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골료가 말하는 교육의 일곱 기둥

1)Sette Pilastri Dell’Educzione Secondo J. M. Bergoglio*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김민 요한 S.J. 옮김

  교육에 관한 도전은 현 교종의 마음에 항상 자리 잡은 주제였다. 2016년에 우리와 했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산미겔의 본당 사제로 있을 때 청(소)년 사목과 교육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매일 본당이 위치한 대학 내의 널찍한 공간으로 동네 아이들을 모으곤 하였다. “나는 언제나 어린이 미사를 드리곤 하였고 토요일에는 교리를 가르쳤지요.”2) 그의 활동에는 놀이와 공연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인터뷰에 상세히 설명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그의 자연스러운 재능이 비롯했다.

  하지만 예수회 연학수사로서 양성 중이던 때부터 이미 베르골료는 교육과 관련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다. 장상들이 그를 예수회 고등학교 두 군데로 파견하여 문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단지 교탁에서 강의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을 창조적인 글쓰기의 세계로 초대하였고―심지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대작가를 초빙하기도 하였다―연극과 음악에까지 관심을 넓히도록 하였다.3)

  이러한 교육 활동은 예술 및 창작 활동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베르골료는 가장 심원한 인간적·영적 차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다.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음악가 호세 에르난 치빌스는 28세의 베르골료에게 배웠던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리아 에스테르 데 미겔의 『열한째 시간』La hora undécima을 공부할 때 선생님이었던 베르골료가 준 코멘트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치빌스는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가 하느님께로 이끄는 자기 부정과 금욕이라고 생각했다. 베르골료는 학생의 작업을 칭찬하면서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이는 최종 메시지를 다소 수정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적었다. “헌신”La dedizione은, 금욕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결실이란다.”è frutto dell’amore 그리고 치빌스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메시지로 끝맺었다. “네가 부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구나.” 창조적 활동을 접하거나 그 활동에 적극 임하면 한 개인을 심리적 영적으로 끌어들이는 역동이 형성되는 법이다.4)

  예수회 연학수사 시절의 경험, 이어서 사제로서의 활동을 통해 베르골료는 사목자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주교 시절 그가 보였던 사목적인 행보는 최근 단행본으로 정리되었는데,5) 그의 강론과 서한, 담화를 포함한 전체 내용 가운데 삼분의 일이 교육자들, 교사들, 교리교사들을 대상으로 한다. 아직 이 주제는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으며, 교육에 관한 베르골료의 접근 방식을 발전시킨 원천과 영감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6)

  이 글이 철저한 연구를 대체할 수 없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이 주교직을 수행하는 시기 동안 무르익은 다면적인 교육관의 일곱 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기둥: 통합하는 교육

  먼저 베르골료 대주교가 언제나 폭넓은 사회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교육이 시민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공동 투신을 하는 데 필수적인 장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교육한다는 것은 국가를 만든다는 의미와 같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교육에 관한 우리의 과업으로 세상과 사회를 집으로 여기는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생활하기 위한’per abitare 교육인 것입니다.”7) 국가와 세상은 베르골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집’casa 이다. 즉 살아가는 공간이자 가정으로서의 차원을 갖는 것이다.8)

  교육은 온전히 개인적인 현실이 아니고 공적 현실이다. 2006년 베르골료 대주교는 그가 가르쳤던 고등학교 졸업생 몇 명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의 삶이 각자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역사를 만들어내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함께 이루어낸 업적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창조의 여정을 걷는 다른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희망합니다.”9)라고 말하였다.

  베르골료는 항상 학교를 사회 통합과 국가 통합에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즉 공동체 의식,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세우기 위한 중요한 기둥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2002년 아르헨티나 국내 이주민에 대한 그의 성찰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도시에 도착한 국내 이주민들과 혹은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들조차 기초 교육을 받음으로써, 원래 그들이 출발했던 곳에서 마주했던 특수한 처지를 극복할 요소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으로 건설하는 사회 안에서 있을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교육 계획의 다양성이 풍요로워지는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교육에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10)

  교육사업은 단지 자기 힘을 기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미래를 건설하고 공동의 역사를 만들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도착한 사람들은 교육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수단과 중요한 맥락을 찾아 새로운 집에 적응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 핵심요소는 바로 ‘통합’l’integrazione 이다. “국가는 통합을 위해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베르골료는 2001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사회사목의 날을 맞아 이런 글을 남겼고, 여러 차례 계속해서 이 주제를 언급했다. ‘통합’l’integrazione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목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두 번째 기둥: 다양성을 존중하며 동반하기

  사회 건설에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베르골료는 2012년 가톨릭 교육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교 교사로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다양성에 열어두시라는 제안을 합니다. 이 다양성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사회에 점점 더 자주 나타나는 특징입니다.”11)

  이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르골료는 교구의 교육 관련 단체들과의 만남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대화와 사랑은 상대방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다양성의 수용이 있습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공동체의 가치를 다질 수 있습니다. 내 기준과 내 우선권에 상대방이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흡수’assorbendo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성을 즐김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르시시즘, 순전한 제국주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12)

  차이는 ‘도전’sfide 으로 간주해야 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도전이자 자원이지, 문젯거리가 아니다. 긍정적 도전으로 여길 때 모든 형태의 차별에 대항해 싸우게 된다.

  우리는 우리 학교에서부터 모든 형태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웁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관과 가정의 자원이 빈약하지만, 아낌없이 나누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결정 과정에서, 모든 언행에서, 모든 사업에서 천명되어야 할 원칙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매우 분명한 징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다양성 사회의 징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논쟁이 일거나 심지어 필요하다면 갈등을 감수해서라도 말이죠.13)

  따라서 교육사업은 한 인류로서 함께 사회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과 연관이 된다. 교육은 통합을 위한 활동이 되어야 하며, 다양성을 억지로 일치시키거나 뭉개서 섞는 일 없이 모두의 선익을 위해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산으로 인정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 기둥: 변화하는 인간이해를 마주함

  오늘날 교육이 처한 중요한 배경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베르골료는 현대의 인간은 과거에 비해 자신을 다르게 이해한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였다. 사람들은 기존의 익숙한 범주와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참조해온 인간이해와 교회가 사용한 언어는 분명한 토대가 있으며, 지혜와 오랜 경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교회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달리 이러한 인간이해와 언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엄청난 인간이해의 변화를 마주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무척 존경하는 바오로 6세는 복음화란 ‘기쁜 소식(복음)을 변화를 겪고 있는 인류의 모든 영역에 가져다주는 것’14)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 그렇지 않은 복음화는 장식이나 얄팍한 겉치레에 불과할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15)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입장을 『치빌타 카톨리카』에 실린 수도회 장상들과의 대화16)에서도 확인하였다.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교육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세대에게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17)라고 말하였다. 요점은 이것이다. “오늘날 교육은 핵심적, 핵심적, 핵심적 사명입니다!”18)

  교종은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교로 있던 시절 학령기 아이들과 결손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매우 슬퍼하던 한 아이의 경우가 기억납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그토록 슬픈 이유를 결국 선생님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엄마의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또한 학령기 아이들 가운데 부모가 헤어진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19) 편부모 자녀와 동성 커플 자녀라는 가정 배경에서 사는 아이들은 서로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분명히 우리에게 복잡한 도전이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오늘날 교육이 마주하고 있는 도전들이 더 이상 과거의 도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교종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그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들은 새로운 도전이며 종종 이해하기조차 힘들다”20)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복음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세대에게 선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겪는 변화는 종종 이해하기에 너무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다. 이에 관해 교종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런 소년 소녀들에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변화하는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을까요?”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우리는 이 아이들이 신앙에 거스르는 문화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21)

  베르골료는 여기에서 어떤 근본적인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이 마주하는 도전은 인간이해와 관련된 도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땅속에 머리를 박은 타조처럼 마냥 현실을 외면하고 세계가 다른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22) 교육 전반에 관한 베르골료의 성찰은 현실적 접근 방식에 기반한다. 그의 성찰은 항상 구체적인 사실, 그가 만났던 사람과 그 사람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네 번째 기둥: 마음을 움직이는 교육으로서의 부단함

  교육에 관한 베르골료의 사유에서 중요한 측면 그 네 번째는 바로 부단함l’inquietudine이다. 그는 부단함을 교육의 동력으로 이해한다. 그는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부었다.

  아이들이 과연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 이 시대의 지배적인 상황에 길들여진 나머지 아이들은 교회가 전해준 유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교회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다는 듯이 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다르게 말하면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상자 속에 고스란히 처박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 유산을 살아가며 변화해 나가야 합니다! 과연 오늘날 이 아이들이, 이 젊은이들이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들은 이 유산을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까요? … 이 청소년들이 인생 계획을 세우거나 꿈을 꿀 수 있을까요?23)

  여기에서 우리는 ‘길들이기’addomesticamento식 교육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보게 된다. 또한 교육을 통해 전해진 유산은 상자 속에서 보관되어야 하는 보물이 아니다. 교육은 상자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베르골료는 교회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다시금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자유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받은 바를 진정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자유로 이 유산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깨어 있는 부단함이 없다면 자유란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깨어 유산을 받아들이고 직접 자기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베르골료에게 인격적 성숙은 적응을 잘하는 것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베르골료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말을 남겼다. “예수님 당대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부적응자로 여겼고 따라서 미성숙하다고 간주하였습니다.”24)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그저 순전한 적응을 성숙이라고 본다면 우리 교육의 목표는 청년들을, 이 ‘전복적이고 반항적인 젊은이들’creature anarchiche을 건전한 사회 규범에 ― 어떠한 규범인지 상관없이 ― ‘적응’adattare 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이겠습니까? 검열이라는 대가, 주체성의 복속이라는 대가, 심지어는 한 인격에게 가장 필요하고 성스러운 것, 바로 그의 자유의 박탈이라는 대가가 아니겠습니까?25)

  내가 유산으로 상속받은 것은 나에게 속한다. 왜냐하면 이 유산은 끊임없이 깨어 부단한 나를 찾아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와 섞이고 앞으로 세워갈 미래를 향해 나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유산이 끊임없이 깨어 부단한 나의 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이는 화석일 뿐이다. 이는 기억의 박물관에 불과하다. 말러는 전수받은 것에 충실하다는 말은 불꽃을 살아 있게 유지한다는 뜻이지, 타고 남은 재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불꽃이 살아있게 유지한다는 것은, 불을 계속 지피며 역동하는 생명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고 재발견한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도덕주의나 형식주의로 발을 헛디딜 것이요, 한없는 지루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베르골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존적 입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부단한 움직임 속의 평화’pace dell’inquietudine에 대해서 즐겨 이야기하곤 하였다. 특히 『치빌타 카톨리카』를 만드는 예수회원들과 협력자들과의 접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깨어 부단히 연구하는 정신이 있습니까? 오직 깨어 부단히 일하는 태도만이 예수회원의 마음에 평화를 주지요. 부단함이 없다면 우리는 무익할 것입니다.”26) 우리가 생산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적 · 이냐시오적 부단함이다.

  우리가 신앙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부단함의 지혜’la saggezza di una inquietudine이다. 이 지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 초월적 가치를 따라 살도록 이끈다. “삶이 있는 곳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움직임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있고, 탐구와 불확실성이 있으며,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심지어 괴로움과 고독이 있는 법입니다.”27) 베르골료는 교육자들에게 보내는 담화에서 이렇게 썼다. “‘부단한’inquieto 아이는 … 세상과 사회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입니다. 삶에서 닥치는 위기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아이이며 한계에 저항하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한계라면 (물론 고통은 따르겠지만) 오히려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입니다. 세속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클리셰에 대해 순응하지 않는 아이, 토론을 배우고자 하는 아이입니다.”28)

  따라서 끊임없이 깨어있는 부단함을 ‘읽어내고’leggere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침묵시키는’acquietare 모든 시스템은 위험하며, 이는 곧 어떤 식으로든 실존적 정적주의29)로 수렴되기 때문이다.30)

  다섯 번째 기둥: 질문을 통한 교육

  베르골료는 반항적 태도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경향을 어린아이들의 주요한 특징으로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은 교육자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이의 활력은 매우 엄격하고 완고한 틀을 넘어설 수 있는지 측정하는 도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그들에게 ‘따스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온기’를 전해준다. 이 시선은 청소년들의 마음에 전해져서 ‘기억과 투쟁과 결핍과 은총과 죄를 거치며’ 그들의 마음을 성숙하게 한다.31) 이렇게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용기를 주고 일관된다면, 비록 청소년 역시 삶의 고통을 겪을지라도 위기의 순간에 이성을 잃지 않을 것이며 방향을 잃지도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때로 자신의 욕구와 물음을 온전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교육자들이 이 시선을 유지한다면 청소년들의 질문을 ‘발견하고’scoprire 질문에 ‘찬찬히 머물러 충분히 생각하며’contemplare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아는’intuire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복음의 기쁨』 155항) 이 말은 교육과 사목적 돌봄에 있어서 근본적인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리수업은 결코 공허한 주입식 수업이나 도덕규범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식의 수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베르골료는 2007년 4월 18일 교육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길지만 전체 내용을 여기 싣는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교육자들을 위한 일종의 ‘양심성찰’esame di coscienza 역할을 하여 중요한 확인을 돕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아이들의 창조성, 아이들의 희망에 경이를 느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열려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의 발상에 놀라움을 느낍니까? 우리는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경이를 느낍니까? 또한 우리는 아이들의 수많은 장난과 교실에서 맞닥뜨리는 표현할 길 없는 말썽꾸러기 모습에서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은 충분히 열려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닫아, 습득된 지식과 정착된 교육방법론을 갖춘 박물관에 봉인했습니까? 모든 것이 완벽하고 이미 구비된 내용만 적용할 뿐, 새로운 것을 더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 마음은 아이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용적이고 겸손합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심각한 위험이 우리에게 닥쳐올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돌처럼 굳어질 위험 말입니다. 만약 부모의 마음이, 교육자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다면, 아이들은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도 그것을 누구와 나누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오도카니 서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뀔 것이요, 연대는 산산조각날 것입니다.32)

  그렇기에 교육자들에게 “용감하고 창조적으로 되라.”audaci e creativi33)는 호소가 뒤따르게 된다. 좋지 않은 현실 앞에 저항만 하지 말 것이며, 특정한 계획에 목을 매는 근본주의적 관료가 되어서도 말 것이다. 이 호소는 “창조하라”creare는 호소이며, “역사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건설에 벽돌을 놓아라.”는 호소이고, 재능과 정신을 펼치라는 호소이다. 사실 창조성은 ‘능동적인 희망의 특징’caratteristica di una speranza attiva이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어딘가에 있는 무엇, 어떤 실재에 대한 현존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고 ‘그곳에서부터 어떤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길’34)을 찾아 나서기에 그렇다.

  이러한 폭넓고도 개방적인 접근법은 ‘진리’verità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에 상응한다. 교육자들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연설에서 베르골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진리 개념을 제한하기보다는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가 세상의 진리―아무리 이것이 공고해 보이더라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며 헤아릴 길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 해변을 거의 볼 수조차 없을 거대한 대양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바야흐로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우리의 진리’nostra verità를 수호하는 데 편집증적인 노예가 되지 맙시다. (마치 내가 ‘가졌으면’ 그는 가질 수 없고, 만약 그가 ‘가질 수 있다면’ 나는 ‘갖지 못하는’ 진리처럼 말입니다.) 진리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선물이기에 우리를 더욱 크게 만들고 고양시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귀하게 주어진 선물에 봉사하게 합니다. 이는 상대주의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진리는 우리의 이해를 더욱 심화하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35)

  가톨릭 학교는 ‘이데올로기’ideologia의 학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베르골료의 연설에서 이 교육법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실례를 발견하게 된다. 베르골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 학교는 모든 대답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패권적 군대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물음들이 환영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빛에 따라 개인적인 탐구는 적절하게 장려되어야 하며 언어로 이루어진 장벽에 의해서 방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장벽은 오히려 약하디 약한 것이요, 곧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전이야말로 위대합니다. 도전은 깊이를 요청합니다. 도전은 삶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며 우리 자신이 우상으로부터 치유되고 자유로워지도록 요청합니다.36)

  이 호소에는 베르골료의 비전이 완전하고도 농익은 형태로 종합되어 있다. 탐구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성숙한 인격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 인격은 식별을 거친 선택을 하고, 완전히 성숙한 방식으로 신앙에 충실할 수 있게 한다.

  여섯 번째 기둥: 한계를 잘못 다루지 않음

  아르헨티나의 주교로서 봉사했던 시기에 형성된 베르골료의 교육론 여섯 번째 기둥은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부단함과 현실 너머를 향한 긴장이라는 베르골료 교육론은 한계에 대한 인식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2003년 교육자들과의 담화에서 베르골료는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창조하는’creare a partire da ciò che esiste 것이 필요하며 이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사실이 전제하는 바는 차이를 인식하고 기존의 노하우를 이해하며 아이들과 그 가족의 기대와 심지어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37) 몇 년 후 베르골료는 보다 직접적으로 강조했다. “아이들을 동반한다는 것은 인내를 의미합니다. ‘견디어냄’hypomoné을 통해 한계를 잘못 다루지 않게 됩니다.”38)

  한계를 잘못 다루지 않는 혹은 한계를 ‘품는’accarezzare 태도는 배르골료 교육론의 또 다른 핵심 측면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 『사랑의 기쁨』(AL) ― 이 문헌은 교육학적 문헌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 에서 교종은 다정다감한 태도를 강조하면서 “온유함은 다른 이들의 한계에, 특히 그러한 한계가 분명히 드러날 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AL 323)고 하였다.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항상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무한한 신뢰가 스스로 자라나는 은총과 사소한 것에 들이는 세심한 주의와 공존한다. 단순한 낙관주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상태를 정체됐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신뢰를 보내는 태도와 관련된다. 만약 우리가 확고한 개방적 태도, “돌볼 수 있다”prendersi cura는 그러한 개방적 태도를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육자라고 할 수 없다.

  일곱 번째 기둥: 생명을 낳는 풍성함, 가족의 풍성함 속에서 살아가기

  쉬지 않는 끊임없는 태도와 질문을 주저하지 않는 살아있는 교육론은 진리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과 포용적인 접근법을 갖는다. 이는 곧 교육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풍요로움이란 사실에서 비롯한다. 이것이야말로 베르골료가 지닌 교육 비전의 근본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을 낳는 부모와도 같은 교육적 차원이 바로 교육에 부여된 사명을 이해하는 근저를 형성한다. 이는 곧 세상을 가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교종은 세상을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특히 놀랍다. “대화는 유산을 남기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39) 유산은 가족 안에서 자자손손 전해지는 충만함이다. 베르골료는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유산으로 받은 우리 아버지들의 기억을 회복합니다. … 우리와 함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 지금 물려받은 유산을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전해주고자 하는 용기, 미래의 유토피아에 대한 결실 있는 투신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을 증식시킨다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40)

  이 말들은 우리 경험과 삶에 대한 태도를 대화하며 나눔으로써 모든 풍요로움이 점점 커짐을 의미한다.

  베르골료 대주교의 글들은 또한 그가 얼마나 이야기를 깊이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직 이야기를 통해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산을 넘겨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본적인 주제 하나, 즉 젊은이들과 나이 든 이들 사이의 가족관계를 다룬다. 현대 사회에서 ‘일회용품’scarti 취급을 받는 두 집단의 관계 말이다. 젊은이들은 미래이며 에너지이다. 나이 든 이들은 지혜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법이나 그들은 서로 다르다. 아이는 복제인간이 아니다.

  교육은 가족과 관련된다. 교육에는 세대 간 관계와 경험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는 놓여야 할 다리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다리가 바로 교육이며 그런 점에서 교육은 살아있는 유산을 전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산에는 항상 전율이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유산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교종은 청소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지평을 바라봄으로써, 항상 더 많이, 더 멀리, 더 앞을 내다보는 삶에 대한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41) 그럴 때 우리는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교육자들에게 보내는 충고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들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도전을 그들에게 주십시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현기증’vertigine을 일으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현기증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현기증,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원의를 채우는 현기증이어야 합니다.”42)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은 쉬지 않고 끊임없는 태도의 유산임을 이해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베르골료에게 아버지들, 연장자들은 ‘꿈을 꾸는’sognano 이들이다. 교종은 오랫동안 요엘서를 묵상한 적이 있었다. 특히 다음의 구절 말이다.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1) 젊은이들이 보고 있는 미래에 대한 환시는 그들보다 앞선 이들의 꿈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꿈을 꾸는 이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다! 그 대신 젊은이들은 ‘환시’visinoi를 보고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으로 미래를 세운다.43)

  꿈을 들려줄 아버지들이 없다면 “젊은이들은 더 이상 ‘환시를 볼 수’avere visinoi 없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멈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계획을 세울 수 없게 된다. 미래는 이제 불안하고 의심에 가득차고 두려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44) 우리가 희망을 품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오직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싸우기가 가능했음을 볼 수 있게 하는’ 아버지들의 증언이다.

  이러한 역동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전통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유물보존소’bottega di restauro나, 혹은 항상 높은 곳에 올라 앉아 자기 보고 싶은 면만 보고자 하는 이들이 여기는 ‘유토피아적인 실험실’laboratorio di utopia로 보지 않게 해준다.45) 교육의 사명은 그렇기에 역사에의 투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역사적 실체이다. 많은 세대를 거치며 형성된 실체이다.46)

* * *

  우리는 베르골료 교육에 관한 사유의 일곱 ‘기둥’colonne이 성좌에 오르기까지 형성된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각각의 기둥에 대한 성찰은 교종이 베드로좌에 선출된 이후 5년 동안 발전한 교육에 관한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베르골료 교육의 일곱 가지 근본적인 요소들을 확인하였다. 국가 미래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 다양성을 맞아들이고 선익을 위해 통합하려는 교육, 새로운 인간 이해가 던지는 도전에 맞서는 용기와 선견지명의 교육, 부단함을 동력으로 하는 교육, 질문과 탐구를 방법론으로 삼는 교육, 한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교육, 그리고 관계는 가족과도 같이 생명을 낳는 교육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베르골료 대주교의 교육적 성찰을 모은 책자들의 제목들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한 그의 접근법을 특징짓는 세 가지 단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선택’scelta, ‘필요’esigenza, ‘열정’passione.’47) 덧붙여서 베르골료가 교육자들에게 보낸 글에서 아주 간결한 표현을 소개하겠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활동을 다시금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은 우리 존재 방식 가운데 우리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이는 예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끊임없이 우리 지평이 확장되기를 요구합니다.”48)


* La Civiltà Cattolica, 4037 III (1 settembre 2018), 343-357.
** Antonio Spadaro S.J.
1) 역자 주: 이 제목은 잠언 9,1의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T. E. 로렌스의 자전적인 책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을 연상시킨다.
2) Papa Francesco, Nei tuoi occhi è la mia parola. Omelie e discorsi di Buenos Aires 1999-2013, (Milano: Rizzoli, 2016), XII. 본문의 인용문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주석에 출처를 밝힐 때 날짜 다음에 OP라는 약자와 쪽수를 괄호 안에 넣어 덧붙였다.
3) 이는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참조: Antonio Spadaro, “J. M. Bergoglio, il ‘maestrillo’ creativo. Intervista all’alunno Jorge Milia”, La Civiltà Cattolica, (2014 I), 523-534.
4) 참조: Ethel Mannin, Tardi ti ho amato, (Rome – Milan: La Civiltà Cattolica – Corriere della Sera, 2014), XIX.
5) Papa Francesco, Nei tuoi occhi, XII.
6) 이에 관한 중요한 자료는 L’educazione secondo Papa Francesco, (Bologna: EDB, 2018)이다. 여기에 “Atti della X Giornata pedagogica del Centro studi per la scuola cattolica” (Roma, 14 ottobre 2017)가 수록되어 있다. 베르골료의 교육접근법의 원천 가운데 하나는 로마노 과르디니의 사유이다. 이에 관해서는 Carlo M. Fedeli, Guardini educatore, (Lecce: Pensa, 2018)를 참조. 교종 선출 이후 교육에 관한 베르골료의 글들을 모아놓은 간략한 연구들이 출간되었다. 그 예가 La mia scuola, (Brescia: La Scuola, 2014); La bellezza educherà il mondo, (Bologna: Emi, 2014); Imparare ad imparare, (Venezia: Marcianum, 2017) 등이다.
7) Jorge M.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1 aprile 2004 (OP 265).
8) 이러한 사유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찬미받으소서』에서 교종이 세상을 우리의 ‘공동의 집’casa comune으로 묘사하였듯이 함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2015년 사목방문 중 미국 의회에서 교종이 했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며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좇아 이 땅에 왔습니다.”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 서로 상호 보조성을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적대적인 마음을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요청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Francesco, Discorso all’Assemblea Plenaria del Congresso degli Stati Uniti d’America, Washington, 24 settembre 2015). 여기에 교육의 핵심 맥락이 등장한다. 즉 미래를 세우고 국가를 세운다는 점이다.
9) Jorge M. Bergoglio, “Quarant’anni dopo,” in Jorge Milia, L’età felice, (Rome-Milan: La Civiltà Cattolica – Corriere della Sera, 2014), VII; 이탤릭체 추가.
10)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31 marzo 2002 (OP 153s).
11)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7 aprile 2006 (OP 443).
12)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31 marzo 2002 (OP 148). 이탤릭체는 강조를 위해 추가되었다. 다양성은 도전이 될 수 있다. 교종으로서 베르골료는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관해서 2015년 9월 23일 미국 주교들에게 했던 담화를 참조하라. “통합을 문화적 지적 영적인 모방과 종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3)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9 aprile 2003 (OP 203). 이탤릭체는 역시 강조를 위한 것이다.
14)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18-20항.
15) 보다 최근인 2009년 베네딕토 16세는 체코 공화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내에서 교회는 “과거의 유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여전히 유효한 실체가 있는 가치를 물려받았으며, 미래를 위해 창조적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Benedetto XVI, Intervista durante il volo verso la Repubblica Ceca, 26 settembre 2009). 오늘날 복음에 따라 살기 위해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창조적 방향’orientamento creativo이다.
16) Antonio Spadaro, “‘Svegliate il mondo!’. Colloquio di Papa Francesco con i Superiori Generali”, La Civiltà Cattolica, 3925 I, (4 gennaio 2014), 3-17 [Papa Francesco, Adesso fate le vostre domande. Conversazioni sulla Chiesa e sul mondo di domani, (Milan: Rizzoli, 2017)에도 수록되었다].
17) Spadaro, “‘Svegliate il mondo!’”, 16.
18) Ibid.
19) Ibid., 17.
20) Ibid.
21) Ibid.
22) 참조: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9 marzo 2000 (OP 50).
23) Bergoglio, “Omelia nella Messa per l’educazione”, Buenos Aires, 14 aprile 2010 (OP 769).
24)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6 aprile 2005 (OP 369).
25) Ibid.
26) “Papa Francesco incontra ‘La Civiltà Cattolica’ in occasione della pubblicazione del fascicolo 4000,” La Civiltà Cattolica, 2017 I (25 febbraio 2017), 442. 또한 다음 책을 보시오. Solo l’inquietudine dà pace. Così Bergoglio rilancia il vivere insieme, (Roma: Castelvecchi, 2018).
27) Francesco, “Discorso in apertura del Convegno Pastorale Diocesano”, (19 giugno 2017).
28)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3 aprile 2008 (OP 627).
29) 역자 주: 실존적 정적주의나 각주 30번에 나오는 관료적 정적주의는 미래에 대해서 꿈을 꾸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도전을 환영하고 도전을 마주하려는 영웅주의가 결여된, 간단히 말하면 예언자적 소명은 포기하고 영적 위안만을 구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30) “나는 청년들에게 희망과 영웅적 덕목이 결여된 미래에 대한 많은 제안에 현혹되어 물러서지 않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을 고작해야 관료적 정적주의로 물러서게 할 뿐입니다.” 이는 교종이 20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편지에서 쓴 내용이다.
31) Bergoglio, “Celebrazione giubilare degli educatori”, 13 settembre 2000 (OP 82).
32) Bergoglio, “Omelia nella Messa per l’educazione”, Buenos Aires, 18 aprile 2007 (OP 531).
33)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9 marzo 2000 (OP 63).
34)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9 aprile 2003 (OP 192).
35)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1 aprile 2004 (OP 270); 이탤릭체는 강조를 위한 것임.
36) Ibid. (OP 269s); 이탤릭체는 강조를 위한 것임.
37)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9 aprile 2003 (OP 207).
38) Bergoglio, “Parole iniziali nel primo Congresso regionale di pastorale urbana”, Buenos Aires, 25 agosto 2011 (OP 881).
39) Bergoglio, “Relazione alla XII Giornata di pastorale sociale”, Buernos Aires, 19 settembre 2009 (OP 723).
40) Ibid.
41) Francesco, “Discorso ai ragazzi del gruppo ‘Cavalieri’”, 2 giugno 2017.
42) Francesco, “Discorso in apertura del Convegno Pastorale Diocesano”, 19 giugno 2017.
43) 2016년 6월 16일 로마교구회의 개막식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 연장자들의 꿈에는 우리 젊은이들이 새로운 비전을 갖고 다시 한번 미래를 갖도록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2017년 6월 19일 같은 모임에서 이를 반복해서 말하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의 조부모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손주들을 방문하기보다는 자기 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 그들은 말을 해야 합니다. 심지어 ‘절연한’scavalcare 부모들조차 조부모라는 뿌리를 갖는 법입니다. 조부모들에게는 역사와 신앙, 유산을 전수하는 자질이 있습니다.”
44) Francesco, “Discorso all’apertura del Convegno ecclesiale della Diocesi di Roma”, 16 giugno 2016.
45) Bergoglio, “Intervento alla Seduta plenaria della Pontificia Commissione per l’America Latina”, Roma, 18 gennaio 2007, (OP 500).
46) 참조: José L. Narvaja, “Il concetto ‘mitico’ di popolo. Papa Francesco lettore di Dostoevskij” La Civiltà Cattolica, 2018 III (7 luglio 2018) 14-26.
47) 참조: Jorge M. Bergoglio, Educar, elegir la vida. Propuestas para tiempos difíciles, (Buenos Aires: Editorial Claretiana, 2005); Jorge M. Bergoglio, Educar: exigencia y pasión. Desafíos para educadores cristianos, (Buenos Aires: Editorial Claretiana, 2006).
48) Bergoglio, “Messaggio alle comunità educative”, Buenos Aires, 23 aprile 2008 (OP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