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아합과 가난한 나봇: 끝나지 않는 이야기

IL RE PREPOTENTE E IL POVERO NABOT:
UNA STORIA INFIN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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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카를로 파니 S.J.**
강선남 헬레나 옮김 (성서신학 박사)

  “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지만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1)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나봇이 그의 포도밭을 손에 넣으려는 아합 임금에게 목숨을 뺏긴 이야기를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사람 나봇, 사마리아 임금 아합과 그의 아내 이제벨, 예언자 엘리야가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다.2) 주인공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임금은 권력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서도 광대한 자기 영토 한구석에 맞닿은 작은 포도밭마저 탐낸다. 그의 아내는 범죄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 가난한 사람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작은 포도밭밖에 가진 게 없다. 마지막으로 예언자는 불의를 경고하고 양심을 일깨운다.

  암브로시우스 시대 커다란 변화를 겪으며 전환기에 있던 로마 제국의 당시 수도에서도 역사는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권력가들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흥청망청 돈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을 금으로 치장하고 궁궐을 보석으로 수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명예를 위해 대규모 경기를 열거나 수백 가지 음식이 나오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들이 과시하는 부는 대다수 민중이 겪는 가난, 불행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등장한다. 그는 부와 권력을 지닌 로마제국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3) 세례지원자로서 밀라노의 행정관이었던 암브로시우스4) 본인도 부자와 권력가들이 즐기던 유희와 그 규모를 알고 있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전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전기 작가인 파울리누스Paulinus 부제는 암브로시우스가 가지고 있던 금과 은도 어떻게 기부하였는지 기록해 놓았다.

  또한 아합과 나봇은 권력이 교만이 되고 정의가 타락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5)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늘 가난한 이들과 불운한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더 많이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의 저술이 기반을 둔 하느님 말씀에는 예상치 못한 힘이 있으며, 거기 담긴 영속적인 가치는 오늘날에도 가장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며 배고픈 사람들에게 불의가 행해질 때 우리에게 울리는 바가 있다.

나봇 이야기

  암브로시우스는 4세기 말경에 『나봇 이야기』를 썼다.6) 암브로시우스가 여러 작품에서 이 성경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틀림없다.7)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아합의 탄압을 극적인 시기를 지나던 밀라노의 사회 정치 종교 상황과 연결했다. 그는 『아욱센티우스 반박Contra Auxentium』에서 아리우스파에게 자유와 권한을 되돌려주는 내용의 386년 법령을 부추기고 옹호한 이들을 비판하였다. 아리우스파 주교였던 아욱센티우스는 아리우스파의 예식을 위해 포르티아나 대성전을 넘겨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성경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양심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묘사한다.

  나봇은 자신의 피로 포도밭을 지켰습니다. 그가 자신의 포도밭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포기하여야 합니까? 나봇이 자기 조상들의 유산을 넘기지 않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의 유산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어야 합니까? 하느님은 내가 조상들의 유산을 버리는 일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8)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보기에 아욱센티우스는 제2의 가난한 나봇인 자신에게서 포도밭인 교회를 빼앗으려고 하는 제2의 아합 임금이다. 그리고 황제의 어머니 유스티나9)는 엘리야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제2의 이제벨이다. 그러나 주교는 대성전을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많은 신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렀다. 군중의 소요를 두려워한 유스티나는 마침내 암브로시우스의 신자들에게 대성전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분량이 길지 않지만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권위 있는 증언이다.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이들,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한 이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암브로시우스가 대 바실리우스와10) 고대 저자들, 교부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하더라도, 암브로시우스 이전의 어떤 사람도 열왕기 상권의 성경 본문에 대한 체계적인 주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암브로시우스의 독창성과 성경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는 비극적 특성이 눈에 띈다. 아합 임금은 하느님에게서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해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을 굶주리게 하고 온 땅을 갈라지게 하던 가뭄과 기근을 엘리야 예언자의 청원으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더욱 주님을 찬미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괴롭힌다.

  아합은 매우 전형적인 방식으로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1열왕 21,1-2)

  나봇은 포도밭을 넘기라는 아합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포도밭은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재산이었기 때문이다.11)

  이 이야기를 겉핥기식으로 읽으면 포도밭을 아합 임금에게 양도하지 않은 나봇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합은 어찌 되었든 폭력을 사용하여 포도밭을 강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나봇에게 포도밭에 상응하는 돈이나 더 좋은 포도밭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나봇의 포도밭을 구매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가난한 나봇에게 그 포도밭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집안에서 내려오는 상속재산, 조상들의 유산이며 하느님에게서 받은 거룩한 유산이었다. 그 포도밭을 양도한다면 조상에게서 받은 땅을 지켜야 하는 소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아합 임금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1열왕 21,3)

  아합 임금은 나봇의 거절에 속이 상하였다. 그러자 이제벨이 나서서 옳지 못한 계략을 세운다. 나봇이 하느님과 임금을 저주하였다는 터무니없는 고발로 그를 법정에 앉히고, 사형을 선고한 다음 돌을 던져 죽인다. 임금은 마침내 나봇의 포도밭을 자기 땅에 합칠 수 있게 되었다.

  아합이 포도밭을 차지할 때 엘리야 예언자가 그를 만나러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1열왕 21,19) 아합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참회하였다. 그러나 그의 참회가 참되지 않았기에 주님은 그 집안에 벌을 내리셨다.12)

끝나지 않는 이야기

  나봇 이야기는 역사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되풀이된다. 아합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암브로시우스에게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우선 그는 가난한 이들을 희생시켜 욕심을 채우는 권력자들을 비난하고 폭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현세에서 정의와 연대의 정신으로 재물을 사용하도록 제안하면서, 부의 상대적 가치를 납득시키고자 한다.

  이 밀라노 주교에게 아합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부자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부자의 탐욕을 상징한다.

  날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않는 부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재벌이 가난한 사람을 그 작은 밭에서 내쫓지 않으며, 궁핍한 자를 조상의 땅 끝자락에서 몰아내지 않습니까? 그 누가 자신이 지닌 것만으로 만족합니까? 어떤 부자의 영혼이 이웃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합 한 사람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더욱 딱한 것은 아합이 날마다 태어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가난한 나봇 한 사람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나봇들이 쓰러지고, 날마다 가난한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1,1)13)

  암브로시우스는 명징한 논리로 부자들의 영혼을 진단하고 그들의 탐욕을 조명한다. 가난한 백성의 운명과, 정원 옆에 자기 소유의 포도밭을 지니겠다는 이유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고 싶어 하는 임금의 부당한 요구 둘 다 의미심장하다.14) 소유에 대한 부자들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결코 부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조르는 말, ‘네 포도밭을 나에게 달라’는 ‘탐욕의 불길’을 드러낼 뿐 아니라,(2.8)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적 공허를 보여준다. ‘나에게 달라’는 말은 자신에게 결여된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구걸하는 사람의 외침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자는 자기 것은 하찮은 물건처럼 귀찮게 여기지만, 다른 사람의 것은 가장 값진 보화처럼 탐냅니다. … 모든 것을 제 소유로 차지하고 싶어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것 자체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2.9-10)15)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재물을 시기하다보니 부자는 영원히 불행하다!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부분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탐낸 이유이다. 그는 포도밭에 자기 밭을 가꾸고 싶어 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는 쓸모없는 풀밭 공간을 찾아 헤매는 완전히 미치고 얼빠진 짓이었습니다. 그대들은 유익한 그 무엇을 소유하려고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기를 바랄 뿐입니다.”(3,11)16) 부자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가난한 이들이 지닌 유일한 자산을 파괴하면서까지 전부 다 갖기를 원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묻는다.

  왜 자연을 그대들만의 소유라고 내세웁니까? 땅은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이가 함께 사용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대 부자들은 그대들만의 권리라고 사칭합니까? … 이 땅은 우리를 벌거숭이로 낳으며,(욥 1,21 참조) 음식과 마실 것이 필요한 존재로 낳습니다. … [자연은] 우리를 모두 동등하게 창조하고,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무덤의 품속에 가두어 버립니다.(1,2)17)

  더 나아가, 부자들의 부유함은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이기심 안에서 그들은 재산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고 소유한 재산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부자의 소유를 필요로 할 때조차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18)

  여기에 더하여 비뚤어진 욕심은 부자들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고 그들을 인간 공동체에서 분리한다. 그들의 논리는 그들이 사회를 완전히 거부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고 이웃들을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이 사람들을 쫓아내면 다른 사람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고, 저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면 또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이웃으로 다가옵니다. 지상에서 저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3,12)19)

  암브로시우스가 여기에서 끌어낸 경제적 문제들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도 우선, 그 자체가 목적인 재물의 축적을 비난한다. “그대들은 광맥에서 금을 캐내고는 곧바로 숨겨버립니다.”(4,16)20) 이것은 시편 39,7의 말씀과도 같다.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며 쌓아 둡니다. 누가 그것들을 거두어 갈지 알지도 못한 채.” 부의 생산력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에 대해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식량 가격이 별 볼 일 없겠다는 계산이 나오면 많은 소출 때문에 언제나 어쩔 줄 모릅니다. 풍요는 모든 사람의 것인데, 기근은 오직 탐욕스러운 인간에게만 이득이 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식량이 풍부해지는 것보다 물가가 엄청나게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하고, … 높이 쌓인 곡식 단이 곳간 위로 흘러넘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쏟아지고, 궁핍한 이들에게 무슨 좋은 기회라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그 인간을 보십시오.(7,35)21)

  암브로시우스는 또한 부자들의 호사가 가난한 이들의 불행 위에 세워지고 그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비난한다. 이것이 부자들을 위해 일하다가 죽는 사람을 육체적 죽음으로 이끌고,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아이를 노예로 팔아야 하거나 나머지 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 어느 한 명을 팔지 결정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한 부모를 영적 죽음으로 이끈다.(5,22)22)

  축적된 부, 과장된 화려함과 소유에 대한 목마름은 또한 부자들의 내적 불안과 기억상실을 드러낸다. “탐욕은 부자를 흔들어 깨우고,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으려는 걱정으로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시기심은 부자를 고문하고, 부질없는 기대는 고통을 줍니다. 수입이 줄면 혼란에 빠지고, 풍요로우면 불안에 떱니다.”(6,29)23)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7-19)는 삶의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화이다. “자기 영혼에게 육적인 것들을 공급하는 이들이 어리석은 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보관하는지도 모르는 채 숨겨 놓기 때문입니다.”(8,38)24) 부자는 자신을 덮칠 죽음의 시간이 바로 그날 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너무 많이 쌓아두었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다. 받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원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도 경고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풍성한 소출을 주시어 가난한 이들과 나누게 하셨으니, 가난한 이들과 궁핍한 이들은 부자의 곳간으로 초대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어지심으로 들판을 내시고 풍요롭게 만드셨기 때문이다.(6,32)

재물의 공정한 사용

  “악한 것을 선으로 만들어야 할 그대들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만들어 버립니까?”(7,36)25)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 “사용할 줄 알면 선한 것이고, 사용할 줄 모르면 당연히 악한 것입니다.”(7,36)26) 사유 재산과 부에 관한 암브로시우스의 관찰은 흥미롭다. 그것 자체는 나쁘지도 않고 남용도 아니다. 오히려 적법하다. 그 성격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사치와 허영으로 낭비된다면 범죄가 될 수 있으나,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면 선이 된다.

  부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죄가 될 수 있다. 악한 사람들에게는 부가 선행을 막는 장애물이 되듯이 정의와 자애의 정신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부가 덕이 된다. “그대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다면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 그대 정의의 곳간을 열어젖힘으로써, 그대가 가난한 이들의 빵이 되고, 궁핍한 이들의 생명이 되며, 눈먼 이들의 눈이 되고, 고아들의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재산은 선한 것이 됩니다.”(7,36)27) “그대, 영적인 농부가 되십시오. 그대에게 유익한 것을 심으십시오. … 그대가 되받을 자비의 보상은 그대가 준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이 되돌아오겠습니까!”(7,37)28)

  암브로시우스의 이 짧은 저술 후반부에 삽입된 담화는 부자들의 마음을 건드려 관대하게 열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계획을 이루고자 부자들 역시 교회에 가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심지어 단식도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기도와 단식은 무엇인가? 배고픈 이를 위해 빵을 떼고, 궁핍한 이와 집 없는 이들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고 모든 거짓 고발을 물리치는 것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기도이며 단식이다.(10,45)

  그는 부자들에게 권고한다. 탐욕스러운 악인 이제벨의 조언을 듣지 말라. 이제벨은 탐욕을 형상화한 인물이며, 범죄를 생각해 내고 사기를 계획할 때 머리를 빌려준다. 이제벨의 사주를 받은 거짓 증인 두 명이 나봇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하는 장면은 마치 다니엘서에 나오는 수산나의 심문(다니 13,28 참조)과 산헤드린 앞에서 치른 예수님의 심문(마태 26,65 참조)과 같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의 법과 고발을 주님의 율법과 대조하고, 거짓 증언을 양심의 증언과 대조한다.(10,45)

부자의 위선

  나봇이 살해당한 뒤에 임금은 몹시 괴로워하며 후회한다. 그러나 슬픈 얼굴을 하고서도 그 가난한 사람의 포도밭으로 가서 그곳을 차지한다.(11,47) 사실 그의 괴로움은 거짓이었고,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 부자의 위선을 들춘 하느님의 정의가 전달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였습니다.’(1열왕 21,20 참조) 주님께서는 죄 많은 임금들을 저버리시지만, 무죄한 사람들은 당신 원수들의 권한에 넘기지 않으십니다.”(12,51)29) 악은 우리를 속박하고 진리를 가리고, 자신을 숨기려 애쓰고, 양심을 두려워하며,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반면에 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가난한 이에게 우리 마음을 열게 하고, 자비를 행하게 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모든 것은 그대에게 유익합니다. 그대가 무엇을 줄이든 그대에게는 늘어납니다. 그대는 가난한 사람에게 준 음식으로 그대 자신을 자라나게 합니다. … 자비의 씨앗은 땅에 뿌려지지만 하늘에서 싹트고, 가난한 사람 안에 심어지지만 하느님 앞에서 열매 맺습니다.(12,53)30)

  마지막으로, 부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재물이 자신들을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기 때문에 스스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땅과 재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궁궐, 부, 말, 금과 소유물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인데도, 황금을 땅에 묻어 버립니다. 그대는 심판관이 아니라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차라리 황금을 팔아 구원을 사고, 보석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며, 밭을 팔아 영원한 생명을 되사십시오.(14,58)31)

  그대 홀로 이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돈을 망가뜨리는 좀과 녹이 그대와 함께 재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그대에게 이 동업자들을 준 것입니다.(14,59)32)

  그대가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면, 하느님께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세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자비의 부자가 하느님께 부유한 사람입니다. 단순함의 부자가 하느님께 부유한 사람이며, 지혜의 부자와 슬기의 부자가 하느님께 부유한 사람입니다.(14,60)33)

  암브로시우스는 마태오 복음의 최후의 심판 비유를 다시 들며 마지막 권고를 한다.

  아드님을 그대의 빚쟁이로 만드십시오. 그분께서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나를 덮어 주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당신께 해 드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4,60)34)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참된 보물입니다”

  암브로시우스의 글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로 끝맺는다. 시편 75편은 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상징인 아시리아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주님을 드높인다. 그들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들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이다. 주님은 악인과 부자와 권력가와 권세가의 구상을 뒤엎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가난한 이들의 찬미를 받으신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만이 평화와 통교의 장소인 그들의 마음에서 주님을 찬미하기 때문이다. 실로, 가난한 사람은 믿음에서 더 풍요롭고, 보다 절제된 삶을 실천한다.(15,63)35)

  따라서 나봇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탐욕과 권력의 남용에 대한 이야기이며, 거짓 고발과 살인, 강도질, 그리고 불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또한 정직과 진리,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충의, 정의와 진실에 대한 열정이 순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암브로시우스가 책을 쓴 목적은 명확하다. 부가 탐욕과 결합할 때 인간의 불행을 낳는다. 암브로시우스는 땅이 하느님께 속하고 주님께서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고 선언한다. 어떤 사람도 땅을 자신만의 소유로 삼을 수 없고, 누구도 땅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운영하는 관리자이고, 우리가 한 일에 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부의 문제에 대해 대담하고 불편한 가르침을 체계화하면서도 복음의 급진적 성격을 드러낸 교회 저술가는 드물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가난한 이들 편에 섰으며, 필요할 때는 교회의 재산을 팔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교회의 물적 자산은 대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재산이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즐겨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참된 보물입니다.”36)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암브로시우스가 죽고 16세기가 지난 뒤, 프란치스코 교종은 산타 마르타에서 강론할 때, 말씀의 전례에서 읽은 열왕기 상권 21장을 언급하며 이 오래된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교종은 다음의 말로 밀라노 주교를 인용하였다. “[나봇 이야기는] 힘을 가진 사람들, 물질적인 힘, 정치적인 힘, 또는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꾸준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 타락의 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타락한다는 말인가? “안전을 추구하는 길에서 타락합니다. 먼저, 돈과 안락함, 그다음에는 권력과 자부심과 허영심,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것, 심지어 살인까지 나옵니다.” 교종은 이어서 ‘이것은 정치가, 사업가, 고위성직자가 굴복할 수 있는 일상의 유혹’이라고 말한다.37)

  교종은 “그럼 타락의 대가는 누가 치릅니까?”Ma chi paga la corruzione? 라고 묻는다. “가난한 이들이 타락의 대가를 치릅니다!la corruzione la paga il povero! … 가난한 나봇이 아합 임금의 타락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나봇은 자신의 전통에 충실하였고, 자신의 가치에 충실하였고,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상속재산에 충실했습니다.”38) 오늘날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 나봇은 수많은 ‘타락에 의한 순교자들’martiri della corruzione 가운데 첫 번째이다.

  교종은 특별히 교회 내 타락에 주목한다. 여기에도 타락이 극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위성직자가 타락한 대가를 누가 치릅니까? 바로 성호경을 긋는 법도 모르고, 교리도 모르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치르고 있습니다. 아픈데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이들이 치릅니다. 감옥에 갇혔으나 영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치릅니다.39)

  궁극적으로, 타락의 대가는 항상 가난한 이들에 의해 지불된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 의해 지불된다.

  교종은 또한 다윗의 고백을 언급하면서 타락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고백한 다음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며 참회하였다. 교종은 또 복음서에서 자캐오의 이야기를 예시로 더한다. “주님,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참조 루카 19,8)40)

  프란치스코 교종은 암브로시우스의 주석을 언급하면서, 그의 표현 그대로 인용한다.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그러나 밀라노의 주교처럼 교종은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타락에 의한 순교자들’martiri della corruzione을 우선시하는 데 구원의 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위한 초대이고, 힘 있는 이들과 타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초대이다.41)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교종은 아합 임금의 상황을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서 재구성하였다.

  현대 세계의 상황이 “야기하는 불안과 위기의식은 집단 이기심의 …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식 안에 머물 때 탐욕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참다운 공동선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42)

  교종 프란치스코는 얼마 전에 다시 나봇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이야기는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의 전형입니다. 예수님 순교의 전형입니다. 스테파노 순교의 전형이며, 또한 구약성경의 수산나의 전형이고, 중상모략에 의해 선고를 받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전형입니다.”43) 그러나

  이것은 또한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정부와 나라의 우두머리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예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거짓과 비방을 퍼트리고 중상모략으로 사람과 상황을 모두 파괴한 다음에, 그 파멸을 판가름하고 비난합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자유로운 소통을 파괴하는 이러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44)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론짓는다. “의로운 나봇이 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 조상들의 유산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상속재산을 팔지 않고, 역사를 팔지 않고, 진리를 팔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그 포도밭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유산은 팔 수 없습니다.”45)


*  La Civiltà Cattolica, 4034 III (21 luglio/4 agosto 2018), 119-130.
** Giancarlo Pani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Ambrogio, De Nabutae 1,1, Karl Schenkl, ed., CSEL 32/2, (Vienna – Praga – Lipsia ecc: 1897), 469-516; Ambrogio, Il prepotente e il povero. La vigna di Nabot, (Cinisello Balsamo: San Paolo, 2013); Ambrogio, La vigna di Nabot, Maria Grazia Mara, ed., (Bologna: EDB, 2015). 본문에서 암브로시우스의 『나봇 이야기』 인용문 옆 괄호 안에 표기된 숫자는 장과 절 출처를 가리킨다. 편집자 주: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에서는 기존의 번역서를 참고했다.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교부 문헌 총서 20, 최원오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12), 31.
2) 참조: 1열왕 21,1-28. 이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 설화의 일부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는 다신교가 깊이 침투해 있었고, 새로운 경제 체계가 화폐 유통과 무역을 촉진하며 기존 경제 구조의 뿌리를 흔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파산으로 몰고 있었다. 여기에 엘리야 예언자가 등장하여 백성들에게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도록 촉구하였다.
3) 역자 주: 암브로시우스는 수세대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믿어온 로마 시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많은 고위 관리와 순교자 소테리스가 그와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으며, 황제에게서 그 지방의 최고 사법전권을 위임받았다.
4) 역자 주: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미루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될 때까지 세례지원자로 있었다. 30세에 밀라노를 행정 중심지로 둔 에밀리아-리구리아 지방의 황제 파견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5)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1851)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합Ahab이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망에 이끌린 선장은 흰 고래의 신비한 힘에 맞서고 배에 있던 선원 모두를 자신과 함께 멸망으로 밀어 넣는다. 결국 선원들 가운데 신비 앞에 겸허했던 인물인 이쉬마엘Ishmael만이 살아남는다.
6) Ambrogio, La storia di Nabot di Jezrael, (Brescia: Morcelliana, 1952); Ambrogio, Opera omnia. VI. Elia e il digiuno, Naboth, Tobia, (Milan – Rome: Biblioteca Ambrosian – Città Nouova, 1985); Giuseppe De Simone, La miseria del ricco. Esegesi biblica e pensiero sociale nella “Storia di Naboth” di Ambrogio, (Catanzaro: Ursini, 2003).
7) Ambrogio, La storia di Naboth, (L’Aquilla: Japadre, 1975), 29-34; Ambrogio, La vigna di Naboth, Mara, ed., 38-44.
8) Ambrogio, Contra Auxentium 17: PL 16, 1012B.
9) 편집자 주: 이탈리아 원문과 영어판은 ‘아내’로 번역했다. 하지만 유스티나는 선대 황제의 아내, 즉, 당시 황제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원문과 달라도 ‘황제의 어머니’라고 번역을 살렸다. 사실, 유스티나는 황제 발렌티우스 2세의 어머니이며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10) 역자 주: 대 바실리우스의 설교 두 편, 곧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를 다룬 『내 곳간들을 헐어내리라에 관한 설교』와, 부자 청년 이야기(마태 19,16-22)를 풀이한 『부자들에 관한 설교』가 『나봇 이야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1) 모세 율법은 토지소유권이 그 집안을 떠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상속 재산은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자손 지파들은 저마다 자기 상속 재산에 붙어살아야 한다.”(민수 36,7.9) 이스라엘에 왕정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무역 경제가 시행되었고, 지파 중심의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는 붕괴되었다.
12) 구약성경의 아합 이야기는 Vincenzo Anselmo, Fece ci che è male agli occhi di Yhwh. La figura narrative di Acab in 1 Re, (Rome: Gregorian & Biblical Press, 2018)를 보라.
13)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31.
14) 암브로시우스 시대의 ‘대토지 소유제도latifondismo’(역자 주: 고대 로마제국의 토지 제도로서, 로마의 영토 확장과 영유지에 대한 처분법에 의해 성립하고 발전했다. 로마는 영토 확장과 함께 점령한 토지를 국유화하였으나, 힘 있는 이들이 이 제도를 통해 국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와 소수가 부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하게 되는 상황은 엄청난 불균형을 일으켰다. 일례로,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의 명성에 상응하는 밀라노 황실의 수사학의 대가가 되도록 도와준 로마 원로원 의원 심마쿠스는(역자 주: 밀라노에 있는 황실은 로마 시의 총독인 심마쿠스에게 황실에 근무할 수사학의 대가를 구해달라고 위탁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 친구의 도움으로 이 관직에 추천되었다.) 로마에 궁 세 채, 로마 교외에 저택 세 채, 그리고 로렌토, 나폴리, 포추올리와 쿠마의 농경지에도 소유지가 있었다. 암브로시우스 집안도 로마에 궁을 소유하였고, 시칠리아에도 재산이 있었다.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의 힘이 강력해서 작은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자기 재산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이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슬프게 막을 내린 로마제국 왕가들의 투쟁과 야만족들의 침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조: Vincenzo Paglia, Storia della povertà. La rivoluzione della carità dalle radici del cristianesimo alla Chiesa di papa Francesco, (Milan: Rizzoli, 2014), 156.
15)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41.
16) Ibid., 43.
17) Ibid., 33.
18) “그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몽땅 도둑질하여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 가난한 사람들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자신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4,16). Ibid., 49.
19) Ibid., 43;45.
20) Ibid., 49.
21) Ibid., 73.
22) 암브로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의 글에서 일부를 가져온다. 참조: In illud dictum, Destruam: PG 31, 268C – 269 A 강론.
23)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65;67.
24) Ibid., 79.
25) Ibid., 75.
26) Ibid.
27) Ibid. 루카 복음 주석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이와 관련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 “모든 은행가(nummularii, 환전상을 포함하는 개념)를 쫓아버릴 수 없습니다. 그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Exp. Ev. sec. Lucam 9,18)
28) Ibid., 77.
29) Ibid., 97.
30) Ibid., 101.
31) Ibid., 109;11
32) Ibid., 111.
33) Ibid., 113.
34) Ibid. 마태 25,35.36.40; Ambrogio, La storia di Nabot, 14,59.
35) 이 개념은 스토아 논쟁에서 온다. 참조: Senaca, De vita beata, 22 and 26; Valerio Massimo, Dictorum factorumque memorabilia libri IX 9,4 ext. 1.
36) 참조: Paglia, Storia della povertà, 156.
37) Francesco, “Omelia del 16 giugno 2014”,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cotidie/2014/documents/papa-francesco-cotidie_20140616_quando-pagano-i-poveri.html (접속일: 2019. 2. 26)
38) Ibid.
39) Ibid.
40) Francesco, “Omelia del 17 giugno 2014”,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cotidie/2014/documents/papa-francesco-cotidie_20140617_peccatori-con-i-guanti-bianchi.html (접속일: 2019. 2. 26)
41) 교종 프란치스코는 2014년 영신수련에 따른 사순 피정을 하면서 암브로시우스의 『나봇 이야기』를 읽기를 제안하였다. 참조: Bruno Secondin, Profeti del Dio vivente. In cammino con Elia, (Padova – Vatican City: Messaggero – Libr. Ed. Vaticana, 2015), 107-116.
42) 프란치스코, 『찬미받으소서』, 204항. ‘집단 이기심의 온상’은 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항에서 인용.
43) 참조: Francesco, “Le dittature manipolano la comunicazione”,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cotidie/2018/documents/papa-francesco-cotidie_20180618_santa-marta-comunicazione-distorta.html (접속일: 2019. 2. 26)
44) Ibid.
45) Ibid.