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르브레 교종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멘토가 남긴 유산

LOUIS LEBRET. L’EREDITÀ DEL MENTORE DELLA «POPULORUM PROGRESSIO»

페르난도 드 라 이글레시아 비구이리스티 신부(예수회,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

이근상 시몬 신부(예수회) 옮김

1966년 7월 20일 루이 신부가 선종하였다. 불란서 도미니코회 회원인 그는 그의 고향과 조국,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가진 문제, 특별히 남미와 아프리카가 가진 사회적 문제를 전생애를 통해 쉼없이 걸머졌다. 그는 이슈들을 제기하며, 교회의 사회교의 Social Doctrine가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생산에 도움을 준 위대한 지성적 멘토였다. 1967년 이 회칙을 발표한 교종 바오로6세는 루이 신부를 존경하고, 예찬하였다.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그가 남긴 유산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그의 삶과 활동과 영성을 간추리며, 이 글을 그에게 바친다.

2016년 7월 20일은 루이 르브레 신부의 서거 50주년이다. 브리타니아 출신의 이 도미니코 회원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위대한 멘토가 주목을 받고 연구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과 사상, 영성을 살펴보고, 그가 남긴 유산의 가치를 음미해 볼 것이다.

(역자 주: 교종 바오로 6세의 사회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3. 26). 이 회칙은 교종이 1960년대 초 남미와 아프리카를 방문하면서 “그들 대륙이 겪고 있는 심한 곤경을 직접 보고”(4항) 발표한 회칙이다. 회칙은 식민주의(7항), 신식민주의(52항), 불공정한 국제적 통상관계(56-58항)를 통해, 후진국의 가난이 내부에서가 아니라 선진국과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생긴 문제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세계화의 근본적, 구조적 문제를 반세기를 앞서 지적한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회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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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루이 르브레는 1897년 6월 26일, 프랑스, 브리타니아의 생 말로 Saint-Malo 근처, 미니힉 쉬르 랑스 Minihic sur Rance 마을에서 바닷일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 조선소의 선임 조선목공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17년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이미 어뢰정의 선장 보좌관이 되었다. 1920년에는 브레스트학교에서 해군장교 교육관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베이루트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항구 운수 책임을 맡았다. 23살이 되었을 때, 명예 기사 칭호를 받았고, 해군대위에 보임되었다. 보다시피 그는 이른 나이에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는데,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잘 펼칠 수 있는 기회들이였다.

루이 르브레가 성직자가 되려는 마음은 해군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결국 해군 장교로서의 탁월한 경력을 버리고, 그는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앙제 Angers에서 수련을 마치고, 네덜란드의 레골트 Rijckholt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학업의 마지막 해를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을 위해 고향 근처 생 말로의 한 공동체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가 바닷가 근처 고향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서 그는 전에는 몰랐던, 그러나 그에게 아주 밀접한 삶의 현실을 만난다. 그것은 거의 극빈에 가까운 가난과 기초적인 인간 존엄이 박탈된 그 지역 어부들의 삶이었다. 그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는 크리스챤 해양 청년회 Chrisitian Maritime Youth를 만들어 보았지만, 얼마 안 되어 이런 노력에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중에, 에르네스트 라모르 Ernest Lamort 와 함께 프랑스 선원 노조 연합 the French Federation of Professional Seamen Unions을 창설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또한 1932년부터 1939년 사이에 노조신문, 바다의 소리 La Voix du Marin를 발행했다. 십 여 년 동안 그는 모든 노력과 힘을 바닷일을 하는 이들과 이와 연관된 이들을 위해 쏟아부었다. 그의 활동은 두 갈래에서 펼쳐졌는데, 첫째, 법개정을 위해서 유관 기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 둘째 바닷일을 하는 이들과 직접적으로 함께 하는 활동들이다.

생 말로에서 보낸 시간은 르브레 신부의 삶에서 몹시 중요하다. 거기에서 그의 향후의 모든 활동양식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가 전생애에 걸처 추진한 모든 일의 바탕과 핵심에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복음적 사랑 evangelical mercy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그의 모든 활동을 설명해 주고, 모든 다양한 시도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틀이다. (그가 많이 사용한) 사회학, 경제학, 경제발전 등의 개념들은 처참한 곤경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빼면, 그에게 의미없는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곤경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진보해 나가기를 갈망했을 뿐이다.

르브레 신부에게 사랑이란 온정주의 paternalism나 구호 alms-giving에 갖힌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불의한 세상을 뜯어고쳐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애처로운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과 하나의 운명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누구라도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투쟁을 안할 수가 없다. 더 투쟁하면 할 수록 우리는 세상의 비참함을 없애기 위한 이 위대한 사업에서 더 많은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 이로써 활동가는 하느님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활동가는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 중에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하나됨의 현상이며, 자신이 녹아들어가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고향 땅에서 루이 신부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서 수행하게될 하나의 방법을 실천한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탐사의 방법 investigation이다. 그는 모든 주장이 사실 facts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말했다. 그가 보기에 체계적이고, 직접적인 관찰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에서 출발해서,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착수할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성 도미니코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로서, 그는 교육받은 자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확고한 근거에 따라서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유명한 연구 회합들은 생 말로에서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사회 현상의 원인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악의 뿌리를 살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이 신부는 교육이 꼭 필요한 사람을 선정하고, 그들을 교육하는 법을 알았다. 그에게 평신도들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에르네스트 라모르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세상의 문제를 풀려면, 그 문제가 자리한 세상의 이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해결책들이 근거를 가져야 하기에, 그는 사회학적 연구조사, 통계분석, 그리고 단호한 전략과 전술을 가능케한 경제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가 이끌었던 잡지, 바다의 소리 the Voix du Marin에서 그의 이런 노력들을 볼 수 있다.

극심한 경제 위기 기간 동안, 모든 산업과 직업군이 영향을 받았지만, 특별히 해양관련 산업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었다. 프랑스 어부의 60%가 살던 브리타니아 지역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다. 아주 극소수의 어부들만이 합당한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소득을 벌었다. 르브레 신부가 주축이 되서 어촌을 돌며 진행한 연구들이 그의 잡지에 발표되었고, 혹독한 상황을 알렸다.

그것은 전체 85,000 어부 중에 단 30,000명 만에게만 일감이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55,000명은 일을 찾아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다. 르브레 신부는 이런 상황을 프랑스가 용인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 많은 실업자들이 공공부문과 산업단지의 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하였다. 재난을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정부가 긴급하게 재정 지원을 하고, 각 가정에는 최저소득을 보장해 주어야 했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해양관련 단위들이 굳건한 노조를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브리타니아 지역 어업행정은 이런 필요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루이 신부는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가 따르려고 하던 방임주의 정책들의 사회적 결과가 두려웠다. 그는 프랑스 선원들이 당시의 포르투갈 선원들처럼 비참한 처우를 받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노동자들끼리 경쟁해서 다같이 빈곤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땅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폭풍우를 견디려면,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수단들이 필요했다.

르브레 신부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활동을 해 나갔다. 그의 동역자인 에르네스트 라모르가 그 노동조합의 핵심멤버였다. 어업과 관련한 다양한 직종들이 함께 만든 여러 위원회들은 훗날 그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가장 자연스러운 조직이라고 부를 만큼 효과적이었다. 데이타에 확고하게 근거한 노조활동으로 그가 목표한 것은 오로지 사람들을 구하는 것 뿐이었다. 브리타니아 해변이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루이 신부는 생 말로에서 시작한 사업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려고 이미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현장활동가들은 자기들대로 책임감 있게 자기 성찰을 깊이 해 나가야 하겠지만, 그는 현장조사와 교리연구 doctrinal study를 위해서 연구센터를 지었다. 그는 경제학적인 문제와 삶의 문제를 통합하려고 했다. 1941년 9월 24일, 마르세이유에서 `경제와 인본주의 Economie et Humanisme`란 단체를 등록했다. 여기에는 그와 함께 도미니코 회원들, 그리고 저명한 경제학자인 프랑소와 페루 Francois Perroux 같은 평신도들도 있었다. 그로 부터 일 년 뒤, 그는 그 유명한 `선언, Manifesto`을 발표하였다. 폐쇄경제라는 전제하에, 그리고 둘로 나뉜 프랑스의 현실에서 선언은 몇 년에 걸쳐 더 진전될 생각과 대책들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이윤에 근거한 경제체제의 거부, 개량주의를 넘어서는 구조 변화, 재화 자체와 재화에 대한 필요의 구분, 그리고 공동체주의적인 경제체제의 초기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마르세이유에서 보낸 이 시기 동안 르브레 신부는 어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연구조사에도 박차를 가했다. 연구센터는 곧 리용으로 이전했다. 그 곳에서 진행된 연구결과들이 보다 잘, 보다 넓게 받아들여지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루이 신부와 `경제와 인본주의`에게 1947년은 중요한 해였다. 루이 신부는 브라질 상파울로의 정치 자유 대학 Free School of Political Science of San Paulo의 초대로 그 해 5월부터 9월까지 한 과목을 가르쳤고, 남미 여러 나라와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강의들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수강생들은 루이 신부가 위대한 스승이며 친근한 형제라고 느꼈다. 참으로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브라질과 다른 남미 국가들이 그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들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가난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저발전 국가들을 돕는데 헌신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올 무렵 르브레 신부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만성적인 실업, 영아사망, 문맹, 열악한 주거환경, 굶주림과 같은 인간 품위의 적나라한 전락을 목도하고, 저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넓게 퍼진, 충격적인 가난을 접하고 그는 가장 가난한 프랑스 사람도 남미의 사람들에 비하면 부자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이 신부의 삶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든다. 그는 저발전국가들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집중한다. 1958년 발전의 문제가 20세기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교육과 발전을 위한 국제연구센터 International Institute of Research for Training and Development(IRFED)를 설립했다.

`경제와 인본주의`처럼, IRFED는 일련의 폭넓은 활동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조화로운 발전이 어떤 요소를 담아야 하는지를 연구하였다.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 예를 들어 GDP 증가와 같은 것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삶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진보여야 했다. 따라서 르브레 신부는 연구센터 내에 `발전과 문명 Development and Civilization` 부서를 만들고, 경제중심주의를 벗어나, 산업화 이전의 가치들을 간직한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IRFED는 매년 남미, 아프리카, 마그레브, 중동 그리고 아시아에서까지 다양한 연령과 경험을 가진 백 명의 학생을 초청하여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르브레 신부는 교육을 크게 강조하였다. 동시에 그는 경제학적, 사회,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지만,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우선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았다. 그는 센터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봉사의 마음을 가지길 원했다. 그는 이들이 죄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했던 오래된 한 수도회와 같은 수도단체처럼 되기를 원했다.

그의 삶에서 이 시기에 르브레 신부는 전세계적인 권위를 얻게되었다.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베트남에서까지 주교들이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세네갈에서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1960년부터 64년까지 레바논으로 파견되었다.

레바논은 그가 젊을 때 활동하고 사랑하던 나라였다. 이 파견이 그의 마지막 주요한 봉사였다. 그에 앞서 르완다와 베네주엘라에 가기도 하였다. 바티칸은 그를 여러가지 UN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르브레 신부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 다다랗다. 이 무렵 그는 바티칸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의 활동과 사상이 점차 더 잘 알려졌고, 1962년 르브레 신부는 제네바에서 열린, 저발전지역을 위한 과학기술 유엔 회의에 교황청 특사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조화로운 발전에 대한 그의 사상을 훌륭하게 소개했다.

루이 신부는 로마에서 보편교회를 섬기며 현역으로서 마지막 사년을 보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봉사가 귀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에 문을 열던 시기였다. 교종 바오로 6세가 르브레 신부에게 애정어린 찬사를 보냈고, 1964년 그를 공의회 전문가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개인 알현의 시간을 가졌고, `현대 사회에서의 교회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 초안이 발표될 무렵에 교종께 자신의 생각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1965년 2월, 르브레 신부는 세계 international community와 관련된 장chapter 을 써서 공의회에 제출했다.

불행하게도,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진행될 때, 르브레 신부는 위독한 상태였다. 그는 그림자로 남겨졌다. 교종 바오로 6세가 친히 그에게 무리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초안 13장이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이 되었다. 르브레 신부는 정의성청 Secretariat for Justice의 설립을 위해 개념을 계발하고, 내용이 그 문서에 담기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교종 바오로 6세가 썼듯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발전development이 평화peace의 새로운 이름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정의성청이 교의적인 지원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의성청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발전에 대한 한결같은 교의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어야 했다. 덧붙여, 성청은 바로 그 교의가 실제 삶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활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르브레 신부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 1966년 7월 20일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다음 해, 교종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브레 신부의 이름을 인용한 문서,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을 발표했다. 르브레 신부의 흔적은 문서의 거의 모든 단락에서 드러났다.

르브레 신부의 표현방식이나 어휘에 익숙한 이들은 회칙에서 그의 영향을 알아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장은 그의 것에서 통채로 인용된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일기를 통해서 우리는 교종 바오로 6세가 회칙을 만드는데 그에게 언제 어떤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교종 자신이 르브레 신부를 존경하고, 의지했다고 밝힌 것과 「민족들의 발전」에 대한 회칙이 르브레 신부라는 교회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며 경의의 표시라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

우리는 이미 그의 삶의 여러 시기를 돌아보며 그의 사상의 상당부분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사상의 세 가지 요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첫째 공동선 common good에 대한 이해, 둘째 자유주의 Liberalism와 맑시즘에 대한 비판, 마지막으로 조화로운 발전이란 그의 개념이다.

르브레 신부에게 공동선이란 인간 사회의 선이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선을 추구한다. 선을 실현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그 선을 접수한다. 선에 대한 공동 욕구가 있다. 그 선은 사회정의를 통해서 획득된다. 우리 각자는 각자 고립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우리 자신이 완덕에 이르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본성에 새겨져있다.

모든 개인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자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필요한 이들에게 자기의 재화가 쓰여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나누어야 하고,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자는 다른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소유물이란 (역자주: 모든 것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공동선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르브레 신부에게 있어서 무질서란 누군가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들 (예를 들어 땅, 공장, 과학, 능력들)이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될 때 발생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일을 현대의 자본주의가 벌이고 있다. 이런 것들이 공동선에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공동선을 배반하고 있다. 자유시장 경쟁을 통해 자본주의는 사회정의에 반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그것은 덜 인간적이고, 덜 솔직하여, 피고용인들을 착취하며, 더 낮은 임금으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일하도록 만들고 있있으며, 현혹적인 광고로 시장을 접수하고 있다. 공동선을 위한 필수적 조건은 전체가 함께 융성한다는 생각과 상호 신뢰다. 이를 위해서 (역자주; 기능에 한정된 교육이 아니라 더 넓은 인식이 가능한) 뿌리 깊은 교육, 즉 종교 교육이 요청된다. 그것은 교회가 공동선을 달성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주장이다.

이런 위대한 인간중심적인 이상을 가지고 르브레 신부는 맑시즘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자본론을 읽고, 맑시즘의 지침들이 공동선의 원리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적 인류학에 기반하여, 결정론적인 체계인 맑시즘을 거부했다. 거기에는 인격의 개념이 자리할 수 없고, 자유가 행사될 수 없으며, 도덕의 자리가 없었다. 그는 맑시즘을 자본주의의 다른 한 면으로 이해하며 맑시즘이 자본주의보다 덜 해로운 것이라 보는 시각을 거부했다.

루이 신부는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해 열정적으로 싸웠다. 그가 내놓고자 한 것은 새로운 문명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전이란 개념이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라는 그의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발전은 GDP의 증가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말한다. 단순히 생산량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발전을 본다면 그 발전은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아니다.

르브레 신부는 이런 발전의 개념을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실재, 즉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에게서 차용했다. 그들은 성장하는 존재들이다. 이 개념에는 성장하는 동안 유지되어야 할 내적 균형 equilibrium이 포함된다. 발전은 발전하는 존재의 본질에 담겨진 조화 harmony를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의 가치를 드러낸다. 발전이란 가능성이 실현되어 가는 진화다. 결국 최적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고, 최적의 상태에 다다랗을 때 종결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적의 상태란 여러가지의 면이 있다. 양육, 힘, 활동성, 지적 성숙도, 그리고 도덕적 영적 삶의 충만함등이 최적의 상태에 다다라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다양한 발전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에만 달성된다. 그것은 질서있는 성장이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성장과 닮아있다. 그것은 정말이지 경제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인간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발전에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르브레 신부는 기발전 국가와 미발전 국가, 양자가 연대를 통해서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그는 서구 산업 문명이 전통적인 문명의 가치체계에 주는 충격에 대해서 염려했다. 제삼세계의 발전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영혼, 그리고 살아갈 이유등을 앗아가버리는 경제성장으로만 점철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루이 신부는 전통적 가치를 지킨다면서 발전을 거부해 버릴 위험이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화를 거치며 전통 가치를 파괴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란 점도 분명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런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까? 르브레 신부는 그 응답을 가치체계의 공생 symbiosis에서 찾았다. 공생이 이루어지면, 이 때의 발전은 형편없이 분배되어 온 전세계적인 생산력을 단순히 높이는 것을 넘어서는 성취가 될 것이다. 그것은 앞선 가치와 새로운 가치의 역동적 조화가 될 것이다. 그것은 토착가치와 이방가치의 조화가 될 것이다. 조화로운 발전이란 진정한 의미의 연대 속에서 최대한의 인간적 경제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의 영성

르브레 신부가 세상의 temporal 질문에 아주 깊이 천착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몇 몇 사람들은 그가 도미니코회원이란 사실에 아주 놀란다. 이에 대해서 그는 그가 만일 먼저 선원이 되었고, 나중에 도미니코회원이 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모든 일들을 수행해내지 못했으리라고 고백했다.

모든 것은 그가 태어난 브리타니아에서 출발했다. 그는 평생 고향과 아주 깊이 연결되었다. 유아기, 그리고 가족들과 있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브리타니아 사람 Bretons의 전형적인 가치들이 그 속에 뿌리를 내렸다. 많은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다. 들판에서 바다에서 고된 일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힌 사람들이었다. 진취적이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도미니코회원이 되어 생 말로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리타니아가 1930년대의 사회 경제적 위기로 황폐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전에서 빈곤을 보았고, 때때로 그것은 거의 비참의 수준이었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삶의 불안정이었다. 단지 어부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농부들 역시 농사에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1900년에서 1940년 사이에 약 600,000명의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참다운 의미의 발전이 결핍된 이런 현실이 루이 신부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이 그를 그의 사람들, 브리타니아 사람들을 위해서 용감하게 봉사하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는 풍부한 신앙적 환경에서 교육받은 그는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쉐르부르 Cherbourg 가까이에 있는 브리크벸 Briquebecq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성정이 보다 활동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레바논에서 그는 예수회의 성소식별 피정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예수회원들은 그에게 성이냐시오의 자녀가 되기에 그가 너무 독립적이라고 말하며, 도미 니코회원이 되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는 예수회원들이 그를 원하지 않았다고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런 사건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정말 도미니코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그는 볼로냐에 있는 성 도미니코의 무덤에서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강렬하게 도미니코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르브레 신부는 자기 수도회의 정신을 사랑했다. 그는 성 토마스를 그의 지성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수도원의 일상을 좋아했다. 기도시간을 사랑했고, 침묵과 노동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그를 풍부하게 했고, 사도직에서 그를 도와주었다. 이런 점에서 르브레 신부은 기도의 사람이며 관상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우리에게 8권의 영성서적을 남겼다. 그는 참여하는 영성 engaged spirituality으로 많은 신자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작을 읽을 때, 우린 어떤 반복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주님과 하나된 격정적인 삶이 있다. 그 삶은 그의 기도 안에서 숨김없는 진솔함으로 드러나고,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주님를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르브레 신부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시선은 바로 주님을 흠숭하는 시선과 관상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웃을 향한 이런 자비로운 사랑은 그가 쉼없이 공동선을 추구하고, 보편적 형제애를 증진하도록 만들었다. 사랑이 그를 전생애를 걸쳐 불의에 맞서 싸우도록 이끌었다.

루이 신부가 바친 기도들은 영과 육이 결합된 신비와 관상의 결과물이었다. 영적 도피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다급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1946년과 1949년에, 르브레 신부는 로마에 있었다. 그 때 그는 산 루이지 San Luigi성당에서 영성수련 강의를 하였다. 이는 저작물로도 출간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구원역사 전체를 다루며,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의 이웃이란 인간 전체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루카 16,19-31)를 복음에서 읽을 때, 이는 즉각 우리 역사에 적용되어야 했다. 즉 바로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라자로인 것이다.

`우리는 악한 부자다. 지금 라자로는 우리의 식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고 있다. 우리 국민 소득의 백분의 일, 이백분의 일, 천분의 일(의 부스러기들.) […] 라자로는 군중이다. 인류의 거대한 다수가 라자로를 이루고 있다. 한 때 라자로는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있었다. 우리의 경제체계가 그 라자로를 미친듯이 착취했었다. 그러나 이제 라자로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세상이 더 좁아졌기 때문이다. 라자로가 이제 우리를 대신하여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제서야 그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신문을 읽으며 사태를 판단하기 시작했고,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두려워한다. 라자로는 반역하는 법을 배우고…. 이해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라자로가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흔들고 있다. 우리는 라자로를 더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도우려면 경제적으로 힘을 가진 이들이 증오를 멈추고, 군비에 쓰는 돈을 줄여야 한다.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대신, 서른 배의 비용을 군비에 쓰고 있 다. 우리의 자만과 어리석음이 라자로는 분노케하고 있다.`

르브레가 사람들을 사랑했듯이, 사람들 역시 그를 깊이 사랑했고, 그를 필요로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기도, `당신 안에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나누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한다.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 안에서, 그리고 제가 걸어온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사랑해 왔다고 믿습니다./ 저는 제 사랑이 언제나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제 이기적인 삶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아이였을 때, 저는 미사에 입고 갈 옷이 없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자루에 빵을 채워야 하는 걸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쎄이드 항구에서 석탄을 나르던 부두노동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플란드르 제방의 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침몰당해 도움을 청하던 독일해병을 사랑했습니다./ 기계화와 세계경제위기에 몰려 굶주리며, 도시로 떠나야 했던 어부들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로브 신부 Fr. Loew가 저를 데려가서 만나게된 마르세이유의 빈민을 사랑했습니다./ 리오 Rio와 레시페 Recife의 빈민촌 흑인들을 사랑했고, …경찰에 의해 살던 장소가 파괴된 도쿄의 쓰레기청소부를 사랑했고,…수를 알 수 없는 수 많은 불쌍한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돈의 노예가 된 부자들을 사랑했고, …주어진 의무를 수행할 능력도 탁월함도 없는 정치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고, 참 사랑만이 붙들어 줄 수 있는 가련한 수 많은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 안에서 사랑했던 이들, 또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저와 함께 했던 이들이 다 같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제가 해 준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제 부족함은 당신의 이름에 희망을 두고 있는 모든 이들과 온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이 채워주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우리는 르브레 신부의 저작 전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씩씩한 브리타니아 사람은 자기 고향마을, 자기 나라, 그리고 세상의 사회적 문제를 참으로 진지하게 감당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사회교리에서 발전과 관련된 모든 주제에 있어서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진정한 발전이란 전체로서 한 인간의 성장이며 모든 인류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시대를 앞서 소개했다. 그의 세대, 1950-60년대에 발전이란 그저 경제적인 요소에 한정된 초보적인 개념이었다. 우리는 그의 저작을 읽을 때, 그의 사상이 가진 명료함과 시의적절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그의 심오한 영성에서 출발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 마음이 움직여, 사회적 행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높은 평가와 감탄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