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 시대의 종말

BRASILE: La Fine di un’Epoca

피에르 드 샤랑트네 신부(예수회, 지중해 가톨릭 연구소)
심애정 젬마 수녀 옮김(성바오로딸수도회)

지우마 호세프는 2016년 8월 31일 브라질 상원의회의 의결에 따라 공화국 대통령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2016년 5월 12일 직무가 정지되었고 부통령이던 미셰우 테메르가 그의 권한을 대행해 왔다. 이 사건은 주목할 만하다. 올림픽 경기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국제 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브라질이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새 대통령 또한 법적 논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9월 4일, 십만 명이 상파울루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셰우 테메르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가 선거 없이 대통령직에 임명된 것이 불법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부패에 대한 소송과 경제 문제를 넘어서서, 이번 해임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당 간에 벌어진 매우 폭력적인 충돌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관습적인 과두정치 세력과 신자유주의 세력이 대대적인 비리 척결 작전 ‘라바 자투’와 공조해 정부 권력을 장악했다.

이 일을 더 분명히 보기 위해선 수십 년을 거슬러가서 당시 부패 상황과 룰라 다시우바가 대통령에 당선된 2003년에서 2010년까지 노동자 정당이 정권을 잡았던 상황, 그리고 그 후의 붕괴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독재 권력에서 파생된 여러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이 광활한 나라의 다양성을 의식해야 한다.

지정학적 복합성

미국이나 중국만큼 광대한 브라질에는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같이 천만 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가 있고, 2억 4백만 인구가 특히 남동부와 북동부 해안에 밀집해 있다.

브라질 국민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광활한 영토에서 일하려고 전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온 많은 이민자들 때문이다. 원래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오늘날 30만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먼 후손인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이 천오백만 정도 있다.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가 분할된 후 3세기 동안 포르투갈 지배를 받은 브라질은 1822년에 독립을 획득했다. 이 긴 식민 통치 기간에 브라질은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수많은 노예가 일으킨 여러 차례 소요로 출렁거렸다. 이어서 이 나라는 제국이 되고 그 다음은 1889년까지 군주국이 되었다. 1889년 공화국의 도래는 대지주들의 등극과 유럽에서 계속 들어온 이민과 맞물린다. 독재정권에 이어 들어선 인민당 정권은 1964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부는 20년 이상 집권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1985년에 시작되었는데 외채, 인플레이션, 부패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경제 불안은 1985년에서 1994년 사이 10년간 열두 번이나 재무장관으로 교체된 각료의 숫자로 분명해진다. 자유주의 경향의 유명한 경제학자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가 개혁을 촉진해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이 네 자리 숫자에 멈추는 데에 성공하면서 성장을 재개했다. 하지만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희생이 따랐다. 당시 노조 활동가이자 노동자당 창당 멤버 중 한 명이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2003년이 되어서였다. 그는 이미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세 번이나 떨어졌던 인물이다.

이 나라의 광활함과 대지주들의 지배를 받은 사회 구조로 인해 국민들은 평온하고 민주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렵다. 폭력은 적대적인 힘 사이에 늘 존재하는 요소다.

부패가 지속된 전통

브라질의 정치 활동은 대토지 소유 계급과 군인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은 협상으로 오랫동안 활기를 띠었지만, 민주적 법과 인권 존중은 뒤로 밀려났다. 재정비용을 치러야 하는 이 정치협상 관례는 모든 차원의 선거에서 이뤄졌다. 이런 까닭에 부패가 일반화된 것이다.

‘국제 투명성 기구’는 브라질 국회의원의 58%가 부패로 기소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기구는 부패지수가 낮은 순위로 가늠해 볼 때 브라질이 세계 76위라고 한다. 1992년에 페르난두 콜로르 지멜루는 부패 혐의 때문에 공화국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지만 후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오늘날, 에두아르도 쿠냐 하원의장은 페트로브라스 스캔들에 관련된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헤난 칼레이루스 상원의장도 같은 소송에서 수사를 받았다.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는 모든 성향의 정당에 자금을 조달한다. 이 회사는 1953년에 설립되어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90년대에 페트로브라스는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었다가 후에 룰라 대통령 때 다시 정부 감독 아래 놓였다. 노동자당과 그와 연정을 맺은 이들이 이 회사의 주요 경영진을 임명했다. 그들 중 몇 명은 회사 기금을 부도덕하게 집행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금은 선거 자금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자금 조달은 마치 비가 쏟아지듯 이루어졌다.

비리 척결 작전 ‘라바 자토’는 화약가루에 불을 던졌다. 세르조 모로 판사가 2014년 3월에 먼저 돈 세탁을 반대하기 위해 시작한 수사에서 페트로브라스와 몇몇 거대 건설회사, 그리고 공공 노동 회사인 브라질 항구 터미널(BTP)을 둘러싸고 조직된 부패 시스템이 곧바로 발견됐다. 노동자당의 의원들도 연정을 맺은 다른 당들의 의원들처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곧 179명이 기소되어 93명이 처벌되었다. 다국적 그룹인 BTP의 회장인 마르셀로 오데브레히트는 19년 감금형을 선고받았다. 부당 횡령 액수는 수십억 유로에 이를 수 있다.

2016년 3월 브라질 대법원은 하원의원 48명에 대한 수사를 승인했는데 그중에 룰라도 있었다. 심판 기관의 활동은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계속될 수 있도록 견고하고 충분한 독립성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과 여론이 이 노력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룰라의 변혁

정치는 부패하고 지주 계급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브라질의 북동부 빈민 지구에서 올라왔다. 선반공 노동자 룰라 다시우바의 소리였다. 그는 2003년 국내 대통령 선거 때까지 노조 활동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었으며 기존 정당 후보들을 제치고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변혁을 시도해 브라질을 세계 경제 주역 중 하나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곧바로 사회 정책에 뛰어들었다.

룰라는 이 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놓여 있는 가난에서 탈피하려고 애썼다. 혜택을 입지 못한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대학을 개방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중산층에 진입하도록 도와 브라질을 개선하는 동력이 되게 했다. 이 활동의 규모를 상상해 보려면 브라질 대도시에 눈에 보이는 데까지 뻗쳐 있는 거대한 ‘판자촌’을 다녀 봤어야 한다.

룰라 정권은 특히 2004년부터 가난을 타파하겠다는 주목적을 가진 ‘볼사 파밀리아(가족 지원금 정책)’라는 정책을 마련했다. 극심한 가난에 처한 천이백만 가구에 직접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수급자는 몇 가지 조건을 따라야 했다. 그것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하라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이외에도 건강에 관한 프로그램, 특히 출산 준비 프로그램에 참가하라고 요구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4백만 정도의 가구는 이 정책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등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볼사 파밀리아’ 영향으로 실제로 극빈 가정이 소외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자녀 교육이 보장되었다. 이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가 대단하고 수백만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됨과 동시에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음을 확증하는 많은 연구가 있다.

다른 사회 정책인 ‘포미 제로(굶주림 제로)’는 나라에서 기아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가장 가난한 가정들에 주어진 여러 도움과 더불어, 수돗물을 사용하고 싼 값에 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며 균형 잡힌 영양을 취하도록 교육하고 비타민을 나누어 주는 것 같은 여러 사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룰라의 국정 운영을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그의 정책만큼이나 모순적이다. 그는 매우 강력한 사회 정책을 지지해 인구 중 가장 가난한 계층을 도와주었는데, 그의 전임자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의 관례를 따른 자유주의 경제 정책 또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바로 이전에 있었던 경기 변동에서 드러난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브라질이 깊이 변화된 것이다. 세계 경제 지위가 13위에서 8위로 뛰어올랐다. 부채에서 벗어나 채권국이 되었다. 2천8백만 명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났고 3천9백만 명이 중산층에 진입했다.

하지만 이 결과에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약속을 많이 한 농업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토지 없는 농민에게만 국유지를 양도하는 개혁, 곧 ‘토지 없는 이들의 운동’은 잊혀졌다. 룰라는 농업과 산업을 결합한 정책에 착수하여 유전자 변형 농산물 집중 재배가 확장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관점에서 재정 이득과 거대 경제 지수 안정화에 기여했지만 이것은 엄청난 사회 개혁을 희생한 대가로 이루어졌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뒤로 밀려나서 2008년에는 마리나 시우바 환경부 장관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룰라에 대한 평가는 불분명하고 역설적이지만, 빈곤에 대항한 투쟁에서 거둔 진보는 실제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대통령직에 오른 첫 번째 여성

4년 연임 후에 미국에서 그렇듯이, 룰라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우마 호세프를 선택해 2010년 선거에 후보자로 나서게 했다. 지우마 호세프는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다. 그는 1964년에서 1985년까지 브라질을 이끌었던 군부 독재에 항거했고, 약 3년간 수감되었으며 게릴라 운동에 참여했다고 고문당했다. 지우마 호세프는 당선 초기에 인기를 많이 얻었다. 룰라와 같은 정책을 계속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대통령직은 위태로워졌다. 경제 성장은 저조해진데다 다수를 확보하려고 보수 정당들과 의심스러운 정치 동맹을 맺었으며, 근본주의 종교단체가 그의 대통령직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토록 이질적인 정당들의 연합은 오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노동자당은 조금씩 편향주의와 부패, (2005년에 있었던) 국회 투표 매매와 같이, 다른 정당들과 같은 죄로 더럽혀졌다.

무엇보다 그의 대통령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임기 첫 4년간의 경제 성적표였다. 2014년에 브라질에 불경기가 시작되었다. 2010년에는 7.5% 성장했던 브라질 국내 총생산이 0.6%로 감소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인한 외상은 격렬했다. 세계 신용평가 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브라질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새로운 중산층을 직접 타격했다. 이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브라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 경기 변동, 중국 경제의 침체와 더불어 특히 아르헨티나의 어려움은 이런 경기후퇴의 원인 중 일부분이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세 감속이 강화되었다.

동시에 룰라는 석유 그룹 페트로브라스와 몇몇 거대 건설회사, 그리고 공공 노동 회사가 연루된 부패에 관여했다고 기소되었다. 룰라에 대한 기소, 그리고 전임 대통령인 그가 건설 회사로부터 아파트와 별장의 형태로 받은 선물로 인한 고소가 확증될 경우, 그는 영원히 정치 현장에서 퇴출될 것이다.

필연적이었던 브라질민주운동당과 결별로 지우마 호세프는 소수당으로 밀려났고, 브라질민주운동당 당원인 부통령이 나라를 이끌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해임

지우마 호세프의 두 번째 임기는 왕국의 종말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소속당에서 발생한 부패사건에 대한 기소에 직접 연루되었다. 기소에 연루된 당이 노동자당만은 아니지만 그와 연정을 맺은 브라질민주운동당과 함께 노동자당이 첫째 과녁이 되었다. 국내에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당은 아무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급진 좌파는 노동자당이 브라질 정치의 관례적인 행위를 평준화된 듯 답습한 것을 고발했다.

전임 대통령 룰라가 신뢰성을 잃었기에 2016년 10월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그가 지지한 후보들은 진정한 ‘죽음의 입맞춤’을 받게 된다. 73%의 선거인들이 전임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후보들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룰라 없이 노동자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15년 12월 초반에 지우마 호세프는 그의 재선 이전에 재정 ‘적자’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탄핵 소송이 시작되었다. 전체적인 여론은 이 소송을 지지했다. 대통령의 인기는 10%대의 지지율로 떨어졌다.

2016년 5월 12일 호세프는 사실 면직되었지만 대통령 관저에 머물며 그의 국정 운영과 부패 기소에 관한 수사를 허가했다. 8월 29일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의회 앞에 나서서 자신을 대항해 일어난 반란과 음모와 불의를 비난하며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다. 또한 자신의 경제 실정을 세계 경제 위기 탓으로 돌렸다. 호세프 대통령은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상원 투표에서 삼분의 일만 확보하면 됐다. 하지만 그 표를 얻지 못했다.

8월 31일, 61명의 상원의원이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에 찬성하고 20명이 반대했는데, 찬성자 중에는 그 또한 탄핵되었던 페르난두 콜로르 지멜루가 있었다. 투표는 브라질 국민 대다수가 탄핵에 찬성한다고 보는 여론조사의 경향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탄핵 투표 전에 진행된 심리가 텔레비전에 중계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브라질 정치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론은 이에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은 경기가 침체되고 여러 달이 지나도 주도권을 다시 잡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포함한 정치 전반에 대한 비판에 기대고 있었다. 나라의 재정 ‘적자’를 숨기려 한 의지뿐 아니라 사실 오류와 무능력, 의회 내에서 굳건한 반대를 끌어내지 못함 같은 정국 운영 전체가 처벌받아야 했다. 반대 세력 자체가 숱한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기에 대통령의 부패를 지나치게 주장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노동자당의 정책 전반을 기소한 것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끝난다. 탄핵은 ‘정치 공작’과 권력의 모래 속에 가라앉아 버린 사회 개혁과 변화 시도의 종말을 기록한다. 노동자당은 오래 전부터 그 역동성과 정치활동을 포기했다. 룰라의 좌파는 자기 스스로에게 충실하기 위해 현대화되고 깊이 개혁되어야 한다. 우파는 테메르와 함께 권력을 다시 쥘 준비가 되었다. 테메르는 자유주의 정치로 되돌아가기 위해 많은 사회 정책을 그만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의 시작은 벌써 속임수로 가득하다. 장관 두 명이 수사조작 의혹에 연루되어 사임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고민

2013년에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호의와 열정으로 세계청년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종직 수락 이후 ‘첫 해외 사목 방문 무대’이기도 했다. 지우마 호세프도 교종을 환대했다. 하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다르다. 2016년 4월 15일자 문헌에서 브라질 주교회의는 24쪽에 달하는 긴 글을 공식발표했다. 이 문헌은 경제 상황에 대한 엄정한 진단을 담고 있으나 그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수요와 정치 잠재력 자체를 무시하는 시장과 소비 원칙을 문제 삼아 논의한다. 이 문헌은 토마 피케티와 불평등 발전에 대한 그의 분석을 인용했다. 공동선을 생각하지 않고는 모든 사람을 위한 진보란 있을 수 없음을 기억시킨다.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한 공동 정책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이 윤리적인 토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에서 이 문헌은 정치기관을 강화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세계적 정치 권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베네딕토 16세의 생각을 다시 다루는 것이다. 용기 있고 많은 수고가 담긴 이 문헌은 교회의 사회교리 전통 전체를 토대로 삼았는데, 특히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경기 전인 2016년 8월에 브라질 교회는 거대한 스포츠 향연이 복음화를 쇄신하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했다. 경제 사회 상황 앞에서 교회가 지닌 염려도 감추지 않았다. 위기 전에 호의적인 경기 변동이 지속되던 몇 년간 희열 속에서 올림픽 경기를 유치한 날로부터 많은 것들이 나빠졌다. 부패가 있었고 야당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붕괴시켰다. 리우데자네이루 대교구장인 오라니 주앙 템페스타 추기경은 그의 입장에서 “사회적 재난”을 선언했다.

독립 기념일인 2016년 9월 7일은 브라질 주교들이 “윤리와 도덕적 가치 부재는 정치와 경제, 사회의 깊은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기회였다. 브라질 주교회의 농어촌환경사목위원회는 대통령 탄핵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데, 나름대로 보도 자료를 내고 지우마 호세프를 거슬러 시작된 소송에서 “쿠데타”가 있었다고 고발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인권과 땅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정치적 논란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보편교회의 전통 속에서 교회는 국가의 상황에 직면해 참여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임을 재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