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 드러난 영적 식별 오디세우스와 오르페우스 사이에서

IL DISCERNIMENTO SPIRITUALE IN «CHRISTUS VIVIT»
Tra Ulisse e Orfeo*

디에고 파레스 S.J.**
최원오 빈첸시오 옮김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 자유대학원 원장)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1) 프란치스코 교종이 ‘젊은이들과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ai giovani e a tutto il popolo di Dio, 곧 사목자들과 신자들 전체에게 사랑을 담아 보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종 권고의 제목이다. 이 문서에는 교종에게 의견을 제시한 ‘전 세계 수많은 신자들의 목소리’migliaia di voci di credenti di tutto il mondo와 믿지 않는 많은 젊은이들이 교종에게 던진 물음들이 메아리치고 있다(CV 3-4항 참조).

  마지막 장인 제9장의 제목은 ‘식별’il discernimento이다. 여기서는 21개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녀야 하는 본연의 모습인 그 놀라운 다면적인 실재’(CV 207항)를 간결하면서도 중요하게 묘사한다. 9장 도입의 다섯 개 항에서 교종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GE)2)의 ‘내용 일부를 다시 성찰하면서’riprende alcune riflessioni 이를 ‘세상 안에서의 성소 식별’al discernimento della propria vocazione nel mondo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이어지는 열여섯 개 항목들은 세 가지 주제로 묶인다. 첫째, ‘네 성소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Come discernere la tua vocazione (‘너’라는 표현에 유념하자). 둘째, 9장뿐만 아니라 권고 전체의 중심 주제인 ‘벗이신 분의 부르심’La chiamata dell’Amico. 셋째, ‘경청과 동반’Ascolto e accompagnamento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소와 식별 과정을 동반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사용하는 방법들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 요소들을 나누어준다.

  교종이 자주 언급하는 그 유명한 ‘다면체’poliedro 교육론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일 없이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십면체 도형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이 원을 그리거나 동그란 풍선을 부는 일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이들은 학교에서 경험해본 기하학 실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식별에 관한 이 장을 읽으려는 사람은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면체의 각 ‘면’faccia은 다른 면들과 연결되어있기도 하고, 하나인 중심을 그때그때 다른 각도에서 드러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형의 든든한 ‘기초’base로서 구르는 생각의 리듬을 잠시 멈추고 구체화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면과 다양한 색상을 지닌 기하학적 도형을 손에 쥐고 돌리면 한 면에서 멈추다가 그 옆면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식별의 단면들은 저마다 중요한 그 무엇과 맞닿아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근본 식별’discernimento fondamentale로 통하는 창들이다. 교종은 이 근본 식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첫 번째로 식별하고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젊은이의 벗이 되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식별입니다.”(CV 250항)

  그리스도와 맺는 우정은 이 교종 권고의 핵심 주제이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는 주님과 나누는 우정의 노래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젊음은 젊은이를 위한 축복의 시간이며 교회와 세상을 위한 은총입니다. 젊음은 기쁨이고 희망의 ‘노래’canto이며 축복입니다. 젊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삶의 이 시기를 다만 어른이 되기 전의 과도기가 아닌 소중한 시간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CV 135항)

  이 권고의 가장 아름다운 한 대목에서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저 자신도 포함되는 노인들에게 어떤 당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노인에게 기억의 지킴이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나의 성가대를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노인들을 위대한 영적 지성소의 영원한 성가대로 상상해봅니다. 이 성가대에서 울려 퍼지는 탄원 기도와 찬미 노래가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공동체 전체를 지탱해 줍니다.(CV 196항)3)

  참된 노래와 세이렌의 노래를 식별하기 위해 교종은 권고에서 오디세우스와 오르페우스라는 두 표상을 대조한다. 둘 다 긍정적이지만, 교종은 음악의 신(아폴론)과 웅변의 여신(칼리오페) 사이에서 난 아들 오르페우스를 더 높이 친다.

  오디세우스는 뱃사람들을 홀려 배가 암초에 걸려 난파되게 만드는 세이렌들의 노랫소리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고 동료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한편, 오르페우스는 세이렌들의 노래에 맞서 다른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더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여 오히려 세이렌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중대한 과제는 바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소비주의 문화의 되풀이되는 유혹에, 신중하고 단호한 결단과 연구, 지식, 나눔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CV 223항)4)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컨대 별 모양 큰 이십면체와 같은 일부 다면체는 꼭짓점을 연장하여 더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며칠 전 교종 프란치스코와 이 권고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느낀 감동을 전했다. 매우 아름다운 권고였고,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으며,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문헌을 설명할 때 특별히 참고할 것이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 질문했다. 교종은 할 말을 곰곰 생각할 때 늘 그러하듯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밖으로 끄집어낼 것이 많습니다.”Ci sono molte cose da tirar fuori 이 말씀은 권고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풍요로움에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끄집어내라’estrarre라는 초대였다. ‘연장한다’prolungarli는 의미에서 다면체의 이미지와 그 꼭짓점을 ‘뽑아 당기는’tirar fuori 이미지가 떠올랐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선물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이 선물을 누리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CV 289항)

  들어가는 문단: ‘다시 성찰하고 적용하기’Riprendere e applicare

  프란치스코 교종은 앞선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이미 식별에 관하여 ‘전반적으로’in generale 다룬 바 있기에, 여기에서는 ‘세상 안에서 우리의 고유한 소명을 식별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성찰을’(CV 278항) 다시 살펴본다. 교종은 젊은이들에게 말을 건넬 때에도 모든 이를 아울러 격려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교종은 권고 첫머리에서, ‘일부분은 젊은이에게 직접 전하는 말이며, 일부분은 교회의 식별을 위한 좀 더 일반적인 접근법’(CV 3항)이라고 한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성소를 성찰할 때 교회 자신의 소명도 성찰하고 새롭게 하며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CV 34항 참조)

  ‘재성찰’riprendere과 ‘적용’applicare의 교육학은 중요하다. 이는 식별의 실천적 특성에 어울리는데, 베르골료 교종의 사상은 분명 이러한 특성에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교종이 이 주제들에 관해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도 않고 체계적인 논문도 남기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듯이, 이 교육학이 늘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한다. 그런 비판을 하는 이들은 식별의 영역에서는 복음적 지혜도 신학적 사유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권고에서 교종은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도덕적 양성에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선포(케리그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청년 사목에서 “더욱 ‘탄탄하다고’solida 내세우는 양성을 위하여 케리그마를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대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케리그마보다 더 탄탄하고 깊이 있고 확실하고 의미 있고 지혜로 넘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교육은 무엇보다도 케리그마의 심화입니다.” 케리그마는 우리 삶 안에 더욱 온전히 구현되어야 합니다.(CV 214항)

  교종이 늘 강조하다가 권고에서 다시 성찰하는 주제들은 ‘이냐시오의 되풀이 묵상’ripetizione ignaziana5) 정신을 반영한다. 또한 교종의 관심사인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오늘날 젊은이들의 언어로 케리그마를 구현하는 방법을 찾는’ 일과 관련된다.(CV 211항)

  되풀이 묵상은 진리와 깊은 체험에 대한 단순한(감성과 지성과 감각과 의지를 아우르는 정서적 단순성) 관상을 겨냥한다. 그리하여 ‘내적으로 체득하고 맛 들인’sentita e gustata internamente6) 진리를 더 쉽게 실천적 결단으로 옮겨낼 수 있게 된다. “되풀이 묵상이란 이미 앞서 묵상 또는 관상한 데로 돌아가서,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간절하게 맛봄으로써 더욱 잘 소화하고 그사이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생긴 크고 작은 변화 체험에 대입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7) 이것은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는 현실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같은 진리를 지혜롭게 ‘되풀이 묵상’ripetuta 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고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며, 추상적으로 정의(定義)를 정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늘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 밖으로 나가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만나고, 복음을 더욱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근거를 찾는다. 이런 이유로, 교종은 이 권고에서 식별을 다루면서, 기존 성찰들과 일반 규범들을 ‘어떻게 다시 살펴보고 적용할지’come riprende e applica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주제인지 식별하게 해준다. 절대적 의미에서 본질적이거나 부수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을 건네는 대화 상대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종의 바람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몸소 이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친밀감 속에서 당신 우정의 따스함과 빛으로 열매 맺는 온갖 선에 대한 감각을 가꾸어주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하느님의 새로움을 지혜롭게 식별하기: 특별 성찰

  이 식별의 길잡이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와 시노드 최종 문서를 언급하면서 본문을 ‘확장하기’espandere 위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이제 우리도 ‘성찰’esame을 해석하는 데 집중해보자. 이는 교종이 다다르고 싶어 하는 구체적인 지점인데, ‘예지의 덕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aiuta a crescere nella virtù della prudenza 되기 때문이다.(CV 282항)

  교종이 말하는 ‘성찰’은 단순한 윤리적 내적 관찰 훈련이 아니다. 이것은 더 광범위한 훈련이며 ‘우리 삶에서 새로운 일이 생길 때 …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새 포도주인지 세속의 영이나 악마의 영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CV 279항) 식별하는 것이다.

  식별과 하느님의 새로움이 하나가 될 때, 삶은 매우 긍정적이고 건강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스러지지 않는 불타는 떨기 앞에 있던 모세에게 일어난 것처럼, 새로움은 ‘호기심과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 놀라움은 자연스럽고 기꺼운 방식으로 침묵의 여백과 바라봄과 ‘관상 기도’를 열망하며 잠시 멈추게 한다. 또한 하느님을 따라나서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기 전에 그분의 아름다운 새로움을 자신 안에 가득 채우려는 열망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와 동시에, 다가오는 앞날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힘은 성찰할 때마다 짊어지게 되는 과거의 무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과거의 무게는 죄책감과 통제되는 느낌으로 우리를 내리눌러 익숙한 자리에 머물게 한다. 한편, 하느님의 새로움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하느님의 새로움은 작은 씨앗이지만 마음속에 씨를 뿌리고 가꿀 때면 풍성한 생명으로 가득해진다.

  교종은 이러한 성찰 방식이 식별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최종 문서의 다음 문구를 다시 인용한다. “우리는 자신의 은사와 한계를 차분히 받아들이면서 구체적인 선택들을 통하여 우리 삶의 전반적인 방향을 정립해 나가는 것입니다.”(CV 282항)

  교종은 식별 중에 올라오는 유혹, 또는 ‘재핑’zapping, 세상과 악한 영이 주는 ‘허상’novità ingannatrici에서 비롯한 자유의 약화(CV 279항 참조)를 지적한다. 이는 성소가 우리 안에서 처음부터 온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복음이 어정쩡한 엉터리 조명이 아니라 온전한 새로움 속에서 빛을 낼 수 있듯이, 우리에게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맑고 자유로운 영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표현한다. “여러분이 마음속 깊이 이 메시지의 아름다움을 감사히 여기고, 주님과 만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맡긴다면, 주님과 친구가 되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신 그분께 여러분 삶의 현실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시작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 삶 전체를 지탱할 수 있는 심오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CV 129항) 이 마지막 부분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느님의 새로움은 온전히 공유되고 소통될 수 있으며, 그 안에 사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의 성찰에서 청하고 익히도록 초대 받은 ‘식별의 지혜’la sapienza del discernimento는 인간의 이성과 예지를 뛰어넘는다. 이미 말한 대로 매일의 성찰에서는 ‘하느님의 새로움’novità di Dio에 중심을 두는 것이 좋다. 교종이 말하는 식별은 모든 인간의 유일하고 다시없는 정점이신 성부의 계획에 초점을 맞춘다. 교종은 이 주제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다시 가져온다. “궁극적으로 식별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으로 이끕니다. 곧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GE 170항)

  식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식별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식별이다. 교종이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risto vive라는 위대한 선포의 기치 아래 두고자 했던 것, 이 권고 전체에서 발전시켜 나가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양심의 형성’formazione della coscienza이라는 주제를 이러한 틀 안에 둔다. 윤리나 신학 교육으로 대체할 수 없는 양심의 형성은 인격의 변화를 겨냥하여, 마침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성과 기준과 의지를 갖추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구체적인 수단을 ‘선행의 습관은 양심성찰의 일부’(CV 282항)이라고 제시한다.

  양심성찰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평가가 바로 ‘매일의 경험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활동’opera di Dio nella propria esperienza quotidiana에 대한 식별이다(이것은 유혹자의 행위에도 적용된다). 교종은 이것이 단순히 죄를 헤아리는 행위(고해성사를 위한 양심성찰)일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 안에서’nella propria esperienza, 저마다 몸담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사건들 안에서’nella vicende, 우리보다 앞장서 나아간 사람들과 자신의 지혜로 우리를 동반하는 사람들의 증언 안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CV 282항 참조).

  교종은 이전 권고에서도 강력하게 말한 바 있다. “식별은 위대한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작은 것, 오늘의 일에 온 정성을 쏟는 문제입니다.”(GE 169항) 이 최신 권고에서 새로움은 문화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과 증언들에 관한 일상적 성찰 또는 식별을 포괄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더 중요한 기준은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고 선포하고 고발하는 데 있다.8)

  “너의 성소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교종 프란치스코의 물음

  ‘성소 식별’ 항목(CV 283-286항)에서 교종은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너’(tu)는 이 문헌의 특징적 어법이다.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물을 수 있고 그대가 누구인지를 찾아 헤매면서 한평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십시오.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CV 286항)9)

  이 항목에서 교종은 우리 성소를 식별할 때 스스로 던져야 하는 물음에 관해 예리한 성찰을 시작한다. 이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0)에서 다룬 두 가지 주제와 성소를 연결한다. 곧 ‘주님과 다른 이들을 경청하고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현실 그 자체를 경청’하기 위한 침묵과, 주님께서 베푸실 ‘더 좋은 그 무엇’qualcosa di più을 깨달으려는 자세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소의 쇄신적 성격은 마치 다면체의 ‘꼭짓점’vertice처럼 계속하여 연장되며 매우 풍요로운 잠재력을 드러낸다.

  교종이 던지는 물음의 역동성은 산타 마르타 경당의 강론들11)과 즉흥 연설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질문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 물음들은 잘못되었다고 식별되면 ‘폐기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나가거나 상대의 안전거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으로 던지기도 하며’, ‘적절한 순간에 질문하여 상대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줄도 안다. 점층적 장단이 보이도록 전문을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내 겉모습이나 감정들 말고,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내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고 또 슬픔을 안겨 주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는가?’, ‘나의 장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바로 또 다른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고, 세상과 교회에 더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나의 진짜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 밖에도 다른 많은 현실적인 질문들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일에 필요한 자질들을 갖추고 있는가?’, 또는 ‘나는 그러한 자질들을 습득하고 계발할 수 있는가?’(CV 285항)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물음들이 근본 질문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이 물음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자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나는 누구인가?”chi sono io?라는 물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Per chi sono io?라고 묻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존재한다.”Siamo per Dio는 익숙한 답변에서 한 걸음 더 나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per gli altri 창조하셨음을 밝힌다.(CV 286항 참조)

  우리는 또 다른 물음 하나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벗의 물음이다. “그리스도라면 내 처지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Cosa farebbe Cristo al mio posto? 이것은 성 알베르토 후르타도가 늘 던졌던 물음이다. 교종은 마음의 문을 열고 불을 밝히기 위한 ‘비밀번호’처럼 이 물음을 칠레의 젊은이들에게 던졌다.12)

  ‘벗의 부르심’: ‘더 나은 것’을 향하여 균형을 깨기

  ‘우리의 벗, 예수님의 부르심’(CV 287-290항) 항목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려면, 우리의 성소가 벗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벗이십니다.”(CV 287항) 교종은 그가 즐겨 말하는 ‘우정의 식별’discernimento di amicizia을 가장 반가운 선물로 비유한다. “우리는 벗에게 선물할 때,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합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면서도 포괄한다.’supera e include 인간 지혜의 식별은 적당한 수단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제안하는 식별은 ‘더 나은 것’il meglio을 향해 단호하게 균형을 깨는 것이다. ‘더 나은 것’이 더 값비싸거나 더 희귀할 필요는 없다. 벗을 위한 진정한 선물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면 된다. 이 대목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선물을 주는 이는 “벗이 자기가 준 선물을 열어보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정이라는 열쇳말로 젊은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우정의 특성은 서로 다른 것을 분열도 혼란도 없이 똑같은 차원에 놓는 데 있다. 내적이고 은밀한 우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 개인적 우정의 내밀함과 선호가 실제로 사회적 우정으로 나아가는지가 중요하다. 교종은 친척, 벗들과 함께 여정을 충실히 걸어가시는 소년기 예수님의 우정을 재발견하고(CV 29항 참조), 젊은이들에게 우정을 가꾸고 쌓으라고 초대한다. “저는 젊은이 여러분이 자신의 작은 무리를 넘어 ‘사회적 친교’amicizia sociale를 이루고 ‘공동선을 추구할’il bene comune 것을 당부합니다.”(CV 169항)

  290항에서는 교종이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전형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로마노 과르디니가 말한 청년기의 본질적 특성을 예수님과의 우정에 ‘연결한다’. “중요한 것은, ‘무한함을 향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이 젊은 열망’13)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조건 없는 우정의 만남입니다.”(CV 290항)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율법과 모든 의무를 떠나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제시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이 순수한 우정으로 서로를 따라가고 서로 찾고 함께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맛보는 실패조차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이 우정을 체험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CV 290항)

  교종이 ‘우정의 식별’이라는 부르는 것은 이토록 인간적이면서도 이토록 신적인 식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식별은 상대방의 사상이나 애정을 뛰어넘어 인격 자체를 알고 해석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 권고에 담긴 프란치스코의 ‘위대한 선포’grande annuncio는 “그분께서 살아 계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이다. 이 본질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정이다.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과 친구가 되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신 그분께 여러분 삶의 현실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시작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 삶 전체를 지탱할 수 있는 심오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CV 129항)

  이 체험을 누구나 겪어야 한다. 우정은 선사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그러하듯,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며(첫걸음을 내딛으시며) ‘스스로를 친구라고’si presenta come amico 부르시고 ‘당신의 친구가 되라고’all’amicizia con Lui 우리를 부르신다(CV 153항). 이 탁월한 주님의 우정은 인생의 모든 측면들로 확장된다. “우리가 우리의 현세 삶과 우리의 타고난 능력도 주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주님과 나누는 우정이라는 이 무상의 선물에 감사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선물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유가 은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GE 55항)

  모든 참된 우정이 그러하듯, 예수님과 맺는 우정은 강압적이지 않고, 상대의 ‘자유를 섬세하게’delicatamente alla libertà 존중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고마워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대화와 기도인데, 이것은 주고받는 우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 우정이 효력을 발휘하게 한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열어 드립니다.’”(CV 155항)15)

  이 우정은 거저 주어지고 아주 구체적이고 육화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 모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된다. 교종은 베드로를 늘 예로 든다. 베드로는 믿음뿐만 아니라 우정도 시험을 거쳤기에,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한다.”(1베드 1,8 참조)16)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교종은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과 충돌 이야기’를 대조로 제시한다. 이야기는 “그 청년이 예수님의 사랑 어린 시선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마르 10,21 참조). … 그는 분명히 멋진 우정이 될 수 있었던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 그 청년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을지, …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CV 251항)

  우정이 상대방과 이루는 ‘인격적 만남’incontro personale의 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이 예로 충분하다. 우정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을 이어주며, 외부에서 정당성을 구하지 않는다. 주고받은 우정이 뿌리를 내리고 가꾸어지면 ‘사랑의 역사’storia di amore, 생명의 역사로 변화된다(CV 252항 참조).

  경청과 동반의 실존적 특성

  ‘경청과 동반’ascolto e accompagnamento 항목(CV 291-298항)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젊은이들의 성소 식별을 동반하는 이들에게 당부한다. 교종은 경청의 중요성을 다시 성찰하면서,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세 가지 ‘감각 또는 배려’sensibilità o attenzioni에 따라 다음과 같이 독창적으로 심화한다. 1) ‘개인’persona에 대한 감각 또는 배려, 2) 자신의 은총과 유혹,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해주는 선한 영의 구원 말씀을 통해 상대방이 표현하고자 하는 ‘심오한 진리’verità profonda에 대한 감각 또는 배려, 3) 상대방이 체험하고 있는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impulsi에 대한 감각 또는 배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경청은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궁극적인 지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이 궁극적인 지향을 아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CV 294항) 여기서 교종은 마음속 가장 깊은 열망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와 연결시킨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궁극적 추진력을 모아내고 거기에 꼴을 갖추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이제 우리는 식별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교종의 요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식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말한 대로 “주님을 더욱 충실히 따르도록 도와주는 영적 투쟁의 도구”(GE 169항)이다. 식별은 윤리적 결단의 도구일 뿐 아니라, “더욱 강렬해지고 다른 성격의 드높은 수준을 띠게 되어, 우리 개인과 우리 삶의 존엄에 더욱 잘 부응하는”(CV 295항) ‘자신의 성소’propria vocazione에 도움이 된다.

  예수님을 식별하기

  신앙 안에서 식별이 이루어진다면 친구이신 주님의 인격에 애착하게 된다.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떨쳐버린다. 목자의 음성을 구별할 줄 알고, 그분을 알아보고 따라나설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실천적 특성으로서, 중립적 지성 활동이 아니라 즉각적인 마음의 애착과 신앙의 순종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이것이 식별의 깊은 의미인데, 주님의 인격과 연결되어 있기에 모든 것에서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고(“주님이십니다”, 요한 21,7), 부르심을 알아듣고(“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27-28), 그분의 행동 방식으로 그분 인격을 알아본다(“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았다”, 루카 24,35).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동반자들에게 세 가지 결론을 내려준다. 첫째, 동반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식별’discernere하도록 도왔을 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살아 계신 분’을 알아보자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CV 296항 참조). 이 성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라지시어’scompare 신앙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남아계시는 이유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한(요한 20,29) 이유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실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삐를 채운다. 주님을 눈에 보이는 사물로 만나는 것은 단순한 예배 대상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고 교회 생활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의 부르심은 먼저 우리가 활동하고 걷고 성장하고 성숙하라는 초대이다. 주님의 ‘불가시성’non visiblità은 부르심의 본질적 부분이며,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한 여정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이것이 부활하신 분을 향하여 달려가라는 교종 권고의 최종 의미이다.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Egli vive는 것은 삶을 분석과 구경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그 자리에서 가만히 관찰만 하게 만드는 하나의 공식이 아니다.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분을 만나러 그분을 뒤따라 달려가자는 초대이다. 그분은 살아 계시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precede in Galilea 가신다(마르 16,7). 그분은 살아 계실 뿐 아니라, “보십시오, 그분께서 오십니다.”(묵시 1,7)라고 맞이할 분이다.

  둘째 결론은 인격적 만남으로 이끌어주는 이 과정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온전히 ‘주의 깊은 식별’attento discernimento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사도적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Pastores dabo vobis에서 말한 바와 같다. 동반의 열쇠는 덕행과 악습을 상대화하며 주님을 만나는 방향으로 질서를 찾는 데 있다(CV 297항 참조).17)

  셋째 “이 여정에서 다른 이들을 동반하려 한다면, 여러분이 먼저 날마다 이 여정을 따라야 합니다.”(CV 298항) 성모님이 그 본보기이다. ‘젊은 시절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문제와 어려움에 직면’하시어 당신 몸소 식별하셨다.

  성장하도록 격려하는 하느님의 선물

  교종의 권고는 시노드에서 이루어진 식별에서 출발한다. 이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공유되었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교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삶에서 의미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CV 40항).

  이런 까닭에, 교종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의 특성은 근본적으로 실존적이다. 교종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백성의 만남에 관한 사도들의 신앙을 되살리고자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CV 124항 이하), 그분의 힘은 “여러분 삶에서도 계속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10) 오셨기 때문”(CV 128항)이라고 강조하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교종은 젊은이들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해주시리라고 온 교회와 함께 믿고 있다.

  시노드 최종 문서와 교종의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할 수 있겠다. ‘함께 걷고 성령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시노드 교부들이] 얻은 경험은’(시노드 최종 문서 1항)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에 새로운 추진력을 불어넣었다. 시노드에서 이루어진 교회 ‘안을 향한’ad intra 중요한 성찰은 이제 교종의 ‘위대한 선포’grande annuncio인 이 권고에서 교회 ‘밖을 향하여’ad extra 결정적으로 확장된다. 이 권고는 젊은이들을 북돋우고 격려한다. 수행해야 할 명령이나 윤리적 과제가 아니라, 자녀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아버지의 섬세함으로 젊은이들에게 진리를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 먼저 도착한 사람들보다 더 멀리까지 다다르는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면 교종은 행복할 것이다.

  교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마지막 이미지는 요한복음의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를 다시 성찰한다. 젊은 사도가 더 빨리 달려 빈 무덤에 첫 번째로 다다르는 장면이다. 일반적으로는 요한이 시몬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종은 그의 직무의 권위와 연륜으로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교종은 물론 기다려달라고 부탁하지만, 젊은이들이 더 빨리 달려가는 것을 기뻐하고 그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축복한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추진력, 여러분의 통찰력, 여러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를 필요로 합니다!”(CV 299항) 교종은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해석을 뒤집어엎는다. 권위보다 ‘훈육적’disciplinare 차원을 강조하려 하고, 권위는 더 겸손한 자리에 둔다. 교종은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러 더 빨리 달려가는 이들의 사랑을 알아주고 결정적 힘을 실어준다. 수위권이 젊은 사도 요한으로 상징되는 추진력과 통찰력과 믿음으로 옮아간다.18)

  프란치스코 교종은 젊은이들의 식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특히 교종은 횃불을 자기 손에 들고서 젊은이들을 비추어주려는 사람들과 자기 자녀들이 자기보다 더 낫기를 희망하고 기뻐할뿐더러 그들이 더 멀리 달려가도록 격려하면서 횃불을 젊은이들의 손에 진정 기꺼이 넘겨주려는 사람들의 차이를 날카롭게 구별한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선언보다는 자신의 삶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선포하면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빨리 달려가라고 초대하면서(더 느린 사람들을 기다려달라고 부탁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내세우지도 않고 스스로 사라질 줄 알면서 표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엄격한 가르침을 받기’disciplinati보다 ‘귀 기울여 들어주기’essere ascoltati를 더욱 열망하지만, 또한 ‘선의 가능성’il bene possibile을 북돋아 주고 일깨워주기도 바란다(CV 232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열망에 응답한다. 이 권고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언어로 말을 건넨다.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환한 빛을 향하고 있다. 나와 네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주고받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개종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사랑의 문법으로’ 다가간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납득하는 언어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의 언어, 젊은이들 때문에 젊은이들을 위해서 거기 있어 주는 사람의 언어, 자신의 온갖 한계와 나약함에도 충실히 신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언어’(CV 211항)이기 때문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4052 II (20 apr/4 mag 2019), 118-132.
** Diego Fares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019년 3월 25일.
2) 참조: 프란치스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018년 3월 19일, “제5장. 영적 투쟁, 깨어 있음, 식별”, 특히 166-171항.
3) 참조: Francesco, La saggezza del tempo. In dialogo con Papa Francesco sulle grandi questioni della vita, (Venezia: Marsilio, 2018), 10. [한국어판 『세월의 지혜』, 정제천 옮김, (서울: 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9), 21].
4) Francesco, Discorso nell’incontro con gli studenti e il mondo accademico a Bologna, 1° ottobre 2017.
5) 되풀이 묵상은 “더 큰 위안이나 황폐함 또는 더 큰 영적 맛을 체험한 요점들에 주목하고 머무는 것이다.”(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한채 옮김, 62번; 참조: 64, 76, 104, 118, 227번).
6) Ibid., 2번.
7) Miguel Ángel Fiorito, Buscar y hallar la voluntad de Dios, (Buenos Aires: Paulinas, 2000), 71.
8) Francesco, “‘Giocarsi la vita’. Papa Francesco in dialogo con I gesuiti dell’America centrala”, La Civiltà Cattolica, 2019 I, 313-328에서 루틸리오 그란데에 관한 교종의 언급을 보라.
9) 편집자 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자문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참다운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교황 프란치스코,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Christus Vivit),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옮김,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9.
10) 참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71-172항.
11) “내 마음은 어떠합니까? … 우리 마음이 애착하고 있는 보화는 무엇입니까?”(프란치스코, 산타 마르타 강론, 2014년 5월 19일), “우리 마음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프란치스코, 산타 마르타 강론, 2014년 10월 10일)
12) 참조: Francesco, Incontro con i giovani nel Santuario Nazionale di Maipú, Cile, 7 gennaio 2018.
13) Romano Guardini, Le età della vita, Opera omnia IV/1, (Brescia: Morcelliana, 2015), 209.
14) Lucio Gera, “Sobre el misterio del pobre”, in Pierre Grelot – Lucio Gera – Andre Dumas, El pobre, (Buenos Aires: Heróica, 1962), 103.
15)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우정 어린 대화이자, 빈번한 독대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Vida de Santa Teresa de Jesús Escrita por ella Misma, 8,5),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9항.
16) “순간의 식별로써 자라나는 신앙에 관한 이러한 성찰을 구체화하기 위해, ‘밀처럼 체질’을 거친 시몬 베드로의 이콘을 묵상해 봅시다. 이는 주님께서 본보기로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시험을 거친 베드로의 신앙 덕분에 우리 모두 ‘보지도 않고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을’(1베드 1,8 참조) 확인받았습니다.”(프란치스코, 로마 교구 본당 신자들 및 사제들과 만남, 2017년 3월 2일)
17) 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 1992년 3월 25일, 10항.
18) “부활 아침 베드로와 함께 빈 무덤을 향해 혼란스럽고도 희망 가득한 달음질을 하는 [사랑 받은 제자의 발자국을 따라](요한 20,1-10 참조)”(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총회 예비 문서, 2017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