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식별: 이냐시오 영성의 기여

DESIDERIO DI DIO E DISCERNIMENTO:
IL CONTRIBUTO DELLA SPIRITUALITÀ IGNAZIANA*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대전 가톨릭 대학교 교수) 옮김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언어가 분열되고 파괴되었으며, 몬탈레E. Montale의 말처럼 다만 ‘나뭇가지처럼 메마르고 일그러진 몇 음절’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도 근대 이후의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desiderio di vedere Dio을 말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차이가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원리가 되고, 의미의 문제는 고고학에나 관련된 듯이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갈망’desiderio이라는 단어는, ‘욕구’bisogno와 동의어로 사용되거나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당혹스럽고 너무 강하며,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보인다. 주체의 죽음과 더불어 갈망도 죽었다. 스페인 철학자 로사노J. M. Lozano는 상징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서 나침반을 레이더로 대체했다.”고 말한다. 나침반이 유일하고 정확한 기준을 뜻한다면 레이더는 가장 미세한 신호에도 열려 있는 무차별적인 개방성을 뜻하며, 때로는 ‘공회전’girare a vuoto한다는 느낌도 내포한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 안에 ‘던져져’gettato 있음을 발견한다. 거기에서 최종적인 한 마디 말은 기대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오는 메시지들을 수용하도록 열려 있다. 갈망이 사라져감과 더불어 금방 시들해지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욕구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거룩함, 내밀함, 안전,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가지의 욕구로 분해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단편화 시대에, 이냐시오 영성은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갈망을 이해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갈망의 수련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 처음부터 – 일깨우고 개입하는 깊은 차원이 바로 갈망의 영역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완덕에 대한 큰 갈망’molto desiderose di perfezione1)이 없는 사람이라면 영신수련을 시작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영신수련에서는 자신의 갈망들을 투명하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분명 대단한 경험들을 찾는 것도 아니고, 회심도 아니다.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principio e fondamentale는 ‘갈망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근본적인 갈망이 말하도록 하는’ 방법이다.2) 어떤 사람이 영신수련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갈망들이 있을 수 있다. 흔히는 ‘좋은’buoni 갈망들이다.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고, 행동하기 위한 힘을 갈망하며, 하느님과 대화가 시작되기를 갈망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런 갈망들이 하나가 되어 고정되는 단 하나의 점을 찾도록 제안한다.3) 또한 처음에는 준비를 갖추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준비는 “자신 안에서 영신수련이 제시하는 체험들을 하고자 하는 갈망을 일깨우고 내면으로부터 이를 위하여 요구되는 자세들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4) 이냐시오 성인은 부유함과 가난함, 질병과 건강 사이에서 초연함을 권고하면서, 피정자의 첫 반응을 통하여 그 자신의 깊은 갈망을 시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갈망이 없다면 영신수련에 들어갈 수 없다. 영신수련에 임할 때에는 “창조주이신 주님께 관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영신수련에 임하고, 자신의 모든 원의와 자유를 주님께 바치는 것이 크게 유익하다.”(ES 5) 여기서 갈망은 중요한 일들에서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능동적인 수용성이다. 기도 시간의 여정은 갈망의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영신수련에서 근본 전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우리 주 하느님께 청하는 것”(ES 48)이다. 기도 안에서 강해지는 원의와 갈망은 4주간 영신수련 여정의 각 단계에서 열매를 얻음으로써 목표에 가 닿는다. 하느님께 강한 갈망을 나타내는 단어로 자신을 바치게 된다: “원하고 바라며 이를 신중히 결정하였사오니”(ES 98).

  성 이냐시오, 갈망의 사람

  이냐시오 성인의 삶 자체에서 우리는 갈망의 깊은 자취들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갈망에 매혹되었다.”attratto da un immenso desiderio5)고 고백했던 사람이다. 영신수련에서 ‘갈망’deseo 또는 ‘갈망하다’desear라는 단어는 흔히 동사 ‘원하다’querer와 함께 사용되며 ‘강렬하게 청하다’chiedere intensamente를 뜻한다. 이냐시오의 자서전에서 우리는, 갈망이 그의 삶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했으며 천천히 발전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26세 때까지 ‘허영에 내맡겨진 사람’dato alla vanitá이었고 ‘명예를 얻으려는 크고 헛된 갈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6) 그에게는 헛된 생각이 많았으며, 특히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매우 ‘사로잡았고’poseido 그래서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네 시간까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7) 그것은 어떤 여인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 갈망은 그로 하여금 그녀와 가까워지는 방법을 생각해내고, 그녀에게 할 우아한 말들을 만들며, 그녀를 위하여 세울 무공을 꿈꾸게 했다. 그는 이런 꿈들로 부풀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pensiero과 달리 영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또 다른 생각들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도미니코 성인이 한 것을 나도 한다면?”8) 그래서 그는 스스로 ‘어렵고 위대한 일들’을 하기로 다짐했고, 조금씩 이냐시오 성인의 내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전에는 그가 ‘명예를 얻으려는 크고 헛된 갈망’을 지닌 이 세상의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큰 갈망’을 지닌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9)

  욕구와 갈망

  그러나 처음과 나중의 갈망 간에 차이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첫 번째 갈망을 헛되고 진정하지 못하다 말하며, 히브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하듯이 그것을 ‘욕구’bisogno라고 부르고, 다른 것은 참된 ‘갈망’desiderio이라고 부르는가?10) 나는, 이냐시오 성인이 했듯이 그 갈망들이 자신 안에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의 종류를 살핌으로써 그 차이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것들을 갈망하는 생각은 “그를 매우 즐겁게 해주었지만, 피곤해져서 그것을 떠나고 나면 무미건조하고 불만족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11) 반면 예루살렘에 가고 참회를 하려는 생각은 “그 생각에 머물러 있을 때에 그에게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떠난 후에도 만족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12) 이 차이는 매우 깊다. 첫 번째 경우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강렬한 즐거움과 그 후의 피곤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뚜렷하지만 짧은 즐거움이고, 피곤함을 느끼게 되는 즐거움이다. 이 생각들은 일단 그 생각을 떠나고 나면 메마름과 불만을 남긴다. 두 번째 경우 그는 ‘즐거움’diletto이 아니라 ‘위로’consolazione를 강조하며, 그 후에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첫 번째 경우는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향유할 수 있지만 그 향유는 곧 그 대상을 파괴하게 된다. 두 번째 경우는 소모되지 않는다. 이 차이가 영신수련에서도 진정한 갈망을 식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냐시오 성인은 ‘큰 갈망’con grande desiderio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회심은 시간적으로 한정된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그의 갈망을 통한 회심과 연마는 오래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13)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갖게 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은 – 이 갈망은 그의 이기심과 세속적 만족에 대한 갈증을 줄어들게 했다. – 점점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깊은 물을 불러오는 마중물이 되었다. 또한 이 갈망은 그가 그 순간까지 만족감을 느꼈던 무가치한 온갖 인간적 야망들을 사라지게 했다. 로욜라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도달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갈망은 모호했다. 영적인 갈망과 함께 소유와 명예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큰 갈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탕에 실현하고 싶은 이기적인 야망이 있었고, 이는 정화가 필요했다.14)

  이냐시오 성인이 자신의 영적 체험 일부를 옮겨 놓은 『영신수련』은 하느님을 향한 긴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갈망의 회심 여정을 따른다.15) 퀴송G. Cusson은 영적 갈망이야말로 이냐시오 성인이 걸었던 영적 변화를 결정했던 요인들의 총합이라고 본다.16) 이 점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냐시오 성인이 일러두기, 부칙, 주, 통회에서 제안하는 것은 “내가 갈망하는 바를 찾아내는 것”trovare ciò che desidero을 목적으로 한다.(ES 20, 73, 87, 89, 133) 이냐시오적인 인간은 ‘온전히 갈망하는 존재’17)이다. 어쨌든 이냐시오 성인에게 ‘회심’convertirsi은 언제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갈망과 애착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욕구와 하느님에 대한 갈망

  일반적으로 갈망은 찾는 것, 강렬하게 지향하는 것, 온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뜻한다. 갈망에 의하여 움직여져서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 행위는 더욱 의지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갈망에서 나오는 행위는 열렬하고 강하다. 애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18) ‘나에게만 중요한’importante in me 것에 관련되는 감정은 결국 정체를 가져온다. 우리를 우리 자신 안에 가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만 머물다가 결국은 사라지고, 지루함과 공허함으로 끝난다. 반면 ‘그 자체로 중요한’importante in sé 것에 관련되는 감정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 위로 들어 높이고, 순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쾌락에 갇혀있는 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지속적인 가치를 향하도록 개방시킨다. 영신수련은 우리의 갈망을 자기중심적인 데에서 벗어나게 하는 교육 방법이 된다.

  영신수련 기도를 통해 피정자와 하느님이 맺는 관계에서 갈망의 회심이 일어난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수’nemico의 근본적인 유혹인 세 가지 기본 욕구를 강조한다. “어떻게 [모든 원수들의 우두머리가 마귀들에게] 사람들을 그물과 오랏줄로 덮치라고 일러주는지를 생각한다. 그가 보통 하는 것처럼, 먼저 사람들을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유인하고, 그들을 세상의 허영심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한껏 부푼 교만에로 더 쉽게 이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첫 단계는 부, 둘째는 명예, 셋째는 교만이다.”(ES 142)

  욕구는 필요를 내포한다. 살기 위해서는 먹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는 동화와 소멸의 질서에 속한다. 필요가 충족되고 그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갈망의 대상이 소멸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빵은 배고픔의 긴장을 없앤다. 마지막에 대상인 빵과 필요인 배고픔은 둘 다 사라진다.19)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는 안전이나 자존감과 같은 모호한 필요가 그 동기가 될 수도 있고, 탐욕이 담긴 긴장을 모델로 삼는다면 ‘종교적 필요’bisogno religioso가 될 수도 있다. 기도는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긴장을 없애기 위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럴 때에는 하느님을 마치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계로 맺어질 위험이 있다. 하느님을 소모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마치 아기가 세상의 젖이 떨어지지 않도록 엄마를 집어삼킴으로써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를 요구하는 유혹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안전에 대한 원의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려 하는 것이다.20) 여기에서도 유혹은 극복되어야 한다.

  시편 저자가 “제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21) 또는 “저의 힘은 옹기 조각처럼 마르고 저의 혀는 입속에 들러붙었습니다.”22)라고 말할 때, 그는 일차적 욕구 곧 목마름의 욕구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잘 해석해야 한다. 이 표현은 하느님을 향하며, 표상은 오직 갈망의 강도와 그 관계의 근원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런데 예를 들어 피정에서, ‘강렬한 순간’momenti forti, 섬세하고 ‘감미로운’gustose 독서와 묵상에 대한 욕구는 불가피하게 우리 자신을 향하게 한다. 우리가 위로의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위로를 찾는 순간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향유의 모호성 또는 우선성은 부정적으로 나를 나 자신 안으로 물러나게 하는 착취의 증거가 되고 만다. 나 자신이 회전의 유일한 축이 되고, 거기에서 향유는 퇴행적인 곡선의 중심이 된다.23) 인간은 물이나 빵에 대한 욕구를 가지듯이 하느님에 대한 욕구를 느낄 수도 있다. 하느님에 대한 욕구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고 충족시켜 주신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만족이 하느님의 표지이며 우리의 목적이 그 만족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욕구’bisogno의 모호성에 대한 체험은 어쩌면 불가피하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이러한 욕구 사이에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욕구에 대하여 갖게 되는 구체적인 경험을 깊이 탐구하면서 회심하도록 초대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받는 사람은 욕구와 갈망을 식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져오는 차이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진정한 것으로 확증해 주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경험은 무엇인가? 기도하는 사람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과 하느님, 즉 ‘소모’consuma하는 것과 관계 안에서 계속해서 근본적으로 타자로 존재하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말하자면, 하느님에 대한 필요가 충족된다고 우리가 갈망하는 대상인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욕구와 갈망이 모호한 한 가지 분명한 체험은 사랑의 체험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사랑도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것과 같이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천생연분을 찾고 그 다음에 주어지는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의 이기심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서 우리는 다른 인격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그가 욕구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갈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하여 다른 인격의 고유성을 배우게 된다.24) 사랑은 욕구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전적이고 초월적인 외재성을 전제 또는 요구한다. 욕구와 갈망이 동시에 나타나며, 우선순위를 헤아려야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가장 완전한 사랑 안에도 욕구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지를 보아야 한다. 만남에 대한 갈망이 지배적이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고, 그렇지 않다면 욕구의 사랑이거나 모호하고 중의적인 사랑일 것이다.

  욕구에서 갈망으로 바뀌는 지점은, 나와 동등하고 나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할 때이다. 그는 그대로 있으며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이다.25) 영신수련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하느님과의 관계 체험은 이러한 여정이며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와 이권”(ES 189)에서 해방된 갈망의 점진적 성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과 육적이고 세속적인 사랑을 거슬러서”(ES 97) 이루어진다.

  꿈과 욕구 사이의 기도

  타자성을 체험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욕구를 극복하지 못하는 기도는 ‘꿈’sogno의 양상을 띤다. 꿈속에서 감각은 실제 대상의 자리를 대신하는 상상의 대상에 의하여 충족된다. 그러므로 어떤 욕구에 대한 긴장이 실제에서는 갈망의 대상에 도달함으로써 해소되지만 꿈속에서는 필요한 행위를 꿈꾸면서 해소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한계를 접하고 욕구 충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가진 욕구는 차이의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인정은 욕구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데에서 핵심이다.26) 한계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온 세상을 원한다는 사실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그의 갈망을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달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느님께로 향한 갈망이다.

  갈망의 대상인 하느님은 갈망을 충족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갈망을 더 깊게 만드신다. 그 갈망은 충족될 수 있는 모든 굶주림을 넘어서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욕구의 ‘죽음’morto으로부터 생겨난다. 자신에 대한 욕구의 죽음은 수덕 없이, 포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갈망이 즉각적이고 충만하게 충족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그 갈망의 대상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소모의 유혹은 언제나 있으며, 모든 것을 즉시 원한다. 그러한 즉각적인 만족은 포기해야 한다.27) 이것은 욕구들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욕구의 힘은 무의식적인 보상의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다. 자아와 포기하는 욕구들 사이의 의식적 연결을 단절한다면 그 욕구는 되살아난다. 이것은 의식과 마음에 들지 않는 ‘표상들’rappresentazioni 사이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중단시키는 ‘제거’rimozione를 통하여 일어난다. 제거는 그 표상들이 존재함을 부인하고 그것을 무시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는 존재하고 계속 작용한다. 제거된 것은 더 이상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대화하지 못하는 주체의 생각과 행동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하여 갈등 단계가 시작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영신수련의 강박적 성격’carattere ossessivo degli Esercizi28)이 ‘신경증을 일으킨다.’provocano una nevrosi29)고 말하지만, 이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떤 상황을 의식적으로 원하고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의도하는 결과는 제거가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동일화이다. 피정자는 의지적으로 그가 약화시키기로 선택한 특면들을 억압하고, 설정된 모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억압하고자 하는 표상들을 계속 보고 그것을 의식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 안에 존속하면서도 모델이신 그리스도에 자신을 동화시킨다. 분명 이때에도 하느님에 대한 이냐시오 성인의 관계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며, 바르트처럼30) 피정자와 하느님 사이의 의존 관계를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 사는 아들의 관계와 같이 말할 수는 없다. 그 관계는 이성적으로 의도된 것이며, 하느님의 ‘대답들’risposte은 이해되고 나서 받아들여진다. 반면, 전이의 관계에서는 그와 반대로 투사의 대상이며, 이 경우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합리적인 기준들이 사라지게 된다.

  이냐시오 성인의 방법은, 어떤 욕구가 점차로 그 역동적인 잠재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31) 그러나 그 움직임과 에너지는 오직 하나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강조하는, 자신의 삶을 ‘질서 짓는다.’ordinare는 것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자신의 삶을 질서 짓는다. 분명 그 전제는 갈망에 ‘유년기’infanzia가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갈망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영신수련의 과정이 목표로 하여 성장해 가는 갈망의 진정한 목적을 명명할 줄 모르는 시기이다. 식별은 ‘선한’buoni 갈망과 ‘악한’cattivi 갈망을 알아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갈망과 교육, 정화에서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갈망하시는 하느님’Deus desiderans

  지금까지 인간의 편에서 갈망의 차원이 나타났다면, 이냐시오 성인에게 이것은 하느님이 주체로서 지니고 계신 갈망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적인 갈망은 ‘하느님 의지의 반영’il riflesso della volontà divina32)이다. 하느님 자신이 먼저 당신 자신을 통교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의 갈망에 앞서서 그 기초가 되며 또한 그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하느님의 주도는 필수적인 것이다. 갈망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께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을 발견한다. 성 프란치스코 보르하Francesco Borgia에게 쓴 편지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엄위가 … 한손으로는 그러한 갈망들을 보여주시고 다른 손으로는 그분의 더 큰 영예와 영광을 위하여 그 갈망들 안에서 그리고 그 갈망들에 작용하심으로써 … 당신이 그분께 더 큰 봉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도록 거룩한 감정과 갈망들을 키워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33)

  이냐시오 성인에 따르면 하느님은 갈망들로써 그리고 갈망들 안에서 작용하시며, 갈망들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증가시키신다.34)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이 갈망하는 바로 그것을 실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갈망을 갖게 하신 목적’quello per cui Dio ha posto questo desiderio35)을 실현하심을 뜻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주기를 갈망하시며, 이 자신을 ‘내어 주심’darsi은 피정을 지도하는 사람에게 “창조주이신 주님이 몸소 그 열심한 영혼과 통교하시어 당신 사랑으로 그를 껴안아 당신을 경배케 하고 앞으로 당신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길로 준비시키도록” 할 것을 요청하는(ES 15)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한 일러두기로 우리를 인도한다.

  결론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삶의 특전적 순간일 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하나의 은유이며, 더 적절한 수사법을 사용하자면 ‘삶을 나타내는 대유법’sinèddoche della vita이다. 곧 그것은 체험이고 체험의 일부로써 삶을 온전히 나타낸다. 갈망의 관점 안에서 삶 전체를 재발견할 수 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에 따라 드러나는 갈망의 공간은, 욕구의 차원을 넘어서 갈망 자체의 강렬하고 수고스런 연마의 공간이다. 그 갈망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으로부터 초월하는 개방을 향하게 된다.

  영신수련 안에 내포된 메시지인 갈망의 수련은 일시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체에게 자신의 갈망의 방식과 대상을 식별하게 함으로써 단편화된 자신의 삶을 질서 지어 주기를 호소한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desiderio di vedere Dio 또는 더 단순하게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수련과 수난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지혜가 된다. 그 지혜는 갈망을 초월과 내면화를 향하게 하는 영의 수련과 ‘할 수 있는 한 당신 자신까지 내어주고자’(ES 234) 하시며 ‘나를 움직이고 이끄시어’(ES 175) ‘당신 사랑으로 나를 껴안으시는’(ES 15) 하느님 자신이 불러일으키시는 수난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학적 갈망에 대한 묵상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어린 담론으로 이를 수밖에없는 것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3629 III (1 settembre 2001), 379-389.
** Antonio Spadaro S.J.
*** 역자 주: 인용된 『영신수련』 번역문은 다음을 참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역,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6.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MI, Epp. XII, 677. 본고에서는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로마의 예수회 역사 연구소에서 출판한 Monumenta Ignatiana판을 따라서 권과 페이지를 표기한다. 『영신수련』은 약자 ES로 표기하고 문항 번호를 적는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은 Autob.로 표기하고 문항 번호를 적는다.
2) 참조: M. de Certeau, “L’espace du désir ou le ‘fondement’ des Exercices Spirituels”, Christus 20 (1973) 118-128; 120–124.
3) 이 주제에 관하여, M. Giuliani, “Demander ce que je veux et désire”, Cahiers de Spiritualité ignatienne XI (1987) n.42, 99-104.
4) G. Cusson, Pédagogie de l’expérience spirituelle personnelle. Bible et exercices spirituels, (Bruges – Montréal, DDB – Bellarmin, 1968), 65.
5) Autob., 1.
6) Ibid., 1.
7) Ibid., 6.
8) Ibid., 7.
9) Ibid., 14.
10) 참조: E. Lévinas, Totalità e infinito. Saggio sull’esteriorità, (Milano: Jaca Book, 1980).
11) Ibid., 8.
12) Ibid.
13) 오래고 점진적인 이 회심의 과정 전체에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데, 길라르디(L. Gilardi)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이냐시오의 자서전과 특히 다른 예수회원들의 자서전이 아우구스티노의 모델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회원들의 글에 나타난 한 사람의 실존적이고 서사적인 변화 과정은 어린시절에서 시작하여 성숙해지고 다시 창조주께 돌아가는 과정이 중단 없이 이어진다. 참조: L. Gilardi, Gesuiti autobiografi (1598-1613), Tesi di laurea. Università degli Studi di Torino. Facoltà di Lettere e Filosofia (1981-82).
14) 참조: Autob., 14와 20. 더 자세한 내용은, G. Cusson, Pédagogie, 151과 204 참조.
15) 참조: Ibid., 156.
16) 참조. Ibid., 150.
17) Ibid.
18) 이 주제에 대해 더 고찰하려면, L. M. Rulla, Antropologia della vocazione cristiana, vol. I; Basi interdisciplinari, vol. II; Conferme esistenziali, (Casale Monferrato (AL): Piemme, 1985); 특히 vol. I, 92-96 참조.
19) 참조: D. Vasse, Le temps du désir. Essai sur le corps et la parole, (Paris: Seuil, 1969), 20.
20) 참조: Ibid., 24-25.
21) 시편 42,3.
22) 시편 22,16.
23) 참조: E. Lévinas, Totalità e infinito, 118-119.
24) 참조: Ibid., 41.
25) 참조: Ibid., 46.
26) 참조: D. Vasse, Le temps, 31.
27) 참조: C. Demouchel, “Les dimensions psychologiques et spirituelles de l’intégration du problème du mal en première Semaine des Exercices”, Cahiers de spiritualité ignatienne, Supplément n.2, 1978, 27-44.
28) R. Barthes, Sade, Fourier, Loyola. La scrittura come eccesso, (Torino: Einaudi, 1977), 88.
29) Ibid., 59.
30) 참조: Ibid., 60.
31) 참조: J. Nuttin, Psychoanalyse et conception spiritualiste de l’homme. Une théorie dynamique de la personnalité normale, (Louvain: Publications Universitaires, 1950), 252.
32) I. Iparraguirre, Vocabulario de los Ejercicios. Ensayo de hermenéutica ignaciana, (Roma: Centrum Ignatianum Spiritualitatis, 1978), 70.
33) MI, Epp. I, 528.
34) 이에 관하여 이냐시오 성인은 타르가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예와 봉사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키워 주시고 계속 그분의 은총을 더해 주시어 이 갈망들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MI, Epp. I, 514).
35) I. Iparraguirre, Vocabulario,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