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유혹과 하느님의 유혹

LA SEDUZIONE DEL MONDO E LA SEDUZIONE DI DIO

벤자민 곤잘레즈 부엘타 신부(예수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옮김(전주교구, 광주가톨릭대학교)

유혹의 문화

우리가 유혹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근대 시대의 위대한 유토피아,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쇠퇴한 이후 절망의 의미는 근대 이후 사회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많은 노동과 왜곡된 환상은 사라졌다고 본다. 곧 많은 노동과 왜곡된 환상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를 고아로 느끼게 하는 내면의 공허함과 삶의 초월적인 차원의 상실 앞에 두 가지 허황된 큰 계획, 곧 소비주의와 쾌락이 생겨나 다시 세상의 넋을 잃게 한다.

소비주의는 엄청난 발명품으로서 주머니에 약간의 돈을 가진 사람이 있는 그런 세상 구석구석에 이른다. 소비주의의 상징은 대형 상업 중심가들로서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입고 여행하고 즐기는 방법을 만들 수도 있다.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모두 삶의 스타일이다. 대형 상업 중심가들 안에는 여러 색깔과 조명 그리고 거울의 효과로 진열된 제품들이 풍부하게 제공된다. 그 안에는 긴장을 풀어주고 시간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제품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 음악과 함께 냉난방 설비를 통해 세련된 향기가 보이지 않게 흐른다. 약속된 땅과 같고 그런 공간은 우리의 필요한 물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고 한다.

두 번째 큰 계획은 쾌락, 오락, 즐거움이다. 하루 24시간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영화, 음악, 스포츠 행사와 온갖 형태의 공연들과 즉시 연결할 수 있는 전자제품들이 우리에게 제공된다.

현대 문화의 새로운 신(神)들이 생겨났다. 더 이상 영웅들의 시대가 아니고 순교자들의 시대도 아니다. 오히려 유명인들, “명성”있는 이들의 시간이 도래하였다. 유명인들과 명성 있는 이들은 그들의 공적이나 색다른 언행으로 전달 수단에서 놀라운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소비제품과 오락제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텔레비전(TV) 제품과 정기간행물 홀에서, 녹화방송 스튜디오와 연구소들에서는 계속해서 새롭고 강하며 지능적인 느낌을 주는 제품을 정교하게 만든다. 그런 느낌을 주는 제품은 감각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내부로 파고들며 상점의 자극을 받는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나 인위적인 구미에 항상 열려있는 틈새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온갖 느낌은 정교한 방식으로 연구되었다.

호텔의 향기, 진공청소기의 소음, 씹을 때 바삭 바삭거리는 소리 또는 천이 찢어지며 나는 소리, 호화스런 자동차의 문을 닫을 때 나는 소리는 완벽한 느낌을 얻을 때까지 전문가들에 의해 정교하게 만든 요소이다. 아무것도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술가의 바구니에서 빠져나온 것과 같은 특수 효과로 유혹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자세하게 연구하였다. 특수 효과는 우리를 속이고 현혹하여 이성을 잃게 한다.

신경 마케팅(역주: 제품 마케팅에 노출되었을 때 뇌의 반응이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신경학 연구를 말한다)은 현대 기술의 아주 현란한 수단을 통해 어느 방식으로 느낌이 인간의 두뇌에 도달하는지 연구한다. 그런 연구는 우리의 대답과 결정을 구체적으로 완성하는 곳이며 감정에 지배받는 잠재의식의 내면까지 직접 다가서는 느낌을 탐구하는 것이다.

광고는 무엇보다 몸과 감정에 호소하면서 이성을 작용하지 못하게 하여 이미 계획된 대답을 얻으려고 한다. 광고는 우리를 통해서 결정한다. 우리는 자판만 클릭하면 된다. 우리는 오로지 느낌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미끄러진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 “우리는 강요받고 흘러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열정이 약한 세상에 살고 있다”(앤토니 가이던스A. Guidens).

우리의 문화는 항상 서둘러 살고 우리의 내적 필요에 대한 만족을 뒤로 미루며 오늘 미리 알려지면 내일 우리 상점들에 도착할 신제품에 대한 만족을 기대하도록 한다. 그 속도는 내면보다 더 친숙하지 않다.

이런 유혹의 문화에서 오로지 감각을 감지하는 것들만 중요하다. 그러므로 겉모양에 관심을 집중하고 유사한 것을 존재 앞에 둔다. 몸과 감정적인 잠재의식 상태가 유혹의 열쇠로 변질되는 반면에 사고는 미약하고 결정은 불안하다. “아니오”라는 말도 못하고 “예”라고 말하며 부부와 우정, 단체와 노동에서 취한 약속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한다.

이런 시간들에 대한 도전은 예수회 심리치료가 카를로스 도밍궤즈 모라노(Carlos Domínguez Morano)에 의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모든 현대 심리학이 유혹의 개념에 제시하려고 결정한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 중요성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신화라고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의 자아도취가 전제하고자 하는 내용 그 이상으로 우리의 행위는 외적 자극에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이 분명히 입증되었다. 우리의 내면적인 특성은 매번 우리가 빠져드는 자극의 현장을 대신하여 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복음화한다면 실재의 가장 심오한 차원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나쁜 행위는 이 시간을 거부하고 접근할 수 없는 탑 안에, 불가능한 무균의 거품 속에 우리를 가둬놓도록 하는 것이며 가면을 쓰고 거리를 산책하며, 거절과 비난의 행위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면서 이런 우리의 유혹 문화에 맞서 거칠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끝났는가? 새 생명의 제물을 완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상상력은 고갈되었는가? 매혹적인 느낌을 주는 창조주들은 다가오는 세상을 계획하는 독점권을 갖고 있는가? 하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은 이런 문화에서도 활동하신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새 인류를 만들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는 백성과 문화, 종교와 인간적 상황,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신중하게 설명하는 그런 곳에서 우리는 거룩한 영의 계획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집에 이르는 전자 단말기들에서도, 유명상표가 부착된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도 거룩한 영은 현존하게 된다. 그러나 거룩한 영을 감지하는 감수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도전은 실재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열려 있는 모든 우리의 감각을 통해 실재에 접근하여 매혹적인 겉모양의 무가치한 것을 보고 생각하여 해결하며, 실재의 깊은 내면에서 무한한 창조 행위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능동적인 현존을 감지하면서 실재를 보고 느끼며 맛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함께 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를 괴롭히는 악행을 고발하는 예언자들만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다시 어떤 것을 창조하고 계시는 그런 곳을 발견하는 신비주의자들도 필요로 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막연히 언급하는 것만 아니라 그분께서 순간마다 삶의 줄거리를 다시 완성하시면서 활동하시는 장소와 방법을 나타내는 것도 필요하다.

사회는 개인적인 타락, 불의와 온갖 형태의 소외로 더욱 세속적으로 파괴된 실재들 안에서 신비적인 감수성을 갖고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냐시오 영성

초기 예수회원들이 길목과 광장과 거리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수도자들이오? 수도승들과 수도사들은 회랑과 경당이 달린 개별 수도원이나 단체 수도원들에서 살며 그들 신앙을 양육하고 그들이 관상한 내용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여러분은 수도승들이나 수도사들처럼 집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잖소?” 나달 신부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문장 하나를 만들었다. “세상이 우리 집이오.” 다른 수도자들이 수도원의 회랑을 거닐면서 아름다움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처럼, 예수회원들도 도시의 떠들썩한 거리와 황량한 도로에서 그리고 그 시대의 지리와 종교 그리고 문화의 국경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 시대는 마치 우리의 세계가 신세계의 발견과 함께 교회와 정치, 종교와 지리의 대변화로 요동치는 것과 같다.

이런 소명의 은총은 카르도네르(Cardoner) 강가의 끝자락에 앉아 있었을 때 만레사(Manresa)에서 겪은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체험에서 미리 알려진 것으로 드러난다. 이냐시오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듯한 그런 큰 깨달음을 체험하였다. 그는 새로운 눈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았으며, 새로운 눈을 가졌다. 그의 체험은 시각의 변화였다.

라이네즈(Laínez) 신부는 그런 이냐시오의 체험을 해석하면서 “이냐시오는 특별한 방식으로 존엄하신 하느님의 도움을 받고 소식을 얻으며 내적으로 깨달아, 다른 눈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는 하느님을 관상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온갖 사물과 모든 장소에서 매우 쉽게 신심을 느꼈다.”(J. 나달).

이냐시오는 자신의 작품 「영신수련」에서 사랑에 이르는 관상에서 자신의 체험을 제시하였다. 사랑에 이르는 관상은 모든 실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실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모든 실재를 관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사랑에 이르는 관상은 실재의 투명함이고 맑음이다. 이는 예수께서 니코데모에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해 준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제공되는 선물이다. 곧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계획에 따라 우리 삶을 조정하기 위하여 마음과 내면적인 감정을 바꾸어 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장소와 방법,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방법을 일상에서 감지하기 위하여 감수성도 바꾸어 준다. 그럴 때에만 그분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의 중심 자체에서 순간마다 솟아오르도록 하는 절대적인 새로움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고 그분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이 끝나는 곳, 하느님의 손이 시작하는 곳, 그리고 두 손, 즉 인간의 손과 하느님의 손이 결합되는 방법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서로 갈라놓을 수 없는 신비주의의 두 차원이 등장한다. “닫혀 있는 눈의 신비주의는” 충만한 ‘주 하느님’과 이런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충만한 ‘주 하느님’ 안에 머무는(요한 15,1-17 참조)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영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열려 있는 눈의 신비주의”는 모든 실재의 최종 진리이신 하느님을 관상하도록 해 준다. 모든 실재는 아름다움과 파멸, 죽음과 탄생, 번제물과 카인의, 우리의 것과 우리와는 서로 다른 것과 연관된다.

고독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마음을 변화시키며, 그때 우리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하느님을 바라본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눈을 주시한다. Ubi amor ibi oculus, “사랑이 있는 그곳에 바라볼 능력이 있다”(성 빅토르San Vittore의 리카르도Riccardo). 사랑은 실재의 파멸 “아래에” 그리고 실재의 신비스러운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느님을 관상하도록 해 준다. 실재의 내면을 향한 모든 움직임은 모든 피조물을 맞이하는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더욱더 파고들도록 해 준다. 그 다음에 우리가 개인적인 관상으로 돌아설 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움직이는 공간의 어느 것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신비를 향한 새로운 감수성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자라나고, 매일 고유한 관심사에 따라 실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서만 사물을 바라보려는 공간에서 자라난다. 실재의 표상은 그 자체로 이익을 창출하고,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며, 공연에 대한 매력을 끄는 성향을 갖고 있다. 실재의 표상이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 시대의 실재를 지켜보시고 그분이 바라보신 것을 말씀하셨을 뿐, 회당에서 라삐들이 그분에게 바라보도록 가르쳤던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이사야는 바빌론에서 수년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유배 생활에 의해 억압받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였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 보는 것, 알아보는 것은 감각과 감수성에 대한 언급이다. 재능 있는 어느 한 예술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 예술가가 표현하는 예술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이 작품이 암시하는 인간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때때로 대화, 얼굴, 노래, 일, 궁핍 등과 같이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만 알아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때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기쁨이 우리 마음  속에 솟아난다.

「영신수련」에서 “눈 먼 상태”(「영신수련」 106항 참조)로 움직이는 사람은  예수님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활동과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 활동하시는 새로움을 바라보도록 인도된다.

실재의 존경

때때로 종교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멀리하고 동떨어진 생각에 잠겨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웃, 친구, 종교 의식, 세상의 아름다움은 하느님과 영혼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후에 비실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때 처음에는 단지 꿈에 불과했던 일들이 실재가 된다”(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실재를 감추고 실재를 존중하지 않는다. 즉 하나는 우리가 실재를 이상화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를 악마화할 때이다.

때때로 우리가 실재를 이상화하는 데는 전반적인 그의 견고함에서 실재를 바라보는 것을 참지 못하거나 약점을 바라보지 않을 만큼 실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가 실재를 악마화하는 데는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상황에서 좋은 것을 바라보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념화할 때 빛나는 색으로나 악마화할 때 어둔 색깔로 물들일 때 우리는 실재를 부정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활동 또한 이런 상황의 밑바닥에 감추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각각의 모습은 학문적인 수단을 통해 밝혀진다. 단지 현미경을 통해서만 물속에 있는 박테리아를 볼 수 있다. 반면에 단지 관상에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차원들도 많다. 관상을 통해 시선은 외적으로 덮여있는 것을 벗겨내어 내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학문적인 시선은 병든 영혼을 지니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어느 한 사람의 모든 특징을 진술할 수 있지만, 관상적인 시선은 하느님의 어느 한 아들이 지닌 무한한 품위를 느끼고 맛볼 수 있다. 이런 발견은 엄청난 효력을 지닌 역동성을 일깨워 줄 수 있다.

열려 있는 눈을 지닌 신비주의가 최고의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실재의 겉모습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대단히 자유롭게 쉬지 않고 활동하시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최종 진리도 바라보기 때문이다.

세상 유혹의 헛된 시도들

소비주의, 쾌락이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은 우리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현혹적인 광경을 만들 수 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모이게 하는 스포츠 대(大) 행사, 정치 캠페인, 대(大)연주회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참여를 이끄는 현란한 기술을 통해 완성된 과대광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표명들에서 몇몇 종교적 이유를 듣게 되는 것에 놀라지 않는다. 때때로 몇몇 종교적 이유가 명확하게 지지를 받는 이유는 오늘날 소집하고 환영하는 스포츠 행사의 역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중국 올림픽 대회의 개막식은 유토피아를 기리는 탁월한 비유가 되었다. 모든 인종이 지닌 독특한 특징과 그들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복장을 입은 대륙의 많은 민족들이 인종차별과 속임수 없이 깨끗한 경기를 기원하며 서로 경쟁하기 위하여 단 하나의 노래와 리듬에 맞춰 공통된 대축제로 결합되었다. 그곳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탁월한 세속적인 비유를 숙고할 수 있다.

분명 많은 예식들 안에서 우리는 단편적인 예술을 통해 매우 인간적인 삶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은 우리 존재의 최상의 것을 표현하는 예술가들과 사람들 안에 머무시지만, 광경의 흐름을 움직이는 관심과 조작이 뒤엉켜 있어서 성령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참으로 세상의 넋을 잃게 하려면 아름다움, 곧 잘 정리된 것, 빛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약함, 오늘날 수백만 명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물처럼 용해되어가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고통의 실재주의 또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관심을 없애고 기억을 지우려고 행하는 많은 예식들이 있다. 일부 음악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마약이 붉은 양탄자 사이에서 퍼지고 화면의 반짝거림에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과 같은 참된 예식은 쾌락과 과오로 얼룩진 일상생활에 빠진 인간 생명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인간 생명을 십자가의 가혹함에서 부활에서 생명의 변화로 이끌어준다. 생명에 대한 어떤 괴로운 시련도 축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잔치의 비유(루카 14,15-24 참조)에서 벌어진다.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재산도 집도 없이 버림받은 이들을 데려오도록 하여 그들을 집안에 들여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각자 개인적인 수입에 만족하는 이들은 이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주위를 계속해서 맴도는 대중적인 대형 서커스는 표상들과 매혹적인 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파고든다. 서커스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실재에서 멀리 벗어나 긴장을 풀고 근심과 불안을 떨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안다. 서커스는 하느님께서 오늘날 한정된 우리 인류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보여주시면서 이루시는 것을 관상하고 인정하고 거행하는 것에 우리의 시선이 멈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아침 일찍부터 독한 술을 찾아다니고 저녁 늦게까지 술로 달아오르는 자들! 그들은 비파와 수금, 손북과 피리 소리와 더불어 술을 마셔 대면서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이사 5,11-12).

우리는 우리 감각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유혹의 문화에서 우리는 실재를 감지하는 방법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이해하고 내면화한 내용에서 우리 감각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만큼 백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혹적인 느낌”이 우리를 가로지르고, 우리는 가속화된 리듬, 우리 안에 “성급한 애정”을 자아내는 찰나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화면과 이어폰에 지속적인 의존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차분하게 생각하고 비교할 겨를도 없이 정보와 광경을 소모하는 “시청각 약탈자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더욱더 강렬한 자극은 우리의 감수성을 나약하게 하면서 성령의 현존과 계획의 명암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많은 선물에 의해 다그치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아니오”라는 말을 못하고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선택을 항상 열려 있는 상태로 놔두면서 우리 삶의 마지막까지 근거 없는 일만을 성취할 수 있다. 현재의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감정의 이단”이며 이런 유혹의 문화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시고 있는 새로운 것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각성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이 멀 수 있다. 라오디케아Laodicea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잘 보기 위하여(묵시 3,18 참조), 하느님을 관상하는 대로 실재를 바라보기 위하여 안약을 필요로 한다. 성경에는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면서도 더 좋은 시력을 돌려주는 안약들이 많다. 첫 번째 안약은 욥이 잿더미에 앉은 곳, 곧 오물이다. 건강과 명예, 부귀와 안정된 가정을 누리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본 다음에 욥은 모든 것을 잃는다. 잿더미에서 백성의 불행과 하느님의 다른 표상을 본다. “당신에 대해서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두 번째 안약은 광야이다. 초연함과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대단히 명확하게 보인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당신 백성을 보시고 당신의 원래 계획을 찾아내시며 유혹을 극복하신다. 세 번째 안약은 이 될 수 있다. “나는 내 감각이 예민해지는 어둔 시간에 나의 존재를 사랑한다”(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밤에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러 오시지만, 도둑 또한 우리의 물건을 훔치러 온다. 우리는 우리의 감수성을 연마해야 한다. 끝으로 네 번째 안약은 감시탑이며, 도시의 국경에 보초가 세워져 있다. 접근하는 사람이 친구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는지 아니면 그가 원수이고 우리를 파괴하러 왔는지를 바라보는 관상의 소명이다.

하지만 참된 안약은 예수님의 관상이다. 예수님을 관상하는 사람의 모든 감각은 그분에 의해 깨끗이 정화되었다. 그와 같을 때만 오늘 실재의 내면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

실재에 휩싸이지 않는 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멀리서, 특별 무대에서 실재를 관상할 수 없다. 오히려 실재에 휩싸이면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매일 노동 안에서 실재를 관상할 수 있다. 언제나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우리의 활동이 그분의 활동과 결합되도록 우리 또한 활동해야 한다.

이사야 58장은 우리를 밝혀주는 기준점이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친 제사와 제물에도 하느님께서 그들 목소리에 귀담아 듣지 않으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가난한 이들과 사로잡힌 이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대답하신다.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어디요?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이사 58,10), “너의 상처가 곧 아물리라”(이사 58,8).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의 내면생활은 회복되고 그의 활동은 사회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리라”(이사 58,12).

“그리스도인의 신비주의적 차원이 수반하는 위험을 피하려면 선천적인 윤리-정치적 차원을 그 안에 보완할 필요가 있다”(후안 마르틴 벨라스코Juan Martín Velasco).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Teilhard de Chardin)은 그런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쁘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현재의 순간, 활동과 행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어느 모로 내 펜의 끝에, 내 곡괭이의 끝에, 내 화필의 끝에,  내 바늘의 끝에, 내 마음의 끝에, 내 생각의 끝에 머무르신다. 내가 전념하고 있는 특징, 돌발 행위, 점을 자연의 최종 완성까지 동반하면서 나는 내면의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관상은 복잡한 일도 수반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일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반응에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2). 실재를 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면서 인간의 고통을 진정시켜야 한다.

우리가 인간적, 개인적이나 사회적 고통을 진정시키고 그처럼 하느님을 발견하는 반면에, 우리는 수백만 명을 실재 밖에 놔두며 신체적, 심리적, 관계적인 고통의 개인적인 과정을 무시한다.

라이네Lainé의 피난민 수용소에는 서로 다른 업무를 수백 명의 피난민들에게 맡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총알에 맞은 친구들과 친척들과 지인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니 코나크리Guinea Conakry 지역의 피난민들을 위한 예수회원들의 서비스 총괄 국장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피난민들은 계속해서 노래하고 춤추며 평화와 새로운 시작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말하였다. 내 눈 앞에서 운명의 가장 많은 돌을 맞아 죽은 존재들이 투석형의 마지막 돌을 새 집의 초석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것 가운데 하나는 내 삶 안에서 볼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지 지금도 묻고 있니?”.

이것이 열려 있는 눈의 신비주의의 핵심적인 도전이다. 여느 모로 외형적으로 하느님의 부재가 있을 수 없는 그곳에서 활동적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소란스럽게 보인다. 가장 소외받는 지역에서 감탄할만한 복음적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형성된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자유롭게 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인간적인 낮춤이 없다.

위대한 사랑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인간 상황의 한계까지 하느님의 나라에 전념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다른 표상을 만난다. 우리는 멀리 계시는 하느님에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으로, 강한 하느님에서 나약한 하느님으로, 처벌하시는 하느님에서 처벌받는 하느님으로, 무감각한 하느님에서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하느님으로 건너간다.

실재는 명백해진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하느님의 현현만 아니라 모든 것의 명백함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장 어려운 상황들이 명백하게 드러날 때에만 이루어질 것이다.

둘체 마리아 로이나즈(Dulce María Loynaz)가 자신이 만든 아주 짧은 시에서 “이 빛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어둠 또한 조명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열려 있는 눈을 지닌 신비주의자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내면의 밤과 역사의 밤을 건너갔다. 마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의 빈 무덤에서 생겨난 것처럼 그들은 어둠과 넌센스 안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체험을 통해 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느끼고 맛보는 새로운 표징들

실재가 우리를 위해 명백해지는 곳에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가 생겨난다. 고통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분을 만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에 어울리기 위해 손을 펼쳐 소유하려는 것을 막는다.

우리는 온 세상이 이해하는 보편적인 “성사들”을 만난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장례식에서 일상생활에서는 원수로 지냈던 이들, 곧 회교인들과 힌두교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로 일치되었다. 예수님과 그분의 뒤를 따라 많은 이들이 나중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은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만레사에서 이냐시오가 체험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 안에서 과거와 미래의 삶을 구별해주는 교차점의 “성사들”을 체험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작은 “성사들” 또한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작은 성사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을 부드러운 빛으로 채워준다.

강의실, 주방, 우리가 머무는 거리, 업무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회랑, 공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에 예수회 총장이었던 콜벤바흐Kolvenbach 신부에게 그가 기도할 때 동방 이콘들을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묻자 그는 “아니오. 그 이콘들이 저를 바라보던데요.”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는 범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통상적인 공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삶을 의미로 칠하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면서 살 것이다.

새로운 관상적인 감수성

우리가 진술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감각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본다. 풍경 앞에서 화가는 모든 색을 볼 것이고, 건축기사는 가능한 도시화의 설계를 볼 것이며 생태학자는 보호해야 할 종류를 볼 것이다. 눈에 쌓인 풍경 앞에서 우리는 하얗다고 말한다. 하지만 항상 눈과 얼음 사이에서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눈을 가리키기 위해 열 개 정도의 이름을 갖고 있다. 관상가는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생명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계속적으로 활동하는 곳에서 실재의 마지막 차원을 볼 것이다.

실재를 감지하는 이런 방법은 절망해서 우리를 부동적이고 슬프게 만드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삶의 특별한 역동성을 일깨워 줄 수 있다.

성 이냐시오는 자신의 작품 「영신수련」에서 예수께서 오감을 통해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셨던 방법을 관상하도록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흩어진 실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백성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우리가 진술한 이런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하여(요한 3,3 참조) 다시 태어나도록 해준다.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세속적이지 않다”(떼이야르 드 샤르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