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와 시대적 도전

LA COPPIA E LA SFIDA DEL TEMPO

조반니 쿠치 신부(예수회)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최근에 발표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복잡하고 어렵지만, 교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주제이다. 그 일련의 내용들은 “성경에는 가정과 출산, 사랑 이야기와 가정의 위기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폭력으로 얼룩졌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명력을 지닌 아담과 하와의 가정 이야기가 나오는 첫 부분부터(창세 4장 참조) 신부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에(묵시 21,2.9 참조) 이르기까지 그러하다”(「사랑의 기쁨」, 8항).
이 문서에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질문들과 문제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한 측면에 머무르고자 하는데, 이는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시대에 부부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다만 마법에 바탕을 둔 우연이나 행운의 문제이며, 존재에 대한 가장 강한 실망들의 문제라면, 각 시대의 문학들이 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강조할 수 있을까? 사랑은 시대 안에서 지속될 수 있을까?

“그들은 행복하게 만족하며 오래오래 살았다”

공연장에서 완벽하게 성공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뮤지컬 「판타스틱The Fantasticks」(1960)은, 모든 시대의 사랑 이야기들이 본디 가지는 고전적인 흐름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야기는 공연장에서도 유명한 희극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재조명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바오로와 프란체스카, 프리모와 티스베와 비슷하다.) 서로 사랑에 빠졌지만, 각자 집안의 금령으로 사귈 수 없는 두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만남을 금지하려고 부모들이 세워 놓은 장벽들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욱더 강해지고, 그 장벽들을 넘어서려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관계는 어려움들이 조화를 이루고 마침내 가족들이 그 관계를 승낙하려는 준비가 되었을 때 위기를 맞는다.
이 공연과 다른 공연들의 성공 여부는, 설정된 사랑 이야기들의 두드러진 측면들을 그 이상과 두려움 들 안에서 표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이야기들의 결말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대개 그 커플에게 비극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학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는, 대개 그 시작, 곧 사랑에 빠지는 것부터 사랑하는 남자 또는 여자를 힘겹게 차지하는 것까지 고집스럽게 다루지만, 무엇이 사랑을 오래도록 지속시키는지는 결코 말해 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나,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만족하며 오래오래 살았다.”는 고전적인 결말은, 결국은 한 커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탈출구이다. 곧 가장 열정적인 사랑조차 스러지게 할 수 있는 날마다의 일상이 그것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반대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혼인하였다면, 시어머니와 관계에서, 그리고 양말을 깁고, 힘든 일을 하고, 변덕스러운 자녀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틀림없이 그것을 불멸의 작품으로 만들었던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기운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할 것이고, 이른 죽음으로 그들이 면제받았던 일상생활의 문제들과 지루함들을 함께 겪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는 이야기가 그 매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릴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상생활의 도전

이러한 이야기에서 이르게 되는 가르침은, 모든 장애가 거두어지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면, 열정은 식고, 꺼져 버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교황 권고는 더 큰 계획으로 열정을 시간적으로 연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조금 강조한다. 더 큰 계획 안에는 열정 외에도, 덜 돋보이기는 하지만, 관계를 더욱 만족스럽고 견고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곧 대화하고, 서두르지 말고 안아 주고, 함께 계획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존중하며, 관계를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 사회의 정신없는 속도나 의무적인 일에 쏟아야 하는 시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유익하지 못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단지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 안에 있을 뿐 서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사랑의 기쁨」, 224항)
서로가 모든 것을 곧바로 허락해 주는 것은 관계를 느슨해지게 하는데, 이는 서로 강렬하기는 하지만 지속 기간이 짧은 것들(신체적 매력, 열정 등)에 쏠리면서, 그만큼 결정적인 다른 점들을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나쳐 버린 것들을 합당하게 살펴보려면, 자유와 선물이라는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데, 설익은 친밀감은 오히려 이 자유와 선물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것이 수년 동안 동거 생활을 하고 나서 혼인하는 커플들이, 혼인한 다음에 함께 살기 시작하는 이들보다 결별하거나 자신의 혼인에 만족하지 못할 개연성이 훨씬 높은 주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동거 효과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표현으로써 이 문제가 그들의 기질이나 삶에 대한 전망에서 추정되는 개인차들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동거라는 사실 자체에 연결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확실성에 대한 과도한 연구는 관계와 계획적인 능력을 약화시킨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비극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빛나는 대사로 표현하였다. 연인을 시험해 보고 싶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만일 정말로 사랑이라면, 얼마 만큼인지 저에게 말해 주세요.”), 안토니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평가될 수 있는 사랑에는 비참함이 있네.” 사랑은 계량화하려 할 때 죽어 버린다.
동거하기로 결정하면서 혼인을 거부하거나, 그 혼인을 무한정 미루는 것은 그 커플의 결속을 더욱 약화시킨다. 이에 함축된 법칙은 각자가 원하면 떠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법칙은 이 일이 무척 빨리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결합되어 있다. 이 두려움은 이 일이 자동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되어 버린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이 역설적으로 그것이 일어나는 데 얼마나 이바지하는지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결합은 혼인에 견주어 열 배 높은 유대 해소 비율을 기록한다. 임무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이전의 여정에 견주어 질적 도약을 이루게 되며, 이는 계획될 수도 없는데, 심리적 차원에서 보면 커플의 지속성을 도와주는 요소들은 보통 처음 사귀는 순간에 무게를 두는 요소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야 할 것은, 혼인을 비용이 들면서도 중압감을 주는 업무로 여기며, 더욱이 비슷한 행보에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중산층 사회가 갖는 고유한 어려움들이다. “혼인 준비 기간은 하객 초대, 예복과 피로연 준비, 그리고 금전뿐만 아니라 힘과 기쁨을 고갈시키는 다른 많은 소소한 일들의 준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약혼한 이들은 그들이 부부로 함께 내딛게 될 커다란 발걸음을 준비하는 데에 전념하기보다는 지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부 사실혼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로 사랑하는 것과 이 사랑을 다른 이들 앞에서 공식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신에 많은 비용이 드는 혼인 예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혼을 한 이들은 절대로 그 예식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다”(「사랑의 기쁨」, 212항).
여기에 대해 교황 권고가 제시하는 도전은, 어렵지만 가정의 건강과 삶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수많은 현란한 제안들 앞에 놓여 있지만, 또한 대단히 매력적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이 인생의 수많은 다양한 국면들을 건너갈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커플이 시간 속에서 지속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조직으로서 커플

심리학적 성찰에 따라 강조되면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측면 하나는, 가정을 조직적인 요소들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곧 모든 구성원들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방법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가정의 특징들을 형성하는 데 협력하는 그런 조직 말이다. 부부의 원동력을 조직 안에서 고려한다는 것은 가정을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화된 전체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상호작용이 갖게 되는 일종의 ‘조금 더’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없이는 개인들의 행동들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기준이 되는 지평을 뜻하는데, “그들의 결합에서 오는 결과는 독립적으로 고려된 요소들의 결과들의 합계로 축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직적인 관계들 안에서는 1+1=3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세 번째 요소는 조직으로서, 각 구성원들에게 자의식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러한 질적인 도약을 인정하는 것은 부부의 문제들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개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이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
조직적인 접근의 첫 번째 결론은 관계 안에 하나의 순환적 인과 관계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 각자는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조직 안에서 어떤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다른 요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누가 시작했니? 누구 탓이야?”라고 하는 전통적인 질문들 안에 표현되는 원인/결과 방식의 접근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처음에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조직적인 맥락에서는 A는 A이고, B는 B이다. 각자가 자신의 말과 행동들, 또는 침묵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하면서 최종적인 결과에 이바지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눈에 띄면서도 매우 증가세에 있는 사례로 다시 시작하면, 가정 폭력 사건들에서 이 현상들이 자주 발견된다. 연구된 바에 따르면, 폭력을 겪은 이는 ‘반복 강박’이라고 불리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데, 자신을 학대했던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사귀거나, 자신을 폭행했던 바로 그 사람과 혼인하기를 선택하기까지 한다. 이 경우에 당사자들은 그 안에 얽혀 있는 역학들을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특히 실제적인 동기들은 계속해서 의식하지 못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이 요소들은 부부 관계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 사실, 이런 역학들이 명료화되지 않는 한, 이 고통스러운 상황들은 다음에 있을 새로운 유대들에서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고, 당사자는 앞선 경험들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자주 발생하는 모호함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각 개인의 공헌으로 실현되는 조직의 용어들로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폭력을 행사한 사람을 용서하거나, 그 탓을 피해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공헌도를 식별하고, 자주 문제의 핵심이 되는 자동주의와 수동성을 깨부수는 순간,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직론적 모델은 1960년대 미누친S. Minuchin이 연구하였고, 50여 년 동안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26개국에서 시험되었는데, 놀라운 유사성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저항들도 있었다. 가장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위에서 강조된 이분법적 현상으로서, 곧 병약한 구성원, 가정불화에 책임 있는 ‘속죄양’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조직론적으로 관찰해 보면, 그 전망을 뒤집어 보게 된다. 가족들이 제시하는 문제 제기는 실상 다른 문제들, 더 감춰져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들을 덮어 버린다. 실제로, 속죄양이 개선되면, 그 조직이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것은 참여자들의 역할에 다시 논란을 일으키는 다른 측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조직이 재정비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록 더 힘들고 미지의 세계일 수 있지만, 새로운 여정을 걸을 수 있다. “우리의 주장은, 가정들이 상호 파괴적인 모델들에서 얼마나 정제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제한하면서도 또한 수월하게 하려고 그들이 받아들인 전망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려면, 한 가정의 구성원들을 단지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야기들의 저자들로 여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달리 말하면, 관계의 질을 위해서 정말로 결정적인 요소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다. 목적은 특히, 상황을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용어들로 읽고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마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또한 파괴적이기도 한 이러한 방법에서 비판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황 권고에서 명확하게 강조되었다. “혼인의 삶의 모든 새로운 단계마다 여러분은 마주 앉아 합의한 것을 다시 절충하여 승자도 패자도 없이 배우자 둘 다 승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집안에서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지 말고 부부 두 사람이 가정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가정이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니기에 각각의 혼인 결합은 서로 다르다”(「사랑의 기쁨」, 220항).

부부의 안정성을 도와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부터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교종은 미래의 혼인 생활을 위해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는, 커플들 사이의 긴장의 경향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알지 못한 채로 혼인을 한다. 그들은 그저 함께 즐기며 함께 경험을 하면서 그들 자신을 보여 주고 상대방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도전을 회피한다.”(「사랑의 기쁨」, 210항) 밑바탕에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들의 대부분의 상황을 말하는데, 커플들이 쾌감을 주는 단기간의 매력적인 면들에 집중하면서, 더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 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들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혼인 생활을 연구한 이들에게서 명백해졌다. 17세에서 69세 사이 연령의 젊은 부부들과 성인 부부들을 다룬 연구에서, 10가지 기초적인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것들의 중요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들은 관계의 가능한 정체성과 발전, 그에 대한 기대와 흐름들을 읽어 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정이 중요한 것은 부부 생활의 첫 번째 국면에서 돋보이는 요소들(신체적 측면, 매력, 쾌락, 성적인 결합)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기울어져 가고, 다른 매개체들, 곧 가치들, 지식, 타인에 대한 이해, 종교성, 자녀 교육, 경제적 형태의 필요성 등의 존재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들은 초기 단계에서는 제대로 관심을 끌기 어렵고, 혼인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도 부차적인 것으로 머문다. 이것들의 결핍은 위기의 순간에 느끼게 된다.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여정들을 아는 것이며, 이미 선택한 것을 여러 번 다시 성찰하게 한다.
만일 처음에 이 모든 것이 쉽고도 자발적이었다면, 그 뒤에도 조금은 결정과 책임의 결실이 된다. 첫 번째 시기, 특히 만남이 아름답고 신선할 때에는, 또한 겉으로는 부수적으로 보이지만 그다음 시기에는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나는―위에 강조된 것과 같은―다른 차원들을 관찰하기에도 적합한 시기이다. 함께 즐겼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서로를 알기 위해서 충분하지는 않고, 이 앎이 부족하면 이후 친밀감의 영역이 줄어들며 부부 결합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또 다른 바탕들이 요청될 때에 그 영향력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면의 한계로, 시간의 흐름 안에서 부부를 건강하게 지켜 주는 데 중요한 능력들을 설명하는 것으로만 제한한다. 바로 내밀한 소통의 표현으로서 경청이다.
이는 근본적이면서도 책임이 따르는 능력이고, 교육적인 수준에서는 흔치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는 읽고 쓰고 공적으로 말하는 것은 가르치지만, 경청하는 것은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은 관계의 질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주의 깊게, 감정을 담아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경청하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시간들을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을 알고 도움을 주는 큰 결과들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부부들만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질병이나 무능력 장애로 삶에서 무겁게 상처를 입은 이는, 주의 깊게 애정을 가지고 경청해 줄 능력을 지닌 사람들과 만남이 삶의 변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만남은 사물들을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경청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강한 동기가 있어야 하고, 특히 다른 이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줄 배려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관계가 이루어져 있다면, 사무적 용무들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관계는 자신의 활동들을 더 잘 수행하는 데 자극이 된다. “언제쯤 배우자와 함께 하는 일을 성공하는 것이 출세에 성공하는 것만큼이나 절실히 필요하게 될까를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시간을 만들게 하지? 이를 어떻게 할지 알게 될 것이다. 행복한 부부들은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 우리는 우리가 흥미를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큼의 흥미를 느끼지 않은 사람들과 지냈던 밤들을 그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지내보려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행복한 부부들은 모든 것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부부생활의 연속 단계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의 역할

당연히 순환적인 요소들에 관한 것이다. 관계가 더 만족스럽게 되고, 배우자에 대하여 구체적인 인식을 깊게 하면 할수록, 다양한 관점들을 만나고 평가할 수 있는 기회들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어려움들은 분열의 계기가 아니라,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들을 포함한 도전의 계기가 되어, 부부 삶의 질과 건강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행복한 관계로 살게 되면, 우리는 긍정적인 면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부정적인 면들은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관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면, 그 반대의 경향을 띄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들은 긍정적인 것들보다 실현 차원에서 예언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곧 부정적인 면들이 관계를 파괴할 힘이, 긍정적인 면들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갈등은 삶의 한 부분이며, 부부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 내고 직면할 수 있다. 특히 그 바탕에 서로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뜻이 있고 관계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면 더욱 그렇다. 이에 관하여 더 민감한 도전들 가운데 하나는 배우자의 행동에 대한 다양한 평가의 가능성을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 그것을 다양한 동기로 정당화하는데, 대개 의지와 관계없는 것들(시급함, 피곤함, 경솔함, 표면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부당함을 겪게 되면, 완전히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행한 중대한 행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배우자를 부정적인 요소로 보고 자신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부부에게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혼인을 인내와 이해와 관용과 너그러움으로 함께 일구어 나가는 것으로 여기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점차로 따지면 원망하는 시선, 서로의 이익과 권리에 대한 통제, 그리고 자기주장과 경쟁과 자기변명으로 변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랑의 기쁨」, 218항).
여기에, 남성과 여성의 심리학에서 고유한 감성의 차이를 덧붙여야 한다. 여성의 접근은 전체성에 더 묶여 있고, 문제에 직면해서는 특별히 확신을 갖고자 한다. 남성은 세부 사항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실제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차이는 소통의 장에서도 주목할 만한 결과들을 나타낸다. 남자들은 보통 한 번에 하나씩 말하고 여자들은 한꺼번에 모두 말하면서, 서로 소통한다. 삶의 공통 여정을 다시 들여다보고자 잠깐 멈추고서 함께 시간을 가지며 삶을 바라보는 기준들을 표현하는 것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근본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구조적인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동기와 협력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을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이해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서로 용서하는 능력이다. 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심각함이 조금씩 다른 공격적인 상황들을 주고, 그 상황에서 애정의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이름을 잠재적인 방식으로 중간에 끼워 넣었을 때, 그들이 받은 공격의 형태와 상관없이 용서할 가능성이 늘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감정적인 친근함이 용서하는 것을 도와준다.
부부관계에서 용서가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부부생활에 도움이 되고 유대를 강화시켜 준다. “지난 세기 말 미국에서 실시된 광범위한 여론 조사를 보면, 행복하게 혼인한 지 20년이 넘는 부부들은 그들의 혼인을 지속시키고 번영시키는 데 공헌한 10가지 요소들에 용서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 그것은 용서가 베푼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관계 증진적’인 태도와 행동들을 발전시키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곧 그것은 한 개인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그 안에 엮여 있는 관계에 득이 되는 태도와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이렇게 서로 용서하는 부부들은 한 편이 다른 한 편에게 덜 공격적이 되려 하고, 더 건설적인 소통 방식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갈등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려 한다.”
관계 증진적 태도를 키운다는 것은, 부부와 가족의 더 큰 선익의 관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이를 뿌리째 약화시키는 개인적인 대립들을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가치들의 역할

오랫동안 지속되는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결정적인 능력들은 ‘책임’이라는 더 일반적인 범주에 편입될 수 있다. 책임의 수준과 얻어진 만족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부의 견고함도 커진다. 부부 관계에 책임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랑을 애정의 개념으로 고려하는 것을 뜻하며, 강하기는 하지만 단기간에 그치고 마는 감정의 개념으로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애정은 인식과 의지 그리고 이들을 지향하는 가치들에 결합될 때 자신을 최고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사랑이 하나의 계명으로 소개되는 이유이다(요한 13,31-35 참조). 그것은 스스로 책임을 원하고, 자주 만나는 데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삶의 근본적인 측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서로 닮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무엇보다 자신들 안에서 발견되고 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령으로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명령법으로 표현되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나를 사랑하여라!”). 그것은 평가와 느낌에 결합된 명령이고,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의 능력에 가지고 있는 만큼 수행하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법률로 명해질 수 없는 것이다. 로젠츠바이크Rosenzweig는 섬세하게 이를 강조한다. “사랑을 명할 수 있나? … 사랑의 계명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를 사랑하여라.’고 말할 수 있고(사랑하는 사람은 이를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말한다. 그의 입에서는 사랑의 명령이 이상한 명령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 자체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은 명령이 아니면 이를 나타낼 다른 표현이 없고, …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여라.’고 하는 것은 온전히 완벽한 표현이고, 가장 순수한 사랑의 언어이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열정이나 순전히 의지적 행위에 국한된 사랑이 아닌, 통합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곧 평가와 애정, 결단, 그리고 자신의 증여까지 포함된 가장 아름답고 안정된 표현이다. 애정의 차원과 평가의 차원을 통합하는 능력은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고 삶에 깊이 참여하기 위한 능력을 갖기 위해서 근본적인 것이며, 이루어진 선택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좌절하게 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힘들 수 있는지를 체험하면서도, 사랑하고 또 그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거기에서 얻어 낼 수 있는 상급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그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단순히 사랑에 빠지거나 표면적인 호감을 비치는 것을 넘어서는 충실성을 드러내며, 이는 이러한 선택 안에서 시간이 지속되고 소비되는 것에 직면하면서도 이를 유지할 능력을 갖춘 충실성을 뜻한다.
사랑은 책임과 결단의 결과일 수 있으며, 이것들은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 지속된다. 더욱이 이것들은 자녀들이 자기 부모들에게 요구하는 애정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일시적이지 않고 견고해야 하며, 개인적이고 유일해야 한다. 이런 애정 없이 자녀들은 자신들의 유년기를 빼앗기고, 신뢰하는 능력, 특히 아름다운 무엇을 위해 투신할 능력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자신의 그늘에서 도망칠 수 없다.

초기에는 많았던 친밀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부부의 위기 가능성에 대한 첫 번째 신호이다. 이는 자기 자신의 어떤 모습을 소통하려는 경향이 없어지고, 배우자에게서 늘 더 멀어지려고 할 때 일어나는데, 종종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 비밀은 이렇게 ‘모래에 묻히게 되고’, 관계 안에서 점점 더 깊어지는 구멍이 생기게 한다. “위기에 맞서지 않으면 대화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 어느 사이엔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그저 오랫동안 ‘나와 동거한 이’가 되어 버리며 단지 ‘내 아이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되어 결국에는 ‘낯선 이’가 되고 만다”(「사랑의 기쁨」, 233항).
갈등이 생길 때, 최고의 해결책은 갈라서는 것이며, 새로운 유대 관계를 시작하는 결정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흐름에서 알게 되는 것은, 만일 그러한 자신의 모습들과 배우자와 맺는 부족한 관계의 모습들―리타 바이스R. Weiss는 이것을 ‘대본’,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칭한다.―을 살펴보지 않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특히 부부의 역사를 죄인/피해자의 도식 안에서 읽으려는 ‘이분법적인 경향’을), 그들은 이어지는 관계들 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많은 경우에 선택된 사람은 이전의 사람과 비슷한 성격들을 보여 준다. 유명한 인사들의 감정생활에서 볼 수 있듯이, “배우자 복제”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스튜어트R. Stewart와 윌리스B. Willis도 그 한 예이다). 언급된 유명 인사들의 평판에서만이 아니며, 점점 더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전의 혼인 유대에서 찾는 데 실패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는 것이다.
깨진 관계를 슬퍼하는 작업을 하지 않고, 재빨리 정리해 버리면, 같은 유형을 반복하게 되고, 금세 동일한 흐름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사막의 교부들이 주목했던 것처럼, 자신의 그늘에서 도망칠 수 없다. 깊은 친밀감을 공유했을 때는 언제나 유대를 깨뜨리기가 어렵다. 이것은 혹시라도 태어난 자녀들이나 또는 합의해야 하는 경제적인 제반 문제들(살았던 집이나 식료품 비용 등) 때문만은 아니다. 이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이는 많은 경우 그 커플들이 혼인하지 않았고, 특히 이별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불화와 내면의 고통이 계속되며 점점 더 관계의 종말을 인정하는 비극적인 결말들의 기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들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실재적 어려움은 법적인 이별에 정서적 심리적 이별이 거의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서적 심리적 이별은 유대의 실제 모습으로서, 배우자의 내적인 표현에 계속해서 존재하게 되며, 그에 대해서 가장 약자들, 특히 자녀들이 그 짐을 자주 지게 되며, 미래의 고통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상대방에게 복수를 하거나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자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 자녀의 내면적 삶에 해를 입히고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자녀에게 입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사랑의 기쁨」, 245항). 이러한 태도들을 키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벌하는 것이며, 삶에 돌아가는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배우자의 죽음조차도 자신이 찾는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의 존재는 내면에 남게 되며, 남은 자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한다. 그로부터 전혀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한편으로, 어떤 슬픔이 남게 되는데, 이는 행복한 관계를 이룬 사람은 알 수 없는 슬픔이다. 부부의 삶에서 또 다른 역설적인 면이 있다.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관계로 살았던 사람이 슬프고 갈등의 관계로 살았던 사람보다 배우자를 잃은 것을 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상실의 고통과 함께,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가능성들을 낭비해 버린, 다르게 살 수도 있었으리라는 탄식이 함께 올라오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역할

부부 생활에서 책임 부분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서적 사고에서 의심할 것 없이 가장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은 가정의 안녕을 위해 위험한 흐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부부를 해롭게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경향의 하나로, 책임이 공적인 차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강조한다. “핵가족은 부모님, 고모(이모)와 삼촌, 사촌과 심지어 이웃을 포함한 확대 가정과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확대 가정에는 도움이 필요하거나 최소한 곁을 함께하며 보여 주는 관심을 필요로 하거나 고통을 겪기에 위안이 필요한 가족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사람들이 안전한 작은 둥지 안에 머무르며 다른 이들을 귀찮은 위험으로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은 더 이상 평화나 행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여 그들의 삶을 더 편협하게 만듭니다”(「사랑의 기쁨」, 187항). 책임의 바탕에는 두 가지 본질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이 철회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과 충실성을 위해 자신을 투신할 능력이다. 이 경우에 선택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배우자를 위해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혼인의 공적 차원은 서양에서 광범위하게 저평가되었는데, 부부 생활을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이는 감정을 그 근거로 삼았다. 낭만주의적인 사랑은 당연히 혼인의 선택에서 정서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장점이 있었고, 이 선택을 경제적인 일이나 정치적 계약의 일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것의 제도적인 부분을 놓치게 된다면, 유대는 그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어려움들에 직면하기에 너무나 약해진다. 그것을 평생 유지하기에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사랑을 이렇게 보는 시각은 위험한 환상이며, 현실에서 금방 부정된다. “관계는 일종의 건물들이며, 유지되고 보수되지 않는 건물들처럼 시간의 공격을 받는다. 우리가 어떤 건물이 좋은 조건들 안에서 자체로 유지되는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관계도 저절로 평생 유지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관계를 성장시키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이다.”
이 모든 것이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본 것처럼, 그 등장인물들은 거의 언제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죽음은 마치 일상생활의 어려움들에 직면해서 확실한 탈출구로 여겨진다. 감정을 이상화하는 것은 결합의 안정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끝났고,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더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더 불행한 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가정은 사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부부 자신들을 위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제도적 차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교황 권고는 교회 공동체가 부부들 당사자들에게만 내맡기지 말기를 권고하면서, 삶의 가장 중요한 관계들 가운데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본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성실한 방법으로 혼인을 준비하려 하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반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정들의 공동체들은 여기에서 귀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갖고 있다(「사랑의 기쁨」, 206.230항 참조).
혼인에서 책임 부분은, 위에서 살펴본 것대로, 명령으로서 사랑의 시각에 연결되어 있다. 이 역설 안에, 결정적인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방 정신세계의 불균형을 고쳐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을 재평가하기 위한 도움은 유럽의 문화와 다른 문화들에서 이를 수 있는데, 다른 문화들에서는 혼인이 책임의 결실이며, 우리가 투신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상이다. 이는 출신 가정들의 도움으로 가능해지는데, 그 가정들은 젊은 부부에게 간섭하는 역할이 아니라 동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젊은 부부는 결국 자신들의 부모들에게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배우고, 삶의 어려움들을 함께 직면하는 것을 배웠다.
어떤 인도 기혼 여성의 증언을 여기 옮긴다. 이는 서양의 정신세계에서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글에서 수차례 떠오른 소중한 진리를 드러낸다. 책임은 관계에 안정성을 줄 수 있는 사랑을 낳을 수 있고, 부부에게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감을 체험하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의 혼인을 혼인 서약에 제시된 책임에 바탕을 두고 있지,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는다. 우리의 혼인 생활이 점점 진전되면서, 감정들도 함께 발전한다. 어떤 곳에서는 혼인이 감정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감정들이 줄어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결합된 혼인을 지탱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