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노래는 아직도 바람 속에 흐르고

BOB DYLAN. LA CANZONE SOFFIA ANCORA NEL VENTO

클라우디오 존타(예수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성삼의 딸들 수녀회, 축성생활신학 박사)

 

포착할 수 없는 인물, 모순된 인물, 음유시인, 시인이고 어쩌면 예언자인, 예술가인 것은 분명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넘어서 있는 인물인 밥 딜런의 모습을 대면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 복합성은 그의 작품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노래는 때로는 이야기식이면서도 세상을 향한 비정한 시선으로 권력의 비참함에 못을 박는가 하면 어떤 때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감정과 마음의 움직임들의 세계를 포착하고자 하고, 또 어떤 때는 인간 존재와 세상 안에서 진동하는 무한자의 그 섬광을 직감하면서 영적靈的이고 성사적聖事的인 것이 되기도 한다. 그의 글이 지닌 넓은 폭과 깊이는 조화와 대조를 위해 많은 발라드 포크, 블루스의 리듬, 롴과 재즈와 통합되고, 그것들 안으로 녹아들면서 가스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밥 딜런이라는 인물에게 접근하려는 생각이라면 토드 헤인스Todd Haynes 감독이 만든 영화 ‘아임 낫 데어(난 거기 없어요)’I’m Not There(2007)를 다시 참고하는 것이 좋다. 그는 이 미국인 싱어송라이터의 캐릭터를 풀어 나가기 위해 서로 다른 여섯 명의 인물에 의지하는데, 그들 각자는 밥 딜런의 예술가적이고 인간적인 본성의 요소들을 하나씩 체현體現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한 유색인종 소년은 쉬지 않고 걸으면서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영감을 따라가고, 내성적인 포크송 가수 잭 롤린스Jack Rollins 그리스도교 신앙에 귀의하면서 미디어의 도구화를 피해 달아나려고 한다. 케이트 블랑쳿Cate Blanchett이 분한 쥬드 퀸Jude Quinn은 천재성과 분방함 사이에서 역설을 통해 언론에 도전한다. 이들은 – 꼭 이들만은 아닌데 – 꿈과 현실을, 창의성과 인간다움을 넘나드는, 그리고 실패와 대성공을 넘나드는 밥 딜런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면놀이를 통해 관객에게 제시되는 인물들이다.

초기. 딜런의 초기 노래들 중 하나인 ‘토킹 뉴욬(뉴욬을 말하다)’Talkin’ New York(1962)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의 삶을 바로 하나의 경주로 나타낼 수 있다.

“서부의 광야를 벗어나 /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들을 떠나 떠돌면서 / 뉴욬시에 올 때까지 / 나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몇 가지 것을 보았지 / 빌딩들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데 /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다네.”

이러한 그의 경주는 율리시즈와 같은 방식으로 귀향의 추구를 꿈꾸기보다는 결코 완전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끝없는 실존적 여정이 된다. 이 여정은 어쩌면 장소를 규정할 수 없는, 오로지 정신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여정이다.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아득한 옛날)’Time out of mind(1997)라는 음반에는 ‘하일랜즈(고원지대)’Highlands라는 곡이 들어 있는데 이 곡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러나 분명히 희구되고 추구되는 장소에 대한 갈망과 추구를 표현하고 강조하는 절節로 끝난다.

“날이 밝으면 내 마음은 고원에 있다네 / 언덕 너머 저 멀리 /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지 / 나는 어떻겐가 그 길을 알아낼 거야 /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어 /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해.”

중심을, 곧 자신의 히브리적 기원을, 미네소타에 살고 있던 가족을 벗어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싶은 이 간절한 소망은 그의 세계관을 변화시켜, 인간의 능력을 빈곤하게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구조에 종종 알지 못하는 사이 말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로 서로 다른 조망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밥 딜런의 이해는 아래로부터 출발한다. 사람들이 지닌 저마다의 사연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비참한 처지 위로 몸을 굽힌다. 특히 ’60년대와 ’70년대에 발달한 미국 역사의 중요한 현상들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자 오로지 이 관점에서만 출발하여 그는 눈을 든다.

‘톰 페인’Tom Paine 상을 받은 후에 발생한 케네디 대통령 살해를 언급함으로써 대립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1963년 12월 3일의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더 이상 백인도 흑인도 없고, 우익도 좌익도 없다. 오직 위와 아래, 그리고 아래와 더 아래만이 있을 뿐. 바닥에 이르기까지. […] 나는 일반 사람들과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생각한다.”

또 시 11 ‘아웃라인드 에피타프(묘비명 개요)’Outlined Epitaph(1963)에서는 이렇게 쓴다. “감정이 상처 입을 때 나는 그 상처 입은 감정 편에 선다.” 바로 밥 딜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도시 뉴욬에 존재하는 대조이다.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가고 있고 / 빌딩들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네.” 이 사회적 ‧ 도시적 대조는 그에게 하나의 내적 파열의 체험이 되는데, 이는 그의 활동 초기에 저항가요의 노선에 자리한 노래를 통해 밝혀져야 했다. 바로 ‘토킹 뉴욬Talkin’ New York’에서 들을 수 있듯이 듣는 이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져야 하는 가사를 동반하는 것은 오직 기타반주뿐이었다. 단순하고 즉각적인 음악은 마치 말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남겨 둘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어떤 사연을 이야기하는 프레임이 된다. 긴 절節들의 연속에서 반주는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기타의 저음 위에 얹어진 펜 놀림은 기차여행의 리듬을, ‘서부의 광야’로부터 뉴욬이라는 도시에까지 이르는 오래 된 철길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긴 여행에서 거쳐 가는 수많은 역驛들을 알려 주듯이 한 절과 다음 절 사이의 간주에는 하모니카 소리가 동반한다. ‘토킹 뉴욬Talkin’ New York’은 밥 딜런의 경주를 개시하는 노래인데, 그 경주는 인간을 향한 달리기이다. 수많은 모순들 사이에, 몰이해와 계층의 차이와 평화주의적 반란과 무장武裝을 향한 달음박질과 정치적 위기와 전쟁의 야만 사이에 선 인간을 향한 달리기인 것이다.

밥 딜런의 음악적 뿌리는 땅에 박혀 있다. 화물열차를 탄 방랑자요 농민이자 시인이며 화가였던 포크송 가수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도 노래했던 메마르고 쓰라린 땅에 박혀 있는 것이다. 우디 거쓰리는 30년대에 강한 모래태풍의 공격을 받았던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의 광부들과 노동자들과 수많은 주민들의 처지를 묘사했었다. 이 드라마틱한 대기 현상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이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던 에덴의 동산 캘리포니아를 향해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거쓰리가 ‘도레미’Do Re Mi(1940)라는 가요에서 노래하듯이 그들은 거기서 설탕그릇을 발견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돈이 없는 그들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1961년 첫 번째 음반을 낼 때 밥 딜런은 뉴져지에 가서 바로 그레이스톤 파크 병원에 입원해 있는 우디 거쓰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위대한 스승을 기억하며 ‘쏭 투 우디(우디에게 바치는 노래)’Song to Woody를 부른다.

“먼지와 함께 왔다가 바람과 함께 가 버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손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인간 존재는 그 본질과 깊이에서 분석되어 강도 높은 묘사가 이루어진다. 곧 인간은 본질적으로 마음과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마음은 감정이 자리한 곳이지만 히브리적 해석을 따르자면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편 손은 마음에 자리한 열정과 결정에 기초하여 현실을 변모시킨다. 노래에 묘사된 인간은 또한 성서문화에 뚜렷이 존재하는 다른 두 용어에도 연결되어 있는데, 먼지와 바람이 그것이다. 이 두 용어는 인간조건의 연약함과 허무를 상기시키는 상징이다. 하지만 이는 딜런이 노래 하나를 바칠 뿐 아니라 자기 작품의 상당 부분을 바칠 정도로 존엄성을 부여하는 허무이다. 이는 어쩌면 밥 딜런의 가장 큰 사랑의 행위요 가장 큰 시詩와 꿈의 행위일 것이다.


비참한 사람들의 노래
. 먼지와 함께 왔다가 바람과 함께 가 버리는, 마음과 손으로 이루어진 이 사람들은 딜런의 노래 안에서 이름과 성姓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쓰고 고발당한 미들급 권투선수 루빈 카터 허리케인Rubin Carter Hurricane과 같은 경우이다. 딜런은 1966년 6월 17일 뉴 져지의 라파예트 술집에서 세 명이 숨진 살인사건으로 형을 선고 받은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자신에게 보낸 이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쟈끄 레비와 함께 이 이야기를 ‘허리케인’Hurricane이라는 제목의 기다란 발라드로 쓰기로 작정한다. 루빈 카터는 연방법원의 평결을 통해 1985년에 석방되었는데, 연방법원은 그 소송이 인종차별적 동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따라서 살인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선언했다.

발라드는 마치 권투경기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득점으로 이어진 잽처럼 급박한 리듬과 딱딱하고 날카로운 전자음으로 진행되는데, 바이올린과 빠른 리듬의 기타가 연주하는 빠른 음계가 이를 강조한다. 딜런이 실마리를 얻은 허리케인의 자서전의 제목이 바로 ‘열여섯 번째 라운드’The Sixtenth Round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허리케인이 수감생활을 하던 시기처럼 이제는 오로지 절망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만 싸우는, 규정된 한계를 넘어선 가장 힘든 열여섯 번째 라운드. 딜런은 불의가 인간 존재의 열망과 희망을 깨부수며, 이 경우에는 권투선수 세계 챔피언이 될 가능성을 깨부수며 초래하는 실존적 파열을 표현한다.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은 먼지에서 와서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위험에 처한 사람들 위로 덮쳐오는 불의에 맞서 노래한다.

“이것이 허리케인의 이야기에요. / 그들이 그의 이름의 오명을 벗기고 / 그가 감방에 던져진 채 잃어 버린 시간을 되돌려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이야기. / 하지만 그는 한때 세계 챔피언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죠.”

‘비트 제너레이션’과 상징주의 사이에서 딜런은 포크 스타일에 뿌리를 내린 채로 계속해서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 ․ 음악적 추구는 그것을 넘어 가냘픈 바람 한 줄기를 따라간다. 그 바람 한 줄기는 그로 하여금 실험을 하도록 하고 변화하게 하며, 이해받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팬들까지도 그를 부인하도록까지 이끌어간다. 잭 케루악Jack Kerouac과 윌리엄 버로우스William Burroughs에게서 영감을 얻은 미국 비트 제너레이션의 길을 가면서 그는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를 알게 되는데, 딜런은 그와 긴 문학적 ․ 음악적 우정관계를 맺는다. 그가 1976년 ‘최초의 블루스랙스, 발라드와 하모니움 노래들 1971-74’First BluesRags, Ballad & Harmonium Songs를 내면서 “음유시인 구루지 밥 딜런에게”라는 헌사를 붙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언한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미학이 지닌 면들 중 하나가 딜런을 매혹시키는데 이는 즉흥이라는 개념으로, 바로 긴스버그가 제안했던 낭송 중에 표현되었다. 즉흥이라는 요소는 사실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추진력을 영구화하려는 의도였고 그렇게 주장되었다. 하울Howl의 낭송 및 랭보Rimbaud와 베를레느Verlaine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낭송과 더불어 긴스버그의 참여는 버림, 고독, 자신과의 투쟁이라는 다른 실존적 주제들을 더 심화해 가는 데 토대가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강렬한 곡들 중 하나는 ‘쉘터 프롬 더 스톰(폭풍 속의 피신처)’Shelter From The Storm(1975)으로, 이 곡의 가사는 상징적인 표상들로 짜여 있는데, 이 표상들은 어떤 분명하고 확정된 의미 안에 갇히는 일이 결코 없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나는 광야에서 들어왔네. 형체 없는 피조물로. […] 강철 눈을 가진 죽음의 세계 안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싸우는 사람들 […] 나는 탈진상태로 녹초가 되어 우박 속에 묻혔지 / 덤불 속에서 독을 얻어 오솔길로 끌려가네.”

이는 이 노래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리고 삶이 하나의 형벌로 변할 때까지 얼마나 메마름과 무의미에 빠져들 수 있는지를 밝히 보여 주는 구절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광야와 형체가 없는 피조물의 현존은 불명확성의 표현이다. 곧 자연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 주는 물로 적셔지지 않은 땅은 광야가 되고 불모의 장소가 된다. 한편 형체가 없는 존재는 정체성이 없다. 존재의 본질을 특징짓는 그 모든 한계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래는 그렇게 삶의 정신과 반대되는 상황을 묘사하는데, 그 상황은 강철 눈길을 지닌, 그래서 차갑고 비인간적인 죽음의 세계로, 그 안에서 사람들은 따뜻한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 삶은 그렇게 ‘삶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점점 상승하다가 정점에 이르러 수동태의 동사 세 개가 인간 존재 자체의 사형선고를 정의하는데, 그 동사들은 곧 ‘녹초가 되다’, ‘묻히다’, ‘독을 얻다’이다.

하지만 밥 딜런의 인간학은 부정적이 아니다. 인간을 관계를 맺는 순간에 표현되는 사랑의 전달자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어요. ‘당신에게 폭풍 속의 피신처를 줄게요.’” 이는 1절부터 10절까지 각 절의 끝에 나타나는 구절이다. 그리고 한 가운데 있는 절에서 딜런은 이 반복되는 구절의 의미를 밝힌다. “그녀는 무척 우아하게 나에게로 걸어와 내 가시관을 벗겨 주었지.” 인간의 삶에는 폭풍 속의 피신처가 될 뿐 아니라 끌어안아 주기도 하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상적인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과 내밀함으로 인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가시관을 벗길 수 있는 자,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과 인간의 열정(passion)을 연결해 주는 자라는 섬세한 표상을 통해 살아지는 사랑이다. 이는 인간 존재의 근본요소로 인정받는 사랑이요, 땅을 광야가 아닌 것으로, 세상을 인간을 위한 피조물로, 타인을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존재, 자신을 그에게 비추어 보는 존재로 알아보게 하는 근원적 감정으로 인정되는 사랑이다.

하지만 바로 일상의 체험에서 사랑의 부서진 조각들을 체험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딜런은 단순화를 용인하지 않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의무를 느낀다. 곧 “인간이여, 내가 그대의 질문을 이해했는가? 희망 없이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열려 있는 질문으로 수사적이고 뻔한 답을 제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딜런이라는 가수는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어요. ‘당신에게 폭풍 속의 피신처를 줄게요.’” 하고 계속해서 메아리치는 구절 안에서, 그 질문을 바람에 날아가며 진동하도록 둔다. 밥 딜런은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녹음에서는 오로지 기타와 베이스만으로 편곡을 시도했다면 그 후의 라이브 버젼에서는 가사의 몇몇 이미지들과 거칠음을 강조할 수 있는 동시에 책임 있게 살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드라마틱한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전자 기타들을 이용하면서 더 공격적인 편곡을 택하게 될 것이다.


밥 딜런과 ‘종교적 삼부작’
. 이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적 특성을 가진 기독교로 회심한 시기인 ’70년대 말기에 다시 등장하는데, 존재의 의미는 더 긴박해지고 예언적이고 묵시록적인 면들이 어느 정도 강조된다. 이 시기에 인간에 대한 염려가 더욱 더 절박해지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이야기되고 노래로 불리고 살아지고 상상되고 사랑받고 미움 받는 그 수많은 사연들은 ‘슬로우 트레인 커밍(느린 기차가 와)’Slow Train coming(1979)이라는 음반에 수록된 ‘고타 써브 썸바디(누군가를 섬겨야 하리)Gotta Serve Somebody’라는 곡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데,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의 기타가 멋지게 반주를 한다.

“당신은 고급관리일 수도 있고 젊은 사기꾼일 수도 있겠지요 / 당신은 커다란 텔레비전 방송국의 사장일 수도 있고 /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일 수도 있고, 맹인이거나 절름발이일 수도 있겠지요 / 당신은 또 다른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이 시기에 딜런은 듣는 이로 하여금 노래 안에서 이야기되는 사건들에 대해 숙고하도록 끌어가는 실존적 상황들을 묘사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입장을 취하도록 공개적으로 요구한다.

“진정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 할 거예요. / 그것이 악마일 수도 있고 주님일 수도 있죠 / 어쨌건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 할 거예요.”

이 대목은 루카 복음서의 구절을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6,13). 이 구절은 존재와 그 활동에 내밀하게 연결된 신앙과 관련된 선택 앞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가 특히 일부 인간들의 이기심과 오만에 지배당하는 상처 입은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슬로우 트레인(느린 기차)’Slow Train이라는 곡에서 딜런은 소유와 축적의 욕망에 지배당하여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리고 피조물 및 자기와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린 그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 곡식창고는 넘쳐나고 / 오, 당신은 아는가 / 곡식을 내주는 것보다 곡식을 쌓아두는 데 더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이 또한 성경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카 복음(12,13-21)에 나오는 비유, 곧 자신의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을 생각을 하면서 바로 그 순간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 못하는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유를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생명을 사고파는 거래상품으로 간주하면서 양심과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생명 자체를 ‘사물화事物化’하려는 인간의 경향에 대한 딜런의 생각은 그의 초기 걸작들 중 하나인 ‘블로우잉 인 더 윈드(바람에 날리고)’Blowin’ in the wind에 들어 있는 예들의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 어떤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 사람은 대체 몇 번이나 위를 올려다봐야 /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이 깊은 신앙체험은 이른 바 ‘종교적 3부작’에, 곧 ‘슬로우 트레인 커밍(느린 기차가 와)’Slow Train Coming(1979), ‘세이브드Saved(1980)’, ‘샷 오브 러브Shot of Love(1981)’에 반영되어 있으며, 내밀하고 평온해진 발라드 ‘에브리 그레인 오브 샌드(모래알 하나하나)’Every Grain of Sand(1981)의 마지막 절로 잘 요약될 수 있겠다. 이 절에는 종종 정언적定言的이고 굽힐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 이 체험 역시 실제로는 딜런을 또 다시 바람 속에서 답을 듣게 할 하나의 단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바다의 움직임 같은 오래 된 발자국 소리를 들리네 / 이따금 내가 돌아설 때 누군가가 거기 있어. 다른 때는 나 혼자이지. / 나는 인간의 현실이라는 저울에 매달려 있다네 / 추락하는 모든 참새처럼, 모래알 하나하나처럼.”

밥 딜런에게 인간은 항상 답이 없는 질문으로 드러난다.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을 하느님과의 관계처럼. 이 딜레마는 오직 무한자無限者의 향기를 풍기는 은유와 이미지로, 혹은 고독과 심연의 냄새를 풍기는 비참한 사연들로 이야기되고 노래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을 향한 딜런의 시선은 광대한 것들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관통하는데, 이것들은 인간 존재의 복합성이 분절分節하는 지평이요 실존적 자리가 된다. 그것은 딜런이 계속해서 직면하는 복합성인데, 예견할 수 없고 결코 자신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며 항상 되어 가는 것으로서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삶의 의미에 대해 묻도록 재촉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빛과 그림자
. 이 드라마틱한 특성은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아득한 옛날)’Time Out of Mind(1997)라는 음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음반에서는 ‘낫 닼 옛(아직은 어둡지 않아)’Not Dark Yet이라는 곡이 두드러진다.

“나의 인간미는 몰락했다네 / 모든 아름다운 것 뒤에는 모종의 아픔이 있어 왔지 / 그녀는 내게 편지를 썼는데 아주 친절하게 썼더군 /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글로 썼어 / 나는 내가 왜 거기 신경 써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 아직은 어둡지 않아, 하지만 어두워지고 있군.”

이 구절은 상냥하게 쓴 편지로 상징되는 조화로움에 대한 열망과 어둠이 짙어 간다는 느낌 사이의 드라마틱한 긴장으로 진동한다. 한편 반주伴奏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시적인 노래의 가사를 따라가는 떨리는 듯 차분한 목소리를 감싸고 있다. 밥 딜런은 이 모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다른 것이 있다. 그의 노벨 문학상의 수상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입장을 밝히는 데 늑장을 부린 것 역시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래가 복잡한 역사적 시기들을, 특히 ’60년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정치사회적 역사의 시기들을 지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가난과 폭력으로 부서진 수많은 존재들에게 목소리를 주면서 시와 섬세함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노래는 권력보다 사랑을, 전쟁보다 평화를, 독백보다 대화를 선택할 줄을 알았다. 그의 노래는 영적靈的인 것의 탐구를 시도하면서 하늘을 향해 일어섰지만 발은 종종 메마르고 딱딱한 그 땅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아이패드가 꺼지고 나서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메아리치면서 계속 노래하고 바람 속에서 진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