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예언자의 담대함을 가지고”
교종 프란치스코와 예수회 제36차 총회에 참석한 예수회원들 간의 대화

«AVERE CORAGGIO E AUDACIA PROFETICA»
Dialogo di papa Francesco con i gesuiti riuniti nella 36a Congregazione Generale1)

이근상 시몬 신부 옮김(예수회)

2016년 10월 24일, 교종 프란치스코는 제36차 총회에 참석한 예수회원들을 만났다. 아침 9시 조금 전에 평범한 차로 총원에 도착했다. 이번 총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된 아르투로 소사Arturo Sosa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원들의 영접을 받으며, 총회의장으로 들어와 총회 대의원들과 함께 기도했다. 이어서 준비한 훈화를 발표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대의원들과 진솔하고 애정이 담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총회 대의원들은 그 자리에서 교종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교종은 사전에 질문들을 선별하거나 미리 보내 주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즉흥성으로 해서 한 시간 반가량의 만남이 가족적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대화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한 사람씩 인사를 나누었다. 아래에 그 당시의 질문과 대답을 재현했다. 총회의장에서는 실무적인 이유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질문했다. 아래 본문은 교종의 답변을 읽기 쉽도록 질문의 본의를 살리면서 세분했다. 대화적인 분위기를 살려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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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께서는 예언자적 담대함의 살아 있는 모범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효과적으로 그런 담대함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용기란 단지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잘하는 방법을 아는 것,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가 소음을 내는 것은 아닌지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란 모든 사도적 활동의 필수 요소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때보다, 오늘 우리에게 용기와 예언자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파레시아2), 즉 두려움이 없는 예언자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교종으로 선출되었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동유럽의 문제들이 무엇인지 알았고, 담대하게 그것들에 맞서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예언자적 담대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를 식별해 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자적 담대함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마지스magis3)라는 태도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그 마지스가 파레시아입니다. 마지스는 언제나 더 크신 하느님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그 더 크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식별은 깊어지고, 식별을 통해 담대함을 드러낼 장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일이 이번 총회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믿습니다. 마지스, 예언자적 담대함, 파레시아를 실천할 ‘장소’를 찾는 식별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때때로, 예언자적 담대함이 외교적 수완, 즉, 강력한 표징을 동반한 일련의 설득 과정과 결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몇몇 국가에서 만연한 부패와의 전쟁에서 예언자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부패는 예를 들어, 헌법에 규정된 임기가 끝나가는 권력자가, 개헌을 통해서 권좌에 머물려고 시도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기 있는 예수회가 사회의식을 가르치고 고취하려 할 때, 담대하게 투신하여, 어떤 나라가 미래의 통치 권력을 결정하고자 할 때, 법 원칙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그 사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교종 성하, 식민지 개척자들이 토착민들을 다루는 방식이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 의한 토지의 강탈은 참담한 사건이었고, 오늘날까지 그 휴유증이 있습니다. 교종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먼저, 토착민들이 가진 풍요함이 우리에게 점점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여러 힘들이 세계화를 통해서 토착민들을 점점 더 압박해 가는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가 이들의 가치를 더 깊이 알아 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화는 일종의 ‘단일 영역sphere’ 안에서 모든 것을 표준화, 규격화하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예언자적 담대함, 깨어 있는 의식은 토착화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떠올릴 때 바로 그 단일 영역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면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다면체의 형상을 좋아합니다. 하나이지만,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각각의 민족, 개인, 문화가 각각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하며 동시에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유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화는 단조롭게 되고 파괴적이 될 것입니다.

표준화 과정과 파괴적 세계화가 회복해야 할 토착 문화를 도리어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살려 낼 수 있는 올바른 세계관hermeneutic을 가지고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이 세계관은 식민지 개척 시대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때의 세계관은 사람들의 개종을 추구하고, 교회를 확장하고, 결국 지역의 독립성을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배적인 제국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믿음과 문화를 강요하는 중앙집권적인 세계관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태를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각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별 문화와 언어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토착화의 과정을 도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기 교회의 선교 역사에 있었던 토착화의 시도들에 대해서 좀 더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노력들은 이방인들과 함께했던 사도 바오로의 체험에서 출발했습니다. 성령께서 아주 분명하게 그에게 보여준 바는 복음이 이방 민족들 안에서 토착화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선교를 통해 교회가 팽창하던 시대에 반복되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나 로베르토 데 노빌리의 경험4)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개척자들이었지만, 로마 중심주의의 패권적 개념이 그들의 시도를 저지하고, 가로막았습니다. 문화가 존중되는 대화를 방해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각 지역의 사회적 관습을 해석한 데에서 벌어진 것이지요. 예를 들어 죽은 조상들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 숭배로 잘못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세계관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지금 토착민들의 고유성에 대한 더 큰 자각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하고 각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복음화가 감동을 주는 전례를 가능케 하고 진정한 경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경신성사성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윤리신학과 관련해서 하나의 기억을 나누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신학부 학생일 때, 도서 담당이었습니다. 1700년대 이후 윤리를 다룬 문답 형식의 멕시코 서적을 검토하는 중에 이런 질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스페인 남성과 토착민 여성 사이의 성적 결합이 대죄인가?” 저는 도미니코회원인 윤리학자의 대답을 보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 행위가 중대하므로 행위 자체로 보면 대죄이다. 그러나 이 행위의 결과가 신자 한 명을 더 많게 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므로 유럽에서 행해진 것과 같은 중죄는 아니다.”

교종께서는 담화를 통해 윤리는 식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윤리적 문제를 역동적인 식별의 관점에서 다룰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개별적인 상황들을 일반 규범의 사례로 이해하여 모든 일에 대해 포괄적 적용을 하는 해석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식별이 핵심 요소입니다.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사제 양성 과정에 식별이라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흑 아니면 백’ 다시 말해서 법적인 것에 쉽게 빠져들 위험이 있습니다. 보통 식별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신학교에서 상황의 식별과는 거리가 먼 경직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의론적인 윤리 개념5)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결국 같은 노선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두렵습니다. 세계 청년대회 때, 크라쿠프에서 예수회원들과 만났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거기서 나에게 예수회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예수회의 중요한 임무는 신학생들과 사제들을 식별을 통해서 양성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과, 아마 여기서 가장 젊은 사람들은 빼고, 저보다 약간 후세대도 마찬가지로, 스콜라주의의 쇠퇴기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철학을 교범으로 배웠습니다. 한물간 스콜라주의이지요. 예를 들어, ‘형이상학적 연속’을 설명할 때에, 생각날 때마다 웃곤 하는데요, ‘팽창점들puncta inflata’6)의 이론을 배웠습니다. 위대한 스콜라 철학이 힘을 잃게 되었을 때에 저의 세대와 비슷한 이들이 배운 말기 스콜라주의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말기 스콜라주의가 결의론적인 태도를 조성한 것이지요.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보통 고해성사 과목은 성사 윤리 교수가 가르쳤습니다. 재미있게도 모든 윤리적 논의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여기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되는’ 식의 구분에 갇혀 버렸습니다. 한번은 고해성사 자격시험 도중에 제 동료가, 아주 복잡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 친구는 아주 단순히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그런 일들은 실제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시험관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에는 나오지요!”

식별과는 아주 거리가 먼 윤리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쿠코’7)라는 상황윤리의 유령이 있었습니다. 저는 버나드 헤링8)이 처음으로 윤리신학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게 하여 윤리신학을 다시 꽃피운 선구자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금은 윤리신학의 성찰과 성숙에 있어서 많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윤리신학이 더 이상 사례 중심의 결의론이 아닙니다.

윤리 분야에서 우리는 상황논리에 빠지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함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스콜라주의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보나벤투라도 다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일반 원칙은 모든 것에 적용될 것이지만, 개별 사안에 들어가면 문제는 다양해지고 일반 원칙을 변경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묘한 차이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스콜라식 방법은 유효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채택한 윤리적 방법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체 교회가 두 차례의 시노드를 통해서 식별을 한 뒤 최근에 발표한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의 입장입니다. 「사랑의 기쁨」에서 사용된 윤리적 입장은 토미즘인데, 그것은 위대한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토미즘이지, ‘팽창점들’의 저자가 주장한 토미즘은 아닙니다.
윤리 영역에서 우리는 과학적 엄밀함을 지켜야 하고, 교회에 대한 사랑과 식별을 통해 나아가야 합니다. 윤리적 판단의 어떤 영역에서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신학적 성찰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학은 무릎 꿇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 없이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회에 대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해 주는 긍정적인 것들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하는 다소 어두운 이야기들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잘 알고 계신 성하께 묻고 싶습니다. 성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좀 곤란합니다. 그 비판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제가 지내 온 상황과 환경에서 보면, 예수회에 대한 비판들은 주로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향수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시절에 한때 아주 매력적이었던 예수회 시절의 복귀를 꿈꾸는 이들의 비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그런 예수회는 더 이상 소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예수회에 기대하시는 때는 더 이상 그 시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회에 대한 비판의 이면에 있는 논쟁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회가 성령께서 예수회에게 말씀하시는 바에 충실하게 응답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비판이란 누가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아주 악의적인 비판자가 저를 돕는 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하고, 식별해야 합니다. 어떤 비판에도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한번 귀를 닫으면 곧 그게 습관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좋은 게 아니지요. 식별을 한 뒤에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비판은 근거가 없고, 한쪽에 치워 놓아도 좋다. 그렇지만, 우리가 듣게 되는 모든 비판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매일매일, 진심으로, 항상 선의를 가지고, 마음을 열고, 하느님 앞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종교적인 양극화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성하께서는 관구장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구장으로서 여러 다른 경험들을 하셨습니다. 그 경험에서 볼 때, 이런 양극화의 상황, 특히 예수회원들이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보아 저는 큰 정치에서 작은 정치로 계속해서 정치의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국가 내의 정당 정치만이 아니라, 대륙 단위의 정치 분야에도 이러한 수준 저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받은 바와 같은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유럽과 연관하여 세 차례의 연설을 통해 제 생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두 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한번은 ‘샤를마뉴’ 시상식에서였습니다. 또 프랑스의 주교들이 정치에 관한 성명서를 최근에 발표했는데, 이는 15년인가 20년 전에 나온 「정치의 회복Réhabiliter la politique」이란 아주 중요한 선언과 입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선언으로 정치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여러 민족들을 일치시키고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집단들을 일치시키는 장인정신의 정치를 독려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대한 정치인들이 안 보입니다. 대의를 위해 충심으로 투신하고, 대화와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성과 정치인 고유의 카리스마를 갖추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말입니다. 정치는 최고 형태의 애덕에 속합니다. 위대한 정치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극화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치에 도움이 되는 것은 대화입니다.

예수회 생활하시면서 평수사9)들의 역할이 어떠하다고 경험하셨는지요, 그리고 사람들을 예수회 평수사 성소로 초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수사들에 대한 제 경험은 언제나 아주 좋았습니다. 연학기 동안 함께 살았던 수사님들은 현명하고 아주 지혜로운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사제들이나, 연학수사들과 다른 종류의 지혜를 가졌습니다. 요즘에는 공부를 많이 하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수사님들이 많지만 여전히 “나는 잘 모르는데,” 하며 사제들과는 사뭇 다른 자세를 취합니다. 저는 이런 지혜, 평수사로서 얻는 이런 특별한 슬기로운 자질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평수사들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저는 그들의 특별한 감각에 감명을 받곤 했습니다. ‘냄새를 맡는’ 능력인데, 예를 들어, “저 신부님 좀 봐,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와 같은 말을 할 때 드러납니다. 제가 아는 평수사들은 거의 다 분별력이 뛰어난 분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공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평수사들이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알아차리곤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특별한 은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늘날 평수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지를 찾아가야 하겠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교종께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이사 2,4) 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저의 대륙, 아프리카에는 전 주민의 열배를 살육할 수 있는 무기가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활동은 긴급한 요청입니다. 저는 일 년 반 쯤 전에 세계는 여기저기서 소규모로 제3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소규모의 전쟁들이 점점 더 크게 뭉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순진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고, 많은 나라에서 그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중동을 보세요. 아프리카를 보세요. 계속되는 전쟁 상황입니다. 이 전쟁들은 식민 지배와 착취의 역사에서 출발한 것들입니다. 그 나라들이 독립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독립을 선사했던 바로 그 나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지분을 그 땅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그 풍부한 자원을 약탈하려는 이들의 먹잇감입니다. 이제는 과거에 이들 나라에 관심도 없었던 이들까지 가세한 형국입니다. 아프리카는 언제나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몇몇 나라에서는 이념화의 문제가 사회에 심대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평화를 위한 활동이, 진복팔단 중에 하나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적 선택 사항이라고 믿습니다. 도대체 평화가 언제 이루어질까요?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 전에 그게 올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정치를 통해서, 또 공존을 통해서,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올 수 있습니다. 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보여 주신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질 때, 많은 것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때로, 여기에서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고, 특히 처음 나서는 사람에게는 큰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교는 우리 성소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홀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공동체 구원과 개인 구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홀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은 아주 분명한 원칙이라고 믿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도 혼자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만의 완덕의 길을 통해서, 혼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사용하신 형용사, ‘위선적’이라는 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위선으로 끝장이 날 것입니다. 일종의 엘리트 의식으로, 혼자서 구원받겠다고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애쓰는 것은 위선입니다. 주님은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실제 생활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요?

제 충고는 이렇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체험할 것인지는 개인적, 공동체적 식별에 달려 있고 기도에 부쳐져야 합니다. 학문 연구와 실제 삶, 단지 변두리만이 아니라 변두리의 끝에서 겪는 삶, 그리고 기도, 개인적 공동체적 식별, 이것들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학생 공동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 뭔가가 빠져 있다면 그건 좀 걱정입니다. 만약 연학이 부족하면,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 쉽고, 너무 단순한 방식으로 상황을 이상화할 수 있습니다. 또 만약 연학이 보통 사람들의 객관적인 맥락을 잘 알고, 관련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의 동반이 없이 이루어진다면, 순진한 이상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기도와 식별이 부족하면 우리는 아주 좋은 사회학자나 정치학자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앞서 말씀드린 복음적 담대함과, 간직해야 할 복음적 십자가는 가지지 못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35차 총회 후에 예수회는 생태환경적 도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회는 「찬미받으소서」를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종께서 다양한 기관과 대화의 문을 여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에 계속해서 투신하기 위해서 예수회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생산한 회칙입니다.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과 단순치 않은 가설들은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작업입니다. 사실 제가 한 일은 지침을 정하고,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그러니까, 제 스타일로, 약간 표현을 다듬어 최종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학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함께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세상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뿐만 아니라, 자원의 남용, 자연 학대로 인해 세상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이 회칙이 ‘자연 보호 회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회 회칙입니다. 회칙이 생태적인 관점에서 현 상태를 설명하며 시작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회 회칙입니다. 생태적 위기의 결과로 고통받는 자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이며, 버림받은 이들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회칙은 사람을 폐기 처분하는 문화에 맞서는 회칙입니다. 우리는 회칙의 사회적 측면을 좀 더 진지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회칙 작성에 참여했던 신학자들은 생태적 현상들이 사회적 현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자 무척 노력했습니다. 이 회칙을 사회 회칙으로 보는 것이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교종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예수회를 원하십니까? 예수회가 그 방향으로 걸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십시오.

가난이란 측면에서 성 이냐시오는 우리를 한참 뛰어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 청빈 서원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한 점을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성 이냐시오는 가난을 자신을 더 쥐어짜내며, 더 큰 고통을 감수하도록 이끄는 수덕적 태도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으로서 구원의 방식이며, 교회의 방식인 가난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이냐시오가 가난과 관련해서 사용한 두 개의 핵심 단어가 어머니와 성채였다는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양육합니다. 어머니들이 그렇듯, 가난은 영적 삶, 거룩한 삶, 사도적 삶을 낳습니다. 그리고 가난이 이 삶들을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합니다. 예수회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얼마나 많은 교회의 재앙들이 가난의 결핍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불행하게도 제가 살펴야 할 많은 스캔들 중에 얼마나 많은 수가 돈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저는 이냐시오 성인이 아주 위대한 통찰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이냐시오의 비전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 중 하나인 성직주의는 가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직주의는 부자입니다. 돈으로는 부자가 아닌 경우에도 자부심으로 여전히 부자입니다. 그렇지만 성직주의는 실제로 부자입니다. 성직주의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가난이 자신을 양육하도록 허락하지도 않고 가난의 성채 안에서 보호받도록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성직주의는 오늘날 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부의 한 형태입니다. 적어도 일부 지역의 교회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복음의 교회이며,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 루카 복음의 들판 수훈의 교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은 우리를 심판할 기준이기도 합니다. 마태 25장을 보십시오. 저는 복음이 여기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저는 또한 예수회가 가난에 대한 이냐시오의 비전을 심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비전은 전체 교회를 위한 것이고, 우리 모두를 도울 수 있는 바로 그 무엇입니다.

교종께서 위로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매일 하루를 마치고 성찰하실 때, 어떤 것들이 교종께 위로를 주고, 어떤 것들이 위로를 앗아갑니까?

저는 지금 가족에게 말하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요. 저는 좀 비관적입니다. 항상! 우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잘 안 된 것들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제가 발견해 낸 최선의 항우울제입니다.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하루 동안 하신 일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놓아둘 때, 저는 위로를 발견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오셨음을 깨달을 때, 비록 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저를 감싸는 물결처럼 저를 이끄시는 힘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저는 위로를 느낍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여기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교종직에 대해서도 ‘제가 이 춤을 추도록 이끈 힘은 투표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분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라는 내적 믿음이 제게 위로를 줍니다. 이것이 제게 위로입니다. 저의 저항이 승리하는 순간들마다, 저는 슬픔 속에서 용서를 청합니다. 이건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제게 유익을 줍니다. 이냐시오가 말하듯, 자신이 ‘구제불능’임을 깨닫는 것, 자신이 저항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매일 저항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때때로 저항을 이겨내지만, 때때로 이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을 줍니다. 이런 경험이 자신의 자리에 있게 합니다. 도움이 됩니다. 저의 개인적 체험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아주 감동적이었고, 복음화란 주제에 대해서 저희들이 보다 더 이야기하도록 북돋고 있습니다. 권고의 마지막에 저희들이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권고하시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교종의 문헌이 가진 위험 중에 하나는 문헌이 얼마간 흥미를 일으키지만 이어서 다른 문헌이 나오면 그 전의 것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헌이 계속해서 제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모임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복음의 기쁨」의 주제가 더 심화되도록 마지막 부분에 지적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복음화의 방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질문자는 아마도 권고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아페레시다 문헌10)을 참조한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 우리는 「현대의 복음 선교」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시의적절하고 생생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문헌은 제가 보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가장 중요한 사목 문헌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도 않고 인용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 일들이 「복음의 기쁨」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복음의 기쁨」에서 언급한 강론과 관련된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주제가 침묵 속으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강론은 교정되어야 하며, 성직주의적인 요소를 제거해내야 합니다. 저는 「복음의 기쁨」이 심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오늘날 교회가 바라는 복음화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평신도 그룹, 사제 그룹, 그리고 신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복음의 기쁨」은 됐고, 이제 「찬미하여라」가 새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제 됐고, 앞으로는 「사랑의 기쁨」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복음의 기쁨」을 기본 골격으로서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현대의 복음 선교」와 아파레시다 문헌을 결합하여 만든 문헌입니다. 「복음의 기쁨」이 복음화를 주제로 한 시노드 다음에 나왔지만, 이 문헌이 가진 강점은 앞의 두 문헌으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오늘날 교회가 사도적 봉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본 골격입니다.

교회가 성소의 감소를 겪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소 증진 활동에 미온적이었던 지역들에서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교로 있을 때 일입니다. 아주 훌륭한 신부들과 대화하면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경험한 일입니다. 그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본당에 보석 같은 신자가 있어요!” 그들은 일등급 평신도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부제로 서품 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평신도를 부제로 만들려고 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를 성직자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요. 제가 최근에 우엘레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성직주의에 빠지지 않은 거의 유일한 것이 민중신심입니다. 사실 민중신심 행위는 사제들은 믿지도 않았던 ‘백성들의’ 풍속 중에 하나였기에, 평신도들의 창조성이 발휘된 영역이었습니다. 일부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민중신심 행위는 사제들이 관여하지 않았기에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성직주의는 성장을 돕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례성사의 권능이 자라나도록 허용하질 않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과 함께 주신 은총과 권능은 세례의 은총에서 옵니다. 성직주의는 이 은총을 통제하고, 의존성을 높여서, 때때로 모든 사람들을 극심한 미성숙의 상태로 놓아두곤 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또 젊은 사제였을 때, 교회의 기초공동체들이 등장했고, 그때 벌어진 싸움을 기억합니다. 왜냐구요? 평신도들이 힘찬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처음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바로 몇몇 사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마도 너무 일반화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문제를 너무 단순화해서 직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직주의의 문제가 아주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의 성소와 관련해서는 성소 감소의 문제를 다음번 시노드에서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저는 성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성소를 어떻게 권하고, 성소에 어떻게 귀 기울여야 하는가, 입니다. 만약 사제가 언제나 너무 바쁘고, 천 가지 사무에 정신이 없다면, 영적지도가 본래 성직자의 성소가 아니라, (사제들도 계발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 본래) 평신도 성소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성소 식별을 할 때, 평신도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성소가 없을 거란 것은 분명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더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아마 젊은이들이 지겨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늘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어달라고 합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앉아서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창조적일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 일해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모임을 가져 봐야 별로 의미도 열매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선교나 교리 봉사, 사회 활동에 파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아주 도움이 됩니다.

한번은 변두리, 즉 빈민가에 있는 본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사제가 모임방을 만들고 있더군요. 이 본당사제는 주립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이어서, 함께 하는 남녀 청년들에게 열정과 열망을 불러있으켰던 것입니다. 제가 토요일날 도착했는데, 그들은 석공처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관리하는 기술자는 유대인이었고, 여학생들 중에 한 명은 무신론자였고, 다른 친구는 뭔지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과업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이 경험이 제게 한 가지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 역시 다른 이들을 위해서, 또 다른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젊은 친구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그들에게 귀 기울여야만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성소를 증진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교회에 직접 불임시술을 하는 것입니다. 성소 증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난관을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들을 낳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디지털화가 현대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것은 속도, 팽팽한 긴장, 그리고 혼란crisis을 초래했습니다. 디지털화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요? 속도와 함께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삼십여 년 전에 ‘rapid-ize빠르게 만들다’라는 한 단어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속도를 기하학적 궤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디지털 세상이 잠재적인 위협이 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 ‘rapid-izing빠르게 만들기’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다 아는 디지털화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저는 구체적인 것을 소멸시킬 수도 있는 액화현상11)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유럽의 한 주교님이 사업가 친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주교님에게 어떤 거래를 십 분 내에 끝내면서 이익을 남기는 것을 보여 주더랍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콩으로 소를 팔고선, 몇 분 뒤에 그의 계좌로 즉각 그 이윤이 송금된 것입니다. 경제의 액화현상, 노동의 액화현상, 이 모든 것이 실업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더욱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복귀라는 말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의미하기에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복귀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볼베르volver(‘돌아가다’라는 뜻을 지닌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 탱고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네요! 노동의 구체적 차원을 회복시키고픈 바람이 있습니다. 이태리에서는 25세 이하 젊은이들 중에 40퍼센트가 실업상태입니다. 스페인에서는 50퍼센트, 크로아티아에서는 47퍼센트입니다. 이 액화현상이 실업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질문해 주시어 고맙고,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해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가 너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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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끝나고, 예수회 총장 아르투로 소사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로 교종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교종 성하, 두 차례 만남을 마무리하면서, 36차 총회에 참석한 형제들을 대표해서, 형제로서 저희와 함께해 주심에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롭게 나눠 주셔서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식별에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사를 깊이 살아내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사는 교회와 함께, 또 선의를 품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 나가며,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고, 화해를 통해 위로를 나누며, 시대의 징표를 민감하게 식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 일은 길 위에서 발견한 많은 아름다운 지점에 그저 머물고픈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간직한 그 자유를 통해 우리는 어디든 파견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주 예수님의 강생의 역동을 따라서,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덜어 주며,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과 정의, 대화와 화해, 관상과 활동 사이의 긴장을 간직하며, 우리의 행동양식에 따라, 우리는 함께 걸어 나가겠습니다. 그 길에서 저희들은 문화의 다양성 안에서 인간의 풍부함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복음을 더 잘 선포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의 아버지께서 지니신 다문화적인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성하의 충고를 충실히 따라서, 성하의 멈추지 않는 기도에 함께하겠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저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 위로를 통해 우리 모든 예수회원과 그리스도의 사명을 나누어 받은 모든 사람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들이 될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이제 저희가 개인적으로 한 사람씩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1) La Civiltà Cattolica 2016 IV 417-431 | 3995 (10 dicembre 2016)
2) 파레시아Parresia는 신약성경에서 많이 사용된 그리스어다. 이는 증언하는 자의 용기와 진정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전통에서 폭넓게 사용된 용어로, 특별히 초기 교회에서, 위선의 반대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3) 마지스magis(the more, the greatest)란 이냐시오 전통에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ad maiorem Dei gloriam”라는 유명한 행동원리로부터 온 말로, 강한 영성적 격동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이다. 예수회원의 활동은 이 마지스란 말로 구별될 수 있다. 마지스는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 언제나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살아있는 긴장이다. 예수회원의 여정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의 식별을 통해서, 예수회원은 각각의 상황에서 선한 뜻을 식별해 내고, 보다 더 큰 선익을 가져올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운다.
4) 예수회원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와 로베르토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1577-1656)는 진정한 개척자들이었다. 각각 중국과 인도로 파견된 선교사로서 그들은 복음의 선포를 지역 문화와 경배방식에 따라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방식이 일부의 염려를 불러일으켰고, 교회 안에서는 그들의 행동방식을 마치 오염된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지인 것으로 오해하여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5) [역자 주] 결의론(決疑論)은 casuistry를 번역한 말이다. 일반 원칙을 개별 케이스case에 적용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사례 위주의 윤리적 방법론’이다. ‘식별’은 이와 달리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결정을 더 기뻐하실까를 묻고 결정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신앙생활과 고해성사 성찰 규칙은 주로 결의론에 따랐다. 금육재라는 일반 규범에 대하여 예를 들어 보자. “금육재 날에 날계란을 먹는 것은 금육재를 어기는 것인가, 아닌가? 날계란은 액체 상태이기 때문에 고기라고 할 수 없으니 금육재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계란을 삶아서 먹는 것은 금육재를 어기는 것인가?” 하는 식이다. 교종은 몇 개의 예를 더 들어서 이야기한다. 결의론에 따라서 우리 행동을 결정한다면 신앙생활이 규범화되고 박제화되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삶으로 변질될 수 있다.
6) 교종은 로드리고 데 아리아가Rodrigo de Arriaga와 같은 예수회원들이 관련된 1600년대 초의 이론논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7) 부기맨bogeyman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역자 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도깨비’이다.]
8) 버나드 헤링Bernard Häring(1922-1998), 구속주회원으로, 독일 윤리신학자이다. “Academia Alfonsiana” 창설자 중의 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와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9) [역자 주] 예수회는 성직수도회로 출발하였는데, 성직자의 신분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려는 이들도 초기부터 있었다. 이냐시오는 이들을 받아들여 속무(俗務)보조자로 삼았다. 평수사는 이 속무보조자를 말한다. 과거에는 사제와 평수사의 비율이 거의 1:1이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수사의 수가 격감하였다. 한국관구에는 현재 5명의 평수사가 있다.
10) [역자 주] 2007년 5월 브라질의 아파레시다에서 가진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에서 작성한 주교회의 문헌으로 교종 베네딕토 16세의 승인을 얻었다.
11) [역자 주] liquidity. 직역하면 유동성, 물처럼 잡히지 않는 경제거래 따위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