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거울’: 자기애와 영적 세속성

«SPECCHIO DELLE MIE BRAME…»
Narcisismo e mondanità spirituale*

호세 루이스 나르바하 S.J.**
강선남 헬레나 옮김(성서신학 박사)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7장 끝부분에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존재 깊숙이 파고드는 고통을 표출하는 탄식이 나온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이 구절은 언뜻 보기에는 사도 바오로가 고요한 영적 삶을 살기 위해 마치 자신의 육체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육체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이 구절 앞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면 바오로가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육체와 영 사이의 긴장에 대해 탄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7,22-23)

  이러한 긴장은 인간 구성의 복합성, 곧 육체와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대조의 논리에서 드러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두 가지 법과 두 가지 논리

  겟세마니 동산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바오로가 탄식한 이 내적 투쟁과 똑같은 경험을 하였음은 예수의 다음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분은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고 하시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 하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육체의 법(또는 논리)이 우리 삶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께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보자.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이야기하실 때(루카 18,9-14 참조), 그분은 기도에 대하여 그리고 이 두 사람과 관련된 두 종류의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우선 한 사람은 바리사이고 한 사람은 세리라는 점은 생각하지 말고, 두 사람 각자의 기도 방법에 대한 묘사에 초점을 두고서 보자.

  비유는 첫 번째 사람이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자신의 삶에 감사하고 있음을 기도하였다고 서술한다. 반면에 두 번째 사람은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가슴을 치며’ 겨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며 자비를 구하는 간청을 올릴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의 신학적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성화에서 마주하게 되는 응시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바라보심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면 그는 그분의 이 시선이 자신을 들어 올리고 변화와 회심의 과정에 들어가게 함을 깨닫는다.1) 이는 비유의 두 번째 인물에게 해당한다. 그는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눈을 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분께 자비를 청한다. 이와는 달리 첫 번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심을 느끼지 못한다. 삶의 방식이 잘못된 자기인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그의 영적인 삶에는 변화의 자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변화의 자리가 없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도에 초대하시면서도, 아무러한 방식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것도 알려주신다.2) 육의 논리나 영의 논리 둘 다 영적인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우리가 주의 깊게 깨어있으라고 초대하신다.

  이제 우리가 앞에서 잠시 밀어두었던 것, 곧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 바리사이와 세리에게 돌아가 보자. 이 두 사람은 명확하게 반대 방식으로 살아간다. 두 사람 모두 공적인 인물이다. 세리는 세상일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그가 종사하는 직업이 그를 ‘공적인 죄인’Pubblico peccatore 으로서 부패한 사람, 도둑으로 만든다. 이와는 반대로, 바리사이는 율법으로 표현된 하느님의 뜻(로마 7,12 참조)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실제로 여기에는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사람들이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세상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두 부류와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 두 부류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한 부류는 세상의 논리를 사용하고 다른 부류는 영적 논리를 사용한다. 실제로 세상의 논리를 따르며 세상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비유에서 세리의 경우이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세상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 바오로의 충고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논리를 따르면서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비유에서 바리사이의 경우이다. 또한 예수가 말한 것처럼, 영적인 논리에 따라 행하면서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7,14)

  따라서 비유는 우리에게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을 제시한다. 곧,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 두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회심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자애로운 사랑으로 자신들을 감싸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시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유혹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마음을 쓰는 대상에 있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허락하여 행동을 지배하게 된 율법과 우리가 행동 근거로 삼는 논리에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논리가 적용된 대상은 유혹을 더욱 교묘하게 만든다.

  영적 세속성

  성 바오로가 자신의 지체를 두고 ‘죽음에 빠진 몸’corpo di morte이라고 한 표현이 성 요한의 용어에서는 ‘세상의 논리’logica del mondo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한다. 요한은 이것을 다음 구절에서처럼 확신한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5,5)

  베르골료는 예수회 양성 담당자 시절,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corruptio optimi pessima’, 곧 ‘완덕의 삶을 살기로 서원한 사람들의 부패는 최악의 부패’라는 경구를 상기시켰다. 그들은 영적인 삶과 완덕의 삶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로 있을 때 베르골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적인 삶에 세상의 논리를 적용하고 싶은 미묘한 유혹에 대하여 말하였다.3) 한 강론에서는 야고보 서간을 출발점으로 삼아 영적 세속성을 다루었다.

  야고보 서간의 말씀이 인상에 남습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십시오.”(야고 1,27) 바리사이주의, 이른바 성직주의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사실이듯이, 세속성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부패시키는 해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뒤에 이별하시면서 예수는 성부에게 당신을 세상의 영에서 구해달라고 간청하십니다. 그것은 영적 세속성입니다.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영적 세속성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4)

  실제로 베르골료는 이 아이디어를 프랑스 예수회 신학자 앙리 드 뤼박에게서 가져오고,5) 여기에다 영적인 문제에서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의 삶의 특성 몇 가지를 더한다.

  사목적 관점에서 베르골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의 성실한 백성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에서 오는 특별한 후각을 지닙니다. 이 감각은 백성의 사목자가 정부의 관료, 공무원처럼 변하는 것을 알아채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세상적인 사제는 다른 종류의 과정, 감히 말하자면 영적 부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사목자로서의 본성을 공격하고 부패시켜 그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과는 다른 ‘위상’status을 부여합니다. 예언자 에제키엘과 「사제에 관하여」De Pastoribus라는 글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맡겨진 양 떼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들은 양들에게서 젖과 털을 빼앗아간다.”6)

  2013년에 로마의 대주교가 된 이후 프란치스코 교종은 세속성이라는 주제를 자주 언급하고 기만과 유혹의 은밀함을 폭로하기 위해, 세속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려주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세속성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기애가 표현된 것인데, 개인주의로 드러나기도 하고 자기중심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에 더 기운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확신에서 자신은 섬기는 종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생각이 생겨난다(루카 17,10 참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양상들로 드러난다. 보통 사람들의 삶과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필리 2,5 참조),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마음이 굳어지거나(사도 7,51 참조), 마르타처럼 너무 많은 일에 매여서 더 좋은 몫을 선택하지 못하거나(루카 10,38-42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 개인의 역사와 소명 안에서 자리하고 계신 본디의 자리를 잊어버린다(묵시 2,4 참조). 참된 기쁨을 잃어버리고 빈 곳을 다시 채우려고 물질을 축적한다. 경쟁과 헛된 영광, 앞뒤가 다르게 살며, 불평불만과 험담을 일삼고, 폐쇄된 내부집단을 만들어내고, 이익을 얻기 위해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출세를 최고로 여긴다.

  이것은 전부 프란치스코 교종이 바티칸에서 진단한 병폐들이지만, 모든 교회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병과 유혹들은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황청 전체, 공동체, 수도회, 본당, 교회 운동에 위험합니다. 또한 개인에게나 공동체에도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7)

  영적 세속성의 뿌리

  우리가 위에서 지적한 것은 일종의 증상으로서 드러나는 모습일 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상실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식어버린 데에 병폐의 뿌리가 있다고 한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경험했던 사랑을 잊어버림으로써 마음이 차가워졌을 때, 모든 방어막을 잃고 세상적 영의 논리에서 오는 이 모든 증상을 드러낼 준비가 된다.8)

  앙리 드 뤼박은 영적 세속성의 뿌리에 관해 더욱 지적인 분석을 제공하였는데, 그는 이에 앞서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교만에 대하여 설교했던 것을 ‘세속성’mondanità에 적용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확립하였다. 교만 자체가 승리에서 양분을 얻기 때문에 무찌르기 가장 힘든 죄다.9)

  영적인 삶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든 성공은 유혹의 뿌리를 감추고 있다. 곧, 루카 복음서 비유의 바리사이 경우처럼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마음이다. 사실 종교적 규범을 실행하는 일은 좋지만, 율법의 문자 뒤에 있는 성령을 잊는 것은 좋지 않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2코린 3,6)고 상기시키며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육과 성령 사이의 긴장에 대한 이 새로운 표현에서 출발하여 드 뤼박은 그러한 사고의 지적인 뿌리와 논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대적하는 미묘한 인본주의’로서, 철저히 인간중심적 태도를 야기한다. “원래의 세속성에서 분리된 듯이 보이지만,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완전성이 윤리적 영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태도가 바로 영적 세속성이다.”10)

  이러한 미묘한 인본주의는 실제로, 반기를 들고 저항하는 사람의 모습을 암시한다. 곧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당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참된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저항하며 비난의 주먹을 치켜든 파우스트 박사 같다(독일어로 ‘파우스트’는 주먹을 뜻한다).11) 이것은 자신이 선과 악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강생과 십자가 없이도 무한한 발전을 통해 하느님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정제된 인본주의로서 그 형태는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단일 요소를 절대화한다. 순수이성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이며, (영지주의 사상처럼) ‘명확하고 구분되는 이성’idee chiare e distinte에 강조점을 두기 위해 육에는 관심이 없는 인본주의이다. 이것은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자연적 한계 안에 고립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비판적 사고의 인본주의로 나타났고 여전히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인본주의는 ‘하느님을 믿지만, 그분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스토옙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처럼12) 자신을 ‘자아’io라는 공간에 넣고 문을 닫아버려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한다.

  이처럼 공간적 한계의 강조는 시간적 한계의 강조에 상응한다. 이것이 ‘순간’instante 안에 인간을 가둬버리지만, 인간은 오히려 그 안에서 충만을 찾는다고 주장한다. 괴테가 그린 파우스트 박사가 그러했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러한 인본주의는 거룩함과 죄, 축복과 불행, 삶과 죽음, 낙원과 지옥,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놓인 인간의 존재론적 긴장을 비극의 변증법 안에서 절대화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에서도 볼 수 있고, 고전의 현대적 변형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전부 한계를 지니고 긴장관계에 있는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한 측면을 일차원적으로 절대화하는 정제된 인본주의 형태들이다. 서두에 언급한 성 바오로의 호소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탄식에 바오로 스스로 곧바로 다음과 같은 답을 제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13)

  이러한 까닭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서 태어나셨음을 되새긴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 권력자와 세도가의 논리, 바리사이의 논리와, 인과론적 논리, 결정론적 논리의 전복입니다.”14)

  문학작품의 몇 가지 예시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논리가 도달하는 종착점을 보여주는 문학작품 두 편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는 신화이고 하나는 동화로서 이 둘은 원시적 원형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태들이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우리에게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신화는 젊은 사냥꾼이 자신을 사랑한 여신을 거부한 데서 온 처벌과 복수의 이야기이다. 오비디우스Ovidio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의 글에서 이 신화를 만날 수 있다.15) 이야기의 마지막은 비극적이다. 자신의 모습을 포옹하려다가 나르키소스는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

  그러나 나르키소스의 죽음 같은 결론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문학작품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 공주」에서 공주의 계모인 여왕은 후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거울아, 거울아, 내 욕망의 종아!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지?” 여기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백설 공주의 아름다움은 여왕에게 자기애의 다른 측면을 일깨운다. 곧 자기보다 더 높은위치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파괴하려는 살의이다.

  이야기에서 나르키소스는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백설 공주의 계모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여왕의 이야기와 그가 되풀이하는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표현은 ‘가장’più이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 이 ‘가장’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위협으로 간주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이든 배제하는 표현으로 변한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세상 논리의 근원인 자기애의 결말이 바로 자기 파괴와 타인 파괴임을 알려 준다.


* La Civiltà Cattolica, 4044 IV (15 dic 2018/5 gen 2019), 599-606.
** José Luis Narvaja. S.J.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참조: José L. Narvaja, “Leer y escribir en el campo de la teología. El problema de la ‘recepción’ en el campo teológico,” Stromata, 71 (2015), 322-324.
2) 참조: 프란치스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72항.
3) 참조: Jorge M. Bergoglio, Nei tuoi occhi e la mia parola, (Milano: Rizzoli, 2016), 670, 702, 933f.
4) Ibid., 933f.
5) 참조: Henri de Lubac, Meditazione sulla Chiesa, (Milano: Jaca Book, 2017), 268f.
6) Bergoglio, Nei tuoi occhi, 670.
7) 참조: Francesco, Presentazione degli auguri natalizi della Curia romana, 22 dicembre 2014.
8) 참조: Ibid.
9) 교만에 대하여 요한 카시아누스가 말한 것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악습, 곧 허영과 교만 역시 우리가 앞서 말한 다른 악습들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커지면 이것은 다른 하나의 시작점이 된다. 흘러넘치는 허영이 교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 두 가지 악습은 다른 여섯 가지 악습과는 다르고,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 두 악습은 다른 여섯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다른 여섯이 없을 때 이 둘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섯 가지 악습이 뿌리 뽑혔을 때 나머지 두 악습은 그 가지를 더욱 뻗는다. 나머지 악습의 죽음을 거름 삼아 자라서 더욱 굳건하게 성장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악습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공격한다. 앞선 여섯 악습에서는 우리가 한 악습에 패하는 순간 바로 그다음 악습에 빠지지만, 우리의 승리가 증명되는 순간에 마지막 두 악습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Giovanni Cassiano, Conferenze spirituali, V 8)
10) De Lubac, Meditazione sulla Chiesa, 269.
11) 참조. Erich Przywara, Che ‘cosa’ è Dio? Eccesso e paradosso dell’amore di Dio: una teologia, (Trapani: Il Pozzo di Giacobbe, 2017), 132-136.
12 Romano Guardini, Dostoevskij, Il mondo religioso, (Brescia: Morcelliana, 2000), 178.
13) Agostino, s., Questioni sulla Lettera ai Romani, 38.
14) Francesco, Presentazione degli auguri natalizi della Curia romana.
15) 참조: Ovidio, Metamorfosi, III 339-510; Pausania, Guida della Greccia, III 31,8; 역자 주: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시인으로, 호라티우스와 더불어 로마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오비디우스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가 있다. 파우사니아스는 2세기 그리스의 여행자이자 지리학자로,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를 직접 돌아다니며 집필한 『그리스 이야기』Hellados Periegesis로 유명하며, 이 책은 고전 문학과 현대 고고학을 연결 짓는 결정적인 연결 고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