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파브르의 영적 어휘
‘열망’, ‘정감’, ‘신심’, ‘마음’

IL VOCABOLARIO SPIRITUALE DI PIETRO FAVRE
«Desiderium», «affectus», «devotio», «cor»
*

브라이언 올리어리 S.J. **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성삼의 딸들 수녀회)

  중세 영성사는 식별의 이론과 실천의 정의定義에서 어휘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이는 성 베르나르도와 다른 시토회 저자들의 저술에도 해당되듯,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첫 번째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1506-1546)의 『영적 일기』Memoriale1)에도 해당된다. 몇몇 핵심 단어의 분석은 『영적 일기』의 영성에 있어 체험의 중요성에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체험에 관련된 모든 용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완벽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된 용어들은 식별에 대한 파브르의 글에서 분명 의미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용어들의 사용으로 그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주된 흐름 안에 자리하게 되며, 특히 성 이냐시오 로욜라 가까이에 있게 된다.

  열망Desiderium

  이 단어의 잦은 등장은 파브르의 영적 주해의 편집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그들이 일기에 부여한 제목들에서 알 수 있다. 편집자들 중 하나는 일기가 마치 모든 면에서 열망들의 목록이기라도 한 것처럼 해석했으며,2) 현대의 독자들도 같은 인상을 받는다. 어떤 해석자는 파브르를 ‘열망의 사람’l’homme de désirs이라고 불렀다.3)

  열망desiderium이라는 용어는 이미 선善으로 인정되고 사랑받는, 하지만 아직 획득하지는 못한 선善을 향하는 상태이다. 파브르의 내적 삶은 열망으로, 갈망으로, 그 순간 자신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는 원의願意로 지배되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였고, 결코 만족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였으며 “이것으로 충분해!”Basta 하고 외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실에서 이냐시오식 ‘마지스’magis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파브르가 열망한 대상은 직접적으로 하느님 이거나 자신의 영적 진보, 혹은 이웃의 구원이었다. 그것들은 파브르 영성의 필수적이요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식별 활동을 위한 날것 그대로의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파브르의 열망들은 결코 허황된 욕망이 결코 아니었다. 흔히 그것들은 강렬했고 막강했으며 그의 내면 상태를 깊이 바꾸어 놓기도 했고 위로나 황량함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의 예민하고 감성적인 성품에 대해 알려진 대로 볼 때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열망이 다양하고 많은 것은 어린애 같은 단순함에서,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권능 및 그 권능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려는 의도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파브르는 어떤 열망들이 좋은 것인지를 식별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한다.

  열망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오는 한, 그리고 그분께로 인도하는 한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우리 힘을 넘어서 있는 일들도, 그리고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도 우리의 기도 안에서 자주 열망합시다.

  이 열망들은 하느님께 불쾌한 것들이 아닙니다. 열망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고 그분의 영靈 안에서 체험되는 것들입니다. 어느 쪽이냐면 열망하는 방식으로 그분은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부추기시는데, 이 사랑은 내적이기만 하지 않으며 그분이 행하시는 거룩한 활동으로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주 더 높은 것들을 원하고 꿰뚫어 보고 희망하게 하십니다. 적어도 가장 평범한 것들을 게으름과 불신 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M 155)

  이러한 실용적 관찰은 예리한 심리적 통찰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찰은 파브르가 도달한 자의식의 정도와 그가 더 크고 더 강력한 활동을 향해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동기 부여를 위해 열망을 이용하는 방식도 어느 정도 드러낸다.4) 그러한 동기 부여가 항상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그는 인정한다. 파브르는 내밀한 열망들과 감정들로 충만해 있다 할지라도 외적인 일에서는 너무 자주 실패하기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M 160 참조)

  1542년 8월 5-6일에 기록된 일기의 주해註解에서 파브르는 열망들에는 목표에 따라 규정되는 어떤 질적 위계가 있다는 믿음을 드러낸다.5) 며칠 동안 그는 기도 안에서 신심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괴로워했었지만, 하느님께서 ‘내 안에 모든 다른 현세적 열망을 넘어서 신심을 찾을 열망을 보존하시면서’ 활동 중이시다는 점은 인정했다.

  나의 통상적인 불만족과 열망들이 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커다란 호의로 여겨졌다. 그랬다면 위에서 말한 하느님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을 위한 신심을 발견하려는 열망을 없애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나는 알게 됐다. 우리 주님께서 내 마음의 최초 열망이 주요하고 원초적으로 되도록, 곧 하느님, 우리 주님을 발견하려는 완전한 관심에 내 영혼 안의 첫 자리가 주어지도록 내 영혼에 질서를 부여하는 은총을 그렇게 나에게 주시기 시작하고 계셨다.(M 63)6)

  여기서는 이제 더 이상 큰 것들에 대한 열망인가 작은 것들에 대한 열망인가 하는 구별, 기적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통상적인 것들에 대한 열망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직접적 결합에 대한 열망과 다른 모든 열망들 ―얼마나 좋고 거룩한가는 무관하게― 사이의 구별이다.

  사도직이나 자신의 영적 윤리적 진보에 관한 열망을 파브르는 이차적인 것으로, 하느님의 더 작은 선물로 간주한다. 이 사실은 왜 그가 종종 그러한 이차적 열망들(좋은 것들이라 할지라도)의 존재를 분심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더욱 직접적인 열망에서 그를 갈라놓는다. “성 라우렌시오 축일 전날, 순교자 성 로마노 축일 미사 전에 내가 내 생각과 열망의 지배자요 조종자가 되도록 나의 모든 분심에 맞서는 은총을 청할 마음이 생겼다. 당시에 나는 다소 분심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M 72)

  ‘내 열망의 지배자가 되려는 마음’은 참으로 파브르의 전형적인 특별한 내적 체험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심성, 의혹, 망설임, 식별의 예들은 어떤 유형의 열망들이건 간에 항상 파브르의 삶에서 하나의 커다란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애초에 우리가 주장한 바에서 결코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열망들의 위계가 위협을 받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또 어떤 것이 됐건 적어도 그 순간 덜 고양된 다른 열망을, 사도적 성격의 열망이라 할지라도, 옆으로 제쳐두기를 요구하는, 하느님의 더욱 직접적인 접촉으로 부르심을 체험할 때, 그는 항상 자신을 성찰했다. 일반적으로 열망들은 파브르가 두려워하거나 가장假裝하는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열망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거는 기대를 의미하고 드러내는 움직임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정감Affectus

  Affectus의 어원에 따른 유래(동사 afficio에서 나온)만 본다면 이 단어는 중립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어떤 외적 행위자에게 끌리거나 배척당하는 데서 오는 영혼의 모감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 단어를 네 가지 감정에 썼는데 이것들이 모두 다른 느낌을 구성한다. 그들은 그 네 가지를 구체적으로 사랑amor, 두려움timor, 기쁨gaudium, 슬픔tristitia으로 제시했다. 교부시대와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적 저술가들은 이 어휘에도 충실했고 그 뒤에 놓인 심리학에도 충실했다.7) 그러나 12세기에 특별히 시토회 회원들과 빅토르 수도회 수도자들의 독려를 받은 정감의 심리학이 발전하면서 affectus라는 말은 철저하게 중립적이었던 의미를 잃고 amor(사랑)와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하느님과의 결합을 일차적으로 정감으로 보던 신비 신학의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8)

  이것이 파브르가 affectus라는 말을 사용할 때의 의미이다. 그는 이 단어를 결코 단순히 감정이라는 말로 생각하지 않으며, 느낌이라는 말로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의지는 이 맥락에서 정감의 능력이다.9) 파브르에게 있어 의지는 행동을 차갑게, 엄격하게 비인간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곧 의지는 열망의 대상에 끌리고 집착하는데, 그래서 끌림과 집착이 넘쳐서 느낌과 감정을 포함하여 인간 전체를 끌어들인다. 결과는 선善에 대한,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께 대한 온전히 인간적이고 사랑에 찬 응답이다.

  정감affectus이 인간의 내적 삶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폭넓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 ‘정적情的 영성’spiritualità affettiva과 ‘정감적 기도’preghiera affettiva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용어들을 신앙과 영성에서 지적 요소를 소홀히 하는 배타적 방식으로 사용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런 순진한 배타성을 피하고 인간의,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응답의 본질적이고 갈라짐 없는 일치를 염두에 둘 때 그 용어들은 적어도 강세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체험과 영적 성숙의 결과로써, 직접 동료들의 여정을 인도했으며 그들을 정적情的 영성으로 양성하였다. 이냐시오도 역시 파리에서 지내던 시기에 학업에서 오는 몇 가지 메마름의 효과를 체험했다. 거기서 이냐시오는 기도 안에서 여러 가지 건조함을 견디어야 했지만, 1536-37년에 베네치아 근처에서 사제 서품을 준비하면서 그다지 영적이지 않은 일들을 해야 했을 때 그의 애정은 열정을 되찾았다. 이냐시오가 앞서 체험한 위로와 신비적 환시도 되돌아왔다.10) 묵상은 이냐시오에게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필요와 접촉함으로써 정감적 기도가 길러짐을,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기도는 또 사도적 열정을 자극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파브르가 묘사하는 일-기도-일이라는 순환이 발전한다.

  나는 기도를 잘 하는 방법과 선한 활동을 하는 방법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곧 기도의 좋은 열망들이 어떻게 선한 활동의 길을 열어 주는가, 또 반대로 어떻게 선한 활동이 좋은 열망을 가져오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또한 성령과 선한 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인간은 활동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훨씬 더 잘 발견한다는 점을 주목했고 분명하게 이해했다. 나는 우리가 특히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나중에 우리의 일에서만 그분을 발견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점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선한 일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찾고 발견하는 사람은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는 사람보다 더 견고한 방식으로 진보한다는 점도 알아차렸다. 선한 일을 수행하는 데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그분을 ‘실제로’in effectu 소유하는 것과 ‘정감으로’in affectu 소유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M 126)

  1543년 7월에 마인츠에서 쓴 어떤 글에서 파브르가 사용한 다소 흥미로운 문장 하나는 기도와 사도직이 서로 상호작용을 할 뿐 아니라 서로 혼합되어서 거의 함께 녹아들기도 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을 묵상한 후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손발의 상처들을 관상하고 있었는데, 그 상처들은 특별히 선행과 선한 열망에서 진보하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나를 초대하는 듯이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도 우리의 정감을 통해서도 행동할 수 있다.”(M 361)11)

  이 진술은 우리의 정감은 그 자체로 기도이기에 사도적으로 결실이 풍부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정감이 우리의 활동을 끌어내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파브르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는 순수한 의지력의 산물로써 우리를 어떤 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의무감이 요구하는 활동들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밀고 가는 우리의 감정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는 사랑을 통해 우리의 복합적 인격을 통합하도록 권고한다.

  신심Devotio

  파브르가 영혼 상태와 영적 체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신심devotio보다 더 중요한 말은 별로 없다. 그의 글에 나타나는 이 용어의 높은 사용 빈도뿐만 아니라 특히 그 말이 지니는 넓은 범위의 의미 때문에도 그렇다. 종종 이는 의미가 불명확한 모호한 용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한 가지 측면이 드러나는데, 곧 은총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 의지의 방향 정립(태도attitude)이 그것이다.

  파브르에게 있어 의지의 방향 정립은 흔히 정감, 감정, 열망 등을 포함하면서 그의 인격 내면에서 흘러나왔으며, 그래서 자주 신심devotio은 위로consolatio의 동의어가 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신심은 하느님을 향해서, 혹은 하느님과 관련된 것들을 향해서 끌리는 모든 체험을 나타낸다. 그러한 체험은 기도 중에, 기도 밖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사람들이나 사건들에서, 혹은 묵상 자체에서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원천은 항상 하느님이시다. 신심devotio은 언제나 선물이요 은총이며 호의이자 인생의 순례 길에서 주어지는 도움이다.

  이 말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 그것이 사용된 여러 구절 중 몇 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옛 성모 방문 축일 8일째인 1542년 7월 9일12) 파브르는 자신의 서원 1주년을 기억하고 ‘내 서원의 내용에 대해 큰 신심을’(M 45) 체험한다. 기도 중에 그 기억은 서원에 표현된 이상들에 새롭게 투신하도록, 그리고 서원에 충실하려는 결심을 강화하도록 그를 몰아 간다. 이 모든 것에는 정감적 열망이 동반된다. 여기서 그의 신심체험이 기억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기도가 항상 쉽지는 않다. 분심이 들기도 한다. 신심devotio은 때로는 유혹과 시련에 맞서는 피신처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 주일에 아침 성무일도를 낭송하고 있을 때 나는 분심 중에 있었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녀께 도움을 청하고 있었는데 나는 많은 답변들과 함께 명료한 신심의 은혜로운 순간들을 많이 받았다. 이 순간들은 용기를 북돋우는 선한 영들의 현존이 지속되기를 열망하도록 나를 초대했다.(M 135)

  파브르는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활동적인 사도이기도 했으며, 신심devotio은 그의 사도적 체험의 열매이기도 했다. 파브르는 자신에게 고해를 하러 오겠노라고 약속해 놓고 여러 시간을 헛되이 기다리게 한 어떤 젊은이의 일화를 들려준다. 그때 파브르는 쓰라림의 느낌을 체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형제들 중 꼴찌로서 인내를 발휘함에 있어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보여 주시면서 그를 위로하셨다.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 자주 나에게 주셨던 각 개인의 영혼에 대한 신심이 돌아왔고 그와 함께, 그들 각자를 위해서, 어쨌건 각 영혼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각자를 위해 온 생애를 사시고 고통 받으시고 돌아가신 분을 본 받아, 덜 힘들고 더 영광스러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방식만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각자를 위해서 고통 받고 수고하려는 의지가 돌아왔다.(M 429)

  파브르가 체험했던 강렬한 신심의 정도는 신심이 눈물lacrime과 연결된 구절들 안에서도 나타난다. “죽은 이들의 날 미사를 거행하는 동안, 아니 미사를 준비하는 동안 벌써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커다란 신심이 생겼는데 전에는 이 축일에 죽은 이들에 관해서 그런 신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체험 전부가 죽은 이들에 대한 연민을 지니도록 나를 재촉하는 어떤 영을 통해서 왔는데, 엄청난 양의 눈물과 함께였다.”(M 164) “연기된 성 질베르토 축일의 예식을 행하던 날 미사 중에 나는 죽은 이들에 대한 가장 큰 신심과 그들을 위한 커다란 연민의 느낌을 체험하면서 미사 내내 눈물이 흘렀다.”(M 257)

  여기서 기술된 체험의 강렬함과 심리적 반향은 파브르의 정서적 기질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데 그에게는 기질적으로 고양된 상태와 가라앉은 상태, 커다란 다정함과 고통에 극단적인 경향이 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이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모든 것이 더욱 명백한 설명을 바라고 있는데, 곧 파브르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처럼 영적 저술가들이 자주 ‘눈물의 은사’il dono delle lacrime라고 부르는 것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1542년의 긴 기록 하나는 그 자신이 이해한 대로 신심devotio의 다른 두 가지 측면을 비추어 주는데, 곧 그 대상이 물질적인 사물(성물)일 가능성, 그리고 신심과 신앙과의 연계이다. 파브르는 스피라Spira에서 성 십자가Santa Croce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 성당에는 ‘신앙을 다시 일깨우고 신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느님의 권능으로’ 수많은 기적을 행한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아주 선한 영을 주시고 그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신심의 느낌을 주셔서 나는 그 십자가를,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십자가 깃발과 십자성호를 공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악령들에 맞서는 십자가의 놀라운 권능을 신앙과 신뢰로 이해했고, 그래서 실제로 항상 내 영혼 안에, 그리고 믿음과 희망을 통해 영적으로 십자가를 지니는 일이 가능하기를 원했다.(이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M 130-133)

  성물聖物이라는 주제에 대해 더 말하자면 파브르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들’gente umile e semplice에게 그것들에 대한 ‘신심과 거룩한 정감과 믿음을 주시는지’를 묵상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방식이다. 하느님은 ‘당신 영광을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선익을 위해서가 아니면’(M 131)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파브르는 이렇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십자성호로 거룩해지고 표시가 된 이 성물들을 공경하는 신심을 자라게 하여라. 날마다 그것들을 관상하는 일에 더 실제적으로 노력을 기울여라. 성물들 안에도 현존하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그것들을 네 마음에 박아 넣고 새기고 그려라.(M 133)

  이 대목에서 파브르의 다소 무의식적으로 꾸밈없는 유익한 그런 신심이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들’gente umile e semplice 가운데 자리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신심은 모든 사물 중 거룩한 것,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포함한다. 이는 그가 쓴 다음의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러 방식으로, 영으로, 또 내적으로 믿음과 신심을 갖춘 태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외적인 조배 행위를 통해서도 그토록 위대한 성사를 조배하는 훈련을 합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눈에 보이시는 것처럼.”(M 326)

  외적인 조배 행위를 활성화하고 그 행위에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믿음과 내적 신심인데 이 조배 행위는 (그렇게 활성화될 때) 커다란 가치와 중요성을 지닌다. 파브르는 순전히 예식주의적인 종교에 만족하지 않으며 순전히 영적인 종교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 주 하느님의 일들에 대한, 특별히 그분 자신과 거저 주어진 그분의 선물에 대한 직접적인 앎과 감정’으로서의 신심devotio에 대한 자신의 가장 분명한 정의定義를 제시한다.(M 81) 인지적認知的이고 정감적인 요소들의 이러한 통합은 신심 개념을 이해하는 파브르에게서 건강한 균형을 보여 준다.

  ‘느끼는’sentita 혹은 감각적 신심은 결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런 신심이 없는 것이 좋은 때가 있다. 파브르는 이런 경우에 주목하며 그러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자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신심을 느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은총이 별로 없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혹은 달리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희박한 은총과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신심 자체만 크게 중요시하지 말고 신심에 대한 열망desiderio과 추구도, 그리고 신심을 갖지 못한 고통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체험에서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수확 때까지 성장하는 밭의 씨앗처럼.(M 173)13)

  파브르는 이러한 이해에서 은총이 그에게 거의 신심의 동의어였던 때보다 더 성장해 있다. 이제 그는 ‘본질적’essenziale 은총(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키는)과 ‘비본질적’accidentale 은총(우리에게 감각적 신심을 가져다주는)을 더 주의 깊게 구별한다. 그는 또한 신심이 주어지지 않을 때 신심을 계속해서 갈망하고 추구하는 노력도 주목하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한 구절을 포착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열망하는 것을 항상 추구하고자 한다.”14)

  마음Cor

  파브르가 자신의 내적 체험을 표현하며 사용한 단어들의 대부분이 다수多數, molteplicità와 관련이 있다.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인간이 반응하는 자극의 광범위한 다양성 ―신체적, 심리적, 영적, 초자연적― 을 고려할 때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체험은 그 본성상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다수성은 이를 통합하는 어떤 요소가, 계속해서 무의식적인 방식으로라도, 적어도 한 순간이라도 의식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요소는 인격체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통합하는 활동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이 요소가 항상 의식적 차원에서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럼에도 인간이 대체로 자신이 되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서이며, 그가 더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도 바로 거기에서다.

  이 통합적 요소는 『영적 일기』Memoriale에 마음cor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이 용어의 사용은 파브르에게 있어 중세의 영적 전통의 주된 흐름과 노선을 같이 한다.

  대 그레고리오Gregorio il Grande에게서 게르손Gerson에 이르기까지 중세 전반에 걸쳐 마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와 같은 존재, 곧 탁월하게 윤리적 삶, 종교적 삶, 영적 삶이 자리한 인간의 참된 중심이었다. 사실 나쁜 생각과 욕망들이 솟아나는 것은 바로 마음에서이다. 하지만 은총이 작용하는 것도 마음 안에서요, 신앙과 사랑carità이 뿌리 내리는 곳도, 하느님께서 당신 거처를 정하시고 사랑의 일치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영혼과 결합시키시려 오시는 곳도 마음이다.15)

  파브르의 열망의 위계에서 하느님과의 직접적 결합의 열망은 일차적이며 마음cor의 차원에 자리한다. 하느님께서 일차적 은총을 베푸신다면 그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 은총을 없애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부차적 염려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식별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직접적 결합이 아닌 그 모든 것에 대한 부당한 불안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영혼의 정화 또한 요구한다.

  그해 12월에 파브르는 다른 용어들과 동일한 생각의 노선을 발전시킨다. 그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총gratia redeundi ad cor에 대해 말하며, 안으로 향하기intractio, 물러남retractio, 되돌리기revocatio라는 세 단어를 사용한다.16) 기도 중에 다른 길로 들어감distrazione에 대한 글에서이다. 그는 과거에는 자기가 자주, 나쁜 생각들17)에 대한 유혹의 압박과 같은 활동적인 외적 힘에서 해방되어 ‘안으로 향하기’intractio 혹은 내면성interiorità18)이라는 다른 상태로 들어갔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은총을 체험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자신 안에 기원을 둔 어떤 움직임에 붙잡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움직임의 샘이 아니다. 원천은 오직 그의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마음으로 돌아가기’ritorno al cuore는 그저, 반항하는 기질을 단련하는 인간 의지의 열매인 잠심潛心의 동의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파브르가 자주 열망하고 청했던 주입 관상preghiera infusa 첫 단계의 표현이다.19) 그래서 1542년 12월 첫 주는 파브르의 영적 삶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을 포함한다.

  내면성의 가치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면서 파브르는 가장 완전한 질서는 안에서 밖으로 향하지 그 반대가 아님을 알게 된다. 파브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악의 시초에서 보호하시고, 그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셨으며, 그리고 오직 그 후에 태어나시고 외적 세상에서 자라나시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방식으로 그것을 재발견한다.(M 188)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생애의 첫 30년을 숨어서 지내셨는데 바로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먼저 개인적인 영적 완덕에 힘써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20)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활동하시는 내면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꾸준히 그분을 찾아야 하고 여러 체험과 활동으로부터 마음cor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과의 결합은 자기의 선익을 위해 추구하더라도 어쨌건 밖으로 향하는ad extra 우리 모든 활동의 발판이다. 다른 곳에서 파브르는 그리스도론적 강조를 통해 ‘나의 모든 내면성, 특히 내 마음이 열려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때 길을 만들어 드리며, 마음의 중심에 그분을 위한 자리를 남겨 드릴 수 있기를’(M 68) 기도한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 한가운데서, 내 아래서(곧 내 안에서) 발견되실 수 있도록, 또 그분이 내 정신을 통해 내 위에서, 그리고 내 감각들을 통해 내 밖에서 발견되실 수 있도록’(M 307)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내면성의 실천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파브르는 고통을 통한 정화의 필요성을 자주 말한다. 하느님 안에서 넓어지고dilatari in Deo 고양되며elevari 뻗어나가는estendi 등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예비적 체험을 거쳐야 한다. 이 체험은 제약을 받고restringi, 제지당하고refrenari, 낮추어지고humiliari, 고뇌하고angustiari, 울고lugere, 작아져야diminui 한다. 파브르는 계속해서 말한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길은 육신의 극기와 정신의 희생을 통해서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좁은 문은 각 사람 안에서 본다면 마음을 향해 가는 길이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진리 안으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에게서 마음은 가장 먼저 영혼에 의해 활력을 얻고 절대 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의 이성적이고 감각적인 부분들은 점차 마음으로 옮겨 가게 된다. 거기서 마침내 그 부분들이 서로 모여들고 결합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나뉘지 않는 영적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M 355)21)

  여기서 영적 가르침은 비록 오래되고 지나치게 단순한 생물학과 심리학으로 이루어진 기초 위에 세워졌다 할지라도 그저 상대적으로만 분명하다. 파브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인간 존재는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기억은 성부를, 지성은 성자를, 의지는 성령을 나타내며, 그것들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은 마음이라고 주장한다.22) 따라서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삼위일체 안에 존재하는 일치를 반영하면서 하나로 결합하도록 영혼의 여러 부분을 소환하는 일이다.

  나아가서 ‘모상’immagine은 단지 비유만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참여를 표현하기에, 일치시키는 요인은 삼위일체 내부와 인간 존재 내부에서 동일하다. 곧 본질에서 하나로 인간의 마음cor 안에 머무르는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능력들을 당신 안으로 끌어당기시고(안으로 향하기intractio) 당신의 일치Unità 안에서 통합하신다.23)

  신비 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영적 체험에 적용하지만 파브르는 결코 과장된 개인주의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는다. 파브르는 교회적 감각이 너무도 강했고, 성사적 영성이 그의 인격 안에 너무도 깊이 통합되어 있었다. 파브르에게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일치가 마음cor의 차원에서 성사적 차원을 취하는데, 다음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 일치를 성체성사에 연결해 준다.

  성 요한의 참수斬首 축일에 나는 일종의 분심에 빠져 나 자신 안으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면서24) 그러한 과제를 위한 은총이 자리한 곳은 바로 이 거룩한 성사라는 생각에 대한 커다란 신심을 체험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를 회심悔心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기에, 그래서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날마다 더욱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으로, 더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M 104)25)

  성체성사는 다른 어떤 개인적 인식도 줄 수 없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보증을 가져다준다. 성체성사를 받는 일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뒤로 끌어당기시는 힘(은총)과 함께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다는 최대의 보증이다. 역설적으로 우리 존재의 가장 내밀한 중심으로 들어가기는 우리 자신에게보다 그분께 더 쉬운 일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따르면서, 혹은 우리 자신이 그분의 매력에 이끌리도록 허용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결론

  네 가지 핵심 단어 —열망desiderium, 정감affectus, 신심devotio, 마음cor— 에 대한 분석은 파브르가 자신의 내적 삶을 구성하는 여러 ‘움직임’mozioni을 기록하는 일에 부여했던 중요성을 밝혀 주었다. 각각이 하적의 은총이거나 호의, 당신 뜻과 계획을 표현하시는 하느님 자유로움의 표지였다. 파브르가 마치 안내자처럼 바라보았던 것은 추상적인 신학 원리가 아니라 바로 이 표지들이었다.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식별 능력이라는 조건이 요구된다.

  우리의 고찰은 처음 세 단어가 지닌 많은 공통점도 보여 주었다. 곧 열망desiderium, 정감affectus, 신심devotio은 때로는 동의어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결합에서 지성(곧 이해)보다 인간 의지(곧 사랑)에 수위성을 부여하는 정적情的 영성의 어휘에 속한다. 마음cor은 바로 신비 전통의 용어로 나타난다. 곧 영혼의 중심 부분이요 가장 깊은 부분으로서 결합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내면화의, 혹은 ‘마음으로 돌아가기’ritorno al cuore의 여정은 노력이나 인간적 훈련의 대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목적에 도달하는 일은 하느님이 개입하실 때인데, 그분은 마음cor이라는 거처로부터 인간의 여러 능력과 활동 모두를 일치Unità 자체로 끌어당기신다. 파브르는 이를 사색思索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참된 체험으로서 충실하게 기록하였다.26)


* La Civiltà Cattolica, 3923 IV (7 dicembre 2013), 459-472.
** Brian O’Leary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P. Favre, Memoriale, in Fabri Monumenta, (Madrid: 1914), 489-696. 이하 Memoriale는 대문자 M으로 표기한다.
2) 참조: 예수회 로마 문서고Archivum Romanum Societatis Iesu에 있는 원고, «Una memoria dei desideri e buoni pensieri del Padre Maestro Pietro Favre, uno dei compagni di Padre Ignazio»(사부 이냐시오 신부의 동료들 중 한 명인 마에스트로 베드로 파브르 신부의 열망과 좋은 생각들에 대한 기억).
3) 참조: G. Guitton, L’âme du bienheureux Pierre Favre, (Paris: Spes, 1934), VII 장.
4) 더 높은 것들을 원하라는 권고와 M 153에서 파브르가 하는 말은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M 153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작은 것들을 위한 은총을 청하십시오. 그러면 아주 큰 것들을 실현하고 믿고 희망할 은총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살피고 그것들을 실행하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더 큰 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이 모순의 해결은 오직 열망들의 원천에 대한 식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망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점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면 큰 것들에게나 작은 것들에게나 유용하다.
5) M 63-67, 특히 63-65 참조.
6) 참조: H. Martin, “Désirs”, in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영성 사전의 ‘열망들’ 항목), III, (Paris: Beauchesne, 1957), 609. “하느님께서 최상의 선이시요 사랑받으실 만한 선善이시기에 열망은 첫째로 하느님께서 행사하시는 끌어당김(매력)의 표현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지상에서는 결코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열망은 또한 점점 더 내밀해지는 하느님과의 결합을 추구하도록 자극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7) 참조: J. Châtillon, “Cordis affectus au Moyen Âge”, in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영성 사전의 ‘중세에 있어서의 마음의 정감’), II, (Paris: Beauchesne, 1949), 2288.
8) Ibid., 2291-2296.
9) 파브르에게 있어 정감과 의지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라. M 50: “… ex aliquo pio et recto affectu movente voluntatem”(의지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거룩하고 참된 정감으로부터)
10) 참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95.
11) 그런데 마지막 명제는 번역에 있어 어려움을 제기한다. “sic ut operibus et affectibus”(활동에서도 정감에서도).
12) 역자 주: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당시에는 7월 2일에 지냈다.
13) 문맥에 따르면 ‘신심’은 깊이 느껴지는 것을 뜻함이 분명해진다.
14)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76번.
15) J. Châtillon, «Cordis affectus au Moyen Âge», 2289. 참조: Agostino, Confessioni(고백록), X, 3: “Cor meum, ubi ego sum quicumque sum”(어떻게건 내가 있는 곳인 내 마음).
16) 참조: M 188. 안으로 향하기’intractio라는 단어는 15세기의 영성신학자의 언어에서 발견된다. H. Herp, Directorium, III, 53.56.57. 참조: E. Gullick e O. de Veghel, “Herp”, in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영성사전), VII, (Paris: Beauchesne, 1969), 351.
17) 파브르에게 있어 그런 생각들은 마음cor에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인용한 샤띠용Châtillon의 연구에서 제공하는 마음cor에 대한 중세적 이해의 측면 중 하나와 대립한다. 참조: M 46.
18) ‘안으로 향하기’intractio와 ‘물러나기’retractio에 대립하는 ‘다른 길로 들어가기’distractio라는 용어들에 대한 파브르의 언어유희에 주목하라.
19) 참조: M 135.
20) 참조: M 189. “여기에는 개인적 완덕을 사도적 활동에서 분리시키는 이원론에 대한 가벼운 암시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는 파브르의 전형적인 요소는 아니다.”
21) 콜로 3,3 참조. 이러한 심리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래하며 중세의 서방 수도승생활의 영성에서, 특히 시토회 영성에서 발전되었다. 다음과 같은 중세 영국의 몇몇 저자들도 참조하라. W. Hilton, La scala della perfezione(완덕의 계단), (Torino: Gribaudi, 1989), 170-173, 그리고 익명의 저자, 『무지의 구름』Nube della non conoscenza, 63-66장.
22) 참조: M 45 와 Agostino, De Trinitate, XII장.
23) 파브르는 플랑드르와 라인란트 신비주의의 영향 아래서 양성되었지만, 특정 저자를 구별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Herp, Sutor 와 Blomevenna 같은 ‘보급판’을 통해서 전해졌을 것이다. 참조: P. Favre, Mémorial, a cura di M. de Certeau, (Parigi: Desclée de Brouwer, 1960), 28-40; I. Iparraguirre, “Influjos en la espiritualidad del Beato Pedro Fabro”, Revista de Espiritualidad 5 (1946), 438-452.
24) ‘자신 안으로 돌아가다’Volver en sí (내 안으로 돌아가다 redeundi ad me)는 M 188의 ‘마음으로 돌아가다’redeundi ad cor에 상응한다. 참조: Lc 15,17.
25) 참조: M 124.
26) 이 글은 B. O’Leary, Pietro Favre e il discernimento spirituale, (Roma: Adp, 2006), 97-118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