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날아가는’ 젊은이들
교종 프란치스코의 사도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분석

GIOVANI CHE «VOLANO CON I PIEDI» Analisi dell’Esortazione
apostolica «Christus vivit» di papa Francesco
*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장재명 파트리시오 신부 옮김 (부산교구 우정성당 부주임)

  ¡Él vive y te quiere vivo! 그분은 살아계시고 여러분이 생기에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2019년 3월 25일에 서명한 새로운 사도 권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외침은 베르골료의 이번 문헌에 담긴 깊은 뜻을 요약한다. 문헌의 제목도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Christus vivit이다. ‘생명’vita, ‘살아있는’vivo, ‘살다’vivere라는 어휘들이 이 문헌에서 280번이나 등장하는데, 이 권고의 키워드인 ‘젊은이’giovani에 버금가는 횟수이다. 충만하게 사는 삶, 이것이 젊은이들에 관하여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하는 모든 것의 중심축이다. 권고의 각 페이지는 에너지가 넘쳐흐르며 일정한 리듬으로 전개된다. 마치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충만한 삶을 문자 그대로 ‘촉구하는’esortare 듯하다.

  젊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존재할 뿐이다

  『God is Young: 이 시대 청년들에게 전하는 희망 메시지』1)라는 대담집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명확하게 말했다. “젊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젊음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젊음에 대한 신화를 언급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젊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청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길 좋아합니다.”2) 젊은이는 ‘카스트’casta의 한 계급처럼 분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 성 바오로 6세 교종이 말한 것처럼, 청춘기란 “구속받지 않는 열정, 필연적인 추락, 극복할 수 없는 위기, 퇴폐적인 염세주의, 해로운 에고이즘을 겪는 나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젊다는 것은 하나의 은총이고 행운이다.”3) 우리 모두 지금 젊거나 한때 젊었으므로, 젊음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은총이고 행운이다. 그러므로 젊은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곧, 인간 존재에 대하여 말함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생명에 자신을 여는 이들이 지니는 충만과 행복의 직관이 젊은이들에게 있음을 알아본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는 사슬을 잇는 고리와도 같다. 분명히 이 문헌은 독립적인 글처럼 읽을 수 있지만, 교종이 풍요로우면서도 복합적인 편집 과정을 거쳤으며 여기에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참여했음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바로 2018년 10월 3일부터 28일까지 로마에서 개최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를 통해서였다. 이 회의는 자체 최종 문서도 발표한 바 있다.4) 젊은이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약속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젊은이에게는 예언자다운 면모가 있다. 그래서 시노드는 이들의 예언을 파악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는 이러한 해석 작업의 한 부분이다. 권고는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을 훑어보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찾아가 보자.

  그분은 살아계시고 여러분이 생기에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문헌을 여는 장은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젊은 인물들을 간략하게 훑는다. 여기서 이 권고의 맛을 읽어낼 수 있는데, 교종은 대단한 연설을 하기보다는 폭넓게 종합하면서 한 가지 특성, 한 가지 행동, 한 가지 활동 등을 잡아, 조화로운 초상을 그리는 데 유용한 스케치를 포착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젊은이들에게 꿈속에서 영감을 주시고(요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들 가운데 당신이 선택한 이를 찾으시는(다윗) 분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솔직한 젊은이들(기드온), 불확실 속에서도 용기를 내는 젊은이들(사무엘), 책임 앞에서 ‘막막하지만’persi 지혜롭게 행동할 줄 아는 젊은이들(솔로몬), 자기 백성의 양심을 일깨울 줄 아는 젊은이들(예레미야), 역경 속에서도 관대함의 모범이 되는 젊은이들(룻),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아내의 시종으로서 ‘주인’padrone을 현명한 방법으로 도와줄 줄 알았던, 이름 모를 소녀가 등장한다.

  신약 인물을 훑어보는 데도 같은 방법이 사용된다. 여기서도 기꺼이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허락하고자 하며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 이유에 대해 교종은 ‘젊은이는 기가 꺾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젊은이의 특징은 위대한 것들을 꿈꾸고, 광활한 지평들을 찾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며, 세상을 극복하려 하고, 주어진 짐들을 받아들일 줄 알며, 최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15항)

  또한 ‘자신의 젊음을 포기한’(18항) 한 청년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더’di più 선한 것을 찾고자 예수님께 다가왔다가 슬퍼하며 돌아간 한 인물을 강한 표현을 써서 다룬다. 이렇게 젊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생의 겉만 맴돌며’(19항) 산란하고 무감각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이 ‘젊음’giovinezza이 몸통과 형체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젊은이에 대한 현상학적인 직관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얼굴도 살펴보며, 교종은 그 얼굴에서 젊음을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특징도 제시되는데 어느 정도 상상을 가미하여 그려진다.

  예수님은 관계에 마음을 다하는 젊은이로 나타난다. 이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묘사를 읽어보자.

  예수님은 거기 서 계셨고, 다른 사람들 사이를 오가셨으며, 당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 농담을 건네셨고,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으며, 공동체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동하는 공동체를 표현할 때 사용한 그리스어 ‘시노디아’synodía는 정확히 이 ‘순례하는 공동체’communità in cammino를 가리킵니다. 성가정도 이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부모님의 신뢰 덕분에, 예수님은 자유롭게 다니시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웁니다.(29항)

  ‘공동체’carovana에 속했다는 특성이 나타나고 교종은 이를 주저 없이 ‘시노드’sinodo, 즉 이 권고가 나온 배경이 된 교회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와 연결 짓는다. 시노드적 교회는 젊어질 줄 알고, 엘리트주의에 빠지거나 따로 떨어진 곳으로 물러남 없이, 이 세상 속에서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와 함께 어울릴 줄 아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의 순례하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또한, 이는 세상 안에서 계획을 갖고 사는 방식이다.

  젊은이들을 가족이나 세상과 격리시켜 버린다거나, 때 묻지 않게 보호받는 선택된 소수로 만들어 버리는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젋은이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너그럽게 봉사하며 선교에 투신하게 하는 계획들이 필요합니다.(30항)

  부단함 ― 교회의 사명과 성화의 열쇠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요소들을 지니도록 부름받는다.(34-42항 참조) 경화硬化와 비활동성으로부터 자유롭고, 정의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며, 겸손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삶에서 교회를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더욱이 그들은 가끔 교회를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40항 참조) 만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교회는 ‘박물관’museo으로 전락할 것이다.(41항) 자, 그러므로, 질문을 던져보자. 교회가 어떻게 젊은이들의 꿈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교종은 이론적인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성경 인물 스케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 3세기 세바스티아노 성인부터 1990년에 세상을 떠난 키아라 바다노 복자까지 젊은 성인 열두 명을 짤막짤막하게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꿈과 요청들을 주시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과제와 사명에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마리아에게서 교종은 교회의 온전한 형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교종이 마리아를 ‘부단한 사람’quella inquieta이라고 묘사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46항) 부단함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사명과 성화의 열쇠이다.

  권고의 세 번째 장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 정확하게 말해서 부단함을 읽어내는 데 집중한다. 이 권고는 청년들의 현 상황을 빠짐없이 다루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권고 전체에 걸쳐 시노드 최종 문헌이 언급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여, 제 이야기는 시노드에 의견을 전달했던 전 세계 신자들의 수많은 목소리가 합쳐져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젊은이들까지도 그들의 성찰들을 가지고 참여하기를 원하며 질문을 던져 제 안에 새로운 질문들이 올라왔습니다.”(4항)

  그러므로 교종의 말은 신자 및 비신자들의 목소리를 떠안으며, 전기가 한데 집중되듯이 그의 말에 사람의 목소리가 ‘실린다’carica. 그리고 이때 교종에게는 성스러움 앞에서 삼가는 태도가 묻어난다.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젊은이의 마음은 하느님 생명의 씨앗을 품는 땅,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고 깊이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 거룩한 땅’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67항)

  교종이 권고에서 확인한 방식은 시노드 역동에서부터 나왔다. 해석하거나 선택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하고,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의해 ‘부단함이 일어나야’inquietati 한다. 젊은이들과 함께 세상의 여정들 안에서 걷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불가능하다. 시노드 회의실에 모인 교회의 목자들은, 젊은이들과 함께 걷지 않는다면 교회가 지키는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젊은이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을 수도 있다. 시노드에서 묵상에 동반되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콘 역시,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의 권고에서 다시 떠올린다.(156, 236, 292, 296항 참조) 권고의 3장 전체가 이러한 여정 방식을 확인하고 있다.

  들음으로써 첫 번째 확인된 점은, 목소리들이 너무나 다양해 하나로 혼합되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성악이 불가피하다. 이것저것 다 묶어서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 서두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했다. ‘젊은이들’giovani에 대해 통틀어서 말할 수는 없다고. 귀 기울여 듣고 걷기 시작한다면, 목소리들의 차이와 다양성이 전부 드러나게 된다.

  위기에 처한 세상의 젊은이들

  목소리마다 다르지만, 교종은 어느 단락의 제목에서 ‘위기에 처한 세상의 젊은이들’Giovani di un mondo in crisi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위기는 온갖 폭력, 박해, 남용, 중독, 배척의 산물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더욱 나쁜 것은 ‘무감각’anestesia일 것이다. 감각은 잃어가고, 외양에만 머무르면서, 멸시받고, 가난하고, 추하고, 버려지는 것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며, 정신과 영혼이 이런 식민지화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다.

  해독제는 존재한다. 눈물 가득한 눈을 통하여 현실을 바라봄 안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우는 법을 배웠는가? 굶주린 아이, 길에서 약에 취한 아이, 집 없는 아이, 버려진 아이, 학대받는 아이, 사회의 노예처럼 이용되는 아이를 볼 때 나는 우는가? 혹은 나의 울음은 뭔가를 더 가지려 하기 때문에 우는 자의 변덕스러운 울음인가?”(76항)

  교종은 젊은이들 안에 있는 ‘갈망, 상처, 탐구들’desideri, ferite e ricerche을 인지하면서 시노드가 확인했던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주제를 상기한다.(시노드 최종 문헌 21-31항, 권고 86-102항 참조) 그는 그 주제들을 가져다가 폭넓게 문헌에 인용한다. 그 세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디지털 환경, 이민, 그리고 학대의 비극이다.

  첫째, ‘디지털 환경’l’ambiente digitale은 소통의 도구로서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디지털화된 문화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아주 명확하게 디지털을 ‘정치사회적 참여와 능동적 시민의 배경’(87항)으로 규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주제를 건드린다. 문제인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도전인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가장할 수 없고 디지털 환경에서 형성되는 동의를 인지해야 한다. 불편함도 특히 거기서 표현된다. 어떻게 선동적인 샛길로 떨어짐 없이 민주적 참여의 형태로서 인터넷을 활용하는가?

  둘째, ‘이민’le migrazioni은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a del nostro tempo으로 이해된다. 이 현상은 고통과 학대의 결과뿐만 아니라 외국인 혐오 감정 측면에서 묘사된다. 교회는 오늘날 예언자적 역할을 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이는 분명 또 하나의 긴박한 주제이다.

  셋째, ‘학대의 비극’il dramma degli abusi은 권력, 경제, 양심, 성性에 관련된 형태에 치우쳐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해석한다.

  이 검은 구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쇄신을 불러오는 능력, 일관된 증언을 요구하는 능력, 다시금 꿈꾸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을 사용한다면 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00항)

  권고를 가로질러 교차하는 주제 한 가지는 ‘여성’donna의 권리 보호와 남녀 간에 필요한 ‘상호관계성’reciprocità 옹호다.(42, 81항 참조) 교종은 42항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더 큰 정의와 동등함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반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를 기억하면서 남성이 행사한 권위주의, 지배와 종속, 여러 형태의 노예살이, 학대, 남성우월주의적 폭력의 오랜 이야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비록 몇몇 페미니스트 단체들의 제안과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여성의 권리 주장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고, 남녀 간 상호관계 증진에 확신을 갖고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호보완성’complementarità에서 ‘상호관계성’reciprocità이라는 개념으로 건너가는 데 주목하자. 상호보완성은 더욱 정적인 개념으로 나타나며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어떤 면으로 이는 남녀 한 쌍의 구체적 삶을 파악하지 않고 특성을 지정한 채로 관계를 고착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계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플라톤주의적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주의 개념에서는 차이가 사랑의 일치 안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으며, 일치의 혼합을 통해 완전한 인간이 탄생한다고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245항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여성 리더십’liderazgo femenino, 즉 ‘교회 안에서 기준이 될 만한 여성 모델’의 사례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위대한 선포’

  4장이 권고의 중심이다. 이 장은 ‘모든 젊은이를 위한 위대한 선포’에 내용을 할애하며, ‘우리 모두가 꾸준히, 거듭 들어야 할 세 가지의 위대한 진리’(111항)를 담고 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Dio ti ama이다. 이 메시지에는 무장을 해제시키는 단순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바의 핵심 지점이기도 하다.

  만일 여러분이 이미 들은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상기시키고자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삶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은 끝없이 사랑받고 있습니다.(112항)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하드 디스크가 아니다. 그분의 기억은 ‘측은히 여기는 자애로운 마음’un cuore tenero di compassione(115항)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진리 없이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난다. 거짓되고, 탁하고, 무거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바로잡는 데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목적 작업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시는’amante della vita 하느님의 참된 이미지로부터 그분을 멀어지게 하는 생각들로 그분의 이미지를 채워왔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의 4장에서 표현한 두 번째 ‘위대한 진리’grande verità는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당신을 사랑으로 내어주셨습니다.”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행동할 것을 호소한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께 매달리십시오, 그분이 구원하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맡겨드리십시오.”(119항) 십자가에 도달한 이 사랑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모순들을 넘어선다.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의 모순, 연약함, 결핍들을 통하여’(120항) 우리와 함께 당신 사랑의 이야기를 써나가신다. 아무것도 또 아무도 십자가에서 내쳐지지 않는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Él vive!이다. 이는 그저 아름다웠던 과거의 예시가 아니다. 베르골료는 요청한다.

  기쁨이 넘쳐흐르는, 행복한 예수님을 묵상해 보십시오. 영광스럽게 승리하신, 여러분의 친구이신 분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사람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을 죽였지만,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악은 마지막 발언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악은 마지막 한마디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친구가 되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서 영광스럽게 승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십니다.(126항)

  마치 부활의 기쁨의 직접적인 결실인 듯이, 이 표현들 안에서 엄청난 승리, 환희가 느껴진다. 이것은 회심을 일으키지만, ‘윤리적인 결정 혹은 대단한 사상’(129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앙의 세 가지 위대한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원자이시며, 그분은 살아계십니다.”(130항)

  ‘두 발로 날다’

  권고의 5장에서 교종은 복음의 빛을 받을 때 젊음의 여정에서 무엇이 변하는지 묻는다. 이 여정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은 마치 영신수련에서 요점을 제시할 때처럼 묵상의 실마리들을 제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생각은 학문적 논문처럼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이고 존재론적 묵상을 위한 가르침들을 주면서 독자를 성장하게 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꿈과 선택들’sogni e scelte. 젊음은 꿈이 있는 시절로 이해된다. 그러나 베르골료는 주님과의 만남이 사람들을 자라게 하고, 꿈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성찰한다. 주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추상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신앙은 사람들을 책임을 향해 개방시킨다. 이것이 핵심이다. 부단함이 성장의 동력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마음을 열어주고, 열린 상태를 유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138항 참조) 하지만 그 이후에 이러한 상태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선택으로 이어져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길을 찾는 소년 소녀를 볼 때, 그들에게서 ‘두 발로 날기’를 원하는 이를 본다. 이 훌륭한 표현으로 충분하겠지만, 교종은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젊은이는 어른들처럼 두 발로 걷는다. 그러나 두 발을 나란히 둔 어른들과 달리, 젊은이는 두 발을 앞뒤로 놓고 언제든 출발할 준비를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정, 즉 인생 여정으로 향하는 길을 여는 약속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젊은이는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지만, 또한 그로 인한 낙담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는 자원들이 충분히 있어서(139항 참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과 경험에 대한 원의’voglia di vivere e di sperimentare. 그래서 젊은이의 여정은 미래를 향하고, 역사에서 오는 낙담을 상쇄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번민이 문제가 될 수 있다.(142항 참조) 우리 행동의 결과가 즉각적이지 않음을 알고는 두렵고 불확실하며 무력해질 때 번민은 우리의 원수가 된다. 교종은 이러한 긴장들을 겪는 젊은이의 상황을 공감한다. 또한 그는 그러한 긴장들이 불만족과 무책임할 정도로 방종한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위험도 본다.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일을 준비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살라는 초대임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분명한 자극이다.(147항 참조)

  ‘우정’l’amicizia. 젊은이의 삶에 중요한 요소 하나가 바로 우정이다. 교종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주님께서 우리가 성숙하도록 도와주신다고 말한다. 어려운 순간들에 우리 곁에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애정, 그분의 위로 그리고 그분의 호의적인 현존의 반영이다. 친구들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열고, 고립을 버리고, 삶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151항 참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젊은이의 특권의 모습이다. 이는 지력으로 동의하는 껍데기가 아니라, 우정이라는 소중한 친밀감이다.

  ‘성장과 상상력’crescita e immaginazione. 안전과 안락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져서 열정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젊음의 열정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 동반이 필요하다. 넓은 마음의 개방과 매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교종은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고백한다. “제가 교종으로서 직무를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제 지평을 넓혀주시고 저에게 새로운 젊음을 주셨습니다.”(160항) 교종의 삶에 대한 통찰을 밝히 보여주는 문장이다. 지평들을 열어주고 확장하는 이러한 성숙은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격려하는 예언이 된다.(162항 참조)

  ‘형제애’fraternità. 성숙은 타인에 대한 개방이며 이것이 ‘황홀경’estasi의 참된 모습이라고 교종은 말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형제애를 아는 것이다. 형제애를 증언하기 위하여, 교종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했던 국가 르완다의 주교들을 언급한다.

  ‘투신’impegno. 이 의미에서 교종은 소규모 집단에 대한 참여가 더 큰 투신으로 이어지기를 권한다. 교종은 ‘사회적 애덕’carità sociale과 ‘정치적 애덕’carità politica, ‘능동적 시민 활동’cittadinanza attiva, ‘사회적 연대’solidarietà sociale에 대해서 말하는데,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헌신을 표현한다. 베르골료의 언어에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며 탁월하게 투신의 형태를 요약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사회적 우정’amicizia sociale이다. ‘단결’이라는 어휘보다 고상하면서도 훨씬 더 강렬한 표현이다. 이 우정이 ‘공동체적 힘’coesione(172항)이 수렴되는 열매이다.

  ‘선교’missione. 마지막으로 베르골료는 이러한 투신이 한계와 제한을 갖지 않음을 명확하게 규정한다.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지 더 가깝고 더 다정한 사람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힘, 담대함, 창의력을 가지고 세상의 변화에 협력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과제이다.

  하늘로 뻗는 가지들과 땅속으로 내리는 뿌리들

  권고의 어조는 단호하게 오늘부터 (내일부터 혹은 미래에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시키려는 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베르골료는 뿌리들의 중요성을 진술하는 데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과거 없는 미래는 날아가버리고, 역사와 전통이 없는 젊음은 순수한 이상, 신화, 조작 또는 피상적인 것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세대 단절은 세상에 결코 유익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191항)

  시노드 참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사모아제도에 온 젊은이가 말했다. 교회는 하나의 카누이며 노인들이 별들의 위치를 해석하면서 방향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젊은이들이 노인들과 대화하면서, 힘차게 노를 젓는 것이다. 교종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했고 이번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다시 언급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모두가 같은 카누를 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201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젊은이는 예언자이지만, 삶의 여정을 먼저 걸었던 사람들의 꿈을 들음으로써만 참으로 예언할 수 있다. 그 꿈들은 그 사람의 오랜 체험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다.

  시노드 기간에 『세월의 지혜』5) 책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려, 교종이 직접 참석하고 세대 간 관계를 주제로 노인들과 젊은이들의 질문을 받았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 세계 노인들의 증언을 모은 이 책에서 교종은 증언에 대답하거나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상호작용을 한다. 교종은 권고에서 책을 다시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월의 지혜』라는 책에서 저는 몇몇 갈망을 요청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노인들에게 나는 어떤 부탁을 해야 할까요? 나는 우리들을 기억 지킴이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성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노인들을 하나의 종신 성가대로 그려봅니다. 위대한 영적 안식처로서의 성가대, 삶의 현장 안에서 일을 하고 투쟁을 벌이고 있는 더 큰 공동체를 청원기도와 찬미가로 지원하는 성가대입니다.’ ‘소년 소녀들, 노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주님의 이름을 찬미함’은 아름다운 일입니다.(196항)

  노인들은 한 해 한 해를 살아오면서 겪은 체험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기억과 회상의 바탕 위에서 그들의 꿈을 세운다. 만일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꿈들 안에 뿌리를 내린다면, 분명 그들은 미래를 볼 수 있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는 시각들을 가질 수 있다고 교종은 생각한다. 반면에 노인들이 꿈꾸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은 더는 명확하게 전망을 볼 수 없다.(193항 참조) 세대 간 단절이 역사의 단절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불꽃을 잃지 마라

  7장은 ‘청년 사목’pastorale giovanile, 즉 교회가 젊은이들을 동반하고 주역이 되게 하는 교육 활동에 온전히 할애되었다. 교종은 때때로 전통 구조 안에서는 불안, 필요, 문제, 상처들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202항 참조) 젊은이들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기를 요청한다.

  계획 수립을 전략으로 삼거나 모임들을 활동 모델로 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 교종은 ‘창의력’creatività, ‘담대함’audacia, ‘영리함’astuzia, ‘재능’ingegno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203-204항 참조) 그러고는 크게 두 가지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하나는 젊은이들을 찾아가서ricerca 참여시킴으로써 새로운 젊은이들을 주님 체험으로 끌어당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체험한 이들이 성숙의 여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교종은 사목 일선에서 젊은이들이 ‘불꽃을 잃어버리는’(212항) 끔찍한 위험이 없게 하기를 요청한다.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만일 젊은이들이 재의 세상에서 성장한다면, 그들의 커다란 열망과 계획의 불꽃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아무 의미 없는 광야에서 성장한다면, 어떻게 씨앗을 뿌리기 위해 희생하고자 하겠습니까?”(216항)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이 ‘주입식 교리’indottrinamento(214항)로 변할 때도 분명히 불꽃은 꺼지게 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의 교리뿐 아니라 영적 양성 프로그램들에도 지쳐있고, 때때로 그들은 사람들을 위한 활동들에서 더욱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요청합니다.”(225항)

  교리로 축소된 복음은 밋밋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멀리 떨어져 있고, 젊은이들의 문화와 분리된 복음이다. 이것은 아마도 생명도 풍요도 없는 고독 속에서 방황하며 나머지 젊은이들과는 ‘다른’ 청년 ‘엘리트’에게만 어울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계 속에서도 성장의 길을 찾는 수많은 새싹들의 숨을 막으며 뿌리를 뽑고 있습니다.”(232항)

  교회는 ‘방공호’가 아니다

  교육기관 내의 사목에 할애한 장은 매우 중요하다. 교종은 매우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된 듯이 보이는 가톨릭 학교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 학교들은 변화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모든 변화와 함께 초래될 실제 혹은 허구의 위험들 앞에서 자신을 닫도록 떠밀립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매우 강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바깥의’di fuori 오류들로부터 보호하는 ‘방공호’bunker로 변한 학교는 이러한 경향의 풍자적인 표현입니다. 이 이미지는 많은 젊은이들이 일부 교육기관을 떠날 때 겪은 경험, 즉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젊은이들이 사는 세상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일치를 도발적으로 반영해 보입니다.

  여기서 교육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양성하기 바라는 인간상도 문제가 된다. “젊은이들이 받은 종교적 윤리적인 가치들 또한 그것을 비웃는 세상에 직면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지 못했고, 이 사회의 속도 안에서 쉽게 유지할 수 있는 기도 방법과 신앙생활 방법도 그들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교육자에게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강인하고 전인적 인격을 갖추며 주역을 맡고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 학생을 보는 것’(221항)이다.

  탐구와 질문의 길은, 식별을 동반하여 선택하고 완전히 성숙하게 신앙에 충실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방공호 모델은 세상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될 양성 공간의 의미로 교종이 자주 언급한 ‘야전병원’ospedale da campo 모델과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민중의 참여와 리더 역할 수용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호소 역시 매우 강력하다.

  성소聖召와 식별

  권고의 마지막 두 장은 ‘성소’vocazione와 ‘식별’discernimento에 관한 내용이다. 이 두 가지는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폭넓게 다룬 주제이다. 새 권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시노드 체험에 비추어 이 주제를 재조명한다.

  성소에 할애한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8장의 서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성소를 식별할 때, 사회를 위한 특정 봉사에 필요한 능력을 자신이 갖추고 있는지 보는 일은 중요합니다.”(255항) 다른 사람들을 향한 봉사는 대개 다음의 두 가지 근본 문제와 연결된다. 새로운 가정의 형성과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가정’famiglia은 어디 매이지 않고 개인주의적으로 삶을 보는 관점, 그러나 실은 고립과 고독에 구속된 관점과 충돌이 불가피한 노선 위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전적이고도 관대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능력’(266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매우 강조한다.

  ‘노동’lavoro은 인간이 충만하과 성취를 누리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것을 세 개의 ‘T’, 즉 토지tierra, 주거techo, 노동trabajo과 함께 묶어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대중운동’movimenti popolari에 대한 교종의 2016년 11월 5일 연설은 기억할만하다.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노동이 그들의 꿈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을지라도, 청년들이 전망을 키우고, 그들의 삶을 위해 진정으로 자신에게 와닿고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일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계속 식별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268항)

  이 때문에 정치에서도 노동을 중요한 주제로 간주해야 한다. 지금은 고용증진을 위한 새로운 방법보다 고용절감을 위한 새로운 방법이 더 빨리 생기고 있다.(271항 참조)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빠른 속도로 수많은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재핑’과 식별

  한편, 성소로 이해되는 삶은 내적 침묵의 공간을 요구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실존적 ‘재핑’zapping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7항에서 이를 언급하였고 이번 권고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 “둘 또는 셋의 화면을 동시에 검색하면서 서로 다른 가상의 현실 속에서 동시에 교류할 수 있습니다.” 실존적 멀티태스킹 앞에서 식별의 지혜가 요청된다. 만일 이 지혜가 부족하다면, 우리 모두에게 ‘지나가는 유행의 힘에 좌우되는 꼭두각시로 쉽게 변해버리는’(279항) 위험이 올 수 있다. 침묵과 고요는 식별에 유익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침묵 안에서 울려 퍼질 질문 목록을 제시한다.

  나는 내 감각들과 외적인 모습들을 넘어서,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 가슴을 기쁘게 하는 것과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나의 강점들과 약점들은 무엇인가? 또 다른 질문들이 곧바로 뒤따릅니다. 나는 어떻게 세상과 교회에 더욱 유익이 되고 더 나은 봉사를 할 수 있는가? 이 땅 위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또 다른 매우 현실적인 질문들이 뒤따릅니다. 나에게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능력들이 있는가? 혹은, 그 능력들을 획득하고 개발할 수 있는가?(285항)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식별이란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 개화된 이들을 위한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식별은 하나의 카리스마carisma이다. 교종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당신을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참조), 식별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더 뛰어난 지력이나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170항) 그러나 무엇보다도 “식별은 유아기적인 자기 분석이나 개인주의적 자기 성찰의 형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으로 벗어나 하느님 신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형제자매의 선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175항)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여정을 식별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교종에 따르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들음은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세 가지 감수성을 포함한다.(292-294항 참조) 첫째는 필요한 시간만큼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조건 없이 들어주는 것이다. 둘째는 은총 또는 유혹의 활동을 인식하는 올바른 지점을 알아차리는 능력과 관련된다. 이렇게 듣는 것은 선한 영뿐만 아니라 악한 영의 함정들, 속임수들, 유혹들도 알아보도록 이끈다. 셋째는 감정들의 껍질을 넘어서서 상대방이 진정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깊이 들어주는 것이다.

  식별은 자유를 전제로 하고 동반을 요청하는 과정이다. 정해진 처방전은 따로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주는 큰 가르침은 이것이다. 바로 젊은이들이 자신의 운명과 세상의 운명이 그들 손안에 있음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의 투신은, 신앙의 빛 안에서, 성소이고 사명이다.

  * * *

  세상과 교회는 젊은이들의 직관과 믿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열정과 책임도 필요로 한다. 젊은이들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교종은 그의 권고를 지혜와 겸손을 담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여러분이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에 먼저 다다른다면, 인내를 갖고 우리를 기다려주십시오.”(299항)


* La Civiltà Cattolica, 4051 II (6/20 aprile 2019), 3-17.
** Antonio Spadaro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프란치스코 교황·토마스 레온치니, 『God is Young:이 시대 청년들에게 전하는 희망 메시지』, 윤주현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8).
2) Ibid., 21.
3) 성 바오로 6세 교종, 1963년 12월 1일 눈치오 술프리치오의 시복식에서 행한 훈화.
4) Una Chiesa che frequenta il futuro. Tutti I documenti del sinodo ordinario 2018. «I giovani, la fede e il discernimento vocazionale», (Milano: Àncora, 2018).
5) 교황 프란치스코, 『세월의 지혜』, 정제천 옮김, (서울: 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