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적 투쟁을 위한 <기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제5장

UN «PROTOCOLLO» PER LA BUONA BATTAGLIA SPIRITUALE:
Il capitolo V della «Gaudete et exsultate»
*

디에고 파레스 S.J.**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옮김 (광주대교구, 임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GE)의 핵심에 ‘참된 행복’le Beatitudine, 즉 참된 ‘성덕의 계획’programma della santità1)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성덕을 말하기 위해 ‘기준’protocollo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이 단어는 하나의 절차, 즉 행위를 유발하기 위해 완성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인들의 삶을 살펴보고, 참된 행복에 관한 장을 살핀 뒤 이 실질적인 핵심 단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인들의 힘 있는 증언은 참행복을 실천하고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위한 ‘기준’la regola di comportamento2)을 따르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디의 단순한 말씀을 주셨지만 이는 모든 이에게 실제적이고 유효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연구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더욱 잘 실천하도록 도움을 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GE 109)

  특히, 영적 투쟁에 있어 네 가지 도움을 포함하는 ‘기준’을 작성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도움은 영적 투쟁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특징짓는 태도는 이 확신인데, 이는 축제를 지내며 펼쳐진다. 교종은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승리하실 때마다 기뻐하는 것’(GE 158)에 대한 중요성을 살핀다. 교종은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의 승리를 축하해 주시기’(GE 159) 때문에 우리도 축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두 번째 도움은 실용주의 원칙이 갖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잘 생각하라는 초대이다. “경험상의 원칙들로만 삶을 보려고 고집하지 마라.” 악과 투쟁하는 순간에, 악마는 일종의 신화나 묘사, 상징이나 사상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경계심을 낮추게’abbassare la guardia 하며, 악마는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개념은 명료하다. 「주님의 기도」에서 “악에서 구하소서.”Liberaci dal Maligno라고 아버지께 청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도움은 꿈과 원의들을 정향시키며, 봉헌의 아름다움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주님께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려는 이상을 포기한 사람들은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GE 163)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GE 1) 주님의 원의에 대한 응답이다.

  네 번째 도움은 선교를 검증하는 기준을 제안한다. 교종은 다음과 같은 예수회 격언을 사용한다. “가장 큰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담기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Non coerceri a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3) 교종은 위대한 것과 작은 것 앞에서 갖는 우리의 자세를 실마리로 하여, 우리 사도직에서 매일 하는 양심성찰의 기준으로 이 격언을 제시한다. “식별은 위대한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작은 것, 오늘의 일에 온 정성을 쏟는 문제입니다.”(GE 169)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강조할 수 있는 예수님의 자세는 ‘두 얼굴, 곧 [위대하신] 하느님 얼굴과 [특히 작은 이들 안에서] 형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길을 열어 주시는’(GE 61; 114항 참조) 모습이다.

  ‘기준’protocollo이라는 단어

  이제 ‘기준’protocollo4)이라는 용어에 대해 간략히 묵상해 보자. 이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 문맥에 따라, 어떤 예식에서의 행동 규칙과 같이 순수하게 형식적인 것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인질들이 잡혀 있거나 어떤 재앙이 일어났을 때,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협동과 신속함, 정확성이 요구되는 곳에서 따라야 할 절차들처럼 역동적인 중요성을 지닌 무언가를 뜻할 수도 있다.

  평범한 답변의 가능성을 넘어선 극적인 상황에서, ‘기준’은 명확한 주요 목표를 향하도록, 팀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고 강화하여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정확한 규칙을 제공한다. 교종은 자주 교회를 ‘야전병원’ospedale da campo5)으로 정의했다. ‘기준’은 대표적인 의료 처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용어 사용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고 정반대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교종은 2013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청년들과의 만남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신부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보라, 너에게 복을 가져다 줄 참된 행복을 읽어보아라. 만일 구체적으로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면, 마태오 복음 25장을 읽어보아라. 그것이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될 기준이다. 참된 행복과 마태오 복음 25장, 이 두 가지를 행동 계획으로 삼아라. 다른 것은 읽을 필요가 없다.6)

  교종은 이미 한 달 전에 성녀 마르타 경당의 강론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하느님의 행위를 어떤 ‘기준’에 가둘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7)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만남 이후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이 용어를 활용했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기준’에서 명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이다. 자비는 무한히 창조적이므로, ‘기준’이 순수한 형식에 빠질 위험을 피하며, 오히려 구체화하는 과정에 역동성을 준다.”

  우리가 받을 ‘최후의 심판의 기준’protocollo del giudizio finale8)에서 “자비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준’의 핵심입니다”9).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교종은 이를 ‘중대한 기준’il grande protocollo, ‘올바른 행동 규칙’la grande regola di comportamento(GE 95)으로 정의하신다. ‘기준’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들리면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살도록 자극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승리를 거두실 때마다 매번 축제를 행하기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승리를 거두실 때마다 매번 축제를 행하기’는, 마치 승전가 처럼, 선한 영적 투쟁에서 ‘기준’의 정신이 울려 퍼지는 보고서이다. 이와 관련해서 질문 하나를 해야 한다. 주님께서 ‘무엇을’in che cosa 이기셨을 때 축제를 지내셨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매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렇다. 우리가 유혹을 견디고 악에 대항하며 복음 선포에 있어서 진전을 이뤄낼 때마다 매번 그분 스스로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신다.

  ‘축제의 기쁨’la gioia della festa은 투쟁에 있어 마지막 원기를 준다. ‘매번’ogni volta은 매일의 리듬을 만들어주며, ‘복음 선포’l’annuncio del Vangelo는 역사의 과정에서, 비록 우리가 결정적인 승리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축제를 지내도록 허락해주는 기초적인 내용이다. 교종이 말씀하시듯이,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리스도인의 투쟁이 ‘매우 아름답게’molto bella 만들어진다.

  거룩함을 향한 영적 투쟁의 ‘기준’을 따르며 내딛는 걸음으로써, 첫걸음이자 (‘매번’) 결정적인 이 걸음은 분명히 사도적이며,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포함한다.10) 주님께서 우리가 자신의 성공만 기뻐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에서도 승리할 때마다 기뻐하도록 하셨다.

  형제애는 우리가 다른 이의 행복에 기뻐할 수 있도록 하기에, 기뻐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늘립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로마 12,15) “우리가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뻐합니다.”(2코린 13,9) 반면에 “우리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만 안주한다면 기쁨이 없는 삶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사랑의 기쁨』 110항)(GE 128)

  복음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선포되고,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어도’(루카 9,49) 그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기에, 예수님의 이런 승리로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 하도록 하는 사람들은 모든 민족과 문화와 종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투쟁에는, 구경꾼으로 머무르며 ‘밖에서’dal di fuori 명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다. 여기서는, 1점을 기록했거나 혹은 상대편의 1점을 막아내는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운동선수들은 서로 축하와 기쁨을 나누게 된다. 주인공들은 이러한 행복을 계속해서 충만히 누리지만, 구경꾼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들에게 행복은 싸움을 완성시키는 부분이다. 매 순간을 축하함으로써 그들은 팀으로 연결되고, 한 사람이 했던 일에 모두가 동참하게 되며, 긍정적인 결과 –즉 미리 희망하는 승리에 참여함– 는 어떤 아름다움을 고정하며 거기서 시작하여 다음을 향해 출발하게 한다. 전투에서 작지 않은 가치를 지닌 매 순간을 축하하는 일은 적에게 패배를 예언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악마가 우리에게 밀어 넣는 주요한 유혹이 ‘패배 정신’spirito di sconfitta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요한 유혹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확신 없이 싸움을 시작한 사람은 이미 싸움에서 절반은 진 셈이고, 자신의 재능을 묻어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악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온유함으로 우리는 이 깃발을 들고 갑니다.”(『복음의 기쁨』 85항)(GE 163)

  1978년에 예수회원들에게 영신수련을 줬던 베르골료는 이 패배의 정신을 새로운 의미로 정의했다. 패배의 정신 안에서 특별한 형태의 허영이나 영적으로 속된 마음을 보았다. 베르골료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 예수회원들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허영이 비관주의입니다. 이것이 허영인 이유는 우리가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더라도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는 부대의 사병들이 되기보다는 패전한 군대의 장군이 되기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확장주의의 정책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는 패전한 장군들의 특징입니다. 이 경우 우리 각각은 예수회원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는 희생과 희망, 그리고 매일의 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11)

  비관주의를 심는 것은 적이다.

  전투적인 신앙 앞에서 빛의 천사로 가면을 쓴 적이 염세주의의 씨앗을 심을 겁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어떤 사람도 전투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믿음도 없이 전투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절반은 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언제나 십자가이지만, 이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들에게서 배우고, 이러한 전투적인 신앙을 우리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 비관주의적 정신은 우리 스스로 진 소송에 올라타게 우리를 부추깁니다. 십자성호를 긋는 어린이의 신중함과 자기의 기도를 바치는 할머니의 심오함 안에서 드러나는 전투적인 부드러움을 갖지 못합니다. 이 부드러움이 신앙이고, 패배 정신을 이겨 낼 예방주사입니다.(요한 1서 4,4; 5,4-5)12)

  복음이 승리할 때마다 – 말씀이 인간들의 구체적인 역사에 육화될 때마다 – 하는 잔치는 ‘일치[승리]는 갈등보다 낫다’(GE 88)는 원칙을 실현한다.

  경험상의 원칙들로만 삶을 보려고 고집하지 마라

  두 번째 도움은 잘 생각하도록 하는 단순한 초대에 있다. “경험상의 원칙들로만, 그리고 초월적인 전망 없이 삶을 보려고 고집하지 마라.” 부정법不定法13)을 신중하게 사용함으로써, 악에 대한 토론이 진흙탕으로 되고 마는 비교와 추상적인 토론들을 회피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악마에 대해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싸우는 적합한 방법으로써 식별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식별은 지성이나 상식 이상의 자질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간청해야 하는 은총이기도 합니다.”(GE 166)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게 하시는 요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외부’esterno에서 오는 도움이 아니라, 이를테면, 우리의 내부로부터 오는 도움이다. 우리가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아버지께 청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식별하는 것을 가르쳐주소서”insegnaci a discernerlo라고 청한다. 악을 알아보고, 해석하며, 거부하고, 이겨내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을 달라는 기도이다.(GE 173 참조)

  악이 갖는 파괴력의 실제적 문제는 우리 경험의 기준들을 넘어서며, 야생성을 드러낸다. 우리 이성이 악을 성찰하려 하면, 악의 내부에 이성이 ‘안에서부터 읽으려’legere dentro 노력할 때 지성의 빛을 밀어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빛 자체에 타격을 주는 무언가의 존재를 즉시 경험할 수 있다. 그 빛은 밀려난 후에는 온전하게 무사히 나오지 못한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일만이 심오하게, ‘안쪽에서’intus legere 파악할 수 있다. 사랑은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요소이다. 그리고 악은 사랑받을 수 없기에, 악은 그의 본질 안에서 인식할 수 없다. 악은 ‘대화하려고 하지 말고, 이를 거부하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면 충분하다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14) 그런 현실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교종은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묵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악마가 현존하는 성경의 기준들을 활용하라고 권고하며, 악마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자연적 기준인- 우리 신앙의 초점을 맞춘다. 일반적인 악이나 추상적 악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악마, 즉 ‘우리를 공격하는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GE 160) 표현이다. 복음에 근거한 신앙에 대한 이런 확신으로 “우리는 악이 때때로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GE 160)

  악마가 가지는 파괴적인 힘은 우선 복음 선포에 반대해서 작용하며, 따라서 특별히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사기와 거짓과 허위로- 우리가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피오리토Fiorito 신부는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누가 사탄인지는 오로지 계시만이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다”15)라는 주장을 인용하며 언급하였다. 이처럼, “‘사탄의 신비’mistero di Satana에 관한 우리들의 토론은 온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계시의 원천에 근거해 이루어져야 한다.”16)

  교종이 악마를 언급하려고 선택한 성경의 인용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 점을 주목해보자. 첫째, 루카복음 10장 18절은 전투를 위한 근본적인 열쇠를 제공하는데,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들에서 아무것도 덜어냄이 없이, 교종은 모두에게 복음을 기쁘게 선포하기 위해 나가도록 권고한다. 씨를 뿌리기 위해 다시 나가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주요한 도전이며, ‘복음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거룩함이 주는 기쁨에 대해 반대하는 악령의 주요한 유혹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루카 복음 구절의 중요성이 있는데, 그 안에서 주님께서 첫 번째 복음 선포 이후에 기쁘게 돌아온 일흔두 제자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악마의 몰락을 알아보신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작은 이들에게 당신의 것을 드러내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오로지 경험상의 원칙들만을 사용하려 고집하지 않는 것은, 현실이 추상적인 개념인 이상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상은 현실을 소유하고 조작하기 위해서 정의를 내리려 한다. 반면에 식별은 현실에 봉사하며 움직이기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며, 선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악을 밀어내기 위한 최상의 길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식별은 ‘우리가 주님을 더욱 충실히 따르도록 도와주는 영적 투쟁의 도구’(GE 169)이다.

  주님께 더욱 아름답게 봉헌하기 위해 꿈꾸기를 멈추지 않기

  세 번째 도움은 다음과 같이 형성된다. “주님께 더욱 아름답게 봉헌하기 위해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봉헌에 대한 꿈과 원의에 집중하는데,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언제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도 있다. 봉헌하기를 꿈꾸는 것이지, 소유하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투’agōn17)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 마음 내면에서 치르는 싸움이며, ‘마지막 말’l’ultima parola을 갖는 자가 이긴다. 이는 한편으로는 저울이 기울어지게 하며, 우리가 정말로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을 실천에 옮기고 행동하도록 만든다.18) ‘마지막 말’l’ultima parola -이는 꿈이고 원의이다- 을 인정하지 않거나 잘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특별한 재산을 합리화하는 어떤 열정의 목소리나 혹은 직접 거짓말의 아버지인 악마의 음성을 따라 선택하도록 유혹받는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소명을 분별하는 것을 함축한다.19) 이는 교종이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초대이다. 교종은 그들에게 단순한 관객으로 머물거나, 삶의 창가에 서 있거나, 안락의자에 앉아있지 말고, 주인공이 되라고 늘 격려한다. 희망이 없는 순수한 소비자의 삶이라는 구석으로 그들을 밀어 넣으려는 이들에 반대하며, 교종은 그들이 비록 실수할지라도 위험에 직면하라고 재촉한다.

  여기서 젊은이들이 표현하는 어려움을 숙고해 본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언급할 필요성은 느껴지지만, 그들의 용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분별이라는 말을 이해하는’20) 어려움이다. 젊은이를 위한 주교대의원회의 의안집(IL)에 어떤 젊은이의 증언이 의미심장하게 인용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늘날, 신자든 비신자든 수많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저도 특히 저의 미래 직업과 관련하여 여러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결심한 게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걱정만 됩니다.… 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지금 저는 막다른 벽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허함 앞에서 저는 식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IL 106)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devo fare delle scelte라는 명령법과 분별이 ‘장벽’muro과 ‘공허함’vuoto처럼 여기는 인식과, 살아갈 삶을 직면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인식 사이에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용어에 들어가지 않는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을 느낀다.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된 어려움은 이미 그 자체로 젊은이들의 공헌이다. 실제로, 분별에 반대하는 가장 강한 반발은, 무엇이 문제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믿고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교의적이고 윤리적인 규범들을 명확히 밝히는 것에 직면하는 문제라고 주장하는 데 이르렀다.

  대의원회의 준비 모임에서, 불안하게 하고 공허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들에 관련된 질문에 응답하면서, 교종은 “우리는 모두 식별의 필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의원회의 제목 안에 이 단어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공허함, 불안함이 있을 때, 식별이 필요합니다.”21)라고 말했다.

  영적 투쟁에 관한 항목의 중심에 교종은 핵심 질문을 내놓는다. “어떤 것이 성령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세속적 영이나 악마의 영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유일한 길은 식별입니다.”(GE 166) 식별은 선물이고 성령께 청해야 한다. 자신의 봉헌에 대한 식별을 쇄신하는 일은 실제로 때는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22)는 명제를 확언하는 원칙이다.

  위대한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도, 작은 것에 온 정성을 쏟는 문제

  네 번째 도움은 위대한 것과 작은 것 사이의 긴장에 초점을 맞추면서, 소명을 검증하는 기준을 제공해준다. Non coerceri a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 라는 예수회의 격언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수많은 번역과 설명이 가능하다. 교종은 여기에서 ‘위대한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도, 작은 것에 온 정성을 쏟는 문제’(GE 169)라는 표현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키면서, 우리가 위대한 것, 최상의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작은 것, 오늘의 과제에 온 정성을 쏟았는지 양심성찰을 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식별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꿈들이 ‘주님께서 당신의 신비로운 사랑의 계획으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구체적 수단을 알아보고, 우리가 선의에만 머무르지 않게(GE 169) 도와준다.

  교종은 모든 이에게, 그러나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정확한 성찰을 매일 충실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 모두, 특히 젊은이들은 재핑zapping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둘 이상의 화면을 동시에 검색하며, 둘 또는 셋의 가상현실 속에서 동시에 교류하고 있습니다. 식별의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모든 지나가는 유행에 좌우되는 꼭두각시가 되기 쉽습니다.(GE 167)

  베르골료는, 자신이 행한 강의 중에, 꼭두각시의 표상을 의미심장한 또 다른솔개의 표상과 연결했다. 두 개의 유혹, 즉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일종의 솔개로 우리를 변형시키며’ 젊은 시절의 큰 소망들을 좌절시키는 유혹이나, 혹은 정반대로, ‘매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상점을 형상들과 인형들로 가득찬 화려한 무대로 변형’시켜 꿈을 발전시키지 못해서, 우리를 ‘하늘은 넓지만 길을 잃어버린 솔개로 만들어, 어쩔 수 없이, 노력을 다 허비하고 어둠 속에 길을 잃어버리게’23) 만들어버린다.

  시장에 가는 여인의 비유

  ‘시장에 가는 여인의 예’esempio della signora che va al mercato로 결론을 맺어보자. 이를 윤리적 관점에서 읽는다면, 여인이 지나간 여정은 평범하게 보일 수 있지만, 선한 영적 투쟁이라는 ‘기준’protocollo을 염두에 두며 읽는다면, 이야기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한 부인이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가 이웃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데 남을 흉보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합니다. “아니야,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입니다. 그러고 나서 집에 갔더니 아들이 자기 꿈과 희망에 대하여 그녀에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피곤하였지만 아들 곁에 앉아서 애정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들어줍니다. 바로 이것도 성덕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희생입니다. 그다음, 그 부인은 어떤 불안감이 들었지만, 동정 마리아의 사랑을 떠올리고는 묵주를 들고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이것도 또 다른 성덕의 길입니다. 한번은 그녀가 외출하였다가 길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자 멈추어 서서 그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를 건넵니다. 이 또한 성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GE 16)

  이 단순한 예를 읽으며, 여인의 각각의 만남에서 주님의 승리를 ‘축하하기’festeggiare를 연마할 수 있다. ‘바로 옆문에 사는 성인들’santi della porta accanto의 군단에 참여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삶 안에서 이루어진 네 가지 승리이다. 네 걸음 전진하며, 자신으로부터 네 번 나가고, 그 안에서, 경청한 덕분에 –인내와 애정을 가지고 아들의 말을 들어준 덕분에, 그리고 자신의 번민 가운데 동정녀께서 들어주신다고 느낀 덕분에- 여인은 비방을 견딤을 시작으로 영적인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건너갑니다.

  이 예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구절에 현존하는 기쁨과 함께, 유혹에 견디기 위해 말씀에 의지하고(“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야고 4,11) ‘거룩하게 하는 봉헌’offerta che santifica을 하고, 가난한 이와 애정으로 대화하려고 멈추는 특별한 이에 대한 관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동정녀 마리아께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는 이 예를 권고의 마지막 형상인 경청하시는 성모님의 이콘과 연결해준다. “성모님께는 수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시시콜콜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순간 계속해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 ’를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GE 176) 이 이야기는 경청에 대한 것인데, 이는 식별의 첫걸음이요, 따라서 성덕의 첫걸음이다. “기도를 통한 식별은 주님과 다른 이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하는 현실 그 자체를 경청하려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GE 172)

  성덕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GE 177 참조)은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게 하는 것’(GE 2)을 수반하며, 이는 들으려고 준비된 귀가 없으면 어떤 소명도 울려 퍼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이 그의 기쁜 빛 안에서 –간섭받지 않고- 울려 퍼지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인식 가운데 이루어진다. ‘기준’은 복음 선포에 대한 이러한 장애물들에 대항해서 잘 싸우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 La Civiltà Cattolica, 4043 IV (1 dicembre 2018), 424-435.
** Diego Fares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참조: D. Fares – M. Irigoy, Il programma della felicità. Ripensare le Beatitudini con Papa Francesco, (Milano: Àncora, 2016).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관한 일반적인 소개는 다음을 참조.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교종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권고의 근원, 구조, 의미”,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7권,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8, 86-106.
2) ‘기준’Protocollo이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 본에서는 ‘행동규칙’Regola di Comportamento으로 표현한다.
3) 참조: J. 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Alle radici della mia spiritualità, (Milano: Rizzoli, 2014). 미겔 앙헬 피오리토는 베르골료의 영적 지도자로 베르골료의 묵상을 맨 처음으로 출판했던 『영성회보』Boletín de Espiritualidad의 각주에 자신의 해설을 첨가했었다. “가장 큰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담기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 모토가 로마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 무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이냐시오의 추도사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650년, 예수회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된 바로크 양식의 찬미가의 일부였음이 발견되었다. 이는 또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이 들어 올려진 것 앞에서 물러섬이 없이,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겉보기에 작은 것을 주워 모으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것. 혹은, 더 멀리 있는 것을 향해 팔을 뻗으며, 더 가까이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 이 격언은 종교규율에 적용되며(참조: M. A. Fiorito, “La opción personal de S. Ignacio”, Ciencia y fe 12 [1956] 43s), 이냐시오 영성을(Gaston Fessard가 채택한 의미로) 변증법적으로 특징짓는 데 유익하다.(참조: M. A. Fiorito, “Teoría y prática e G. Fessard”, Ciencia y fe 13 [1957] 350s).
4) 이 용어는 그리스어 prōtos, ‘첫 번째’와 kolla, ‘접착제’에서 왔다. 수많은 종이가 접착제를 통해서 나란히 붙인 파피루스 두루마리 가운데 첫 번째 종이를 이렇게 불렀다.
5) 교종은 다음 글에서 처음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La Civiltà Cattolica, 2013 III 449- 477.
6) Francesco, “Incontro con i giovani argentini nella cattedrale di San Sebastián”, Rio de Janeiro, 25 luglio 2013. 참조: D. Fares – M. Irigoy, Il programma della felicità.
7) “‘주님께서 오실 때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행위는 어떤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이런 방식으로 하시고, 다음번에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을 하십니다.” Francesco, “Omelia a Santa Marta”, 28 giugno 2013.
8) Francesco, “Omelia a Santa Marta”, 9 giugno 2014; 참조: Francesco, “Udienza generale”, 6 agosto 2014; Francesco, “Incontro con la società civile”, Quito, 7 luglio 2015.
9) Francesco, “Discorso ai vincitori del Premio Ratzinger 2016”, 26 novembre 2016.
10) 참조: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14항.
11) J. 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112.
12) Ibid., 129.
13) “우리는 단순히 세상에 대항하는 투쟁, …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대항하는 투쟁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투쟁은 … 인간적인 나약함 … 에 대한 투쟁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악마, 곧 악의 우두머리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투쟁입니다.”(GE 159) “우리가 … 경험적 기준만으로 삶을 해석하기를 고집한다면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GE 160).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Ibid)
14) 익명, Meditations on the Tarot: A Journey into Christian Hermeticism, (New York: Penguin Group, 1980), ebook Kindle, pos. 8408-8412.
15) 실제로 “때로는 – ‘누구를 삼킬까’(1베드 5,8) 하고 찾아 돌아다니는 – 사탄이 가진 사악함들 중 하나는 자기에 대한 대부분의 신학적 진실을 구름으로 둘러싸 버린다는 점이다.” M. A. Fiorito, Buscar y hallar la voluntad de Dios, (Buenos Aires: Paulinas, 2000), 282.
16) R. Guardin i, Il potere. Tentativo di orientamento, (Brescia: Morcelliana, 1963), 20.
17) 고대 그리스어에서 agōn이라는 말은 ‘분쟁’contesa, ‘도전’sfide, ‘논쟁’disputa을 의미한다. 두 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형식적 토론이며, 통상적으로 회중은 판관의 역할을 한다. Il prōtos agōnistēs ‘(이태리어) protagonista, 주인공’은 먼저 말하는 사람이며; il deuteros agōnistēs는 두 번째로 말한다. 두 번째로 말하는 사람이 언제나 agōn을 이기는데, 마지막 말이 항상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18) 참조: M. A. Fiorito, Buscar y hallars, 같은 곳.
19) 참조: D. Fares. “‘Io sono una missione’: verso il Sinodo dei giovani”, La Civiltà Cattolica. 2018 I 417- 431.
20) 제15차 주교시노드 정기총회 의안집, 2018년 5월 8일, 107항.
21) Francesco, Discorso nell’ incontro pre-sinodale con i giovani, 19 marzo 2018,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8/march/documents/papa-francesco_20180319_visita-pcimme.html(접속일: 2019. 6. 9)
22) 역자 주: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 222항에 나오는 이 명제 Il tempo è superiore allo spazio를 주교회의는 위와 같이 번역하며, 역자 주에서 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때’tempo는 지상에서 영원의 지평을 바라보는 ‘때’時 곧 ‘카이로스’kairos로, ‘시간’spazio은 한계를 지닌 역사적 시간時間 곧 ‘크로노스’xronos로 이해하고 옮깁니다.”
23) J. M. Bergoglio, Il desiderio allarga il cuore, (Bologna: EMI, 2014),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