두 가지는 그런 분별을 위한 기준이다. “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하다.”40)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 요구되는 명쾌함은 그곳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갈등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끈기 있는 명쾌함이다. “실재는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도 명쾌함이 요구된다. 실재는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과르디니(Guardini)에게 모순은 단지 사고와 언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지 실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실재-그가 “구체적인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는 항상 복잡하다. 모든 극이 그곳에 자리한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대조를 이루는 관계 조직이다. 과르디니는 위-아래, 내부-외부, 형상-전체, 구조-활력 사이의 긴장을 서술한다. 실재는 이전 것과 모순되지 않고, 이를 포용하고, 변형시키거나 이를 뒤에 남겨 둔다.41)

  이런 까닭에 교종이 칠레인들에게 써 보냈듯이, “분별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귀담아듣는 법을 배우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의 현실을 귀담아들을 수 있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42)

  베르골리오는 1990년에 발간된 자신의 글 「마음의 결합에 대한 몇 가지 성찰」에서 모순과 대치 또는 대조의 차이를 명확히 다룬다. 모순은 항상 배타적이고 대안에 공간을 주지 않으며 분리된다. 반면에 대치는 오히려 표면적이거나 실제로 반대되는 것이 일치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낸다.43) 스스로 기도하고 분별할 때 나타나는 생각과 애정, 상상력과 움직임의 차이는 “계속되나 분별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것과 구별되는 새로운 내적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44)

  새로운 조화는 항상 조화를 잃을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새로운 종합에 끊임없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어원학적으로 ‘갈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을 형성합니다.”45) […]. 제가 ‘모순’보다는 ‘대치’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 내적 갈등은 예수회에서 다양성의 일치”와, 비슷하게 교회와 사회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인 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성의 일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 기준입니다.”46) 이런 까닭에 교종은 때로는 격동적이고 대립적인 시노드 과정을 신뢰할 수 있었고, 이는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의 새로운 사목 실천을 낳았다. 오랫동안 유혹에도 불구하고, 성찰과 관점의 교환, 기도와 분별을 통해 “좋은 마음이 우세하였다.”47)

  자비의 패러다임에 “좋아요”

  양극화하는 논쟁에 “아니오”라고 말할 때 우리를 강화시키는 분별은 더욱 심오하고 근원적인 “좋아요”에 그 원칙과 기초를 둔다.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좋아요”에 두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 안에서 구체화 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자비는 “본성상 통교”48)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써 모든 거짓 모순을 치유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재이다. 교종이 효과적으로 말하듯이, “자비는 의로움의 완성이요 하느님의 진리를 가장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49) 자비는 최고의 궁극적인 패러다임이고, 우리의 임무는 말과 행실로써 이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 모델을 찾는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계시뿐만 아니라 더 부드럽게 인간적인 것의 계시도 포함하고 있다.

  이웃의 몸에 관한 한, 이른바 “육체적인” 자비 행위의 실천은 좋은 친교로 맺어진 “영적” 자비 행위의 실천으로, 곧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의심하는 사람에게 좋은 의견을 제시하고, 잘못한 사람을 훈계하며, 모욕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인내롭게 참아주며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보완된다. 이러한 자비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이를 알게 되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분명한 메시지를 띄우는 것을 의미한다.

  교종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방식, 모든 말과 모든 행위는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와 부드러움과 용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온유한 자비는 진리를 선포하고 불의를 단죄하는 우리 방식의 기준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우리의 주된 임무입니다(에페 4,15 참조). 사랑으로 말하고 온유함과 자비를 동반하는 말만이 우리 죄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50)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의 통교 방식은 죄인을 의인과 명확하게 갈라놓는 논리를 극복할 수 있고” 동시에 분열되고 단편적이며 양극화된 세상에서 […] “친밀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51)

  좋은 통교의 분별 기준은 모든 그리스도인 삶과 일반적으로 교회의 삶과 그것과 같다. 곧 자비가 성숙하는지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도 여정이 진실한지 분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비에 비추어 변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GE 105)

  “조상들의 언어로” 증언하라

  그러므로 베드로 파브르(Pietro Favre) 성인이 말했듯이, 기쁜 마음으로 “예수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사용하는 표현은 “조상들의 언어로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 증언의 내용은 교종이 “교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곧 순수하게 알려진 것이 아닌 체험된 진리이다. 교리는 참된 일치를 이룬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항상 보탭니다. 하나도 빼지 않습니다. 모아들입니다.”52)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것은 반대와 저항을 낳는다. 그것은 “단지 교회가 참된 분열을 나타내는 교리를 말할 때만입니다.”53)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상과 증언은 대립 “정당들”이 있는 맥락에서,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 또는 영국에서 브렉시트(Brexit)를 두고 갈라진 (유럽연합) 잔류와 탈퇴 지지자들 사이에서 적용될 수 있는 탈극화 과정을 제시한다.

  그것은 무익한 양극화의 치명적인 함정을 피해 가면서 긴장과 불일치를 조정된 다양성과 자비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탁월한 것을 창조하는 기회로서 받아들이는 여정이다. 그것은 불일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꿈을 귀담아들으면서 대화하는 방법이다.

  “모국어”로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가족 대화의 협소한 영역에서든 공개 토론의 광범위한 영역에서든 모두 가치 있는 행동의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소통을 잘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점은 (주고받는) 말 뒤에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모든 백성의 공동생활을 가능케 한 부드러움의 원천이 숨겨져 있는 그곳에서 삶의 기초가 되는 그런 언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이것, 곧 갈라놓는 이데올로기의 추상적인 언어를 상대하기 위해서 모든 실재를 하나로 묶어주는 그런 모국어의 실마리를 찾고 잃지 않는 것은 도전이다.

  “형제 여러분, 의견은 서로 다투어야 합니다. 상황은 분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다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54)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Pew Reserch Center의 설문 결과, “Partisanship and Political Animosity in 2016”(www.people-press.org/2016/06/22/partisanship-and-political-animosity-in-2016), 2016년 6월 22일 참조.
2) J. Haidt, 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 New York, Vintage Book, 2012 (이탈리아 역. Menti tribali. Perché le brave persone si dividono su politica e religione, Torino, Codice, 2013).
3) www.better-angels.org 참조.
4) 다른 네 가지 태도는 대화를 의심하고, 명확하게 하고, 변화시키고 보존하는 중요성과 연관된다. “The Seven Habits of Highly Depolarizing People”, in www.the-american-interest.com/2016/02/17/the-seven-habits-of-highly-depolarizing-people/; D. Blankenhorn, “Why polarization matters“, in www.the-american-interest.com/2015/12/22/why-polarization-matters 참조.
5) “Though Many, One: Overcoming Polarization through Catholic Social Thought”, promosso da Initiative for Catholic Social Thought and Public Life nella Georgetown University 참조. C. White, “Georgetown summit looks to Francis in overcoming polarization”, in Crux, 7 giugno 2018 참조.
6) 프란치스코 교종, “추기경 회의에서 행한 강론”(Omelia nel Concistoro), 2016년 11월 19일.
7) 프란치스코 교종, “Siamo membra gli uni degli altri”(Ef 4,25). Dalle “community” alle comunità. Messaggio per la 53a Giornata Mondiale delle Comunicazioni Sociali, 24 gennaio 2019.
8) 같은 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 참조.
9) 같은 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 참조.
10) 프란치스코 교종, Discorso all’Assemblea plenaria del Congresso degli Stati Uniti d’America, 24 settembre 2015. 다른 기회에 교종은 이렇게도 말하였다. “양극화와 불목의 바이러스가 우리의 사고방식, 이해와 행동방식에 침투합니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태도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풍요로움과 보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종, “추기경 회의에서 행한 강론”(Omelia nel Concistoro, cit.).
11) 성 아우구스티노, Discorsi 46: I pastori, n. 13, in D. Fares, “Io sono una missione”, in Civ. Catt. 2018 I 430 s 참조.
12) 프란치스코 교종, Comunicazione e misericordia: un incontro fecondo. Messaggio per la 50a Giornata Mondiale delle Comunicazioni Sociali, 24 gennaio 2016.
13) J. M. Bergoglio, trascrizione della lezione inaugurale del Corso di formazione e riflessione politica, Cefas, 1 giugno 2004.
14) ID., Nel cuore di ogni padre. Alle radici della mia spiritualità, Milano, Rizzoli, 2014, 139.
15) Ivi, 37.
16) Ivi.
17) Ivi, 46 참조.
18) Ivi, 42. 이 이론이 베르골리오의 생각에서 차지하고 있는 무게에 관하여, 교종에게 예수회원 미구엘 안젤로 피오리토(Miguel Ángel Fiorito, 1906-2005)의 영향, 그와의 대화와 협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M. A. Fiorito, “La opción personal de San Ignacio: Cristo o Satanás”, in Ciencia y Fe XII-46 (1956) 23-56 참조.
19)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영적인 것”은 “현세적인” 기준들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바오로가 말한 바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noun]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anakrinetai]할 수 있습니다”(1코린 2,14-16 참조).
20) 프란치스코 교종, La saggezza del tempo. In dialogo con papa Francesco sulle grandi questioni della vita, Milano, Rizzoli, 2018.
21) 역자: 2마카베오 7장, 특히 21절과 27절 참조.
22) ID., Dialogo intergenerazionale, Incontro con i giovani e anziani all’Augustinianum, Roma, 23 ottobre 2018.
23) Ivi.
24) ID., Conferenza stampa durante il volo di ritorno dall’Irlanda, 26 agosto 2018 참조.
25) ID., Saluto ai giornalisti durante il volo di ritorno dal Bangladesh, 2 dicembre 2017.
26) A. Tornielli, “Il Papa: ‘La presenza di Dio oggi si chiama anche Rohingya’”, in Vatican Insider, 1 dicembre 2017.
27) 프란치스코 교종, Omelia in Santa Marta, 3 settembre 2018.
28) 2018년 9월 3일과 20일 사이에, 비가노 대주교의 비난에 따른 언론 침묵 이후 교종은 “거대한 고발자”에 맞서 강론을 여덟 차례 행하였다. 거대한 고발자에 대해 교종은 적절한 상황에서 태도, 곧 하느님 말씀의 선포하는 태도를 폭넓게 서술하였다.
29) ID., Omelia in Santa Marta, 18 settembre 2018.
30) 사탄은 “그렇게 초라하고 지쳐있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마치 바늘에 물려있는 미끼를 먹는 굶주린 고기처럼, 사탄은 그곳에 가서 예수를 삼켰고 […], 그런데 그 순간에 신성도 삼켰습니다. 그것은 고기와 함께 바늘에 물려있는 미끼였기 때문입니다”(ivi, 14 settembre 2018).
31) ID., Non fatevi rubare la speranza, Milano, Mondadori, 2013, 85-108. A. Ivereich, “A time to keep silence”, in www.thinkingfaith.org/articles/time-keep-silence/; D. Fares, “Contro lo spirito di ‘accanimento’”, in Civ.Catt. 2018 II 216-230 참조.
32) 프란치스코 교종, Omelia in Santa Marta, 3 settembre 2018 참조.
33) 스파다로 신부와 나눈 대담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립은 여정을 열어줍니다[…]. 저는 그 대립을 좋아한다고 말해야 합니다.”(J. M. Bergoglio – Papa Francesco, Nei tuoi occhi è la mia parola. Omelie e discorsi di Buenos Aires 1999-2013, Milano, Rizzoli, 2016, XIX).
34) J. M. Bergoglio, Natale, Milano, Corriere della Sera, 2014, 107 ss 참조.
35) Ivi, 113.
36) Ivi.
37)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내 불행,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부끄러움의 감정입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종, Omelia in Santa Martha, 6 settembre 2018).
38)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in Civ.Catt. 2018 II 214 참조.
39) G. Thibon, El pan de cada día, Madrid, Rialp, 1952, 63, citato da López Quintás nell’Introduzione a R. Guardini, El contraste, Madrid, BAC, 1996, 11.
40) 「복음의 기쁨」 226-230항. 프란치스코 교종, Lettera al Popolo di Dio pellegrino in Cile, 31 maggio 2018; D. Fares, “Francesco e lo scandalo degli abusi in Cile”, in Civ.Catt. 2018 III 155-166 참조.
41) 베르골리오에 끼친 과르디니의 영향에 관하여, D. Fares, “Prefazione. L’arte di guardare il mondo”, in R. Guardini, L’opposizione popolare, cit.; M. Borghesi, Jorge Mario Bergoglio. Uno biografia intellettuale. Dialettica e mistica, Milano, Jaca Book, 2017 참조.
42) 프란치스코 교종, Lettera al Popolo di Dio pellegrino in Cile, cit.
43) J. M. Bergoglio, Non fatevi rubare la speranza, Milano, Mondadori, 2013, 152 참조.
44) Ivi, 151. rm 과정은 평화와 구별되는 내면의 대화에서 일어난다. 베르골리오는 “우리의 내면의 체험을 자세히 살펴보면 긴장은 -새로운 조화로- 다양한 특수성의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더 높은 수준에서 해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ivi, 152)고 말한다.
45) “성 이냐시오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의 분별과 싸움의 특별한 장소인 「영신 수련」에서 이를 마주치지 않을 때 의심을 갖게 된다.”(ivi)
46) Ivi.
47) 프란치스코 교종이 공개적으로 발간되었던 Pope Francis, the Family and Divorce. In Defence of Truth and Mercy(New York, Paulist Press, 2018) 책의 저자인 스티븐 월포드(Stephen Walford)에게 보낸 편지 참조.
48) 프란치스코 교종, Comunicazione e misericordia: un incontro fecondo, cit.
49) GE 105항; AL 311항 참조.
50) 프란치스코 교종, Comunicazione e misericordia: un incontro fecondo, cit.
51) Ivi.
52) J. M. Bergoglio, Natale, cit., 116.
53) Ivi, 114.
54) 프란치스코 교종, Lettera ai vescovi cileni, 15 maggio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