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독자로서의 프란치스코 교종의 ‘신화적’ 민중관(民衆觀)

IL CONCETTO «MITICO» DI POPOLO
Papa Francesco lettore di Dostoevskij*

호세 루이스 나르바하 S.J.**
정호정 안젤라 옮김(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 학장)

  독일 출신 신학자이자 사제인 과르디니의 연구 가운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신부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미겔 철학·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논문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타난 신앙적 인물들」1)이라는 이 논문에서 과르디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등장인물들의 세계를 분석해놓았다. 베르골료 신부는 이미 학생들이 돌려 읽고 있던 이 논문을 추천도서목록에 추가했다.2) 과르디니의 연구, 특히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드러난 ‘종교 세계’mondo religioso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 고찰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베르골료 신부의 독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과르디니의 도스토옙스키 성찰에 영향을 받아 프란치스코 교종이 ’민중이 신화적 개념’임을 확인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양한 계제와 수많은 인터뷰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본지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단히 잘못된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민중’Popolo 입니다. 포퓰리즘, 포퓰리즘 정치학, 그리고 포퓰리스트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어떤 ‘민족’이 행하는 모든 일이 선하다거나, ‘천사’와 같이 선한 범주에 속하는 범주어라는 의미에서 ‘민족’이나 ‘민중’이란 어휘를 사용할 경우, 이 어휘들은 절대로 논리적이거나 신비적인 범주어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신화적’mitica 개념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민중’은 역사적이며 신화적인 범주어입니다. 민중은 어떤 목표나 공동사업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가운데 [역사의] 과정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한 민족 안에서 선대先代를 잇는 세대들의 승계 작업으로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민족을 이해하는 데는 신화가 필요합니다. 민족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때 논리적 범주어를 사용하게 되는 이유는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접근도 필요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민족에 대한 소속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민족’ 혹은 ‘민중’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사회문화적 유대로 형성된 공동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공동 과업을 향한 더디고 지난한 ‘과정’ 자체입니다.3)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근 또다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민족을 이해하려면 그 민중의 정신, 정서, 업적, 역사 속으로, 또 ‘민족’이라는 그들의 전통 신화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만 그 민족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신학’teologia del popolo의 근간입니다. 그 핵심은 민중과 함께하면서, 민중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입니다.4) 따라서 민중을 대상으로 강론하기 위해서는 민중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법을 알고,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직접 들어가 스스로를 몰입시킬 필요가 있습니다.5)

  프란치스코 교종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생각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가 ‘논리적 범주어’categoria logica와 ‘신화적 범주어’categoria mitica를 구분하는 일로, 이를 통해 [민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6) 구체적인 접근법을 생각한다. 두 번째가 민중의 정서 안으로 들어가 성찰의 대상을 찾아낼 수 있게 하는 표현들을 이해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민중과 함께 걸어갈’andare con il popolo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통해 성찰의 신학적 위상을 찾는 일이다.

  과르디니는 ‘민중은 신화적 존재’라는 베르골료 신부의 말을 도스토옙스키 연구 서두(15)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이 ‘신화적 범주어’이자 ‘신화적 존재’un essere mitico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플라톤의 신화

  위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서양철학의 태두 플라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적 숙고는 엄밀하게 신화적 표현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신화는 이상계理想界와 물질계物質界의 중간단계인 존재층위를 표현한다.7) 바로 이 물질적 모체母體의 기반 위에서 영원한 이상으로부터 구체적인 현실이 생성된다.

  플라톤은 복잡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에 기댄다. 신화는 이상과 관련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상 자체는 아니고, 또한 구체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것 자체로 환원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화는 역사와 초超역사,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표현이다.

  논리적 범주를 확인하는 대신, 신화는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암시하는 한편, 그 복잡성 안에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몇 가지 제공해준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현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신화는 영원을 모색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데, 주체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상관없다. 신화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가리키는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며, 이런 의미에서 초월적이자 신학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강조할 점은 신화가 구체적인 인간의 구체적 삶이나 이미 일어나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그 자체로 유일하며 반복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진 구체적 현실의 의미 — 혹은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이상’ — 를 드러내는 인간의 설명이다. 신화는 존재를 의미와 대면하게 하는 방법, 책임감 있는 자세로 역사와 삶을 돌보는 방법을 표현한다.

  과르디니 논문의 독자이자 우리를 신화적 지평으로 안내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는 인식, 이해, 성찰의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과르디니가 분석한 러시아의 민족정신

  민중을 신화적 범주어로 볼 때 냉정하고 추상적인 개념 대신 살아있는 현실이 부각된다. 민족은 구성원 개개인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출신배경과 주어진 소명召命, 물질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차이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 속에 존재하는 현실인 동시에, 정신을 불어넣어야 하는 대상이다. 과르디니는 민족을 ‘독특하고 본질적인 별도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실제 인간은 이 영역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민중’이며, 이 민중은 하느님께 가까운 존재”(15)라고 말한다.

  민족은 개별적 삶을 사는 개인들로 구성되고, 이들 개개인은 신화를 통해 공동의 뿌리와 소명의식, 그리고 민족을 초월하는 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뭉쳐져 있다. 신화 속에 담겨진 민족의 기원, 종말, 존재의미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소속감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과르디니는 인간이 민족이라는 범주와 관련을 갖기 위한 조건을 언급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존재로 남아있을 뿐, 일부러 성찰과 비판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36)8)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것처럼, 과르디니가 민중에게서 발견하는 근본적인 특성은 이들이 자연과 운명이라는 ‘근본적인 존재 현실’과 맺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35)

  그러나 자연과의 관계가 자연주의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여기서 자연이란 순수 자연의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통치하고, 움직이는 분이자, 미천한 일상의 존재 안에서 만나게 되는 분으로서’(35)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는 공간을 가리킨다.

  민중이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이 자연과의 관계가 범신론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과 피조물 간에는 분명한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의 삶은 하느님 안에 존재하며, “하느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자연이나 하느님과의 일체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나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존재하나, 이들과 동일시하거나 거리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과르디니는 이렇게 지적한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께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와 그 사랑에 가까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느낄 수 있다. 이 구분을 흐려 놓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해주는 일치의 신비, 무엇보다 피조물과 하느님의 일치를 보여주되 여전히 구분이 가능하게 해주는 일치의 신비는 표현의 영역을 넘어서는 최상의 일치가 된다.(78)

  이것은 민족이 삶을 통해 경험하는 긴장의 표현이다. 자연과 하느님 사이에서, 현재 생활과 미래운명에 대한 소명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와 그 자유를 고려하지 않고 주어지는 운명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긴장의 표현이다.

  죄인된 민중의 성스러움

  도스토옙스키가 민중을 이상화한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면,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닫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에는 민중의 존재 현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로맨티시즘이 없다. 그는 탐욕, 타락과 같은 등장인물의 부패하고 파괴적인 특성들을 객관적으로, 노골적 사실주의를 통해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popolo di Dio(20)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죄악과 고통이라는 존재의 긴장을 경험한다. 이들은 모두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이런 딜레마에 직면해있음을 깨닫고, 긴장, 반목,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 두 명의 소니아(『미성년』과 『죄와 벌』의 동명 여주인공)를 비롯하여 신앙심 깊은 여성 등장인물들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지만 영웅적으로 이 일을 해낸다. 『미성년』의 순례자 마카르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수사는 ‘실존의 막강한 힘과의 끊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결합’(66)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위에서 말한 딜레마를 ‘구원받은 마음이 발산하는 통합의 힘을 통해’(152) 극복한다. 그리고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도 후에 자신 안에 있는 천상적 힘을 통해 이들과 같은 상태에 도달한다.”(152)

  과르디니는 도스토옙스키의 등장인물에게서 자연과의 관계 때문에 민중의 모든 구성원에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곧 순명과 인내를 발견한다. 두 덕목은 고통을 삶이 자신에게 지운 십자가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순명과 수용이라는 ‘신실한 지향’un atteggiamento credente을 갖고 인내하는 두 소니아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두 사람은 ‘구원으로 향하는 실존의 변화’(65f)가 이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 덕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자연과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하느님께 순명하고 운명 앞에서 인내하는 자세에서 드러난다. 이런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 발하는 광채는 민중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민중의 신화 아래 사는 것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어두운 삶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진다. 민중을 거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반 카라마조프이다. 이반에게서는 앞서 말한 생각이 정반대로 구현된다. “하느님의 창조적 구원 활동의 신비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겸손하고 외경심 강한 존재의 비밀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은 더더욱 믿지 않기 때문이다.”(20)

  이반은 자신이 이 존재의 딜레마에 직면해있음을 깨닫지만, “초인招人의 긍지를 포기하지 않고 … 자신을 선악을 초월하는 위치에 놓는다.”(115) 그는 과르디니가 민중의 근본특성이라고 지칭한 “하느님 신비로서의 현실을 거부하는 한편,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순명과 인내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139) 선악의 긴장 속에서, 그리고 선악을 구분함에 있어 이반은 ‘하느님 사랑으로 구원받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하느님에 대한 엄청난 저항’(153)으로서, 유한한 존재들이 무한한 존재의 특성을 갖게 된다고 주장하는 파우스트처럼(211f) “세계가 불완전성의 표징을 지니고 있다”(152)고 선언하는 쪽을 택한다. 이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모반이다. 이반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만, 그의 창조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178)

  이런 모반적 태도의 결과는 자명하다. ‘실제로 선언되는 것은 발가벗겨진 알몸의 유한성’이다. “상징적 가치나 공간적 위치도 차지하지 못하고, 더 이상 하느님의 깨어있는 배려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다. 그 주위에는 대신 모든 것을 ‘절멸絶滅시키는’ ‘무’無만이 자라난다.”(217)

  세상의 변모

  자연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당신과 하나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 때문에 지구, 자연, 민중은 단순히 자연적 현실만이 아니라 구원된 현실이기도 하다.(15-18 참조)

  이렇게 볼 때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운명은 우리가 순응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은 하느님을 따르고 변화해야 한다. 개인의 내적 변화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단계이다.(82f 참조) 과르디니에 따르면 이 변화는 자연의 힘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세상을 변화시켰지만, 자신의 변화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논리’la sua ragione individuale와 ‘주관적 의지’la sua volontà suggettiva로 스스로 고립되었으며, 오직 이 이유로 자신을 ‘지구상의 악마적 세력’으로 변화시켰다.(177) 이같은 균열에는 스스로의 결정이 필요하다. 즉 자발적으로 모반세력으로 남아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대를 통해 세상 그리고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야 한다.

  고통, 죄악, 범죄는 개인이 세상의 힘과 새로운 접촉을 시작할 때 극복될 수 있다.(179 참조)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환상에 불과한 자유를 얻기 위해 살인했다. 그는 자신과 하느님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종국에는 용서받는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를 다시 찾는다.(311 참조) 과르디니는 이 가능성을 개인적으로 ‘새로운 존재의 층위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창조할 수 있는 ‘과업’opera 또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177)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심오한 주장에 도달한다. 민중에 속하면서 자연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구원이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선택을 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이는 이런 긴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잘못된 길로 가지 않으려면 선택은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도, 자연physis도 아닌, 가슴이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가슴만이 인간의 삶이 정신을 갖고 물질을 취하게 해준다. 가슴만이 정신이 ‘영혼’anima이 되고, 물질이 ‘육체’corpo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럴 때만 기쁨과 고통, 책임과 고군분투로 점철될, 비참하면서 동시에 위대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이 비로소 탄생한다.”9)

  민중의 가슴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악령』의 스타브로긴 같은 인물의 가슴은 죽어있는 상태여서 사막과 같다. “그의 삶은 얼어붙은 것 같다. 기쁨이나 고통의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이런 감정의 퇴화된 편린만을 느낀다. 육체적 쾌락과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학은 절망적일 만큼 명확하게 감지했다. 그의 내면에는 진정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41) 그러나 자기 가슴의 변화를 허용하는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되찾고 ‘천국’paradiso에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은 다시 이들 주위에 존재하기 시작한다.”(82f)

  과르디니에 따르면, 민중의 근본적인 특성은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민중은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는 전체 과정의 시작점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세상과의 관계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질 때 인간성 회복의 결과로 세상은 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어둠과 잘못을 세상에 퍼뜨린’ 죄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의 관계 전반을 변화시킨다. 그 결과 세상은 더욱 투명해지고, 내적 의미는 더 이상 어두운 마음의 불투명성 안에 숨겨지지 않는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등장인물로, 모반자 이반의 형제인 ‘천사’il cherubino 알렉세이는 이 같은 종말론적 변모를 상징한다. 그는 “내가 어떻게 나와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의 봉사를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87)10) “주인과 하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 그들이 나의 하인인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의 하인이 되고 싶을 것”(83)이라고 고백한다.

  알렉세이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누군가가 자신에게 복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로서는 운명이나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 하더라도 — 그는 “이 세상에서 하인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라고 고백한다. — 그럼에도 자신의 가슴은 변화시킬 수 있고 자신 주위의 세상은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그대의 하인이 그대의 집에서는 다른 집 하인일 때보다 자유롭게 느끼도록 처신하십시오”(90f)라고 권고한다.

  이런 변화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 오지 않는다.11) 변화의 진정한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살아있는 겸손한 사랑이다. “겸손한 사랑은 막강한 힘이어서, 모든 힘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다른 힘들과 구분된다.”(91)12)

  그래서 과르디니는 도스토옙스키의 신앙 세계가 하느님, 자연, 타인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등장인물 각각의 운명은 민중에게 소속되거나 소외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민중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근본적인 특성은 복음이고,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물 —그러나 감추어진 방식으로만— 은 그리스도이다. 한 서한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신앙 고백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리스도보다 더욱 아름답거나 심오하거나 매력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비범하거나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보다 더한 존재는 없을 뿐만 아니라, 질투 섞인 사랑의 감정으로 고백하는 사실은 그리스도보다 더한 존재는 있을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 내게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진리임이 실제로 확인된다 해도, 나는 진리와 함께하는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13)

  민중을 알기 위해 민중과 함께 걸어가기

  민중을 표현하는 말에서 민중의 가슴과 정신을 찾아내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민중과 함께 걸어갈’andare con il popolo 필요성을 상기시킨 바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교종이 생각하는 의미를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도스토옙스키 전기작가 앙리 트루아야Henri Truyat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에 유일하게 한 인물만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하느님이다. 이는 우리가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등장인물의 세계에서 목격한 바와 다르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자신의 세계에 하느님을 등장시키기 위해, 사형집행 총살대銃殺隊와 시베리아 유배라는 시험’이 필요했다.14)

  도스토옙스키는 교수형 집행을 위해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 러시아 차르가 사형 선고를 시베리아 유배형으로 변경했을 때 구원을 경험했다. “종신형. 유배. [사형 대신 이 소식을 전해듣자마자]15) 기쁨이 봇물처럼 도스토옙스키에게 밀려왔다. 살았다!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한가? 20년 후 그는 아내에게 ‘그때보다 더 행복한 날이 없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었다.”16) 사람들이 감옥 체험에 대해 묻자 그는 대답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고, 저 높은 곳에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나를 감옥에 보냈는지 누가 알겠나? 그랬을 수도 있지.”17)

  이 극단적인 실존체험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민중신화 안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운명에 순종한 그는 인내심을 갖고 4년간의 수형 생활과 강제노동을 견뎌냈다. 그가 극형을 면했다고 느꼈던 ‘가장 행복했던 그날’giorno più felice 이후, 정화와 양성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 고통스런 경험으로 인해 그는 ‘빛이 다시 한번 아래로부터 비추어 올 것’18)임을 알게 되었고, 자신을 ‘수형자들의 사도’discepolo dei forzati로 여겼다. 시베리아에서 “그는 수형자들의 사도요 제자였으며, 종신형의 교훈은 그의 전 존재에 흔적을 남겼다. 4년간의 수형생활은 이후 그의 영감靈感을 채워주는 비밀 샘물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그의 삶의 구심점이 되어 그의 삶을 양분한다. ‘죽음의 집’la casa dei morti 이전의 도스토옙스키와 이후의 도스토옙스키가 존재하는 것이다.19)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경험과 다른 표현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로 하여금 민중에게, 존재의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를 허식 없이 정화시켜줄 ‘신앙의 샘물’riserva religiosa20)을 품고 있는 민중에게, 가까이 오도록 초대한다. 베르골료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말보다 민중이 더 큰 부름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 고립으로부터, 편협한 관심으로부터, 개인의 ‘늪’으로부터 벗어나 광활한 생명의 강줄기로 흘러나오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응답하면 그 강은 역동적으로 흐르는 가운데, 자신이 관통하여 지나가며 생명을 불어넣는 광활한 대지의 삶과 역사를 결합시킬 것이다.21)

  그러나 “민중에 대한 이야기는 참여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교종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특별한 지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백성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앙현실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22)는 사실을 신학자들에게 강조한다. 더 나아가 이 같은 하느님 체험의 보고寶庫에서부터 묵상을 시작하려면 민중에게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라고 신학자들을 초대한다.

  두 층위의 지식과 접근법

  이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가장 추상적인 면을 들여다볼 차례이다. 본 논문의 시발점이 된 인용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식의 두 층위를 구분할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한편에는 ‘논리적’logica 지식이 존재한다. 이 길을 택하면 결과적으로 민중에 대한 ‘기술’記述descrizione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민중의 가슴에 들어갈 수 없는데, 민중의 외부에서 기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상가들은 자신이 민중의 구성원이 아닌 것처럼 자신을 민중이라는 경계의 바깥에 놓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이상’idea이나 ‘패러다임’paradigma을 바탕으로 민중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민중은 이해와 분석과 기술의 대상이 된다.

  반면 민중에게 가까이 가는 데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야기하는 또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방식은 거리를 두는 대신 ‘민중과 같이 걸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근접성, 그리고 민중과의 의미있는 만남에서 시작하면 민중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뀌는 또 다른 층위의 지식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민중이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새롭게 구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23) 또 이 문화 안에서 민중은, 교종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들의 정신, 정서, 업적, 역사, 그리고 민족이라는 자신들의 전통 신화’를 표현한다.

  과르디니는 ‘개념화’concettualizzazione 작업, 곧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경험을 ‘달리 변경할 수 없는’irreversibili 정형화된 어휘들로 표현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개념만으로는 삶의 역동과 생활의 긴장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과르디니는 ‘보다 세심한’più sottile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주의를 환기시킨다.(325)

  현실에서, 또 현실 인식 행위 그 자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들 사이의 긴장을 감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성’ratio은 특정 상황, 특정 순간, 한시적인 문제들을 사진과 같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삶의 현실을 낱낱이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실, 살아있는 존재의 삶의 특징은 연속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양상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보다는 영화와 같다. 따라서 ‘개념화’에는 이런 과정에 대한 인식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정이 항상 움직임을 의미할 필요는 없는데, 긴장이 외적이면서 내적이고, 실존적이면서 돌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24)

  삶의 이런 조건은 지식의 층위에 ‘비논리적 요소’elemento alogico를 삽입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326) 그러나 ‘직관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비논리적 요소가 논리적 요소만으로 구성되는 지식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327) 비논리적인 요소는 논리적 요소와 정반대되는 삶의 구성요소로서 반드시 동등하게 개념화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성을 삶에 대한 위험, 삶의 이해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과르디니에 따르면,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이 세계와 타인과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 공존하는 이들 두 요소 간의 긴장을 늘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 두 요소는 인간이라는 현실을 이해하고 부호화하는 과정에 늘 함께해야 한다.25)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긴장을 고려하는 개념화 방식이 등장하는데, 이는 정형화된 사고와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오히려 역동적으로 인간 삶의 합당한 활동에 문호를 열어준다.

  과르디니는 도스토옙스키가 이 같은 긴장관계의 양극단에 비추어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고 생각한다. 이들 인물들은 ‘존재가 충만한 순간, 무한함, 모든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유동성’을 나타내는가 하면 ‘유례가 없고 예측도 불가능’하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이런 풍부함이 그의 신앙세계에 대한 과르디니 연구의 근간을 이룬다. 사실상 과르디니는 관계의 세계에 대한 이런 방식의 묘사가 ‘인간적이며 영적인 유럽세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으며, 그 결과로 ‘인간의 정신과 가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 La Civiltà Cattolica, 4033 I (21 luglio 2018), 14-26.
** José Luis Narvaja S.J.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Romano Guardini, El universo religioso de Dostoyevski, (Buenos Aires, 1954). 이탈리아어 번역본: Dostoevskij: il mondo religioso, (Brescia: Morcelliana, 2000). 이 글에서 괄호 안에 표기한 숫자는 이탈리아판의 페이지 번호임.
2) 참조: Diego Fares, “L’arte di guardare il mondo”, prefazione a Romano Guardini, L’opposizione polare, (Milan: Corriere della Sera, 2014), V-XI; Massimo Borghesi, Jorge Mario Bergoglio. Una biografia intellettuale. Dialettica e Mistica, (Milan: Jaca Book, 2017), 13 e 126도 참조.
3) Antonio Spadaro, “Le orme di un pastore. Una conversazione con Papa Francesco”, in Papa Francesco, Nei tuoi occhi è la mia parola. Omelie e discorsi di Buenos Aires (1999-2013), (Milan, Rizzoli, 2016), XV-XVI.
4) Dominique Wolton, Pape François. Rencontres avec Dominique Wolton. Politique et société. Un dialogue inédit, (Paris, 2017), 47f.
5) Spadaro, “Orme di un patore”, XVI.
6) 역자 추가.
7) 참조: José L. Narvaja, “Città visibili e città invisibili. Una riflessione a partire da Italo Calvino”, La Civiltà Cattolica, 2018 I, 128-141.
8) 도스토옙스키는 지식인들을 비판했다. 트루아야(Henri Troyat)는 도스토예스키가 서유럽 문화를 흉내내려 하면서 러시아 문화와 국민을 폄하하던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실망했다고 설명한다. 트루아야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지식인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더이상 서한을 받지도, 독서를 하지도 않는다. 복음이 그의 유일한 정신적 양분이었고, 복음이 머리에 대한 가슴의 승리”였다. Henri Troyat, Dostoievski, (Buenos Aires: Emecé Editores, 1996), 143. 이탈리아어 번역본: Henri Troyat, Dostoievski. Vita tragica e avventurosa, (Milano: Poligono, 1948).
9)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중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우리 신앙의 토대인 십계명을 무시한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민중은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가슴 속에 영원히 품고 있다.”고 쓰고 있다. (Troyat, Dostoievski, 318)
10) 참조: Ibid., 226.
11) “러시아가 진격한다. 진정한 러시아가. 신랄한 지식인, 혁명분자들, ‘가진 자들’invasati의 러시아가 아니라 흙, 노동, 신앙의 러시아. 이 러시아만이 저 러시아를 구원할 것이다.” (Ibid., 285)
12) 마찬가지로 트루아야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 지구상에서 불쾌한 존재는 욕구를 상실한 사람, 무미건조한 영혼, 자만심 강한 지식인뿐이다. 어떤 범죄도 용서받을 권리를 말살하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한다. 사랑은 겸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확인했다. (Ibid., 231).
13) Ibid., 144.
14) Ibid., 60.
15) 역자 추가.
16) Ibid., 115.
17) Ibid., 106.
18) Ibid., 318.
19) Ibid., 139.
20) Jorge M. Bergoglio, Meditationes para religiosos, (Buenos Aires, 1982), 46f.
21) Jorge M. Bergoglio, El verdadero peder es el servicio, (Buenos Aires: Editorial Claretianum, 2007), 88.
22) Francesco, “Discorso all’Associazione teologica italiana”, 29 dicembre 2017.
23) 국제신학대회에서 행한 연설 “문화의 복음화와 복음의 토착화”에서 베르골료 신부는 “문화야말로 피조물이 자신을 자각하게 만드는 무대이다. 때문에 우리는 ‘문화’cultura를 다양한 민족들의 최선이요, 민족 예술의 최고봉이요, 민족 기술의 절정이라고 부른다. 문화는 그 민족 내의 정치 단체가 공동선을 추구하게 하고, 철학이 존재이유를 제공하게 하고, 종교가 ‘숭배’culto를 통해 초월적인 존재와 결합하게 한다. 그러나 숙고를 기반으로 판단하고 삶을 정렬하게 만드는 인간의 이러한 지혜는 추상적으로, 개별적으로, 또는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작업에 대한 숙고, 개별 민족들의 정서와 집단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숙고, 시간에 기반을 두고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숙고를 통해 주어진다.” (Jorge M. Bergoglio, “Discurso inaugural”, in Stromata 41 [1985] 162).
24) 참조: Hanna-Barbara Gerl, “Vita che regge alla tensione. La dottrina di Romano Guardini sull’opposizione polare”, epilogo a Guardini, L’oppsizione polare, 235-262.
25) 과르디니는 “현대 서양의 사고는 필요한 균형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극단에서 극단으로 넘나들며 사고와 행동의 근본문제들을 피해 다녔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