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의미 되찾기

한병철의 사상에 관한 고찰
RITROVARE IL SENSO DEL TEMPO
Riflessioni sul pensiero di Byung-Chul Han

마르크 라스투앵 S.J.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 옮김

  한병철은 재독 한국 철학자로 1959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한 다음 1985년에 독일로 갔다. 장차 철학자가 될 사람으로서 이는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94년에 마르틴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양 사회의 발전에 관해 간결하면서도 주목을 끄는 다수의 독창적인 저서들을 출판했다.

  그의 글에서 두드러진 점은, 다수의 문헌에 기초한 독일식 엄정함과 일종의 아시아식 소박함을 놀라운 단어들의 절약으로 조화시키는 능력이다. 그의 책 하나하나가 정확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여정을 묘사하는데, 이 안에서 그는 다른 저자들이 직접 언급한 내용과 그 반대로 자신이 변경하거나 의미를 약화시킨 것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힌다. 그의 어조는 언제나 매우 신중하고 예리하며 결코 개인적 공격을 하거나 지나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한병철은 꿀벌이 꿀을 모으듯이, 지혜롭게 모아들이는 철학을 한다. 또한 그는 주의깊게 주변을 바라보며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처럼 사회학을 한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신념들에 대한 그의 박식함과 신중함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자주 읽고 인용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여러 언어로도 번역된 그의 저서들 가운데 아홉 권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 『피로사회』1)는 1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

  한병철의 사상에 입문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는 것은 그의 2009년 저서 『시간의 향기: 머무름의 기술』2)이다. 이 책에서 그가 다루는 몇 가지 주제들은 이후의 책들에서, 특히 『피로사회』와 『투명사회』3)에서 다시 언급되고 완결된다. 이 한국인 사상가에 따르면 21세기 인류가 체험하는 인간학적 변동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근본 요소는 인간과 시간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프랑스 사회학자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를 비판적으로 다시 읽는데, 그의 저작 『피곤한 자아: 우울증과 사회』4)는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다. 분명 에랭베르는 현대 문화의 장기간에 걸친 변천을 간파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언명령은 현대의 주체들에게 “삶에서 성공해라! 너 자신이 되어라! 네 꿈을 실현해라! 네 재능들을 잘 활용하라!”고 부담을 지운다. 그리고 이 프랑스 사회학자는 이런 부담이 잠재적으로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스트레스와 새로운 불안을 일으킨다는 것을 파악했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5)

  한병철은 에랭베르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보완하여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이러한 분위기를 정서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자기 이익에 활용하기 위해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개인으로부터 최대한을 얻어내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논박에 따르면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한다는 데 있다.”6) 그런데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performance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7) 그러므로 많은 저자들이 지적했듯이 우울증과 소진이 21세기의 개인에게 이토록 전형적인 질환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어서 한병철은 현대의 개인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 경제 체제에 대한 분석을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현재의 특정 철학 담론들과 자본주의 생산체제 이윤 사이의 공모 관계를 고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입장이 이념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심리적 경향이 사목적 주체들, 사제와 평신도 또는 수도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마치 대기업 관리자들처럼 그들은 매우 동기가 강하고 정서적으로 자기 일에 아주 깊이 열중한다. 그들에게 그 일은 단순한 “노동”을 훨씬 넘어서는 무엇이다. 종종 강력한 초-자아의 지배를 받는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소임의 무게를 계속 가중시키면서 다른 이들보다 더 끊임없는 시간과의 싸움에 지쳐 쓰러질 위험에 처한다.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란 강한 동기부여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수록 이런 싸움은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8)

  한병철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현대의 개인이 어떻게 시간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지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수많은 요소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에 쫓기고 파편화되는 느낌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더 경제적이거나 심리적인 전망에 따라 움직이는 다른 저자들과 달리, 이 한국 철학자가 중요하게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입문의 시기가, 더 일반적으로는 문턱의 시기가 사라지는 현상이다. “다만 삶은 더욱 분주해졌고, 삶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과 방향 설정이 더욱 어려워졌을 뿐이다. 시간은 산만해진 까닭에 더 이상 질서를 세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삶에는 뚜렷하고 결정적인 결절점이 생겨나지 못한다.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늙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불시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죽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어려워진 것이다.”9) 그런데 “문턱은 물론 괴로움과 정념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행복을 선사하기도”10) 한다.

  한병철은 또한 문턱과 예식의 사라짐이 세속화로 인해, 그리고 종교적 리듬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더 부추겨졌음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종교적 리듬은 직업적 사회적 리듬의 압박에 대해 – 물론 제한적이지만 – 실제적인 제동 장치를 구성했고 지금도 구성할 수 있다. “전반적인 탈시간화는 의미를 형성하던 시간적 매듭, 종결, 문턱, 이행 등의 소멸을 가져온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더 강화된다. 중력의 부재로 인해 사물들은 슬쩍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무것도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적einschnei-dend이지 않다. 아무것도 최종적이지 않다. 어떤 결정적 단락Einschnitt도 생겨나지 않는다.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만다.”11) [반면] 안식일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선사하는 기회를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한병철은 독일 철학자이자 수필가로서 시간의 가속화에 대한 고찰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와 거리를 둔다.12) 이 한국 철학자에게 현대 질병의 근원은 시간의 ‘가속화’라기보다 그 ‘파편화’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간다는 인상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머무를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 지속의 경험이 대단히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 […]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더 빨리 죽고 만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짧은 삶일 뿐이다.”13)

  시간의 분산과 죽음에서 벗어나기

  한병철은 딱 들어맞아 보이는 단어들로 우리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는 산책의 유유함도, 떠도는 듯한 방랑자의 경쾌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 신경과민, 막연한 두려움 등이 오늘의 삶을 규정한다. 사람들은 유유자적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정보에서 저 정보로, 이 이미지에서 저 이미지로 황급히 이동한다.”14)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의 삶은 받침대Halt15)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16)

  이러한 시간과의 관계 변화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종적인 책임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며, 이것은 혼인생활과 수도생활 모두에서 벌어지는 오늘날의 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결정도 최종적이지 못하다. 한번 내려진 결정은 새로운 결정에 밀려난다.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즉 운명의 시간은 폐기된다.”17)

  시간과의 새로운 관계는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 외에 죽음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에 대한 한병철의 숙고는 점점 더 뜨거워지는 안락사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것이다. 분명 안락사 논쟁은 많은 사회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령화 현상과 그것이 더 젊은 세대들에게 가하는 부담의 결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공동체 소속감의 약화와 현대사회 개인주의에 의해 강화된 자율성이란 계몽주의적 이상이 점차 증대된 결과만도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단기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흐름 안에서 폭넓은 서사적 종합을 이루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인들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병철은 니체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불시에 끝나버리는 삶에 맞서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죽음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제때 죽어라!’라는 교훈은 여전히 낯설게 들린다. 제때 죽어라.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물론, 제때 산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제때 죽을 수 있으랴?”18)

  말하자면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종결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인데, 이는 죽음을 또 하나의 의지적 결정으로 만들려는 열망으로 해석된다. 즉 그것은 더 이상 스스로 할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죽음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이면서, 죽음마저도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우리 자아의 일련의 결정들 가운데 하나로 새기고자 하는 의지이다. “죽음은 인생 밖에서 와서 인생을 불시에 종결시키는 폭력이다. 인간은 불시에 때 이른 끝장을 맞이한다. 죽음이 인생, 삶의 시간 자체에서 도출되는 결말이라면, 폭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결이 있을 때만 인간은 삶을 스스로 마지막까지 살 수 있고 제때에 죽을 수 있다.”19)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삶 전체를 일관되고 통일된 이야기가 되게 하는 능력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고찰한다. “사건들의 장황한 나열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고도의 서사적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히 짧은 삶도 충만한 삶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가속화의 테제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분주하고 초조해진 원인이다.”  진리에 관한 숙고

  한병철은 더 심오한 진리의 본성에 관해 몇 가지 놀라운 고찰을 한다. 현대 세계의 많은 개념들이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바와는 반대로, 진리는 모든 대인 관계와 모든 사회와 무관하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Halt 없이는 자유도 없다.”  선택에 의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고립된 개인은 진리를 찾는 데 있어서 불리하다. “진리 역시 관계적인 사건이다. 사물들이 유사성이나 혹은 다른 종류의 근친관계로 인해 서로 교통할 때, 사물들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관계를 맺을 때, 그렇다, 사물들이 사귀기 시작할 때, 진리는 일어나는 것이다. […] 유사관계, 친교관계, 근친관계를 통해 비로소 사물들은 진리가 된다. 진리는 단순히 우연적인 병렬 상태와 반대된다. 진리는 결속, 관계, 가까움을 의미한다. 오직 강렬한 관계만이 사물들을 진짜로 존재하게 한다.”  관조에 관한 고찰

  저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병철은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와 대화한다. 니체와 관련하여, 그는 그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쉼과 멈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잘 파악했다고 본다. “거친 일을 기꺼워하는 너희 /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모든 자들아 / 너희는 잘 참지 못한다. / 너희의 부지런함은 도피이며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의지이다. /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도 적어 지리라. /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속에 담겨 있지 않구나. / 게으를 수 있을 만한 내용조차 없구나!”  한편 하이데거는 반세기 전에 이렇게 고찰했다.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프랑스의 위대한 가톨릭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1947년에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더 서둘러 가는 것, 더 빨리 뛰는 것. 서둘러 가는 것 – 그러나 어디로? 아!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은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 ‘파리에서 마르세이유까지 반시간, 대단하다!’ 너희 아들딸들은 죽을 수 있지만,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너희의 시신들을 빛의 속도로 운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있는가? 아아! 너희는 너희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너희 각자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마치 자신의 피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빨리 달려가려 하는 듯이… 현대 문명이 내적인 삶을 거스른 일종의 공모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문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한병철은 이러한 진단에 공감하고,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 가는 행동과 선택을 한다. 중용을 취하는 깊은 신중함, 사회 관계망에 참여하기를 포기함, 스마트폰 사용을 포기함, 관조의 시간을 갖게 해 주는 한적한 생활의 선택.

  관조는 이 한국 철학자에게 소중한 주제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가 나눈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구분으로 되돌아가지만, 어떤 면에서 아렌트의 철학을 수정한다.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을 그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강제의 공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어떤 관조적 계기도 들어 있지 않은 활동적 삶은 아무 내용 없는 공허한 순수 활동으로, 그리하여 안절부절못하는 부산함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몇 가지 주제들에 관해서는 한병철이 “보수적” 사상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무조건적 투명성 거부, 피정과 침묵과 관상 및 전례와 의식에 대한 찬사,  한병철 고유의 형이상학적 위치를 자리매김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분명 그가 의도한 것이며 또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특정 신앙고백을 선호한다고 스스로 명시적으로 선언했다면, 자신의 종교적 신조를 공공연히 고백하기 쉽지 않은 독일에서, 특히 베를린의 지적 환경 속에서는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그가 스스로 종교를 반대한다거나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더라면 우리 삶 안에서 멈춤과 안식일의 재발견, 관조를 위한 시간, 시간과 고전적 관계를 맺는 수도승적 삶의 방식 등을 지지하는 그의 많은 논거들이 약해졌을 것이다. “관조적 삶을 되살리는 것만이 사람들을 노동의 압박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관조의 본질을 “사랑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하느님 곁에 머무는 것”으로 정의할 때에 그는 신비주의 전통 전체에 조심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은총을 이렇게 정의한다. “반면 은총은 은근하고 간접적인 것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행위로 놀이를 하며, 목적의 경제에서 벗어나는 행위와 형태들의 자유로운 놀이를 전제한다.”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니체를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결론

  이 글은 한병철 사상의 풍요로움을 요약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한병철은 지금 시기에 주목해야 할 저술가로서 겸손하면서도 박학다식하고 언제나 예의 바르며, 우리 삶의 단조로운 일상에 근거하여 철학적 성찰을 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이다. 그의 저술은 현대의 우리 삶을 살펴봄으로써, 21세기 인간의 실존을 이루는 데 위협이 되는 요소와 구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한 성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Byung-Chul Han, Müdigkeitsgesellschaft (Berlin: Matthes & Seitz, 2010); it. La società della stanchezza (Roma: Nottetempo, 2012); en. The Burnout Society (Stanford UP, 2015); 한국어판은, 김태환 역,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2) Id., Duft der Zeit. Ein philosophischer Essay zur Kunst des Verweilens (Transkript 2009); it. Il profumo del tempo. L’arte di indugiare sulle cose (Milano: Vita e Pensiero, 2017); 김태환 역, 『시간의 향기: 머무름의 기술』 (2013).
3) Id., Transparenzgesellschaft (2012); La società della trasparenza (Roma, Nottetempo, 2014); ko. 『투명사회』 (2014).
4) A. Ehrenberg, La Fatigue d’être soi: dépression et société, Paris, Odile Jacob, 1998; it. La fatica di essere se stessi. Depressione e società (Torino: Einaudi, 2010); 한국어 미번역.
5) 한병철, 『피로사회』, 94.
6) Ibid., 26.
7) Ibid., 103.
8) 참조. I. Pascal, Le burn-out. Maladie du don, Paris, Quasar, 2015. 신학자이며 의사, 철학자인 저자는 특히 사제들의 삶에 관하여 트리베네토 주교들이 진행시킨 설문 조사를 기초로 한다.
9) 한병철, 『시간의 향기』, 34쪽.
10) Ibid., 70.
11) Ibid., 52.
12) 참조. H. Rosa, Alienation and Acceleration: Towards a Critical Theory of Late Modern Temporality, Malmö-Aarhus, Nordic Summer University Press, 2010 (이탈리아어역, Accelerazione e alienazione. Per una teoria critica del tempo nella tarda modernità, Torino, Einaudi, 2015); 한국어 미번역, <소외와 가속화: 후기 근대 시간성에 대한 비판 이론을 향해>
13) Byung-Chul Han, Il profumo del tempo, cit., 43-44; 한병철, 『시간의 향기』, 63.
14) Ibid., 61.
15) Ibid., 21: 독일어 Halt는 “받침대와 정지, 멈춤”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16) Ibid., 62.
17) Ibid., 71.
18) Ibid., 22 재인용: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 Ibid., 30.
20) Ibid., 32-33.
21) Ibid., 62.
22) Ibid., 82-83.
23) Ibid., 162;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24) Ibid., 105; M.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1939); 이기상 역,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까치, 2001); it. Concetti fondamentali della metafisica. Mondo-finitezzasolitudine (1983).
25) Ibid., 107; M.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it. Essere e tempo (2005)
26) G. Bernanos, Français si vous saviez, Paris, Gallimard, 1995, 1024.
27) 한병철, 『시간의 향기』, 158: 한국어 판에서는 vita contemplativa가 “사색적 삶”으로 번역돼 있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관조적 삶”으로 수정했다. 이하 ‘사색적’은 ‘관조적’으로 수정. [편집자 주]
28) Ibid., 164-165.
29) Ibid., 167.
30) 참조. Id., La società della trasparenza (2012); 김태환 역, 『투명사회』 (2014), 53.
31) Id., 『시간의 향기』, 127.
32) Id., 『투명사회』, 42.
33) Id., 『시간의 향기』,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