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시노드를 바라보며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과의 인터뷰

VERSO IL SINODO SULL’AMAZZONIA /b>
Intervista al card. Cláudio Hummes*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오경택 안셀모 옮김 (춘천교구 퇴계본당 주임신부)

  2017년 10월 15일, 교종 프란치스코는 로마에서 범아마존 지역을 위한 특별 시노드를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교종은 이 시노드의 주된 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지역의 하느님 백성, 특히 자주 잊히고 밝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지구에 아주 중요한 허파 역할을 하는 아마존 밀림의 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18년 6월 8일 시노드 예비 문서가 발표되었다.

  아마존 시노드는, 경계들을 넘어서고 사목적 노선들을 재정립하면서 현시대에 적용하려는 교회의 커다란 계획이다. 범아마존이라 함은 볼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 수리남, 가이아나, 프랑스령 가이아나로 구성된 지역을 뜻한다. 이 지역은 세계 원시림 보호지역 면적의 삼분의 일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전 세계 주요 산소 공급원이다. 또한, 지구 생물 다양성의 최대 보고 가운데 한 곳이다.

  아마존 지역의 모든 주교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뽑힌 주교들이 이 시노드에 참여하게 된다. 시노드 준비 작업에 가장 깊이 관여할 인물은 브라질 상파울루 대교구장을 지낸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다. 그는 페루 우앙카요 대교구장 페드로 바레토 추기경과 함께 시노드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들은 각각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Rete Ecclesiale Panamazzonica(Repam)의 의장과 부의장이기도 하다.

  이 초국가 네트워크는 교구, 수도회, 카리타스, 여러 가톨릭 협회 또는 재단, 평신도 단체 등 다양한 교회 구성원 간에 조화로이 협력을 끌어내고자 한다. 이들의 주목표 가운데 하나는, 아마존 공동체들의 삶을 지키는 것이다. 자연환경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이 아마존 공동체들은 환경오염, 근본적이면서도 급속한 생태계 변화, 기본적 인권 보호의 부재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31일, 우메스 추기경은 교종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직자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 5월엔 교종의 지명으로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제5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 참여하였다. 현재 그는 브라질 주교회의 아마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있다.

  그의 경험과 활동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와 만나 시노드 작업과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기로 했다.

  존경하는 추기경님, 교회의 커다란 행사인 아마존 시노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특별하고 소중하면서, 광대하고 풍요로우며 복잡한 상황이 얽힌 이 지역에 관한 성찰이 시노드의 주제입니다. 분명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는 곧 개최될 시노드가 교회의 일치에 역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염려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날 교회의 일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이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모범에 따라, 다양성을 수용하는 일치로서의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동시에, 일치가 결코 다양성을 파괴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할 필요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시노드는 전체적인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다양성은 일치가 지닌 풍요입니다. 그리고 다양성은 획일화로부터, 통제에 대한 정당화로부터, 일치를 보호합니다.

  결국, 다양성이 교회에 중요한 가치입니까?

  오늘날,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에 열려있습니다. 아마존 지역 국가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다양성의 한 표현이며, 유럽과 전 세계 교회가 주저 없이,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존 시노드가 우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마치 유럽 교회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전통의 빛을 주어야만 하는 것처럼,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유럽과 세계 교회에 새로운 빛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교 정신은 유럽 문화에 토착화를 이룰 수 있었고, 매우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 번의 토착화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종은 오직 단일 문화에 복음의 풍성함을 담아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교회는, 비록 처음에 있었던 유럽식 토착화를 존중하지만, 다른 문화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화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교회에 위협이 아닌 풍요가 선사될 것입니다. 다양성은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아마존에 있는 교회를 위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는 전체 교회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마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 구성원 여러분이 교종 프란치스코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만남, 또 새로운 소식, 교종이 시노드 과정에 제시하는 도전과 희망에 관해 들려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지난 2월 25일, 페드로 바레토 추기경과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 사무국장 마우리치오 로페스, 그리고 제가 교종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시노드 준비 과정 중에서 아마존 지역 개별교회들과의 자문과 공청회 단계가 일단락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시노드를 준비하며 우리 네트워크는 단지 ‘보고, 판단하고, 실천할’vedere, giudicare, agire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듣기’ascoltare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경청이 우선입니다. 시노드를 준비하기 위해선, 단순한 계획과 조직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들음이 요구됩니다.

  결국, 시노드는 듣는 능력과, ‘틀을 잡고’quadri ‘계획하는’piani 사고를 넘어서는 능력에 의해 특징지어집니까?

  진정한 ‘관찰’에는 경청이 필요합니다. 아마존 지역이 무엇인지, 아마존 교회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분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노드는 합의를 이룬 추상적 개념이나, 개괄적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아마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외침들을 들을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관찰, 판단, 실천 방법론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우리의 ‘관찰’은 거리를 두고 상황을 조사하는 분석가의 시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교종과의 면담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우리는 교종에게, 우리에게 조언할 것이 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시노드의 특별한 목적을 희석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반어적인 라틴어 옛말 “De omni re scibili et de quibusdam aliis”(알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하여)처럼, 모든 사안을 논의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종은 세계 교회가 당면한 모든 현안, 모든 도전, 모든 요구를 다루는 데 시노드의 목적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체적 목표에서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노드 전체 과정은 전 세계 보편교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노드는 막연하게 끝나지 않기 위해 좇아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점에서 입장이 매우 분명하십니다. 아마존이라는 시노드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길들.’Nuovi cammini per la Chiesa. 이것의 의미는 아마존 지역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길들이며, 아마존 지역에 통합생태론을 적용하기 위한 새로운 길들입니다. 이 주제는 시노드가 지향하는 바를 규정해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새로운 방식, 새로운 진행을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멈추어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는 전통에 충실하며, 또한 같은 것만 되풀이하지 않고 성장시키는 데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는,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우며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이미 언급되었던 것들을 반복하는 차원으로서의 시노드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다루었던 이야기를 논하기 위해서라면 시노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노드는 필요성이 드러났을 때 새로운 길들을 모색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이 무척이나 필요합니다. 그리고 혁신을 두려워하거나 막아서거나 버티지 않아야 합니다. 옛것이 새것보다 더 중요한 양, 옛것을 지니고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하나를 이루어야만 하며, 혁신은 이 여정에 힘을 북돋고 용기를 불러일으켜야만 합니다. 교종의 말씀은 매우 단호합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고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께 믿음을 두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교종으로서 직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를 권고하고 격려하시어, 자신의 신학과 자신의 견해를 과신하며 방어적 태도에 멈춰있지 말고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는 화석화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와 전통의 자리에 언제나 한 부분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모든 세대는 이 커다란 전통의 풍요에 공헌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발전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작용에 우리를 맡깁니다.

  과거는 식민지 유산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식민주의적 태도는 이 지역에 들어왔으며 지금도 들어오는 몇몇 개신교 오순절 교파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던지는 가장 의미심장한 비난입니다.

  교종은 모든 형태의 신식민주의를 거부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복음 선교에서 그 정신과 행동방식을 채택하지 않기를 권고하십니다. 교종의 선언은 교회가 아마존에서 식민 지배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원주민들의 신앙과 영성, 그리고 그들의 하느님 체험과 관련하여 그들을 식민화하려는 시도가 없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원주민들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합니까? 그 민족들을 복음화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합니까?

  신앙의 토착화와 종교 간의 대화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원주민들 안에, 그들 특유의 모습과 표현들, 그리고 그들의 역사 안에 언제나 현존하셨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들은 세계의 다른 오랜 민족들, 특별히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이미 하느님에 대한 고유한 체험이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그 역사 안에는 하느님의 현존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그리고 이어지는 영성에 대한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구원이시며 결정적 계시이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원주민들의 복음화는 원주민 공동체를 위한 원주민의 교회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와 영성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시노드를 향해 가는 중에 곳곳에서 원주민의 교회에 대한 이 비전에 어떤 저항이 생기고 있습니까?

  저항들과 오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면에서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계획과 이상들이 존중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마존의 식민지 정책들은 오늘날에도 지배와 강탈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착취하러 와서 짐을 가득 싣고 떠났으며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원주민의 굴욕과 가난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황폐해지고 오염된 땅에서 빈곤에 처했습니다.

  산업과 농업 그리고 기타 많은 형태의 생산 분야에서는 자기네 활동이 ‘지속 가능하다’sostenibile고 점점 더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땅으로부터 얻어내거나 혹은 부산물로서 땅에 도로 남기는 모든 것이, 수확이 가능하고 비옥한 토양으로 회복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됨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팎, 예를 들어 정부, 산업계, 그 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항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의제기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지를 식별해야 하고, 어떻게 할지 알아야만 합니다.

  어째서 이러한 저항이 일어납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경제적 이득에 대한 관심과 기술관료적 관점은 그 어떤 변화 시도도 반대합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보호와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어기고 그 지역 사람들의 기본 인권을 침해하면서 강제로 일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폭력적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결정적이고 예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대화와 만남은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대화로 풀기 원한다는 순진한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우선 우리는 분노하고 예언직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분명 협상하고 논의하며 합의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대화할 준비가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우리를 협상으로 초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루카 14,28) 아마존의 교회는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란이 될 만한 현 상황에서 기본 인권은 지속적이고 고착된 폭력 앞에 놓여있고, 공동의 집은 훼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범죄들은 대부분 처벌되지 않고 넘어갑니다.

  교회는 예언직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메데인 회의와 그 외에 여러 중요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들을 폭넓게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정신은 발전을 이루었으며, 한편으로 점차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큰소리를 내고 규탄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적 정신은 이것들을 넘어섭니다. 어쩌면 이 고발과 대화의 정신도 온유를 조금 보태면 풍성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예언자적 정신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대방이 대화를 받아들이도록 빛을 비추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대화를 이루는 만남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며, 자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누군가는 문화 속으로 흡수되는 토착화inculturazione와 다른 문화들 사이의 대화인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à을 상반된 범주로 이해합니다. 이 둘은 범아마존 지역의 원주민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매우 현실적인 주제들입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이 주제를 시노드 과정에 넣을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토착화와 상호문화성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둘을 하나로 묶어서 봐야만 합니다. 토착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상호문화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아마존에는 다수의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마존 지역과 세계 도처에 얼마나 많은 원주민이 있는지 고려한다면 토착화와 상호문화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가 원주민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대한 문제는 어떻습니까?

  ‘원주민을 위한’indigenista 교회와 ‘원주민의’indigena 교회를 구분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들 직후에 우리는 원주민을 사목 대상으로 여기며, 원주민을 위한 교회를 이루고자 해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을 고유한 신앙 체험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원주민의 교회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브라질의 ‘원주민 선교 위원회’Consiglio indigenista missionario(Cimi)가 일을 잘하고 있는 듯합니다.

  분명, 원주민 선교 위원회는 빛나는 사례이며 비범한 일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사실을 제시하고, 폭력 사례들을 알리며, 통계와 수치로 뒷받침합니다. 자료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리하게 또는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불의, 인권 침해, 살해, 인권 활동 방해에 대한 자료들을 부각합니다. 원주민 선교 위원회는 지속적으로 감독하며 이 임무를 전개합니다. 위원회의 활동에 몇몇 국가의 정부들,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이 당황합니다.

  이 경우에 원주민을 위한 교회는 불편한 방식으로 눈에 띄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로서 우리가, 제시할 자료를 갖추고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브라질의 원주민 선교 위원회는 우리가 원주민을 위한 교회가 되어 원주민 권리를 보호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는 단지 원주민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특히 선교지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권을 옹호하고 원주민의 권리와 히베이리뉴스ribeirinhos 부족들, 해안 주민, 그 밖의 다른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자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주민을 위한 교회입니다.

  그러면 ‘원주민의’indigena 교회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루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위해 원주민의 교회를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원주민의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복음 선포를 접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토착 공동체들은 그들의 신앙이, 전통으로 내려온 현실 안에서 적합한 과정을 거쳐 육화와 토착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지닌 문화와 정체성, 역사와 영성의 맥락 속에서 그들 사이에서 나온 목자들과 직무 사목자들과 함께 원주민의 교회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보편 가톨릭교회와 온전한 친교와 일치를 이루면서, 한편으로 토착 문화 안에서 토착화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실제 원주민들의 역사 안에 이미 하느님의 손길이 많이 닿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하느님은 언제나 그들의 역사 속에 현존하셨습니다.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와 문화에서부터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명확한 표징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 민족들은 유럽 문화와는 뿌리가 다릅니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 민족들이 각각 다르듯이 또 다른 혈통입니다. 결국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과 영성의 내면 안에서, 그들이 초월자와 이루는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주민의 얼굴을 한 교회를 탄생시켜야만 합니다.

  원주민의 교회는 범아마존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이곳 현실에서 필요한 사목적 접근은 무엇일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특색 있는 이곳 문화들 안에서 그리고 이곳 상황에서 적합한 사제상, 선교자상, 기타 역할들에 어울리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유럽적인 사제의 모습을 원주민 사제들에게 이식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직무 사목자의 특성에 지나친 관심과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그 사목자를 받아들일 공동체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합당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원주민 공동체가 사목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목자가 공동체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목자는 공동체의 필요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요구는, 아마도, 특정 지역의 특정 공동체에는 그에 맞는 사목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목을 고려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원주민 공동체에 파견된 모습 그대로라는 이유로 과거의 사목자상을 아무 변용 없이 고수하고, 공동체도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항변하지 맙시다.

  사목자들이 파견된 이들이라는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고유한 필요를 지닌 현장의 공동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사목자를 파견해야만 합니다. 더욱이 사목도 공동체를 기반으로, 그 문화와 역사와 필요로부터 구상되어야 합니다. 개방성이란 이러한 것을 뜻합니다.

  원주민의 교회는 교령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시노드는, 충분히 자유롭게 논의하고, 모든 그리스도인과 하느님 자녀가 걸맞은 존엄성을 인정받도록 길을 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번 시노드가 중요합니다. 교종은 이 시노드가 전체 교회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이미 있는 것을 재생산하거나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교종은 지구적 차원의 위기라는 현재 상황을 부인할 수 없다고 명확하게 표명하십니다. 교종은 ‘통합생태론’ecologia integrale을 촉구하며 다가오는 시노드에 이 주제를 포함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심각한 환경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겠습니까?

  교종이 우리 앞에 제시하신 통합생태론은 경이로울 만큼 새로운 현실입니다. 통합생태론은 현대의 성장과 생산 모델에 근본적 도전을 제기합니다. 반대로 성장과 생산 모델은 기술관료적 관점의 바탕인 현대 이성, 과학, 기술에 기댑니다. 이 모델들은 통합생태론이 내는 결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기술관료적이고 통치적인 관점이 우세합니다. 이 관점이 사상을 강요하며 원하는 바를 내키는 대로 얻어냅니다.

  이러한 기술관료적 제도 또는 관점은 사실, 근대성에서 옵니다. 이것은 현대철학의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rivoluzione copernicana의 결과물입니다. 고대철학에서 숙고되고 분석되던 것이 이제는 객체에 머물며, 사고하는 주체 또는 주체성이 부각됩니다. 이는 굉장한 진보였습니다. 사실, 근대성이 주는 풍요로운 자산이지요.

  그러나 큰 이익이 걸리면서 이 진보가 변질되었습니다. 주체성이 주관주의, 개인주의로 변했고, 그러고는 자유주의가 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철학 혁명뿐 아니라 이 자유주의도 현대 과학의 탄생과 기술에의 적용에서 덕을 봤습니다.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진보했으며 점점 더 정교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손에 자연을 조정할 수 있는 막대한 힘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기술적인 진보는, 그 비용이 어떻든, 그리고 자연이나 사람들 혹은 인류 공동체에게 얼마나 해를 끼치든지 간에, 더욱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정교해진 기술은 지구를 착취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는 다른 세계, 외부에서 왔고, 지구는 길에서 주운 물건인 양 우리의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망설이는 법이 없이 지구를 착취하고 손상시키고 약탈해도 된다는 듯이 굴었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현대의 인간에게 언제나 더 좋은 재화들을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사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원주민들은 재화를 축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주변 모든 것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축적합니다. 그들은 재화를 쌓아 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관계와 공동체적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쳐줍니다.

  추기경께서 말씀하시는 기술관료적 관점이 우리 지구에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은….

  기술관료주의는 통합생태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가 이 땅의 자손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치 다른 데서 이 지구에 와서 찾은 보물을 모든 가능한 방식을 동원하여 착취하듯이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손들이며, 만일 우리가 땅을 훼손시키면 결국, 우리 자신에게 해가 돌아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땅의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땅으로부터 났음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러기에 ‘어머니’madre인 땅이며, 우리는 이 땅의 자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의 것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하느님은 땅으로부터 온 이 육신에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영은 생명의 영입니다. 우리가 땅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과 형제입니다. 그리고 교종은 우리 인간들은, 지성과 자유 의지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땅을 돌봐야 할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양하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하고, 돌보고, 잘 관리하는 지성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창조물들과 다른 형제자매들을 희생하면서 이 땅의 부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통합생태론은 신학적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까? 추기경께서 발전시킨 신학적인 비전이 있습니까?

  교종은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통합생태론의 가장 중요한 면은, 하느님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과 결정적인 관계를 맺으셨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관계 안에 계시기에,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스스로 묶이셨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걷는 여정의 마지막 지향점이 되십니다. 모든 생명체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아가고 있는 목적 지점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훌륭한 문헌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것들에게는 초월적인 최종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분명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창조물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성소는 초월적인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물의 이름으로 주님을 찬미하고 그것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창조물은 모두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부활의 논리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물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의 의미 안에서 그것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향하고 있는 여정의 끝에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걸을 길이 어떤 것인지 먼저 계시하시는 모범이 되십니다. 인류는 방향성 없이, 그리고 의미 없이 뱅뱅 돌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걸어야만 합니다. 분명한 미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향하고 있는 커다란 초월적 지점입니다. 그러므로 통합생태론이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론을 다시 쓸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성 바오로는 인류가 걷는 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테야르 드샤르댕은 진화에 대한 연구에서 이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신학과 그리스도론, 그리고 성사 신학까지도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있고’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 넓은 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읽혀야만 합니다.

  브라질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Tudo está interligado, como se fóssemos um, tudo está interligado nesta casa comum”(모든 것은 연결되어있고, 이는 마치 하나로 이루어진 것과 같아, 모든 것은 이 공동의 집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있다). 하느님 스스로 관계 안에 계시며, 결정적으로 우리들의 공동의 집과 함께 계십니다. 저는, 통합생태론의 개념이 우리가 시노드의 여정 안에서 하나로 일치하기 위하여 아마존 지역에서 행해야만 하는 모든 일을 비추어준다고 믿습니다.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가 시노드 준비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기구는 어디에서 탄생된 것인가요?

  네트워크에 대한 구상은 제5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존경하는 베네딕토 16세 교종도 이 회의에 참석하셨지요. 그 당시에 교종은 회의 처음부터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개방성에 우리가 모두 놀랐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당신에게 친숙하지 않은 세계에 대해 넓은 개방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럽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이 민족과 이 지역과, 라틴아메리카와 함께하는 대화에 열려계셨습니다.

  아파레시다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알려진 대로 베르골료도 그곳에 계셨지요.

  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였던 베르골료 추기경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아마존 공동 사목 계획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종 프란치스코는 그 회의에서 아마존에 관한 도전 앞에 경각심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이며 대주교인 분에게 아마존은 아르헨티나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는 현실이었습니다. 마치 환상의 세계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파레시다에서 아마존 문제들을 다루었던 브라질 주교님들의 주장이 그분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자각하셨습니다. 그분은, 사실 그 순간부터, 아마존 전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존을 위한 라틴아메리카 전체 공동 사목 계획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교회의들은 국가 단위의 조직인데, 아마존은 한 국가에 속하지 않고, 9개국이 포함된 초국가적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인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내었습니까?

  처음에, 아마존 지역에 걸치는 나라들의 주교회의에서는 자기 나라에 해당하는 아마존 지역도 사목 계획에 포함했습니다. 지금은, 아파레시다 이후, 그리고 무엇보다 아마존 시노드 개최 선언 이후, 범아마존 전체를 위한 사목 계획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각 국가 주교회의에 해당하는 아마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덜어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교회적 주체가 만들어졌으며, 점차 이것을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종은 분권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중앙 권한을 분산할 때는 언제나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중앙의 권력과 위신에 다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려면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범아마존 교회 네트워크는 정확하게 아마존의 9개국 모든 나라의 현실 상황들 간에 하나의 네트워크를 결성하고자 하는 활동을 제안합니다. 네트워크는 자체 계획을 지닌 별개의 단위가 아니라 모든 개체, 공동체, 선교사, 그 지역 교회 주체, 아마존을 보존 보호하는 사람들과 기획들을 연결하는 활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림 속에서 외떨어지거나 길을 잃었다는 느낌 없이 모두가 이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활동은 언제나 지역 주교들과 지역 선교사들에게 달려있게 될 터이니, 그분들도 이 네크워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고 느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종은 언제 시노드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까?

  이미 2015년에 교종은 저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아마존 지역의 모든 주교를 소집해 회의를 열 구상이 있습니다. 아직 어떤 형태의 회의 혹은 모임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노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교들과, 아마존 지역의 나라들의 주교회의들과 함께 이러한 모임을 어떻게 이루어낼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시노드에 대한 개념이 자라고 무르익어 결국에는 2017년, 시노드 개최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노드를 위해 매우 많은 일을 했으며, 미래를 위한 이렇듯 중요한 활동 안에서 계속 일해 나갈 것입니다. 시노드는 교회를 위해 새로운 길들을 찾고 설계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 La Civiltà Cattolica, 4054 II (18 maggio 2019), 343-356.
** Antoio Spadaro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예비 문서를 비롯한 시노드 자료들을 www.sinodoamazonico.va에서 볼 수 있다.
2) 참조: 아마존 시노드에 관하여 Arturo Peraza, “Amazzonia e diritti umani”, La Civiltà Cattolica, 2019 I, 45-58.
3) 참조: Diego Fares, “A 10 anni da Aparecida. Alle fonti del pontificato di Francesco”,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 338-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