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력을 기르기 위한 도움들

AIUTI PER CRESCERE NELLA CAPACITÀ DI DISCERNERE

디에고 하비에르 파레스 신부(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 집필자)
곽승용 비오 신부 옮김 (대전교구, 대전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 교황은 폴란드 크라코비아의 양성담당 예수회원들과의 사적인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회는 식별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식별을 실천하는 가운데 성장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은 사제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특별히 영신수련에서 받은 선물(식별의 지혜)을 신학생들과 나누며,” 사제 양성담당 예수회원들에게 권고 하였다.

그런데 식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식별과 관련된 좋은 이론적 정의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식별이 선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보다 나은 순간을 찾고 발견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이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인간의 영적 단계에서 ‘보다 좋은 순간’과 ‘보다 구체적으로 적절한 방법’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이는 항상 인간적인 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십자가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 ‘바보’로 보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 ‘어리석음’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교황은 식별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특별한 ‘영적 성장 양식’을 제시한다. 이는 본질적인 사목적인 회개를 위해 출발하는 여정과도 같다. 그 자비의 은신처에는 모든 가난한 자의 구체적인 빈곤과 죄의 모습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 또한 식별의 선물이 있는 은신처에는 모든 사람의 양심, 온 가족의 공동 양심 그리고 구체적인 모든 백성들이 처해 있다. 식별을 통해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인내와 용기라는 친밀한 동반의 여정을 수반한다. 그 조절점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갖는 마음 속 공간이며 모든 양심이고, 자신의 삶에서 선을 계속하든 그렇지 않든 협의하는 것이며 식별하는 능력 안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식별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식별은 무엇보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대수적(代數的) 방법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라는 형식이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고 현존하는 복음을 만나면 이러한 식별이 혼합된 과정의 형식도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은총의 현존 순간을 식별할 수 없는 불가능을 말하면서, 주님이 모든 것을 듣기 위해, -비가 올지 혹 아닐지-시간을 식별하려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단순한 능력에로 돌아오기를 바란다.(참조 루카 12,55) 이점에서 우리가 말하는 영적 식별은 명견 통찰의 지혜로운 인격들에 관련된 정신 활동이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정확하게 그 반대다: 하느님께서 움직이시고 있는 은혜의 순간을 인식하려는 작고 단순한 능력이다.

신약성경이 나타내는 식별은 선을 움직이기 위한 -지혜로운- 인간 능력이 영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참조1코린 12,10)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지혜의 선물을 청한 솔로몬 왕이 실행했던 것처럼(참조 1열왕 3,9-12) 교회에서 식별을 실천하는 가운데에서 성장하는 원리의 첫 번 째 길은 기도하면서 지속적으로 그것을 질문하는 것이다.

결국 식별의 개념 안에 하느님의 구원지평과 여정의 개념들을 포함하는 것이 적합하다. 식별은 선한 원의를 성숙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꼼꼼하지 않은 모양의 세 가지 단계들을 제시하면서 그 과정으로 걸어가게 하지만, 총체적이고 충분한 믿음의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동하기 위한 가지각색의 동기들을 느끼기, 자각하기; 그것들을 해석하기는 멀지 않고 또는 복음적 분별에서 멀어지며; 결과에 따라 행동하기다.

현실에서 원형을 만드는 능력처럼, 그 본질을 위한 식별은 늘 다른 것 그리고 연속적인 조정에 열려있고, 그렇게 바라보기 위한 시선처럼 빛과 외적인 형태에 지속적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비록 식별이 바르게 완성된 모든 길에서 결정적일 지라도, 늘 ‘불완전’하다.

그밖에 식별은 -삶의 모든 것들에서 지혜로울 수 없다- 도움과 확인이 늘 필요로 한다. 도움과 확인은 외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순간을 따라서 보면 구조적 성격을 지닌다: 식별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현실; 그리고 근본적인 모습에서 우리 주님 하느님 그리고 다른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식별은 중립적인 현실과 어려움들 그리고 기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영은 공동선을 위해 제시되는 그 은사와 스타일, 모습을 통해 움직이도록 은총의 그 순간들, 영의 봉사자로서 그 위치를 발견하도록 누구에게나 허락되며, 하느님의 구원지평의 길을 통해 우리를 인도한다.

식별하는 능력으로 성장하는 여정에서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모두를 위해 유용하고 그렇게 영에 알맞으며 이러한 좋은 선물에 관심을 두는 어떤 장애들을 식별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식별에 대해 말할 때, 위험한 상황에서 그것을 맛보도록 돕고 있는 일반적인 어떤 분별 기준을 위로하는 그런 것일 것이다. 셋째는 이 긴 여정을 다른 이들과 동반하고 또는 식별의 과정에 들어가도록 하는 자에게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의해 언급된 도움의 가치와 독창성의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질 것이다.

장애들을 제거하기

첫 번째 실천적인 길은 결국 어떤 장애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식별의 여정에서 위험을 무릎 쓸 때, 글자 그대로 그 길이 《사라지게》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두 가지, 곧 정확하게 그리고 더욱 무거운 다른 유혹(誘惑)들로 나타나는 장애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양식은 《하늘로 그것을 오르게》 하는 것이다. 곧 정말 완전한 사람들만 활용할 수 있고, 뛰어나고 교회적인 은사범주에로 그것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식별이란 엘리트에 한정되고, 수도생활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 또는 사막의 은수자에게 관심사라는 것이다.

길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다른 양식은 “지면을 쓱싹 상쇄하는 것”이다. 선택되는 것들은 《좋은 것들》이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규범에 정상참작이 가능한 예외들이 없이 그리고 늘 모든 특별한 경우를 받게 하도록 주장하는 데 따른 그런 법적인 위치들이다.

식별에서 더욱 필요한 많은 경우들을 배제하는 이런 위치들에 반대해 《그런 목표에 교회의 도움을 수락하면서 은총과 사랑의 삶에서 항상 자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회칙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AL)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식별이 구체화되는 것을 선언하면서 먼저 두 가지 유혹은 결정적인 양식으로 거부된다. 우선 엘리트(지식인)가 아니라 우리가 보듯이 영께서 일치 안에서 하느님의 믿음직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총이다. 그리고 식별은 이론적인 정반대의 극단과 함께 하는 긴장에서 모든 법의 본질을 구성하는 실천적인 극점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강화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분명히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역시 다른 측면에서, 실천의 경우는 법의 이론적인 형식과 함께 완전하게 일치를 이루는 단계에서 식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지성적인 언급에 대한 과정과 의지의 동의가 요약되어 일어난다: 식별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형식화된 법의 적용을 통해 직접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복잡한 현실 상황은 식별의 적합성을 넘어 식별의 의무를 요구한다: 위험한 상황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선을 언급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취해야 한다.

우리가 식별 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해 말할 때, 매우 《통찰력 있고》, 《특별한 경우들 위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신중한 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은 행하는 마음 자체 안에서 스스로 처해 있다. 우리는 늘 판단하는 곳에 위치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의 목적으로서 선을 찾는 것, 악을 거부하는 것.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을 실행하고 판단하기 전에 그곳에 머문다. 우리는 모든 그 복합성 안에서 현실을 음미하고, 협의하기 위해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식별로 부르는 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 선물 받는 선함과 인간이 행하는 선 사이에서 매개하는 길이다. 이 식별의 선물로 성장하는 것이 결정적인데, 특히 이론적으로 표명된 식별들이 다른 페러다임들의 대립 중간에 위치하면서 힘들어 하는 순간에 서 있다. 사람들은 계속 양심을 괴롭히는 결정들을 하도록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본다. 그래서 선한 길 위에서 가능한 방법을 취할 수 있도록 용기를 가질 수 없을 때, 그것은 모두 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하양과 검정의 벽이 어깨를 누르게 한다.

인간은 식별 안에서 자랄 수 있고 자라야 한다. 사랑의 기쁨이 전하고 있다. “또한 종종 우리는 믿는 이들이 자신의 양심을 키워 나가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믿는 이들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에 응답하며 복잡한 상황 안에서도 자신만의 식별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대체가 아니라 양심의 함양을 요청받습니다”(사랑의 기쁨 37). 영적 성장의 보상은 차별이 없는 양식에서 “법에 정신을 기울이는 것”으로 제한될 수 없고, 그것에서 기원된 어떤 일시적인 혼동에 따라 원인이 된 불일치 보다 더 중요하다.

복음은 마치 예수께서 죄인들이 걸어간 길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을 식별하는 육이 되신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갈라진 갈대를 쪼개지 않고, 꺼지지 않은 불을 불지 않는 종의 모습으로 계신다. 그는 선한 길에서 모두가 앞으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비로 용서하면서 비난하지 않고 식별한다. 사람은 사랑을 위해 그리고 순수한 의무가 아닌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도록 인도하는 새로운 여정을 취할 수 있도록, 그는 형식화 된 법을 때때로 뛰어넘으면서, 추상적인 논쟁들에서 빗나가지 않게 식별한다.

식별의 가치를 바라보도록 돕는 다른 기준들

영들의 식별은 요한의 첫 편지에서 그 기본을 찾을 수 있다. 사도는 “아무 영이나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1요한 4,1) 보고 주님 안에서 남아 있도록 권고한다. 진실 또는 영들의 거짓을 식별하기 위한 기준은 강생이다. 마치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단순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하는 것, 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육으로 오신 주님 말씀의 강생의 길에서 온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지만 만일 그 길 위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 첫째 기준, 영적 식별은 관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실천적인 지혜이라는 것이다. 현재 구원 지평의 총체성을 취하지 않는 하느님 의지의 식별은 없다. 역사 앞에서 놓여 있는 자들의 구체적인 식별을 이해하지 않는 구원의 지평은 없다. 교황은 신학자들에게 말씀한다: 《신학자는… 얼마나 믿음의 진리들이 조화롭게 논리 정연하고, 유기적인 일치를 구성하는 지를 보이는 책임을 지게 된다. 그밖에 신학자에게는 우리 시대의 다른 언어들을 해석하고 식별하며, 주의 깊게 청취하고,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빛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과제를 지닌다. 왜냐하면 계시된 진리는 늘 더욱 깊게 이해되고, 더 좋게 이해되며, 더욱 적합한 형식에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또 다른 기준의 열쇠와 동시에 아주 똑같지 않는 진정한 한 가지는, 프란치스코에 의해 인용된 《시간과 순간》에 관해서 이다. 교황이 늘 기억하는 것은 시간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래서 《시간 위에 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 위에 어떤 힘을 훈련하도록 봉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덕은 사실 없다. 시간을 바라보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덕은 “주님에 의해 선물되어야 한다: 지혜이다.”》《속이게 두지 않는 순간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식별과 함께 방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예수께서는 순간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질책한다.(참조 마태 13,28-29) 〔…〕자, 식별은 무엇에 필요하나: 우리가 이 순간에 취해야 하는 길들을 알고, 참 표징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다》

표명은 단순하지만 아주 치밀하다. 시간 위에 지혜가 없다고 말하면서 어떤 모양에서 지성은 추상의 지평으로 떨어지면서 예방된다. 거기서 체계적로 변형되기를 원할 때 난관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 신비의 관상과 지금 여기 이 순간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원하신 길의 식별로 방향이 정해진다. 신학에서 논리는 시간 위에 관념적인 힘을 수련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에서 짊어진 사랑의 논리이다. 단순한 사랑처럼 늘 이해되고 분명하며 항상 놀랍고 은혜로우며 행동으로 움직이고 드러나는 자비로운 사랑의 선물의 논리이다.

3)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식별은 그 구원으로 방향 정해지고 식별을 통해 수락된 그의 동행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영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신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이 함께하는 동행에서 하느님 백성은 예언자들의 백성이다. 성령의 선물을 위해 교회 구성원들은 신앙감각을 소유한다. 영적 본성의 종류에 관해 논하는데, 이는 복음의 영과 사도적 신앙에 적합한 것을 식별하려고 교회와 함께 감각하기sentire cum Ecclesia를 허락 한다. 그러므로 식별은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지니는 삶 자체에 대한 일상의 구조역할을 한다. 이 개념의 깊은 배경에 어린이들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다(침고 마태 11,25-26).

4) 결국 악한 영에 반대하여 싸우는 기준이 있다. 영들의 식별이 비단 인간적인 식별 또는 지혜의 종류로 -또는 아직 더 나쁘게, 깊은 심리학으로- 혼동된다는 것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영성생활에서 악의 행동에 관해서 믿음의 경험과 분명한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언어에서 말하고 있듯이, 실천에서 악을 지명하고 악한 영의 것을 참으로 인격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인격 또는 구조들을 악령화하도록 제시한다.

이 점에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식별을 하는 순간 유일한 도움이 계시된다. 만일 우리가 성 이냐시오의 그리스도중심주의 영성과 동시대 다른 작가들의 영성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전부가 아닌 일부 작가들이 마치 성 이냐시오에서처럼, 그 업적의 그늘은 그리스도 신비의 보다 명백한 빛을 납득하는 모양에서 사탄의 신비를, 그가 신뢰하며 따르는 위대한 전승에서 강조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은총의 모든 주제들이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그들의 일치를 취하는 반면, 죄의 주제들은 사탄의 인격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탄은 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사탄 모두가 동등한 단계 위에 그들 스스로 안에서 생각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사탄의 행동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행동을 더욱 명백하게 납득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리스도의 필요성, 그의 무상성, 지속성 등)

식별의 과정에서 영신수련의 도움

이제 우리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식별의 과정으로 들어가고 또는 이 여정 위에서 다른 이들을 동반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제공하는 가치 있는 도움과 기원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의 복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메시지, 그의 케리그마이다. 영신수련에서 모든 것이 -이냐시오 자신이 고찰한 성경과 관상 그리고 묵상에서 이끌어내는 주제들, 거기에 구조화하는 질서, 식별하기 위한 규칙들, 기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인 조언들, 모든 국면을 위해 안정되는 시간들-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봉사에 목적을 두고 있으면서 각자의 삶의 근본적인 변형 또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수련자들의 기초 위에 영적인 발의들을 야기하도록 응시하는 선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식별의 주제를 제한하려는 제안이 줄어드는 듯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카리스마들이 보편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배제되지 않지만 보충이 되는 다른 카리스마들을 총괄하고 있다. 은총은 영이 공동선을 위해 거룩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신학자이다. 그는 영신수련에서 -무엇보다 먼저 영들과 선택의 식별에 대한 그의 개념에서- 신학을 한다. 신학은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분명히 스콜라신학자들의 방법이 아니라 《참으로 정의를 내리고, 또는 확실하게 하는 신학…》 곧《모든 것 안에서 우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한 애정들을 움직이는… 참으로 적절한 분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처럼 교회박사들의 실증신학방법》에 있다. 이냐시오의 신학은 “모든 것 안에서 우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영신수련 363) 사람을 돕는데 목적이 있는 식별의 신학이다. 이는 이상들의 신학이 아니라 삶을 변화하도록 응시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이 전망들에 관한 교부들과 성 토마스의 권위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특별한 길이 아니라 보편적(가톨릭 전승의 전망)이라고 생각된다. 식별에 관해서 성 이냐시오를 언급하는 것은 교회가 영신수련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한 자에게 거슬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신수련을 실천하는 것은 교회가 특별한 형태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최고로 칭찬할 가치가 있고 아주 유리한 방법들로서 추천하는 그 어떤 것이다.

영신수련의 유연성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특성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 유연성이다. 곧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변화하면서 교회의 선을 위해 양도하는 종의 위치를 선택하면서 더욱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섯 가지 원의를 돕는 유연성을 말한다.

여기서 비오 11세 교황의 제안으로 돌아간다. 곧 교황은 영적 유연성을 위해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권고하곤 하였다: 《모든 계층과 사람들의 조건에 감탄할 만하게 적합한 것》을 위해. 신학이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곤 했는데, 《위(僞) 신비가들의 환상들과 위험에서 먼 영적 교리의 견고함》그리고 《그 부분들의 유기적 일치, 묵상하는 진리들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감탄할 만한 질서》, 이렇게 《해방과 잘못으로부터 기도와 하느님 사랑의 더욱 높은 정점들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힘인 것처럼 그렇게 한다.

같은 선상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양성은 《특별히 사제들에게 법규를 존중하는 사목적 식별의 역동 안에서 영신수련의 빛에 도움을 주기 위해 변혁으로 가지만, 그 밖에로 갈 수 있다. 이것이 원형을 만들도록 하는데 첫째로 있어야 하는 동반을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

식별을 준비하는 걸음들

영적 식별은 자치적 주체의 개별적인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선을 위해 교회 안에서 가장 낮은 종의 위치를 선택하고 개혁하는 자의 가장 인격적인 행동이다. 곧 누군가를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변화 또는 삶의 상태를 선택하기 이전에, 교회의 삶과 구세사의 삶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복음적으로 적응하는 양식을 선택하도록 준비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첫 주간 구조에서 우리는 삶의 식별에 아주 적합하게 준비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냐시오는 우리의 삶을 잘 변형시키고 선택하기 위해 조절해야 하는 무질서한 애정들과 죄에 관해 묵상하도록 한다. 보다 넓은 구조에서 죄에 처하는 모양은 우리의 사고 덕분이다. 이냐시오의 시선에서 각자 지은 죄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죄들을 증오하도록 이르기 위해서는 이전의 걸음과는 다른 연속적인 것이 필요하다. 이전의 걸음은 창조와 그 역사의 긍정적인 시선을 회복하고 강화하는데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들을 창조하셨다. 그의 정화는 바깥에서 오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선함과 관련된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냐시오가 《기초와 원리》에서 창조의 긍정적인 이미지-찬미와 경배에서-를 되찾게 한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영신수련23).

이 회개에로 가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걸음이 있다: 죄들에 대한 묵상은 지옥의 묵상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하신 왕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함께 마친다. 이것은 《부르심 받은》열쇠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소개하면서 첫 주간과 계속되는 주간 사이에 요점에 의해 시작하는 묵상이다. 이냐시오가 원하는 것은 이 묵상에 내적 일상이 봉헌되는 데 있다. 강청하고 절박한 주님의 부르심 없이 -사실 모든 세상의 구원은 위험한 상황 안에 있다- 죄의 심오함과 복합성은 축복의 길 위에서 누군가 단지 주님을 따르도록 생각하는 모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전에 정화의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다.

마치 죄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듯이,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영신수련의 신학적 구조에서 두 개의 긍정적인 현실들 사이에 있는 관계다: 창조 그리고 구세주의 부르심의 그것이다. 마치 프란치스코가 항상 말하듯이, 사도적인 희망과 은혜로운 기억의 전망 안에서 자리를 잡는다.

이냐시오의 이 구조는 기초적인 식별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의식성찰을 하면서 그날의 목적이 되는 식별의 실천을 조명하고 그 원형의 틀을 만든다. 영적 의식성찰은 보다 넓게 고해성사를 위한 것이 된다.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와, 주님에게 큰 영광을 위해 주님께 방향을 전환하는 구체적인 부르심에 따라 원형을 묘사하고 본뜨면서 삶을 변화하고 수정하도록 의도하고, 매일 수여받은 은총을 식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별하는 공간이 조금 제공될 때, 개선해야 했던 것의 식별은 복음적인 그의 뿌리를 잃는다. 선한 많은 계획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르신 은총 충만하고 구체적인 무엇을 잘 경청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의 부족 정도와 같은 판단의 부족이라는 현실이 될 수 있다.

모든 식별의 구성으로서 행복들

삶의 상태를 선택하거나 삶을 변화하기 위한 식별은 단순하게 인간적인 이익과 불이익의 기준들을 따르면서 얻지 못한다. 그 대신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듯이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다룬다. 그래서 준비된 큰 틀 밖으로 우리가 본 영적 식별은 더욱 적합한 각오를 다시 요구한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는 예수님의 모든 삶을 관상하면서 특별하게 이 적합성에 보존된 그의 묵상들을 선택한 다음 그 준비를 구조화 한다.

우리가 좋은 결정을 하고 식별을 잘하도록 균형을 이루는 것은 인간학적이고 신학적으로 견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로운 행동은 선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면서 목적을 갖고 명령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천적인 위탁과 초대에 순종한다. 그것에 《영원한 왕의 관상》이 도우며, 그 왕은 그의 구원지평에서 가장 낮은 종의 위치를 발견하도록 모두 그리고 누군가를 부르신다.

지성의 협의는 선택한 것을 정리한 범주가 소개될 때, 강화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천적인 두 가지로 환원된다. 그 순간 지성은 강화되고, 외적 선택의 자유에 대한 다양성 이론을 내세우도록 할 필요 없이 그의 정감에 시선을 보낼 수 있다. 이에 두 개의 깃발에 관한 묵상이 도움이 되는데, 그 속에서 어떤 중립적인 선택의 자유가 없는 드라마틱한 방법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놓이게 되고 또는 악의 깃발 아래 남게 된다.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총애하는 사랑은 선의 선택을 미루고, 단념하기를 원치 않은 유혹의식을 취할 때 강화된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은 단념을 견디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사람들의 세 가지 범주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데, 그 묵상은 우리가 정말로 자유롭고 선을 선택하는 단계에 있는지 식별하는 것을 돕는다.

다른 모든 선들 위에 인간들을 위한 절대적인 최고의 가치로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참 사랑이 아니면 다른 매력 없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빛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위한 특별한 모양에서- 생명의 결정을 취해야 하는 자에 대해 식별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분명하도록 허락한다. 겸손의 세 단계에 관해 사고를 하도록 돕는데, 그 단계들은 그리스도에게 총체적 동의 안에서 마음을 따르게 하며, 보게 하고, 거기서 무엇인가 비용이 들고 또는 비위가 상하기도 하는데, 어떤 다른 것을 위해서는 더욱 겸손하고 가난한 그리스도를 위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식별이 영적인 행복 안에서 이뤄지고,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어떤 결정이 행복 안에서 자라도록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을 확인한다.

선하고 건강한 선택은 추인을 얻는다.

보통의 삶에서 -예를 들어 노동에서- 무엇인가를 식별하고 선택할 때, 선한 선택은 일반적인 경과를 책임지는 사람과 결과들로부터 오는 추인을 요구한다. 모든 선한 인간적인 결정에서 추인이 이뤄지는데, 이 관점에서 부정적인 결말들을 직면하게 하는 능력은 모든 결정(단념, 배제, 이상, 또는 대조적인 태도…)들, 다른 점에서 이뤄진 선택으로부터 유래되는 풍요를 위해 기뻐하고 즐기는 능력과 함께 연결되었을 것이다.

한 번 선택한 영신수련은 장애들을 견디는 능력과 현실을 단련하는 그런 모양으로 주님의 수난과 함께 비교하면서 그것을 추인하기 위한 도움을 제공한다. 영신수련은 부활의 관상과 함께 앞날에 있을 원조를 제공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행복과 함께 각자의 선택에서 출발하도록 조화를 이루는 능력은 선택 또는 잘 이뤄진 변혁을 완성한다.

사실 영신수련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영신수련 230-237)과 함께 식별의 추인을 위한 도움을 제공한다. 이는 이냐시오 영성의 전형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 주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발견하고 찾는 것을 뜻한다. 이 평화는 보다 좋은 상태의 추인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에서 부활하고 영광되신 주님의 현존 경험을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