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테러리즘, 전쟁

RELIGIONI, TERRORISMO E GUERRA

피에르 드 샤랑트네 신부(예수회, 지중해 가톨릭 연구소)
임숙희 레지나 옮김(영성신학 박사)

국제적인 현상 안에서 종교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종교는 인도부터 이슬람 국가, 미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문화적 콘텍스트이다. 종교는 다른 어떤 ‘하드 파워’보다 잠재적으로 더욱 강력한 ‘소프트 파워’이다.

작년 이 잡지에서는 종교와 외교 관계의 구체적인 사례로 이탈리아와 교황청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 곧 1911년에 일어난 리비아 전쟁과 비오 12세의 유럽 건설에 관한 토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새로운 ‘소프트 파워’ 형태로의 모험을 무릅썼는데, 그것은 바로 영향과 의식이다.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많은 것들이 바뀌었음에도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그리고 2015년 12월 2일 미국 샌버나디노San Bernadino 공격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이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하게 됐다. 테러행위를 전쟁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유형의 전쟁인가? 이 새로운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최근 몇 년 간 자주 발생한 공격에 관해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사용됐다. 이런 국제 관계의 변화는 모든 종교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종교가 이런 유형의 충돌에 개입되는 것은 테러를 자행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종교를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에 직면할 때 종교 간의 협력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까?

이 글에서는 먼저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표현을 분석해야 한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과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종교가 평화 추구를 위해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전쟁으로서 테러리즘’: 잘못된 정의

테리리즘을 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전쟁은 파악 가능한 적대관계이며, 일반적으로 각자 자기 군대를 보유한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무력을 행사해서 충돌을 일으킨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충돌은 구체적으로 정해진 지역에서 발생한다. 영토를 점령하거나 정복하려는 의도로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영토, 혹은 두 나라 국경에서 일어난다. 이 충돌은 전쟁 선언이나 군대 파병 권한을 가진 국회의 투표로 시작되고, 교전국 중 하나의 항복으로 끝난다. 협상 후에 양측에서 서명하는 조약이 이어진다. 이러한 조약이 강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는 테러 공격은 이런 의미의 전쟁은 아니다. 테러 공격은 누가 그런 행위의 책임자인지 알 수 없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스스로를 전사라고 여기는 민간인들이 테러를 감행하고, 무엇보다도 이 전사들은 다른 민간인들을 공격한다.

테러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언하는 절차도 없다. 테러 공격은 어떤 장소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수년간 계속될 수도 있다. 우리는 15년 이상을 테러 공격과 함께 살고 있지만, 테러를 지시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테러 목표로 삼는 적대자들이 어디에 사는지, 언제 공격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2011년 5월 2일에 파키스탄에서 빈 라덴Bin Laden을 사살했지만, 그를 죽였다고 해서 이런 테러의 전반적인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는 테러 행위에서 더욱 복잡한 것은 지역 전쟁과 테러의 글로벌화가 혼합됐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리아와 리비아에서 명확하고 파악 가능한 적대자와 싸우는 지역 전쟁―이시스ISIS 또는 대시Daesh―과 알카에다Al Qaeda와 이시스, 또는 보코 하람Boko Haram, 아크미Aqmi 등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닌 여러 집단이 자행하는 테러의 글로벌화가 뒤섞여 있다.

시리아와 리비아의 지역 전쟁은 여느 영토 전쟁처럼 다뤄야 한다. 이라크 무장군들과 국제적인 연합은 이시스의 무력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든 공격하면서 이시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있다. 팔미라와 팔루자 수복 후 모술을 손에 넣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적대자들에게서 위 도시들을 해방시키기를 희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일말의 토론이나 협상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시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화를 거부하고 있어 그들의 정체가 파악되면 제거해야 한다.

시리아 아사드Assad 정권과 반체제파의 충돌과 관련된 시리아 평화 조약은 상황이 다르다. 시리아 무력 충돌은 대시와의 전쟁은 아니다. 대시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무력 충돌은 위에서 언급한 전쟁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참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국제적인 연합이 이시스를 물리치면 충돌을 끝낼 수는 있어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 행위를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역 전쟁은 테리리스트들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알카에다는 어떠한 경우든 영토 요구와는 별개로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시스는 그런 시각을 바꿨다. 그들은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갖기 위해 영토를 요구하고, 수년간 영토를 확장시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실상, 알카에다는 기존의 전쟁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서 많은 외국인 전사들을 그 지역에 끌어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토를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모든 군비를 갖춘 군대를 창출할 능력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군대가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위험부담이 약점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세계적 테러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목표물이 대상이다. 이것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상하지 않은 장소를 선택해서 공격한다. 테러리스트들은 서구 국가와 중동 출신이고, 세계 모든 곳(코트디부아르, 터키, 말리, 프랑스, 레바논, 이집트, 미국, 나이지리아 등)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테러 행위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 한다: 그들은 조종당하고 있는가? 그 결정은 지역 차원에서 내려진 것인가? 그들은 알카에다와 이시스인가? 이 두 집단은 서로 경쟁 관계인가? 몇 가지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알 수 없다.

자살 폭탄 공격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더욱 힘들게 한다. 가해자들은 사고 현장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은 관련된 네트워크의 기원과 전략에 대한 각종 연구를 힘들게 한다. 올란도의 경우처럼 외로운 늑대의 소행일까? 혹은 파리처럼 조직적인 지하 군대의 공격인가?

이 충돌의 특별한 점은 이시스와의 지역전쟁과 세계 테러 위협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토 정복과 새로운 ‘칼리파’, 즉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희망에 사로잡힌다. 젊은이들에게 새롭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하고, 천천히 다른 곳으로 확장해 가면서 서구를 상대로 투쟁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런 유토피아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테러의 우발적인 행위로 설립되는 국가를 지향하는데 아주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유토피아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이시스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큰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 행위들이 서구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지 않는 동안에도 테러리스트 국가의 확장은 국제적 측면에서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테러 행위는 세계 전쟁은 아니다.

‘전쟁으로서 테러리즘’: 위험한 정의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표현은 위험하다. 전문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무기 사용과 군대 동원으로 테러리즘을 소개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시George W. Bush가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선언할 때 일어난 일이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테러를 테러로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테러리스트들 중 많은 이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신자였지만, 외세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할 명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은 전문적인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전략적 표현이다. 사실 이라크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을 목표로 하는 대신 다른 지역에서 테러 공격들이 일어나도록 자극했다. 2016년까지 뉴욕, 발리, 샤름엘셰이크, 파리, 베이루트, 브뤼셀, 다카와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테러 행위들이 일어났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은 정치 영역에서는 맹목적인 폭력에 대해 정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적대자를 지목하지 않고 테러행위로 이끈 진짜 문제를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적이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테러와의 전쟁”은 끝도 없고, 해결책도 없는 싸움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테러의 진짜 문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적대자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와 투쟁하면서 싸우고 있다는 착각과 거짓 희망을 심는다. 현실을 부정하도록 사람들을 속이고,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을 방해한다.

테러리즘은 특별한 성격의 충돌이다. 일반적인 전쟁보다는 내전에 가깝다: 오로지 테러리즘에 대해 연구할 때만 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글로벌화된 테러리즘’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욱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면 세계 대전보다 강도가 낮은 ‘세계적인 내전una guerra civile mondiale’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종교가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왜냐하면 이 내전에는 정치적 대립을 넘어선 문화적, 종교적 차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내전

이 세계적인 내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는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테러 공격의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테러가 구조적인 상황의 산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개인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테러 행위의 구조적 원인은 장기간 지속되어 왔다. 이것은 이런저런 날에 조약을 맺거나 토론을 거듭한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는다. 테러리즘의 기원은 다양하다. 이슬람 세계의 극단적인 집단들은 80년대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후 테러 행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알카에다는 정치적 목적과 종교 전파를 결합해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그들의 행동반경을 확장했다. 알카에다는 중동과의 관계에서 중심이 됐다. 시리아와의 관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이라크 전쟁과 사담 후세인 정권 파괴가 테러리즘 확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시스는 2013년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에서 (알카에다와) 정치적, 종교적 혁명의 같은 기반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운동들의 기원은 굴욕감, 불의에 대한 분노, 침략에 대한 반응과 자신의 정체성 탐구와 연결된다. 이 운동들은 문화와 정치가 ‘혼합’된 것이다. 이것은 이 세계 내전에 왜 종교가 현존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운동의 주체들은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상대로 복수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파르네시나Farnesina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바티칸 외무 장관Segretario per i Rapporti con gli Stati 폴 갤러거Paul Gallagher 추기경은 이것이 그릇된 해석임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역사와 종교 전쟁’을 피상적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테러리즘은 종교보다는 정치와 연관됩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은 종교가 전쟁과 충돌의 원인이라는 반복된 비난과, 종교 없는 세상은 갈등 없는 세상일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확신을 갖게 합니다.”

테러리즘은 정치적인 갈등의 표현이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양산한다고  의심하는 국가에 다른 나라들이 개입하곤 하였다. 이라크 전쟁과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해 리비아에 개입한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그런 개입은 오히려 테러 행위를 확산시켰다.

이는 또한 오바마가 왜 시리아에 직접 개입을 원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한다: 오바마는 이라크와 레바논 신드롬에 시달렸다. 개입은 사람들에게 테러리스트에 합류하는 또 다른 동기를 제공해 세계 내전을 확산시킨다. 다양한 개인적 이유로 이 과정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동기를 부추긴다.

테러리즘에 가담하는 개인의 경로

우리는 여기서 테러리즘의 개인적 측면에 집중할 것이다. 특히 서구, 곧 종교가 개인의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테러리즘에는 무기를 들거나 군대 소집에 응하라는 요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발성에 토대를 두고 일어난다. 여기에서 문제는 왜, 어떻게 한 개인이 자발적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지다.

그런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요약하면 테러리스트들은 각기 다른 환경 출신이며, 자주 고립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급진적 무슬림 웹사이트 검색을 통해 발견되는 것들을 찾는다. 그들은 특정 지점에서 과격화되면서 자신의 상징으로 이슬람을 사용한다. 이 젊은이들은 일반적으로 무슬림 2세대다. 그들은 부모의 나라와 새로운 나라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특정 공동체와 연결되거나 지지받지 않으며, 국가적 소속감도 없다.

그들은 불안정한 상황 안에서 고립돼 있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으면서 서서히 급진적으로 변한다. 시리아 여행이 뒤따른다. 그곳에서 그들은 적극적인 테러리스트가 되도록 세뇌당한다.

이것은 다른 국가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세대 젊은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들은 어떤 종류의 교육과 지원을 받는가? 이것은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런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국가는 교육과 도시 계획, 경제 성장, 사회 서비스, 교육 도서 활동 등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 사회는 고립의 장벽을 깨고 공동체와, 이웃, 직장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토대를 둔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

상황과 전략

이러한 대화가 필요한 나라의 문화는 서구의 급진화 과정을 해결하는 과정에도 중요하다. 이탈리아처럼 문화가 종교와 가족 관계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나라에서는 이런 대화가 더 쉬울 것이다. 프랑스처럼 종교가 공적 공간의 주변부에 속한 나라에서는 도시 계획이 아주 빈약하고, 도시 교외 지역에서 교육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이탈리아의 종교적 상황은 이런 나라들보다 더욱 개방됐으므로 좋은 기회로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적합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시민 사회의 과제이자, 또한 지방자치, 지역, 혹은 국가 차원의 행정 기관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교육부는 학교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 대화 과정에 개입하고 참여해야 한다. 외무부도 테러리즘이라는 드라마틱한 국제적인 문제가 국가, 시민사회 차원에서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와 진지하게 협력해야 함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어떤 외교 조치도 다차원적 통합 없이는 행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 테러리즘의 ‘글로벌하고 지역적인 해결책’을 펼칠 수 있다. 이것은 지역적 해결책을 위한 글로벌한 협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가 갈등의 일부인가? 어떤 형태로? 그리고 어떤 주체들과 함께? 어떤 구성원들인가?

이것은 테러리즘의 분석과 해답 안에 다양한 종교를 포함하는 행동 전략으로 이끌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처럼 특정 상황에서는 종교는 정부와의 공동 행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회 분야 활동에 속하는 학교들은 공공영역에 종교를 통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교의 잠재적인 역할은 자주 상실되거나 단순히 거부된다. 종교를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세속성’의 특징인데, 공적 토론과, 테러리즘을 반대하는 공적 행동에 종교계 인사들의 주요 역할을 배제한다. 이러한 거부 방식은 이데올로기 원칙에 토대를 두는 각종 해결책의 한계를 내포한다.

종교 간의 대화

민간 사회가 종교에 더욱 개방된 상황에서 종교 그룹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들은 구체적 역할을 지녔는데, 젊은이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이런 사례들은 종교적인 문제와 근접하기 때문이다. 갤러거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에 관해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요소들을 의식하는 데 공헌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종교를 문제로 여기는 것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종교가 더욱 결실을 맺는 방법 중 하나가 종교 간 대화다. 이것은 풀뿌리 차원에서, 본당 차원에서 근본적 방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화를 더 높은 차원의 그룹에게, 공적인 종교 간의 대화에 자주 위임해왔다.

종교 간 대화는 중요하고, 더 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타우란Tauran 추기경은 여기서 한계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를 할 운명을 타고났다. 대화가 없다면 대안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와 이슬람의 대화는 겨우 이뤄졌고,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추기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대화는 지나치게 엘리트적이다.”

이 대화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지역, 학교, 지방자치, 교회, 회당에서 실용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1990년대 가톨릭 운동은 많은 장소에서 자유과 인권을 위해 일하며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 종교 간의 대화에 집중하며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이슬람 신자들과 협력하며 이러한 운동을 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젊은 시민들―이슬람 신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더욱 가까이하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많은 것에 기여할 수 있다. 다른 종교인들과 인격적인 관계의 창조는 애덕 활동이나 사회활동, 또는 기도 모임을 통해 구체적 협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 대화하며 여러 종교가 참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각자의 가정에 평화를 가져가는 구체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과격한 종교운동과는 다른 종교의 얼굴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쇄신을 위한 행동이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리고 지역 차원에서 관련이 없다면 글로벌한 대화가 현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이런 지역 차원의 해결 방식은 종교 간의 관계라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동기를 부여받고 지원을 받아야 한다.

결론

종교 간 대화는 직접적으로 서구의 전략과 연관된다. 그리고 폭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지도자들과 종교 공동체가 어떻게 정부를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비정부 조직이 폭력을 줄이고 격동의 상황에서 폭력을 줄이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테러리즘이 생겨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중동 위기라는 현실과 맞물린다. 이 위기는 세계 지도자들과 주변 국가들이 힘을 합쳐 높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시리아 분쟁 해결은 근본적 문제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분열도 논의되어야 한다. 이들이 정치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요소는 이슬람 내부의 분열에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지중해는 남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간의 대화에 중요한 자연적 배경이다. 지중해는 이미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토론은 종교계에 더 개방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의 다양한 차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은 보다 낫고, 평화를 건설하는 세상을 위한 이런 토론들 안에서 종교들을 통합하도록 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